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큐]땡땡이

2013. 12. 13. 01:45 from ETC/007 Skyfall

본드큐

 

 

 사나운 고양이의 목덜미를 긁어주자 가르랑거리며 얌전해지는 광경에 놀란 것처럼 사무실의 모두가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는 동안, 본드가 Q를 바라보며 흐음, 하고 알 수 없는 의미의 신음성을 냈다. 뭔가 심각한 고민을 하는 건가 싶어 Q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데, 본드가 갑자기 책상 위에 벗어놓았던 안경을 집어 들어 Q에게 씌우는 것이 아닌가.

 

 “?!”

 그에 그치지 않고 본드는 또 한 가지 일을 저질렀다.

 “지, 지금 뭐하는 겁니까!”

 본드가 Q를 공주님처럼 들어 올려 품에 안고 웃으며 말했다.

 “뭐긴. 땡땡이치러 가는 거지.”
 “때, 땡땡이……!”

 지나치게 당당한 태도로 땡땡이 운운하는 본드의 태도에 넋을 잃은 Q가 당황하여 주춤거리다가 빽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얼른 내려놓으세요!”
 “왜? 그다지 무겁지 않은걸. 오히려 깃털처럼 가벼운데? 맛있는 걸 먹여서 살을 좀 찌우던가 해야겠군.”
 “제 체중은 제가 알아서 관리할-아,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제가 자리를 비우면 평행 우주 간 정보량 밸런스 관리는 누구더러 하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Q의 항의에 본드는 그야 문제될 것 없다는 태도로 머니페니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머니페니, 뒷일을 부탁해.”
 “물론이죠.”

 시원스럽게 본드의 부탁을 승낙하는 머니페니를 포함하여, 귀엽지만 워커홀릭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상사의 등쌀에 시달려왔던 사무실 식구들은 모두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마치 한통속이 된 것처럼 모두가 동조하여 고개를 끄덕이자 Q는 기가 차다는 태도로 뭔가 잔소리를 하려 했으나 본드가 Q의 말을 자르고 능청맞게 말했다.

 “이런, 너도 형님들처럼 땡땡이를 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어.”
  “그럴 필요성 따위 조금도 없습니다!”
 

 Q의 반박은 소용이 없었다. 깡마른 Q가 저항한다고 해서 본드의 품을 벗어나는 것 또한 역시 불가능했다. 그저 얌전히 안겨서 생전 처음으로 업무 중 일탈에 동참하는 수밖에. 물론, Q과 본드의 갑작스런 업무 중단은 ‘임무 수행 중 예기치 못한 대기상황’ 으로 처리될 것이었고 말이다.

 

*

 

 본드에 품에 안겨 버둥거리던 Q는 도착한 장소를 보고는 몸에 힘을 뺐다. 못 믿겠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며 그곳의 풍경을 바라보던 Q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긴…….”

 “어때? 마음에 들어?”

 그들이 도착한 곳은 Q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의 옥상 테라스였다. 아무도 없는 테라스는 Q의 마음에 쏙 들도록 조용했고, 사무실에 처박혀있느라 언제 보았는지조차 잊어버렸을 정도로 오랜만에 보는 하늘에서는 쏟아져내리는 맑은 햇빛이 내리비치며 탁 트인 풍경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본드에게서 안겨있던 Q가 그의 팔에서 내려왔다. 넓은 테라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느긋하게 둘러보던 Q가 본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래서 굳이 안경을 씌우고 데려오신 거군요?”

 본드는 대답 없이 하하 웃었고, Q는 곧 의자 하나를 골라 앉았다. 그걸 보며 본드가 부드럽게 미소짓자 Q가 물었다.

 “왜 웃는 겁니까?”
 “역시 그 의자를 가장 좋아하는군.”

 본드의 말대로 Q가 고른 그 의자는 이 카페에 올 때마다 Q가 앉곤 하는 의자였다. 적당히 낡아서 안온한 나무 빛깔을 띤데다가 귀에 거슬리지 않는 낮은 삐걱 소리를 내면서 Q의 몸뚱어리를 포근하게 받아들이는 의자의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속내를 들켰다는 생각에 뺨이 조금 상기된 Q가 톡 쏘았다.

 “용케도 알아차리셨네요.”

 Q의 앙칼진 쏘아붙임에도 본드는 여유로운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를 의자에 앉힌 후 본드는 한편의 트레이 위에 준비되어 있던 찻잔과 찻주전자를 가져왔고, 테이블 위에 놓인 갖가지 종류의 양철곽 안에 든 찻잎을 은제 스푼으로 퍼내어 능숙하게 차를 우렸다. 총을 쥐고 주먹질을 하는 데에 더욱 익숙할 투박한 손이 여린 다기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능란하게 다루는 것이 어색할 법도 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하고 느긋한 분위기에 취한 Q는 그 점쯤은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었다.
  곧 향긋한 다향이 퍼졌고, 본드는 Q의 앞에 놓인 찻잔에 주전자를 기울였다. 연한 붉은빛으로 우러난 찻물이 소담한 향기를 풍기며 찻잔에 담겼고 Q는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깔끔한 맛과 적절한 농도에 씁쓸함에 줄곧 경계 태세를 풀지 않고 있던 Q의 인상이 한층 부드럽게 풀어졌다.

 

 “마음에 들어?”

 본드의 물음에 Q가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유능한 요원이시라 그런지 차 끓이는 솜씨도 남다르시군요.”

 불친절한 말투였지만 간접적으로 칭찬을 담고 있는 것이 명백한 그 말에 본드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임무에는 명철하면서 왜 자신 앞에서는 저런 바보같은 표정을 짓는 것일까 하고 Q는 생각했다. 주책맞게 실실대는 본드를 절반은 한심스럽다는 시선으로, 나머지 절반은 왜인지 모를 민망함으로 그를 바라보던 Q는 본드가 시선을 돌려 자신을 쳐다보자 그에게로 고정되어 있던 눈길을 황급히 내렸다. 꼭꼭 숨기고 있던 어떤 감정을 들켜버린 듯해 다시 뺨이 뜨거워졌다.
 한동안 테라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날씨는 유난히 화창했고, 고요한 침묵으로 가라앉은 공기 중으로 홍차의 향기가 기분 좋게 떠돌며 무거운 정적을 완화했다.
 어색한 침묵을 무시하려는 듯 차에만 신경을 집중하던 Q는 이어지는 적막을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순전히 땡땡이나 치려고 절 데려오신 건 아닐 것 같은데, 뭔가 단둘이서만 이야기해야 할 용건이나 청탁이라도 있으십니까?”

