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그럼 이만 마치도록 합시다.”

 

 청진기를 갈무리하며 존이 말했다. 그 말에 레스트레이드는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슬쩍 존의 눈치를 살폈다. 레스트레이드가 이편을 연거푸 흘깃거리는 것을 알아차린 존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원하시는 대로 철분제 처방은 해드리죠. 하지만 과다복용은 좋지 않다는 점 유념하세요.”
 “감사합니다, 닥터 왓슨.”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렉 레스트레이드를 존은 몰래 염려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항상 지나치게 건강에 신경을 쓰는 이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위가 혹시라도 심기증의 초기 증상을 약하게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작은 의심에서 비롯된 걱정이었다. 하지만 반백으로 머리가 희끗희끗해져가는 중년의 남자가 스스로의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하지 못한 일일 터였다. 마음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작은 의심을-아직은-굳이 지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존은 적당한 인사치레를 마치고 경위의 방을 나섰다.
 진찰을 끝내고 왕진비를 받고 돌아가는 존의 눈이 언뜻 무의식적으로 레스트레이드의 책상으로 향했다. 어지럽게 서류가 쌓여있는 사이로 청동 잉크스탠드가 보였다. 경위의 방이 전형적인 헤플화이트 양식으로 화려한 곡선미의 가구가 놓인 훌륭하고 중후한 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직선적이고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모양의 잉크스탠드는 조금은 의외로 보이는 집기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존이 나가다 말고 그것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레스트레이드가 웃으며 말했다.

 

 “썩 어울리진 않지요? 선물로 받은 것이라서 말입니다.”

 

 겸연쩍어하는 듯한 그의 말에 존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요, 멋진데요.”

 

 그렇게 말하는 존의 시선은 이제 잉크스탠드 아래에 짓눌려 있는 어떤 편지봉투로 옮겨가 있었다. 익숙한 보라색의 편지봉투는 어디선가 분명히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하고 곰곰이 생각하며 기억을 더듬는데 레스트레이드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우회적인 축객령에 존은 멋쩍어하며 손에 든 왕진 가방의 손잡이를 고쳐 쥐고 방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원래는 조금 더 나중이었던 오늘의 진료 시간을 앞당긴 것도 이 뒤에 있을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라고 전해 들었었지. 사정을 알 만큼 알면서도 빠릿하게 행동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하긴 그 자신도 느긋하게 환자의 책상이나 훔쳐보고 있을 계제는 못되었다. 며칠 전 홈즈 저택에서의 연회 초대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홈즈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와서 존이 나름대로 조사를 한 결과 홈즈 저택은 템플 가든처럼 명랑한 이름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처럼 엄숙한 위명도 지니지 못했으나 다른 의미로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가문의 수완 덕분이었다. 홈즈 가문 특유의 은둔적인 성향과 대대로 작위를 물려받아온 세습 귀족들로서는 썩 달갑게만 여기지 않을법한 그들의 오만한 양태, 그리고 현재 당주인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병적으로 폐쇄적인 기질에도 불구하고 홈즈 가문은 영국을 움직이는 세력가들을 중재하는 의미로서의-이를테면, 가교 역할로 상류사회에서의 은근한 존재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서섹스에서 일가가 런던으로 이주한 지 근 백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신흥 젠트리 가문으로서 그만한 명성을 떨친다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매년 늦봄과 초여름의 경계에 한정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초대장이 돌아간다는 홈즈 가문의 연회는 간단히 말하자면 잠시도 쉬지 않고 요동치는 런던 사교계의 지각 변동과 함께 앞으로 성장 주가가 높은 우량주는 누구이며 누구에게 줄을 대어야 유리한지에 대한 정보를 한눈에 보여주는 지표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속사정을 아는 존 왓슨으로서는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초대받은 가문의 위력에 대한 간접적인 증명임과 동시에 어느 누구도 섣불리 초대를 거절하지 못한다는 대단한 연회가 열리는 날짜는 바로 오늘로, 존의 숙소로 마이크로프트가 마차를 보내주기로 했기 때문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집으로 가서 참석할 채비를 해야 했다.
 그런 닥터 왓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경위는 항상 의기소침해보였던 의사 선생이 오늘따라 들떠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느 때와는 다른 밝은 기색과 경쾌한 걸음걸이에 고개를 갸웃 하고 멀어지는 존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레스트레이드는 곧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도 연회에 갈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레스트레이드 또한 존과 마찬가지로 오랜만의 사교 행사에 초대받아 흥분했다는 것을 자각하지는 못한 채였다.
 그리고 그들의 육감이 전해준 미묘한 경고-심상치 않은 일치감을 무시한 결과, 잠시 후 그들은 몹시도 어색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됨은 물론이다.

 

*   *   *

 

 어색하게 침묵을 지키던 두 사람 중 존이 먼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레스트레이드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쳤다.

 

 “저도 그렇습니다.”

 

 상투적인 인사를 주고받던 그들은 곧이어 입을 다시 다물었다. 의사와 환자의 사무적인 관계로만 서로를 인식하고 있던 두 사람에게는 지금의 예기치 못한 상황에 어찌 대처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둘을 잇는 것이 다른 연결고리도 아니고 무려 홈즈 가문이었다는 것 때문에 더욱 그랬다.
 존이 마차가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계단에서 내려왔을 때는 아직 가로등 불빛이 켜질 시각은 아니었다. 셜록과 만나고 나서부터는 절름거리는 정도가 덜했지만 그래도 지팡이를 놓고 다니기에는 아직 불안한 감이 있었기 때문에 전용 케인을 챙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인 것이 조금 시간을 잡아먹었다. 약간 숨이 거칠어진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존은 현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일반적인 연회는 정오 무렵에 시작하여 해가 지기 전에 마무리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홈즈 가의 연회는 가문 특유의 반골 기질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특이하게도 저녁 무렵에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지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덕 슈트를 걸치려던 존은 고민 끝에 클래식한 이브닝 슈트를 입기로 마음먹었고 건물 입구의 계단참에 잠시 서서 짙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진 거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지팡이 끝을 보도에 뭉개며 마차에 올라탄 존은 그와 마찬가지로 정석적인 검정 턱시도를 빼입은 레스트레이드와 마주치게 되었고 잠시 입을 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둘은 마부의 재촉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움직일 수 있었다.
 이것이 두 성인 남자가 같은 마차에 앉아서 수줍음을 타는 영애들 마냥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얌전히 앉아 있게 된 사태의 전모였다.

 

 “아까 본 편지 말입니다.”

 

 존이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보랏빛 편지봉투를 꺼내어 보이며 웃어보였다.

 

 “어쩐지 눈에 익은 것이다 싶더니 역시나였군요.”

 

 존의 손에 들린 편지봉투의 겉면에 쓰인 마이크로프트의 필적을 본 레스트레이드가 깜짝 놀라며 자신의 것도 꺼내들며 말했다.

 

 “아까 이상하게 유심히 살펴보신다 싶었습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전혀요.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존이 과감하게 대화의 물꼬를 텄으니 이어나가는 것은 레스트레이드의 몫이었다.

 

 “어느 쪽과 면식이 있으신 것인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저는 그러니까 동생 쪽과…주인분도 만나는 뵈었습니다만 친분이라고 할 만한 것은 딱히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존이 물어왔다.

 

 “경위님께서는?”
 “아, 그러니까 저는 형님 쪽과 어릴 적부터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대단하군요.”

 

 솔직하게 감탄하는 존의 말에 레스트레이드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야 고작 일개 경위일 뿐이고, 어렸을 적의 인연에 기대어 가외로 초대받는 처지인걸요.”
 “그렇다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한 존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형님분의 성정은 동생 쪽보다는 한결 온화하지만 어딘지 더욱 까다로운 면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 분과 오래 친분을 유지했다는 것 자체가 제겐 굉장하게 느껴지는걸요.”

 

 마이크로프트의 음흉한 성미를 은근하게 표현하는 말에 속이 시원해진 레스트레이드는 절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존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지요. 맞습니다. 그 말이 정확하군요.”

 

 그렇게 두 사람이 홈즈 형제의 괴팍스럽기 그지없는 성정에 대해 은밀하게 토로하며 공범으로서의 공감대를 쌓아가는 동안 마차는 열심히 움직여 홈즈 저택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가 흡혈귀의 마차가 아니랄까봐 햇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올 틈새도 없이 내려진 채로 꽉 닫혀 있는 덧창을 보고 후후 웃던 레스트레이드가 존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물어보았다.

 

 “덧창을 올릴까요?”

 

 일종의 스무고개의 질문인 셈이었다. 존이 홈즈 저택의 비밀을 알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동요하는 기미가 비치겠지 싶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존도 레스트레이드가 무슨 의미에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인지 이해한 듯 살짝 표정을 굳히다가 금방 덧창을 올려도 좋다고 대답했다.
 덧창을 올리자 저녁놀빛을 받아 반짝이는 광대한 녹색 들판이 시야를 꽉 채웠다. 인적이 드문 풍경을 따라가다 보니 건물들의 자취는 점점 줄어들었고, 퇴색한 황혼과 서늘해지는 오후의 공기가 그들의 얼굴을 시원하게 때렸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지평선 위로 암담한 실루엣을 형성하고 있는 숲을 제외하면 밋밋하기만 한 풍경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나름의 정취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편에는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이 보였고, 위로 뾰족뾰족한 윤곽을 그리는 어두운 회색 숲 위로는 타는 듯 짙은 자줏빛 구름이 모여들었다. 붉게 빛나는 환한 햇살 아래에서는 늘 그렇듯 풍경의 색채는 빛과 어둠의 대비와 그로 인한 경계가 서로를 잠식하려는 듯 어두운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일몰의 마지막 빛은 녹지의 모퉁이에 아직 머무른 채로, 구불거리며 펼쳐지는 오솔길,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자리한 고저택을 그림처럼 아름답게 물들였다.
 그 광경을 멍하니 응시하던 존이 중얼거렸다.

 

 “홈즈 저택은, 이상하게도 말입니다, 늪이나 모래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자신마저도, 서서히 침몰하는 유사(流砂) 속으로 푹 꺼져 들어갈 것만 같았다.
 몇 개월 전의 기억이 빗물처럼 존의 머릿속으로 다시금 스며들어왔다. 저택 안의 어두운 회랑을 서성이며 음산하고 불길한 색채의 그림들이 그를 내려다보는 가운데 캄캄한 복도를 헤매었던 기억. 아니, 그 이전이다. 비밀스러운 광채를 품은 강철 같은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했을 때의 기억. 그 눈이 새파랗게 빛나며 자신의 영혼 깊숙이까지 사로잡았을 때의 기억. 분명 그때부터 중세의 지하 감옥 같은 저택의 그림자가 그에게로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존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존재를 무언의 형식으로 설명한 까닭과, 정체를 드러낼수록 더욱 두려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을 그에게 한 까닭을. 아무리 알맹이를 덮고 있는 겉껍데기를 벗겨낸다 할지라도 그것의 궁극적인 정체인, 이성의 인지 범주를 벗어난 공포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

  저택의 구관 정문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니 불이 드문드문 켜진 저택과 연못이며 분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레스트레이드는 그런 것들에 오래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볼거리가 있었다기보다는,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마이크로프트와 잠깐이라도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 복잡한 저택의 구조에 익숙하지 않을 존을 혼자 남겨두는 것에 대한 걱정이 들었으나 그 걱정은 다행히도 오래가지 않았다. 평소와는 영 다르게 품위 있는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존을 기다리던 셜록이 그와 존이 정문의 노커를 두드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참을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존을 낚아채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대놓고 레스트레이드를 무시한 채 마치 존과 단둘이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은근한 목소리로 그에게만 말을 걸었고, 깔끔한 암회색 장갑을 낀 셜록의 손에 붙들려가는 존은 약간 놀란 것 같았지만 기분나빠하는 기색은 없었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며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레스트레이드는 곧 몸을 돌려 옆쪽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고용인들이 닦아내고 거미줄을 걷어내어도 결국엔 방치되고 다시 지저분해지기 일쑤이던 계단은 밤새 묵을 손님들을 위해서인지 드물게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묵은 먼지를 벗겨내느라 깨나 고생했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2층에 일렬로 마련된 손님방을 지나쳐 3층으로 향했다.
 역시나 빈틈없이 꾸며진 복도를 조용히 걸어 마이크로프트의 개인실 앞에 도착한 레스트레이드가 문을 두드렸으나 웬일인지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발길을 돌릴까 망설이던 레스트레이드의 속에서 가끔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라는 대담한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저 안에 들어가서 그가 돌아오길 기다릴 참이었으니까 그다지 결례를 끼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 결심을 굳히자 몰래 나쁜 짓을 저지르는 쾌감 같은 것이 느껴져 레스트레이드는 오랜만에 소년같이 맑은 웃음을 지었다.
 심호흡을 하고 방문을 열자 우아하고 단정하게 꾸며진 다실이 보였다. 열린 커튼 틈으로 저녁 햇살이 가득 들어와 방 안을 오렌지색으로 밝혔고, 기다란 프랑스풍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나무는 잎사귀마다 녹색 빛이 스며들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다실에서 오른쪽의 커다란 문을 열면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적합한 응접실이 있고, 반대편으로 가면 의상실과 침실이 있다는 것을 레스트레이드는 잘 알았다. 하지만 주인 없는 방에 몰래 들어오는 것 이상의 일을 범하고 싶지는 않았던 레스트레이드는 다실 한가운데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앉는 것으로 만족했다.
 벨벳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고 차분한 색상의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화풍의 정물화의 둘레를 장식하는 금빛 액자 위로는 흐릿한 빛깔의 베일이 늘어져 있었다. 몇 번이고 본 그림이었기 때문에 거의 사물의 배치를 외울 지경이었지만 다실의 주인의 고집스러운 취향은 몇 년 동안이나 한결같았기 때문에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가 지평선으로 서서히 기울며 다실에 드리운 침묵과 어둠은 차차 깊어갔고, 모든 소리를 잠재운 듯한 고요함 속에서 레스트레이드는 인내심을 가지고 한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한가로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어느샌가 침실 쪽에서 바닥 판자가 작게 삐그덕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라일락 화장수의 향기가 다실로 느리게 스며들고 있다고 느낄 즈음에 문이 열리며 마이크로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이런 풍의 은백색 타이를 맨 그는 꼼꼼하게 다려진 실크 양복의 라펠을 살며시 매만지며 레스트레이드를 향해 다가왔고 경위는 다소간의 딱딱한 예의를 갖추며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그런 그를 향해 자리에 앉아도 좋다는 손짓을 하며 마이크로프트가 농담조로 말했다.


