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높은 창문 위로 빛이 쏟아지고 있다.
당신의 엄숙한 얼굴 역시
둥근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조용한 은빛 달이 이토록이나
나를 감동시켰던 밤은 없었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노래 중의 노래가
말할 수 없이 감미롭다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잠자코 있다 나도 잠자코 있다
침묵 또한 빛 속으로 사라져 갔다
호수 위 한 쌍의 백조와 머리 위의 별 외에는
달리 생명 있는 것이라곤 없다

 

당신은 창문으로 몸을 내밀었다
당신이 내민 손과
당신의 가는 목덜미를
은빛 달이 곱게 물들였다.

 

-헤르만 헤세

  

 

 저택에 들어서면서도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이 지금 마이크로프트를 찾아가는 것이 올바른 처사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고뇌를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레스트레이드는 걸음을 멈추었다. 멈춰선 그의 뒤로 앙상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챙 하는 쇳소리가 그를 떠밀듯 울렸으나 레스트레이드는 못박힌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망설임은 마이크로프트에 대한 너무나도 깊은 그리움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 지 그는 가늠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마음 속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오랜 시간동안 뱀파이어들과 가까이 지내온 레스트레이드는 그들의 특성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이 때때로 특정한 사람에 대해 사랑과 비슷한 열정에 사로잡히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열정의 대상이 되는 이를 뱀파이어들은 '죽음의 신부'라고 칭했다. 뱀파이어들이 죽음의 신부를 맞이하게 되면 결과는 대체로 두 가지였다. 죽음이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거나, 아니면 언약과도 같이 죽음으로 맺어지거나. 확률은 반반이었다.
 섬약한 뱀파이어들은 마음에 둔 인간의 죽음에 크게 상처입고 그를 따라 소멸을 택하거나 한동안 광란의 발작 또는 깊은 토퍼(수면)에 빠져드는 것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했다. 인간을 동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엘더와 프린스의 허락을 받는 등의 만만치 않은 절차를 필요로 했으나 또한 많은 뱀파이어들이 택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그들의 사랑을 깨뜨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권태였다. 오랜 세월을 누리는 그들은 쉽게 서로에게 질렸고 끝은 좋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였다. 레스트레이드는 반세기 남짓밖에 살지 못한 인간이었으나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많은 뱀파이어들이 그렇게 하찮고도 지저분한 감정 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자주 보아왔다.
 마이크로프트가 내놓고 말을 하진 않았으나 레스트레이드는 그가 하고 많은 인간들 중에서 자신을 유별나게 아끼는 이유가 자신이 그의 죽음의 신부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레스트레이드는 또한 그가 자신에게 영생을 선사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뱀파이어가 인간을 혈족으로 변화시키는 순간을 그 인간이 가장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시기를 골라 택했으며 레스트레이드 자신은 이미 젊음을 잃은지 한참도 더 지난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불멸의 동반자로 삼으리라는 희망을 오래 전부터 저버리고 있었다.
 한때는 그와 영원을 살아가리라는 치기어린 희망을 품기도 한 그였지만 이제 현실과의 타협이라는 것을 할 줄 알게 된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먼저 자신을 저버리지 않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3개월 전 주제넘게도 마이크로프트에게 투정을 부리듯 화를 내고 그의 곁을 떠난 자신이 이제야 그에게 돌아간다고 해서 그가 과연 기뻐할 것인가? 천성이 냉정한 데다 자기자신에 대한 자긍심으로 충만한 마이크로프트를 떠올리니 그가 돌아온 자신을 다시 받아줄 것이라는 것에 대해 점점 자신감이 사라졌다. 냉대를 받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미 그는 자신은 안중에도 없을지도 모른다. 다른 인간을 총애하고 싱싱한 젊은이를 골라 그의 피를 맛보는 데에 맛들였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옅어진 레스트레이드는 지금이라도 저택을 나가 모습을 감추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련이라는 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미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이 저택 안으로 들어온 것을 눈치채었을 터, 조금만 더 머무르며 그가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려도 무리한 선택은 아닐 것이다, 라고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의 미련을 합리화하며 한옆에 정원을 향해 발을 돌렸다. 그러나 초겨울 날씨에 이미 혹사당한 바깥쪽 정원에는 추위에 강한 관목만 흔적처럼 남아있었고 그나마도 무성히 자라 야생의 수풀과 별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래서야 정원을 구경한다는 핑계도 댈 수 없겠군, 하고 자조하던 레스트레이드가 무심코 고개를 돌린 곳에는 새장처럼 서있는 유리온실이 보였다. 흐린 유리창 너머로 홍조처럼 붉은 빛깔이 언뜻 보이는 것에 레스트레이드는 그 안으로 향했다.

 

 온실을 들어서자마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풀내와 잔향처럼 남은 장미향기가 레스트레이드를 감쌌다. 안은 전혀 손질되지 않은 장미넝쿨이 엉망으로 엉켜 무턱대고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꽃송이를 떨어뜨리지 않은 몇 떨기의 장미가 남아 최소한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버려진 지 오래되어 퇴색할 대로 퇴색한 정원의 모양새와 동질감을 느낀 레스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정원 안을 거닐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의 자태가 피어있던 모양 그대로 시들어버린 듯 바랜 주홍색의 장미가 레스트레이드가 뻗은 손가락에 닿아 바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간신히 붙어있던 꽃잎을 떨구었다. 반쯤 시든 장미향의 관능에 취한 레스트레이드는 머리가 아찔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꽃향기로 가득한 곳에 오래 있으니 현기증이 일었다. 레스트레이드는 아파오는 머리를 무시하고 마이크로프트가 결국엔 와주지 않으려나 하고 온실 안을 초조히 거닐었다.

 

 "오랜만이예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온실 내벽을 울렸다. 레스트레이드는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향한 곳에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마이크로프트가 서있었다.
 은거하는 동안 수심에 잠기지나 않았을까 걱정했던 레스트레이드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그의 핏기도 홍조도 한 점 없는 이목구비는 여전했다. 온 몸에 배인 위엄도 조금도 퇴색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전히 퇴색해버린지 오래된 정원 한복판에 결코 퇴색하지 않는 우아함을 지닌 남자가 서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이러닉했다.
 레스트레이드가 떨리는 입술을 열려다가 다시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마이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못 본 사이 수척해졌군요."

 

 지극히 일상적인 말을 차분한 어조로 말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의 얼굴에 드리운 일말의 순결한 우울과 애절한 고뇌로 말미암아 매우 중요한 듯한 울림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레스트레이드는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고 마이크로프트의 생기를 잃은 붉은 입술도 이윽고 닫혀버렸다.
 재회의 순간을 기쁨이 아닌 무겁기 그지없는 침묵이 점령하고 말았다. 악마의 저주처럼 그들을 짓누르는 침묵의 그늘을 미처 걷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길고 긴 시선의 조우 끝에 레스트레이드가 먼저 눈을 돌렸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레스트레이드가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강하시니 되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레스트레이드가 몸을 돌려 온실을 나가려는 것을 마이크로프트가 가로막고 말했다.

 

 "내 안부만을 확인하러 온 건 아닐텐데요?...그렉."

 

 망설이다 뱉어낸 이름에 더이상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레스트레이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반복하여 말했다.

 

 "그것뿐입니다. 그것뿐이라고요."

 

 마이크로프트는 흠씬 두들겨맞은 어린애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레스트레이드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열려던 마이크로프트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억지로 자신을 외면하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한 레스트레이드를 한동안 응시하던 마이크로프트가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정말로 납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레스트레이드의 속마음을 마이크로프트가 입 밖으로 내어버린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을 없을 것이었으니까. 레스트레이드는 안도섞인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간다고요, 그렉?"

 

 또다시 이름을 불러온다.
 레스트레이드는 더이상 마이크로프트를 피하지 못하고 그와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긴 했으나 어깨를 간헐적으로 떨고 있는 레스트레이드에게 마이크로프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알 수 없는 눈길로 레스트레이드를 바라보던 그는 눈앞의 반백이 다 된 남자를 품에 안았다. 난데없는 포옹에 레스트레이드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가 꼼지락거리던 손을 살그머니 올려 마이크로프트를 마주 안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은 정말 어렵군요."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표정을 보려 했으나 마이크로프트는 팔의 구속을 풀지 않았다.
 일일천추라고 했던가.
 그를 만나지 못했던 삼 개월은 오랜 기간을 살아온 마이크로프트에게도 고문과 다름이 없는 시간이었다. 마치 존재의 한 조각이 영영 떨어져나간 것처럼 활기도 의욕도 없는 하루하루는 그 이전까지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을까 싶을 정도로 공허한 시간들이었고, 마이크로프트는 권태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버렸던 수많은 기억 속의 혈족들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부유감을 떠안고 간신히 시간을 흘려보내던 중, 레스트레이드가 저택에 당도한 순간이 되어서야 마이크로프트는 다시 능동적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자각하자 씁쓸한 조소가 치밀었다. 그렇게 자기혐오의 감정이 들면서도 레스트레이드를 막상 품에 안으니 이렇게 기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이크로프트의 심정을 더욱 착잡하게 만들었다.
 무슨 심경에서 하는 말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모호한 어조로 마이크로프트가 레스트레이드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이 나를-자신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지요."

 

 간접적으로 레스트레이드에게 그 자신이 그의 속내를 파악했음을 알리자 마이크로프트에게 안길 때부터 빨라진 심장의 고동이 한층 더 빨라졌다. 레스트레이드가 오길 기다리며 저택의 불을 밝힌 마이크로프트. 일부러 저택이 아닌 정원으로 발길을 돌린 레스트레이드. 결국 레스트레이드가 있는 곳으로 움직인 것은 마이크로프트가 먼저였다. 그것을 지금 굳이 언급한 이유는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레스트레이드에게만큼은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것을 은밀히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레스트레이드의 두 뺨에 홍조가 몰렸다. 사탕발림과도 같이 달콤하기만 한 그의 속삭임에 레스트레이드는 그가 지금 하는 말의 진실성에 대한 불안함을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었지만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을 먼저 찾아주고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레스트레이드를 감격하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에 따라 소심하게 손을 등 뒤로 올리는 것에 불과했던 그의 포옹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그런 한없이 순수하고 솔직한 그를 꼭 안은 채로 마이크로프트는 야비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띠었다. 지금 이 순간 끔찍하고 기괴한 소유욕으로 얼룩졌을 자신의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는 좀더 단단히 그를 끌어안았다. 레스트레이드는 한낱 보잘것없는 인간에 불과했으나 그가 힘들여 자신을 향한 마음을 토해낼 때 마이크로프트는 어디에서도 그보다 더한 희열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레스트레이드를 안심시킬 수 있는 자신의 친절하고 상냥한 가면을 계속해서 덮어쓰고 있기로 했다.
 레스트레이드의 등을 쓸어내리며 마이크로프트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들어요."

 

 새빨갛게 되었을 얼굴을 들기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쳐들게 한 후 그 입술에 부드럽게 입맞추며 마이크로프트가 속삭였다.

 

 "나의 그렉..."

 

 마이크로프트의 속삭임을 들은 레스트레이드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에게 짧은 키스를 한 마이크로프트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그에게 키스했다. 수줍지만 분명히 적극적인 몸짓으로 레스트레이드가 화답했다.
 신사적인 입맞춤으로 시작되었던 키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스트레이드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깊어졌다. 오랜만에 맛보는 입 안의 점막을 하나하나 느끼려는 것처럼 깊숙이 혀를 집어넣은 마이크로프트는 입 안에서 난폭하게 분탕질을 쳤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것처럼 진득한 키스가 이어졌다. 간간이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마이크로프트가 나의 그렉, 을 연신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소유를 재확인하듯 연신 낭만적인 속삭임을 퍼부으며 마이크로프트는 키스를 계속했다. 집착처럼 끈질기게 이어지는 입맞춤에 숨이 가빠온 레스트레이드가 잠깐, 하고 고개를 뒤로 물리려고 했지만 마이크로프트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오히려 바들바들 떨리는 그의 구강 점막을 한계까지 유린하는 데에 집중했다.
 호흡의 주도권마저 마이크로프트에게 박탈당해 힘이 빠져 축 늘어진 레스트레이드를 지탱하듯 안고 마이크로프트는 만족스럽게 키스를 마치고 입술을 떼었다. 사랑스럽다는 듯이 레스트레이드의 뺨을 어루만지며 마이크로프트가 못박듯이 말했다.

 

 "당신은 내것이지요?"

 

 키스의 여운으로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레스트레이드가 대답했다.

 

 "...네."

 

 솔직한 대답에 마이크로프트가 미소지었다. 웬만해서는 개인적인 희노의 감정이 얼굴에 나타나는 일이 적은 마이크로프트로서는 커다란 감정 표현인 셈이었다.
 온실 안으로 은은한 달빛이 들어와 두 사람을 감쌌다. 달빛을 따라 더욱 농도를 더했을 고독의 유혹은 이제 간데없었다. 대신 마이크로프트는 아직도 헐떡이는 레스트레이드를 끌어안고는 달이 완전히 기울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가 회포를 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장미 온실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달빛의 파도가 흠뻑 적셨다.