 본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런, 그렇게 내 속마음을 파악하려고 머리 아프게 굴 필요는 없다고. 정말로 땡땡이를 치려고 끌고 온 거니까.”
 “그런 것치고는 오늘따라 제 비위를 맞추시려고 무척 애쓰시는 것 같군요. 제가 좋아하는 카페와 의자까지 꿰고 있으신 걸로 봐서 말이지요. 게다가 이 홍차 블렌드도 제가 좋아하는 종류라는 점이 무척이나 수상쩍군요. 저는 제 개인정보를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마냥 줄줄 흘리고 다니는 타입이 못 되어서요. 누군가가 알려준 게 아닙니까?”

 Q의 날카로운 추궁에 본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들켰군. 솔직히 말하자면 형님께 물어보았어.”
 “마이크로프트입니까?”

 본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인간, 또 쓸데없는 짓을… 하고 분노로 바르르 떠는 Q를 말리며 본드가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형님들도 다 동생을 생각해서 나한테 이것저것 알려주신 거니까.”
 “절 정말로 아낀다면 그럴 시간에 일이라도 돕는 게 더 바람직한 처사일 텐데요? 안 그래도 요즘 얼마나 엔트로피 급증 현상이 심한데…….”

 투덜거리는 Q에게 본드가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어차피 네가 그렇게 몸을 혹사시켜가며 일하더라도 늘어날 엔트로피는 늘어난다고. 현장 요원인 나도 아는 사실을 Q가 모를 리 없잖아. 그러니까 이럴 때만큼은 마음 놓고 휴식을 즐기는 게 어때?”

 반박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선뜻 수긍할 기색을 보이지 않는 Q에게 본드가 물었다.

 “혹시 아랫사람들이 그렇게도 못미더운 건가?”
 “그렇지는 않지만.”
 “그러면 Q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려던 Q는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하여튼 제임스 본드와 함께 있으면 도저히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가 없다. 까딱 잘못하면 그의 의도대로 말려들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할 자신까지 괜히 느긋해지고 만다. 안될 일이었다.
 게다가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 놓고 휴식을 즐길 수 있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같이 있는 게 불편한가?”

 직구로 던져오는 질문에 Q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항상 이렇다. 감정의 징후 따위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정상이어야 하는데 이렇게 동요를 겉으로 드러내보이고 만다. 그리고 솔직하게 불편하다고 해버리면 되는데, 왜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망설이던 Q는 본드가 자신을 응시해오자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다지…….”

 말을 흐리던 Q가 나직하게 말을 맺었다.

 “많이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Q의 대답에 본드가 진정으로 기뻐하는 듯한 미소를 짓자 Q의 뺨이 다시금 달아올랐다. 상기된 얼굴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고 있던 Q에게 본드가 언뜻 말을 던졌다.

 “아, 물론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은 용건은 있어.”

 그에 화끈거리던 얼굴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다. 하긴 정말로 Q와 둘이서 한담 따위나 나누려고 이곳까지 끌고 왔을 리는 만무하다. 사업적인 용건 때문이려니 생각하며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Q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뭐죠?”

 본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Q를 향해 다가왔다. 갑작스런 그의 접근에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놀라는 Q의 앞에서 본드는 프러포즈를 하는 사람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Q의 손을 움켜잡았다.

 “이, 이게 무슨……!”
 “Q.”

 본드가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Q는 그의 엄숙한 태도에 덩달아 긴장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진 말은,

 “좋아해. 아니, 사랑해.”

 엄청난 고백에 Q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다시 입을 벌리는 행동을 반복하던 Q는 한참 후에야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간신히 말이라고 할 만한 것을 뱉어낼 수 있었다.

 “……거짓말이죠?”

 여전히 Q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던 본드가 Q의 손을 꼭 붙들고 다시 한 번 못 박았다.

 “아니. 거짓말도 농담도 내기 같은 것도 아냐. 내 진심이야.”

 확고한 본드의 말에 Q는 다시 한 번 말을 잃었다. 본드는 인내심 있게 Q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그렇지만…….”

 Q가 겨우 입을 열고 중얼거렸다.

 “이제야 겨우 세계 엔트로피가 관리할 만한 수준으로 정착했는데, 정보의 출입을 관리하는 제가 당신하고 교제하게 되면 새로 유입된 밈(Meme)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도 나도 또 철야를…….”

 횡설수설하며 거절인지 응낙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Q에게 본드가 말했다.

 “나와 Q가 사귀는 것만으로도 밈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다니, 벌써 밈 걱정을 할 정도로 그렇게나 날 좋아하고 있었던 건가?”
 본드의 말에 Q는 자신이 우회적으로 그동안 그에게 자신이 품고 있던 마음을 고백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손을 내저으며 급하게 변명했다.
 “그건 실언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날더러 미녀들과 놀아난다며 나무랐었지.”
 “업무 태도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괜찮아, Q.”

 본드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Q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그 어느 여자들보다도 더 아름다워. 안경알 뒤에 감춰진 에메랄드빛 눈동자도, 초콜릿색의 머리카락도, 무뚝뚝한 말만 뱉어내는 그 조그만 입술도, 매일 똑같은 녹색 야상만 입고 다니는 그 몸도. 심지어 그 허름한 야상과 멋대가리 없는 뿔테 안경도 사랑스러울 지경이야.”

