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존/레존/마존/짐존/악마는프라다를입는다AU

 

 존은 셜록을 뒤쫓았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걸어도 셜록의 뒷모습은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만 갔다. 선천적인 다리 길이 차이때문인지, 아까 전 목격한 광경 때문에 화가 난 셜록의 빨라진 걸음 속도와 넓어진 보폭 때문인지 그와의 거리를 좁히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같았다.
 잰걸음을 놀리던 존은 다리를 삐끗하여 넘어지고 말았다.

 

 "윽!"

 

 의가사제대의 원인이 된 쪽의 다리가 꼬인 것이 원인이었다. 항상 절뚝거리던 것이 하필 지금 재발한 것인지 아무 이유 없이 무척이나 저리고 아픈 것이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일단 꼬인 다리를 제대로 바로잡고 임시 방편으로 주물러 보았지만 찌르는 듯한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이대로 셜록과는 영영 안녕인가 싶어 절망적인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 셜록이 가던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때 존의 눈에 보인 것은, 그를 향해 급히 달려오는 셜록의 모습이었다.

 

*

 

 아무리 셜록과 존이 열성을 다해 다리의 통증을 덜려고 노력해도 아픔은 사라지지 않고 더해만 갔다. 택시를 잡으려고 했지만, 새벽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택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존은 셜록의 등에 업혀 호텔로 향했다.
 셜록은 존을 업고 한참 걸어가는 와중에 제길,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존은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빠졌다. 나를 업고 가는 것조차 짜증이 난다는 뜻일까?
 존은 셜록에게 쏘아붙였다.

 

 "됐습니다. 그렇게 나를 업기 싫거든 내려놓고 혼자 가요."

 

 셜록이 곧바로 대꾸했다.

 

 "그게 아냐!...길을 잃었다고."

 

 존은 셜록의 등 위에서 눈을 깜박였다. 런던의 도로 사정에는 해박하던 셜록도 역시 파리에 와서는 길을 잃기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왜인지 아까까지도 화가 치밀던 것이 누그러졌다. 존이 어조를 부드럽게 하고 말했다.

 

 "그럼 차라리 여기 있다가 가요. 이대로 업고 가봤자 셜록 당신 체력만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존의 제안에 셜록은 잠시 멈춰서서 생각하다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셜록과 존은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그나마 벤치라도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것마저 없었다면 꼼짝없이 풀숲에 웅크리고 누워서 차가운 밤이슬을 맞으며 밤을 지샐 뻔 했다.
 말 없이 존을 외면하고 있던 셜록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리는 좀 어때?"
 
 고요한 밤공기 속에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존은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까보단 좀 덜하군요. 하지만 걷기에는 무리예요."

 

 왠지 자신이 셜록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해진 존이 말했다.

 

 "이 정도로 아픈 건 처음이라...미처 대비를 못했어요. 미안합니다."
 "괜찮아. 그런 거 가지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

 

 조급하게 셜록이 대답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또 침묵이 내려앉았다. 차분한 밤의 공기를 타고 찌르르 하는 벌레들의 울음소리만이 간간히 들렸다.
 존은 입을 열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아까 전의 오해를 해명하기도 해야했다.

 

 "셜록, 아까 전의 일은-"

 

 셜록은 또 조급하게 존의 말을 잘라먹었다.

 

 "괜찮아. 존이 나를 좋아하지 않은 것 뿐이지, 그것가지고 귀찮게 들러붙을 생각은 없어. 직장은...어쩔 수 없이 옮겨야 하겠지. 존이 불편할 테니까. 추천서는 확실히 써 줄테니 걱정마. 그리고-"
 "잠시만요."

 

 존이 약간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셜록은 미리 생각해둔 말을 외워서 하듯 늘어놓다가 깜짝 놀라 말을 멈추었다.

 

 "일단 내 말 좀 들어줄래요?"

 

 셜록은 존의 말에 따르기로 한 것인지 입을 다물었다. 존은 한숨을 쉬고 천천히 말했다.

 

 "아까 그 키스는 술에 취해서 한 거예요. 아무 의미없는 키스라고요."
 "그런 것치고는 아주 격렬하던데."

 

 셜록이 부루퉁한 어조로 딴지를 걸었다. 존이 말했다.

 

 "말 끊지 말라고 했죠."

 

 셜록이 뭐라 항의하려는 기색이자 존이 선수를 쳤다.

 

 "지금까지 난 셜록, 당신이 하는 말을 충분할 정도로 많이 들어왔다고요. 이제는 내가 말할 차례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입 좀 닥치고 있어요!"

 

 존의 기세에 밀려 셜록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의 휴지 뒤에 존이 입을 열었다.

 

 "아까는 내가 당신 말을 듣지 않고 일찍 연회장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모리어티 씨와 당신 형님하고 같이 술을 마시다가 벌어진 일입니다. 솔직히...그 키스를 하게 된 건 당신 탓이예요!"

 

 갑자기 분개한 목소리를 내는 존. 그러나 존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거 압니까? 난 당신 수발을 들고 당신 따라서 사건 현장에 드나드느라 여자 친구에게 차였어요."
 "그게 내 탓이라는 거야?"
 "아니요."

 

 셜록의 말에 존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내 탓입니다. 왜냐면,-"

 

 망설이던 존이 마음을 다잡고 말을 이었다.

 

 "내가 내 여자친구보다 당신을 더 아끼게 되어버렸기 때문에...내 여자친구보다 당신에게 신경을 더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셜록은 왠지 모르게 웃고 싶었다. 기쁘다는 감정을 모르는 그였지만, 사건을 해결한 후의 성취감을 기쁨으로 종종 혼동하곤 하던 그였지만, 지금 존의 말을 들이며 이게 기쁨인가, 라는 확신이 들었다.
 셜록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존이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그녀와 헤어졌을 때에도 가슴이 아프진 않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다기보다는, 오랜 시간 같이 지내온 사람과 헤어진다는 느낌이 더 강했지요."

 

 존의 숨소리가 죄책감으로 한 순간 거칠어졌다. 셜록은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현명했기에, 여기서 잠자코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존은 말을 이었다.

 

 "그거 압니까? 당신이 그 얼음장같은 얼굴을 하고 사건 현장을 돌아다니며 멍청한 경찰들을 우롱하고, 명석하고 총명한 눈으로 사건 현장을 훑고서 멋진 추리를 한바탕 늘어놓으면 그게 그렇게 오싹하고, 소름이 끼쳤어요. 전율이랄까...난생 처음 그런 걸 느꼈습니다."

 

 존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당신이 상냥해지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은 한없이 불친절해졌다가, 미소를 짓다가, 다시 조롱을 하고, 갑자기 파리에 데려오더니 날 사랑한대요. 그럼, 나는 얼씨구나 좋다, 하고 받아들여야 합니까? 난 그 전까진 남자를 사랑한 적도 없고, 남자를 사랑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한테 손만 내밀면 내가 넘어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내가 우습게 보이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셜록은 차마 그 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존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다는 이유로,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존이 자신의 고백을 당연히 승낙할 것이라고 생각한 자신은 명백히 잘못을 저지른 것이니까. 존을 우습게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행동 징후만으로 그의 대답을 예측한 것 또한 잘못한 것이었다.
 한 순간 극단에 다다라 높아졌던 존의 목소리는 다음 문장에 이르러서 꺼질 듯이 낮아졌다.

 

 "난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앵무새처럼 그 말을 반복한다.

 

 "난...정말로 혼란스러웠다고요."

 

 다시금 둘 사이의 말이 끊길 찰나 존이 다시 원래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 형님이, 한 번 확실하게 알아보기 위해서, 내가 당신을 정말로 좋아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자기한테 키스를 해보랍디다. 난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거듭 말했지만,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태였고...그래서-"

 

 그 순간, 셜록이 횡설수설하는 존의 턱을 손으로 끌어당겨, 부드럽게 입술을 겹쳤다. 원래 그렇게 되기로 예정된 수순이기라도 한 듯, 존은 아무런 저항 없이 셜록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가볍게 시작된 키스는 점점 서로를 집어삼킬 듯 격렬한 파랑처럼 이어지다가 썰물에 쓸려내려가듯 잔잔해졌다.
 키스를 마치고,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셜록이 말했다.

