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이라고는 타원형의 유리창 위쪽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회색빛뿐이었다.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면서 새벽녘 특유의 빛으로 밤에 젖은 캔버스 위를 덧칠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었던 것인지 선명한 보랏빛 어둠이 허공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더해가는 햇빛으로 말미암아 하늘은 구석구석마다 푸른빛과 은빛으로 맑게 물들어갔다. 간밤에 그리도 아름답게 비추이던 달빛은 잿빛에 가까운 실루엣으로 하늘에 가까스로 머물다가 이미 사라진 별들의 뒤를 이어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창 밖에서 쏟아져들어오는 흐린 햇빛에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눈을 뜬 존은 자신의 옆에 셜록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딜 간 것일까, 하고 궁금해 하는 것도 잠시, 존은 창 너머로 보이는 납빛과 은빛이 뒤섞인 새벽 하늘빛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말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존은 창가로 다가갔다. 이상하리만치 상쾌하게 밝아오는 아침이었다. 존은 창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창턱에 얇게 덮인 눈을 흐트러트리고 묵직한 커튼을 흔들었다. 존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쨍한 바람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나른한 잠기운을 씻어냈다. 존은 차가운 바람이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벨벳 상자 속에 담긴 사파이어처럼 뭉근한 어둠을 띤 채 파랑색으로 빛나는 하늘 귀퉁이와 하얀 꽃잎이 흩뿌려진 것처럼 흰빛으로 드문드문 밝아오는 하늘의 차갑고 감미로운 색채는 몹시 아름다웠다. 이따금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하늘을 바탕으로 흩날리는 가루눈이 혼미함과 투명함을 동시에 띠고 있는 특이한 섬광을 반사하며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풍경에 존은 흠뻑 빠져든 채로 한동안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 몸을 맡기고 있던 존은 문득 귀가 멍멍해지는 듯한 환각을 느꼈다. 허공을 가득 메운 침묵.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빽빽하게 들어찬 채로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러한 감각을 느낌과 동시에 완벽한 패닉이 그를 덮쳤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물에 빠진 사람이 젖은 옷가지를 바삐 주섬주섬 챙기고 나오는 것처럼 존 또한 그를 둘러싸고 있던 나른한 새벽 공기와 감상적인 기분을 황급히 떨쳐 빠져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답게만 보이던 것들이 하나같이 섬뜩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간결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다고 생각했던 방안 사물들도 하나같이 낡아빠진 데다 색이 바랜 고물 더미들처럼 보였다. 천장 한가운데 외롭게 매달린 가스등 불빛에 어슴푸레하게 비친 방 안은 인기척뿐 아니라 인간미의 한 조각도 느껴지지 않는 둔중한 회색빛과 진청색의 덩어리일 뿐이었다. 지나치게 환상적이었던 꿈자락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존은 망연하게 웃었다. 뿌연 안개 속을 헤매다 갑자기 시야가 밝아져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된 듯, 화려한 색채를 띤 듯 했던 풍경에서 활기가 달아나고 창백하고 무미건조한 회색조로 온통 물이 빠진 것 같았다.
 이제 모든 것이 다 잘못된 것처럼 보였다.

 

*

 