 무지막지한 고백이 퍼부어지는 것에 Q는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뭐라고 황급히 말하는 Q의 손을 본드가 부드럽게 끌어당겨 키스했다. 손등에 와 닿은 입술의 감촉에 Q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살짝 닿은 입술은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것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처럼 그의 입술을 Q의 가냘픈 손등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 입술이 전하는 온기가 전염된 것처럼 Q의 뺨도 다시금 연분홍빛 홍조를 띠었다.
  멀리서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와 Q의 진갈색 머리를 흩트려 놓았다. 손에서 입술을 뗀 본드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고백했다.
 

“I love you, my maje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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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본드실바/본드큐

 

스카이폴 배포전에서 외전까지 단행본으로 출간했습니다. 외전은 블로그에 업로드하지 않습니다. 단행본 재고 남아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연락주세요.

 

 

D-5

 

 뒤로 길게 빠졌다가 다시 쳐올리는 도중의 감각이 뻑뻑했다. 뒤에 난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응고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피가 단단하게 굳어가며 색이 점차 검어지고 있었다. 접합된 부위에 지저분하게 엉긴 핏자국을 보며 홀린 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찔꺽이는 소리가 난잡하게 울렸다. 잠시 신음소리가 이어지다가, 크게 숨을 토해내는 것을 기화로 쉰 듯, 거친 듯한 목소리가 뚝 끊겼다. 다시 정적이 밀려왔다. 무거운 침묵 사이로 실바의 초조한 헐떡임이 재차 파고들었다. 귓가를 멍멍하게 울리는 젖은 소리에 본드는 충동적으로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실바의 등허리께를 꼭 붙들어 안고 움찔거리는 어깨를 바라보았다. 실바의 어깻죽지를 이빨로 살점이 떨어져나가라 사납게 깨물며 본드는 절정에 달했다.
 잇새로 피맛이 느껴졌다.

 

*

 

 다소 허무한 절정을 끝으로,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수감실을 나서는 본드의 뒤로 실바의 목소리가 울렸다.


 -……본드.

 

 본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실바는 그에 아랑곳 않고 물었다.

 

 -Do you even remember Severine?

 

 이번에도 본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지 벨트를 잠그는 그의 손이 잠시 멈칫 하고 떨렸을 뿐이었다. 실바는 본드의 미미한 동요를 알아차렸다. 실바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본드는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수감실을 나섰다. 실바가 쾌활하게 소리쳤다.

 

 -Goodbye, James!
 
 

 

D-0

 

 Q가 말했다.

 

 -실바가 죽었어요.

 

 지나가는 투였다. 본드 또한 무심하게 대꾸했다.

 

 -알고 있어.
 -그래요?

 

 Q가 묻자 본드는 잠시 Q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대답했다.

 

 -그래.

 

 본드는 Q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Q가 나직하게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바람결에 그의 한숨과 음성이 섞여들어갔다. 옥상에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웠다. 본드는 꼿꼿하게 선 채로 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Q는 잠시 동안 그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곧게 뻗은 검정 코트의 끝자락이 한순간 휙 불어온 바람에 펄럭였다. 본드는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유난히 맑은 하늘을, 그 아래 펼쳐진 런던의 분주한 정경을, 그리고 저 멀리로 흐려지는 지평선을 끝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Do you even remember Severine?’

 

 문장이 메아리쳤다.
 나직하게 한숨쉬었다.

 

*

 

 무엇을 그리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을까 싶어 Q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본드의 곁으로 다가섰다. 회색빛 건물의 외벽은 마치 깎아지를 듯한 절벽처럼 아래로 곧장 떨어져내렸다. 난간도 없는 옥상 가장자리에 피뢰침처럼 서 있는 본드의 신형은 어찌 보면 굳건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Q는 꼭 본드가 지금 당장 그 아래로 몸을 던지고 싶어한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Q는 본드를 따라 아래로 보이는 차체들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 흐름은 빨라졌다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가짓수를 다 셀 수 없는 색조들이 모여 무채색으로 귀결되고, 저마다 다른 뉘앙스의 회색이 물처럼 미끄러져 흐르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이따금 하얗게 빛을 반사하는 그것을 보고 있자니 솟구쳐 오르는 급류가 돌에 부딪혀 일어나는 하얀 거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딩과 그 아래 흐르는 사람들. 절벽과 그 아래 흐르는 강물. 허공을 감싼 하늘은 잔인하게 맑고 푸르렀다. 그리고 Q는, 야릇하게도 무언가가 그의 내부에서 무너져내리는 듯 느껴졌다.
 Q는 천천히 허리를 곧게 폈다. 몹시도 허탈한 기분이었다. 아직도 시선을 허공에 고정한 채로 서 있는 본드를 뒤로하고 Q는 천천히 옥상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계단참의 문이 삐걱 하고 열리는 찰나, 본드가 말했다.

 

 -Q.

 

 그의 부름에 Q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릴 뻔했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있었다. 꼴사납게 그의 무관심에 슬퍼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어차피 자신과 그의 관계는 요원과 쿼터마스터라는 관계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왜요?

 

 본드가 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이었다.

 

 -미처 말하지 못했는데,

 

 Q는 본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기대해도 되는 걸까?

 

 -다음 임무 때는 동행하도록 해보자구.

 

 멋쩍어하는 듯한 본드의 말에 Q는 미소가 비어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비행기는 타지 못한다고, 이브가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무섭다면 곁에 같이 있어주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어줄 테니 기대하라고.
 -그럼…….

 

 그래. 이거면 된 거다.

 

 -…기대할게요.

 

 Q는 빠르게 내뱉고는 옥상 계단문을 쾅 닫아버렸다. 본드가 그런 그의 앵돌아진 뒷모습을 보며 귀엽다는 듯 낮게 흘리는 웃음이 귀에 선했다.

 

*

 

 가볍게 웃으며 모습을 감춘 Q의 모습을 눈으로 덧그리던 본드의 미소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머릿속에서는 아직 목소리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Do you even remember Severine?’