 “살금살금 들어와서 날 놀라게 하다니, 많이 늘었군요?”


 그렇게 말하는 마이크로프트의 어조는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졸음의 여운으로 나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열린 왼쪽 창문으로부터 막 지는 석양빛이 새어들어오고 있는 참이었고 그건 뱀파이어인 그에게 있어서 기상시간을 상당히 일찍 앞당긴 셈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있으면 손님들이 오실 테니 그걸 감안해서 조금 미리 찾아뵈었습니다.”


 레스트레이드가 말하자 마이크로프트가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헤아려주어서 고마워요, 그렉.”


 친밀한 호칭에 레스트레이드의 양볼이 언제나 그랬듯이 미미한 홍조를 띠었다. 그런 레스트레이드를 마이크로프트가 부드럽게 끌어당겨 이마에 입술을 살짝 대었다가 떼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옷맵시가 흐트러질까 두려워 얼른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마이크로프트가 은근하게 힘을 주어 그를 놓지 않는 것에 순순히 그가 강제하는 대로 가만히 동작을 멈추었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춘다. 서로를 향한 그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는 것처럼 달콤하고 안타까운 포옹은 달아오른 용광로에서 날리는 불티처럼 밝게 날아들던 해가 완전히 지고 방 안에 우울한 그림자만이 드리워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창밖으로 마차가 하나둘씩 도착해서 말발굽이 제자리를 두들기며 다그닥거리는 소리와 남녀가 쌍쌍이 흥분한 목소리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마이크로프트는 겨우 레스트레이드를 놓아주었다.
 못내 아쉽다는 듯이 입꼬리를 미묘하게 일그러뜨리던 마이크로프트가 나직이 말했다.


 “오늘은 저들뿐 아니라 조금 더 특별한 손님도 올 예정이랍니다.”


 마이크로프트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레스트레이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여자’인가 보군요.”
 “그래요. 서신으로 미리 각별한 주의를 주긴 했지만, 막상 도착해서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모르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몽마와 흡혈귀의 혼혈이니만큼 성격이 무척이나 제멋대로거든요, 라고 덧붙이며 그는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제야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의 안색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붉은 노을빛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눈을 날카롭게 빛내는 마이크로프트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올려다보던 레스트레이드의 얼굴에도 한 줄기 고통의 경련이 스쳤다. 레스트레이드의 시선을 감지한 마이크로프트는 평소와 같이 여유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꼭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를 바라보는 어머니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군요.”
 “그야, 걱정하고 있는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곧바로 이어진 레스트레이드의 대답에 마이크로프트의 창백했던 안색에 어렴풋한 핏기가 돌았다. 너무도 예절바르고 몸가짐이 바른 나머지 종종 그를 애타게 만드는 그의 연인은 때로는 이다지도 직설적으로 감정을 피력함으로써 그의 미묘한 정념의 구조를 자극하여 황홀하게 만드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비록 그 자신은 조금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욱 사랑스러웠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를 침대에 끌고 들어가 무자비하게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마이크로프트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난폭하게 들고일어나는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차분하게 한숨을 쉬며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그럼, 아래에서.”


 레스트레이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창문으로 스민 밤바람에 감긴 머리카락이 천천히, 꼭 살아있는 것처럼 흔들렸다.

 

*   *   *

 

 60피트쯤 되는 길이에 연한 베이지 색깔의 나무로 벽을 댄 실내의 정가운데에서 3단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 높은 원형의 천장에 가까운 높이에서부터 길고 가느다란 창문이 십자 모양으로 달려 있었다. 안팎으로 스며들고 흘러나오는 호박색 불빛 속에서 하인들이 천천히 원탁 주위를 돌면서 손님들의 와인잔을 채우고 음식을 덜어주었다.
 테이블 주변에 모여 속닥이는 사람들의 말소리, 낮아졌다 높아지기를 반복하는 웃음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등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홀의 네 외곽에 놓인 전축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가 잔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에 섞여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은 점잖으면서도 화려함이 돋보이는 옷을 입었고 하나같이 취한 것처럼 흥분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현란한 불빛 아래에서는 사람들의 얼굴도, 단단한 가죽 소파와 벽의 군데군데를 메우고 있는 책장도 오래되어 나긋이 닳은 것처럼 보였다. 곳곳에 적절한 배치로 놓인 램프와 등롱에서 발산되는 밝은 불빛과 그것을 반사하여 증폭시키는 빅토리아 초기 양식의 색유리들이 아니었더라면 꽃이 풍성하게 꽂힌 창가의 화병은 말할 것도 없고 엠파이어 풍의 책상이며 번쩍번쩍 빛나는 벽난로 위의 금박 장식품들을 비롯해 녹색 공작석 테이블까지 온갖 유서 깊고 값비싼 장식품들이 하나같이 닳아빠지고 유행이 지난 물건들처럼 보였겠지만, 세밀한 조명의 안배로 인해 그것들은 낡았다기보다는 과거를 향한 은은한 향수가 감돌고 우아함이 서린 우울함을 내포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그러한 감상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라도 하듯 누군가가 속삭이듯 내뱉었다.


 “낡아빠졌군요Vieux jeu.”


 그러고서는 저희들끼리 키들거리며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웃음을 참으려고 서로를 쿡쿡 찌르고 야단인 것이다. 프랑스 사립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귀국한 오길비 백작가의 영애 오르탕스 양과 그녀의 친구 루드밀라 모라비아 공작 영애였다. 스포드 사의 정찬용 디저트 접시를 두고 한 농담치고는 원색적인 언사에 그녀들의 건너편에 앉은 오길비 백작 부인이 급히 나무랐지만 한창의 젊음이라는 특권을 누리며 한껏 들떠있는 그 나이 또래의 사춘기 소녀들의 행실을 단속하기에는 무리였다.
 마이크로프트를 제외하면 가장 상석에 앉은 윌리엄 하그리브스 경은 그것을 보며 눈살을 조금 찌푸렸지만, 홈즈 경의 표정이 조금도 변치 않는 것을 보며 그 자신도 조용히 품위를 지키는 편을 택했다. 부유한 신사의 가문의 자손이라는 것보다도 보수적인 정책을 고수하는 런던의 부시장으로 더욱 유명한 그로서는 철없는 암망아지처럼 날뛰는 계집아이들을 탐탁하게 여길 리 만무했지만 나이가 지긋한 그가 섣불리 스스로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은 더욱 안 될 말이었으므로.
 대신 그는 사교계 행사에는 진력이 난 노신사답게 다른 화제를 입에 올림으로써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노련한 기술을 발휘하는 재치를 부렸다.


 “이 케이크는 무척 맛있군요. 요전에 포츠머스에서 열린 선상 무도회에서 비슷한 것을 먹어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쪽에서는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의 풍미가 그것보다 훨씬 낫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소.”


 십 년 전만 해도 손님들로 하여금 찬사를 받았을 그의 매너-고상한 주인으로서 식탁을 주관하며 서비스를 베풀고,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가도록 돕는 따위의 기술은 이제는 슬프게도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는 낡은 관행에 불과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효력을 톡톡히 발휘했다. 그렇지 않아도 막 포크로 하그리브스 경이 가리킨 둥근 원통형의 케이크를 찍어 올리고 있던 델라폰테인 남작 부인이 거들기 시작한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바랭이던가요?”


 남작이 핀잔을 주었다.


 “바바 오 롬(럼주에 적신 스펀지케이크)이야, 이 사람아.”


 장난스럽게 질책하는 남편에게 부인이 과장스럽게 우는 소리를 내었다.


 “내가 요리사도 아닌데 사바랭인지 바바 오 롬인지 알아서 무엇하겠어요, 여보. 그런 사소한 것으로 트집을 잡다니.”


 남작 부처가 밀고 당기며 가벼운 말싸움으로 분위기를 돋우는 한편으로 테이블 끝 쪽에 앉은 에드윈 스톤은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틈을 타 프랑스식 완두콩 요리를 양껏 접시로 퍼담고 있었다. 그는 내달이면 인도로 발령나도록 결정된 외교관으로 정계에서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그 평가를 대변하듯 그는 최근에 살이 오르기 시작한 몸을 멋있게 맞춰 입은 양복으로 감싸고 비교적 일찍 흰머리가 생기기 시작한 머리를 깨끗이 넘기기가 예사여서 늘 헤어토닉 향기를 풍기고 다녔다. 옅은 금발에 조각 같은 미모로 유명한 그의 약혼녀 로자먼드 홀 양은 처녀 특유의 걱정스런 얼굴로 야채 스튜를 깨작거리다가 뒤늦게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식의 현장을 알아차리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시작한 논쟁이 격화되어 점차 언성이 높아지는 와중에 하그리브스 경의 비서 자격으로 자리에 참석한 야심찬 젊은이 체스터 그린 군은 두 남녀가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것을 약간의 비웃음을 담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멀쩡하게 잘 부푼 슈크림을 찔러 구멍을 내고 흘러나오는 크림으로 반짝반짝 윤이 나는 은접시를 더럽히는 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케이크로 시작된 대화의 주제는 워터하우스 로지로 옮겨갔다.


 “가본 적이 있나요, 왓슨 선생?”


 존이 상이군인이라는 것에 일차적인 호감을 보인 델라폰테인 남작이 그에게 호기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존은 입 안에 물고 있던 송아지 고기를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예, 멀리서 본 적은 있습니다만…….”
 “나중에는 꼭 내부를 구경해보도록 해요. 버드나무 무늬가 그려진 벽지가 그렇게나 멋스럽더군.”


 아까 경솔한 발언으로 테이블 위에 일대 소란을 일으킨 레이디 오길비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 저도 좀 끼워주세요. 저희들도 런던에 오기 전에 갔다 온 참이라고요.”


 그다지 얌전한 축에 끼지 않는 어린 숙녀임에는 분명했으나 수레국화처럼 파랗게 빛나는 커다란 눈을 빛내며 애교스럽게 눈웃음을 치는 데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 옆에 앉은 레이디 모라비아 또한 검은 눈을 깜박이며 이편을 바라보았다.
 둘은 똑같이 재단한 듯이 비슷한 시프트 드레스 위에 비단으로 만든 길고 넉넉한 카디건을 걸쳤는데 오길비 양 쪽이 자잘한 레이스로 풍성한 느낌을 더했다면 모라비아 양은 가냘픈 목에 길고 가는 목걸이를 여러 겹 겹쳐 걸어 단순한 미적 감수성을 극대화시켰다는 데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처럼 두 소녀는 동갑에 동문이라는 것 이외에는 거의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차이점이 많았다.
 일단 오길비 양은 자연스럽게 굽이치는 짙은 갈색에 금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둥글게 말아 올리고 보석이 박힌 상아 빗을 꽂고 나머지는 목 부근으로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어느 남자라도 한번쯤은 그 희고 통통한 손목을 쥐어보고 싶어 할 만큼 보기 좋은 몸매를 가진 생기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다. 반면 모라비아 양은 검은 머리를 단아하게 틀어 묶고 선이 또렷한 얼굴에 지적인 이목구비를 가진데다가 날씬하고 키가 큰 편이었다. 신사들이 으레 찬양하기 마련인 전형적인 연약한 숙녀의 생김새라고 하기에는 도도해 보이는 콧날에 절도 있는 분위기를 지닌 그녀는 친구인 오길비 양보다 성숙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좀더 귀족다운 위엄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두 소녀는 파리의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모라비아 공작가가 있는 비엔나와 독일의 비스바덴을 거쳐 수많은 도시를 바삐 돌아다니다가 런던으로 온 참이었기 때문에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다양한 화제를 꺼낼 수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질 뻔한 식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워터하우스 로지를 비롯해서 최근에 유행하는 코티지 양식에 대한 한 차례 토론이 지나간 후 드디어 홈즈 저택이 화제의 물망으로 올랐다.