 존은 일단 방을 빠져나왔다. 끝없이 이어져 그의 앞을 번번이 가로막던 숲을 빠져나온 것도 기적이었고, 환각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아니, 믿고 싶었던-남자, 셜록 홈즈와 다시 만나게 된 것도 기적이었다. 그렇다면 어제 몇 번이고 있었던 기적의 일환이 오늘까지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물론 지금 존이 의미하는 기적이란 인간이 아닌 자들에게 들키기 전에 저택을 무사히 빠져나가 다시 한 번 숲을 지나서 마을로 도착하는 그 모든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셜록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혼자 놓아두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저택을 나가려는 지금 그의 그러한 조치는 존에게 호재였다.
 닫혀있던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연 존은 고개를 내밀어 복도를 살폈다. 창문이 있을 법한 위치에는 어김없이 커튼이 단단하게 쳐져 있었다. 그 대신인지 등불이 하나 침침하게 켜져 있을 뿐이었으나 시야를 확보하는 데는 다행히 문제가 없을 정도의 밝기였다. 존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복도로 발을 디뎠다. 복도 전체에 깔린 두꺼운 융단이 푹신하게 구두창을 감싸며 발소리를 삼켰다.
 주욱 이어진 통로에는 단조로운 문양의 벽지가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간간이 벽에 걸려 있는 시커멓고 우울한 양상의 그림들은 색이 바래기 이전에 선명한 녹색과 금색으로 빛났을 벽지의 지나치게 활달한 색조를 한층 장중하게 누르기 위해 배치했을 것이었겠지만 하나같이 칙칙한 금빛으로 퇴색해버린 지금에 와서는 그저 암담한 분위기를 가중시킬 뿐이었다. 복도가 길어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세워져 있는 책장이나 자그마한 장식품과 낡은 램프가 놓인 작은 장식용 탁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손질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윤기를 띠기는커녕 초록색의 녹으로 온통 점철된 청동 촛대에 꽂힌 양초에 누군가 불을 붙여놓긴 했으나 그나마도 불꽃이 심지에 거의 근접해가고 있어 가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최소한의 관물들과 그것들이 자아내는 퇴락한 화려함마저도 없었다면 존이 걸어가는 이 통로는 전형적인 지하 감옥처럼 보였을 것이었다는 점에서 안심 아닌 안심을 느껴야 했다.
 먼지가 내려앉은 부서진 초기 빅토리아 시대 양식의 거울 틀을 마지막으로 통로가 끝나고 계단이 나타났다. 희미한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은 바에 따르면 이 자리에는 내리막의 비좁은 나선형 계단이 있어야 했으나 뜻밖에도 그의 앞에 놓인 계단은 오르막으로 된 계단이었다. 존은 그가 반대편으로 왔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미 돌아가기엔 늦은 것같다고 판단한 그는 그대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존은 금방 그가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깨달았다. 계단은 폭이 좁고 천장에서 샌 물로 인해 여기저기가 부식된 채로 깨져있어 불안했으며 난간도 온통 녹슬어 있었다. 덕분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끼익 거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먼지가 엉겨 붙어 완전히 낡고 더러워진 채로 장정 도서의 표지처럼 딱딱해진 카펫이라도 밟으면 요란한 쇳소리가 좀 덜할까 싶어 궁여지책으로 카펫이 깔린 부분에만 발을 디뎌보기까지 한 존이었으나 심지어 카펫을 밟을 때조차 귀에 거슬리는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존은 조금이라도 소리가 덜 나도록 걸어볼까 하는 노력을 거두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계단의 삐걱거리는 소리는 도무지 가라앉지도 않고 귀에 익숙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아서 혹시라도 자신이 저택을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두려워하던 존의 심장을 덜컹덜컹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렇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계단의 끝에 다다른 존은 약간의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계단의 끝에는 텅 빈 종루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바람에 풍화되어 자연적으로 마모된 석조 종루의 돌난간에는 까마귀들이 몇 마리 옹기종기 모여앉아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인 존을 향해 까악까악 울어댔다. 까만 눈을 무심하게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까마귀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는 피해망상적인 생각과, 아무도 없는 종루에 다다르기까지 괜히 쓸데없는 긴장을 했다 싶어 약간 부아가 치민 존이었으나 자신이 올라온 쪽의 계단 통로 외에도 하나의 통로가 더 있다는 것에 존은 그쪽으로 내려가는 시도를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존이 올라온 계단 통로와 직각으로 방향이 갈리는 층계는 아까까지 올라온 낡아빠진 계단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다. 층계는 자단나무로 되어 있고 까만 양탄자가 계단을 따라 빙글빙글 돌아가며 깔려있었다. 내려가는 내내 총계에는 황홀할 정도로 정교한 짜임새로 맞물린 난간이 둥글게 둘러쳐져 있었고 벽에는 기하학적인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벽에 새겨진 지루한 형태의 조각에 슬슬 질리고, 끝도 없이 원을 그리며 내려가는 계단에 어질어질해질 무렵 계단은 갑자기 뚝 끊겨버렸다. 다시 한 번 긴 복도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양편으로 길이 나뉘어 있다는 점이 달랐다. 생각보다 크고 복잡하기까지 한 저택을 돌아다니는 것에 굉장히 부정적인 감흥을 느끼기 시작한 존이었으나 이제는 달리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길을 모색하는 수밖에는.