 

 비참하게 죽은 여인을 떠올렸다. 머리로 술잔을 받치고, 윌리엄 텔의 아들처럼 신뢰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여인. 탄환이 발사되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고개를 푹 수그린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은 비스듬한 각도로 균형을 잡지 못했고, 곱슬머리가 폭포수처럼 앞으로 쏟아져 내렸었다. 힘없이 꺾인 고개는 다시는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지 못했다.
 더 이상 그녀의 환상을 견디지 못한 본드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환상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환영처럼 Q의 미소가 떠올랐다. 엷은 붉은색의 입술. 붉은색은 점차 깊어져간다. 실바의 창백한 어깻죽지에 물든 붉은 잇자욱이 눈앞을 떠돈다. 초승달처럼 휜 형태의 핏빛 자국이 어른거리자 본드는 다시 눈을 감았다.

 

 -Q…….

 

 의미모를 중얼거림을 끝으로, 본드는 다시 눈을 뜨고 코트 깃을 살짝 올려 여미고 옥상을 떠났다.

 

 

 

D+4

 

 모니터를 바라보는 무심하고 건조한 녹색의 눈동자가 깜박였다. 눈동자는 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파일 삭제 확인’

 

 그것은 실바와 본드가 대면했을 시각의 영상 기록을 담은 파일이었다.
 그러니까, 약간의 트릭이 있었던 셈이다.
 Q는 본드가 영상 기록의 중지를 요청했을 때 카메라와 컴퓨터 사이의 연결을 단절했을 뿐, 실상 영상 자체는 꼬박꼬박 녹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메인 컴퓨터의 데이터베이스로 백업되지 않았을 뿐으로, 둘의 만남에서 실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Q는 언제든지 알아낼 수 있었다.
 본드의 요청에 대해 저런 얄팍한 잔꾀를 쓰게 된 것은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충동 때문이었다. 그 충동은 실바에 대한 자신의 질투라고 해도 좋았다. 라울 실바는 제임스 본드와 기분 나쁠 정도로 닮아있는 반면에, 자신은 제임스 본드와의 공통점 따윈 없었으니까. 과연 그 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으며, 왜 그것을 비밀로 하려고 하는가? 굳이 자신에게 부탁하면서까지?
 마우스를 손에 쥔 채로 Q는 몇 초간의 짧은 시간동안 갈등했다.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Y/N’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Q는 속으로 컴퓨터가 던진 질문을 되뇌었다. 기록 유실이 아닌 고의적인 기록의 폐기는 중대 처분감이다. 007의 쿼터마스터 직은 물론, MI6에서 퇴출당할지도 모른다.
 입술을 깨물던 Q는 숨을 짧게 들이켜고 마우스 왼쪽 버튼을 클릭했다.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Y/N’

 

 흔적도 없이 파일을 디스크에서 날려버린 Q는 혹시라도 다른 누군가가, 혹은 자신이 파일의 복원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복원의 가능성까지 손수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바쁘게 손을 놀리던 Q는 작게 실소했다. 쓸쓸한 웃음이 한동안 입가에 머물렀다.

 

 


<Undead>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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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본드실바/본드큐]Undead 5

2013. 12. 13.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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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드실바/본드큐

 

 

 -이러려고 온 건 아니었어요.

 

 Q가 말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한 듯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에 본드는 피식 웃었지만 그의 말에 아무런 토도 달지 않았다. 본드는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도드라진 쇄골을 검지로 쓸었다. 정사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몸은 단순한 접촉에도 쉽게 흥분했다. 역시 젊어서 그런지 Q는 본드의 애무에 금세 달콤한 숨을 흘렸다.
 단조롭지만 세심한 애무를 거듭하며 본드는 Q라는 남자에게는 의외적인 요소가 많다고 생각했다. 오늘 그는 Q와 갑작스런 관계를 가지면서 여러 번 놀랐는데, 그 중 그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Q에게서 발견한 의외의 면모였다. 색기라곤 약에 쓸래도 없을 것만 같던 단정하고 배타적인 태도의 Q였건만, 막상 침대에 눕히자 뭐라 말할 수 없이 묘한 색기를 발산하는 것이 아닌다. 본드가 주는 자극이 유도하는대로 여윈 등줄기를 휘며 높은 소리로 흐느껴 우는 Q의 모습은 매우 선정적이었고 마치 어린 소년을 희롱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 산전수전 다 겪어본 본드를 모처럼 몹시 흥분하게 만들었다.
 부끄러워하긴 했지만 그다지 내숭을 떨지 않고 솔직하게 쾌감에 응하는 그 모습 또한 무척 사랑스러웠다는 생각을 하며 본드는 애무를 계속했다. 단단한 남자의 손마디가 쇄골에서부터 가슴팍의 유두 근처를 간질간질하게 어루만지자 숨소리가 약간 거칠어진 Q가 본드를 밀어내며 말했다.

 

 -하지 마요.

 

 본드는 미련없이 손을 떼었다. 대신 그는 Q에게 무척이나 곤란할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날 좋아했어?
 -그런 거 아니라니깐요.

 

 거듭 부인하는 Q의 모습에 장난기가 솟은 본드는 시트 자락 사이로 드러난 Q의 배를 마구 간지럼 태우면서 언제부터냐고 물었지만 부끄럼을 타는지 Q는 눈에 눈물이 맺힐 지경이 되어도 완강하게 입을 열지 않았다. 간지럼에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면서도 Q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본드는 조금 아쉬웠지만 더이상 그에 대해 묻지 않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대신 그와 몸을 섞을 기회가 또 생기면 그때 다시 한 번 물어보기로 했다. 물론 그때는 물어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소한 듯 보이는 소년같이 가녀린 체구의 몸에서 야한 소리를 뽑아내며 그를 쾌감에 못견디어 엉망으로 울게 해 주리라고 본드는 다짐했다.

 

 -그거 알아요?

 

 Q가 눈가에 배인 눈물을 닦으며 문득 입을 열었다.

 

 -당신이 들른 덕분인지 실바가 더이상 저항하지 않더군요. 일이 한결 편해졌어요.
 -얌전히 포도당 주사를 맞던가?
 -그래요. 대체 어떻게 구슬린 거죠?