 

 "어때, 이제 혼란스럽지 않지?"

 

 어둠 속에서 눈꼬리를 휘고 웃는 셜록의 눈이 보였다. 존은 그 눈을 바라보았다.
 그 키스가 뭐길래, 더이상 어지러워질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던 존의 머릿속의 고민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착각이 들 만큼 애정을 듬뿍 띠고 반짝이는 셜록의 눈, 호선을 그리는 그의 입꼬리.

 이거면 된 게 아닐까?
 존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마이크로프트 씨가 키스를 잘하긴 하는군요."

 

 뭐라고, 라고 길길이 날뛰며 당장이라도 마이크로프트를 죽이러 갈 기세의 셜록을 기습적으로 끌어안은 존이 셜록의 귓가에 대고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이 훨씬 더 좋아. 한 번 더 해줘."

 

 존의 대담한 요구에 셜록은 기꺼이, 라고 속삭인 후 존과 입맞추었다.
 한 밤의, 파리의 연인들의 숲에서, 두 연인의 정열적인 키스는 그칠 줄 몰랐다.

 

*

 

 셜록은 자신이 존의 대답을 속단한 것에 대해서 그에게 사과했다. 존은 기분좋게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셜록은 곧바로 존을 찾아내지 못한 이유에 대해 털어놓았다. 폴록이라는 모리어티의 수하가 나불대는 것을 의심할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덫에 걸린 셜록은 존재하지도 않는 테드 볼드윈이라는 사람에게서 더글러스를 보호하려고 들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에 그들을 내버려두고 모리어티를 찾았다. 그러다가 존이 모리어티와 마이크로프트를 양 사이드에 끼고 폭음을 하다가 마이크로프트아 키스하는 존의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번에는 존이 사과했다. 존은 마이크로프트와 다신 그런 일로 엮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셜록은 앞으로 자기 앞에서만 술을 마시라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시면 절대 안된다고 극구 당부했다. 대체 왜 그런 조건을 내거는 지는-술 취한 자기 모습이 어떤지 모르는-존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아침이 밝고, 그 둘은 사이좋게 런던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대절했다.

 

 런던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존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셜록."
 
 셜록이 왜, 라고 말했다.

 

 "어젯밤 말인데요, 내가 넘어진 건 어떻게 알고 바로 뒤돌아서 달려온 겁니까?"

 

 셜록은 험,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존, 커피 한 잔 마시고 갈까? 설탕 싫어하지?"

 

 서툴게 말을 돌리려는 그 모습에 존은 짖궂은 미소를 지으며 추궁했다.

 

 "내가 뒤에서 쫓아오나 안 쫓아오나 귀기울여 듣고 있었던 거 맞죠? 그래서 차도 안 타고 가고, 내가 넘어지니까 걱정이 되서 바로..."

 

 셜록은 안되겠다는 듯 머리를 빠르게 굴려 묘안을 짜냈다. 그리고 정말이지 완벽한, 묘안이 떠오른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습관적인 몸짓으로 코트 깃을 올리고, 말을 시작했다.

 

 "존."

 

 갑자기 분위기를 잡는 셜록에게 존이 말했다.

 

 "왜 갑자기 또 분위기 잡아요?"

 

 하도 셜록과 오래 부대끼다 보니 그의 습성을 다 간파한 존 때문에 기껏 멋있게 지은 무표정이 깨질 뻔 했지만 셜록은 그에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존, 나와 함께 삽시다."

 

 존은 전혀 예상치 못한 셜록의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이며, 입을 열지 못했다. 셜록이 그를 채근하자, 겨우 입을 연 존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갑작스러워서,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셜록이 그런 존을 휘감아 안고는 속삭였다.

 

 "그러다가 또 마이크로프트에게 속아넘어가서 둘이 잠깐 동거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리가 없잖-"

 

 약간 화가 나서 소리치려던 존의 입을 셜록은 자신의 입으로 막았다. 처음에는 말을 가로막힌 존의 저항이 거셌지만, 셜록이 성심성의껏 키스를 함에 따라 그 저항은 점차 누그러지고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키스 후에 가쁘게 숨을 헐떡이는 존에게 셜록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사랑해. 그러니 같이 살자."

 

 존은 홀린 듯 셜록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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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이 존을 꼬드겨 바 한 쪽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앉힌 마이크로프트와 짐은 존을 다독이고 '진짜 남자'라고 치켜세워주며 셜록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도록 은근슬쩍 건드리며 동시에 엄청난 양의 술을 먹였다. 처음에 경계하던 존도 아까부터 줄곧 상냥하던 마이크로프트가 옆에 있다는 것에서 짐에 대한 경게심이 허물어진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셜록에 대한 불평을 하기 위함인지 연신 독한 술을 들이키며 기분을 내고 있었다.
 짐은 헤네시를 얼음도 없이 한 잔 가득 따르며 이미 인사불성에 가까운 존에게 권하며 말했다.

 

 "셜록이랑 같이 다니면 답답하지 않아?"

 

 존은 약간 혀가 꼬인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답답하고...속이...터지는 것 뿐이 아니지. 가끔은 기가 막힌다니까. 도대체가, 같이 협력을 해도 모자랄 경찰들을 놀려먹어서 어쩌겠다는 거냐고. 나중에 그러다가 큰 코 다친다고 아무리 말해도 들어먹지도 않고...아주...그냥...내 속을 까맣게 태워놓는단 말야."

 

 화를 내다 말고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하는 존을 보며 존의 좌우에 앉은 짐과 마이크로프트, 두 남자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셜록 새끼 존나 부럽다.'
 '셜록 이놈 자식 복이 터졌네.'

 

 약간 흐트러진 금발은 산책길에 나선 골든 리트리버의 흔들리는 털처럼 햇살을 머금은 듯 따스한 빛깔이었고, 푸른 조명 아래에 있다고 해서 퇴색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눈물을 한 방울 매단 그 눈꼬리는 순진한 듯한 귀여움과 요염함을 동시에 풍기고 있어 뭐라 말 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엄밀히 따지면 존 왓슨은 30대 중후반의 아저씨에 불과했지만, 어쩜 이리도 보듬어주고 싶은 새끼 고양이처럼 연약하고, 품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이렇게 귀여운 걸 주워온건지...진짜 나도 애완동물이나 키워볼까.'

 

 아까 전 셜록을 도발하느라 농담처럼 던진 말이지만 지금 와서 그걸 진지하게 재고하기 시작한 짐은 존의 손등을 슬그머니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러면 셜록은 내버려두고, 나한테 와."
 "뭐?"
 "나한테 오면 실컷 귀여워해줄게. 지겨울 정도로. 어때?"

 

 끈적한 목소리로 존에게 가까이 다가서 유혹하는 짐을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말똥말똥 쳐다보던 존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 게이야?"

 

 직구를 던지는 존 때문에 헛기침을 한 번 한 짐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게이는 아니지만...당신 한정으로."

 

 짐의 말에 존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난 스트레이트란 말야."

 

 그 말에 낙담하던 짐은 이어지는 존의 웅얼거리는 푸념에 귀를 쫑긋 기울였다.

 

 "게이는 질색이야. 게이따윈 되고 싶지 않다고. 제기랄...셜록 그 놈 때문에..."

 

 짐이 뭔가 심상치 않은 존의 기색에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마이크로프트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셜록을 좋아하나?"

 

 가만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끼어든 것치고는 위화감이 없는 그의 목소리에 존은 술에 취해 무거운 고개를 까딱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니야...제길...그딴 놈...좋아할 리가...난 스트레이트라고 말했잖아!"
 "그래. 존은 스트레이트지. 스트레이트고 말고."