 “일찍이 1890년대 무렵에 선친께서 이 집을 사셨죠. 그때만 해도 으리으리한 대저택이었습니다. 밸모럴 성을 연상시키는 외관이었다고 전해 들었을 정도이니까요.”


 있지도 않은 선친 운운 하며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마이크로프트를 웃음기 어린 눈으로 힐끗거리며 존과 레스트레이드는 한 차례 눈빛을 교환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마이크로프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대에 이르러 워낙 손이 귀해진지라 지금 홈즈 가문에는 저와 동생밖에 없지요.”
 “천만에요. 군식구가 딸려있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델라폰테인 남작 부인이 와인을 마시며 말했다. 그에 마이크로프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도 외진 저택이라 무료한 것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제 오랜 친우인 레스트레이드 경위가 종종 찾아와주곤 하죠. 최근에는 제 동생의 주치의인 왓슨 박사도 함께요.”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른 화제로 넘어가죠.”


 아까부터 신사 숙녀를 막론하고 존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을 달갑잖게 생각하면서도 꾹 참고 있던 셜록이 결국에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괴팍스럽기 그지없는 그 행동에 신사들은 깜짝 놀랐지만 숙녀들은 다른 측면으로 그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명문가의 젊고 잘생긴 신사가 아직까지 독신이라는 것은 모든 레이디들의 관심을 한 몸에 집중시키게 마련이다. 아무래도 개업의 존 왓슨 보다는 홈즈 가의 차남인 셜록 홈즈가 구미가 당기는 신랑감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존에게 쏠린 관심을 분산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뜻밖에도 그 관심이 온통 자신에게 쏠려버린 것을 눈치 챈 셜록이 작게 혀를 찼다.

 

*


 제아무리 날고 기는 셜록이라도 다섯 여자-수선스런 부인네들과 말괄량이 숙녀들 뿐 아니라 말석에 앉아 얌전빼고 있던 홀 양도 은근슬쩍 공세에 가담한 탓이었다-의 수다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결국 그도 이 애매하고 불편한 상황에 순응하여 숙녀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표면적인 노력이나마 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노력에 힘입어 정찬의 분위기는 완전히 무르익었다. 또한 신사들의 환담도 끊임없이 이어져 분위기는 순조롭게 고조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깥 하늘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칠흑처럼 검어졌고 사라진 일몰의 흔적 대신 연회장 곳곳에 놓인 복숭앗빛 갓을 씌운 등불이 홀 안을 속속들이 비추었다. 누군가 저택 바깥에서 이편을 바라보면 마치 저택의 창문들이 하나같이 기괴한 바로크 시대의 보석처럼 마구 빛을 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었다. 부끄럼을 타는 레이디의 뺨처럼 발그스름한 조명의 덕택인지, 밤이 깊어졌지만 내객들의 태도는 더한 열기를 띠면 띠었지 덜해지지는 않았다. 영롱한 조명이 석조 벽난로, 하얀 테이블 커버와 늘씬한 제비꼬리처럼 우아하게 빠진 정장의 옷깃, 벨벳 야회복으로 감싸인 여자들의 둥그스름한 어깨를 아른거리며 비추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저녁 식사는 거의 끝나가는 참이었다. 홀 양의 참견에도 불구하고 스톤 씨가 마지막까지 오믈렛 오 샹피뇽(버섯 오믈렛)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적거리다가 포크를 놓은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누구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처지고 느슨해지기 시작할 즈음 지루함으로 몸부림치던 오길비 양이 선봉장이 되어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과감하게 입을 열었다.

 

 “홈즈 경? 이제 이 다음 순서를 진행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녀가 대담하게 마이크로프트를 지목하자 마이크로프트는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응대했다.

 

 “혹시 그거 아십니까, 오길비 양?”

 “뭘 말이에요?”

 “열세 명이 모인 자리에서는 제일 먼저 자리를 뜬 사람이 죽는다는 미신 말입니다.”

 

 마이크로프트의 갑작스런 발언에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지자 물결이 이는 것처럼 식탁 주위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 사이에도 한 차례 동요가 일었다. 담담하지만 암시적으로 불길한 징조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어조에서 풍기는 위험에 존은 불안한 표정으로 마이크로프트를 쳐다보았다.

 

 “자, 그러면 모두들 몇 명인지 한 번 세어보도록 합시다.”

 

 물론 좌중의 인원은 더도 덜도 말고 딱 열세 명이었다.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섬뜩한 무언가가 짙게 묻어나오는 그의 말을 부인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그래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려 홀을 둘러보았고 마이크로프트의 말이 옳다는 것만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참다못한 델라폰테인 남작이 입을 열었다.

 

 “자, 홈즈 경. 내 아내는 마음이 약해 무서운 놀이라면 질색이라오. 게다가 어린 숙녀분들도 계시니 농은 그만하십시다.”

 

 남작의 온건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로프트는 고의적으로 소름끼치는 공기를 증폭시키려는 듯 담배를 쥔 손가락 끝에 힘을 단단히 주고 강렬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구식인 사람인지라 미신을 아주 신봉하는 편이지요.”

 

 뒤이은 말에 누구도 토를 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장내는 정적에 휩싸였다. 지금의 상황은 누군가의 지독한 악취미가 틀림없다고 모두들 생각했다. 하지만 마이크로프트는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이 그저 사람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아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담배를 고쳐 물었고,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 끝부분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허공을 떠돌아 모호한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을 악마처럼 보이게 했다.

 존은 반사적으로 셜록을 바라보았다. 셜록은 냉정한 국외자처럼 이 모든 소란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난 채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 셜록의 모습은 존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건 간에 셜록은 결코 이렇게 얌전히 앉아있는 성미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인내심이라는 것을 발휘하는 데에 능숙치 않다. 또한 쉴 새 없이-그의 말에 따르면 악의는 없는-독설을 주위에 퍼부어 상대방의 계략이 무엇이든 여지없이 깨뜨려버리고는 금세 싫증을 내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셜록은 확실히 이상했다. 그것이 적지 않게 존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다음 순간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자 그럼,”

 

 그는 입술 사이로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놓고 술잔 손잡이를 빙글 돌렸다. 잔 안에 담겨 있던 노르스름한 샴페인이 샹들리에에서 떨어지는 빛무리를 반사했다. 손가락에 나란히 끼워져 있던 그리스 양식을 본뜬 묵직한 은반지도 그의 가슴 언저리에서 번쩍 빛났다.

 

 “미스 아이린 애들러와 미르칼라 폰 카른슈타인 여백작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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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이라고는 타원형의 유리창 위쪽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회색빛뿐이었다.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면서 새벽녘 특유의 빛으로 밤에 젖은 캔버스 위를 덧칠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었던 것인지 선명한 보랏빛 어둠이 허공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더해가는 햇빛으로 말미암아 하늘은 구석구석마다 푸른빛과 은빛으로 맑게 물들어갔다. 간밤에 그리도 아름답게 비추이던 달빛은 잿빛에 가까운 실루엣으로 하늘에 가까스로 머물다가 이미 사라진 별들의 뒤를 이어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창 밖에서 쏟아져들어오는 흐린 햇빛에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눈을 뜬 존은 자신의 옆에 셜록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딜 간 것일까, 하고 궁금해 하는 것도 잠시, 존은 창 너머로 보이는 납빛과 은빛이 뒤섞인 새벽 하늘빛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말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존은 창가로 다가갔다. 이상하리만치 상쾌하게 밝아오는 아침이었다. 존은 창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창턱에 얇게 덮인 눈을 흐트러트리고 묵직한 커튼을 흔들었다. 존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쨍한 바람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나른한 잠기운을 씻어냈다. 존은 차가운 바람이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벨벳 상자 속에 담긴 사파이어처럼 뭉근한 어둠을 띤 채 파랑색으로 빛나는 하늘 귀퉁이와 하얀 꽃잎이 흩뿌려진 것처럼 흰빛으로 드문드문 밝아오는 하늘의 차갑고 감미로운 색채는 몹시 아름다웠다. 이따금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하늘을 바탕으로 흩날리는 가루눈이 혼미함과 투명함을 동시에 띠고 있는 특이한 섬광을 반사하며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풍경에 존은 흠뻑 빠져든 채로 한동안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 몸을 맡기고 있던 존은 문득 귀가 멍멍해지는 듯한 환각을 느꼈다. 허공을 가득 메운 침묵.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빽빽하게 들어찬 채로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러한 감각을 느낌과 동시에 완벽한 패닉이 그를 덮쳤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물에 빠진 사람이 젖은 옷가지를 바삐 주섬주섬 챙기고 나오는 것처럼 존 또한 그를 둘러싸고 있던 나른한 새벽 공기와 감상적인 기분을 황급히 떨쳐 빠져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답게만 보이던 것들이 하나같이 섬뜩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간결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다고 생각했던 방안 사물들도 하나같이 낡아빠진 데다 색이 바랜 고물 더미들처럼 보였다. 천장 한가운데 외롭게 매달린 가스등 불빛에 어슴푸레하게 비친 방 안은 인기척뿐 아니라 인간미의 한 조각도 느껴지지 않는 둔중한 회색빛과 진청색의 덩어리일 뿐이었다. 지나치게 환상적이었던 꿈자락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존은 망연하게 웃었다. 뿌연 안개 속을 헤매다 갑자기 시야가 밝아져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된 듯, 화려한 색채를 띤 듯 했던 풍경에서 활기가 달아나고 창백하고 무미건조한 회색조로 온통 물이 빠진 것 같았다.
 이제 모든 것이 다 잘못된 것처럼 보였다.

 

*

 