 

*


 아침이 가까워왔고, 레스트레이드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피를 빨린 목덜미가 욱신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사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둔통이 더 심했지만 그건 달리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밤의 행위를 되새기듯 허리를 살살 매만지며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의 옆에 누운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흡사 죽은 사람처럼 숨도 쉬지 않고 얌전히 누워있는 마이크로프트의 모습은 레스트레이드에게는 익숙하면서도 굉장히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다정한 시선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던 레스트레이드는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저택 복도에 햇빛이 비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저택의 주인이 뱀파이어이니만큼 아침이 되기 전까지 반드시 저택 안으로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으나 간밤에 문을 열어놓고 닫는 것을 잊어버렸는지 지금 저택 안으로는 여느 인간들이 사는 곳처럼 무방비하게 햇빛이 쏟아져들어오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레스트레이드는 급히 침대에서 내려서다 허리를 삐끗할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일어선 그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옷을 줏어 대충 걸치고 방을 나서려다 무언가를 기억해낸듯 다시 뒤돌아서 마이크로프트가 누워있는 침대로 향했다. 흡혈의 효능으로 약간 발그스름하게 혈색이 도는 마이크로프트의 뺨에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입을 맞춘 레스트레이드는 시트를 끌어당겨 그를 덮어주고 침대 매무새를 다듬어주는 것까지 끝마친 후에야 방을 빠져나갔다.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젖혀져있는 커튼을 하나하나 닫던 레스트레이드가 문득 그 자리에 멈춰섰다. 깊은 밤 등 뒤에서 신경을 묘하게 곤두서게 만드는 이상한 기척이 바스락바스락 들려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방 안의 분위기가 으슬으슬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간임에도 오한이 든다는 것은 확실히 기이한 것이었기에 레스트레이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한 차례 몸을 떨고 다시 손을 움직여 열려있던 마지막 커튼을 틈새 없이 여몄다. 커튼을 닫고 뒤로 돌아선 레스트레이드는 그제서야 그가 이유모를 불안감을 느끼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셜록 홈즈. 마이크로프트의 호의를 입어 저택에서 함께 지내게 된 신생 뱀파이어. 언제나 활력없이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흘깃 바라보고 지나치던 남자가 어째서  지금 자신의 뒤에서 수상쩍은 눈빛을 보내오고 있는지 레스트레이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물건을 품평하듯 위아래로 자신을 훑어보는 셜록의 시선에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레스트레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그의 나이가 분명 자신보다 어리다는 것을 레스트레이드는 알고 있었지만 그는 엄연히 포식자의 입장이었고 자신은 그 반대의 입장이라는 것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행동일 것이라고 결론지었고 따라서 셜록에게 다소 과도할 정도로 예의를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당황하지 않고 자신을 마주 바라보며 태연하게 말을 거는 레스트레이드의 의연한 대처에 셜록이 오히려 당황한 듯 잠시 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배가 고픈데요."

 

 그가 입을 여는 순간 훅 끼치는 피냄새에 레스트레이드가 본능적으로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기묘하고도 따뜻한 냄새가 짙게 풍겨왔다. 왜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도록 진한 피냄새였다. 급작스레 변하는 상황에 위기감이 든 레스트레이드는 기민한 관찰력을 동원해 멀리 떨어져 있는 그를 관찰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가 매끈한 돌바닥에 남긴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피바다에 푹 빠졌다 나온 것처럼 핏물로 그려진 발자국이 회색 대리석 바닥에 선명했다. 셜록의 상반신으로 시선을 향하자 피에 푹 젖은 채로 목덜미에 달라붙어 있는 와인색의 셔츠깃이 보였다. 과연 그 셔츠가 본디 와인색이었을지, 그렇지 않으면 피에 젖어 와인색으로 변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더욱 무서웠다. 언뜻 보기에도 몸 전체에 피범벅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였지만 신기하게도 얼굴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아 보랏빛으로 창백하게 보였다.
 셜록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살짝 벌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어정쩡하게 입을 벌리고 있다가 멋쩍었는지 혀로 메마른 입술을 쓸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레스트레이드는 그 입 안이 위험한 붉은색으로 물들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겁이 더럭 난 그는 약간 급하다 싶게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곤란해요."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셜록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한옆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던 고개가 다시 똑바르게 들려 그를 바라보는 것에 레스트레이드는 괜히 입을 열었다 싶었지만 어쩔 수없이 말을 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아까 전까지 마셨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소립니다."

 

 사실 지금도 머리가 조금 아픕니다만, 하고 말을 끝맺는 레스트레이드에게 셜록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예요. 사실 지금 배가 고프다는 것이 저로서도 의외이긴 한데..."

 

 셜록이 말을 흐리며 곤란한 듯 손을 올려 머리를 긁적였다. 가만히 늘어뜨리고 있던 팔을 갑자기 위로 들어올리자 피가 엉겨붙어 한층 짙은 검은색으로 변한 재킷 소매에서 핏방울이 몇 초의 간격을 두고 간헐적으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손에 피가 묻은 것도 모르고 있었는지 찐득하게 핏자국이 달라붙은 손으로 머리를 만지다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 달라붙는 것에 당황하는 셜록을 보는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허술한 모습에 다소 안심이 되면서도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왜 저 남자를 받아들인 걸까? 그는 마이크로프트와 일견 닮은 듯한 분위기를 지니긴 했으나 마이크로프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레스트레이드는 두 흡혈귀의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마이크로프트가 특유의 기품과 식견으로 타인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라면, 셜록은 그보다 복잡미묘한 존재였다. 두렵지만 동시에 연민이 뒤섞인 모순된 감정을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품게 한다고나 할까. 아직 인간의 피를 앗아 자신의 생을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하지 못한 젊은 흡혈귀에게서 흔히 보이는 인간성의 잔재때문인지 아니면...
 방황하는 레스트레이드의 상념의 끈을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셜록이 입을 열었다.

 

 "사실 아까까지 한 인간의 피를 마시고 돌아왔거든요."

 

 딱 보기에도 그래보입니다, 라고 답하려고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인간의 몸 속의 피를 남김없이 뽑아낸다고 해도 저렇게 피에 푹 절도록 할 만큼의 양은 되지 못했다. 그러면 어디서, 라고 물어보려던 레스트레이드가 미처 질문하기 전에 셜록이 해답을 주었다.

 

 "그런데도 배가 고파서 저택 지하실에 있는 혈액보관함에서 몇 팩 꺼내마셨죠."

 

 피로 가득 채운 욕조에 담갔다 꺼냈다고 해도 믿을만한 그의 몰골을 보면 몇 팩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일이었지만 레스트레이드는 대화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길 원하지 않았기에 적당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대신했다.

 

 "인간의 피를 언제 마셨는데요?"
 "어젯밤이었습니다."

 

 셜록의 대답에 레스트레이드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벌써 목이 마를 이유가 없을텐데요."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셜록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고 말했다. 격앙되던 목소리는 금세 힘을 잃고 나직하게 잦아들었다.

 

 "그런데 갈증이 가시질 않아요."

 

 내뱉은 탄식에는 절박함이 어려있었고,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이 섣불리 자신의 피를 마시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하필 마이크로프트가 자고 있을 때 이런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단 말인가. 흡혈귀의 생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기는 했지만 명색이 형제인 마이크로프트가 마땅히 이런 돌발상황에 관여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레스트레이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시기에 갑작스레 젊은 뱀파이어의 상담역이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한숨을 내쉰 레스트레이드는 입을 열었다.

 

 "일단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그 몸부터 어떻게 합시다.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하죠."

 

 그의 옆을 지나치던 레스트레이드가 다시 돌아서 셜록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함부로 뭐 만지지 말아요. 그 꼴로 이 집 물건에 손댔다간 마이크로프트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하나하나가 적어도 몇 십년의 세월을 지닌 물건들이니까요, 라고 말한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이 목마름을 해소한답시고 엉망진창으로 피를 튀겨놓았을 지하창고를 청소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

 

 셜록이 깨끗이 씻고, 레스트레이드가 피범벅이 된 지하실을 청소하고 나자 정오가 훌쩍 지나있었다. 셜록은 여전히 갈증이 치미는지 종종 목을 만져대긴 했으나 그 비정상적인 갈증을 풀기 위해 레스트레이드를 습격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게다가 뱀파이어들의 힘이 약해지는 낮시간이었으므로 그는 졸음을 간신히 참는 사람처럼 소파에 몸을 나른하게 누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뱀파이어의 우월한 신체 능력이 어딜 가는 것이 아니었고, 만의 하나의 상황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었기에 레스트레이드는 그와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레스트레이드의 모습을 본 셜록은 쓴웃음을 지었으나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지라 달리 무어라고 말은 하지 못했다.
 아침부터 이런저런 상황에 휩쓸리느라 식사도 하지 못한 레스트레이드는 혼자만을 위한 애프터눈 티타임을 가지며 셜록의 설명을 들었다. 셜록은 초조해하는 기색이었으나 금방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초지종을 듣게 된 레스트레이드는 당혹스러웠다.
 그의 말에 따르면 셜록은 한 인간의 냄새를 맡았고, 주체할 수 없는 욕구를 느낀 끝에 그 남자의 피를 빨았다고 했다. 하지만 흡혈귀의 흡혈은 본래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들의 신원 조회 절차가 복잡화되면서 시체를 유기하는 것이 어려워진 지금 흡혈귀들은 욕구에 몸을 맡긴 채로 인간을 습격하는 원시적 사냥 방식을 버리고 좀더 교묘한 방법을 택했다. 보통은 밤거리에서 흥청망청대는 인간들이 제 일의 목표물이었다. 술이나 약에 취해있을 것이므로 설사 기억을 한다 해도 환각으로 치부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적합한 사냥감이 없을 경우에는 좀더 번거로운 방법을 썼는데, 상대방을 유혹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방법이었다. 물론 뱀파이어가 소유한 강한 매료 능력이 그 작업에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매료 능력만 발휘한다고 해서 인간이 흡혈귀의 수중에 쉽사리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의심이 극도로 많아진 현대 인간들을 속이기 위해서는 책략을 구사할 줄 아는 지성과 그것을 줄기차게 지속해낼 수 있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했다. 그건 마치 사랑과도 같은 일련의 과정이었다. 물론 기간이 하루에서 이틀 정도로 무척이나 짧다는 것과, 결과가 흡혈로 끝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셜록이 털어놓은 바는 그와는 확연히 달랐다. 처음부터 상대방을 제압하여 꼼짝 못하게 만들고 흡혈을 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매료 능력이 웬만큼 강해서는 먹히지 않는 수법이다. 또한 흡혈을 하고 나서도 욕구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특이한 반응은 단 한 가지 특정한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을 죽음의 신부로 낙점지은 것처럼, 셜록이 그 남자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반려나 다름없는 죽음의 신부는 보통은 뱀파이어가 된지 한참 지나고도 한 명을 발견할까 말까 한 것이었다. 그런데 혈족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가, 그것도 첫 흡혈을 한 대상에게서 그것을 느끼다니, 우연이 겹친다 해도 이리도 절묘할 수는 없었다.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에게 그 점을 셜명하고선 말했다.

 

 "...그런 상황이 닥칠 수 있지. 네가 지금 겪고 있는 증상이 그 상황에 따른 것이라면, 불행하게도 너로서는 억제할 방법이 없어."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레스트레이드의 말투는 자연스럽게 반말조로 바뀌어 있었으나 딱히 셜록은 그에 신경쓰는 것같지는 않았다. 레스트레이드가 말해준 사실들이 충격적이었는지 그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억제할 수 없다고요, 라는 말을 한숨과 함께 중얼거릴 뿐이었다. 감성을 배제하고 이성에 입각한 합리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셜록에게는 자신으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원인에 의해 뜻하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 못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셜록이 왜 절망하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자의로 흡혈귀가 된 것도 아닌데다가 통제불능의 상황에 휩싸인 그의 혼란스러움만큼은 레스트레이드는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그를 위로하고 싶었던 레스트레이드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이크로프트와 나도 그런 관계야."

 

 네가 상상하는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하고 중얼거리며 후후 웃는 그에게 셜록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유난히 친밀해보였던 까닭이 있었군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레스트레이드를 쳐다본 셜록은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굳이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당신은 그와 함께하고 싶은 것같은데요."

 

 이유는 당신이 더 잘 알테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하고 말한 후 셜록은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 얼굴을 마주칠 때에도 소 닭보듯 데면데면하게 굴며 그다지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듯 싶었던 셜록이 자신과 마이크로프트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의외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에 놀란 레스트레이드는 급히 말을 돌렸다.

 

 "사실 이런 것은 내가 아닌 마이크로프트와 의논해야 하는 것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주의할 점만 간단히 알려주지."

 

 레스트레이드가 말을 이었다.

 

 "두 가지만 주의하면 돼. 하나는 그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

 

 셜록이 레스트레이드를 바라보자 그가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그와 같은 입장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그렇게 말한 레스트레이드는 표정을 심각하게 굳히고 말을 이었다.

 

 "사실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는 죽음의 신부라는 개념 자체를 말만 번드르르하지 실상은 전속 수혈팩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건 모르고들 하는 소리거든. 그가 죽으면 너도 상처를 받게 돼. 그런 뱀파이어들을 여럿 보아온 내가 하는 말이니 믿어도 되네."

 

 셜록은 수긍하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태도로 레스트레이드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레스트레이드가 당부했다.

 

 "육체적인 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말이야."

 

 딴에는 걱정이 되어 해주는 말이었지만 셜록은 그에 말을 영 진지하게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기껏 말해주었더니 정작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에 한편으로는 화가 났지만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던지라 레스트레이드는 그저 몇 마디 덧붙이는 정도로 이야기를 마치려 했다.

 

 "아마 자신은 괜찮을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견딜 수 없을지도 몰라.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게 좋겠지."
 "굳이 당신이 당부하지 않더라도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겁니다."

 

 거듭된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셜록이 툴툴거리듯 답했다. 레스트레이드는 곧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두 번째는 그 인간에게 당신의 피를 먹여서는 안된다는 거야."

 

 레스트레이드의 목소리는 한층 진지해졌다.

 

 "그를 혈족으로 탈바꿈하려면 웃전의 허락을 얻어야 해. 엘더들 말이야. 그렇지만 당신은 탄생부터가 그들에게 밉보였으니 그들이 허락해주지 않을게 뻔하지. 허락 없이 그를 뱀파이어로 만들었다간 그는 한때 당신이 처했던 상황을 겪게 되겠지. 이번에도 마이크로프트가 비호해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레스트레이드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단 한 방울도 먹여서는 안돼."

 

 '단 한 방울도'를 강조하는 레스트레이드에게 셜록이 이유를 물었다.

 

 "한 방울 정도로는 인간이 뱀파이어로 변하기엔 부족하잖습니까. 당신이 그 점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을테지요?"

 

 레스트레이드가 셜록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몰라. 마이크로프트도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알려주지 않더군. 내가 알아보았자 소용이 없는 사실이라면서 말이야."

 

 확신이 없는 어조에 셜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당신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사실을 그토록 강조하는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웃기지 않나요?"

 

 시비조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셜록의 말에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레스트레이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의 말을 믿나요?"

 

 명백히 도발적인 어조에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다지 확신이 담긴 눈빛은 아니었으나 아까처럼 시선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셜록이 파란 안광을 빛내며 마주 바라보는 것에 그는 곧 고개를 돌리며 약한 어조로 말했다.