 

 발끈하려던 존은 마이크로프트가 상냥하게 다독이는 것에 금세 수그러들어 다시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셜록 새끼 때문에 머리가 좆나 아프긴 한데...그건 좋아하는게 아니야. 아니라고. 그냥 머리가 아픈 것 뿐이니까. 두통약을 먹으면 괜찮아지겠지."

 

 정말로 심하게 취한 것인지 평소에는 자제하던 욕설이 간간히 튀어나와, 그들은 존의 입이 의외로 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어린애처럼 순진한 발상을 하는 것은 정말 귀여웠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마이크로프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한 번 알아보자고. 단순한 두통인지 아닌지 말일세."

 

 존이 멍한 시선을 마이크로프트에게 돌리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안단 말야?"

 

 마이크로프트가 속삭였다.

 

 "간단해. 나에게 키스를 해보면 되지."

 

 존은 마이크로프트의 제안을 듣고 잠시 말이 없더니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런 씨발...너도 호모냐? 내 주변엔 왜 호모밖에 없는거야...제기랄..."

 

 또다시 욕을 뱉어내는 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것을 짐이 만류했다. 벌써 존이 돌아가서야, 이렇게 재미있게 돌아가는 상황이 제대로 무르익지도 않고 끝나버리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냐. 마이크로프트는, 자기가 셜록의 형이니까, 셜록 대신으로 한 번 시험해보라는 뜻이었지. 자기가 게이라는 건 아니라고. 그렇지 마이크로프트?"

 

 이 순간만큼은 일심동체 격으로 뜻이 통하는 마이크로프트와 짐이었다. 짐이 존을 말리는 동안 마이크로프트도 상식인의 목소리를 가장하여 말했다.

 

 "나는 절대로 게이가 아니라네. 그냥 자네가 너무 마음고생을 하는 것 같아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그런 것인데...그렇게 매정한 반응을 보이다니. 게다가 그런 차별적인 말을 하면 짐이 상처받잖나. 짐은 진짜로 게이란 말이야."
 "아니, 난 게이는 아니고 게이 흉내를 낸 것 뿐인데..."

 

 그러나 이미 존을 꼬신 시점부터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짐은 힘껏 항변했지만 이미 존과 마이크로프트에게 짐은 게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
 어쨌든 마이크로프트는 다시 존을 꼬시기 시작했다. 물론 독한 술 한 잔을 더 건네면서.
 
 "머리 색깔이 다르긴 하지만, 나랑 셜록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얼굴도 꽤 갸름한 편이고, 키도 비슷하다고. 한 번쯤 시도해보는 편이 존 자네가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네."

 

 마이크로프트가 거듭 설득하고 짐이 옆에서 거들자 술에 떡이 되어 판단력을 상실한 존은 헤실 미소지으며 "그럴까아...?"라고 운을 떼었다. 마이크로프트와 짐이 그 미소에 넋을 잃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음은 물론이다.
 존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이크로프트가 앉은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의 뒷머리를 잡고 입을 맞추었다. 마이크로프트의 열린 입술 틈으로 술기운에 달아오른 혀가 거침없이 파고들어왔다. 그러나 존이 술에 어지간히 취한 탓인지 주인을 따라 술 취한 듯 입 안에서 비틀거리는 혀를 존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사이 마이크로프트가 행동을 개시했다.
 그의 혀는 부드럽게 존의 혀를 감고 말랑한 부분을 농락하며 서서히 무대를 존의 입 안으로 옮겨갔다. 알싸한 술 맛이 느껴지는 점막 안으로 진입하며 마이크로프트는 혀놀림을 좀더 적극적으로 바꾸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존의 혀를 그의 혀로 감싸고 존이 그것에 어쩔 줄 몰라하는 틈을 타 더욱 음란한 혀놀림을 구사하여 존에게 쾌감을 선사했다. 처음에 장난스럽게 마이크로프트의 뒷목을 감싸고 있더던 존의 손은 마이크로프트의 능란한 키스에 못이겨 힘을 잃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두 사람의 입가로 두 사람의 타액이 섞여 새어나왔다.

 

*

 

 존은 부드러운 무언가가 자신의 입 안을 휘젓는 느낌에 점차 술이 깨는 것 같았다.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쾌감 때문에 자신의 혀는 맥을 못 추고 상대가 선사하는 쾌감에 일방적으로 떨기만 했다. 이런 감각은 처음 겪어 보는 것이라 생소했지만 꽤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자신의 본능적인 육감을 일깨웠다.
 존은 힘겹게 눈을 뜨고, 자신을 강하게 옥죄는 상대를 밀쳐냈다. 구속은 강했지만 존이 거부하자 의외로 쉽게 그는 그 구속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마이크로프트...?"

 

 간신히 정신을 차린 존이 말했다. 믿겨지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잠시 아까 전의 일을 반추해 본 존의 입에서는 바로 쌍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씹...!"

 

 간신히 뒷말이 다 나오는 것은 억제했지만 존은 당장이라도 욕을 저 둘의 면전에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존의 주먹이 꽉 쥐어진 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본 마이크로프트는 졸지에 얻어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임 전가를 시도했다. 그는 존에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 양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존, 먼저 키스한 건 자네야. 내가 설득하긴 했지만...그래도 확실히 알지 않았나?"

 

 그의 말이 맞았다. 전부 맞았다. 그의 말대로, 확실히 알아낸 것도 있었다.
 자신은 셜록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
 묘한 거부감에 밀쳐내기 전까지 자신은 키스의 느낌을 온전히 즐기기는 커녕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를 연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떠오르는 사람은 오직 셜록 홈즈, 그 성격 나쁘고 잘난 체는 오지게 하는 그 남자였다.

 

 "그래요. 하지만 방법이 정말 부적절했어요."

 

 어느새 정신을 말짱히 차린 존이 아까 전까지의 귀여움이라곤 온데간데없이 딱딱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 두 사람은 아쉬웠지만, 어쩌랴, 존은 이미 임자가 있 몸인 것을.
 그렇게 세 사람이 어정쩡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무렵 짐이 존의 뒤쪽을 바라보고 입을 벌렸다.

 

 "어...?"

 

 예사롭지 않은 짐의 기색에 마이크로프트와 존 모두 짐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셜록이었다.
 살벌한 눈초리로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는 코트 자락을 휙 날리며 입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뒤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뒷모습은 너무나 쌀쌀맞아서 짐도, 마이크로프트도, 존도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

 

 존이 둘에겐 일별도 하지 않고 황급히 셜록을 쫓아가고, 남은 두 남자는 쓸쓸히 술잔을 기울였다.
 두 사람 모두 말이 없다가, 짐이 마이크로프트에게 슬쩍 말을 붙였다.

 

 "갑자기 쓸쓸해보이네, 마이크로프트."
 "새삼스럽게 위로하긴."

 

 존에게 하던 말투와는 정반대로 차갑기 그지없는 말투였지만 그런 말투에 더 익숙한 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오늘 밤은 내가 위로해줄까?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실연 기념으로."

 

 요염하기 그지없는 유혹의 말이었지만 마이크로프트는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누구한테 죽을 일 있냐?"
 "아, 진짜...소심하긴. 셰린포드가 뭐가 무섭다고 그러는 거야?"

 

 그렇다...짐 모리어티는 셰린포드의 애인이었다. 정말이지 충격과 공포의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셰린포드가 어떻게 짐을 꼬셨는지, 모리어티는 어떻게 그의 구애를 받아들였는지는 세간의 미스터리였으나 아무도 그 과정을 알고 싶어하는 이는 없었다. 알려고 들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 분명했으므로...
 더욱 문제인 것은 마이크로프트마저도 벌벌 떠는 셰린포드의 애인이라는 사람이 틈만 나면 바람을 피우려고 안달이 나 있다는 것이었다. 짐 본인의 말에 따르면-

 

 "우리 그이는 독점욕이 너무 심해."

