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피의 본능은 유혹,

진한 향기는 와인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은 키스보다 황홀하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사랑처럼 달콤하다.

 

  

밤비가 차갑다.
 유례없이 거세게 내리는 비가 따갑다.
 비 내리는 거리를 가득 메운 비, 빗물, 빗방울, 빗줄기, 빗소리-커졌다 작아졌다 간헐적으로 후드드 울어대는 빗소리, 사정없이 떨어지는 빗줄기, 우산자락에 내려앉았다 둔탁한 파공음을 내며 튕겨나가는 빗방울, 흘러내려 땅바닥에 고인 빗물, 바닥을 적신 빗물로 깜깜한 아스팔트 바닥은 퇴색한 별빛마냥 조근조근 빛나는데 그마저도 가로등 불빛에 가리워 죽어버리는 반사광이 처량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런던의 밤거리에 가득한 어둠과 비 속에서 한 남자가 무너져버릴 것만 같이 위태하게 서 있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는 감옥처럼 그를 짓누르고 어슴푸레하게 깔린 비안개가 하얗게 그의 숨통을 조이고 보도블럭을 때리는 빗소리가 마치 상처입은 호랑이의 신음소리처럼 울부짖으며 온 밤하늘을 울린다. 검푸른 빛깔의 하늘을 바탕으로 길게도 내리는 빗줄기의 불협화음에 가까운 군무가 달빛을 받아 간간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둥글게 뜬 만월은 구름을 베일삼아 그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갓 남편을 잃은 미망인처럼 조용히 숨죽이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오랜 동안 비를 맞고 서 있었기 때문에 흠뻑 젖어버린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서는 물방울이 맺혀 뚝뚝 흐른다. 본디도 창백한 안색이었을 성 싶은 남자의 하얀 얼굴은 찬 비 때문인지 더할 나위 없이 파랗게 질려 흡사 익사체를 보는 듯 기묘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여윈 뺨의 윤곽이 파르스름하게 날 선 칼처럼 매몰차다.
 빗줄기 하나가 그의 뺨을 타고 흐르며 눈물처럼 투명한 궤적을 남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는 유리알같은 눈은 그 무엇도 담지 않는다. 그 눈꺼풀 위를 비가 무겁게 누른다. 무게감에 잠시 눈을 감는다.

 

 "비를 맞는 기분은 어떤가?"


 옆에서 어떤 차분한 목소리가 말한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음역대의 그 목소리와 함께 수많은 감각이 일깨워져 그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농탕질을 치는 와중에도 그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부드럽고 나긋한 첼로의 선율과도 같이 우아한 어조.
 대답없는 그에게 남자는 다른 물음을 던졌다.


 "생명이 사그라지는 기분은 어떤가?"


 신기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질문한다. 그 질문에 비를 맞고 있던 남자-셜록 홈즈는 불현듯 눈을 떴다.
 그렇다. 셜록 홈즈는 죽어가고 있다.
 도무지 현실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는 남자의 질문을 무시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눈꺼풀로 시야가 가려지는 대신 다른 감각이 명활해진다. 몸을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의 활력을 다른 무언가가 앗아가고, 바다 깊은 곳의 느릿하고 고요한 해류 속을 헤엄치는 미지의 생물체의 태동처럼 소름끼치게 차가운 감각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남자의 말대로 이것이 죽음일까. 이것이 바로 죽어가는 느낌인가. 그렇지 않으면 새로이 태어나는 과정인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셜록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안에 존재하고 있던 연약하디 연약한 필멸의 인간이 지닌 생기, 생명, 활기, 정기가 깨어진 그릇에 담긴 물처럼 셜록의 몸에서 새어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그 느낌은 어쩐지 슬픈 느낌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그 순간을 기억하게."
  

 나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으나-라고 남자는 애상적으로 말을 흐렸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순간이 이렇듯 허무하게 끝난다는 인식은 분명 태생적으로 감성이라는 것에 면역이 되어 있는 셜록에게마저 사뭇 중대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과는 별개로 온 몸이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잠식되는 감각은 결코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몸부림과 단말마처럼 서서히 사그라드는 생. 느린 파도처럼 다가오던 그것은 점차 빨라져 해일처럼 무참하게 그의 인간성을 휩쓸고 그 사라짐에 애도를 표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빠르게 지나쳐간다. 그리고 부스러기처럼 남아있는 잔해가 뒹구는 자리를, 끝없는 어둠이 차지한다. 조용하고 신속하게 그 과정은 진행되었고, 완성되었다.
 셜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뱀파이어가 된 건가?"