 존은 일단 방을 빠져나왔다. 끝없이 이어져 그의 앞을 번번이 가로막던 숲을 빠져나온 것도 기적이었고, 환각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아니, 믿고 싶었던-남자, 셜록 홈즈와 다시 만나게 된 것도 기적이었다. 그렇다면 어제 몇 번이고 있었던 기적의 일환이 오늘까지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물론 지금 존이 의미하는 기적이란 인간이 아닌 자들에게 들키기 전에 저택을 무사히 빠져나가 다시 한 번 숲을 지나서 마을로 도착하는 그 모든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셜록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혼자 놓아두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저택을 나가려는 지금 그의 그러한 조치는 존에게 호재였다.
 닫혀있던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연 존은 고개를 내밀어 복도를 살폈다. 창문이 있을 법한 위치에는 어김없이 커튼이 단단하게 쳐져 있었다. 그 대신인지 등불이 하나 침침하게 켜져 있을 뿐이었으나 시야를 확보하는 데는 다행히 문제가 없을 정도의 밝기였다. 존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복도로 발을 디뎠다. 복도 전체에 깔린 두꺼운 융단이 푹신하게 구두창을 감싸며 발소리를 삼켰다.
 주욱 이어진 통로에는 단조로운 문양의 벽지가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간간이 벽에 걸려 있는 시커멓고 우울한 양상의 그림들은 색이 바래기 이전에 선명한 녹색과 금색으로 빛났을 벽지의 지나치게 활달한 색조를 한층 장중하게 누르기 위해 배치했을 것이었겠지만 하나같이 칙칙한 금빛으로 퇴색해버린 지금에 와서는 그저 암담한 분위기를 가중시킬 뿐이었다. 복도가 길어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세워져 있는 책장이나 자그마한 장식품과 낡은 램프가 놓인 작은 장식용 탁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손질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윤기를 띠기는커녕 초록색의 녹으로 온통 점철된 청동 촛대에 꽂힌 양초에 누군가 불을 붙여놓긴 했으나 그나마도 불꽃이 심지에 거의 근접해가고 있어 가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최소한의 관물들과 그것들이 자아내는 퇴락한 화려함마저도 없었다면 존이 걸어가는 이 통로는 전형적인 지하 감옥처럼 보였을 것이었다는 점에서 안심 아닌 안심을 느껴야 했다.
 먼지가 내려앉은 부서진 초기 빅토리아 시대 양식의 거울 틀을 마지막으로 통로가 끝나고 계단이 나타났다. 희미한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은 바에 따르면 이 자리에는 내리막의 비좁은 나선형 계단이 있어야 했으나 뜻밖에도 그의 앞에 놓인 계단은 오르막으로 된 계단이었다. 존은 그가 반대편으로 왔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미 돌아가기엔 늦은 것같다고 판단한 그는 그대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존은 금방 그가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깨달았다. 계단은 폭이 좁고 천장에서 샌 물로 인해 여기저기가 부식된 채로 깨져있어 불안했으며 난간도 온통 녹슬어 있었다. 덕분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끼익 거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먼지가 엉겨 붙어 완전히 낡고 더러워진 채로 장정 도서의 표지처럼 딱딱해진 카펫이라도 밟으면 요란한 쇳소리가 좀 덜할까 싶어 궁여지책으로 카펫이 깔린 부분에만 발을 디뎌보기까지 한 존이었으나 심지어 카펫을 밟을 때조차 귀에 거슬리는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존은 조금이라도 소리가 덜 나도록 걸어볼까 하는 노력을 거두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계단의 삐걱거리는 소리는 도무지 가라앉지도 않고 귀에 익숙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아서 혹시라도 자신이 저택을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두려워하던 존의 심장을 덜컹덜컹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렇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계단의 끝에 다다른 존은 약간의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계단의 끝에는 텅 빈 종루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바람에 풍화되어 자연적으로 마모된 석조 종루의 돌난간에는 까마귀들이 몇 마리 옹기종기 모여앉아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인 존을 향해 까악까악 울어댔다. 까만 눈을 무심하게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까마귀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는 피해망상적인 생각과, 아무도 없는 종루에 다다르기까지 괜히 쓸데없는 긴장을 했다 싶어 약간 부아가 치민 존이었으나 자신이 올라온 쪽의 계단 통로 외에도 하나의 통로가 더 있다는 것에 존은 그쪽으로 내려가는 시도를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존이 올라온 계단 통로와 직각으로 방향이 갈리는 층계는 아까까지 올라온 낡아빠진 계단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다. 층계는 자단나무로 되어 있고 까만 양탄자가 계단을 따라 빙글빙글 돌아가며 깔려있었다. 내려가는 내내 총계에는 황홀할 정도로 정교한 짜임새로 맞물린 난간이 둥글게 둘러쳐져 있었고 벽에는 기하학적인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벽에 새겨진 지루한 형태의 조각에 슬슬 질리고, 끝도 없이 원을 그리며 내려가는 계단에 어질어질해질 무렵 계단은 갑자기 뚝 끊겨버렸다. 다시 한 번 긴 복도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양편으로 길이 나뉘어 있다는 점이 달랐다. 생각보다 크고 복잡하기까지 한 저택을 돌아다니는 것에 굉장히 부정적인 감흥을 느끼기 시작한 존이었으나 이제는 달리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길을 모색하는 수밖에는.
 왼쪽으로 난 복도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그보다는 밝은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벽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설치된 인공 조명등이 마치 어서 오라는 듯 복도 전체를 훤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 한 점 없이 어두운 복도와 밝은 불빛이 점등된 복도의 지나치게 선명하고 양극적인 대비는 존을 갈등하게 만들었다. 조금의 타협이나 영합의 여지도 없이 완벽하게 갈린 선택지 두 개가 놓여있는 상황은 마치 존을 겨냥하고 미리 꾸며둔 상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의 안에 있는-정석적인 상식인이자 순종적인 군인인 존과 남몰래 탈선을 꿈꾸며 반골 기질을 간직하고 있는 존-두 가지의 상반된 성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을 과시하듯 말이다.
 고민하던 존은 결국 불이 켜진 복도 대신 반대편 복도를 선택했다. 통로를 걸어갈수록 빛을 등지게 되고 눈앞은 점점 캄캄해진다. 간간이 문이 열린 채로 방치된 방들이 보였다. 칸이 분리된 특별실이 계단에서부터 대여섯 개가 있었다. 대개 흡연실이 아니면 카드룸이었다. 안쪽에는 가스난로를 밝혀 놓은 듯 쉿쉿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냉기 어린 복도가 완전히 얼음장이 되지 않도록 일부러 온기가 새어나오도록 한 듯했다. 역시나 창문이 있을 자리에는 햇빛 한 점 들지 않도록 커튼이 쳐져 있었고 복도에 만연한 정적을 더했다.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존은 멈춰서서 복도를 둘러보았다. 시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처럼 시계는 단 한 개도 놓여있지 않았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거쳐 온 다른 복도도 그랬다는 것을 존은 알아차렸다. 그 흔한 괘종시계나 벽시계, 하다못해 뻐꾹 시계도 없었다. 시간을 초월한 채 버려진 곳처럼 인적이라곤 없는 이곳에는 영생을 누리는 자들의 오만과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모독이 서려있다는 것을 존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감각이 오히려 무뎌지는 듯했다. 간간히 가스 난방기 안에서 불꽃이 으르렁거리며 타오르는 소리만 멀리서 들려오거나 환청처럼 웅웅거리는 억눌린 듯한 낮은 소음이 존의 귓가를 부드럽게 자극했다. 하지만 대리석 바닥에 깔린 붉은 빛깔의 카펫이 그마저도 흡수하고 더욱 침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심해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 카펫의 붉은색만이 선명하여 어딘지 섬뜩했다.
 벽에는 군청색과 은색 실로 짠 칙칙한 색조의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세월을 이겨낸 태피스트리는 원래의 색을 거진 잃은 데다가 진한 어둠 속에서 보니 광택이 나는 녹색처럼 보였다. 복도 전체가 방음벽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너무나 조용했다. 숨 막힐 듯한 정적 때문인지 공기 중에 불안한 기운이 떠다니며 지나는 이들에게 경고를 던지는 느낌이었다.
 복도의 중간에 다다랐을 무렵 복도를 감싼 어둠은 최고조를 달렸다. 잉크를 통째로 쏟아부은 듯한 어둠. 존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워보았다. 그러나 그의 숨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크게 숨을 들이키자 어딘가에서 텁텁한 향기가 느껴졌다. 언뜻 담배 연기인 것처럼 생각되었으나 그보다는 좀더 진한 향내가 코끝으로 스며들어왔다. 진하다 못해 역겨울 정도였다. 끔찍하면서도 달콤한 그 향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어디서 흘러나오는지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작은 틈새를 두고 열린 방문이 보였다. 존의 바로 앞에서 도사리고 있는 어둠과 향기, 그리고 그에 한데 뭉쳐있는 위험이 그의 마음속에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존은 약간 충동적으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마약 같은 향기에 정신이 몽롱해진 존은 그 자그마한 냉기 덕에 조금이나마 맑은 정신을 되돌이킬 수 있었다. 존은 몸서리치며 그대로 잠깐 동안 서 있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야 존은 그것이 용연향과 베르가못 향을 비롯해 이런저런 향료를 섞은 채로 태운 향초에서 나는 향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길도 모르는 채로 줄곧 방황하다 보니 감각 신경이 교란된 것처럼 작은 변화에도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듯했다. 그러나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와 그가 서있는 복도를 비롯해서 저택 전체에 무언가 위험한 공기가 떠돌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암흑 속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을까.
 차가운 문손잡이를 잡은 감각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이었다. 돌아서야 한다고 냉기가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택 전체에 깊이 배인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존으로 하여금 냉정한 사고력을 앗아가고 있었다. 확실히 이곳에는 분방하고 대담한 행동을 유발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방문 틈으로 달빛처럼 흐릿한 빛이 새어나왔다. 만용을 부리는 셈 치고 존은 문을 약간, 아주 약간 열어보았다. 빛은 베네치아 풍의 청동 램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존은 결국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

 

 문을 열자 뒤엉켜 뭉친 향기가 화악 밀려들었다. 방 안의 온기에 뜨끈하게 달아오른 향기가 존의 코끝으로 지독하게 끼쳐들었다. 한데 고여있던 향내가 바깥으로 밀려나가길 기다렸다가 존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도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등잔의 심지가 한껏 돋우어져 있었고 방 안은 은은한 불빛에 잠겨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신사의 내실이라는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곳이었다. 그러나 호화롭고 세련되면서도 동시에 기묘한 분위기가 어린 곳이기도 했다. 온 시대를 망라한 듯 가지각색의 고풍스런 과거의 유물들과 손때도 채 타지 않은 현대식의 물건들이 남루한 전리품마냥 한데 뒤섞인 채로 쌓여있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네모꼴의 커다란 방의 사면은 고아한 느낌의 적색 벽지로 덮여있었다. 옛 로마 황제들의 망토에 쓰였을 법한 보랏빛이 살짝 어린 붉은색 벽에는 베니스 풍의 등롱이 불이 밝혀진 채로 나무의 잔가지처럼 매달린 채로 느슨하게 아래로 늘어져 방 안 구석구석을 어렴풋이 비추었다. 어슴푸레한 누런 불빛들 옆의 한쪽 벽에는 오래된 구릿빛 장검과 방패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쭉 뻗은 레이피어나 뾰족한 사브르, 터키의 장검들을 비롯해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아직 예리함을 잃지 않은 날붙이들이 빛을 받아 파랗게 빛났다. 그 아래의 빈 공간에는 주철로 만든 조상, 흉측한 생김새의 괴물 조각, 어딘지 음험한 눈빛의 대리석 두상들이 되는대로 쌓여 용케도 무너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놓여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만물상을 건너뛰고 두툼하게 주름진 검정색 벨벳 커튼이 닫힌 창가를 지나자 건너편에는 비스듬이 놓인 거울과 온갖 물건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놓인 테이블과 옷가지가 걸쳐진 긴 소파가 놓여있었다. 암갈색의 떡갈나무 재목으로 짜인 테이블은 호화찬란하기 그지없는 다른 가구들과는 달리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평평한 윗면에서 튀어나온 가장자리에 플로렌스 풍의 느낌을 살짝 가미한 세공이 살짝 되어있는 정도였기 때문에 전면에 걸쳐 정밀한 세공이 깃들어있는 류의 다른 고색창연한 물품들에 비하면 밋밋할 정도로 소박하고 간소했다.
 넓은 테이블 위에는 남색과 보라색이 오묘하게 섞인 광택의 벨루어 탁자보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일렬로 죽 놓인 화장수, 아스트린젠트, 헤어토닉을 비롯해 브러시와 칼라 버튼, 갖가지 색상의 보석 커프스가 난잡하게 널려 있었다. 그 외에도 책상 위는 붉은 유리 덮개의 램프, 열쇠 묶음, 각국의 지폐와 은전, 동전, 촉에 잉크가 묻은 채로 놓인 만년필과 철필, 연한 살구색의 편지 봉투까지 놓여 있어 혼돈의 극치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한데 놓인 테이블에서는 기분좋은 무절제함이라고 칭할 수 있을 법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이 장소는 아름답고 독특하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늘이 드리운 것처럼 창백하고 우울한 느낌에 휩싸인 채였다. 밝지만 무거운 암담함이 죽은 물고기처럼 하얀 배를 드러내고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존이 방 안에 들어온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마치 몇 시간, 또는 며칠이 지난 듯 느껴졌다. 그 자신이 방 안을 걸어다니느라 나는 발걸음소리까지 호숫물이 꾸르륵거리는 것처럼 침울하게 들렸다.
 존은 암울한 감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두어번 흔들었다. 이 방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는 생각이 든 존은 나갈까 마음을 먹었으나 문득 테이블 위에 있는 편지에 시선이 미쳤다. 하나같이 원색적인 색감으로 물들어있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엷은 색조를 띤 것이었기 때문이다. 손목에 다는 끈도 없고 초침도 멈춘 채로 쌓여있는 손목시계의 크로노그래피들을 살짝 옆으로 밀치고 편지를 손에 든 존은 편지를 밀봉했던 밀랍에 커다란 A가 박혀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 편지봉투를 뒤로 돌리자 발신인의 이름이 적힌 자리에 밀랍 인장과 비슷하게 아름다운 필체로 Irene Addler라는 여성의 필적이 남아있었다. 존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수신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마이크로프트...홈즈?"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그 이름을 읽은 존은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펄쩍 뛸듯이 놀라고 말았다.
 

 "제 이름입니다."
 

 존은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잘못 듣기라도 한 듯 뒤편의 어둠 속은 성당의 납골당처럼 고요했다. 다리와 등골을 타고 한기가 줄달음을 쳤다.
 그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울렸다.
 

 "마이크로프트 홈즈라고 합니다."

 

*


 "그러니까, 당신이 바로 존 왓슨이군요."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분명 그의 실루엣은 가까워지고 있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언뜻 보기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같이 보였다. 그 정도로 남자의 움직임은 우아하고 고요했으며, 날개를 접고 있는 독수리처럼 위엄이 넘쳤다.
 팔을 뻗으면 존에게 닿을락말락한 거리에서 남자는 멈춰섰다. 그는 키가 큰 편이었고 마른 축에는 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비대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그의 자세가 유달리 곧고 민첩한 덕분인 것같았다. 남자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무게감이 있고 예의바른 태도였다. 일종의 호감을 이끌어내려는 데에 특화된 듯한 조용하고 온화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있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목소리에는 오랫동안 지배자의 위엄을 지니고 존경받아온 사람처럼 명령하는데 익숙한, 그러나 겸양을 갖춘 조용한 자부심같은 것이 배어있었다. 미묘하게 사람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느껴지면서도 조금도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은 채 표정은 기분나쁠만큼 평온한 것에 존은 어렴풋한 위화감을 느꼈다.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이을 때까지 정적이 그곳을 감싸고 있었다.
 

 "포트 와인이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난데없는 제안에 놀란 존은 고개를 살짝 쳐들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미소짓고 있었다. 결례가 됨을 알면서도 존은 마이크로프트의 면면을 뜯어보았다. 어렴풋하지만 확실하게 느껴지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아색의 혈색은 기묘했지만 그렇다고 병약해보이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존은 마이크로프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둠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빛이 들지 않아 동공과 홍채의 경게가 구분이 되지 않았고 검은자위가 온통 새까맣게 보였다. 그러나 그 눈에서 섬뜩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단지 그것이 띤 색채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물린 입술만큼이나 과묵하게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는 눈은 웃고 있었지만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뱀처럼 차가운 그 눈을 마주하고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목도한 존의 몸이 떨렸다.
 그것을 알아차린 마이크로프트가 잔잔하면서도 약간은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존에게 말했다.
 