 

 "믿고 말고."

 

 레스트레이드가 말을 맺었다.

 

 "그리고 믿어야 하고 말이지."

 

*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간신히 눈을 떴다. 줄곧 감고 있던 눈에는 옅은 햇빛도 고통스러웠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눈을 떴다가, 손가락 사이를 천천히 벌려 눈이 햇빛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그런 후에야 존은 겨우 눈을 똑바로 뜰 수 있었다.
 눈은 떴지만 몸은 흙 속에 묻히기라도 한 듯 딱딱하게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밤새 온몸을 엄습했을 냉기에 사지가 굳은 듯 팔다리를 까딱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장시간 노력한 끝에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존의 발 아래로 무언가가 스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동시에 싸늘한 아침 공기가 목덜미를 파고드는 것에 존은 부르르 떨었다. 그는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목도리였다. 처음 보는 색상과 질감의 그것은 당연히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남자의 눈동자 색깔을 한층 짙게 한 후 가라앉힌 듯한 톤의-
 목도리를 보고 곰곰히 생각하는 동안 흐려졌던 어제의 기억이 다시금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길을 잃고 이름모를 저택으로 향하던 중 한 남자를 만났고, 무뚝뚝하지만 다소 정중한 태도의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덫에 발꿈치가 씹힌 것처럼 도망칠 수가 없었던 어젯밤.
 존은 급히 자신의 목덜미를 만졌다. 신기하게도 어제 남자에게 잘근잘근 씹혔던 그곳은 빠르게 아물어 손끝에는 다소 울퉁불퉁한 자국만이 남아있었다. 살갗 위로 느껴지는 다소간의 요철감만이 그가 어제 당했던 일이 단지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하하하 하고 허탈한 웃음소리가 존의 입술로 새어나왔다. 한여름밤의 꿈도 아니고, 라는 다소 낙천적인 중얼거림이 존의 머리를 맴돌았다. 아니, 따지고 보면 한여름밤의 꿈보다 더욱 질이 나쁘다. 적어도 거기선 남녀간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라도 했잖은가? 그것도 세 쌍이나. 이왕 당할거면 미녀한테 당했으면 좋았으련만, 하고 존은 애써 가볍게 생각하려 했다.
 잊자, 잊어, 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의 시야에 다시 목도리가 들어왔다. 그는 땅바닥에 흩어진 그것을 집어들었다. 어젯밤 자신을 습격한 남자가 남기고 간 것이 분명했다. 대체 왜 그런 뜬금없는 호의를 베풀었는지는 존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추위에 굳은 손가락에 목도리가 감겨왔다. 고급스런 질감에, 밤새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던 부드럽고 따뜻한 목도리. 아직 자신의 온기를 머금고 있는 그것을 손에 들고 존은 망설였다.
 그는 그것을 길바닥에 내버릴 수도 있었다.
 한동안 망설이던 그는 남들의 눈치를 보듯 좌우를 흘깃 둘러보고 빠르게 왕진 가방 안에 목도리를 쑤셔넣었다. 자신을 습격한 자가 남긴 목도리를 당장에 내팽개치기는 커녕 소중하게 챙긴 자신의 행동은 순전히 고급 머플러를 내버리기 아까워서였을 뿐이다 라고 합리화하며 존은 숫제 누가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바삐 걸음을 옮겼다.

*

 

불쌍한 의사양반 존 왓슨이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가 따끈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침대에 누워 간밤에 있었던 일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결심하던 그때 마이크로프트는 막 오수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빈틈없이 완벽한 차림새를 한 그는 셜록이 거처하는 작은 방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덧창과 커튼까지 빠짐없이 전부 내려져 빛이라곤 한 점도 들어오지 않는 저택의 컴컴한 복도를 걷는 그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입가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셜록의 방문 앞에 다다른 마이크로프트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셜록의 방은 천장이 높은 탓에 실제의 넓이보다 다소 좁아보이는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벽에 나 있는 단 하나의 유일한 창문은 17세기 후반에 유행한 타원형 양식을 본뜬 것이었다. 이 창문은 저택의 채광 방향과 건물 주위를 둘러싼 숲의 조감에 대한 고려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창문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하늘을 직접 볼 수 없고 연못에서 반사되는 위치의 하늘만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낮은 위치의 창문으로 약한 저녁 노을빛이 희미하게 비쳐들었다. 램프 하나도 심지어 촛불 하나도 켜져 있지 않은 어둠침침한 방은 밤이 다가오고 유일한 광원이라 할 수 있었던 햇빛마저 스러져가면서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셜록은 방의 가장자리에 놓인 의자에 심란한 기분으로 앉아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의기소침해보이는 셜록을 향해 다가가며 연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내 사랑하는 동생아."

 

 막이 오르고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처럼 거창한 서두였다.

 

 "이 무슨 우울하고 낙심천만한 사태란 말이냐?"

 

 마이크로프트의 말은 셜록의 주의를 자신 쪽으로 잡아끄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셜록은 잠시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본 후 황망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늘진 어둠 속에 침잠한 채로 연못의 잔잔한 표면에서 반사되는 석양빛을 응시하는 셜록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죄를 저질러 순수를 상실한 어린아이의 비애감이 배어있었다.
 그런 셜록을 바라보며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인간의 피를 마신 것이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니?"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에게 건넨 말은 폐부 깊이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건만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몰래 엿듣기라도 한 것인가? 혐오감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셜록이 물으려 하자 마이크로프트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듯 곧바로 말했다.

 

 "이 저택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 눈과 귀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란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니? 하고 말하며 마이크로프트가 웃었다.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방 안을 낮게 떠돌다 가라앉아 사라졌다. 웃음소리의 잔향이 사라지고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에게 말했다.

 

 "그럼 충격적인 전모를 한 번 들어볼까."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셜록은 발작하듯 소리쳤다.

 

 "충격적이지 않으면? 충격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건가?"

 

 셜록이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

 

 이성을 잃고 짐승같은 욕망에 몸을 맡긴 것이 충격적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마이크로프트가 그 점을 모르고 셜록에게 그렇게 자못 순진한 뉘앙스의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첫 흡혈이란 본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흠 하나 없이 결백한 인간성이 난생 처음으로 흔들리고 점차 괴물의 길로 접어드는 첫걸음이니만큼 셜록의 동요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으로, 자신이 몇 백년 전에 이미 끝마친 고민에 새로이 잠겨 허우적대는 셜록을 보는 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루하기도 했다. 마이크로프트는 방 한 편에 놓인 침대 가장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침대를 덮은 남색의 벨벳이 사각거리며 부드러운 감촉을 주었다. 얼마쯤 그대로 앉아 있던 사내의 어깨가 마치 목이 메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금씩 들먹거리며 흔들렸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셜록이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본 셜록의 얼굴은 곧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왜 웃는 거지?"

 

 셜록이 물었으나 마이크로프트는 좀처럼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셜록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간신히 웃기를 멈춘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을 향해 다정스레 말했다.

 

 "오, 순진한 아이야."

 

 셜록이 파랗게 안광을 빛내며 마이크로프트를 노려보았다. 마이크로프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셜록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린 인간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존재들이 아니야."

 

 아니고 말고, 라고 마이크로프트는 잔혹하게 중얼거렸다.

 

 "우리들이 고귀한 혈통을 가진 우아한 귀족이라고 생각하나? 절대 그렇지 않아. 조금의 수고도 없이 여인들이 우리에게 기꺼이 목덜미를 바치고 우리의 발치에 엎드려 굴복하며 우리의 존재를 갈구하리라고 생각해? 부분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이지. 하지만 그건 우리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서가 아니야."

 

 마이크로프트가 속삭였다.

 

 "본질적으로 말이다, 우리는 더럽고 야비한 악당에 지나지 않는단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한밤중에 타인의 목숨을 몰래 빼앗고, 무덤에서 일어나 자기자신의 수의를 갈가리 찢어 씹어먹는 괴물이란 거야. 폭력과 죽음, 그것의 결정체일 뿐이라고...그 가운데의 하나가 된 너조차도 자신의 본모습을 이때껏 깨닫지 못한 것이로구나."

 

 셜록뿐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까지 가차없이 비하하는 조롱을 내뱉으며 즐거워하는 마이크로프트는 변함없이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단정한 자태로 앉아 있는 그의 얼굴에 창문으로 스며들어오는 투명하고 아득한 햇빛이 비쳤다. 태양의 황금빛, 보랏빛을 띤 구름의 색조, 서서히 떠오르는 별들의 선홍빛이 타오르는 듯 선명하게 창문가로 스며들며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믿기지 않게도, 추악하게 일그러져 셜록은 물론이고 그 자신까지도 비웃는 그의 모습은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첫 난관을 넘어서지 못하고 절망으로 주저앉는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 스스로 햇빛 속으로 몸을 던지는 이들도 많단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입을 열어 셜록에게 말했다.

 

 "살고 싶지 않다면 당장 저 일몰로 나서면 된단다."

 

 그가 유혹하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놀라울 정도로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우리보다 한참은 더 연약한 인간들은 갖은 방법을 다해 죽음에 다가가려고 노력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말이다. 성공하더라도 남은 이들에게 몹시 추한 꼴을 남기고 갈 때도 많지 않니.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우아하면서도 간단한 방법으로 존재의 소멸을 택할 수 있다니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마이크로프트는 마침 그 절정에 달하여 있는 석양의 태양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그 치명적인 빛의 물결 속으로 몸을 던지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의 눈빛은 아련한 기미를 담고 있었다.

 

 "물론 네가 죽음을 택한다면 난 무척 아쉬울 거란다. 넌 내 무료함을 잠시나마 달래주었지 않니. 더이상 그럴 수 없다면 난 다시 나를 즐거이 해줄 수 있는 또다른 누군가를 찾아나서야 할 테고."

 

 철저히 이기주의에 매몰된 사고방식으로 점철된 말에 셜록이 인상을 찡그렸다. 마이크로프트도 셜록의 표정 변화를 눈치챘는지 어조를 다소 다정하게 바꾸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알겠지."

 

 마이크로프트가 조용히 말했다.

 

 "고통은 한순간이란다."

 

 충격으로 잠시 말문이 막혀 있던 셜록은 곧 냉정을 되찾았다. 마이크로프트에게 야릇하고 복합적인 면이 숨겨져있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냉혹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한없이 감상적으로 돌변할 때도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의 본모습에 놀란 것은 예상치 못한 야습에 놀란 적군의 심정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더이상 감정에 휘둘려 절망하는 것은 그에게 치욕적일 터였다. 냉정하게 동요를 수습한 셜록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속이 메스꺼워질 정도로 추악하군."

 

 셜록의 중얼거림에 마이크로프트가 웃음을 그치고 차분히 동조했다.

 

 "옳은 말이구나."

 

 그리고 잠시, 둘 사이의 대화가 끊겼다. 오가는 대화가 사라진 공간을 메운 것은 그날의 안녕을 고하는 햇빛이었다. 창에서 들어오는 빛은 아직 불그스름한 낙조의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마지막으로 저무는 햇살이 길게 구릿빛을 드리우다가 그날따라 푸르다기보다는 꺼멓게까지 보이는 어두운 하늘로 흔적없이 사라졌다. 빛줄기가 잠시 머물렀다 떠나버린 하늘에는 아직 주홍빛이 간간이 남아있었으나 셜록의 방 안은 그와는 대조되는 어둠이 한층 짙게 내려앉아, 셜록과 마이크로프트의 실루엣은 마치 그림자 무언극에 나오는 윤곽처럼 보였다.
 완전한 어둠에 잠긴 채로 묵묵하게 앉아있던 마이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네가 거리끼지만 않는다면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주도록 하지."

 

 셜록은 코웃음쳤다. 무엇에 대한 조언이란 말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의 피를 효율적으로 강탈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조언?
 마이크로프트를 도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셜록이 말했다.

 

 "그런 당신을 두둔하려는 자가 불쌍하군."

 

 셜록이 지칭하는 사람이 레스트레이드라는 것을 알아차린 마이크로프트는 잠시 침묵한 후 대답했다.

 

 "그가 내게 과분한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지."

 

 마이크로프트가 슬픈듯이 덧붙였다.

 

 "저주받은 긴 세월 속에서 그 하나만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빛이자 천사였는데 그는 이제 늙어가고 있구나."

 

 셜록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내가 보기엔 무척이나 간단해 보이는데. 그에게 영생을 선물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 또한 당신의 혈족이 되는 것을 원하고 있는 듯 보이던데."

 

 셜록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미소지었다.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야."

 

 답답하기 짝이 없군, 하고 중얼거린 셜록이 약간 언성을 높여 말했다.

 

 "뭐가 문제인 것인지 모르겠군. 당신과 대립하고 있는 다른 흡혈귀들이 문제인 건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당신이 그 정도의 반발을 통제하지 못할 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따위 사소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를 당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도 말이 되지 않아. 마이크로프트 당신은 현명한 척 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누구보다도 겁이 많고 어리석은 사람이야."

 

 셜록은 줄곧 앉아있던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차갑게 말했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어. 이제 당신의 혀끝에 섣불리 놀아나지 않을 거야. 당신이야말로 당신 자신의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게 좋을 걸. 빛이니 천사이니 하는 닭살돋는 고백은 내 앞에서 하지 말고 당사자 앞에서 하란 말이야."

 

 매몰차게 쏘아붙인 후 셜록은 코트를 걸친 후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불빛 한 점 없는 어둠에 파묻힌 방 안에서 마이크로프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이미 그를 죽일 뻔했어."

 

 그가 느닷없이 중얼거렸다.

 

 "그런 내가, 내 욕심 때문에 그를 또다시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단다."

 

 예전의 두통이 희미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마이크로프트는 고개를 숙였다. 참회하는 신도처럼 경건하게 고개를 숙인 마이크로프트는 정적 속에 몸을 맡겼다. 흐린 별빛만이 비쳐들어 순간적인 신기루처럼 그림자와 어둠이 먼 과거의 백일몽처럼 어른거리는 방 안에서 그는 뚜렷한 검은 윤곽의 하나가 되어버린 채로 밤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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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Blood is life; blood is utu; blood is death; blood is silent; utu is silent;

that was the rule; that is the rule; that will be the rule.