 애써 동요하지 않으려 무덤덤한 어조를 고수했으나 음성이 조금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그를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답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떴다. 흐릿한 별무리. 비를 맞긴 했지만 그의 눈가는 여태 건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고 있는 자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이지러진 그 별무리는 무척이나 애달팠다.
 셜록은 그를 줄곧 바라보고 있던 남자를 향해 들고 있던 고개를 내렸다.
 남자는 검은 장우산을 들고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말끔한 모습으로 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정하게 갖추어 입은 남자에게서는 아무에게서나 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기품이 느껴졌다. 우아한 광택이 일품인 검은색의 양복과 진홍색의 실크 넥타이는 그에게 맞춤복처럼 잘 어울렸다. 그가 걸친 고풍스런 느낌의 회중시계와 넥타이핀도 한눈에 봐도 수제품이겠거니 싶은 고급이었다. 단순히 옷만 잘 차려입은 신사가 아니라 모종의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가 가진 권위를 충분히 활용할 수완과 능력이 있는 자만이 가지고 있는 위엄이 풍겨나오는 모습이었다. 셜록의 날카로운 눈썰미는 그의 옷에 단 한 점의 먼지와 주름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간파했다. 또한 무슨 수를 썼는지 빗물이 흐르고 있는 바닥에 발을 디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고 있는 신발에는 물방울 하나도 묻지 않고 있었다. 분명 강박적으로 결벽을 추구하거나 그런 종류의 미학을 추구하는 부류이리라.
 한편 그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음습한 향기가 풍겼다. 해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 그림자 속에 안주하는 이 도시의 숨겨진 맹수. 귀족적인 미소로 그 정체를 위장하고 다물린 입 안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숨긴 채 살아가는 존재. 인간의 피를 탐닉하며 뜨거운 햇살 아래 약동하는 그들의 생기에 기생하는 인간이 아닌 것들 특유의 향기.
 그리고 그 자신과 같이 완연한 뱀파이어의 풍모를 지니게 된 셜록 홈즈와 시선이 마주친 남자의 눈은 이내 이채를 띠었다.


 "아름답군."


 경탄어린 찬사였지만 그 말을 듣는 당사자인 셜록 홈즈는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납빛 안색의 그는 무척이나 피로해보였다. 경멸 어린 시선이 남자에게 되돌아왔지만 도취된 남자는 그에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남자는 오히려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서 셜록 홈즈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섰다. 남자의 눈은 오래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볼 법한 고색창연한 진푸른 빛을 발했다. 세월의 흔적이 여과없이 느껴지는 깊은 눈. 오랜 세월과 시간을 감당해온 자의 눈빛으로 그는 셜록을 압도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셜록은 그의 접근에 무척이나 불편한 기색이었으나 그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그는 멈추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남자는 셜록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나와 함께 가자꾸나."


 미소지으며 남자가 말했다. 유혹하듯 달콤한 목소리가 불안정한 셜록의 마음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이어진 셜록의 대답은 남자가 바란 대답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싫어."


 단호한 거절을 표한 셜록은 남자를 외면하며 뒤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그 당당한 기세가 무색하게도, 입 밖으로 거부 의사를 내뱉은 직후 그는 제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남자가 그에게 뭐라 말하는 것이 셜록의 귓가에 불분명한 음조로 울렸다.


 "기껏 살려놓았는데 죽으려 들면 안되지."


 그것이 셜록이 정신을 완전히 잃기 전에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영문 모를 말을 하던 남자는 순간 정신을 잃고 무기력하게 쓰러진 셜록이 길바닥에 나뒹굴기 직전에 그를 용케 잡아채어 그를 끌어안았다. 남자에게 안겨 그가 쓰고 있던 우산 속으로 들어온 셜록은 더이상 비를 맞지 않았다. 다만 힘없이 늘어진 셜록이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옷을 적시고 축축한 감촉을 남길 뿐이었다. 그를 부축한 남자는 품에 안긴 셜록을 뭐라 형언할 수 없이 음울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어깨에 무겁게 자리한 그의 머리칼을 흰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그는 우산을 슬쩍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그렇게나 내리는데도 하늘에는 달이 오롯히 자리하고 있다. 햇빛의 미약한 반사체에 불과한 그것이 내리쬐는 그 보잘 것 없는 자연광에 매혹된 그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멋진 밤이군……."

 

*


 눈을 뜨자 낮선 샹들리에가 달린 천장이 보였다. 원형을 기본 구조로 하여 잘 세공된 다이아몬드처럼 수많은 단면을 지닌 크고 작은 크리스탈이 모여 층층이 겹쳐진 눈의 결정들처럼 아름다운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불 붙은 촛불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에 샹들리에의 구조를 이루는 크리스탈의 단면이 은은하게 빛을 반사했다. 천장에는 샹들리에의 빛과 그림자가 섞여 난반사를 이루며 기하학적인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조그마한 빛과 열기에 불과한 그것이 투명한 수정을 통과하면서 보석처럼 오색 찬란하게 빛을 퍼뜨리는 광경은 무척 아름다웠으나 한편으로는 어떤 이의 두통을 가중시켰다. 인간이었을 적의 그라면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을 터이지만, 지금 그의 눈으로 날아드는 그 빛무리들은 너무나 환한 빛을 내리쪼이며 쏟아지는 바늘처럼 그의 망막에 날카롭게 박혀들어왔다. 마치 그 눈부신 광채를 각인이라도 하려는 듯.
 지나치게 선명한 감각이 오히려 셜록에게는 고통으로 작용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의 한계보다 수백 수천배는 예민하게 변한 오감은 특히나 그처럼 예민한 이에게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끓는 주전자가 자신의 속에 들어찬 열띤 증기를 이기지 못하고 삐익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셜록도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을 뒤틀며 작게 신음했다.
 멀리서 속삭이는 것처럼 나직한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

 

 "한동안은 그렇게 고통스러울 걸세."