 "내키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예의상의 서운한 티를 살짝 드러내었으나 말 그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의상의 제스처일 뿐이었다. 마이크로프트는 다시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렇다면 산책은 어떠신지요. 보셨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근방은 수색(樹色)이 뛰어나죠. 아직 아침이 되지 않았으니 저도 새벽 공기를 쐰다면 즐거울 것같군요."
 

 잘생겼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투박한 외양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세련된 음성이었다. 다소 시적인 리듬까지 가미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의사를 더이상 거절하기 어려웠던 존은 간신히 그의 정중한 제안에 승낙의 표시를 건넬 수 있었다.
 

 그들이 빅토리안 고딕 양식의 저택을 나와 부지로 들어선 것은 아침이 다 되어가는 새벽 다섯 시쯤이었다. 그들 앞에는 별로 섬세하지는 않지만 탄탄하고 장엄한 모양으로 잘린 돌로 포장된 길이 똑바로 나 있었다. 서서히 떠오르는 햇빛을 등진 낡은 종탑이 이편으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어둠 속에서 빛의 윤곽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저택과 신축된 건물을 잇는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 존의 입에서는 절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화강암 판석이 반듯하게 깔린 통로 양 옆으로 규칙적으로 늘어선 아치형 돌기둥을 차치하더라도 탁 트인 풍광은 과연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말대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저택을 둘러싼 나무들은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꿋꿋한 자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간밤에 영락없이 어린 소년의 연한 살점을 탐하는 마녀의 손가락처럼 오그라든 검은 실루엣처럼 보이던 나무들은 희미한 초록색으로 밝아오는 새벽하늘 아래에서 깨끗한 은빛으로 빛났다. 부드러운 은색을 띤 나무들은 겹겹이 저택을 감싸고 밀도 높은 청회색으로 짙어지며 저편의 검푸른 산의 그림자까지 이어졌다.
 얇은 구름이 낀 하늘에서 스러져가는 금성이 반짝이고 있었다. 초록색으로, 회색으로, 파란색으로 색이 뒤바뀌며 점차 밝아지고 있는 허공에서 그것은 흐릿하지만 따스한 온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한 색유리같은 공기에 선명한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그러나 정작 그 하늘을 바라보는 존은 그 모든 것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폐부로 생기 넘치는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면서도, 아름다운 석조 통로의 기둥 사이를 한발 한발 나이가면서도 존은 혼란스럽고 소름끼치는 무언가가 잊혀진 채 뒤에 남겨져 있는 것 같은 꺼림칙한 감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건 아마도 자신을 반강제로 기묘한 새벽 산책에 끌어들인 남자 때문이리라.
 멀어졌던 시선을 다시 가까이로, 앞서 걸어가고 있는 남자에게로 옮겼다. 한눈에 봐도 귀족적인 풍모가 확실히 느껴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차림새도 점잖았다. 언뜻 보아서는 수수해 보이는 그의 검정 인버네스케이프는 고급 양복점에서 맞춰 입은 옷이었고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나는 검은담비털이 달린 깃의 접힌 부분에는 아스트라한 모직 안감이 붙어있었다. 장신에 호리호리한 몸집을 감싼 그 길고 어두운 빛깔의 코트는 최신 유행에 편승한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대에 뒤떨어질 정도로 고답적인 차림새는 아니었다. 존이 보기에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그의 옷차림은 실상은 꽤나 고풍스러운 것으로 요즈음의 젊은 영국 신사들에게 유행하는 스타일보다는 한층 전통적이고 역사적이라고 할 만한 구석이 역력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둘은 어느새 건너편 건물의 입구에 도착했다. 존이 아까까지 헤매던 건물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모양새인 것과는 달리 눈앞의 건물은 기능성을 살린 현대식 구조로 깎아지른 듯한 모양으로 지어져 있었고, 지금까지 걸어온 로마식의 아치형 복도와 어울리지 않게 불투명한 유리창이 달린 이중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문손잡이의 열쇠구멍에 열쇠를 돌려 넣는 그의 동작은 교향악단 지휘자의 동작처럼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그의 와이셔츠 소맷부리에서 에매랄드 버튼이 반짝반짝 빛났다.

 

 “겨울이라 경관이 보잘것없어 보여드릴 것이 얼마 없군요.”

 

 그렇게 말하며 마이크로프트는 뒤따라오는 존을 흘깃 쳐다보았다. 자신의 말이 일으키는 반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비록 얌전하게 그의 제의에 응하기는 했지만 언제까지고 순순한 태도로 일관하고 싶지는 않았던 존은 지금이 그가 왜 뜬금없는 산책 따위의 제안을 건넨 것인지 그 진의를 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교계에서 으레 하듯이 예의바른 방식으로 몇 초간 머뭇거리는 체 하던 존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제게 산책을 제의하신 겁니까?”

 

 지나치게 전투적인 서두였을까 싶어 급히 덧붙였다.

 

 “관대한 제안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또한 지나치게 숙이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다.

 

 “굳이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마이크로프트가 주의 깊게 지켜보는 가운데 존은 애써 당당한 태도를 고수하며 말을 맺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과 쌀쌀맞은 눈빛은 절로 그를 움츠러들게 했지만 존은 어깨를 곧게 펴려 노력했다.
 잠시 말이 없던 마이크로프트는 방금 전까지의 냉랭한 표정을 싹 지우고 입매를 슬쩍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글쎄요.”

 

 미봉책에 불과한 그 대답에 존이 무어라 반박하려는 찰나 마이크로프트는 부러 달칵 소리가 나도록 손잡이를 돌렸고, 존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다시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는 마이크로프트의 뒤를 따라 들어가야 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를 급히 뒤쫓아 가니 현관이 순식간에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이크로프트는 곧장 응접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맞은편으로는 커튼이 쳐진 창문들이 정문 쪽에 위치한 바깥 정원을 면해있었고, 오른쪽에는 개별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칸막이 방들이 몇 개, 왼쪽에는 작은 문이 하나 보였다. 선뜻 응접실로 따라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서성이던 존은 다행히도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생각보다 금방 방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마이크로프트가 알맞게 풀을 먹인 검정 실크햇과 손에 쥔 장우산을 들어보였다.

 

 “일단은 이것 때문입니다.”

 

 급히 파리에 갈 일이 있어서요, 라고 즐거운 듯이 말하는 그에게서 아까까지만 해도 표정에 명백하게 어려 있었던 미묘한 적대감이 마치 어슴푸레한 새벽 속으로 녹아들어갔거나 아침 바람에 쓸려가 버린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통 종잡을 수가 없는 그의 말투와 표정에 존이 헷갈려하는 사이 다시 마이크로프트는 응접실 왼쪽으로 나 있는 쪽문으로 나갔다.
 그들은 열려있는 문으로 나와서 모퉁이를 돌아 제멋대로 자란 관목들이 듬성듬성 늘어선 돌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후원의 산책로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의 주위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막무가내로 모아서 쌓아 놓은 수석, 균열이 가고 깨어진 천사와 님프의 조각상, 원래 있었던 땅에서 통째로 파서 옮겨놓은 듯한 폐허의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스산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존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나마 현대식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건물마저 음침하고 색 바랜 일출에 물든 것처럼 희미한 회색을 띠고 있었다. 낡은 돌을 가져다가 외벽에 쪼개 붙인 것이 분명한 연회색의 건물 돌벽에는 이끼가 아래에서부터 벽을 잠식하고 있었고, 방금 전 그들이 열고 나온 쪽문의 위에는 과거의 유물을 되는대로 가져다가 붙인 것처럼 옛 문양이 새겨진 채광창이 붙어 있었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황량함과 마주치자 흠칫 놀란 존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돌을 깐 뜰과 한옆에 놓인 낡은 벽돌 무더기 사이로 죽어가는 나무가 기다렸다는 듯 구부러진 가지를 쭉 내밀고 있는 것을 보자 존은 저택 주인이 지닌 그로테스크한 미적 관념에 대한 체념마저 들었다.
 멀리 보이는 숲에는 영구차를 장식하는 까마귀 깃털처럼 검은 소나무들이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마치 군집한 까마귀들 한 무리가 모여 있는 것처럼 어둠이 짙게 배인 그 숲에는 그리스의 고전 비극에나 묘사되었을 법한 필연적이면서도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 분위기는 이미 사라져버린 무언가가 풍겨내는 상실감, 영원히 가시지 않을 슬픔, 현실적이지 않아 치유될 수도 없는 고뇌-그 어느 것이라고 칭해도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저택 뒤편의 들판 한가운데 선 수양버들과 황록색의 덩굴로 칭칭 감긴 나무둥치를 지나치며 마이크로프트가 문득 입을 열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이건 순전히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미로 정원 안에서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는 마치 무덤 안에서 들리는 메아리처럼 낮게 울렸다. 늘어진 수양버들의 줄기는 가느다란 발을 촘촘히 내건 것처럼 늘어진 채로 새벽 공기의 유유한 흐름에 따라 이따금 물결쳤다.

 

 “이 대화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지요.”

 

 제가 말하고도 궁색하기 그지없지만 말입니다, 라고 짐짓 유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마이크로프트의 눈빛에 존은 작게 몸을 떨었다. 틈을 보이면 먹잇감을 곧바로 급습하려는 뱀처럼 싸늘하고 소름끼치는 눈빛이었다. 눈매는 웃음을 가장하듯 휘어져 있었으나 시선은 노려보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렇게도 차가운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세련되고 정확하게 다듬은 억양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 또한 다른 종류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두려움을 떨치려는 한편으로 자신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그 눈빛에 떠밀린 것처럼 존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군요.”

 

 이채를 띤 채로 존을 옭아매어 질식시킬 것처럼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마이크로프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서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요…….”

 

 덧문이 모두 내려진 쓸쓸한 저택이 그들 뒤로 점점 멀어졌다. 앞으로는 점점 빈번하게 보이는 갖은 장식물들과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로 엉킨 미로가 있었다. 그들은 그 좁고 어두운 길 안으로 스며들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마이크로프트는 앞에 놓인 석조 아치문에 손을 올리며 다시 존을 흘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당신은 순순히 저를 따라왔군요. 그렇게나 공포에 질려서 떨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마이크로프트는 싱긋이 웃었다. 조용하고 온화한 웃음이었으나 존은 몸이 오싹해져 옴을 느꼈다. 그의 입가에 어린 웃음 때문에 오히려 표정은 더욱 부드럽게 변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으나 그의 푸른 눈 깊숙이에서 번득이는 강한 타산의 빛은 존을 긴장시켰다. 왜 지금까지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야 상황파악이라는 것이 되는 것처럼 온 몸이 긴장하며 싸늘하게 굳으며 무뎌진 신경이 다시 곤두섰다.
 시대가 엉망으로 뒤섞인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느낌이 다시금 그를 감쌌다. 그들을 둘러싼 장소는 중세인 동시에 현대이기도 한 이상한 곳이었다. 안개에 젖은 가스등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처럼 푸른 새벽안개를 바탕으로 마이크로프트가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홍채와 동공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검어 소름끼쳐 보였던 그의 눈은 비쳐드는 햇볕 아래에서 보자 맑은 파란색이었다. 그가 기대선 아치형 돌문이 눈에 들어왔다. 웅크린 악마의 부조의 요철은 풍파에 시달려 흐릿하게 자취만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딕 양식 특유의 냉소적이고 오싹한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인 그것은 마이크로프트가 발산하고 있는 악마적인 분위기와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기이하면서도 오싹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진 것을 알아차린 마이크로프트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고양이가 아니고 당신도 쥐가 아니잖습니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겐 먹지도 않을 사냥감을 데리고 노리갯감으로 삼는 악취미는 없으니까요.”

 

 존의 무의식적인 우려를 정확히 간파한 말이었다. 너무도 정확하게 그의 속내를 짚어내었다는 것에 발끈하여 존이 대꾸했다.

 

 “제가 당신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그는 주의깊게 존의 면모를 찬찬히 살피고 신중하게 결론을 내렸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부인하는 그의 목소리는 고상하고 품위가 넘쳤다. 교육을 많이 받은 영국인만이 낼수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정교하게 조율된 악기처럼 감미롭기까지 했다. 그 달콤한 울림에 존은 압도당하는 자신을 느꼈다.
 어둑어둑한 정원 한가운데에 잠시 정적이 머물렀다. 마이크로프트는 아무 감정도 싣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존 왓슨 선생, 당신은 참으로 용감하군요.”

 

 존의 눈썹이 까딱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이크로프트는 말을 이었다.

 

 “용기란 무모함의 동의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이 든 뱀파이어의 물음은 어딘지 섬뜩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달관한 듯한 그 초연함이 존의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에 존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문했다.

 

 “무슨 뜻이죠?”

 

 날카롭게 되묻자,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젯밤의 일을 말하는 겁니다. 미궁처럼 얽힌 숲을 헤치고 단서 한 조각 없이 저택을 찾아나서는 모험을 감행하는 당신의 대담함은 절로 찬탄을 불러일으키더군요. 마치 용에게 사로잡힌 공주를 구하러 나선 용감한 기사나 할 법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악의를 품었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런 낌새를 은근히 풍기고 있었다. 고의적으로 그런 기색을 풍긴다는 것을 존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확실하게 알 길은 없었다.
 존이 말했다. 