 

  

 해질녁이었다.
 저녁놀은 점점 붉게 타오르다가 다시 푸르게 희미해졌다. 닫힌 커튼 사이로 실낱같이 가느다란 햇빛줄기가 살며시 들어왔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피가 담긴 크리스털 유리잔이 놓인 탁자를 가운데 두고 셜록과 마이크로프트는 나른한 자세로 앉아서 공기 중의 색이 옅어지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곧이어 잿빛 어스름이 깔렸다. 밤의 산들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바람결에 떠밀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홀연히 달이 떠올랐다.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하얀 햇빛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마이크로프트는 입을 열었다.

 

 "뱀파이어는 죽음 그 자체이지."

 

 그는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 후 닫혀있던 커튼을 열었다. 이미 호흡이란 것을 할 필요가 없는 육신을 지닌 그였지만 커튼을 연 그는 막혀있던 숨통이 트이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빛이 스며드는 대신 저택의 열린 문틈과 창문으로 간간이 노란 빛이 새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검푸른 살얼음이 낀 연못의 표면에 불빛이 일그러진 형태로 비쳤다.
 자리로 돌아온 마이크로프트는 길고 긴 쉼표를 넘어 말을 이었다.

 

 "뱀파이어와 마주한 인간이 변변한 저항 하나 없이 순순히 목덜이를 내미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인간에게 제 일의 본능이란 생존 욕구라고 할 수 있지만, 이율배반적이게도, 그와 더불어 인간 정신에 내재한 또다른 본능은 죽음에의 열망이지. 그런 연유로 우리들의 존재는 그들에게 저항하려 해도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매혹이자 죽음의 환상을 그들의 상상 범위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보여주는 자들이 된단다."

 

 퀭하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청년이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오묘한 오팔 빛깔의 눈은 자신을 향해 막연한 동경을 품고 빛나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동경이란 말인가? 이미 완성된 존재인 그가 미완성의 존재를 보고 앞으로의 전도와 가능성에 대해 질투라도 한다는 말인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 다리를 꼰 채로 아무렇지 않게 앉아있는 듯한 그의 자세는 실은 완벽한 균형과 섬세한 관능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것은 이미 하나의 조형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토록 완벽한 그가 다른 이를 동경한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한없이 우아한 자태의 남자가 자애롭고 온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가르침을 주고 있건만 정작 당사자인 셜록은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의 병적인 무관심은 다름이 아니라 때아닌 우울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뱀파이어가 된 지 세 달이 막 지났을 뿐인 그는 최근 밤이 되어 깨어날 때마다 이상스레 침울했을 뿐만 아니라 나른한 탈력감에 종일 시달렸다. 무엇보다도 그를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붙는 그 기분을 도무지 떨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느끼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의 상태를 알고 있다는 것을 굳이 그에게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더욱 셜록의 내부를 장악하고 있는 공허감을 극한까지 부추기기 위해 그것을 고의로 외면하는 것을 택했다. 그는 유혹적인 어조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덕분에 우리는 인간들을 능동적으로 유혹할 필요가 없어."

 

 타오르는 모닥불에 이끌린 불나방들처럼 스스로 불길 속에 몸을 던지니까 말이야, 라고 마이크로프트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귓가를 가랑비처럼 적시는 마이크로프트의 속삭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셜록의 빈틈을 파고들었고 반대급부로 이유모를 울화가 속에서 치미는 것을 느끼며 셜록은 몸을 들썩였다.
 끝없이 그의 주위를 맴돌며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그 무언가의 정체를 셜록은 무의식적으로는 깨닫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의식적으로는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셜록도 마이크로프트의 장광설이 이유없이 이루어질 리는 없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미리 준비한 것이 분명한 길고 긴 대사는 분명 셜록의 안에 잠들어있는 무언가를 촉발시키기 위한 것일 터였다. 아직까지 한번도 그의 안에서 깨어난 적이 없는 피에 대한 욕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지금까지 속삭이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정교한 덫처럼 셜록을 잡아 무너뜨리기 위한 함정의 설계였다. 미숙한 뱀파이어인 셜록은 인간이 아닌 자로서의 심리적인 적응기를 거치고 있었던지라 외줄타기를 하는 광대마냥 불안한 상태였고 그렇기에 촘촘한 거미줄과도 같은 마이크로프트의 꼬드김에 쉽사리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동요된 마음의 틈새로 산 자의 피를 원하는 지독한 탐욕이 흘러나와 셜록의 냉정한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꺼지지 않는 반항심과 무턱대고 욕구를 좇지 않는 특유의 금욕적인 성미가 그를 잠시잠깐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셜록이 당장이라도 용수철처럼 자리를 튕기고 일어나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그러한 욕구를 참아내고 있는 것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던 마이크로프트가 미소지으며 속삭였다.

 

 "네가 인간들 틈에 섞여있어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눈치채겠지. 네가 얼마나 아름답고도 위험한 존재인지-그들에게 단숨에 꺼져가는 죽음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고-반대로 그들이 그토록 바라는 영생을 선물할 수도 있으며-또한 그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없는 강렬한 쾌락을 줄 수도 있는 존재인지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마이크로프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셜록을 향해 몸을 수그리며 말했다.

 

 "나는 그저 알려주고 싶을 뿐이란다."

 

 우아한 동시에 냉혹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그가 속삭였다.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손쉽고도 당연한 일이라는 걸 말이다."

 

 열린 창문으로 달빛이 천천히 쏟아져들어왔다. 달빛을 등진 남자의 얼굴은 분명 교활한 미소로 얼룩져있을 것이다. 셜록은 남자에게, 또 남자의 세 치 혀에 속수무책으로 놀아나는 자신에게 분노하며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믿을 수 없군."

 

 셜록의 반박에 마이크로프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엇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그의 질문에 셜록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이 그토록 손쉬운 일이라면 당신은 어째서 인간 남자 한 명에게 연연하는 것이지? 그 이외에도 당신에게 피를 바칠 인간은 차고 넘칠텐데 말이야."

 

 순간 마이크로프트의 실루엣이 파르르 떨린 것도 같았다. 그러나 멀리 커튼을 여미고 있는 리본 끝이 밤바람에 움직여 방 안을 채우던 빛무리의 진로를 방해한 듯도 했으므로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밤하늘의 여행자 달이 위치를 바꾸어 더이상 방 안을 비추지 않게 될 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달빛이 걷히고 드러난 마이크로프트의 안색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변화라곤 한 점도 비추이지 않았다. 그저 담비털 붓으로 그린 듯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미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닫힌 입술이 열리며 속삭임을 뱉어냈다.

 

 "레스트레이드는-"

 

 그때 멀리서 저택의 철문이 끼이이 소리를 내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약한 소리일 뿐이었으나 셜록과 마이크로프트 둘 모두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가벼운 몸놀림과는 확연히 다른 걸음소리가 낯선 공기를 몰고 저택 안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이크로프트는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체취. 레스트레이드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하고 셜록이 속으로 혀를 차는데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찰나의 순간 속살을 보인 진솔함의 여운은 간데없고 평소의 무심한 목소리였다.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만 주의해야하는 것은 맞단다. 너무 빠져들지 않도록..."

 

 마이크로프트는 '무엇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다. '무엇'의 빈 자리를 어떤 단어가 채워도 상관없다는 뜻일까?

 그가 몸을 일으키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쩌면 네가 나보다 더 현명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거기까지 말한 그는 불빛 한 점 없는 복도에 오랜만에 불을 밝히러 천천히 방을 걸어나갔다.
 셜록도 이제는 익히 알고 있는 손님을 맞이하러 나간 마이크로프트마저 방을 떠나자 그렇지 않아도 을씨년스러운 방 안은 더욱 적막감이 떠돌았다. 셜록은 탁자를 바라보았다. 잔 내벽에 달라붙은 피가 응고되어 색이 한층 짙어진 것이 보였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 싸구려일 뿐 아니라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 뿐인 그것을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셜록은 손을 뻗어 걸쭉해진 그것을 단숨에 삼키고는 신경질적으로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비린 맛과 혈액 유화제의 인공적인 향내가 혓바닥을 깔깔하게 자극했다.
 배고픔도 달랬겠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궁상을 떨 이유가 없었다. 창가로 다가간 셜록은 창문을 열고 초겨울의 찬 기운을 음미한 후 고양이처럼 조용하게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미 한 사람의 훌륭한 밤의 식구가 된 그는 은밀하게 밤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

 

  늦은 왕진을 마친 존 왓슨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마차는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날씨는 빌어먹도록 추웠다. 마차를 기다린답시고 정류장에 계속 앉아있다가는 마차는커녕 얼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존은 결국 걸어서 집으로 가기로 마음먹고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바람이 세지는 않아 어느정도 걷다보니 찬 공기에 적응이 된 것인지 초겨울 날씨치고는 추운 밤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목덜미를 스산하게 파고드는 바람은 견디기가 힘들었고 존은 고개를 움츠린 채로 한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존은 서서히 아파오는 한쪽 다리에 끄응 하고 신음하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다친 곳은 어깨이건만 아파오는 곳은 반대쪽 다리라는 모순적인 사실이 우스우면서도 슬프게 그의 마음을 찔렀다.
 미묘한 황색의 가로등 불빛만이 그를 내리비추었고 그날따라 런던의 밤거리는 소름끼치게 조용했다. 하긴 이런 날씨에 바깥을 돌아다니는 머저리는 나밖에 없겠지. 존은 자조했다. 뭐 부상으로 의가사제대하여 기반없이 급하게 자리를 잡은 의원인 자신이 가려서 손님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줄곧 수그리고 있던 목에 둔통이 느껴지는 것에 존은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고 좌우로 살살 움직였다. 그러면서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자신이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고개를 숙인 채로 걷다보니 잘못된 길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더 큰 문제는 존의 눈에 주변의 거리가 영 익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풍광에 당황한 존은 추위조차 잊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쩐다.'

 

 존은 속으로 낙담하며 한숨을 토했다. 하얀 입김이 사르르 허공 중으로 올라갔다.
 계속 멈춰서있을 수만도 없었으므로 존은 절뚝이는 다리로 걸음을 재촉했다. 점점 으슥한 수풀길이 그의 앞에 펼쳐졌고 존은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직감했다. 한번 길을 잘못 들어 가로등도 없이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 깔린 지대로 들어선 데다 밤눈이 어두운 편에 속하는 존은 어느 방향이 올바른 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기에 한참 헛수고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식은땀을 훔치던 그는 순간 저편에서 은은하게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저 멀리 저택으로 보이는 건물의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길을 헤메던 그에게 그 불빛은 너무나도 반가운 존재로 다가왔다. 어둠에 조금 익숙해진 눈으로 땅바닥을 유심히 살펴보니 저택으로 뻗은 길이 어렴풋이 보였다. 존은 몹시 기뻐하며 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심 불안했지만 저택의 주인이 인정머리없는 사람만 아니라면 하룻밤 추위를 지새게 해주는 정도야 허락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한결 속도를 붙여 걷기 시작했다.

 

*

 

 마이크로프트에게 자신을 의탁한 후로 한 번도 저택 밖으로 나온 적이 없는 셜록은 오랜만의 바깥 공기를 쐬자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다소 들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몇 주간 만성적으로 그를 짓누르던 우울감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택 안에서 체재하고 있을 때보다는 가벼운 기분이었다.
 손질이 되지 않아 불규칙적으로 자란 풀들이 발 아래에 푹신하게 밟히는 것을 느끼며 셜록은 정처없이 걸었다. 창백한 뺨을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뭇 차가운 공기였다. 인간이었다면 덜덜 떨었겠지. 하지만 이미 식어버린 몸은 코트 한 벌과 목도리를 대강 걸치는 것만으로도 겨울의 도입부를 예고하는 냉기에 무던하게 적응했다. 꽁꽁 싸맬 필요가 없어서 편리하군, 하고 낙천적인 생각을 하던 셜록은 문득 무언가가 다가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우뚝 멈춰섰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무거운 발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걸음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고 빨랐다 느려졌다 하는 것으로 보아 다리가 불편한 인간이었다.
 셜록은 다가오는 자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쪽으로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인간의 피에 대한 탐욕이 미미하다 싶을 정도로 적었기에 그가 인간 하나의 냄새에 끌려 이편으로 오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은거형을 받은 마이크로프트의 족쇄 역할을 수행하는 스커지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는 근방에 거동마저 불편한 인간이 돌아다니는 것을 그들이 알아차린다면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선 이 불쌍한 인간은 영문도 모른 채 순식간에 한 끼 식사거리가 되어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선한 피를 갈망하며 허덕였던 셜록이었으나, 다행히도 저택에서 나오기 직전에 피를 마셨기 때문에 인간을 다시 저들의 도시로 돌려보내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터였다.

 

*

 

 저택으로 통하는 골목으로 향하는 왼편의 오솔길에 다다른 존은 고통을 호소하는 다리를 잠시 쉬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저택으로 곧장 통하는 길에는 가장자리에 잎을 다 떨군 채 바싹 마른 가지만 남은 검은 나무들이 줄세워 드리워져 있었고, 뭐라 말하기 힘든-살아있는 자들의 출입을 거부하는 듯한 불친절한 기색이 짙게 풍겼다. 존의 걸음을 늦출 정도로 으스스한 어둠을 품고 있으며 희끄무레한 안개마저 끼어 있는 길은 어린 시절에 침대맡 벽장 속의 괴물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원초적인 공포와도 같은 것을 되살리고 있었으나 존은 달아나려는 희망을 다시금 붙잡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일대에 얇은 장막처럼 떠도는 안개를 헤치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균일하지 못하게 끼인 안개에 가리운 사람의 윤곽이 그가 다가옴에 따라 점차 분명하게 드러났다.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본 존의 눈이 커졌다.

 

 "길을 잘못 드셨군요."

 

 나직하고 정중한 어투로 말하는 그의 얼굴은 피가 모두 증발해버린듯 충격적으로 새하얬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묘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석고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의 혈색없는 얼굴에 깜짝 놀란 존은 남자의 말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예. 왕진을 갔다 오는데 길을 잃어서..."

 

 뒷말을 흐리는 존에게 남자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제가 모셔다드리죠."