 

 셜록은 힘들게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손에 글라스를 든 채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 우산을 쓰고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는 의자에 몸을 편안히 누인 채 다리를 우아하게 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걱정인지 근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약하게 어려있는 것 같았으나 꼿꼿하게 세운 자세, 치켜든 고개와 더불어 내려다보는 듯 다소 거만한 시선 때문에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이 어떤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는 정체모를 붉은 액체가 담긴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잔에 든 것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그는 잔을 든 팔을 의자의 팔걸이 위에 나른하게 늘어뜨렸다. 그가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움켜쥐고 있던 잔을 좌우로 살짝 흔들자 안에서 저희들끼리 뭉쳐있던 얼음 조각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들릴락 말락한 소리였지만 그런 작은 소음조차 지금의 셜록에게는 천둥번개처럼 커다랗게 들렸고 심한 두통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남자가 잔을 흔듦에 따라 잔 속에 얇게 깔려있던 적색의 액체에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몇 안되는 기포의 생성과 소멸조차 힘껏 북 치는 소리처럼 그의 고막을 터뜨릴 듯 괴롭혔다. 셜록은 더 참지 못하고 귀를 막았다. 남자는 그런 셜록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얄미울 정도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나약한 이들은 그마저도 버티지 못하고 자살하기도 하지."

 

 약간의 조롱기가 섞인 오만한 어조로 그 말을 내뱉은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자네는 잘 견뎌낼 거야."

 

 그는 잔 바닥에 남은 것을 마저 들이키고는 침대 위에서 몸부림치는 셜록을 홀로 방 안에 내버려둔 채 문을 닫고 나갔다.
 남자가 나가고 혼자 남은 셜록은 태중의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아 시시각각 그를 괴롭히는 외부 자극들을 무시하려 해보았으나 그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새로운 감각까지 기존의 소리 그리고 떨림과 합세한 모든 것들은 그가 편하게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수군거리는 이들의 크고 작은 웅얼거림, 위층에서 걸어다니는 누군가의 발소리뿐만 아니라 혈관을 흐르는 피가 점점 그 열기를 잃어가며 차갑게 식고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느릿하지만 강하게 맥동하는 울림, 자기자신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흉곽이 오르내리는 그 움직임마저 그에게는 커다란 재난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카페트 안에서 열심히 기어다니는 좀벌레의 다리 중 하나만 까딱 해도 셜록에게는 엄청난 소리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셜록은 빠르게 돌아가는 팽이였다. 그 회전 속도는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뾰족한 끝을 바닥에 디디고 팽팽 돌고는 있지만 금방이라도 중심을 잃고 넘어져버릴 것같이 불안하다. 지금 이 순간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하면 결말이 좋지 못하리라는 것을 셜록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수습하고 똑바로 이성을 끌어올리려고 할수록 쇠망치로 그를 후려치는 것과 같은 간헐적인 강렬한 고통이 더욱 명료하게 그의 온 몸을 엄습했고 한동안 그런 줄다리기와도 같은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한 순간, 모든 것이 숨이 멎는-여명과도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 지는 알 수 없었으나 바깥에는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장대비가 흐린 유리창에 이따금 와닿으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쉬지 않고 내리는 빗소리는 노이즈처럼 셜록의 귓바퀴에 쟁쟁 울렸으나 더이상 크게 신경쓸 거리는 못되었다.
 셜록은 남자가 붙여준 시종의 도움을 물리고 건네어진 옷을 스스로 천천히 걸쳤다. 자못 엄숙한 태도로 연한 하늘색의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며 든 생각은-이와 같은 빛깔의 하늘 아래를 더이상 자유로이 활보할 수 없게 된 것이구나, 라는 다소 감상적인 것이었다. 셜록은 스스로에게 코웃음을 치며 허무감만을 안겨줄 뿐인 그 생각을 뇌리에서 몰아냈다. 대신 셜록은 그가 걸치고 있는 옷에 신경을 집중했다. 아직 아까 겪은 고통의 후유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그의 손은 종종 경련하며 셔츠의 앞단추를 꿰려는 그의 노력을 수포로 돌리고 있었다.
 옷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그는 아까 남자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서 남자가 다시 자신을 찾기를 기다렸다. 쉬지 않고 닥쳐오는 원인 모를 상황들에 휩쓸린 나머지 지쳐버린 것일까, 목적 의식이 결여되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의지도 생각도 들지 않는 것에 그는 내심 당황하면서도 여전히 기운은 차리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있다가 문득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긴 손에 불거진 혈관이 시리게 푸르렀다.
 혈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대리석처럼 하얀 그것에서 신비스러움보다는 오히려 혐오감을 느낀 그는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 시선을 둘 곳이 없다는 것을 이내 깨닫고 말았지만.
 뱀파이어의 발달된 신경과 감각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통제할 수 있게 되자, 마치 그를 가두고 있던 몇 겹이나 되는 장막에서 벗어난 것처럼 온 몸이 상쾌하고 한결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적인 부분에 한해서였고, 셜록의 기분은 물에 푹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게 저조한 기분 상태는 그가 무의식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난 이후로부터 쭉 지속되고 있었다. 그는 자학과도 같은 심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거울 앞으로 섰다.
 조각상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한 남자의 흉상이 매끄러운 거울 표면에 비쳤다. 호흡하는 것처럼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으로 간신히 그가 무정의 물체가 아님을 알 수 있었으나 그 호흡하는 행위마저도 그동안 인간으로 살아온 세월의 여운으로 인한 의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니 그의 기분은 더욱 울적하게 침몰해갔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마치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뱀파이어의 모습 그대로였다. 소위 말해서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에 여위어버린 얼굴, 묘한 안광을 발하는 청회색의 눈, 그리고 퇴폐적으로 아무렇게나 늘어진 검은 곱슬머리. 습관적으로 무심하게 풀어내린 목 깃 사이로 보이는 쇄골과 홍조 한 점 없이 병적으로 바래어버린 뺨과 반듯한 이마 위에 흘러내린 암흑보다 새카만 머리카락, 그리고 방 안의 은은한 불빛의 일렁임이 그의 얼굴에 더욱 진한 그늘을 드리운 가운데서 데카당스풍이라고 칭할 만한 기이한 종류의 관능미와 문란함이 언뜻 풍겨나오는 듯 보였다면 착각일까.