 

 “제가 이곳을 찾아낸 것에 대해 탐탁찮게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오!”

 

 그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였다.

 

 “실상은 말입니다, 그 정반대랍니다, 닥터 왓슨. 그 반대라고요.”

 

 마이크로프트가 자못 인자한 태도로 웃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저는 셜록이 당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입장을 바꿔 말하자면 당신이 셜록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 정말이지 반가웠답니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등장이 아닙니까? 성탄절 전야에 다시 만난 운명의 두 사람!-끔찍하게 진부하고 신물이 날 정도로 통속적이지만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데에 대한 효과가 보증된 상황이지요. 그 애는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는 있지만 누구보다도 쉽게 그런 낭만에 매료되곤 하니까요.”

 

 지금까지의 적대적인 태도는 완벽하게 꾸며낸 것일까 싶을 정도로 환영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존은 어리둥절했다. 그의 장광설에 포함된 어휘는 하나같이 학구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었기 때문에 책에서 곧장 걸어 나온 사람이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침 저택의 생활이 지겨워질 때도 되었으니까 정말이지 시기적절했던 겁니다. 박수를 쳐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집요한 찬사에는 어딘지 비정상적인 데가 있었다. 존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마이크로프트를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존이 예상한 대로 마이크로프트는 잔잔하고-약간은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제가 어째서 이 모든 사실들을 가감 없이 알려드리는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마이크로프트는 더할 나위 없이 나긋한 설교조로 존에게 말했다.

 

 “진실로 신비한 것은 정체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모두 드러내는 법이랍니다. 설혹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낸다 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그 부분이 진정으로 신비함의 정수가 되는 것이지요.”

 

 존이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그는 사색에 잠긴 것과 같은 편안한 표정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중에도, 고목이 나이테를 더해가듯 햇빛은 시간의 줄기를 타고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워온다는 것을 깨달은 마이크로프트는 아치문을 넘어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언덕을 걸어가며 말했다.

 

 “아직 이해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저택의 후문으로 이어진 길로 걸어가는 동안에는 주욱 침묵이 이어졌다. 마이크로프트의 말이 존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마이크로프트가 털어놓은 모호한 진실은, 베일 뒤에서 움직이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처럼 흐리멍덩할 뿐이었다. 게다가 다시 만날 때까지, 라니. 그건 재회를 전제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존이 입을 열었다.

 

 “난…….”

 

 존이 입을 열자 마이크로프트가 멈추어 섰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마이크로프트가 물었다.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요?"

 

 왠지 모르게 허술하게 대답했다가는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존은 벌렸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정말입니까?”

 

 존은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존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듯, 당신의 까다롭고 솔직한 성정이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지요, 라고 마이크로프트가 속삭이며 혀를 찼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속삭임의 여운이 사라진 후 마이크로프트가 또박또박 말했다.

 

 “나라면 그런 방향으로 조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진심으로 충고합니다.”

 

 부드러운 어조임에도 불구하고 섬뜩한 무언가가 존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기에 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분명히 직접적인 악담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악의가 충분히 들어 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살짝 존을 향해 뒤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다시 뻣뻣하게 굳어버린 존을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이어나가며 마이크로프트가 사뭇 이해심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요. 한 번 더 생각해보세요. 성급하면 오히려 독이 되죠.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세요. 결심이 서면 다시 찾아오면 됩니다. 절대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충분히 가지세요.”

 

 중립적인 입장에 선 사람마냥 냉정하고 간결한 말씨였지만 말투가 모호하다는 점이 존의 육감을 자극했다.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찜찜했다. 마이크로프트는 그의 말처럼 존 자신을 썩 마음에 들어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존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점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데도 그는 셜록 때문에 존의 존재를 용인하고 있었다. 그는 대체 왜 셜록 홈즈의 존재가 이 저택에 붙박여있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것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이 문제는 충분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니까요.”
 “제 입장에서 본다면, 한 가지 관점으로 볼 수밖에 없을 텐데요?”

 

 존이 겨우 입을 열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방울뱀의 최면에서 풀려난 새처럼 끽끽거리는 것 같았다. 그야 당연했다.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는 쪽은 셜록이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그에 반해 마이크로프트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건 그 이상의 문제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신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완고하시군요.”

 

 존이 거듭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은근하게 위협하는 태도를 취하리라고 생각하고 존은 지레 몸을 굳혔지만 예측을 저버리고 그는 변함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은 곧 우리를 필요로 하게 될 거예요.”
 “왜 내가 당신들을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정말로 모르겠습니까?”

 

 그의 말이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존은 움찔했지만, 마이크로프트는 생각지도 못한 점을 지적했다.

 

 “셜록과 당신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요. 특히 권태와 안정에 지독한 염증을 느끼는 점이 말이죠!”

 

*

 

 저택 후문에 도착하자 셜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존을. 마이크로프트가 그에게 쓸데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냐며 경계 태세를 보이는 것에 마이크로프트는 언제나 그래왔다는 듯이 느물느물하게 화제를 돌리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이상하게도 존을 조금이나마 안심하도록 도와주었다.


 “어제 꽤나 힘든 방법으로 저택을 찾아오셨기 때문에 갈 때는 조금 편하게 가시라고 마차를 구했습니다. 셜록과 저는 여간해서는 저택 바깥출입을 하질 않는 터라 마차도 구비해놓지 않고 있었는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적당한 사륜마차 하나 정도는 들여야겠군요."


 암시적으로 존의 재방문을 권유하는 것에 존의 인상이 미미하게 구겨졌지만 옆에 셜록이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인지 마이크로프트와 존 모두 아까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셜록은 무언가를 어렴풋이 눈치챈 듯 눈빛이 날카로워졌으나 일단은 넘어가기로 한 듯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서 있던 이륜마차에 존이 올라탔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상당히 높게 떠올라 있었기 때문에 밤하늘을 수놓던 별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난 후였다. 때문에 셜록은 존을 배웅하고 나서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짙푸른 역광이 어려 검게 보이는 저택으로 향하는 셜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존은 무언가가 마차 창문을 톡톡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창문을 내렸다. 창문을 내리자 장우산을 손에 든 마이크로프트가 미소 짓고 있었다.


 “달리 뭐라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존이 입술을 달싹였으나 마이크로프트가 더 빨랐다.


 “답은 당신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존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극적인 반응이었으나 마이크로프트는 만족한 기색으로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부디 안녕히 가시길. 다음에 또 만나 뵙길 바라지요.”


 정중한 인사를 끝으로 마이크로프트가 손을 내밀었다. 진절머리 날 정도로 압박적이고 일방적이었던 대화를 얼른 끝내고 싶었던 데다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가 싶은 여상한 그의 태도에 존이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밀자 그가 난데없이 존의 손등에 키스를 해왔다. 메마르고 미지근한 감촉에 존이 앉은자리에서 펄쩍 뛸 듯이 놀라는 찰나 마이크로프트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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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요."

 

 응접실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존은 소스라치게 깜짝 놀랐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의 청년이 자신을 무감정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가 완전히 낯설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 달 만의 재회에 놀란 존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당황한 채로 황망히 서있는 동안 그는 천천히 가죽장갑을 벗고, 여미고 있던 코트의 세워진 목깃을 내렸다. 존이 들어오기 전까지 안에서 그다지 오래 기다리지는 않은 듯 그에게서 숨길 수 없는 바깥 공기의 찬내음이 풍겼다. 세웠던 목깃을 내리자 하얀 목이 드러났다. 겨울, 특히 눈이 내리는 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존은 그의 목덜미가 허전한 까닭이 지난 달에 있었던 '그 일'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그 날 겪었던 일이 단순히 꿈이었을 거라고 치부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로 아무 사건도 없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건만, 한 달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가 다시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까닭을 존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마치 한 달이라는 시간이 도살장에 끌려가기 직전의 짐승에게 주어지는 유예기간이 아닌가 싶었던 존이 남자의 방문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것에 불안해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태연한 표정으로 서슴없이 방 안으로 들어와 응접실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앉으시죠."

 

 그가 앉은 뒤에도 오랫동안 존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천연덕스런 어조로 의자를 권한 후에야 존은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고서도 한동안 입을 차마 열지 못하던 존이 용기를 내어 말을 붙였다.

 

 "어...어떻게 들어온 거죠?"

 

 존의 물음에 남자가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많이 놀라셨나요?"

 

 극도로 긴장한 존과는 달리 그는 이 만남이 무척 즐거운 듯 했다. 그러나 존은 섣불리 남자의 기분에 맞추어 놀아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눈앞의 그는 지금은 귀족적이고 세련된 태도를 지닌 신사였지만 언제 괴물로 돌변하여 자신의 피를 취하려 달려들지 도통 짐작할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존이 더욱 불안한 이유는 또 있었다. 이전에 있었던 일 이후로 존도 달리 조사를 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흡혈을 하는 존재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며 알게 된 것은 무엇 하나 확신할 수는 없는 것들 뿐이었으나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흡혈귀는 초대받지 못한 집에 발을 들일 수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응접실로 소리소문없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나마 존을 지금까지 편하게 잠들도록 해주었던 단 하나의 사실조차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음에 틀림이 없으므로 더욱 방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짧은 순간 후다닥 지나가는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으로 지속적인 경계 태세를 보이며 표정이 굳어있는 존을 지켜보던 그는 후후 웃으며 존의 질문에 답했다.

 

 "인간들에게는 애석한 일입니다만...우리들은 설화 속의 존재들과는 다르게 집주인의 초대 없이도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답니다."

 

 존의 가정을 확실시해주는 말이었다. 존의 표정이 미미하게 구겨지는 것을 바라보며 남자는 조용히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두는 편이 당신네들의 심신의 안정에 더 도움이 되겠지요."

 

 일단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있을테니까요, 하고 남자가 상냥하게 읊조렸다. 남자의 말에 존은 바람빠지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짓는 존의 얼굴이 지나치게 경직되어있다고 느꼈는지 남자는 가벼운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햇빛은 우리들에게 쥐약이나 마찬가지라는 건 사실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존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생각하던 존재가 맞다는 것을 알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느새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도 지우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옷차림의 신사는 실내의 따스한 불빛을 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가 노랗게 보이기는 커녕 실핏줄이 비쳐보일 정도로 하얬으며 뺨에는 온기라곤 없어 보였다. 시체를 제외하고는, 그가 본 사람중에서 가장 창백한 얼굴을 가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혈색이 창백한 경우 자칫 맥아리가 없어 보일 수도 있었으나, 남자는 그런 결점이 있음에도 유난히 우아해보였다. 그의 외양 가운데 특히 존의 마음을 잡아끈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언뜻 보면 엷은 농도의 무채색인 그것은 빛을 받을 때마다 신비로운 푸른색이 어린 채 반짝였다. 존이 그의 눈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린 이유는 단순히 빛깔만 출중한 점에서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예리한 지성의 눈빛때문이었다. 마치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한 매혹적인 보석같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그가 자신의 피를 강제로-정말로 강제였는지 존은 확신할 수 없었다-빨아마셨던 그때의 끔찍하고 음산한 괴물이라고 간주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러나 존이 그에게 느끼는 것은 매혹뿐이 아니었다. 공포. 그는 아직도, 여전히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을 뿐더러, 그가 풍기는 악몽처럼 스산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멀쩡한 사고를 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바깥에서는 은은하게 캐롤이 울려퍼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활기차게 거리를 활보하며 즐겁게 성탄절 전야를 보내고 있건만, 눈앞의 남자가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오싹한 고립감을 느꼈다. 마치 응접실만이 바깥 공간과 뚝 떨어져있기 때문에 외부의 흥겨운 분위기가 섞여들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마 지금 그가 거리로 나선다 해도, 주변을 응시하는 그의 눈짓 한번으로 웃음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인간다움과는 동떨어진 존재였다.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이끌림이라는 상반된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존을 바라보며 남자는 다리를 꼬고 있던 방향을 바꾸었다. 사각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잦아든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동안 많이 알아보셨겠지만...혹시 또 알고 싶은 것이 있으신가요?...닥터 존 해미쉬 왓슨."

 

 남자의 연보랏빛에 가까운 입술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담자 존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것처럼 놀랐다. 동요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이름은 어떻게..."

 

 내뱉어진 존의 물음에 그가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이름만 아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인도에서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부상때문에 의가사제대를 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는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지요."

 

 단 한 문장으로 명료하게 존의 이력을 읊어내는 남자의 통찰력에 존은 문득 자신이 처한 상황마저 잊고 솔직하게 감탄을 토했다.

 

 "굉장하네요."

 

 존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약하게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아까 보았던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듯한 미소가 아닌, 좀더 인간다운 느낌의 어떤 것이었다. 그것을 본 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으나 그 미소는 금세 스쳐지나가듯 사라져버렸다.
 잠시 그의 말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는데 문득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뱀파이어들은 모두 당신처럼 사람을 꿰뚫어볼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조사를 하신 건가요?"