 왼쪽으로 난 복도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그보다는 밝은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벽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설치된 인공 조명등이 마치 어서 오라는 듯 복도 전체를 훤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 한 점 없이 어두운 복도와 밝은 불빛이 점등된 복도의 지나치게 선명하고 양극적인 대비는 존을 갈등하게 만들었다. 조금의 타협이나 영합의 여지도 없이 완벽하게 갈린 선택지 두 개가 놓여있는 상황은 마치 존을 겨냥하고 미리 꾸며둔 상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의 안에 있는-정석적인 상식인이자 순종적인 군인인 존과 남몰래 탈선을 꿈꾸며 반골 기질을 간직하고 있는 존-두 가지의 상반된 성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을 과시하듯 말이다.
 고민하던 존은 결국 불이 켜진 복도 대신 반대편 복도를 선택했다. 통로를 걸어갈수록 빛을 등지게 되고 눈앞은 점점 캄캄해진다. 간간이 문이 열린 채로 방치된 방들이 보였다. 칸이 분리된 특별실이 계단에서부터 대여섯 개가 있었다. 대개 흡연실이 아니면 카드룸이었다. 안쪽에는 가스난로를 밝혀 놓은 듯 쉿쉿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냉기 어린 복도가 완전히 얼음장이 되지 않도록 일부러 온기가 새어나오도록 한 듯했다. 역시나 창문이 있을 자리에는 햇빛 한 점 들지 않도록 커튼이 쳐져 있었고 복도에 만연한 정적을 더했다.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존은 멈춰서서 복도를 둘러보았다. 시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처럼 시계는 단 한 개도 놓여있지 않았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거쳐 온 다른 복도도 그랬다는 것을 존은 알아차렸다. 그 흔한 괘종시계나 벽시계, 하다못해 뻐꾹 시계도 없었다. 시간을 초월한 채 버려진 곳처럼 인적이라곤 없는 이곳에는 영생을 누리는 자들의 오만과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모독이 서려있다는 것을 존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감각이 오히려 무뎌지는 듯했다. 간간히 가스 난방기 안에서 불꽃이 으르렁거리며 타오르는 소리만 멀리서 들려오거나 환청처럼 웅웅거리는 억눌린 듯한 낮은 소음이 존의 귓가를 부드럽게 자극했다. 하지만 대리석 바닥에 깔린 붉은 빛깔의 카펫이 그마저도 흡수하고 더욱 침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심해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 카펫의 붉은색만이 선명하여 어딘지 섬뜩했다.
 벽에는 군청색과 은색 실로 짠 칙칙한 색조의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세월을 이겨낸 태피스트리는 원래의 색을 거진 잃은 데다가 진한 어둠 속에서 보니 광택이 나는 녹색처럼 보였다. 복도 전체가 방음벽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너무나 조용했다. 숨 막힐 듯한 정적 때문인지 공기 중에 불안한 기운이 떠다니며 지나는 이들에게 경고를 던지는 느낌이었다.
 복도의 중간에 다다랐을 무렵 복도를 감싼 어둠은 최고조를 달렸다. 잉크를 통째로 쏟아부은 듯한 어둠. 존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워보았다. 그러나 그의 숨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크게 숨을 들이키자 어딘가에서 텁텁한 향기가 느껴졌다. 언뜻 담배 연기인 것처럼 생각되었으나 그보다는 좀더 진한 향내가 코끝으로 스며들어왔다. 진하다 못해 역겨울 정도였다. 끔찍하면서도 달콤한 그 향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어디서 흘러나오는지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작은 틈새를 두고 열린 방문이 보였다. 존의 바로 앞에서 도사리고 있는 어둠과 향기, 그리고 그에 한데 뭉쳐있는 위험이 그의 마음속에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존은 약간 충동적으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마약 같은 향기에 정신이 몽롱해진 존은 그 자그마한 냉기 덕에 조금이나마 맑은 정신을 되돌이킬 수 있었다. 존은 몸서리치며 그대로 잠깐 동안 서 있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야 존은 그것이 용연향과 베르가못 향을 비롯해 이런저런 향료를 섞은 채로 태운 향초에서 나는 향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길도 모르는 채로 줄곧 방황하다 보니 감각 신경이 교란된 것처럼 작은 변화에도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듯했다. 그러나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와 그가 서있는 복도를 비롯해서 저택 전체에 무언가 위험한 공기가 떠돌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암흑 속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을까.
 차가운 문손잡이를 잡은 감각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이었다. 돌아서야 한다고 냉기가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택 전체에 깊이 배인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존으로 하여금 냉정한 사고력을 앗아가고 있었다. 확실히 이곳에는 분방하고 대담한 행동을 유발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방문 틈으로 달빛처럼 흐릿한 빛이 새어나왔다. 만용을 부리는 셈 치고 존은 문을 약간, 아주 약간 열어보았다. 빛은 베네치아 풍의 청동 램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존은 결국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