 

 '이미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얼굴이군…….'

 

 루스벤 경도 아닌데 말이야, 라고 생각하며 그가 죽음처럼 그늘진 얼굴이 비친 거울의 표면에 저도 모르게 손을 갖다 대어 어루만지고 있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남자가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셜록은 거울 너머로 비치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거울을 바라보며 셜록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던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셜록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셜록의 흐트러진 머리결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부드럽게 뒤로 넘기며 말했다.

 

 "기분은 어떤가?"

 

 셜록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그렇군..."

 

 남자는 셜록의 모호한 대답을 곱씹으며 셜록의 머리카락을 다시 한 번 뒤로 넘겼다. 셜록은 남자가 하는 행동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었다. 셜록이 거울 속에 비치는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는 가운데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셜록의 머리를 손으로 몇 번이고 매만지던 남자는 셜록의 검은 머리칼이 그의 이마 위로 자연스러우면서도-미적인 측면에 문외한이라고 칠 수 있는 셜록마저 인정할 정도로-예술적이라고 할 만한 형태로 흘러내렸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만족한 웃음을 입가에 띠며 손을 내렸다.

 

 "완벽해."

 

 그는 셜록의 어깨에 양 손을 올려놓으며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셜록은 남자가 보이는 미(美)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냈으나 남자는 그에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남자는 거울 속의 셜록의 모습을 바라보며 특유의 느릿하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내 이름은 마이크로프트라고 하네."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굉장히 예민해진 셜록의 귀에도 흠잡을 데 없는 발성으로 들리는 그 소리에는 실수 하나 없이 연주되는 현약 사중주의 화음저럼 아름다운 음조가 내재되어 있었고 마치 세이렌의 노래처럼 듣는 이를 현혹시키는 마력이 있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자네의 이름은?"

 

 셜록은 그 목소리의 힘에 굴복하여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셜록 홈즈..."
 "셜록 홈즈. 아마 자네는 지금 궁금한 것이 많을 거야."

 

 셜록의 풀네임을 한번 읊조린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셜록을 다독였다.
 과연 그 말대로 셜록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굳이 남자-마이크로프트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받아들인 이유도 그의 면면을 분석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셜록의 남다른 관찰력으로도 남자의 정확한 나이를 추정할 수가 없었다. 겉보기에는 분명 30대 후반의 나이였으나 그의 눈빛은 절절히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의 노숙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인간 세계의 이면 속에서 밤의 지배자로서 살아왔을지 셜록은 차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셜록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나한테 왜 이렇게 해주는 거지?"

 

 셜록의 질문을 받은 남자는 셜록이 존대어를 쓰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마음쓰지 않는 듯 했다. 그는 일종의 친밀감의 표현인지, 셜록의 어깨를 살짝 매만지며 말했다.

 

 "자네가 아름답기 때문이지."