 

 그의 물음에 남자의 입가에 불쾌한 기색이 여실히 느껴지는 차가운 웃음이 어렸다. 남자가 천천히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마련이죠. 선입관을 제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쉬운 말로 하자면-"

 

 남자가 처음에 보인 만들어낸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관찰이라고 하는 겁니다."

 

 부드러운 어조로 그가 말을 맺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요?"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조근조근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서 지나칠 정도의 격식이 느껴져 더욱 위화감이 느껴졌다. 존은 자신이 무언가 알지 못할 부분에서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을 눈치챈 이상 더이상의 섣부른 언동을 하지 않는 편이 상책이었으니까. 그러나 남자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끝마친 후로는 별달리 다른 말을 하고 싶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결국 존은 한없이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지난 번과 같은 용건이면 어떡하나 라는 생각에 걱정이 된 나머지 존은 말을 더듬을 뻔한 것을 간신히 평상시의 어투로 말할 수 있었다. 남자는 선선히 대답했다.

 

 "제 목도리를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그리고 사과를 하려는 목적도 있고요."

 

 사과? 존은 그가 사과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다는 것을 의아히 생각했다. 그러나 일단은 목도리를 돌려달라는 말에 존은 일단 서랍을 열어 잘 접어 고이 넣어두었던 목도리를 꺼내어 남자에게 건넸다.

 

 "가지고 있으셨군요. 다행이네요."

 

 그는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을 뿐이었으나 존은 어쩐지 목도리를 소중히 챙기고 있었다는 것을 들킨 것만 같아 묘한 가책으로 가슴 한쪽이 쿡쿡 찔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요를 애써 감추며 남자를 바라본 존은 목도리를 돌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에서 나가지 않는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또 다른 용건이 있으신가요?"
 "아까 말했듯이 사과를 드리려고 합니다."
 "무슨..."
 "그날 일 말입니다."

 

 그가 의미심장한 어투로 그 날의 사건을 짚어 말하자 존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우셨겠죠. 많이 놀라셨을테고요."

 

 안색이 바랜 존에게 그가 예의바른 어투로 말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당신을 엉망으로 내버리고 가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저도 그쪽 방면으로는 그다지 경험이 많지 않아서 당신에게 그런 일을 저지르고 나서 당황하고 말았거든요."

 

 존이 아 하고 남자의 말에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트를 여미고, 돌려받은 목도리를 목에 두른다. 존은 목도리를 두르는 그를 지켜보았다. 목도리를 목에 감고 그는 무언가 석연치않다는 듯 코를 몇 번 킁킁거렸다.

 

 "혹시 그날 이후로 이 목도리를 걸친 적이 있습니까?"

 

 갑작스럽고 뜬금없기까지 한 질문에 존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낮게 혀를 차며 말했다.

 

 "아쉽군요."

 

 무엇이 아쉽다는지 알 수 없었던 존은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존의 눈동자를 마주바라보며 남자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 냄새가 참 좋은데 말이지요."

 

 직감적으로 남자의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존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화악 붉어졌다. 그런 존의 표정을 본체만체하며 남자는 금세 미소를 지우고 혀끝으로 날카롭고 하얀 송곳니를 살짝 쓸었다. 그건 맛있는 요리접시를 앞에 두고 기다림 자체를 음미하면서 입맛을 다시는 행위와 같았다. 남자의 예의바른 태도에 잠시 망각할 뻔했지만, 그가 보인 무의식적인 행위는 존이 다시 그의 정체-인간을 먹잇감으로 삼는 포식자라는 것-를 깨닫는 데에 톡톡한 역할을 했다. 존의 얼굴이 다시금 하얗게 질리는 것에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존을 일별하며 나직한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응접실을 나섰다.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뒤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이유모를 아쉬움을 느낀 존이 그를 잠깐이나마 붙잡으려는 듯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끝인가요?"

 

 남자가 돌아서서 존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남자가 입술을 움직였다.

 

 "사과가 부족하신가요?"
 "아, 아니...그게 아니라..."

 

 존이 망설이다 계속해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더이상 만날 일은...없겠죠?"

 

 남자를 겨냥한 물음인지 자기 자신을 향한 자문인지 뉘앙스가 애매모호한 질문이었다. 존의 질문이 의외였는지 잠시 생각하던 그가 곧 미소지으며 답했다.

 

 "당신이 저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앞으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나긋하고 깊은 저음에 담긴 에로틱한 울림에 존이 저도 모르게 아...하고 탄성을 질렀다. 존이 무어라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이 남자는 끝까지 정중함을 잃지 않고 다시 고개를 숙인 후 응접실을 나갔다.

 

*
 

 꿈을 꾸었다.

 그는 또다시 칠흑같이 어두운 숲길 사이에 서 있었다. 마치 그날의 일을 재차 겪는 듯 뺨에 다가오는 바람 칼날 하나하나가 선명했다. 오래 걸어 피곤한 다리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둔통까지도 그날과 다름이 없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 온 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너무나도 실제적인 공간감과 당시의 장소를 그대로 옮긴 것처럼 생생한 풍경에 겁먹을 만도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존은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존은 이 꿈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맞았다.

 숲을 헤매는 사이, 다시 한 번 남자가 나타났다. 연기처럼 스르르 나타난 그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공기 중에 떠도는 남자의 알싸한 체취가 그를 더욱 강하게 사로잡는 것을 존은 느낄 수 있었다. 차게 풍겨오는 그의 향기에 존은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처럼 숨을 가쁘게 쉬었다.

 존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는 동안, 이전의 꿈에서 몇 번이고 그랬던 것처럼 그는 존을 제 품 안에 가두고 그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살갗을 꿰뚫는 것에 존이 신음했다. 느껴질리 없는 그의 존재의 흔적이 존의 몸 구석구석에 낙인찍힌 것처럼 되살아나며 강한 쾌락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꿈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속으로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초현실적이고 어찌 보면 과장되게까지 느껴지는 뜨거운 쾌감이 자신을 향해 몰려올 때면 존은 어찌 할 바 모르고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쾌감의 물결은 거센 파도처럼 점점 더 강하게 자신을 향해 부딪혀왔다. 존은 백사장의 모래알갱이처럼 힘없이 부서져 바닷물 속으로 서서히 쓸려내려갔다. 제어를 벗어난 몸을 물결치는 푸른 바다에 맡기고, 그는 차갑고 포근한 바다를 떠다녔다. 바다거품이 잘게 일었다가 보글거리며 사라진다. 움직이는 물결에 몸을 싣는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솨아아 하며 멀어진다. 물색이 깊어진다. 자신을 둘러싼 물이 연한 청록 빛에서 푸른 하늘빛으로 그리고 끝 간 데 모르는 남색으로 바뀐다. 더 깊은 곳으로 하강한다. 평온하다. 더 이상 아무런 잡음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 느릿느릿하게, 때로는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린다. 무겁게 무겁게 가라앉는다. 자신을 잃고 아래로, 아득한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지는 느낌에 존은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었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쳐내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눈발이 내리고 있다. 존은 비칠비칠 세면대로 걸어갔다. 중간에 한 번 넘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는다. 수도꼭지를 비틀어 연다. 쏟아지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았다. 그는 깨달았다.

 그에게 가야 한다.

 

*

 

 조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에 점차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북쪽 저편에서 다가온 거대한 젖빛 구름이 천천히 하늘을 덮었다. 강렬한 석양의 빛깔이 탁한 색조로 물들었다. 노 저어오듯 가만가만히 기어온 구름이 붉게 빛나다가 해가 지평선에 가까워지는 것과 함께 서서히 아래쪽부터 어두워졌다. 드리워진 커다란 구름의 그림자가 가장자리부터 진해지며 정원 위로 낮게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다.

 주홍빛의 황혼이 긴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희미하게 회색이 감도는 햇살이 내실의 커다란 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마이크로프트도 레스트레이드도 그것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자연스러운 침묵이 기분 좋게 두 사람을 감쌌다. 마이크로프트는 그날따라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는 공상에 잠겨 눈을 감은 채로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손가락을 까딱이고 있었다. 그로서는 몹시 드문 일이었다. 때때로-매우 계산적인 명목에서이기는 했지만-낭만이라는 것을 즐기기도 하는 마이크로프트와는 다르게 레스트레이드는 공상은 공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이크로프트가 무슨 생각에 그토록 골몰해있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고 또한 감히 짐작하려 들지도 않았다. 셜록이 자리를 비운 것과 연관되었을까 하는 가벼운 추측이 레스트레이드의 뇌리를 스쳤다.

 그때 마이크로프트가 눈을 떴다. 눈꺼풀을 가볍게 올려 뜬 그는 검푸르게 변한 구름이 멀리 있는 숲의 뾰족뾰족한 모서리를 스멀스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며 다소 경쾌하게 입을 열었다.

 

 “눈이 올 것 같군요.”

 

 셜록이 존을 방문하기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

 

 북부 런던의 교외지역의 외곽으로 빠져나갈수록 인적은 드물어지는 대신 포장도로가 없는 공터가 눈에 띄는 횟수가 빈번해졌다. 마지막 포장도로가 끊긴 흙길을 더듬어나가자 곧 히스가 무성하게 돋아난 채로 방치된 불모지, 그리고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숲과 그 사이로 난 길이 나타났다.

 존이 숲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해가 다 지고 난 후였기 때문에 언덕진 길 너머에는 짙게 어둠이 서려 한층 더 음산해보였다.

하늘에는 구름이 두텁게 깔려있었으며 달은 여전히 기를 펴지 못하고 간간이 몇 가닥의 빛만 뿌리며 스쳐갔다. 그렇게 빛 한 줄기 들이치지 않는 시커먼 숲의 안으로 발을 들인다는 것은 웬만한 강심장이라도 꺼릴 일이었으나, 존은 무엇에 홀린 것처럼 숲 속에 난 길을 따라 무작정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숲 안쪽은 생각 외로 밝았는데, 그 이유는 나무가 무성하지 않고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숲길의 트인 부분의 하늘로 설핏 내리쪼이는 별빛에 비친 수천 그루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음침한 잿빛을 띠고 있었고 이따금 나뭇가지에 달린 수백만 개의 잎사귀가 바람에 일렁이며 은빛으로 빛났다. 침엽수 특유의 가느다란 잎사귀에는 간간이 서리가 맺혀 흔들릴 때마다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부서져내렸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나무들의 밀집도가 높아지며 존이 가는 길가를 겹겹이 둘러친 나무들은 주위를 벽처럼 뒤덮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발에는 촘촘하게 자란 들풀이 덫처럼 얽혀오는 바람에 헛발질도 수차례였다. 숲 전체가 늪처럼 그를 가두어왔다.

 숲 가운데 완전히 그늘진 한 곳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수백 미터에 걸친 검은 숲이 바람결에 흔들려 흑해의 파도처럼 쓸쓸한 소리를 울리자 존은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때까지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져 있었던 존이 놀라 고개를 들자 탁한 파란색과 초록빛이 엉긴 청회색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을 가리던 구름은 점차 자리에서 비켜나고 있었고 그 틈새로 경직된 별빛들이 깨진 얼음조각처럼 간신히 스며나왔다. 먹구름을 뚫고 나온 달빛은 무척이나 쓸쓸해서 길을 밝히는 한편으로 음울한 정취를 더해갔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의 하부를 방황했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존 앞에는 굽이진 길목이 있었다. 그때 남자와 조우했던 장소가 여기였던가? 사실 그는 이 길을 지났었는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바람도 잦아들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오싹함은 더해만 갔다. 죽음처럼 조용한 숲 한복판에 서 있자니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무서워서인지 추위 때문인지 존의 몸에 덜덜 떨렸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 누군지도 모르는 이를 찾기 위해 질퍽이는 어둠 속을 배회하는 무의미한 일에 발을 들인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된 존이 막 뒤로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나무둥치와 나무줄기가 엉킨 듯 보이는 어두운 저편에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렸다.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춘 존은 그 남자일까 하고 생각했다. 자신을 부르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당장 떠오르는 가능성만 해도 무궁무진했다. 자신의 발걸음소리가 메아리친 것을 착각한 것일 수도 있으며, 순전히 그를 만났으면 하는 자신의 염원이 지어낸 소리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존은 그 희미한 소리에 약간의 기대를 걸어보기로 하고 다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꺾인 모퉁이를 돌자 끝없이 이어진 듯했던 나무들의 무리가 갈수록 듬성듬성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꼭 누군가가 정돈이라도 한 것처럼, 아까까지만 해도 길 한가운데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자란 히스 덤불은 길과의 경계를 뚜렷이 하고 있었으며 숲 가장자리에 다다를수록 키 큰 나무들은 드문 대신 작은 관목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갑자기 숲길이 뚝 끊겨 탁 트인 황야로 나온 존은 밝은 은빛으로 물든 풍경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불빛은 저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둠이라는 불협화음에 막 익숙해졌던 눈이 다시 밝은 불빛을 접하자 오히려 적응이 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저 멀리 무채색의 달빛 아래 푸르게 빛나는 신비스러운 저택을 마주하자 존은 마치 동화 속에 빨려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미로의 막다른 길에 자리한 것처럼 존의 시야를 꽉 채운 저택과 정원에서 밝힌 불빛이 더하여갈수록 막막했던 어둠이 걷히고 푸른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빛이 지금까지 죽 이어져왔던 강렬한 음습한 분위기를 망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눈앞의 저택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느낌은 단적으로 수려한 경관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겁게 패여 있는 세월의 주름과 차분하게 갈무리된 채 내려앉아있는 귀족다운 긍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저택 주변에는 몇 번이고 부수고 고쳐 지은 흔적처럼 군데군데 폐허의 잔해가 보였고 가파르게 뾰족한 지붕의 첨탑이 반쯤 부서진 채로 남아있었다. 조각난 채 파편만 남아 거꾸로 처박혀 있는 연록색의 석판은 비바람을 맞아 색이 한껏 바랜 데다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보이기까지 했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그러나 지은 지 백년은 족히 지났을 저택은 성을 왼편에 두고 있었는데, 가라앉은 회색으로 어슴푸레하여 옛 성보다도 못하게 희미해보였다. 안개처럼 몽롱한 저택이 환각이 아닌 실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등지고 있는 숲이었다. 저택의 뒷배경으로 그림자처럼 자리한 숲은 저택과는 대조적으로 수많은 갈가마귀 떼가 무리지어 모인 듯 새까맸다. 빛과 그림자, 고저택과 달, 바람과 별-그 모든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결과 저택은 비밀스럽고 쓸쓸한 인상을 풍겼다.