 

 그때 계속해서 존을 향해 불어오던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드러난 뺨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찬바람에 혹사당하던 얼굴이 역풍덕분에 약간은 따스해진 듯한 착각이 들어 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셜록은 역풍을 타고 자신의 콧속으로 스미는 향기에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눈 앞의 남자의 체취는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욕망을 능히 자제할 수 있으리라고 장담했던 그의 자신감을 산산조각내어버릴 정도로 향기로웠다. 아까 전 삼킨 피비린내의 잔향이 토하고 싶도록 역겹게 느껴질 정도로 남자의 냄새는 미치도록 좋았다. 무절제한 욕망과는 거리가 먼 그의 속내에서 탐심이 그득하게 고여올라왔다.
 메마른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셜록이 반사적으로 목울대를 움직였다. 아아. 셜록은 마음 속으로 절망 섞인 비명을 질렀다. 침을 삼키는 것은 식욕을 가라앉히기는 커녕 더욱 들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심한 허기가 그의 내부를 진탕시켰다.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무진 노력하고 있는 셜록에게 눈앞의 남자가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을 하고선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저쪽에 저택이 보이던데, 혹시 그곳에서 오신 건가요?"

 

 셜록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입을 움직였다.

 

 "...그렇습니다만."

 

 남자는 셜록을 올려다보며 살았다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셜록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남자가 셜록에게 말했다.

 

 "실례라는 건 압니다만, 오늘 밤만 신세를 져도 될까요? 밤이 깊어서 지금 돌아가긴 무리일 것 같은데..."

 

 호랑이 소굴로 스스로 얼굴을 들이미는 남자의 행동을 만류하고 싶었으나 셜록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뼘 남짓하는 거리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체향이 손쓸 수 없이 그의 후각을 자극했고, 셜록은 더이상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당장에라도 남자를 찢어발기고 하얀 살갗 사이로 샘솟아나올 핏물에 고개를 처박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셜록이 마지막 이성을 그러모아 입을 열었다.

 

 "그건...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같습니다."

 

 셜록의 완곡한 거절에 남자의 안색에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셜록의 소매를 붙잡고 매달렸다.

 

 "부탁입니다! 폐는 끼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존은 자신의 등골이 갑자기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맹수 앞에 맨몸으로 선 것처럼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돋아오르는 감각에 스스로 의아해하고 있는 그 순간 무섭도록 얼굴을 굳힌 남자가 자신을 잡고 쓰러뜨렸다.

 

*


 남자에게 떠밀려 난데없이 풀숲으로 넘어진 존은 항의를 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막상 남자의 얼굴을 마주한 존은 하려던 말을 잊은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무표정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존의 심장을 멎게 만들 것처럼 조여왔다. 눈에 띄게 묘한 남자의 분위기는 비단 창백한 안색때문만은 아니었다.
 오싹하리만치 하얀 얼굴에 섬뜩한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찌르듯이 바라보았다. 존은 더이상 남자가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는 이 상황을 웃어넘길 수 없었다. 전장에서 단련된 존의 육감이 눈앞의 남자는 말 그대로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맹수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공포에 사로잡혀 몸이 덜덜 떨리는 가운데에서도 존은 남자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었으나 사실이 그랬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납빛으로 물든 뺨을 하고선 무기력하게 서있던 남자가 자신을 무언지 알 수 없는 강렬한 열정으로 물든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어서였을까? 아니, 그것은 지금의 정황과는 동떨어진 차원의 이야기였다. 남자의 존재 자체가 존에게 너무나도 고혹적이고 센슈얼한 분위기를 풍겼고 존으로 하여금 그러한 기분에 동화되게끔 한 것이다.
 존이 초점이 풀린 눈으로 남자에게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핏기없는 남자의 얼굴선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얼굴은 그의 이마에 입술을 살포시 갖다대었다. 차가운 입술이었다. 이마에 입술을 내리누른 채로 코를 자신의 땀에 젖은 머리칼에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이 느껴졌다. 존은 어쩐지 울고 싶었다.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분명 냄새가 지독할 거야. 존은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남자는 존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그가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잦아드는 하프 현의 떨림처럼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은 공포와 상반되는 나른한 안도감에 존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멀어졌던 남자의 얼굴이 다시 거리를 좁혔다. 이번에는 이마가 아니었다. 입술도 아니었다. 그의 가벼운 키스가 내려앉은 곳은 존의 목이었다. 어느새 옷깃을 풀어헤쳤는지 여린 목덜미가 활짝 드러나있었다. 한없이 부드럽게 시작된 키스는 어느 순간 날카로운 아픔으로 변모했다. 남자가 육식동물처럼 자신의 목을 물어뜯는 것이 느껴졌다. 환촉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아픔에 존은 나직하게 비명을 질렀다. 상처입은 목과 찢긴 혈관으로 뜨거운 피가 몰리고 남자의 입 안으로 빨려나가는 느낌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생경했다. 존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절할 것만 같았지만 용케도 기절은 하지 않은 채로 존은 그것을 견뎌냈다.
 한순간 존이 눈을 번쩍 떴다.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은 더이상 시커먼 어둠이 아니었다. 황금빛의 황홀경이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시야가 번쩍 열리며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남자 이외의 존재는 순식간에 흐릿하게 존재감을 잃었다. 쾌감과 황홀의 경계에서 존이 숨을 토했다.

 

 "하으..."

 

 남자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한층 명료해진 존의 시야에 들어온 남자의 모습은 새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천사처럼 도드라져보였다. 그러나 눈앞의 천사에게 고결한 자비는 없었다. 대신 그의 얼굴은 달랠 길이 없는 지독한 굶주림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남자의 눈동자가 내뿜는 마력에 홀려 그의 품 안에 갇힌 존은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욕망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와 대조를 이루며 드리워진 검은 속눈썹 아래로 그의 맑은 눈동자가 더욱 분명하게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온전한 회색이 아니었다. 서늘한 코발트 블루 빛깔이 감도는 청회색이었다. 청량한 내음이 끼치도록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존은 빨려들어갈 것처럼 그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가 안심을 시키려는 듯이 눈꼬리를 휘었다. 자신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어린 새의 속깃털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존에게 여전히 그는 무서운 존재였다. 처음에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물어뜯은 것을 제외하고는 남자는 사뭇 다정하고 친절한 방식으로 자신을 마셨지만 엄습하는 본능적인 공포를 이길 수는 없었다. 남자는 다시 자신의 어깻죽지에 고개를 파묻었다. 체액이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쾌감인지 전율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이 퍼졌다. 남자에게 사로잡힌 채로 섬뜩한 공황 상태에 빠져든 그는 이윽고 정신을 잃었다.

 

*

 

 남자의 체향이 한층 강렬하게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느끼며 이성을 완전히 놓아버린 셜록은 짐승처럼 남자를 덮쳤다. 만만찮을 것처럼 보였던 남자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나자 완전히 힘을 잃고 늘어져버렸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흐린 하늘 빛깔의 눈동자가 순종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한결 여유가 생긴 셜록은 먼저 남자의 체취를 한껏 음미했다. 진한 향기가 그의 후각을 마비시킬 것만 같았다. 살과 살을 조금의 틈새도 없이 밀착하고 있자니 그의 온몸을 타고 흐르며 두근두근 울리는 혈류의 흐름, 살아있는 피를 펌프질하는 심장의 박동, 그리고 약간 가팔라진 그의 숨소리와 함께 발산된 체향이 셜록을 감쌌다. 식욕과 함께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그 향기를 계속해서 맡고 있었다가는 남자를 뼈째로 씹어먹어버렸을지도 몰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셜록의 아래에 깔린 남자가 아직 정신이 남아있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저었다. 셜록은 고개를 들었다. 물기가 살짝 어린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상냥하게 말했다.

 

 "가만히..."

 

 거부하는 기색은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 반사적으로 머리를 돌린 것 같았다. 남자의 체향은 충분히 즐긴 셜록은 이제 그의 본능이 이끄는 바대로 남자의 피를 마시기로 했다.
 여전히 미약한 저항의 기색 하나 없는 남자의 목덜미를 덮고 있는 옷자락을 손쉽게 풀어내리고, 아무도 맛본 적이 없는 남자의 처녀지에 이빨을 박았다. 남자가 고통으로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의 셜록에게 배려라던가 그런 체면치레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잇새로 흘러들어오는 진하고 따뜻한 혈액에 매료된 셜록은 더욱 세게 그를 물었다. 난생 처음 즐기는 신선한 인간의 피는 생각보다 역겹지 않았다. 오히려 극상의 맛이었다. 그 맛을 한결 좋게 만드는 것은 이 인간에게 처음으로 이빨을 박은 뱀파이어가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먹이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니. 셜록은 피 한 방울이라도 새어나갈세라 세게 남자의 목덜미를 흡입했다. 상처가 남을 것이다. 그러나 셜록은 그 사실을 반가이 여겼다. 이 순결한 영토에 맨 처음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발자국을 새기고 아프도록 더럽히고 싶었다.

 

 "하으..."

 

 남자가 신음을 토했다. 놀랍도록 색정적인 신음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자신의 귓볼마저 달아오를 정도로. 피를 마시는 데에 몰두해있던 셜록이 순간 정신을 차리고 남자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남자의 하얀 목덜미에는 끔찍하게 검푸른 멍이 들어있었고 자신의 이빨 자국에 따라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자신이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남자에게 이정도로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에 놀란 셜록은 남자를 쓰다듬어주며 추스르려는 동시에 자신을 눈물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초점이 없이 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눈. 셜록은 다시 한 번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남자의 목덜미에 격정적으로 얼굴을 박았다.
 온몸으로 흘러들어오는 활력이 느껴졌다. 그가 원기를 차릴수록 자신의 몸 아래에서 신음하는 남자의 생기는 가냘파지고 있었다. 이쯤하면 만족할 만도 하련만 셜록의 본능은 더 많은 피를 원하고 있었다. 첫 번째 흡혈을 통해 어느 정도 허기를 충족한 셜록은 산 자의 피를 원하는 지독한 탐욕이 더이상 자신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게 하려 노력했다. 자신에게 이러한 왕성한 욕망이 있었으리라고는 자각하지 못했던 셜록은 약간 당혹스런 심정으로 두 번째 흡혈을 끝낸 후 힘겹게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남자에게서 자신이 억지로 피를 강탈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범죄라도 저지른 듯한 죄악감에 기분이 나빠진 셜록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남자는 그 사이 완전히 정신을 잃은 채였다. 셜록은 망설이다가, 남자를 들쳐안고 인간들이 사는 곳 근처로 향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른 셜록은 남자를 수풀 속에 내려놓고 돌아서려다가 남자의 드러난 목과 그곳에 난 선명한 잇자국에 생각이 미쳤다. 한동안 갈등하던 셜록은 멀리서 동이 터오르는 것을 보고 더이상 생각에 잠겨있을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더이상의 고민을 그만두고 급히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쓰러진 남자의 목에 감아준 후 저택으로 향했다.

 

 

Posted by 에스MK-2 :

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기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 분명한 넓은 살롱은 매우 신중하게 배치된 장식품과 벽에 적절한 간격으로 걸린 고풍스런 그림들로 무척이나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으나 지금 그 안에 그것을 즐길 사람이라고는 아쉽게도 단 한 명의 남자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욱 아쉽게도 그 남자는 방 안에 걸린 예술품을 느긋하게 즐기며 찬탄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어보였다. 대신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온다는 전갈도 보내지 않고 멋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온 것이지만, 남자는 저택의 주인이 곧 자신에게 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남자는 벽난로 앞의 소파에 앉아 화로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가만히 응시했다. 화염에 침식된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잿더미 위로 무너진다. 발갛게 물든 불씨가 허공 중에 휘날리다가 금세 빛을 잃고 가라앉는다. 남자는 발치에 놓인 장작을 들어 벽난로 안으로 던져넣었다. 잠시 잦아들었던 불은 새로운 먹이를 휘감고 기세를 더한다. 퍼지는 열기가 한층 강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의자에 더 깊이 몸을 묻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남자가 입은 트렌치코트가 지난밤부터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 물기로 촉촉했기 때문이었다. 물기에 젖어 원래의 색깔보다 약간 진하게 물든 소매 끝을 매만지며 그는 살롱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올 누군가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헛되지 않아, 커다란 문이 열리며 미약하게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가 기다리던 남자다. 고양이처럼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안에 들어온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스트레이드."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마이크로프트의 부름에 뒤를 돌아본 그렉 레스트레이드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불편한 심기로 얼룩져있었다. 살롱 안으로 막 발을 들인 남자처럼 지루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인성이 마모된 뱀파이어들이 그러한 감정의 징후를 보이는 경우는 극히 적었기에, 마이크로프트는 경탄과 호기심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걱정, 우려, 근심-고작해야 백년을 사는 인간이 몇천년이고 끄덕없이 존재하는 그들을 향해 그런 눈길을 보낸다는 것은 신기한 축에 속하는 일이다. 보통의 인간은 그들을 마주하며 공포, 불안, 거리낌-등의 감정을 보이므로 어느정도 그 상황에 적응한 자들은 으레 인간이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니까.

 마치 신기한 것을 관찰하는 듯한 그의 미소를 본 레스트레이드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지만, 자신의 감정과는 별개로 일단 예의를 갖추자고 생각한 듯 그는 남자의 인사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정중히 답했다.

 

 "마이크로프트."

 

 살롱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옆에 있는 또 하나의 소파에 앉을 때까지 백발의 남자는 아무런 말없이 기다렸다. 참을성을 발휘하던 그는 마이크로프트가 의자에 앉자마자 이제 더는 못참겠다는 것처럼 격하게 마이크로프트를 질책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너무 오래 살더니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나요?"

 

 다소 무례한 어투였지만 마이크로프트는 그에 별달리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고, 그 무심한 태도가 남자의 화를 더욱 돋웠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자각한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지금 소문이 파다합니다. 당신이 너무 오래 살더니 드디어 미쳤다는 둥, 노망이 났다는 둥-"
 "알고 있습니다."

 

 마이크로프트라고 불린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남자의 이어지는 말을 잘랐다. 하지만 남자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소문도 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프린스(Prince)가 허락되지 않은 혈족을 당신이 거두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텐데요."
 "그는 언제나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요. 그가 탐탁치않게 생각하리라는 것은 예상한 바입니다."