 

 셜록의 표정이 묘해지는 것을 본 남자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비록 생의 굴레에서 벗어난지 오래되어 인간의 욕망과는 멀어진 나이지만, 인간이었을 적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집착하는 바는 단 한 가지, 바로 지고의 '미(美)'라네...게다가 운명의 장난인지, 내가 속한 혈족의 본성 또한 묘하게도 미에 대한 탐닉이지...만약 내가 노스페라투(Nosferatu. 노스페라투는 포옹되는 순간부터 외모가 끔찍하게 뒤틀리기 시작해서, 섬뜩할 정도로 추한 괴물이 된다. 그들은 타인의 눈을 피해 하수구에서 살아간다. 숨어서 정보를 모으는 데에 능숙하기 때문에 정보 중개인으로 악명높다.) 일족이 되었다면 아마 나는 곧바로 내 자신의 목숨을 버렸을지도 모르지."

 

 '혈족'이니, '노스페라투'니, 셜록으로서는 의미를 섣불리 짐작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남자의 말에 끼어들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셜록의 표정이 어지럽게 변했다. 딴에는 농담이랍시고 한 말인지 짐짓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셜록에게 다정하게, 일면 연민어린 목소리로 셜록에게 말했다.

 

 "아직 밤의 일족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차차 배우게 될 거야. 불쌍한 어린 것..."

 

 본디 남에게 동정받는 것에 익숙치 않은 데다가 자존심마저 강한 셜록은 남이 자신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썩 기분좋지만은 않았다. 여기서 발끈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잠자코 있어야 하는 것인지, 두 가지의 선택지 사이에서 망설이는 셜록을 가만히 바라보며 남자는 오늘 저녁 식사는 농어 구이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근대의 뱀파이어들의 사회에서는-옛 시대의 뱀파이어들처럼 지나가는 인간을 내키는 대로 잡아 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네. 인간들이 말하는 암흑 시대에 뱀파이어들은 영주의 자리에서, 인간의 지도자에게 군사와 금력을 지원하는 대신 각자가 지배하는 영토에서 구미가 당기는 인간들을 성으로 불러들여 한 끼 식사거리로 삼곤 했지. 어린 처녀의 피를 특히나 좋아하는 몇몇 뱀파이어는 초야권이란 것을 만들어서-정말 기발한 생각 아닌가? 응?-곧 다른 남자의 것이 될 소녀의 순결을 빼앗고 그 피를 취한 후 남편 될 이에게 돌려주는 낙을 누리기도 했지...영토를 소유하지 못하고 외따로 떨어져 사는 이들은 길 가는 나그네를 현혹하여 근근이 생을 이어나갔고 말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자유로웠지. 그야말로 진정한 지배자의 삶이라고나 할까..."

 

 서사시를 읊는 것처럼 노래하듯 말하던 남자는 일순 향수어린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했다. 그 당시에 즐거운 추억거리라도 얽혀있는 것일까, 그윽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이 잠시 회상으로 흐려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자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지배자와의 협약은 협약을 맺었던 지배자들의 혈손이 끊기면서, 협약의 존재를 알고 있던 왕조가 교체되면서, 협약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지배자의 자리에 앉으면서, 그리고...일부, 지나치게 욕심껏 인간들의 피를 탐닉하는 데에 열을 올리던 몇몇의 행동이 도를 지나치게 되면서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게 되고 말았지. 그리고 마녀 사냥이 일어났어."

 

 바이올린의 현이 퉁 하고 끊어진 것처럼, 다소 이상한 음조로 남자의 말이 멎었다. 셜록은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남자의 표정은 '무(無)' 그 자체였다. 하긴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남자의 말에 따르면 적어도 중세 시대부터 살아와 인간의 감정과 표현이라곤 모조리 마모되어 생전의 기억을 의태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을 노괴물에게서 어떤 단서가 될 만한 표정이라도 얻어내려고 한 셜록의 생각 자체가 실수일는지도 모른다.
 잠깐의 정적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였던 혈족을 두 동강내었지. 어리석은 내분으로 제 힘을 깎아 내버리고 지쳐버린 뱀파이어들은 이제 가장무도회(masquerade)의 법칙에 따라 마치 범죄자라도 되는 양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인간으로 가장하여 삶을 영위해나가야만 했고. 인간에게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금지되는 것은 물론, 식사도 마음대로 하지 못해. 그나마 이전부터 자신의 영역을 유지해왔던 이들이야 사정이 나았지. 세력을 불리고 영역을 확장하고 그 안에서 인간들을 꼬드겨 피를 마시면 되었으니까. 그러나 자유로웠던 이들은 거지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어, 심지어 피를 마시지 못해 굶어죽는 일까지 생겼다네. 생각해 보게, 거지에게 돈을 적선하는 이야 있지만, 피를 적선하는 이는 없지 않은가..."

 

 애가(哀歌)조의 음성으로 말하던 남자는 약간 사무적인 어조로 바꾸어 이야기를 이었다.

 

 "그리고 이 가장무도회의 법칙에 의하면 뱀파이어가 다른 인간을 같은 혈족으로 만드는 행위, '포옹(embrace)'은 각 섹트(sect)의 엘더(elder)들이 허락하지 않는 한 금지된다네. 특히 현재 런던에 거주하는 뱀파이어들의 인구수는 과밀 상태이기 때문에 그 어떤 규칙보다도 더욱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지."