 

 본드는 비아냥대는 듯한 뉘앙스로 포도당 주사를 언급했으나 Q는 그러한 뉘앙스를 단순히 본드의 비뚤어진 성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대신 Q가 떠보듯 말했다.

 

 -역시 그에겐 당신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나 보군요. 우리가 며칠간 아무리 설득해도 그의 의사를 바꾸진 못했는데 말이예요.

 

 본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실바가 의향을 바꾼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저질렀던 일을 생각하면 더욱 모를 일이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본드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지는 것을 Q는 눈치채지 못했다. Q는 계속해서 말했다.

 

 -혼자 힘으론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강력하게 저항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말하는데 본드가 Q의 말에 담긴 이상한 사실을 간파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돌변해 Q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혼자 힘으로 서지도 못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Q는 갑자기 자신을 향해 굳은 표정으로 물어오는 본드를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몰랐나요?
 -뭘 말야?
 -자기가 찔러놓고도 몰랐군요.

 

 Q가 속시원히 대답을 하지 않자 본드가 그의 뒷말을 재촉했다. Q는 본드가 실바의 이상을 몰랐다는 것에 대해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으나 본드의 채근에 순순히 대답했다.

 

 -당신이 찔렀던 단도가 미묘하게 심장을 비껴나간 대신 그의 척추 신경 부근을 건드렸어요. 척추 자체에 이상은 없지만 신경이 놀란 것처럼 제대로 신호전달을 못하더군요. 팔다리는 그럭저럭 움직이는 편이지만 몸을 일으킬 수 없다고 하더군요.

 

 Q의 말에 본드의 안에서 한 가지 의문이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그랬군...그래서...

 

 무언가 짚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본드에게 Q가 물었다.

 

 -아래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별 거 아니야.

 

 본드는 대답을 피했다. 집요하게 물어오는 Q의 질문을 회피하기 위해 본드는 되려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그런데 그렇게 내버려두어도 상관없는건가? 휠체어에라도 앉혀두어야 나중에 심문하기에 편하지 않겠어?

 

 Q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이 왜 그 문제에 대해 걱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며 그가 본드의 질문에 답했다.

 

 -휠체어 따위는 사치일 뿐이예요. 어차피 말로리가 부임하는 즉시 그는 총살당할 거니까요.

 

 총살. 처음 듣는 말에 본드의 눈이 커졌다. 실바가 총살당한다고?
 Q는 잠시 놀란 표정의 본드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실바는 전임 M의 과오의 집결체이자 과거의 폐습을 상징하는 존재이니까요. 그를 숙청함으로서 M의 잘못을 씻어낸다는 의미부여를 하려는 거겠죠.

 

 관료제 조직은 속죄양 의식을 아주 좋아하니까요, 라고 여린 생김새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듯한 냉정한 말을 잘도 뱉어내는 Q에게 본드가 충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본드가 이제서야 그 소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Q가 잔소리를 했다.

 

 -소식에는 깡통이군요. 그러니까 기지에도 자주 오라고요. 이미 다른 요원들도 다 아는 사실을 정작 본드만 모르고 있잖아요. 집에 있어봤자 술이나 마시고 여자나 끌어들일 거면서...

 

 미묘하게 투정이 담긴 어투였으나 실바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버린 본드는 그것을 미처 달래줄 여유가 없었다. 그저 핀트를 돌리려고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한동안 심각한 표정을 하고 허공을 노려보던 본드는 당장 시트를 벗어던지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Q는 본드의 심경이 갑자기 변화한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침대에서 내려간 그가 갑자기 옷을 챙겨입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본드를 만류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본드는 Q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에게 가보아야겠어.
 -가서 뭘 하려고요? 새벽 네 시에-아니 그 이전에, 지난번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정곡을 찌르는 Q의 질문에 본드가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지?

 

 Q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동요할 이유가 없잖아요?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며칠 전에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 뭔가 변했다고요.

 

 신랄한 Q의 말을 듣고 있던 본드가 손을 멈췄다. 그가 허탈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뭔가 변했다고?

 -딱 집어 말할 순 없지만 당신이 실바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단 건 알 수 있을 정도지요.

 

 Q의 지적에 본드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멈춰있던 손이 잠시 후 다시 움직였다. 그나마 구김이 덜 간 수트 팬츠를 주워 입으며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바지를 걸치고 깨끗한 와이셔츠를 찾아 돌아서는 본드에게 뭐라고 하려던 Q가 본드의 보고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잠깐만요, 007.

 

 그를 따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Q가 그의 등 뒤로 다가서 견갑골 부위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뭉툭하게 깎은 손톱이 그새 자라있었던 것인지 관계를 갖던 중에 그의 몸에 상처를 낸 듯 했다. 등 뒤에 피가 비친 자국을 슬쩍 어루만지자 본드가 움찔거렸다. Q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건 내가 낸 상처 같네요.

 

 작게 미안해요, 라고 말한 Q는 더이상 그를 추궁하기를 그만두고 어디선가 구급상자를 꺼내와 연고를 꺼내 그의 등 뒤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 정도 상처에 연고까지 바를 필요는...
 -제 마음이 불편해요.

 

 현장 요원인 본드에게 그까짓 생채기는 별 것 아닌 상처였지만 Q에게는 큰일이었는지 그는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 자신이 낸 손톱자국의 발간 선을 따라 연고를 발라주고 있었다.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는 가운데 침대 귀퉁이에 걸터앉아 Q가 연고를 다 바르기를 기다리고 있자니 아까 전의 실바가 총살당한다는 폭탄 선언으로 인해 흥분한 마음도 조금은 가라앉는 것같았다. 조심스럽게 등을 가로지르는 손길이 느껴지길 얼마 후, 다 됐어요, 라고 말하며 본드에게서 몸을 뗀 Q를 본드가 상냥하게 끌어안았다.

 

 -고마워, Q.

 

 본드의 포옹을 받아들이며 Q가 중얼거렸다.