 

 그 무엇에도 괘념치 않는다는 듯한 남자의 태연한 표정에 더욱 초조해진 레스트레이드가 말했다.

 

 "소환 명령이 떨어졌단 말입니다."

 

 남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던진 수였지만 안타깝게도 당사자는 별반 동요된 기색이 아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지루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계속 말하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레스트레이드가 계속해서 말했다.

 

 "법정(The court)*으로요."
 "오."

 

 그제야 흥미로워졌다는 듯 마이크로프트가 눈을 빛냈다.

 

 "죄목은?"
 "하도 많아서 일일히 열거하기가 힘이 드는군요."

 

 냉담한 말투였지만 레스트레이드가 마이크로프트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마이크로프트 그 자신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레스트레이드. 뒷배만 믿고 설치는 애송이가 감히 법정을 연다고 해서 내가 순순히 형벌을 받을 정도로 무르리라고 생각하나요?"

 

 마이크로프트는 온화하게 레스트레이드는 다독이며 레스트레이드의 걱정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가 몸에 배인 상냥한 겉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레스트레이드는 그가 레스트레이드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던지는 것에 불과한 말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그만 하세요, 마이크로프트."

 

 거의 반 세기에 가까운 세월동안 마이크로프트의 곁에 머무르면서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에게 말로만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젊었을 적에는 마이크로프트의 신사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언변과 언뜻 엿보이는 우수에 찬 눈빛에 현혹된 나머지 그가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했었지만, 이제 중년의 남자가 된 레스트레이드는 그런 그의 암시적인 행동에 무마되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현명해졌던 것이다.
 지금도 그는 자신 앞에서 짐짓 인간다워 보이는 행동을 보이고는 있었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가 마음의 경박한 편린 따위를 드러낸 순간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그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뱀파이어여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뱀파이어이기 이전의 또다른 문제다. 어쩌면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레스트레이드의 기분은 이유모를 우울감으로 저 아래까지 곤두박질쳤다.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이 속이 상했다는 것을 마이크로프트가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싶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전, 당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겁니다."

 

 퉁명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후후 웃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십분의 일도 살지 못한 한낱 인간 따위가 같은 혈족의 일원보다도 훨씬 농도 짙은 관심과 근심어린 애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그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솔직하게 내가 걱정된다고 말해준다면 좋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어두운 기색의 레스트레이드를 바라보던 그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하긴 내가 침묵의 형벌(dead silence)*을 받는다면 당신도 무사하진 못하겠죠. 버들가지처럼 연약하기 그지없는 당신은...내가 건재하고 있는 동안에 당신에게 눈독을 들여온 탐욕스럽고 천박한 모기 무리의 간식거리가 될 것이고...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워지는군요."

 

 순간적으로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청회색 눈에 서린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송곳처럼 번뜩이는 것에 레스트레이드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가 이리도 쉽게 감정을 표출하는 뱀파이어였던가?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자신의 눈을 의심하던 레스트레이드가 다시 한 번 그의 눈을 바라보자 그 한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미 가셔있었다. 순전히 착시였을 뿐이었을거라고 치부한 레스트레이드가 아직 소름이 가라앉지 않은 팔을 문지르는데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마이크로프트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는 레스트레이드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나의 사람이니까요."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의미의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사람(human)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말하며 마이크로프트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레스트레이드는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직감하고 무어라 말하며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의자에서 일어난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가 자신의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앉아있는 의자로 가까이 다가서서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퇴로를 봉쇄하듯 그를 감싸안아 의자 위에 가둔 마이크로프트는 몸을 굽히어 레스트레이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소환 날짜는 언제죠?"

 

 마이크로프트의 물음에 섞여 나온 미지근한 숨결이 레스트레이드의 귓볼에 와닿았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드럽게 자신의 귓볼을 간지럽히는 달큰한 그것에 고스란히 직면하고 만 그는 바르르 떨며 말했다.

 

 "...내일 밤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는 레스트레이드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을듯이 가까이 다가선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목을 축일 시간은 충분하겠군요. 자...그럼, 그렉."

 

 그렉, 이라는 호칭에 레스트레이드는 몸을 떨었다. 그가 자신의 피를 마시기 전에는 꼭 그의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것을 레스트레이드는 알고 있었다. 마치 섹스를 할 때 이름을 부르며 성감을 돋우는 것처럼. 그리고 확실하게 그것은 레스트레이드를 더욱 무방비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어느 사이엔가 마이크로프트는 잠겨있던 레스트레이드의 셔츠 목깃을 풀어헤치고 하얗게 드러난 레스트레이드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식사는 하고 왔겠지요?"

 

 무언가를 예고하는 듯한 말투에 레스트레이드는 더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그 물음에 답하여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민한 살갗에 와닿는 숨결은 그 어떤 애무보다도 레스트레이드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닥쳐올 행위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등줄기가 쾌감에 대한 기대로 전율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가 산 자의 의태를 하는 것에 불과한 기계적이고 덧없는 호흡이 자신의 목덜미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설렘으로 두근거리며,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의 송곳니가 자신의 살을 찢고 혈관에 이를 박아넣고 피를 빨아들이기를 고대했고, 그의 기대가 배신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금방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법정: 흡혈귀들의 규칙을 어겼을 때 출두 명령이 내려짐. 불응 시 재판 없이 프린스의 주관으로 즉결처분됨.

*침묵의 형벌(dead silence): 일출을 강제로 보게 하는 소멸형刑.

 

*


 흔들리는 의식.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멀리 구석에서 촛불이 타들어가는 희미한 소리와 살며시 흔들리는 불빛 속에서 바닥에 촛농이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수고스럽게 촛불을 켠 이유는 자신 때문이리라. 레스트레이드와는 달리 그는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불이 밝혀진 곳에서처럼 잘 볼 수 있는 시력을 지녔으므로. 레스트레이드는 흐릿한 시야를 맑게 하려 눈을 수 차례 깜박였다.

 

 "쉬어요."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린다. 아픈 아이를 달래는 손길과도 같이 그의 손이 자신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배려심 넘치는 행위에 그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이크로프트 홈즈, 너무나도 오랜 세월 동안 인간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예삿일이 되어버린 그 뱀파이어는 그 자신의 배려가 레스트레이드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을까? 뜻없이 내민 손길이 그를 구름 위로 솟아오르도록 행복하게 만들었다가, 아무 의미 없이 거두어버린 손길이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레스트레이드는 눈을 감고 힘이 빠졌다는 사실을 핑계삼아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렸다. 어느 틈에 침실로 옮긴 것인지 새털처럼 부드러운 베개가 자신의 머리를 감싼다. 다행이야, 하고 레스트레이드는 생각했다. 혹시라도 눈물이 흘러나오더라도 베갯잇에 스며들어 흔적조차 남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마이크로프트에게 피를 빨리어 흐려진 의식 속에서 레스트레이드는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레스트레이드가 마이크로프트를 만난 것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의 어린 시절에 유일하게 선명하게 남은 족적이었다. 소년에 불과했던 그는 마이크로프트에게 외경심을 느끼면서도 왜 그런지를 몰랐다. 그가 지루하게 여겨왔던 일상과는 다른, 충만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 듯한 유심한 눈빛에 혹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뱀파이어 특유의 매료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는 지금에도 그를 연모하는 마음이 힘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의 마음 속에서 나날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있는 것은 그로서는 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눈 때문일까?
 푸른 눈.
 그 눈이 자신을 바라보아준다면...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나간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몸을 쓸어덮치는 피로의 파도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착각으로 여겨질 만큼 상냥한 손길이 그의 머리칼을 쓸어넘긴 것 같았다.

 

*

 

 레스트레이드가 깊은 잠에 빠져들자 마이크로프트는 그제야 레스트레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망설이던 손끝이 부드러운 그의 은백색 머리칼에 닿았다.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감정을 느끼며 더없이 상냥하게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이 새긴 잇자국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목덜미에 시선이 미쳤다.
 눈 앞의 남자는 5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의 곁을 지켰다. 50년은 그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일부, 정말로 일부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동안 남자는 자그마한 검은 머리의 어린아이에서, 다정하고 활기찬 젊은이로, 그리고 은회색의 머리칼의 중년으로 변했다. 보드랍고 발그레했던 그의 뺨은 이제 더이상 팽팽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를 여전히 곁에 두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확실히 처음에는 아름다운 그에게 끌렸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중후한 성인 남성이 된 그가 여전히 아름다운가? 그는 자문했다.
 답은 하나다. 그는 여전히 아름답다. 세간의 미의식이 뭐라 말하든 간에 그가 마이크로프트의 눈에는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가가 커가고 늙어가는 과정을 시시각각으로 관찰하면서 무언지 알지 못하는 감정이 자신의 안에서 고개를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꽝꽝 언 얼음구덩이에서 미세한 균열이 일고, 그 틈새로 싹트는 무언가. 마이크로프트는 그것을 정의할 수 없다. 대신 마이크로프트는 정의한다. 레스트레이드는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이라도 잠자는 사이에 숨을 거둘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이크로프트는 그답지 않게 초조한 심정이 들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 감정을 무어라 명명하기에 마이크로프트는 인간이 그렇게도 연연해하는 감정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마음이 없는 괴물로서 너무 오랜 세월동안 살아온 탓일 것이다. 그 점을 마이크로프트는 애석하게 생각했다.
 -아니, 그는 단지 겁이 났을 뿐이다.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를 어루만지고 있던 손을 떼었다. 한 발짝만 더 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절벽에서 도망치는 것처럼 그는 자리를 떴다.

 

*

 

 눈을 뜬 그는 곧바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회중시계를 꺼냈다. 누가 봐도 옛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옛 사람들의 유물인 그것은 마이크로프트가 선사한 물건 중에 하나였다. 긴 바늘이 2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 있고, 짧은 바늘이 10 근처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레스트레이드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싶어 침대에서 급히 몸을 일으켰다.
 침실 바깥으로 나오자 마이크로프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 앞에 서 있었다. 만 하루에 가까운 시간 동안 휴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낯빛이 창백한 레스트레이드의 안색을 본 마이크로프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너무 내 욕심만 채웠나 보군요.-몸이 좋지 않으면 말해요."

 

 확실히 어제의 마이크로프트는 그답지 않게 레스트레이드의 피를 너무 많이 마신 감이 없지 않았다. 그동안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피를 빤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제 마이크로프트는 마치 레스트레이드의 내부의 모든 것을 삼켜버리겠다는 기색으로 그의 피를 마셨다. 마치 무언가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급하게, 그는 그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레스트레이드의 피를 마시는 것 같았다. 오랜 세월 동안 흡혈당하는 것에 적응된 레스트레이드가 겁을 더럭 집어먹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피를 마시다가 그를 죽일지언정, 그가 자신의 피를 마시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 더욱 싫었다. 마이크로프트가-표면적인 관심일뿐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걱정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레스트레이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괜찮습니다."
 "흐음."

 

 묘한 신음성을 흘린 마이크로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이 아닐지 두려웠던 레스트레이드는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어서 가셔야지요. 곧 재판이 시작됩니다."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줄곧 레스트레이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마이크로프트가 대답했다.

 

 "그 전에 당신 매무새나 좀 정리하는 게 좋겠군요. 자...이리 와요."

 

 그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레스트레이드를 자신 앞으로 가까이 끌어당긴 마이크로프트는 헝클어진 옷깃을 단정히 매만져주었다. 그가 손수 그리해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레스트레이드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하긴 그의 기준에서는 그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행위일 뿐인 것에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될 터였다. 마이크로프트는 미에 대한 탐닉이 피를 섭취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또레아도르일 뿐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떠올린 레스트레이드는 들떠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일부러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 나니 훨씬 진정되는 듯했다.
 마이크로프트가 온 신경을 집중해 그의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카락을 빗어주는 사이 레스트레이드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운 그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많은 혈족들이 모이는 법정에 출두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욱 신경을 썼는지 그는 신비스런 느낌을 자아내는 비둘기색 실크 턱시도 수트를 걸치고 있었다. 목 끝까지 채운 단추, 그리고 진주색 넥타이는 흡혈족에게 필연적으로 드리워져있는 죽음의 그림자에서 염세주의자가 느낄 법한 강렬한 그의 관능미를 경건하게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흠 잡을 데 없는 그 차림에 자신의 낡아빠진 코트와 평범하기 그지없는 차림새가 부끄러워진 그는 위축되는 자신을 감출 수 없었다.

 

 "다 되었군요."

 

 만족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마이크로프트의 시선에 레스트레이드는 그를 향하고 있던 질투의 시선을 거두었다. 그 질시의 감정은 레스트레이드가 마이크로프트를 사랑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류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우월한 자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에 불과했다. 질투를 해보았자 시대를 초월하여 변함이 없는 그의 우아함이 퇴색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갈까요."

 

 그는 검정 장우산을 집어들고 그것을 지팡이 삼아 앞뒤로 흔들며 레스트레이드에 앞서 걸었다. 레스트레이드는 그를 놓칠세라 황급히 걸음을 서둘렀다.

 

*

 

 음산한 분위기의 높은 천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여러 명의 남녀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더욱 똑똑히 들렸다. 콜로세움처럼 가운데의 원형의 공간만을 남긴 계단형의 강당에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착석해 가운데로 걸어나오는 마이크로프트와 레스트레이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남녀들이 그 둘을 바라보며 서로에게 귀엣말을 했다. 간간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방 안에 속삭임처럼 울려 퍼졌다. 모든 사람이 점점 이 사건이 주는 매력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간해서는 변화가 없는 그들의 무료한 일상에 이만큼이나 큰 파장을 일으킨 일은 오랜만이었으니까 말이다.
 마이크로프트가 가운데 피의자를 위한 의자가 마치 왕좌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앉자 비어있던 배심원석이 속속 들어차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은 런던 뱀파이어들의 수장인 프린스였다. 그가 도착하자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떠들던 목소리가 잦아들고 고요하고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압박적인 정적을 깨고 프린스가 입을 열었다.

 

 "착석."


 프린스가 착석함에 따라 다른 뱀파이어들도 하나둘씩 자리에 앉았다. 조용해졌던 장내가 다시금 어수선해지는 것에 서기가 주의를 주었다.
 