 

 정말이지 민폐였다. 그가 바람을 피우면 짐은-침실에서-벌을 받긴 하지만-짐은 오히려 그걸 노리는 것 같았다-상대는 아작이 나질 않는가.
 마이크로프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너무 문란한 거야."

 

 짐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까 그 둘, 어떻게 되려나."
 "무슨 상관이야.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 지지고 볶겠지."
 "그렇겠지?"

 

 짐은 후훗 웃었고, 마이크로프트도 약간은 허탈한 기가 섞인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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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 정식으로 소개를 하지. 나는 마이크로프트 홈즈로 자네 상사인 셜록 홈즈의 형이라네."
 "난 제임스 모리어티라고 해. 짐이라고 불러줘~"

 

 우아한 어조의 마이크로프트의 소개에 이어 경박한 어조의 짐의 인사가 이어졌다.
 이미 이 둘이 등장한 시점에서 셜록은 존더러 호텔방으로 돌아가라고 강력하게 권유하고 싶었지만, 연회는 이미 시작하여 음식이 서빙되기 시작한 후에야 셜록은 존을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돌려보냈다간 남들의 눈에도 거시기할 것이고, 잘못했다간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의 괜한 관심을 끌 수도 있었기에 셜록은 자신이 존의 방어를 더욱 철저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식사가 시작되었지만 테이블에 앉은 인원의 절반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마이크로프트가 데려온 안시아라는 비서는 다이어트 중인 것인지 휴대폰만 연신 만지작거리며 휴대폰 액정에 거의 고개를 처박다시피 했고, 짐이 데려온 모런이라는 사람도 팔짱을 낀 채로 식탁 위에 험악한 분위기를 주도했다. 셜록이야 말할 것도 없이 음식따윈 즐기지 않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으니 알 만 했다. 음식에 손을 댄 사람은 마이크로프트와 짐과 존 뿐이었는데,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에게 '그러다 또 살찐다'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무척 상했는지 포크를 내려놓았다. 결과적으로 음식을 제대로 먹고 있다고 할 만한 사람은 이 테이블에서는 짐과 존, 두 사람뿐이었다. 짐이야 원래 자기 멋대로라 남들 분위기를 살펴가며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존은 극한 상황을 여러 번 거쳐본 사람으로서 멀쩡한 음식들이 손도 대지 않고 버려진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런 불편한 분위기에서의 식사가 그다지 땡기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먹고 있는 중이었다.
 짐은 까나페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마이크로프트 별명 바꿔야겠다."

 

 자신에게 별명이 붙어있다는 것도 모르던 마이크로프트는 음식을 먹지 못해 불편한 심사로 짐을 쳐다보았다.

 

 "아이스맨(iceman)에서 브라더 콤플렉스(brother complex)로 말야."

 

 히죽거리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 짐에게 마이크로프트가 고개를 돌렸다. 하긴 진지한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는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한 그가 잘못한 것이리라.
 고개를 돌린 그는 아예 짐을 무시하기로 하고 존에게 관심을 돌렸다.

 

 "존, 그새 잘 지냈나?"
 "아, 예...잘 지냈습니다."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의 친형이라는 것이 입증된 이상 딱히 그를 적대할 이유는 없었지만 존은 그의 음험한 태도와 지난 번 그에게 금전적인 이익을 약속하며 스파이 노릇을 제의한 것에 그다지 호감을 갖고있지는 않았다. 존이 떨떠름하게 대꾸하자 마이크로프트가 유한 말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전의 일 때문에 아직도 마음이 상해 있는 것 같군. 이해하네. 나 같아도 그럴 테니까 말이야."

 

 알긴 아는군요, 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지나친 도발은 역효과를 불러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전직 군인 존 왓슨은 별 말 없이 전채 요리를 입 안으로 우겨넣었다. 게다가 그 자신이 하는 말이니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영국 정보부 MI-5의 수장이라지 않는가. 존은 이 사람이 대체 뭐라고 하며 자신을 구슬릴 지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존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나긋한 목소리와 그에 못지 않게 부드러운 태도로 존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쁜 뜻은 아니었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셜록은 특수한 범죄를 다루는 잡지의 편집장이자 그 자신이 탐정이기도 하지 않나. 그만큼 그의 주변에 위험한 사람이 꼬일 염려가 많지. 나는 어디까지나 그를 무척이나 염려하는 형제의 입장에서 자네를 시험해본 것 뿐이라네."

 

 존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마이크로프트가 미안한 듯 미소를 지으며 정정했다.

 

 "'시험한다'라는 표현이 자네에겐 거슬리겠지만...어쩌겠나. 대체할 만한 적절한 표현이 없는 걸 말일세. 어쨌거나 자네도 그만 나를 용서해주길 바라네. 자네가 앞으로 계속 셜록과 함께할 거라면 아마 나와도 얼굴을 많이 마주해야 할 텐데, 계속 불편한 사이로 남는 건 우리 모두에게 이롭지 않을 거야."
 "그 말씀 알아들었습니다."

 

 거듭된 마이크로프트의 회유에 존도 이만 숙이고 들어가기로 하고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둘의 화해를 기분나쁘게 여기는 사람은 의외로 셜록이었다. 그는 마이크로프트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표정이 굳어지더니 존이 마이크로프트가 내민 화해의 제스처를 수락하자 흥 하고 코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짐은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흥미롭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우여곡절 끝에 식사가 끝나고 테이블이 고용인들의 손에 의해 홀의 가장자리로 배치되면서 안은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위험한 느낌의 시퍼런 미드나잇 블루 빛깔의 불빛이 곳곳에 깔렸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고상한 분위기의 홀은 흡사 클럽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분위기가 반전되자 셜록은 호기심에 여기저기 눈여겨보고 있던 존에게 말했다.

 

 "존, 이제 호텔방으로 돌아가."
 "지금요?"
 "그래. 계속 남아있다간 더러운 꼴 많이 보게 될테니까. 여기 있는 사람 중의 절반은 겉으로는 고상한 척 하면서 이런 은밀한 모임에서만은 지저분한 본색을 드러내는 사람들이야."

 

 존은 셜록이 경고하는 것이며 갑자기 이렇게 홀의 분위기가 바뀐 것들이 뭐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단호하게 말하는 셜록의 지시를 거부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입구 쪽으로 향했다. 존은 정말로 지금 나가도 되나 싶어서 연신 셜록이 서 있는 쪽을 뒤돌아보았지만 그는 홀에 가득한 수많은 인파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연회장을 나가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의 팔목을 잡아챘다.

 

 "어디 가?"

 

 짐 모리어티였다. 싱긋 웃으며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는 주제에 존의 팔을 잡은 그 악력은 꽤나 셌다. 잡힌 손목에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는 시도가 먹히지 않자 존은 약간 당황했다. 존이 당황한 것을 눈치챈 짐이 더욱 활짝 미소지으며 좀 더 세게 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여기 마음대로 나갔다간 큰일 나."

 

 사실 그건 짐의 즉흥적인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 처음 와보는 존이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짐은 그 점을 노리고 존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진짜 재미있는 부분은 못 보고 가는 셈인데, 아쉽지 않겠어?"

 

 짐은 존의 눈빛이 약간 흔들리는 것을 보고 좀더 본격적으로 꼬드기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셜록이 바쁜 모양인데 나랑 마이크로프트가 에스코트해줄게. 위험의 위 자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지켜줄 테니까."

 

*

 

 "폴록."

 

 셜록이 이름을 부르자 바에서 진토닉을 홀짝이고 있던 어깨가 구부정한 중키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홈즈!"

 

 그가 반갑게 셜록을 호명했다. 셜록은 그 남자가 뭐라 인삿말도 건네기 전에 다짜고짜 물었다.

 

 "모리어티는 지금 어디 갔나?"

 

 존을 먼저 보내긴 했으나 혹시라도 모리어티가 그의 뒤를 쫓아갔다면 셜록 홈즈의 노력도 허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셜록은 모리어티의 수하임과 동시에 셜록에게 호의적인 폴록을 닥달하여 그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다.
 그러나 폴록은 셜록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 말만 늘어놓았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더글라스가 위험해."
 "더글라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떠오른 셜록이 말했다.