 

 -실바에게 가보았자 소용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만...내가 말려도 당신은 결국엔 갈테니까요. 그렇지요?
 -미안.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텁텁한 향수 냄새의 기척따윈 한 조각도 없는 Q의 순수한 체향을 들이마신다. 다소 무거워진 분위기를 떨치려는 듯 그 보드라운 목덜미에 장난스럽게 콧잔등을 비빈 후 본드는 몸을 일으켜 옷을 마저 챙겨입기 시작했다.

 

*

 

 일어설 수조차 없는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겠답시고 지키고 서있는 사람 하나 없는 수감실은 적막 그 자체였다. 철저한 무소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실바는 본드가 들어오며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두 팔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열린 문틈으로 본드의 코트자락에 묻어온 찬 새벽공기가 훅 끼쳤다 사그라들었다.
 절도있게 울리던 본드의 구둣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다가 그의 앞에서 멈추었다. 그새 구강 보조기를 고친 것인지 다시 제 모습을 되찾은 실바는 그럭저럭 멀쩡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선 본드를 맞았다.

 

 -어서 와.

 

 말로는 아무리 멀쩡하다 해도 실바의 안색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확연히 바래 있다는 것을 본드가 모를 리 없었다. 여전히 잠은 제대로 청하지 않는 듯 눈 아래에는 짙게 그늘이 져 있었다. 지금도 새벽 네 시에 졸음기 하나 없이 깨어있었으니 본드가 방문하지 않은 며칠 동안의 생활도 충분히 알 만했다. 초췌한 실바를 마주한 본드는 동정과 연민이 섞인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지만 정작 실바는 그런 것 따윈 개의치 않는지 말끔한 미소를 띠며 그를 바라보았고, 의외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 그와 마주한 본드는 외려 자신이 수감자인양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초조했다.
 죄의식. 그로 인한 번민.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는 가책이 그를 괴롭힌 탓일 게다. 살인면허를 받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완전히 마모된 줄 알았던 도덕성의 남은 파편이 그를 찌르는 듯 약한 통증이 그를 성가시게 했다.
 실바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말했다.

 

 -바깥 날씨는 어때?

 

 목적 없는 말이 허공을 떠돈다. 본드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실바가 자문자답했다.

 

 -하긴, 이런 곳에 머무르면서 바깥 날씨가 무슨 소용이겠어, 그렇지?

 

 입술을 깨물다 본드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날...저항하지 않았던 까닭이 있었더군.

 

 실바의 농간에 놀아나는 일이 없도록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실바는 잠시 눈을 깜짝거리더니 그날 있었던 일은 이미 다 잊어버린 것을 시위하듯 잠시 눈을 굴렸다. 잊을 리가 없는 일을 마치 다 잊었다는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는 척하고 있는 실바가 가증스러운 나머지 본드에게서는 당장에 그를 두들겨패고 싶다는 욕망이 치솟았다. 그러나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본드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미간을 찡그리기만 했다.
 기다림 끝에 아! 하고 연극적인 감탄성을 터뜨린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척추 때문이었냐고?

 

 딱딱하게 굳은 본드의 입매를 눈만 치켜떠 올려다본 실바가 흐흐 웃었다.

 

 -애송이 너드가 말해줬나보군.

 

 그는 내 쿼터마스터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본드는 실바에 말에 딴죽을 거는 대신 그가 말을 잇길 기다렸다. 본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실바가 눈을 다시 내리깔고 천천히 말했다.

 

 -반항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것 하나만은 아니었다고 해두지. 그냥 심정적인 혼란이라고 하면 적당하겠군. 그렇게 하는 편이 좋잖아, 안 그래?

 

 자기자신에 대해 말하면서도 영 확정적이지가 못한 말투였다. 본드는 그런 그의 애매모호한 태도에 참고 있던 화가 점차 들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뭐...그때 있었던 일은...죽기 전 사소한 해프닝이었다고 생각하지 뭐.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어투의 실바의 말에 본드가 그제야 입을 열어 툭 하고 질문을 던졌다.

 

 -알고 있었나?

 

 본드를 외면한 채로 실바가 피식 웃었다.

 

 -모를 리가 있나?
 -이유는 알고 있어?
 -몰라.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아.
 -왜지?

 

 악에 받친 듯한 본드의 물음에 실바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화를 내지, 본드?

 

 실바의 물음에 본드는 입을 다물었다. 실바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 얼굴에 어린 능청맞은 미소를 볼 때마다 왜 이리도 뜻 모를 분노가 차오르는 것인지는 그 자신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입술이 달라붙기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본드에게 실바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네가 화를 낼 이유는 없잖아?

 

 난 그냥, 죽는 거라고.
 실바가 툭 뱉고는 등 뒤의 벽에 고개를 기댔다. 숨을 토해내듯 나직하게 실바가 말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때가 되면 죽는 것처럼 말이야. 나도 때가 된 거겠지.

 

 맥없이 주절거리는 실바를 분노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본드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조금 진정한 기색으로 실바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본드가 실바에게 속삭였다.

 

 -살고 싶지 않아?

 

 

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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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본드실바/본드큐]Undead 3

2013. 12. 13.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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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드실바/본드큐]Undead 2

2013. 12. 13. 01:32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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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드실바/본드큐

 

 

 눈을 떴다.
 파르르 떨던 눈꺼풀이 열릴락말락, 열리지 않을 듯 싶다가 결국엔 열린다. 흰자위와의 경계가 분명한 검은자위의 풀린 동공이 초점이 분명해짐에 따라 서서히 명료한 그림자를 비춘다.
 멍멍한 귓가. 실 한오라기 떨어지는 잡음도 없는 완벽한 적막이 너무나 공허한 나머지 귀청이 터질 것만 같아 실바는 간신히 뜬 눈을 감는다.

 

 -Open your eyes.