 

 문을 열자 뒤엉켜 뭉친 향기가 화악 밀려들었다. 방 안의 온기에 뜨끈하게 달아오른 향기가 존의 코끝으로 지독하게 끼쳐들었다. 한데 고여있던 향내가 바깥으로 밀려나가길 기다렸다가 존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도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등잔의 심지가 한껏 돋우어져 있었고 방 안은 은은한 불빛에 잠겨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신사의 내실이라는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곳이었다. 그러나 호화롭고 세련되면서도 동시에 기묘한 분위기가 어린 곳이기도 했다. 온 시대를 망라한 듯 가지각색의 고풍스런 과거의 유물들과 손때도 채 타지 않은 현대식의 물건들이 남루한 전리품마냥 한데 뒤섞인 채로 쌓여있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네모꼴의 커다란 방의 사면은 고아한 느낌의 적색 벽지로 덮여있었다. 옛 로마 황제들의 망토에 쓰였을 법한 보랏빛이 살짝 어린 붉은색 벽에는 베니스 풍의 등롱이 불이 밝혀진 채로 나무의 잔가지처럼 매달린 채로 느슨하게 아래로 늘어져 방 안 구석구석을 어렴풋이 비추었다. 어슴푸레한 누런 불빛들 옆의 한쪽 벽에는 오래된 구릿빛 장검과 방패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쭉 뻗은 레이피어나 뾰족한 사브르, 터키의 장검들을 비롯해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아직 예리함을 잃지 않은 날붙이들이 빛을 받아 파랗게 빛났다. 그 아래의 빈 공간에는 주철로 만든 조상, 흉측한 생김새의 괴물 조각, 어딘지 음험한 눈빛의 대리석 두상들이 되는대로 쌓여 용케도 무너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놓여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만물상을 건너뛰고 두툼하게 주름진 검정색 벨벳 커튼이 닫힌 창가를 지나자 건너편에는 비스듬이 놓인 거울과 온갖 물건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놓인 테이블과 옷가지가 걸쳐진 긴 소파가 놓여있었다. 암갈색의 떡갈나무 재목으로 짜인 테이블은 호화찬란하기 그지없는 다른 가구들과는 달리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평평한 윗면에서 튀어나온 가장자리에 플로렌스 풍의 느낌을 살짝 가미한 세공이 살짝 되어있는 정도였기 때문에 전면에 걸쳐 정밀한 세공이 깃들어있는 류의 다른 고색창연한 물품들에 비하면 밋밋할 정도로 소박하고 간소했다.
 넓은 테이블 위에는 남색과 보라색이 오묘하게 섞인 광택의 벨루어 탁자보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일렬로 죽 놓인 화장수, 아스트린젠트, 헤어토닉을 비롯해 브러시와 칼라 버튼, 갖가지 색상의 보석 커프스가 난잡하게 널려 있었다. 그 외에도 책상 위는 붉은 유리 덮개의 램프, 열쇠 묶음, 각국의 지폐와 은전, 동전, 촉에 잉크가 묻은 채로 놓인 만년필과 철필, 연한 살구색의 편지 봉투까지 놓여 있어 혼돈의 극치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한데 놓인 테이블에서는 기분좋은 무절제함이라고 칭할 수 있을 법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이 장소는 아름답고 독특하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늘이 드리운 것처럼 창백하고 우울한 느낌에 휩싸인 채였다. 밝지만 무거운 암담함이 죽은 물고기처럼 하얀 배를 드러내고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존이 방 안에 들어온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마치 몇 시간, 또는 며칠이 지난 듯 느껴졌다. 그 자신이 방 안을 걸어다니느라 나는 발걸음소리까지 호숫물이 꾸르륵거리는 것처럼 침울하게 들렸다.
 존은 암울한 감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두어번 흔들었다. 이 방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는 생각이 든 존은 나갈까 마음을 먹었으나 문득 테이블 위에 있는 편지에 시선이 미쳤다. 하나같이 원색적인 색감으로 물들어있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엷은 색조를 띤 것이었기 때문이다. 손목에 다는 끈도 없고 초침도 멈춘 채로 쌓여있는 손목시계의 크로노그래피들을 살짝 옆으로 밀치고 편지를 손에 든 존은 편지를 밀봉했던 밀랍에 커다란 A가 박혀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 편지봉투를 뒤로 돌리자 발신인의 이름이 적힌 자리에 밀랍 인장과 비슷하게 아름다운 필체로 Irene Addler라는 여성의 필적이 남아있었다. 존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수신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마이크로프트...홈즈?"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그 이름을 읽은 존은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펄쩍 뛸듯이 놀라고 말았다.
 

 "제 이름입니다."
 

 존은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잘못 듣기라도 한 듯 뒤편의 어둠 속은 성당의 납골당처럼 고요했다. 다리와 등골을 타고 한기가 줄달음을 쳤다.
 그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울렸다.
 

 "마이크로프트 홈즈라고 합니다."

 

*


 "그러니까, 당신이 바로 존 왓슨이군요."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분명 그의 실루엣은 가까워지고 있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언뜻 보기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같이 보였다. 그 정도로 남자의 움직임은 우아하고 고요했으며, 날개를 접고 있는 독수리처럼 위엄이 넘쳤다.
 팔을 뻗으면 존에게 닿을락말락한 거리에서 남자는 멈춰섰다. 그는 키가 큰 편이었고 마른 축에는 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비대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그의 자세가 유달리 곧고 민첩한 덕분인 것같았다. 남자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무게감이 있고 예의바른 태도였다. 일종의 호감을 이끌어내려는 데에 특화된 듯한 조용하고 온화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있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목소리에는 오랫동안 지배자의 위엄을 지니고 존경받아온 사람처럼 명령하는데 익숙한, 그러나 겸양을 갖춘 조용한 자부심같은 것이 배어있었다. 미묘하게 사람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느껴지면서도 조금도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은 채 표정은 기분나쁠만큼 평온한 것에 존은 어렴풋한 위화감을 느꼈다.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이을 때까지 정적이 그곳을 감싸고 있었다.
 

 "포트 와인이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난데없는 제안에 놀란 존은 고개를 살짝 쳐들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미소짓고 있었다. 결례가 됨을 알면서도 존은 마이크로프트의 면면을 뜯어보았다. 어렴풋하지만 확실하게 느껴지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아색의 혈색은 기묘했지만 그렇다고 병약해보이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존은 마이크로프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둠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빛이 들지 않아 동공과 홍채의 경게가 구분이 되지 않았고 검은자위가 온통 새까맣게 보였다. 그러나 그 눈에서 섬뜩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단지 그것이 띤 색채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물린 입술만큼이나 과묵하게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는 눈은 웃고 있었지만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뱀처럼 차가운 그 눈을 마주하고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목도한 존의 몸이 떨렸다.
 그것을 알아차린 마이크로프트가 잔잔하면서도 약간은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존에게 말했다.
 

 "내키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예의상의 서운한 티를 살짝 드러내었으나 말 그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의상의 제스처일 뿐이었다. 마이크로프트는 다시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렇다면 산책은 어떠신지요. 보셨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근방은 수색(樹色)이 뛰어나죠. 아직 아침이 되지 않았으니 저도 새벽 공기를 쐰다면 즐거울 것같군요."
 