 

 "존 더글러스 말인가?"
 "그래. 사실 그의 원래 이름은 존 맥머도인데, 존 맥머도의 원래 이름은 버디 에드워즈라네. 그런데 존 맥긴티가-"

 마치 꼬리잡기 수수께끼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고유명사에 짜증이 치솟은 셜록이 말했다.

 "제기랄, 무슨 존이 그렇게 많아. 하여튼 미국인들은 만만하면 존이란 이름을 붙인다니까. 그리고 더글라스라는 사람은 맥머도이자 에드워즈란 말이지? 뭐가 그리 복잡해?"
 "자꾸 말 끊지 말고 들어보란 말야. 어쨌든 맥긴티가 더글라스 때문에 작년에 미국에서 사형을 당했어."
 "텍사스에서 재판을 받았나보지?"

 

 셜록의 어이없는 유머감각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폴록은 잠시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셜록을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맥긴티의 부하인 테드 볼드윈이 이 연회장에 잠입했다고 해. 더글라스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셜록은 폴록의 말을 다 듣고도 멀뚱히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지금 모리어티가 어딨는지 알아야 한다니까."

 

 그 말마따라 매몰차게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가버리려는 셜록을 붙잡고 폴록이 말했다.

 

 "홈즈! 그동안 내가 도와준 신세를 이런 식으로 갚을 셈이야?"

 

 그동안 폴록이 사소한 정보 몇 가지를 모리어티의 눈을 피해 셜록에게 넘겨주어 수사를 도운 공로가 있긴 했다. 그러나 짐의 교활한 성미로 미루어 보아 그건 오히려 짐의 계략에 불과할 것이었다. 정도를 넘어 정보를 팔아넘기는 수하가 있다면 단번에 잘라버리려는.
 때문에 셜록이 귀를 후비며 들은 척도 하지 않자 폴록은 마지막 강수를 두었다.

 

 "존 더글라스는 벌스톤 영지의 주인이기도 자네 형님의 중요한 자금원이자 연락책이라고! 그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어? 제발 내 말 좀 알아듣게나!"
 "마이크로프트의 일이야 내 알 바 아니란 거 잘 알지 않아?"
 
 셜록의 반응에 폴록이 셜록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 형님 말고 다른 형님 말이야.'

 

 셜록은 그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싹 굳었다.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 폴록이 말했다.

 

 "이제야 좀 신경을 쓰고 싶은 의욕이 나나 보지?"

 

 약간 조롱기가 섞인 말이었지만 셜록은 그에 일일이 대꾸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존 왓슨의 안전 문제가 급하긴 했지만 그의 큰형인 셰린포드가 연루된 일이라면 다른 건 다 제쳐놓고 먼저 다뤄야 하는 급선무였다.
 셰린포드 홈즈는 홈즈 가의 장남이었지만, 그의 친혈육인 마이크로프트와 셜록마저도 일 년에 한 번 얼굴을 보기 힘들었고, 국제적으로도 암암리에 기밀시되는 이름이었다. 그의 무서움은 그가 발휘할 수 있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없는 것처럼 취급되는 숨겨진 그의 존재, 그러나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감이 바로 그가 정말로 무서운 이유였다.
 이 모임에 셜록이 참석한 것도 셰린포드 때문이었다. 이건 셰린포드가 선의 편이나 악의 편 모두에게 자신의 파워를 상기시키기 위해 막후에서 연 회동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건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런던 바깥을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셜록과 음흉한 뒷공작을 꾸미는 것 외에는 행동력이라곤 전혀 없는 마이크로프트도 이 쓸데없는 겉치레 행사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주최한 이 회동에서 만약 그의 재산상이나 일신상에 뭔가 손해가 가해진다면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인력으로 차출될 사람은 마이크로프트와 셜록 홈즈 두 사람이었다. 손해를 본다는 것을 극도의 모욕이자 치욕이라고 간주하는 셰린포드에게, 가정하기조차 무섭지만 셰린포드와 막역한 사이인 것이 분명한 더글라스가 죽거나 다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존 왓슨의 안전 문제고 뭐고를 따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글라스는 어딨고 볼드윈은 어딨는데?"
 "볼드윈은 아무래도 변장을 단단히 하고 온 모양이야. 전혀 눈에 띄질 않아. 더글라스는 저쪽."

 

 셜록은 폴록이 가리킨 쪽으로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모리어티한테 전해. 존 왓슨을 건드리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야."
 "존 왓슨? 존 왓슨은 또 누구야? 또 다른 존이라니...!"

 

 희극적으로 울부짖던 폴록은 벌써 저만치 멀어지는 셜록의 뒷모습을 보며 연극을 그만두고 한숨을 푹 쉬었다.

 

 "하여간...역시 단세포인 셜록보다는 모리어티 님이 한 수 위라니까. 어서 셜록을 잘 따돌렸다고 그분께 보고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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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이 셜록의 갑작스런 고백에 놀라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셜록은 소파에 누워 얼굴을 돌린 채로 주절주절 말했다.

 

 "사실 이 회동이 일 주일 늦춰져서 망정이지 원래는 회동이 끝나고서 자네에게 고백...을 하려고 했었어. 고백...하고서 같이 이것저것 해보려고 미리 예약도 해놓고 데이트...코스도 다 짜놨단 말이야. 그런데 일정이 어그러져서 뭔가 앞뒤가 바뀌어버렸어."

 

 고백이니, 데이트니 하는 낯부끄러운 단어에서는 멈칫멈칫 하더니 마지막 말에는 약간 분노가 어린 것 같았다. 순조로운 고백 일정을 망가뜨린 누군가에 대한 원망인 것 같았다.
 셜록이 말을 마치고 나서, 얼떨결에 고백을 해버린 셜록도 느닷없이 동성의 남자로부터, 게다가 상사이기까지 한 사람으로부터 고백을 받아버린 존도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존은 설마 설마 했지만 실제로 그가 고백을 해 올지는 몰랐던지라 더욱 놀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존이 입을 열었다.

 

 "일단 거기 처박혀있지 말고 똑바로 날 보고 이야기해요."

 

 셜록이 마지못해 소파에서 일어났다. 존이 그런 그에게 물었다.

 

 "원래 회동 일정이 일 주일 전이었다고요?"
 
 셜록은 존의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존이 심호흡을 하더니 말했다.

 

 "그러면 회동이 이미 끝난 후의 일정인텐데, 내가 당신의 고백을 거절하면 어쩔 작정으로 미리 예약같은 걸 해둔 겁니까? 설마 내가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셜록의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로 그럴 거라고 생각한 듯 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상식이란게 없는 사람이어도 그렇지 어떻게 남자가 같은 남자의 고백을 받아들여 줄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그만큼의 허술한 여지를 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눈 앞이 캄캄해져 왔다.
 문제는 지금의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것이다. 기분이 나쁜 부분은 자신이 셜록의 고백을 쉽게 받아들여 줄 거라고 생각했다는 점이었고, 고백을 받았다는 부분에서는 구역질이 난다던가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참 자신도 중증이구나, 생각하며 존이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셜록."

 

 셜록이 기대감에 찬 얼굴로 죄인처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고백을 승낙한다는 의미는 아니예요."

 

 셜록이 실망한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존이 달래듯 말했다.

 

 "생각해봐요. 이건 정말 갑작스럽다고요. 생각할 시간을 좀 줘야 하는게 도리잖아요."

 

 존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이니까, 일단 이쪽에 집중하도록 하죠."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닌데...라고 셜록은 속으로 궁시렁거렸지만, 안 그래도 놀란 존을 이 이상으로 몰아붙이고는 싶지 않았으므로 셜록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은, 파리 여행이 끝나고 들려드리겠습니다."