 

 단단한 목소리가 고요를 깨고 울린다. 실바는 목소리에 순종하듯 다시 눈을 떴다. 빛 바랜 이끼 빛깔의 무릎. 익숙한 색감에 놀란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다시 떠본다. 시신경의 교란은 아닌 듯 하다. 유리감옥에 갇혔을 때 입은 구속복이 또다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다. 한 번 입어보았던 옷이 입혀진 무릎을 멍하니 바라본다-아니, 줄곧 입고 있었던가?-그나저나, 언제 잠이 든 거지?-도무지 알 수가 없군-
 제법 멀쩡하게 정신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즉시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강타하는 통에 정신이 없다. 고양이가 갖고 놀던 실타래처럼 멋대로 엉켜진 채 제멋대로 풀려나가는 생각들을 갈무리한다. 일단,
 나는?
 티아고 로드리게즈.
 아니, 아니지,... 라울 실바.
 첫 단추부터 엉망진창이군. 실바는 피식 웃었다. 그럼 그 다음은,
 여긴 어디지?
 고개를 든다. 고개를 들자마자 깨질 것 같은 둔통이 머리를 엄습한다.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던 듯 목근육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삐걱인다. 그나마도 손과 발은 자유롭다. 어째서지? 의문을 잠시 뒤로하고 근육통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기 위해 목을 좌우로 꺾는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오는 한 남자.

 

 -...Mr. Bond.

 

 뭉개진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광대뼈가 욱신욱신 아프다. 흉해보이리란 것은 알고 있으나 통증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입을 한 번 쩍 벌렸다가 닫았다. 입 안에서 붕 떠있던 구강 보조기가 그제야 똑바로 맞물려 제자리를 찾았다. 까득 하는 기분나쁜 감촉이 퍼진다. 쩝 하고 입맛을 다신 후 실바는 좀더 명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신가?

 

 본드가 코웃음을 쳤다. 기세좋게 뀐 콧방귀였으나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반듯하게 편 어깨도 왠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처진 듯 보인다. 그런데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가 대체 언제였지.
 기억의 혼선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실바를 앞에 두고 본드가 말했다.

 

 -제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둥 헛소리는 집어치우길 바라.

 

 요동치는 분노를 간신히 안으로 삭히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다. 실바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본드는 화가 나있다. 왜 화가 났지? 곰곰이 기억을 더듬는다. 널브러진 종이 더미 위에서 사각사각하는 소리와 함께 종잇장이 흩날리고, 그와 함께 꿈처럼 아련한 기억도. 무너져 있던 자세를 바로하고 미약하게 온기가 어린 딱딱한 바닥에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세워 톡톡 두들긴다. 손톱이 꽤 자랐다. 손질한 흔적은 지워진지 오래다.
 눈에 덮혀 지워진 발자국을 따라가듯 모호한 흐름에 진저리를 내며 실바가 말했다.

 

 -수수께끼는 여기까지 하자고. M은 어디 있어?

 

 실바의 말에 본드의 눈이 커진다. 푸른 눈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급작스레 일어나 쿵쿵거리는 걸음걸이로 이편으로 다가온다. 유리벽이 엄연히 그 앞에 버티고 있건만, 분노를 감추려는 노력 하나 없이 걸어오는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실바를 저절로 뒤로 움찔하게 만들 만큼 위압적인 기세였다.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유리벽을 꽝 하고 내리친다. 견고한 유리벽이 미미하게 흔들린다. 본드는 마치 상처입은 사자처럼 우렁차게 외쳤다. 실바는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오...

 

 그가 환희에 젖은 표정으로 탄성을 질렀다.

 

 -이제야 알겠군.

 

 본드가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망연한 시선.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며 실바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까 꿈이 아니었군?

 

 본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답지않게 처량한 눈빛에서 답을 확인한 실바는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처럼 바보같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낮게 웃음을 토하며 실바가 중얼거렸다.

 

 -꿈이 아니었어...

 

 본드가 그 말에 뒤이어 말했다.

 

 -그래.

 

 순서 상으로는 두 남자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여겨도 무방할 내용의 말이었으나 실상은 둘다 서로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이 그저 혼잣말을 읊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머언 꿈처럼 흐릿하고 뿌연 기억을 더듬어 되살린다. 저항 하나 못하고 자신의 품에 안겨 날개꺽인 새처럼 바들바들 떨던 그녀. 아주 아주 아주 가까이에서 느껴졌던 그녀의 두근거리던 심장 고동. 그로부터 도망치느라 흘렸을 그녀의 식은땀 냄새. 장딴지에서 흐르던 그녀의 피 냄새. 자신의 몸에 묻은 화약 냄새가 그녀의 냄새를 폭력적으로 잡아먹는 것이 그토록 아쉬웠다. 조금만, 좀 더 가까이, 그녀를 느끼이 위해 그녀를 꼭 끌어안고 비주를 하듯 그녀와 뺨을 마주댄 채, 총구를 겨누고 격발을 그녀의 손에 맡기고 그는 뭐라고 중얼거렸던가. 실바는 여전히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들뜬 중얼거림을 뱉어냈다.

 

 -그래...그렇게...결국엔...

 

 유리벽에 이제껏 대고 있던 본드의 주먹이 힘을 잃고 스르르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진다. 손에 낀 가죽장갑과의 마찰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작은 소음에 실바가 본드를 향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든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몽롱한 미소가 만면에 가득하다.

 

 -M이 죽었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본드가 내뱉었다. 내뱉는 그 말은 순간이었지만 무게는 천근보다 무겁게 두 사람 사이로 떨어져내렸다. 본드는 그 무게에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같았으나 실바는 무통증에 걸린 사람마냥 여상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내가 할 말을 대신하는군 그래.
 정신이 나간 듯 실실거리고 웃던 실바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또박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슬퍼하는 거야?

 

 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언제든 죽을 년이었잖아?

 

 본드, 너도 알겠지만 그년은 늙을대로 늙어버린 퇴물이었다구.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할망구였지. 멋대로 지껄인다. 지껄임이 중얼거림이 되어가고, 중얼거림은 곧 읊조림으로 바뀌었다. 그 읊조림도 점차 힘을 잃고 잦아든다. 신들린 듯 입술을 움직여 말을, 단어를 뱉어내던 그의 입도 멈추었다. 다시 찾아오는 적막에 본드는 입술을 깨문다.
 한동안의 침묵.
 실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허공 중에 떠돌던 실바의 시선이 본드를 향한다.