 잘생겼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투박한 외양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세련된 음성이었다. 다소 시적인 리듬까지 가미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의사를 더이상 거절하기 어려웠던 존은 간신히 그의 정중한 제안에 승낙의 표시를 건넬 수 있었다.
 

 그들이 빅토리안 고딕 양식의 저택을 나와 부지로 들어선 것은 아침이 다 되어가는 새벽 다섯 시쯤이었다. 그들 앞에는 별로 섬세하지는 않지만 탄탄하고 장엄한 모양으로 잘린 돌로 포장된 길이 똑바로 나 있었다. 서서히 떠오르는 햇빛을 등진 낡은 종탑이 이편으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어둠 속에서 빛의 윤곽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저택과 신축된 건물을 잇는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 존의 입에서는 절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화강암 판석이 반듯하게 깔린 통로 양 옆으로 규칙적으로 늘어선 아치형 돌기둥을 차치하더라도 탁 트인 풍광은 과연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말대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저택을 둘러싼 나무들은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꿋꿋한 자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간밤에 영락없이 어린 소년의 연한 살점을 탐하는 마녀의 손가락처럼 오그라든 검은 실루엣처럼 보이던 나무들은 희미한 초록색으로 밝아오는 새벽하늘 아래에서 깨끗한 은빛으로 빛났다. 부드러운 은색을 띤 나무들은 겹겹이 저택을 감싸고 밀도 높은 청회색으로 짙어지며 저편의 검푸른 산의 그림자까지 이어졌다.
 얇은 구름이 낀 하늘에서 스러져가는 금성이 반짝이고 있었다. 초록색으로, 회색으로, 파란색으로 색이 뒤바뀌며 점차 밝아지고 있는 허공에서 그것은 흐릿하지만 따스한 온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한 색유리같은 공기에 선명한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그러나 정작 그 하늘을 바라보는 존은 그 모든 것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폐부로 생기 넘치는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면서도, 아름다운 석조 통로의 기둥 사이를 한발 한발 나이가면서도 존은 혼란스럽고 소름끼치는 무언가가 잊혀진 채 뒤에 남겨져 있는 것 같은 꺼림칙한 감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건 아마도 자신을 반강제로 기묘한 새벽 산책에 끌어들인 남자 때문이리라.
 멀어졌던 시선을 다시 가까이로, 앞서 걸어가고 있는 남자에게로 옮겼다. 한눈에 봐도 귀족적인 풍모가 확실히 느껴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차림새도 점잖았다. 언뜻 보아서는 수수해 보이는 그의 검정 인버네스케이프는 고급 양복점에서 맞춰 입은 옷이었고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나는 검은담비털이 달린 깃의 접힌 부분에는 아스트라한 모직 안감이 붙어있었다. 장신에 호리호리한 몸집을 감싼 그 길고 어두운 빛깔의 코트는 최신 유행에 편승한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대에 뒤떨어질 정도로 고답적인 차림새는 아니었다. 존이 보기에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그의 옷차림은 실상은 꽤나 고풍스러운 것으로 요즈음의 젊은 영국 신사들에게 유행하는 스타일보다는 한층 전통적이고 역사적이라고 할 만한 구석이 역력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둘은 어느새 건너편 건물의 입구에 도착했다. 존이 아까까지 헤매던 건물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모양새인 것과는 달리 눈앞의 건물은 기능성을 살린 현대식 구조로 깎아지른 듯한 모양으로 지어져 있었고, 지금까지 걸어온 로마식의 아치형 복도와 어울리지 않게 불투명한 유리창이 달린 이중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문손잡이의 열쇠구멍에 열쇠를 돌려 넣는 그의 동작은 교향악단 지휘자의 동작처럼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그의 와이셔츠 소맷부리에서 에매랄드 버튼이 반짝반짝 빛났다.

 

 “겨울이라 경관이 보잘것없어 보여드릴 것이 얼마 없군요.”

 

 그렇게 말하며 마이크로프트는 뒤따라오는 존을 흘깃 쳐다보았다. 자신의 말이 일으키는 반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비록 얌전하게 그의 제의에 응하기는 했지만 언제까지고 순순한 태도로 일관하고 싶지는 않았던 존은 지금이 그가 왜 뜬금없는 산책 따위의 제안을 건넨 것인지 그 진의를 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교계에서 으레 하듯이 예의바른 방식으로 몇 초간 머뭇거리는 체 하던 존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제게 산책을 제의하신 겁니까?”

 

 지나치게 전투적인 서두였을까 싶어 급히 덧붙였다.

 

 “관대한 제안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또한 지나치게 숙이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다.

 

 “굳이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마이크로프트가 주의 깊게 지켜보는 가운데 존은 애써 당당한 태도를 고수하며 말을 맺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과 쌀쌀맞은 눈빛은 절로 그를 움츠러들게 했지만 존은 어깨를 곧게 펴려 노력했다.
 잠시 말이 없던 마이크로프트는 방금 전까지의 냉랭한 표정을 싹 지우고 입매를 슬쩍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글쎄요.”