 더없이 아름답고도 황폐한 저택을 바라보며, 구름도 거진 다 걷힌 하늘에 뜬 달이 사위를 환하게 비추는 아래에서 우뚝 선 채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존의 앞에 기다렸다는 듯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는 검은 머리칼에 핏기 없는 뺨을 하고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거울에 반사된 환영을 보는 것처럼 검정 고수머리, 흰 얼굴 윤곽만 간신히 분간이 가는 정도였으나, 망자와 같은 납빛의 안색이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등지고 희끄무레하게 빛났다. 생기가 다 빠져나간 듯 창백한 얼굴의 남자는 그러나 무감각하게 죽어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눈만은 모종의 열정을 간직하고 이채를 띤 채였다. 그는 애원하는 듯한 태도로, 사뭇 우울하고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서 존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존의 피를 마시는 데에 대한 동의를 구하려 안달하는 것처럼 그는 존에게서 연민이라는 감정을 강요하고 있었다.

 존은 밤보다도 더욱 어두운 침묵 속에서 그를 무심히 비켜보았다. 그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은 탓일까, 아니면 그도 모르게 인근의 우울하기 그지없는 공기의 떨림에 감화된 탓일까. 존이 그 자신이 제삼자가 되어 멀리서 추이를 지켜보는 것처럼 별다른 감흥 없이 남자의 흐릿한 실루엣을 바라보는 동안 남자는 존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길게 자란 잔디가 그의 발밑에 채여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할 것 없다는 듯 느긋한 걸음걸이였다. 그러나 존에게 그의 존재는 마음 놓고 지켜볼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그가 존에게로 가까워올수록 존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며 본능이 막연한 불안감을 호소했다. 그건 천둥이 치기 직전의 고요한 긴장감과도 비슷했다. 어서 피하라고, 그에게서 멀리 멀리 달아나라고 힘껏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존은, 대체로 그러한 본능적인 직감을 신뢰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에게서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존은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일정하고 규칙적인 속도로 거리를 좁혀왔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그는 존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이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빛에 찔려 죽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홉 발짝. 열 발짝. 열한 발짝. 열두 발짝.

 둘 사이의 거리는 팔을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로 좁혀져 있었다. 때문에 푸르스름한 물이 든 유리같이 맑은 눈이 또렷하게 존을 응시하는 것이며, 환상에 취한 듯 확장된 동공이 미묘한 감수성에 젖어 흔들리는 것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의 존재감은 새벽별처럼 흐릿해졌고, 오로지 그만이 존의 앞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먹구름이 달을 스치며 사위가 캄캄해졌을 때 남자는 존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내디뎠다. 두려웠다. 그에게 이끌리면서도 그에게서 풍기는 지독한 냉기에 심장까지 성에가 끼고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남자가 손을 뻗어 겁에 질린 존을 끌어안았다. 존은 놀랍도록 손쉽게 그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그 순간 구름이 지나가며 달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중천에 뜬 달은 그 어느 것보다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시각각 달빛의 세기가 강해지며, 사위가 온통 선명한 은빛 광채로 물들었다. 존은 달빛에 환히 드러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또한 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남자의 눈동자가 그에게 마법이라도 건 것처럼, 그의 눈동자에 사로잡힌 존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꼼짝없이 남자에게 잡힌 존은 남자의 눈동자가 서늘한 열기를 띠고 바짝 다가오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조심스럽게 존에게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닿은 입술이 존의 다물린 입술을 살며시 열고 혀를 얽어왔다. 유령에게 홀린 듯 존은 그에 순종적으로 응했다. 이미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듯, 존은 그의 숨결이 뜨거운지 차가운지도 느낄 수 없었으며, 제 입술에 부비어 오는 그의 입술이 불타는 듯 뜨거운 것인지 아니면 얼음장처럼 차가운지도 몰랐다. 그의 손가락이 그의 허리를 붙잡아 오는 감각은 너무나도 선명했으나 한계 이상으로 전해져 오는 느낌에 그의 허리가 화염에 불태워진 듯, 또는 서릿발이 파고든 맨살에 동상이 걸린 듯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존의 수용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길고 긴 키스마저 그랬다.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사랑처럼, 지상에서 영원까지 죽 이어지던 키스는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으나 허무하고 잔잔하게 잦아들었다. 존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처럼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남자는 존의 뺨과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키스로 온기를 되찾은 따스한 입술이 존의 목덜미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목에 이른 입술은 금방 떠나갈 것처럼 느껴졌으나 오히려 아까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애무의 여운에 휩쓸린 존은 그의 이빨이 자신의 살갗을 파고드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듯 셜록이 존을 좀 더 세게 끌어안고, 동시에 이빨을 더욱 세게 박았을 때 치닫던 쾌감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고통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존은 목이 졸린 듯 가늘게 흐느꼈다. 숨결이 높아졌다가 푹 꺼지듯 가라앉았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내리는 꽃잎처럼 그는 끝없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심한 경련과 함께 존은 감각과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잃긴 했으나 간간이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했다. 고장 난 영사기처럼 간헐적으로 빛과 암전이 이어졌다 끊어지곤 했다. 흐릿한 시야에 남자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뭔가를 반추하는 듯 심각하고 무섭기까지 한 표정으로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존은 왜 그러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몸은커녕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기억과 망각의 사이를 오가면서도 존은 그의 입맞춤을 또다시 갈망하고 있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남자가 자신을 들쳐 안은 채로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존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그 미약한 움직임을 알아차렸는지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존이 힘들어하자 남자는 존을 자신의 품에서 내려놓았다. 잠시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되찾자 남자는 잠시 걱정이 어린 듯한 눈으로 존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앞장섰다. 존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말없이 암록색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흑백의 타일이 깔린 복도가 나타났다. 호박색 불빛이 그들의 앞길을 밝혔다. 그에게 이끌려 가면서도 억지로 끌려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인양 존은 말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느껴지는 터무니없는 비현실감과 꿈결처럼 아련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모든 일련의 상황을 그가 납득할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정말로 꿈일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남자가 발을 멈추었다. 멈춰선 자리에서 존을 흘깃 쳐다본 남자는 닫힌 문을 열었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문이 열리며 방 안에 떠돌던 밤공기가 복도로 밀려나왔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존을 쳐다보았다. 돌아가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듯, 잠시 존을 바라보며 숨을 돌리던 남자는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존은 낮게 코웃음 쳤다. 선택권을 주겠다는 듯 존에게 마지막 한 걸음의 결정을 떠넘기는 그의 태도가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돌아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존은 망설임 없이 그의 뒤를 따라들어갔다.

 

*

 

 낮은 격자무늬 창으로 을씨년스러운 은회색의 달빛이 간신히 스며들어왔다. 지금까지 미처 눈치채지 못했으나 하늘에서는 눈발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작은 격자창을 통해 비추이는 침울한 빛깔의 별빛이 겨우 방 안에 들어찬 어둠을 밝히는 정도였다. 달빛보다도 흐릿한 빈약한 햇살이 삼백년 전의 볼품없는 가구에 들이쳤을 광경을 그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방은 지나치게 천장이 높아 불균형한 조형감이 몹시 불안정했다. 장식품 하나하나는 아름다웠으나 멋대로 쑤셔박아놓은 것처럼 조야한 배치로 놓여있었다.

 세련되지 못할 뿐더러 투박하고 침침하기까지 한 방의 한가운데에 선 존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요?”

 

 미약했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이건 불공평해요.”

 

 당혹스런 듯한 목소리였다. 남자가 조용히 되물었다.

 

 “뭐가 말인가요.”

 

 존이 눈을 불안하게 깜박이다가 말했다.

 

 “난…아직 당신의 이름도 모른단 말입니다.”

 

 존이 쥐어짜내듯 소리쳤다.

 

 “반면에 당신은 나에 대해 뭐든 알지 않습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중얼거리듯 이었다.

 

 “정말로 모르겠다고요.”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혀끝이 건조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 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용기를 내어 가슴 속 깊이 자리하던 의문을 토로했다.

 

 “왜 내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 거지요?”

 

 질문하는 그의 목소리는 자제되어 있었으나 어딘지 불안정하고 날카롭게 들렸다. 길고 긴장된 공기가 방 안을 흐르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겨울바람이 스며드는 싸늘한 방 안에서 어스레한 달빛에 둘러싸인 남자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나직하고 느릿하게 목소리가 울렸다.

 

 “-나에 대해서 궁금해 하기를 바랐으니까요.”

 

 언뜻 보기엔 우월감에 가득 찬 듯 오만한 말투였으나 존은 어렴풋하게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말의 의미를 짐작해낼 수 있었다. 자신이 줄곧 느껴왔던 초조함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또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자신의 목줄기를 뜯어낼 수 있는 흡혈귀인 그도 존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 또한 두려웠던 것이다.

 

 눈이 더욱 심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창으로 눈송이들이 달려와 유리창을 때렸다. 굵은 눈이 창문을 이따금 뒤흔들었다. 방 안에 유일하게 켜져 있던 자그마한 초의 심지가 바닥까지 다다르며 불꽃이 깃발처럼 흔들렸다. 조그만 불빛에 비친 존의 눈에는 엄연한 공포심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두려워 떠는 순간에도 기이하고 모순된 감정이 존을 사로잡았다. 존은 떨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이름을 말해줘요.”

 

 남자가 존을 응시했다. 존은 거침없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눈빛에서부터 곧장 느낄 수 있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공포와 혐오가 뒤섞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미묘하면서도 격렬한 흥분이 그의 사지를 내달렸다.

 자못 엄숙한 태도로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은 셜록 홈즈입니다.”

 

 존이 그 이름을 또박또박 되뇌었다.

 

 “…셜록 홈즈.”

 

 그의 이름을 따라 말하는 존을 바라보는 셜록의 여윈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으나 꽤 만족스러워하는 인상이었다. 실제로 셜록은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 존의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고 혀로 굴리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셜록이 말했다.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불러줘요.”

 

 셜록이 요구했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거칠게 엉켜들었다. 방 안은 분명 추웠으나 두 사람을 감싼 공기는 열기를 띠고 있었다. 존은 숨을 한 번 들이켜고, 토해내듯 말했다.

 

 “셜록.”

 

 그 이름을 부름으로서 마지막으로 그러모았던 존의 이성이 송두리째 허물어졌다. 이제는 반항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자신이 그러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동물적인 육감으로 그것을 알아차린 셜록은 존을 그의 침대에 부드럽게 눕혔다. 매끈하게 덮여 있던 남색의 벨벳 침대보가 존의 실루엣을 따라 숙 꺼져들며 가장자리에 달린 금색 술이 화려하게 흩어졌다.

 존의 위에 올라탄 셜록은 무릎을 꿇고 몸을 수그렸다.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존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는 역겹지만 동시에 황홀하기도 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메마른 입술을 핥는 그의 모습에는 다분히 의도적인 관능미가 있었다. 은회색의 달빛을 등진 그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하얀 이와, 그것을 핥는 촉촉한 붉은 혀가 보였다. 먹잇감을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표범 같았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살짝 벌린 채 다가온 입술이 존의 목덜미 위에 멈추었다. 존은 그의 목에 닿는 셜록의 뜨거운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진홍색의 혀가 자신의 치열을 쓸어내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각성제처럼 존의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웠다. 셜록이 천천히 존의 목에 입을 맞췄다. 극도로 민감해진 목의 얇은 피부 위로 그의 입술이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러웠다. 입술이 열리며, 그 안에 도사린 두 개의 단단한 치아 기둥이 이제 막 존의 목을 건드렸다가 존이 움찔거리자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기력을 빼앗기는 듯 온몸이 느른해져왔다. 그의 생명력이 셜록에게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당연하게 예비되어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마땅한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존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나른한 황홀경 속에서 눈을 감고 기다렸다.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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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