 

 존의 말에 셜록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계획이 들킨 시점에서는 고백이고 뭐고 없이 부하 직원의 정조(?)를 노리고 접근한 변태 상사로 오인되어 고소를 하겠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 명백히 여자친구도 있던 스트레이트에게 저런 뉘앙스의 말을 들은 것만 해도 반쯤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셜록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다.

 

*

 

 셜록은 존이 보기에도 만족스럽게 차려입고 차를 타고 회동이 열리는 건물에 도착했다. 차 안에서는 존도 셜록도 서로에게 쉽게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으나 일단 회동에 도착한 이상 다른 이들에게 얕잡아보일만한 언행은 보이면 안되므로 그나마 대인배인 존이 먼저 말을 붙였다.

 

 "가시죠."
 
 셜록과 존은 회동이 열리는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 문 앞에 다다라 셜록이 줄곧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존."
 "네?"

 

 셜록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마 전에 봤던 사람도 있을 거야. 하지만 너무 당황하진 마. 그래봤자 좋아하기만 할 테니까."

 

 상변태거든, 이라고 덧붙이는 셜록이었지만, 애초에 전에 봤던 사람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존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셜록의 말을 들었다. 셜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호텔로 가라고 하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바로 호텔방으로 가."
 "왜요?"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니까. 일단은 묻지 말고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존은 셜록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그의 말에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좋아, 그럼 들어가 볼까."

 

 셜록은 양복 재킷의 매무새를 만지고 연회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호화의 극치였다. 일반적인 건물로 보이던 안에 이런 거대한 홀이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한 존은 입을 헤 벌리며 주변을 돌아보느라 바빴지만 셜록이 주의를 주었기 때문에 황급히 입을 다물고 똑바로 정면을 응시했다.

 

 "일단 정해진 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다음으로 파티가 있을텐데..."

 

 설명하는 셜록의 목소리를 가로막고 누군가가 요란하게 환영의 인사를 했다.

 

 "자기야(Honey)!"

 

 남자의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간드러지는 음성에 셜록과 존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존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오른 것과는 다르게 셜록의 얼굴에는 명백히 불쾌감이 떠올라있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 이 사기꾼같으니라고."

 

 나직하게 위협하듯 그르렁거리는 셜록의 무서운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씬한 체구의 남자가 간들거리며 둘에게 다가왔다.

 

 "아이, 왜 그래.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라고? 사이랄 게 존재하는 사이였나? 네게 엿 먹은 것만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군."

 

 이렇게까지 셜록에게서 적대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상대도 몇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웬만해서는 비속어를 입에 담지 않는 셜록이 '엿 먹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셜록에게 못된 짓을 한 모양이었다. 존은 남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흑갈색의 머리칼, 검은색에 가까운 진한 밤색의 눈. 언뜻 보면 부드러운 인상의 동안이었지만 그 눈만큼은 다소 교활한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러 그런 말투를 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상당히 게이같아 보이는 것이 현재 셜록에게 고백을 받은 것 때문에 성 정체성으로 고뇌하는 존에게는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은회색의 고급 수트를 차려입은 그는 존이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로 그와의 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셜록에게 연신 말을 붙이고 있었다.
 
 "그러지 마. 사실 오늘은 너보다는 다른 사람이 보고 싶어서 부른 건데-그 귀요미는 어디에 놔두고 왔어?"

 

 귀요미라니, 존은 그 말에서 상당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시치미떼지 마. 웬 남자 하나를 애지중지한다는 거 다 들었어. 내가 프랑스로 망명온 몸이라지만 런던의 소식통에게 그런 정보 나부랭이 줏어먹는 거 나한텐 일도 아니란 거 잘 알잖아?"
 "망명이라니, 영국 정부에 의해 국가 전복죄 혐의로 추방당한 걸 고상하게도 말하시는군. 그리고 그 소식통이란 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헛소문을 잘못 전달한 모양이야. 루머가 따로없군 그래."

 

 애지중지한다, 라는 대목에서 그 '귀요미'라는 것이 존 왓슨 자신을 뜻한다는 것을 얼추 알아챈 존은 제발 이 많은 곳에서 아웃팅을 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느님께 빌기 시작했다.
 셜록은 존의 바람대로 그 소문 자체를 부정했지만 셜록 옆에 있는 존의 모습을 어느새 캐치한 것인지, 이름 모를 경박한 남자는 존을 무례하게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 이 남자구나! 전직 군인티 물씬 나고 금발에 파란 눈. 딱 봐도 알겠다. 얼마나 이 남자를 애지중지하길래 이런 공적인 행사에까지 데려온 거야? 아하, 동행으로 데려온 건가?"
 "저는 홈즈 씨의 수행원이지 귀요미라거나 게이 남친 따위가 아닙니다."

 

 참다 못한 존이 입을 열었다. 수행원에 불과한 그가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험악하게 말하는 것은 상당히 무례한 것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일단 상대편에서 먼저 삿대질을 한 이상 막나가기로 한 존의 행동은 셜록에게는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
 문제는 화를 내며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하는 그 경박한 남자는 그러기는 커녕 무척이나 흥미로워하며 오히려 존에게 더욱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이야, 정말 귀엽게 생겼다. 게다가 성깔까지. 나도 저런 거 하나 키우고 싶었는데! 부럽다, 부러워."

 

 하룻밤만 빌려주면 안되? 라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그 때문에 기껏 나서서 대꾸한 보람도 없이 난데없는 두통에 시달리는 존을 대신해 셜록이 존과 남자의 사이를 가로막고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네 자리로 돌아가. 곧 만찬이 시작할 시간이다."

 

 남자는 지금껏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던 것과는 다르게 깨끗이 물러섰다. 그리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그럼 이따가 봐, 라고 말하며 둘에게서 멀어졌다.

 

 잠시 후 둘은 남자가 한 이따가 보자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 만찬에서는 회동의 주최자가 안배한 대로 지정 좌석으로 앉아야 했는데, 그 남자와 다른 한 사람, 그리고 셜록이 같은 테이블로 배정이 된 것이었다.

 

 "도대체가, 센스 따윈 개나 준 모양이군."

 

 회동의 주최자를 겨눈 셜록의 촌평이었다.


 존은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제에 이어 소화불량의 연속이겠구나, 라고 체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을 또 하나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존 왓슨."

 

 바로 자신의 핸드폰을 웅덩이에 빠뜨리는 연극을 하며 존에게 셜록의 정보를 팔라고 협박했던 남자였다. 그때와 다름없이 다갈색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넘기고 최고급 수제 양복을 차려입은 그는 자못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오랜만이죠?'라고 인사했다. 그 남자를 가리키며 존이 셜록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셜록, 이 사람이예요. 왜, 전에...셜록의 숙적이라는. 핸드폰."

 

 몇 개의 키워드를 말하자 셜록은 곧바로 존이 어떤 일을 말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숙적'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던 셜록은 존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정확히 그를 지목할 수 있었다. 셜록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그 남자에게 말했다.

 

 "듣자하니 존한테 수작을 부렸다면서?"

 

 왜인지 친근한 어조에 존이 눈을 굴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데 그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내용은 더욱 가관이었다.

 

 "네가 워낙 엄마 속을 썩여야 말이지."
 '엄마?'
 "엄마? 내가 엄마 속을 썩인다고?"

 

 존이 점점 알아듣지 못할 방향으로 바뀌어가는 대화의 향방을 조금 더 알아듣기 쉬운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염치불구하고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 잠깐. 당신 셜록의 숙적이라면서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셜록이 대신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사사건건 끼어들고 하숙집에는 몰래카메라를 설치해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내 어시스턴트까지 납치하는 게 숙적이 할 행동이 아니면 뭐겠어?"

 

 남자는 상당히 억울하다는 어조로 항변했다.

 

 "그 정도의 일을 한다고 숙적이라고 매도하다니! 나는 영국 정보부의 수장이고 영국 정부를 대표하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어. 게다가 그렇게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는 너같은 3급 감시 대상에게는 당연히 부가되어야 할 정부의 방침이라고."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은 아까 전 게이같은 남자가 대신했다.