 

 미봉책에 불과한 그 대답에 존이 무어라 반박하려는 찰나 마이크로프트는 부러 달칵 소리가 나도록 손잡이를 돌렸고, 존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다시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는 마이크로프트의 뒤를 따라 들어가야 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를 급히 뒤쫓아 가니 현관이 순식간에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이크로프트는 곧장 응접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맞은편으로는 커튼이 쳐진 창문들이 정문 쪽에 위치한 바깥 정원을 면해있었고, 오른쪽에는 개별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칸막이 방들이 몇 개, 왼쪽에는 작은 문이 하나 보였다. 선뜻 응접실로 따라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서성이던 존은 다행히도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생각보다 금방 방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마이크로프트가 알맞게 풀을 먹인 검정 실크햇과 손에 쥔 장우산을 들어보였다.

 

 “일단은 이것 때문입니다.”

 

 급히 파리에 갈 일이 있어서요, 라고 즐거운 듯이 말하는 그에게서 아까까지만 해도 표정에 명백하게 어려 있었던 미묘한 적대감이 마치 어슴푸레한 새벽 속으로 녹아들어갔거나 아침 바람에 쓸려가 버린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통 종잡을 수가 없는 그의 말투와 표정에 존이 헷갈려하는 사이 다시 마이크로프트는 응접실 왼쪽으로 나 있는 쪽문으로 나갔다.
 그들은 열려있는 문으로 나와서 모퉁이를 돌아 제멋대로 자란 관목들이 듬성듬성 늘어선 돌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후원의 산책로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의 주위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막무가내로 모아서 쌓아 놓은 수석, 균열이 가고 깨어진 천사와 님프의 조각상, 원래 있었던 땅에서 통째로 파서 옮겨놓은 듯한 폐허의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스산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존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나마 현대식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건물마저 음침하고 색 바랜 일출에 물든 것처럼 희미한 회색을 띠고 있었다. 낡은 돌을 가져다가 외벽에 쪼개 붙인 것이 분명한 연회색의 건물 돌벽에는 이끼가 아래에서부터 벽을 잠식하고 있었고, 방금 전 그들이 열고 나온 쪽문의 위에는 과거의 유물을 되는대로 가져다가 붙인 것처럼 옛 문양이 새겨진 채광창이 붙어 있었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황량함과 마주치자 흠칫 놀란 존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돌을 깐 뜰과 한옆에 놓인 낡은 벽돌 무더기 사이로 죽어가는 나무가 기다렸다는 듯 구부러진 가지를 쭉 내밀고 있는 것을 보자 존은 저택 주인이 지닌 그로테스크한 미적 관념에 대한 체념마저 들었다.
 멀리 보이는 숲에는 영구차를 장식하는 까마귀 깃털처럼 검은 소나무들이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마치 군집한 까마귀들 한 무리가 모여 있는 것처럼 어둠이 짙게 배인 그 숲에는 그리스의 고전 비극에나 묘사되었을 법한 필연적이면서도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 분위기는 이미 사라져버린 무언가가 풍겨내는 상실감, 영원히 가시지 않을 슬픔, 현실적이지 않아 치유될 수도 없는 고뇌-그 어느 것이라고 칭해도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저택 뒤편의 들판 한가운데 선 수양버들과 황록색의 덩굴로 칭칭 감긴 나무둥치를 지나치며 마이크로프트가 문득 입을 열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이건 순전히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미로 정원 안에서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는 마치 무덤 안에서 들리는 메아리처럼 낮게 울렸다. 늘어진 수양버들의 줄기는 가느다란 발을 촘촘히 내건 것처럼 늘어진 채로 새벽 공기의 유유한 흐름에 따라 이따금 물결쳤다.

 

 “이 대화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지요.”

 

 제가 말하고도 궁색하기 그지없지만 말입니다, 라고 짐짓 유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마이크로프트의 눈빛에 존은 작게 몸을 떨었다. 틈을 보이면 먹잇감을 곧바로 급습하려는 뱀처럼 싸늘하고 소름끼치는 눈빛이었다. 눈매는 웃음을 가장하듯 휘어져 있었으나 시선은 노려보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렇게도 차가운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세련되고 정확하게 다듬은 억양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 또한 다른 종류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두려움을 떨치려는 한편으로 자신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그 눈빛에 떠밀린 것처럼 존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군요.”

 

 이채를 띤 채로 존을 옭아매어 질식시킬 것처럼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마이크로프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서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요…….”