 

 마지막 문장의 동사는 과거형이었다. '있었지'를 은근히 힘주어 발음하며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눈웃음을 띠던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셜록의 어깨에 짚고 있던 한 손을 가볍게 들어 셜록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네가 나타난 거야."

 

 우울했던 기색은 간데 없고, 마이크로프트는 의뭉한 눈빛으로 셜록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은밀한 즐거움을 곱씹는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셜록을 바라보던 마이크로프트의 눈이 순간적으로 냉혹한 광채로 빛났다. 셜록이 그 안광과 마주한 것은 그야말로 아주 찰나간일 뿐이었지만 셜록은 이미 식어버린 자신의 몸이 더욱 차가워지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맹수가 자신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방금 막 알아챈 연약한 초식 동물이 바르르 떠는 것처럼 셜록의 검은 머리카락이 공중에서 미묘하게 움직였다.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상냥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까 이미 말했다시피 혈족을 늘리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는데, 그 이유인즉슨 이 이상으로 뱀파이어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우리들 간의 영역 다툼이 표면화될 뿐 아니라 원인 불명의 실종 사건의 증가로 인간들에게 정체가 발각되고 토벌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네. 그렇기에 각 섹트(sect)의 엘더들이 허락하지 않는 한 포옹당한 이는 발견 즉시 곧바로 사살되는 것이 원칙이야. 특히 자네처럼 포옹한 주체가 없는 경우를 카이티프(caitiff)라고 하며, 그들에게는 공식적인 척살령이 떨어지게 되지."

 

 여기까지 말한 그가 셜록에게 물었다.

 

 "지난 밤 자네를 쫓던 두 명이 기억나나?"

 

 셜록은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었다. 지난밤,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을 구하기 전의 자신은 두 남자에게 추격당하고 있었다. 이유 모를 현기증을 참으며 런던의 지도를 머리 속에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그때를 떠올리자 미약하게 표정이 구겨진 셜록은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생각이 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로프트가 그런 셜록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들은 스커지(scourge)라고 하는데 엘더들 중 도시의 우두머리인 프린스(prince)가 지니는 사적인 무력 집단일세. 간단히 말해 사병이지."
 "계속해서 그들에게 쫓겨다녀야 하는 건가?"

 

 내가 바라지도 않았던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이유로 말이야-라고 덧붙이려던 셜록은 그 말을 도로 삼켰다. 밤의 세계에서 군림하는 저들에게는 벌레의 투정 따위는 귀기울일 가치도 없을 터이니. 셜록이 염세주의자였다면 자신의 목숨 따위는 내버려도 상관이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셜록은 한심한 염세주의자 따위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한심하게도, 삶에서 어떤 즐거움이라도 찾아보려고 발버둥 치는 부류에 더욱 가까웠으니까.

 

 "여기에서 나간다면, 그렇겠지. 그러나 나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프린스의 권위로는 감히 너를 해할 수 없다."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의 물음에 매우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단언에 셜록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동안 두 남자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아 사위가 무척이나 고요해졌을 무렵, 셜록을 줄곧 바라보고 있던 마이크로프트가 문득 커튼이 쳐진 창문쪽을 바라보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커튼을 살짝 젖힌 그는 빛 한 점 없이 어두운 하늘, 그리고 그 가운데 외로이 홀로 빛을 발하는 반쪽 달을 올려다보더니 커튼을 완전히 좌우로 젖혔다. 반달이 내리비추는 빛이 방 안을 한 움큼 노란색으로 물들였다.

 

 "달..."

 

 셜록이 무의식 중에 중얼거렸다. 달빛은 창문 앞에 선 남자의 얼굴 한 켠도 아리땁게 물들였으나 남자는 금세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다시 방 안의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실내를 침범한 빛은 그러나 부드럽고도 조심스럽게 방 구석구석을 밝히어 셜록은 침침한 어둠 속에 가리어있던 방 안의 사물과 구조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셜록은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의 '영역'이란 건 어디까지지? 설마 이 방뿐인건 아니겠지."

 

 고의로 무례하게 대하려는 생각은 없었으나 셜록의 반골 기질은 지나치게 나긋하고 자상한 체 하는 남자의 태도를 용납하지 못했는지 저절로 비아냥대는 듯한 말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셜록의 질문을 들은 마이크로프트는 입에 배인 것과도 같이, 어떤 형상으로 치환되어 보이기까지 하는 모호한 미소를 띠고 셜록에게 말했다.

 

 "갓 태어난 카파도키안(cappadocian)이여, 식사나 하러 가세나."

 

 카파도키안?
 남자가 자신을 지칭한 명사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도 잠시, 셜록은 자신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온 몸을 안쪽에서부터 긁어내리며 피를 갈급하는 내부의 허기.
 어느새 남자는 자취 하나 없이 방 안에서 사라져 있었고, 밀폐된 공간인것만 같았던 방의 한쪽 편에는 살그머니 문이 열려 있었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한 제스처에 셜록은 이젠 '나를 먹어봐!'라는 케이크 한 조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상상하며 작게 실소를 흘리고는 잔잔한 달빛이 들어찬 방을 걸어나갔다.