 

 "와, 마이크로프트, 동생 앞에선 체면 많이 구긴다더니 정말이었구나."
 
 셜록과 마이크로프트라고 불린 남자가 동시에 말했다.

 

 "닥쳐 모리어티."

 

 너무해, 라며 가짜로 울상을 짓는 남자를 모두가 무시하는 와중 존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는 숙적이라길래...범죄 단체의 수장이라거나 뭐 그럴 줄 알았는데..."

 

 마이크로프트라고 불리는 남자가 혀를 차며 말도 안된다는 반응을 보였고, 셜록은 말했다.

 

 "범죄 단체 수장은 저쪽."

 

 그리고 셜록이 범죄 단체의 수장이라며 가리킨 남자는 은회색 수트을 입은 게이같은 남자였다. 남자는 부정하지도 않고 손을 들어보이며 하하 웃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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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은 셜록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편집장님이 정말 미친 건가?'

 

 안 그렇다면, 잡지계 인사들과의 회동이 열리기까지 무려 일 주일이나 남은 시점에서 파리 기행을 다닌답시고 존을 데리고 파리의 명소라고 소문난 곳을 여기저기 돌아다닐 리가 없었다. 일단 도노반으로부터 지급으로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회동 전 주에 열리는 식전 행사 따위는 아예 없을 뿐더러, 설사 그런 게 열린다고 해도 귀찮다며 다 빼먹고 회동 자체에만 잠깐 들렀다가 나올 인간이 바로 셜록 홈즈였다.
 게다가 셜록 홈즈는 기삿거리를 얻어낸답시고 미슐랭 가이드에 등재된 유명 레스토랑 같은 곳에 존을 데리고 가서 막상 자기는 음식에 손도 안대고-그래서 여러 식당의 셰프들을 공연히 긴장하게 만들었다. 불쌍하게도...-존이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봐서 존의 소화 작용을 심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루 정도만 그랬었다면 존은 셜록이 파리에 올 때마다 그랬었나보다, 하고 연례 행사 정도로 넘어가겠지만, 이 행각들이 일 주일 내내 이어지다 보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셜록이 비효율이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미의 소유자라는 것을 잘 아는 존이 봤을 때는 자기 옆에 있는 이 사람이 셜록의 껍데기만 뒤집어 쓴 다른 사람이 아닌가, 라고 의심하기에는 부족할 것이 없는 정황이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아까 먹은 음식이 별로였나?"

 

 자기가 이상하게 비춰지고 있다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셜록 이 인간은 이런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
 안면이 있건 없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같이 퉁명스럽게 대하는 셜록이 이런 식으로 배려심을 보이니 존에게는 오히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셜록의 비위를 거스르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사과를 요구하는 신종 고문법이라도 생각해 낸건가, 싶었다. 존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쯤 셜록한테 사과의 말이라도 건네야 용서해 주려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역시 아까 먹은 립아이가 잘못된 거로군. 당장 항의하러 가야겠어."

 

 존은 타고 있는 벤츠의 운전수에게 당장 지시를 내려 아까 들렀던 음식점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내리는 셜록을 말렸다.

 

 "그게 아니예요! 아까 먹은 고기에는 아무 문제 없다고요."

 

 사실 존은 아까 셜록과 함께 간 레스토랑에서 먹은 쥐꼬리만하고 핏물이 비치는 고기가 립아이인지도 몰랐다. 메뉴판은 불친절하게도 온통 프랑스어로 도배되어 있었는데, 프랑스어라고는 봉 쥬르, 쥬 뗌므 밖에 모르는 존이 립아이를 립아이인줄로 알고 시켰을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실, 그 고기는 매우 맛있었다. 양이 적다는 것만 제외하면, 만족스런 식사였다. 그러므로 애꿎은 식당 주방장이 식당 위생법 위반으로 고소당하기 전에 셜록이 날뛰는 것을 막는 도리밖에 없었다.
 존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는 셜록이 나중에 호텔에 가서 뒤끝 작렬하며 레스토랑에 전화하여 손을 쓸까봐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고기 정말 맛있었어요."

 

 존의 필사적인 말에 셜록이 레스토랑을 닥달하려는 것은 단념하고 다시 뒷좌석에 몸을 기대고 말했다.

 

 "식사가 맛있었다니 다행이군."

 

 핀트가 약간 엇나간 것 같지만 진정한 셜록의 분위기에 안도하던 존이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이제는 셜록으로부터 질문 공세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에피타이저는 어땠나? 후식은? 등등으로 이어지는 질문에 뭐 하나라도 삑사리가 났다간 당장 해당 레스토랑이 망할 기세였던지라 존은 열심히 맛있었어요, 정말입니다를 연발했다. 사실 셜록이 줄곧 쳐다보면서 존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었다면 더욱 즐겁게 음식을 즐길 수 있었겠지만, 존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정도의 현명함은 갖추고 있었다.
 다행히 호텔에 도착할 즈음에 셜록의 질문 공세는 끝이 나서, 또다시 존이 곤란해질 만한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존의 객실과 셜록의 객실은 바로 옆에 붙어있었다. 다행히 둘의 객실이 안에 있는 별도의 문으로 연결되어있다거나 하는-존의 입장에서 봤을 때의-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존과 셜록은 복도에서 멈추어 서서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사실 셜록의 부담스러운 시선 공격만 없었다면 요 며칠 간은 참 즐거운 날의 연속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외에 다른 나라로는 가 본 적이 없는 존에게 파리는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파리는 낭만을 상징하는 대표격인 도시가 아닌가. 물론 직무 차 온 것이라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무르다가 구경다운 파리 구경도 못하고 귀국하리라는 존의 예상과는 달리 이렇게나 호사스러운 일 주일을 보내게 된 것은 앞장서서 존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카드를 마구 긁어댄-셜록의 공이 컸다.
 존이 미소를 짓자 셜록은 멋쩍은 듯 고개를 살짝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런 좋은 경험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딱히 당신만을 위해서 파리를 돌아다닌 건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사건을 위해서 한 거니까 너무 들떠하진 마."

 

 퉁명스러운 대답을 내뱉는 셜록이었지만, 존은 셜록이 공치사를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별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럼, 내일 저녁 여덟 시에 찾아뵙겠습니다."

 

 회동의 시작 시간은 아홉시였고 회동이 열리는 장소도 그다지 먼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존이 셜록의 객실에 들를 때마다 소파에 누워서 빈둥대는 모습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라서 약간 불안해진 존은 임의로 일정을 앞당긴 것이었다. 게다가 도노반과 레스트레이드가 옷을 잘 입혀야 한다고 신신당부한 것도 있으니-안 그러면 시트 한 장만 걸치고 나설지도 모른다고 레스트레이드가 말했지만, 농담인지 진담인지 존은 알 수가 없었다-제대로 챙겨입혀 보낼 예정이었다.
 
 "그래."

 

 짧게 대답한 셜록의 얼굴에 약간 미소가 비친 듯 보였지만, 존은 착각이겠지 싶어 그대로 자신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안으로 들어가 점퍼를 벗어던지고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존은 룸서비스로 맥주를 한 잔 시키고 나서 곰곰히 생각했다.
 그 생각이란 다름이 아니라, 셜록의 행동이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셜록 홈즈라는 사람은 항상 이성이 감성보다 앞서는 사람인지라 그의 행동에는 언제나 그에 선행하는 행동의 이유와 근거라는 것이 있었다. 존에게 열렬한 관심을 쏟는 것으로 보아 파리에 와서의 그의 행동의 기저에는 존에 대한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차 안에서는 그의 행동이 존 자신의 잘못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건 셜록에게 하도 타박을 당하다 보니 생긴 피해망상적인 생각일 것이었다. 게다가 사과를 바라는 사람이 왜 사과를 해야하는 사람에게 비싼 식사를 대접하고 그게 맛있는지 맛이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눈치를 본단 말인가. 또한 셜록이 기사로 실을 만한 소재를 찾는다며 돌아다니던 것은 전부 핑계에 불과하다는 건 조금만 더 생각해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셜록의 잡지는 미식가 잡지가 아니라, 엄연히 범죄 연감 잡지였으니까 말이다.
 존은 문득 아까 전 존에게 강압적인 어조로 음식이 맛있었냐고 물어보며 존의 반응을 열심히 살피던 셜록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공을 주워와 주인에게 내밀며 나 잘한 거 맞지?라고 눈을 또록또록 굴리는 강아지가 연상됬기 때문이다. 파리에 오기 전에 셜록의 플랫에 들렀을 때도 이런 정신나간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런 생각을 자꾸 하는 자신도 제정신은 아닌가 보다 생각할 때 웨이터가 룸서비스를 가지고 왔다.
 마침 웨이터가 날라 온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다가 존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셜록이 날 좋아하는 거 아냐?'