 

 덧문이 모두 내려진 쓸쓸한 저택이 그들 뒤로 점점 멀어졌다. 앞으로는 점점 빈번하게 보이는 갖은 장식물들과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로 엉킨 미로가 있었다. 그들은 그 좁고 어두운 길 안으로 스며들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마이크로프트는 앞에 놓인 석조 아치문에 손을 올리며 다시 존을 흘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당신은 순순히 저를 따라왔군요. 그렇게나 공포에 질려서 떨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마이크로프트는 싱긋이 웃었다. 조용하고 온화한 웃음이었으나 존은 몸이 오싹해져 옴을 느꼈다. 그의 입가에 어린 웃음 때문에 오히려 표정은 더욱 부드럽게 변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으나 그의 푸른 눈 깊숙이에서 번득이는 강한 타산의 빛은 존을 긴장시켰다. 왜 지금까지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야 상황파악이라는 것이 되는 것처럼 온 몸이 긴장하며 싸늘하게 굳으며 무뎌진 신경이 다시 곤두섰다.
 시대가 엉망으로 뒤섞인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느낌이 다시금 그를 감쌌다. 그들을 둘러싼 장소는 중세인 동시에 현대이기도 한 이상한 곳이었다. 안개에 젖은 가스등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처럼 푸른 새벽안개를 바탕으로 마이크로프트가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홍채와 동공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검어 소름끼쳐 보였던 그의 눈은 비쳐드는 햇볕 아래에서 보자 맑은 파란색이었다. 그가 기대선 아치형 돌문이 눈에 들어왔다. 웅크린 악마의 부조의 요철은 풍파에 시달려 흐릿하게 자취만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딕 양식 특유의 냉소적이고 오싹한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인 그것은 마이크로프트가 발산하고 있는 악마적인 분위기와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기이하면서도 오싹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진 것을 알아차린 마이크로프트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고양이가 아니고 당신도 쥐가 아니잖습니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겐 먹지도 않을 사냥감을 데리고 노리갯감으로 삼는 악취미는 없으니까요.”

 

 존의 무의식적인 우려를 정확히 간파한 말이었다. 너무도 정확하게 그의 속내를 짚어내었다는 것에 발끈하여 존이 대꾸했다.

 

 “제가 당신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그는 주의깊게 존의 면모를 찬찬히 살피고 신중하게 결론을 내렸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부인하는 그의 목소리는 고상하고 품위가 넘쳤다. 교육을 많이 받은 영국인만이 낼수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정교하게 조율된 악기처럼 감미롭기까지 했다. 그 달콤한 울림에 존은 압도당하는 자신을 느꼈다.
 어둑어둑한 정원 한가운데에 잠시 정적이 머물렀다. 마이크로프트는 아무 감정도 싣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존 왓슨 선생, 당신은 참으로 용감하군요.”

 

 존의 눈썹이 까딱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이크로프트는 말을 이었다.

 

 “용기란 무모함의 동의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이 든 뱀파이어의 물음은 어딘지 섬뜩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달관한 듯한 그 초연함이 존의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에 존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문했다.

 

 “무슨 뜻이죠?”

 

 날카롭게 되묻자,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젯밤의 일을 말하는 겁니다. 미궁처럼 얽힌 숲을 헤치고 단서 한 조각 없이 저택을 찾아나서는 모험을 감행하는 당신의 대담함은 절로 찬탄을 불러일으키더군요. 마치 용에게 사로잡힌 공주를 구하러 나선 용감한 기사나 할 법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악의를 품었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런 낌새를 은근히 풍기고 있었다. 고의적으로 그런 기색을 풍긴다는 것을 존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확실하게 알 길은 없었다.
 존이 말했다. 

 

 “제가 이곳을 찾아낸 것에 대해 탐탁찮게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오!”

 

 그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였다.

 

 “실상은 말입니다, 그 정반대랍니다, 닥터 왓슨. 그 반대라고요.”

 

 마이크로프트가 자못 인자한 태도로 웃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저는 셜록이 당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입장을 바꿔 말하자면 당신이 셜록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 정말이지 반가웠답니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등장이 아닙니까? 성탄절 전야에 다시 만난 운명의 두 사람!-끔찍하게 진부하고 신물이 날 정도로 통속적이지만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데에 대한 효과가 보증된 상황이지요. 그 애는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는 있지만 누구보다도 쉽게 그런 낭만에 매료되곤 하니까요.”

 

 지금까지의 적대적인 태도는 완벽하게 꾸며낸 것일까 싶을 정도로 환영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존은 어리둥절했다. 그의 장광설에 포함된 어휘는 하나같이 학구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었기 때문에 책에서 곧장 걸어 나온 사람이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침 저택의 생활이 지겨워질 때도 되었으니까 정말이지 시기적절했던 겁니다. 박수를 쳐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집요한 찬사에는 어딘지 비정상적인 데가 있었다. 존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마이크로프트를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존이 예상한 대로 마이크로프트는 잔잔하고-약간은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제가 어째서 이 모든 사실들을 가감 없이 알려드리는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마이크로프트는 더할 나위 없이 나긋한 설교조로 존에게 말했다.

 

 “진실로 신비한 것은 정체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모두 드러내는 법이랍니다. 설혹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낸다 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그 부분이 진정으로 신비함의 정수가 되는 것이지요.”

 

 존이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그는 사색에 잠긴 것과 같은 편안한 표정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중에도, 고목이 나이테를 더해가듯 햇빛은 시간의 줄기를 타고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워온다는 것을 깨달은 마이크로프트는 아치문을 넘어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언덕을 걸어가며 말했다.

 

 “아직 이해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저택의 후문으로 이어진 길로 걸어가는 동안에는 주욱 침묵이 이어졌다. 마이크로프트의 말이 존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마이크로프트가 털어놓은 모호한 진실은, 베일 뒤에서 움직이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처럼 흐리멍덩할 뿐이었다. 게다가 다시 만날 때까지, 라니. 그건 재회를 전제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존이 입을 열었다.