 

*

 

 달빛을 반사하여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희뿌연 빛깔의 나무 껍질이 군데군데 벗겨져 반점이 어린 것마냥 보이는 측백나무의 잎사귀가 드리운 아래에 철제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 옆에는 남자가 셜록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땅에 길다랗고 곧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로 서있었다. 저 멀리로 바스락거리는 발자국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이 들렸다.

 

 "인간 시종 중에 하나일세."

 

 셜록은 흘끗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방 안에서 스스로 걷은 커튼 너머의 달빛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남자의 실루엣과 얼굴 윤곽은 지금에 와서는 더한 그림자에 파묻혀 표정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일말의 웃음기는 띠고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어둠이라는 장막의 힘을 빌려 추악한 괴물의 표정없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셜록으로서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셜록이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자 남자가 비로소 입을 열어 말했다.

 

 "앉게."

 

 그제서야 셜록은 테이블 위에 놓인 크리스탈 유리잔 두 개를 발견했다. 잔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그러나 셜록을 동하게 하는 향긋한 냄새로 인해 단번에 그 정체가 짐작이 가는-액체가 삼분지 이쯤 차 있었다. 남자의 짧은 말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과 동시에 그 액체-혈액에서 풍겨나오는 온기어린 비릿한 향이 셜록을 테이블 옆에 놓인 의자로 잡아끌었다.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에 실린 반향이 미약처럼 셜록의 오감을 어지럽히는 것에 저항하느라 셜록은 잔에 담긴 피가 아까 자리에서 벗어난 인간 시종의 피가 아닐지 의심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그러나 셜록은 다른 한 가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카파도키안이 뭐지?"

 

 흐느적거리며 의자에 몸을 걸칠 때만 해도 셜록을 무감하게 바라보던 마이크로프트였지만 정곡을 찌르는 셜록의 물음에 마이크로프트의 눈동자에 다시금 이채가 감돌았다.

 

 "자네가 속한 클랜의 이름-이라고 나는 짐작하고 있지. 아까 말한 노스페라투, 그리고 내가 속한 또레아도르(Toreador)처럼, 각 혈족(clan)은 각자의 이름과 고유한 자질을 지니고 있다네. 그 중에 하나가 카파도키안이고."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셜록이 말했다.

 

 "그렇다면 카파도키안, 이라는 클랜의 일원 가운데 하나가 나를 뱀파이어로 만든 것이겠군."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지...내가 짐작하는 바가 맞다면 자네를 포옹한 자를 찾는 것은 쉬울 수도 있고, 아니면 어려울 수도 있어."

 

 확신에 찬 듯 셜록을 카파도키안으로 정의한 남자의 말이 의외로 아리송한 구석을 띠자 셜록이 항의하려 입을 벌렸으나 이어진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셜록의 입은 다시 다물렸다.

 

 "내가 알기로 카파도키안 클랜은 멸절되어 그 권속이 남아있지 않거든."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내가 카파도키안이라는 것을 알지?"
 "과거에 직접 본 적이 있으니까."

 

 마이크로프트가 단언했다.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손톱 끝으로 테이블 철구조를 규칙적으로 두들기는 것에서 파생된 작은 마찰음이 그의 목소리 중간중간 끼어들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쇳소리의 음조를 즐기는 것인지 잠시 입을 열지 않고 있던 그는 짧게 덧붙였다.

 

 "단 한 명뿐이었지만."

 

 셜록이 눈빛으로 마이크로프트의 설명을 재촉하자 마이크로프트는 여전히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그들은 지금의 다른-자제할 줄 모르는-혈족들처럼 포옹을 남발하지 않았던 탓에 원래 그 수가 적었는데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종적을 감추고 말았어. 거의 몇 세기 간 모습이 드러났다고 알려진 적이 없으니 공식적으로는 절멸되었다고 선포되었지만...자네가 나타남으로서 상황이 달라진 것이네."
 "그 때문에 웃전에서 나를 제거하려는 건가 보군."
 "자네를 '게헨나의 시작'이라고 부르더군. 카파도키안을 본 적도 없는 애송이들이 나잇살 좀 먹었답시고 엘더 노릇을 하려고 드니 불필요한 소요가 발생하는 것이야."

 

 자못 불만스러운 듯 툴툴거리던 남자에게 셜록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그런 쪽으로 내게 관심이 있는 건가?"

 

 이 남자의 의도를 알 수 없다.
 오갈데 없는 자신을 어째서 거두어들이겠다는 것인지.
 '게헨나의 시작'이고 뭐고에는 셜록은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남들에게 휘둘리는 것이 딱 질색인 성미의 셜록은 이 남자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꿍꿍이가 있다면 목숨을 위협받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생각이었다.
 경계어린 눈초리로 남자를 쳐다보는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본 것인지 마이크로프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자네가 걱정하는 것과 같은 계교따윈 품고 있지 않다네."