 "정숙하세요."

 
  그러나 또레아도르 클랜의 프리모진-뱀파이어 클랜의 대표자-이자, 권위있는 엘더 가운데 하나이며, 런던에서 프린스 다음의 위명을 지닌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뱀파이어 법정에 피의자의 신분으로 출두했다는 것은 많은 뱀파이어들에게 소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을 둘러싼 이들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즐기기라도 하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들이 소란스러우면 소란스러울수록 휘하 뱀파이어 하나 똑바르게 통솔하지 못하는 프린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자신의 네임 밸류는 올라가는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프린스를 비롯한 판사 측에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이크로프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금어질수록 그들의 표정에는 불편한 심기가 번졌다. 그들과는 별개로 인간 조력자의 자격으로 법정 안에 입장한 레스트레이드 또한 마이크로프트가 부리는 만용과 같은 태도에 몹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저히 수습되지 않는 분위기를 보다못한 프린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마이크로프트의 혐의를 명시한다."

 

 그제야 쥐죽은 듯 조용해진 장내를 둘러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제 1혐의, 말살해야 마땅한 카이티프*를 보호하여 카마릴라의 안위를 불안하게 하였음.
  제 2혐의, 그러한 행동으로 섹트*과 섹트 내의 킨드레드*의 존립에 악영향을 미침.
  제 3혐의-"

 

 이어지는 말에 마이크로프트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내려갔다. 그가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의혹삼을 수 있는 혐의가 저 두 가지 말고 또 있단 말인가?
 그러한 의문은 마이크로프트 뿐만이 아니라 법정에 참석한 다른 뱀파이어들도 품게 된 것이어서 한순간 그들이 더욱 바삐 귀엣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린스는 그러한 소음따윈 무시하고 계속해서 혐의를 읊었다.

 

 "제 3혐의, 섹트의 안전을 수호하며, 프린스를 대신하는 스커지*의 행동을 제약하여 프린스의 권위를 무시함.
  제 4혐의, 클랜의 프리모진이라는 지위에 오르기 위해 디아블러리를 하였다는 제보를 접수했고, 정식 혐의로 인정. 따라서 이 법정은 이 네 가지의 혐의에 대하여 마이크로프트 홈즈 본인이 해명하기 위해 열렸음을 알린다."

 

 디아블러리, 라는 말이 프린스의 입에서 나오자 레스트레이드는 주먹이 하얗게 되도록 꽉 쥐었다.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몇몇의 헉 하고 놀란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디아블러리는 모든 뱀파이어들의 규칙에서 가장 준수되어야 하는 규칙 중에 하나로, 그것을 어기는 자는 정상참작의 여지라곤 없이 곧바로 침묵의 형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디아블러리란 자신보다 윗세대의 뱀파이어의 피를 마심으로서 세대의 위계를 거스르는 행위로, 디아블러리는 한 자는 당한 자의 지혜와 힘을 가질 수 있지만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됨과 동시에 섹트로부터 척살령을 발부받고 지명수배를 당하는 극악의 행위였다. 디아블러리에 대한 대처가 이토록 강력하다 보니 감히 전 뱀파이어 사회로부터 추살을 당하고 싶은 정신나간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에야 그것을 저지르는 일은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처벌이 해명의 기회 없이 즉결처분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뱀파이어들 간의 정치적인 세력 다툼에서 다른 뱀파이어가 그와 적대적인 뱀파이어를 디아블러리 혐의로 몰아 죽이는 일은 다반사였다. 마이크로프트가 그나마 재판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은 그가 워낙 유명하고 인지도가 높은 뱀파이어였기 때문에 그를 무턱대고 죽였다가는 세간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임을 인식한 엘더들의 판단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다른 뱀파이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는 마이크로프트의 명성을 질투한 프린스가 벌이는 단순한 위력 행사의 차원이 아니라, 프린스를 비롯한 런던의 뱀파이어들의 지도부가 마이크로프트를 심각하게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과 다름이 없었다. 파티라도 온 듯한 처음의 떠들썩한 분위기는 완전히 심각하게 가라앉아버렸다.
 조용한 가운데 프린스가 입을 열었다.

 

 "발언하세요, 마이크로프트."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다분히 의식하며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발언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깃털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해진 법정에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목을 가다듬은 마이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프린스여, 그리고 그와 더불어 경애받아야 마땅할 엘더들이시여. 부디 피가 흐르는 동안 끝없이 이어질 영광과 홍복을 누리소서. 저는 저에게 쏟아지는 이와 같이 터무니없는 의심들에 깊은 슬픔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나이다."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하자 좌중에 젊은 축에 속하는 뱀파이어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옛 브리타니아의 언어-즉 고대의 영어로 발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몇 백년도 더 지나 쓰일 일이 없었을 그때의 언어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연설문을 읽어내려가듯 말해내고 있다는 것은 다시 한번 그가 오랜 동안 영국의 터전을 다져온 유서 깊은 뱀파이어 일족 중에 하나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지능적인 장치의 하나였다. 스코틀랜드의 차디찬 계곡물이 하얗게 얼어버린 살얼음 사이로 흘러가는 것처럼 유창한 말이 이어졌다.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는 그의 말을 한 엘더가 중단시키고 말했다.

 

 "그대가 우리와 함께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을 잘 알겠소. 그러나 어린 뱀파이어들이 당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니 현대의 언어로 발언해주길 바라오."

 

 그의 말에 발언을 멈춘 마이크로프트가 한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다시 발언을 시작했다. 잠시 숨을 돌릴 만도 하련만 마이크로프트는 기다렸다는 듯 현대 영어로 다시 말을 계속했다.

 

 "먼저 가장 먼저 제게 지워진 혐의에 대해 반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제 보호 아래에 들어온 그 혈족은 비록 대부에게 버림받긴 했지만, 그를 카이티프라고 칭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는 엄연히 카파도키안* 클랜에 속한 혈족이기 때문입니다."

 

 프린스의 뒤에 열을 지어 착석한 엘더들 가운데 하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카파도키안은 이미 절멸당했소! 선조의 무덤에 잠들어 있는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오! 설마 토퍼*에 빠지신 분이 그 카이티프를 자신의 아이로 삼았다는 억지를 주장하지는 않겠지요?"

 

 다른 엘더가 거들었다.

 

 "그 아이가 정말로 카파도키안이라면 더욱 큰 문제요. 카파도키안의 대부분은 우리의 섹트, 카마릴라*에 대적하는 사악한 사바트*에 가담하였던 전적이 있다는 것을 다들 잘 아실테지요. 아까 트레메레* 클랜의 프리모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카마릴라에 적대하지 않은 카파도키안 클랜의 혈족은 단 한 명만이 남아있을 뿐인데, 그 분 이외의 카파도키안이 그 인간을 자신의 자손으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필시 그로 하여금 우리 섹트를 염탐하게 하려는 의도일겁니다. 만약 그를 받아들였다가 생길 수 있는 사단의 경우의 수를 제가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터이니 더이상의 말은 아끼도록 하지요."

 

 자못 논리정연한 엘더들의 말에 레스트레이드와 몇몇 뱀파이어들은 우려 섞인 시선으로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 전혀 기가 죽지 않은 채로 꼿꼿이 서서 말을 이어나갔다.

 

 "벤트루* 클랜의 프리모진께서는 대체 무슨 근거로 대부에게 버림받은 채 길바닥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아이가 카마릴라를 염탐할 것이라고 간주하시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트레메레의 프리모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트레메레의 프리모진께서 사바트의 살아남은 카파도키안과 내통을 하지 않는 이상에야 그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무슨 망발을!"

 

 신랄한 비판에 앞서 발언한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발끈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마이크로프트는 빙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흥분하여 길길이 날뛰는 그를 지켜보았고, 그러한 그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난 남자는 아예 피고인석으로 뛰어나가 마이크로프트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으나 주변의 뱀파이어들이 말리는 바람에 그러한 행동은 무산되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카파도키안 클랜이 과거에 사바트에 가담하여 우리에게 적대하긴 했으나, 그는 엄연히 새로이 혈족이 된 사람이며, 그 대부에게 버림받기까지 한 아이입니다. 따라서 그가 일부 적대자들의 죄과를 대신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연좌제나 다름없는 처사입니다. 여기 계신 킨드레드들께서 다 아시는 것이겠지만 연좌제는 극도로 전근대적인 악습이며 지양되어야 할 폐습이지요."

 

 거기까지 말한 마이크로프트는 입을 다물고 뱀파이어들이 저들끼리 의논하는 것을 마치기를 기다렸고,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렇다면 서론은 충분히 길었던 것 같으니 이제는 제게 지워진 첫 번째와 두 번째 혐의를 완전히 벗기 위해 노력해보도록 하지요."

 

 마이크로프트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주위를 한번 휘 둘러보며 말했다.

 

 "사실 트레메레의 프리모진께서 걱정하시는 바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사바트 클랜에서 서서히 활동을 재개하여 우리의 영역으로 준동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저도 알기 때문이지요. 그 중에 특히 우리가 유념하고 상대하는 데에 있어 주의를 기해야 하는 이들은 바로 펠로워즈 오브 세트* 클랜이지요. 그들에게는 흡혈귀에 대한 강력한 매료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펠로워즈 오브 세트의 대항마가 있다면,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카파도키안들입니다. 펠로워즈 오브 세트는 세트, 즉 죽음의 신의 추종자이고, 세트를 섬기는 대가로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반면 카파도키안들은 죽음에 대한 연구에 특화되어있고, 그들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 존재들이기에 외양이 독특할 뿐 아니라 펠로워즈 오브 세트의 매료 능력에 면역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요. 그들이 카마릴라에 적었기에 지난번 대전쟁에서 카마릴라가 많은 희생을 대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제가 왜 그 연약한 아이를 거두어 제 보잘것없는 보살핌의 날개 아래에 두었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프린스가 입을 열었다.

 

 "따라서 그대의 행동은 킨드레드의 존립에 위태한 처사가 아니라 오히려 존립을 돕는 처사라는 말인가요?"

 

 마이크로프트가 프린스를 향해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제가 할 말을 프린스께서 대신해주시는군요."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엘더들이 웅성거렸다. 잠시 후 아직도 화가 덜 풀린 듯한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일어나 말했다.

 

 "좋소. 그대의 발언의 정당성을 인정하여 제 1혐의와 제 2혐의의 죄목은 거두도록 하겠소. 그렇다면 이외의 혐의에 대해서는 어찌 반박을 하실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하구려."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파닥이는 것을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잔인한 웃음을 머금은 그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마이크로프트가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그 어린 혈족을 보살피는데 스커지들이 기웃거리길래 자리를 피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한 일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군요."
 "내가 듣기로는 간곡히 부탁한 것이 아니라 그 알량한 위세를 믿고 위압적으로 스커지들을 압박했다고 들었소만?"

 

 자리에 앉은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이죽거리며 말하자 마이크로프트는 짐짓 선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못 아시는게 분명합니다. 프리모진께서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잘못 전한 말을 믿어버리신 게로군요."

 

 일견 유감스럽다는 듯 말하고는 있었으나, 마이크로프트가 한 말에 남이 한 말을 의심없이 믿는 당신은 천하의 바보 멍텅구리, 라는 뉘앙스가 듬뿍 들어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는 없었다. 법정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오자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의 얼굴이 다시 벌개지기 시작했다. 장내가 다시 시끄러워지는 것에 서기가 소리쳤다.

 

 "정숙!"

 

 간신히 정리된 분위기가 다시 들떠오르기 전에 마이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스커지들의 행동을 방해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무고한 혈족을 재미삼아 몰이 사냥을 하듯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잔인한 처사를 보이지 않았다면 저도 아마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었을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워낙 시끄럽게 날뛰기에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길래 그렇게 즐거워하는지 궁금해서 다가갔고, 죽어가는 혈족을 발견했지요. 그 이후에 제가 한 일에 대해서는 이미 다들 잘 아실겁니다."
 "그렇다면 제 3혐의에 대해서 인정하고 순순히 죄를 청한단 말씀이십니까?"

 

 엘더 중 하나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분개하는 척 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프린스와 따로 이야기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이런 공개 석상에서 제 행동에 대해 비난을 하는 이가 하나 둘이 아니니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겠군요."

 

 마이크로프트가 프린스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런던에 터를 잡은 뱀파이어들이라면, 다른 이의 영역에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되며, 다른 이의 영역에 발을 들일 시에는 그 영역의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출입을 청하는 것이 오랜 관습이며, 그 관습에 따라 출입을 청한 혈족을 환대하고 그 청을 허락하는 것이 우리들의 규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프린스의 스커지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공무를 집행하느라 미처 허락을 취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으시겠지요. 하지만 불쌍한 어린 아이를 마치 장난감삼아 갖고 놀듯이 느긋하게 사냥을 하는 그들은 아주 시간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특별한 경우였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제 영역에 그대의 스커지들이 인사 한 마디 없이 쳐들어와 장난삼아 인간을 사냥하는 행위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어왔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그러나 저는 그것에 토를 단 적이 없습니다. 왜냐고요? 당신의 수족이며 당신을 대신하여 대외적인 행동을 담당하는 수하들이기 때문에 섣불리 제가 질책하는 것을 삼간 것입니다. 잘못 이야기가 와전되면 내가 당신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고려한 처사였습니다."

 

 빈틈없이 짜인 논변을 이어나가던 마이크로프트가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이로써 내가 얼마나 프린스의 권위에 복종하고 있는지, 잘 설명이 되겠지요."

 

 법정의 뱀파이어들은 말이 없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혐의는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군요. 또레아도르 클랜뿐 아니라 저와 같은 세대 위의 선대들은 지금 모두 토퍼에 빠져 계신 걸 다들 알텐데요? 제 대부도 잠들어 계신 선대 중 하나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감히 디아블러리라는 용서받지 못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는 선조의 무덤으로 남몰래 잠입하여 들어가서 잠든 선조를 깨우고, 감히 선대 혈족의 피를 마시고, 다시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선조의 무덤을 빠져나와 런던 외곽 중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제 저택으로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는 것에 성공한 채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군요."