 

 -난 왜 아직도...살아있는 거지?

 

 묻듯이, 그의 눈이 데구르르 구른다.

 

 -그 이유는 내가 알고 있지.

 

 본드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그건 바로 네가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야. 너같은 놈이 그렇게 세상을 하직하면 이미 목숨을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애석할까? 그러니까 넌 살아서 좀더 고통받아야 해.

 

 푸른 화염이 그의 눈에서 이글이글 타올랐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놀라운 자제력으로 억누르고 있는 본드를 보자 실바에게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오...Mr., Mr. Bond. 세상에.

 

 흥분으로 인해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린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하면서 말하긴 하는 거야?

 

 킥킥거리며 웃는다. 세상에, 천하의 007이 삼류 악당같은 대사를 지껄이다니! 실바가 그렇게 본드를 조롱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화가 나셨군?

 

 보란듯 크게 웃는다.

 

 -그녀 대신 내가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살아난 건 그녀가 아닌 나였고 말이야? 그리고 우리 본드는, 무척 화가 났답니다. 오, 불쌍하고 가련한 본드...

 

 실바가 본드에게 자못 익살스런 미소를 띠며 말했다.

 

 -Mommy's dead, James!

 

 She's, DEAD! 튀어나온 못에 마지막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조롱조의 말을 한번 더 반복하는 실바는 더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온 방 안을 울리는 그의 웃음소리에 본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웃음소리 사이로 까드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숨넘어갈듯 웃어대는 실바는 숫제 배꼽을 잡고 있었다. 온 몸을 뒤틀며 괴기스런 웃음을 흘리는 실바를 뒤로하고 본드는 더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본드가 자리를 뜬 후 독실 감옥을 울리던 웃음소리는 차츰 잦아들었다. 천장을 울리던 웃음소리는 오열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바뀌었다. 길게 울리던 비통에 찬 울부짖음은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울린 후 보잘것없는 히끅거림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않았다.

 

*

 

 Q는 비교적 청각이 예민한 편이었다. 실바가 수감된 지하층에서부터 올라오는 쿵쾅거리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그 걸음소리의 발생 원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파악한 Q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직 실바가 박살낸 본부를 대체할 건물을 찾지 못한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유물이자 잔재인 낡은 기지에서 머무르며 모든 사건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잔해를 씻어내느라 바빴다. 말 그대로의 의미이기도 했고, 행간에 자리한 또다른 의미로서도 말이다.
 이 기지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생김새와는 달리 옛 본부와 비견하면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알찬 구석이 있었으나, 딱 한 가지가 구비되어 있지 못했다. 바로 방음이었다. 작은 소음에도 몹시 예민하게 반응하는 Q에게는 불상사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직 임무를 부여받지 못한 007이 매일 실바가 머무르는 지하 수감장소에 들락날락하며 코끼리처럼 쿵쾅거리는 것은 더한 불상사였다.
 때마침 본드가 Q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유리문을 열고 폭풍처럼 걸어들어오는 본드에게 불편한 기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 Q는 모니터로 표정을 교묘하게 감추며 일에 집중하는 척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본드는 평소처럼 그저 지나치지 않고 그의 옆에 멈추어섰다. Q는 무시하는 척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동안 말없이 서있던 본드는 Q가 먼저 말을 걸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따라서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Q.

 

 Q가 마지못해 고개를 들고 답인사를 건넸다.

 

 -007.

 

 그가 답하자 본드는 더 시간을 낭비할 것 없다는 듯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실바가 깨어났어.
 -?!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본드를 바라보던 Q가 곧 놀람의 기색을 지우며 말했다.

 

 -일주일 만이군요.
 -그래.

 

 본드가 다소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M이 죽었다는 것을 겨우 기억해내더군! 처음에는 꿈인줄 알던데?

 

 다소 경쾌한 목소리에 Q가 고개를 갸웃했다. 본드는 Q가 보내는 미묘한 시선을 캐치하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왜 살아있냐고 묻더군! 정말이지,...

 

 고조된 어조가 금세 바닥으로 치달았다. 정말이지, 를 반복하던 본드는 곧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궜다. Q는 눈에 띄게 우울한 기색의 본드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괜찮아요? 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무슨 심정에서인지 Q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바로 삼켰다. 대신 표정을 가다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하층 수감실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본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상이 드높은 007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처량한 그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Q는 화제를 돌렸다.

 

 -새 국장이 확정되었어요.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말로리가 새 M이 됩니다. 2주일 후에 부임한다고 하더군요. 청문회장에서 입은 팔의 부상이 생각보다 심한 모양이예요. 지금 상황으로 미루어보아서는 곧바로 부임해도 시원치않을 판인데 윗선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 말이지요.

 

 Q의 말에 본드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다소 무성의한 것을 알아차린 Q가 주의를 주듯 말했다.

 

 -부탁하건대, 007.

 

 숨을 들이마시고 Q가 말했다.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어조였다.

 

 -새 M이 부임하면, 지금까지의 일은 잊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무척 힘들 거예요. 당신에게 말입니다. 알겠어요?
 -...알고 있어.

 

 본드가 대답했다. 그러면 되었어요, 라고 Q가 말했다. 여기까지 개입한 것으로도 충분한 오지랖이었다. 유난히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 것이, 그의 쿼터마스터라는 자신의 위치때문인지, 아니면 오늘따라 유독 약해 보이는 본드의 모습 때문인지 Q는 헷갈렸다.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본드는 Q의 어깨를 툭툭 치고 휭하니 가버렸다. 무척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Q는 문득 생각했다. 그는 지금의 기지에 있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아니, 더 잘 어울린다고. 퇴색했으나 마땅히 제구실을 하는 이 낡은 기지와, 풍파에 시달리느라 폭삭 늙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능한 스파이는 많은 부분이 닮아있었으므로.
 거기까지 생각하던 Q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D-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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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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