 

 남자는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그저 내가 바라는 것은-자네가 내 곁에 머무르며, 수십 년간 나를 좀먹어왔던 무료함을 조금이나마 쫓아주길 소망하는 것, 그뿐일세. 이만하면 계략이랄 것도 없지 않나?"

 

 차분하게 미소지으며 말하는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던 셜록은 묘하게 안정되는 기분을 느끼고 찌푸렸던 미간을 풀었다. 알 수 없는 남자의 속마음을 알아내려고 지나치게 머리를 쓴 탓인지 약간의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고개를 떨군 셜록의 눈에 잔에 담긴 붉은 액체의 표면에 떠오른 반달의 뭉개진 모양이 빛무리처럼 떠올랐다. 바알간 색으로 이지러진 반달을 한참을 바라보던 셜록이 문득 입을 열었다.

 

 "왜 나를 이렇게 만든 이는, 나를 죽게 내버려둔 것일까."

 

 마이크로프트를 향한 질문은 그만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셜록 자신을 향한 질문이기도 했다. 피를 빨린 것을 둘째치고 자신을 이렇게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든 주제에 책임감이라곤 없이 내팽개쳐 죽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것이 셜록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존재가 부정당하고 버림받은 고통.
 그의 목소리에 담긴 공허감을 읽은 것인지 마이크로프트가 그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절대 너를 버리지 않는다."

 

 남자가 우아한 발음으로 다정한 목소리를 내어 셜록에게 말했다.

 

 "네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 되어주지. 아버지를 원한다면 아버지가 되어주고, 연인을 원한다면 연인이 되어줄 것이며, 스승을 원한다면 미력하나마 스승 노릇을 해줄 것이다."

 

 셜록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셜록 홈즈, 네겐 형제가 있나?"

 

 마이크로프트의 질문에 셜록이 고개를 저어 답했다. 셜록을 보며 마이크로프트는 만족한 기색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네겐 있어본 적이 없었던 네 형이 되어주마. 보다시피, 이 세상은 고독한 뱀파이어로 살아가기엔 너무나 적막하거든..."

 

 감상적으로 말끝을 흐린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의 손에 피가 담긴 크리스털 잔 하나를 쥐어주고, 그 자신도 남은 잔 하나를 든 후 말했다.

 

 "이 밤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의 밤을 위해 건배."

 

 두 뱀파이어의 입술을 미지근한 피가 적셨다. 그들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적색의 달(crimson moon)이 흘러들어갔다.

 

  

 

 

*한 도시의 지배자인 혈족을 프린스(Prince)라고 한다. 대개 엘더 중에서 영향력의 정점에 서 있는 자가 맡으며, 킨드레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전통을 수호하기 위한 각종 권리를 갖고 있다.
              -도시의 구성원들에게 사냥터를 분배한다. 뱀파이어에게 있어 먹고 사는 중요한 문제.
              -뱀파이어들의 중립지대이자 정치의 장인 엘리시움을 열고 닫는 권리.
              -대부가 새 자식을 갖도록 허락하는 권리. 뱀파이어는 포식자이기 때문에 인간 인구에 맞춰서 숫자가 제약되어야 한다.
              -가장무도회의 전통을 깨트린 자에 대한 처벌.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 피의 사냥(Blood Hunt)을 선포.
              -각종 중재.

 

*Caitiff. 정상적인 클랜이나 블러드라인 소속의 대부가 포옹했으나, 클랜의 특질을 결정짓는 요소가 전달되지 않았던지 부족하게 만들어지는 등의 기타 이유로 무언가 잘못되어 클랜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진 자를 카이티프라고 한다. 이들은 뱀파이어이기는 하지만 클랜의 아무런 특징도 갖지 못하므로, 클랜의 약점도 없고 클랜 디시플린도 얻지 못하며 정상적인 혈족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정상적인 대부라면 자신의 책임을 다해 자식을 지켜볼테니 카이티프는 없는 존재이거나 만들어지더라도 대부의 손에 금새 처리되어야 마땅하지만… 카마릴라 내에서도 종종 엘더의 허락없이 막무가내로 포옹해놓고 버려놓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카이티프가 만들어져서 노숙자처럼 연명하는 경우가 가끔 있으며, 프린스는 카이티프가 발견되면 스커지를 보내서 청소해버린다.

 대체적으로 온갖 편견을 받으면서 물흐리는 사생아 집단으로 취급하며 극단적인 경우 멸망의 전조라고 여겨져 죽이기까지 한다.

 

*Toreador. 토레아도는 예술과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는 예술가이자 비평가이며, 사교의 달인으로 정치계의 꽃이다. 예술과 아름다운 것을 보면 도취되어 꼼짝도 못하게 된다.

 

*Cappadocian. 죽음과 영혼에 대해 연구하던 금욕적인 클랜이었으나, 아우구스투스 죠반니의 쿠데타에 의해 절멸했다. 보통의 뱀파이어에 비해 외모가 훨씬 시체스럽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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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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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3.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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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Cracked 1

2013. 12. 13.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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