 

 마이크로프트가 냉엄한 어조로 말을 잇다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누가 감히 그러한 거짓 제보를 했단 말입니까? 선대들께서 영면해계신 곳에 누가 들어가보기라도 했나보지요? 그곳이 금지구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프린스가 손에 든 깃펜을 움직여 무언가를 끄적이고 자기 앞에 놓인 종이 몇 장을 펄럭펄럭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항변을 마이크로프트는 천천히 의자에 다시 앉았다.
 정적을 깨고 프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혐의."

 

 그가 입을 열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가장무도회의 규칙*을 어겼소. 그는 인간을 사사로이 곁에 두고 그에게 인간이 알아서는 안되는 밤의 질서를 가르쳤으며 뱀파이어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게 하여 훗날 그들이 밤의 세계를 침략할 때 사용할 앞잡이로 길러냈소."

 

 법정에 앉아있던 뱀파이어들의 시선이 한순간 레스트레이드를 향해 쏠렸다. 마이크로프트가 그렉 레스트레이드라는 인간을 총애하여 한시도 빠짐이 없이 그의 곁에 둔다는 것은 알만한 뱀파이어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의심, 혐오, 식욕이 뒤섞여 번뜩이는 그들의 눈초리가 무섭게 레스트레이드를 꿰뚫었다. 그러한 가운데 프린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라는 제보 또한 들어왔다. 마이크로프트 홈즈에게 제보의 신빙성을 반박할 것을 요구한다."

 

 프린스가 자리에 앉자 마이크로프트가 기가 차다는 듯 대꾸했다.

 

"하! 언제부터 그것이 그리도 큰 죄가 되었단 말입니까? 예로부터 선대들께서도, 그리고 누구라 이름부를 수는 없지만 지금도 수많은 혈족들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도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인간들이 우리를 정복하는 것에 일조하기 위함이 아니요, 햇빛이 미치지 않는 밤에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우리들이 인간 세상에 잘 녹아들도록 하기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잖습니까? 그리고 인간들이 밤의 세계로 감히 침략을 한다는 유언비어는 대체 누가 퍼뜨렸지요? 그런 근거없는 낭설로 킨드레드를 부화뇌동시키는 자를 엄벌해야합니다."

 

 마이크로프트가 몸을 일으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므로 저는 프린스께서 공의회(엘리시움*)를 여실 것을 제안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일어나 소리쳤다.

 

 "공의회의 수장은 당신이 아니오! 키퍼 오브 엘리시움*이 당신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는 줄 아시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군!"
 "그렇게 흥분하시는 이유가 없을 텐데요. 어딘가 뒤가 구린 구석이라도 있소?"

 

 여태껏 가만히 사태가 돌아가는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브루하*의 프리모진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입을 다물었고, 브루하의 프리모진이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떳떳하오. 프린스께서 엘리시움을 여는 것을 허가하고 마이크로프트가 그 집정관이 된다고 해도 나를 비롯한 브루하의 일족은 우리의 수호자 달빛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울 일이 없을 것이오."

 

 그의 진지한 태도에 다들 수그러드는 찰나에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쳇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죄인의 혐의를 지닌 이가 공의회의 수장이라니, 말세로군, 말세야!"

 

 그 말을 놓치지 않은 마이크로프트가 나직이 말했다.

 

 "그건 선대들께서 나에게 허용하신 직위입니다. 만일 여기에 그때 나에게 키퍼 오브 엘리시움의 권위를 쥐어주신 이보다 높은 이가 있다면 감히 그 권한을 회수해가도 좋습니다."

 

 그들 세대보다 높은 선대의 혈족이 모두 잠들어있는 데에야, 감히 마이크로프트에게서 그 권리를 뺏을 수 있는 이가 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다. 우아하게 입꼬리를 올려 그를 향해 미소지은 마이크로프트는 곧 프린스를 향해 몸을 돌려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천천히 말했다.

 

 "엘리시움은 열지 않는다."

 

 이어서 그가 말했다.

 

 "판결을 내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 결과가 빤히 보이는 일이었고, 그 판결을 짐작하는 이도 없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프린스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가 선언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 무혐의."

 

 레스트레이드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뱀파이어들 중 일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일부는 원성을 토해냈으며, 일부는 차분하게 무표정을 지킨 채였다. 그러나 프린스의 말을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러나 배심원 중 일부의 의견을 수용하여 법정 모독죄 혐의는 인정. 따라서 3개월의 칩거를 명한다."

 

 재판 내내 마이크로프트에게 맺힌 것이 많았던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은 프린스의 처사가 지나치게 너그럽다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프린스의 의사는 확고부동했다. 엄정한 품위를 유지한 채로 프린스는 자리를 떴고, 그 정도의 제재도 감수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던-더한 처분도 예상했었으므로-마이크로프트는 경의를 표하듯 그의 뒷모습을 향해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그 날 밤의 재판은 다소 싱겁게 끝났다.

 

*

 

 재판이 끝나고 재판정을 빠져나온 마이크로프트와 레스트레이드는 아무런 말 없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레스트레이드는 무언가 수심에 잠긴 기색이었고, 레스트레이드가 급작스레 기분이 나빠진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마이크로프트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모든 혐의에서 자유로워진 마이크로프트 자신에게 안도의 미소라도 지어줄 줄 알았건만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거는 것조차 거부하는 고통스런 안색이었다.
 밤은 어느덧 끝자락에 다다라, 하늘을 보니 달빛이 시시각각으로 선명해져 사위는 온통 부드러운 은빛으로 환해져 있었다. 새벽녘이 되기 직전의 마지막 반짝임을 뽐내는 별들의 장막이 하늘에서 듬성듬성 반짝였고, 그 아래에 선 그들은 저택의 정원에 들어서 걸음을 멈추었다.

 

 "레스트레이드."

 

 마이크로프트가 먼저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무슨 연유로 그렇게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나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겠어요?"

 

 그답지 않게 극도로 정중한 말투였다. 레스트레이드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쳤다.

 

 "수단이라고요? 수단이라고요?"

 

 그제야 레스트레이드가 무엇에 화가 난 것인지 알아챈 마이크로프트가 그를 진정시키려 팔을 뻗었다. 아까 전 재판 과정에서 레스트레이드를 인간의 삶에 녹아들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했던 것에 대해 그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마이크로프트가 레스트레이드의 어깨를 잡으려고 노력했으나 놀랍게도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의 손을 쳐내었다. 깜짝 놀란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레스트레이드, 진정해요."
 "제가 겨우 수단에 불과했던 거군요? 아주 잘 알겠습니다."
 "레스트레이드!"

 

 흥분하여 평소의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행동과 언사를 뱉어내는 레스트레이드에게 마이크로프트가 소리쳤다. 그제야 레스트레이드가 비아냥대는 것을 멈추었다. 잠시 그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고르는 소리만이 고요한 저택을 채웠다.
 마이크로프트가 차분하게 말했다.

 

 "거기엔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요. 만약-"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미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말을 듣는 데에 자신의 온 생애를 쏟아왔고, 그것은 기나긴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고통만을 그에게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에 진력이 나고 만 것이다.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가로막고 레스트레이드가 말했다.

 

 "됐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말뿐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절 달래느라 마음쓰실 필요 없어요."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가 그렇게 말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천하의 마이크로프트가 할 말을 잃고 바보처럼 가만히 서있을 뿐인 그 모습에 약간의 고소함과 양심의 가책이 동시에 자신의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며 레스트레이드가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저는 적어도, 그보다는 나은 것을 바랐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다가 곧 끊어졌다.

 

 "그건 그렇게 큰 욕심이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아니었나보군요."

 

 마이크로프트는 입술만 뻐끔거렸고, 레스트레이드는 더이상 그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앞으로 3개월 동안 형기를 치르실테니 저는 필요하지 않겠죠. 그 동안에는 절 필요로 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레스트레이드!"

 

 뒤늦게 마이크로프트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불렀으나 레스트레이드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을 떠나가버렸다.

 

 "그렉…."

 

 그가 떠나간 후에야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가 돌아서서 가버린 뒤로 공허한 그림자만이 잠시 맴돌다 사라진다.
 마이크로프트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오랜 동안 축적되어 아픔에 젖은 절규를 토해내고 레스트레이드는 떠나버렸다. 그런 그를 차마 잡을 수 없었다. 잡아야 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그가 떠남과 동시에 무너지듯 주저앉을것만 같았지만 마이크로프트는 그러지도 못했다.
 무겁게 눈을 감는다.

 도저히 그에게 할 수 없었던 고백을 그가 떠난 뒤에서야 읊조린다.

 

 "내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 가지 말아요…."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깊은 고요에 감싸인 매혹적인 저택, 그리고 저택을 둘러싼 은은한 달빛만이 외로이 선 그를 비추었다. 햇빛이 들이치기 전까지, 그는 그렇게 망부석처럼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카이티프: Caitiff. 정상적인 클랜이나 블러드라인 소속의 대부가 포옹했으나, 클랜의 특질을 결정짓는 요소가 전달되지 않았던지 부족하게 만들어지는 등의 기타 이유로 무언가 잘못되어 클랜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진 자를 카이티프라고 한다. 이들은 뱀파이어이기는 하지만 클랜의 아무런 특징도 갖지 못하므로, 클랜의 약점도 없고 클랜 디시플린도 얻지 못하며 정상적인 혈족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정상적인 대부라면 자신의 책임을 다해 자식을 지켜볼테니 카이티프는 없는 존재이거나 만들어지더라도 대부의 손에 금새 처리되어야 마땅하지만… 카마릴라 내에서도 종종 엘더의 허락없이 막무가내로 포옹해놓고 버려놓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카이티프가 만들어져서 노숙자처럼 연명하는 경우가 가끔 있으며, 프린스는 카이티프가 발견되면 스커지를 보내서 청소해버린다.


*섹트: 뱀파이어 사회의 파벌. 카마릴라와 사바트로 나뉜다.

*킨드레드: 혈족의 이르는 다른 명칭


*스커지: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뱀파이어나 뜨내기들을 수색해서 무력으로 처리하는 프린스(도시의 지배자 뱀파이어)의 사조직

*카파도키안: Cappadocian. 죽음과 영혼에 대해 연구하던 금욕적인 클랜이었으나, 아우구스투스 죠반니의 쿠데타에 의해 절멸했다. 보통의 뱀파이어에 비해 외모가 훨씬 시체스럽게 보인다

*토퍼: 뱀파이어의 나이가 많이 들었거나 입은 상처가 지나치게 깊으면 그것을 재생할 때까지 죽은듯한 깊은 잠에 빠져드는데 이 수면을 토퍼(Torpor)라고 한다. 뱀파이어가 오래 될수록 토퍼의 기간이 길어지는데, 고대 시절의 정말로 오래된 뱀파이어는 토퍼를 수백년에서 천년까지 빠져드는 경우도 있다.

*카마릴라: 카마릴라(Camarilla)는 마스커레이드(가장무도회의 법칙, 하단 참조)를 지키고 인간성을 보존하는 것에 대체적으로 찬동하는 클랜들로 구성되어있다. 브루하, 강그렐, 말카비언, 노스페라투, 또레아도르, 트레메레, 벤트루가 카마릴라에 속해있다. 카마릴라의 구성원은 가장무도회의 법칙을 비롯해 몇가지 전통(Tradition)이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사바트: 사바트(Sabbat)는 뱀파이어가 인간보다 우월한 종임을 드러내고자 인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놓고 습격하며, 또한 앞으로 닥쳐올 게헨나의 날에 돌아와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할 카인의 검이 되어(한마디로 적극적으로 앞잡이가 되어서) 세상을 휩쓸어버리자는 게헨나 컬트적인 클랜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바트는 자기네 클랜의 앤티딜루비안(선대)을 살해하는데 성공하고 클랜의 주도권을 틀어쥔 라솜브라, 쯔미시 클랜을 핵심으로, 카마릴라 클랜 출신이지만 반골적인 성격을 가져서 뛰쳐나온 앤티트리뷰(Antitribu)들이 추가되어있다.

*트레메레: Tremere. 트레미어는 한때 인간 마법사의 학파였으나, 영생을 추구해 스스로 뱀파이어가 되었다. 강력한 피의 마법을 사용해서 카마릴라를 지탱하는 중추이지만, 중세 때부터 수많은 적을 두었기 때문에 클랜 조직에 대한 충성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한다. 카마릴라 내부에서는 이들을 미심쩍게 보는 시선이 많다

*펠로워즈 오브 세트: Followers of Set. 그들의 클랜 선조가 이집트 신 세트(Set)라고 믿는 그 후예들. 언젠가 돌아올 절대적인 악의 신 세트의 앞길을 닦아놓는 것에 비밀스럽게 전념하고 있다. 영혼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대면하고 있으며 타락과 유혹의 달인이므로 그 어떤 혈족에 비해도 악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암흑의 존재이기 때문에 빛에 극도로 민감하며 태양광선이 아니라도 강한 빛에 괴로워한다. 중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악의 축.

(소설의 흐름상 이집트의 악신 세트를 죽음의 신으로 묘사했으나 사실 이집트의 죽음의 신은 아누비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백과사전에 따르면 아누비스=명계의 신, 오시리스=사자死者의 신, 세트=악의 신이군요. 그런데 이집트 신화는 상이집트-중이집트-하이집트를 거쳐오면서 변화가 상당히 많이 일어났거든요. 신들의 역할이 이집트 왕조의 입맛대로 변형도 되고...이런 묘사를 그런 변화의 갈래 중에 하나로 보아주십사...하는 건 무리겠지만, 여튼 이해해주세요)

*가장무도회의 법칙: Masquerade. 인간에게 정체가 밝혀져서는 안된다.
*엘리시움: 뱀파이어들 사회에서의 정치의 장. 공의회.


*키퍼 오브 엘리시움: Kepper of Elysium. 엘리시움의 평온을 위해 엘리시움 내 모든 것을 관리하는 담당관. 작중에서는 공의회의 수장, 의회의 의장 역할.

*브루하: Brujah. 한때 위대한 철학을 겸비한 강력한 전사였으나, 많은 좌절을 겪은 현재는 반항적인 정치 행동주의자가 되었다. 강력한 전사적 능력을 갖추었으며 카리스마적인 연설가이기도 하나 광포화하기 쉬운 약점을 갖고 있다.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