 

 “난…….”

 

 존이 입을 열자 마이크로프트가 멈추어 섰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마이크로프트가 물었다.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요?"

 

 왠지 모르게 허술하게 대답했다가는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존은 벌렸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정말입니까?”

 

 존은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존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듯, 당신의 까다롭고 솔직한 성정이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지요, 라고 마이크로프트가 속삭이며 혀를 찼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속삭임의 여운이 사라진 후 마이크로프트가 또박또박 말했다.

 

 “나라면 그런 방향으로 조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진심으로 충고합니다.”

 

 부드러운 어조임에도 불구하고 섬뜩한 무언가가 존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기에 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분명히 직접적인 악담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악의가 충분히 들어 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살짝 존을 향해 뒤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다시 뻣뻣하게 굳어버린 존을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이어나가며 마이크로프트가 사뭇 이해심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요. 한 번 더 생각해보세요. 성급하면 오히려 독이 되죠.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세요. 결심이 서면 다시 찾아오면 됩니다. 절대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충분히 가지세요.”

 

 중립적인 입장에 선 사람마냥 냉정하고 간결한 말씨였지만 말투가 모호하다는 점이 존의 육감을 자극했다.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찜찜했다. 마이크로프트는 그의 말처럼 존 자신을 썩 마음에 들어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존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점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데도 그는 셜록 때문에 존의 존재를 용인하고 있었다. 그는 대체 왜 셜록 홈즈의 존재가 이 저택에 붙박여있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것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이 문제는 충분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니까요.”
 “제 입장에서 본다면, 한 가지 관점으로 볼 수밖에 없을 텐데요?”

 

 존이 겨우 입을 열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방울뱀의 최면에서 풀려난 새처럼 끽끽거리는 것 같았다. 그야 당연했다.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는 쪽은 셜록이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그에 반해 마이크로프트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건 그 이상의 문제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신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완고하시군요.”

 

 존이 거듭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은근하게 위협하는 태도를 취하리라고 생각하고 존은 지레 몸을 굳혔지만 예측을 저버리고 그는 변함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은 곧 우리를 필요로 하게 될 거예요.”
 “왜 내가 당신들을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정말로 모르겠습니까?”

 

 그의 말이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존은 움찔했지만, 마이크로프트는 생각지도 못한 점을 지적했다.

 

 “셜록과 당신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요. 특히 권태와 안정에 지독한 염증을 느끼는 점이 말이죠!”

 

*

 

 저택 후문에 도착하자 셜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존을. 마이크로프트가 그에게 쓸데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냐며 경계 태세를 보이는 것에 마이크로프트는 언제나 그래왔다는 듯이 느물느물하게 화제를 돌리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이상하게도 존을 조금이나마 안심하도록 도와주었다.


 “어제 꽤나 힘든 방법으로 저택을 찾아오셨기 때문에 갈 때는 조금 편하게 가시라고 마차를 구했습니다. 셜록과 저는 여간해서는 저택 바깥출입을 하질 않는 터라 마차도 구비해놓지 않고 있었는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적당한 사륜마차 하나 정도는 들여야겠군요."


 암시적으로 존의 재방문을 권유하는 것에 존의 인상이 미미하게 구겨졌지만 옆에 셜록이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인지 마이크로프트와 존 모두 아까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셜록은 무언가를 어렴풋이 눈치챈 듯 눈빛이 날카로워졌으나 일단은 넘어가기로 한 듯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서 있던 이륜마차에 존이 올라탔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상당히 높게 떠올라 있었기 때문에 밤하늘을 수놓던 별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난 후였다. 때문에 셜록은 존을 배웅하고 나서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짙푸른 역광이 어려 검게 보이는 저택으로 향하는 셜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존은 무언가가 마차 창문을 톡톡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창문을 내렸다. 창문을 내리자 장우산을 손에 든 마이크로프트가 미소 짓고 있었다.


 “달리 뭐라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존이 입술을 달싹였으나 마이크로프트가 더 빨랐다.


 “답은 당신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존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극적인 반응이었으나 마이크로프트는 만족한 기색으로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부디 안녕히 가시길. 다음에 또 만나 뵙길 바라지요.”


 정중한 인사를 끝으로 마이크로프트가 손을 내밀었다. 진절머리 날 정도로 압박적이고 일방적이었던 대화를 얼른 끝내고 싶었던 데다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가 싶은 여상한 그의 태도에 존이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밀자 그가 난데없이 존의 손등에 키스를 해왔다. 메마르고 미지근한 감촉에 존이 앉은자리에서 펄쩍 뛸 듯이 놀라는 찰나 마이크로프트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BBC Sherlock > Nocturn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셜존짐/마레]Nocturne 21+22  (0) 2013.12.13
[셜존짐/마레]Nocturne 19+20  (0) 2013.12.13
[셜존짐/마레]Nocturne 13+14+15  (0) 2013.12.13
[셜존짐/마레]Nocturne 10+11+12  (0) 2013.12.13
[셜존짐/마레]Nocturne 7+8+9  (0) 2013.12.13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