 

 그 생각을 하자마자 순간적으로 입에 든 맥주를 뿜을 뻔했던 존은 사레가 들려 죽기 전에 맥주를 제대로 넘기고 생각을 계속했다.
 
 '솔직히 내가 여자였으면 이게 정답인데...'

 

 뭔가 생각을 계속할수록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에 존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파리로 출발하기 전날부터 시작된 지나칠 정도의 배려-물론 여관에 맡긴 짐을 멋대로 옮겨오는 것은 정상적인 배려의 범주에 들지는 않았지만, 런던의 비싼 숙박비를 감안했을 때 그것은 그 나름의 배려였다-, 그리고 어시스턴트 직을 시작하고 얼마 지난 후부터 상당히 친절해진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봤을 때 저 생각이 맞을 확률은 굉장히 높았다. 게다가 도노반과 레스트레이드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자신 이전의 어시스턴트들은 거의 3D 직종과 맞먹는 고생을 한 것과는 다르게 자신을 조심스럽게 굴린다(?)고 하지 않는가.

 

 '안돼 안돼! 난 스트레이트란 말이야!'

 

 발악성의 외침을 스스로에게 해보았지만, 어쩐지 셜록을 생각하면 할수록 두근거리는 자신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아까 전 셜록을 생각하며 귀여운 강아지를 떠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아 존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보통은 이런 생각이 들면 소름이 끼치거나 해야 정상이지만, 존 자신의 누나가 레즈비언이기도 해서 그 쪽에는 별반 거리낌이 없어서 그런지, 이런 생각이 들어도 그다지 그를 멀리하고픈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셜록에게 수난을 많이 당한 그였지만, 최근 들어 그와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가까워진 탓인지 '셜록이라면 나쁘지 않아' '셜록정도면 괜찮을 지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여서, 존은 멀쩡한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무래도 자신은 오늘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역시 쓸데없는 생각 말고 발 닦고 잠이나 자는 게 최고인 것 같았다.

 

*

 

 밤새 셜록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거듭하다 잠을 설쳐서인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존의 얼굴에는 상당히 피로가 어려있었다. 평소 생활 패턴을 규칙적으로 하고 살아온 만큼 그 리듬이 깨지자 상당한 피로가 역으로 존을 덮쳐온 것이다. 육체적인 피로(셜록때문에 사건 현장이며 식당이며 장소를 막론하고 끌려다닌 것)와 정신적인 피로(셜록때문에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한 것)가 누적된 것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라 오후가 되어서도 존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걷히지 않았다. 하지만 티를 내면 셜록이 호텔의 지배인에게 매트리스에 대한 불평을 할 것이 분명했기에 존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셜록의 방 초인종을 울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안의 상황은 존이 예상했던 것과 한 치도 다름이 없었다. 셜록은 흐트러진 머리를 수습할 생각도 않고 하품을 쩍쩍해대고 있었다. 뭐, 정장은 커녕 가운도 벗지 않은 상태에서 머리 손질을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었지만.
 존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자자, 셜록. 아직도 가운을 걸치고 있으면 어떡해요. 내가 일찍 오길 천만다행이네요."

 

 셜록은 존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했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잤군."

 

 저 귀신같은 인간이 또 알아채버렸다. 필사적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는 존의 노력은 깡그리 무시하고서. 존은 어차피 들켜버린 마당에 표정 관리를 하는게 무슨 소용이겠냐 싶어 미소를 지우곤 말했다.

 

 "그래요. 어제 이런저런 생각 하느라 못잤습니다. 그러니 어서 제대로 된 옷을 입고선 제 수고를 좀 덜어달라구요."

 

 존의 당찬 대꾸에 약간 놀란 셜록이었지만 거기서 바로 수긍하고 옷을 챙겨입으면 셜록 홈즈가 아니었다.

 

 "어디 한번 볼까. 존 왓슨의 생각 외로 협소한 인맥 가운데 존의 골머리를 아프게 할 사람이 누가 있을지를 말야. 일단 가장 가까운 가족인 해리엇 왓슨. 그러나 그녀에겐 파리로 간다는 말도 안했을 게 분명해. 아직까지는 그녀가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고 다니는 모양새를 이해할 만큼 마음이 풀리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러면 친우인 스탬포드일까? 이런 거지같은 직장을 알선해줬다고 원망할 셈이었나? 하지만 그런 원망을 하려면 입사 초기에 했을테지. 지금 하기에는 자네도 지금 직장에 꽤 마음을 붙였고-무슨 이유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다행이지-굳이 국제전화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그에게 원망을 퍼부으려 전화할 이유는 없지. 그러면 전 여자친구? 하지만 자네는 사귀기 전과 사귈 때 만큼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정도로 잘 해주다가도 막상 헤어지면 은근히 마음을 빨리 정리하는 습성이 있으니 헤어진 지 한 달이 다 지난 지금까지 그것때문에 머리가 아플 이유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그러면 다음은 난데-"

 

 존이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을 짓자, 셜록이 그제서야 정말로 놀라서 물었다.

 

 "정말 나 때문인건가? 대체 왜?"

 

 존이 항변했다.

 

 "요 며칠 간 이상했잖습니까."
 "뭐가 말인가?"
 "파리 구경을 간답시고 저를 끌고 다니고-아니, 어시스턴트에 불과한 저에게 미슐랭 가이드에 등재한 레스토랑의 음식을 사줄 때부터 이상했어요! 생각해보니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겁니까? 보통 미슐랭 가이드에 등재가 된 곳에서 식사하려면 몇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하잖아요?"

 

 셜록이 존의 추궁에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설마 저에게 사주려고 예약을...?"

 

 궁지에 몰린 셜록은 가운을 몸에 둘둘 말아 소파에 몸을 던지고 웅크렸다. 명백히 대답을 회피하는 행동이었다.

 

 "정말로 그러신 거예요?"

 

 존이 조용히 묻자 셜록은 소파에 파묻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왜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존은 기다렸다. 침묵을 이기지 못한 그가 곧이어 소리쳤다.

 

 "자네가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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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저녁, 존이 퇴근하려 하는데 도노반이 잠깐만, 하고 그를 불러세웠다.

 

 "네?"

 

 멈춰서서 도노반을 향해 의문의 눈빛을 보내는 존에게 도노반이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두꺼운 제본책을 건넸다.

 

 "자. 받아."

 

 얼떨결에 무겁디무거운 책을 받아든 존이 책과 도노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그 책(The Book)이야."

 

 도노반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 달마다 발간되는 잡지의 모든 내용이 여기 다 들어있어. 말하자면 초고라고나 할까. 절대 잃어버리면 안되. 뭐 하나라도 빠뜨려서도 안되고."
 "아-하."
 "발간 일 주일 전에는 항상 편집장님께 가져가서 손을 보아야 해. 갖다드리면 편집장님이 보시고 고쳐야 할 부분이나 빼는 게 좋겠다 싶은 부분을 체크해서 주실 거야."

 

 한참 설명을 듣던 존이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걸 왜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도노반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 책을 무사히 편집장님의 집까지 배달하는 게 바로 선임 어시스턴트의 직무거든. 아직 존 씨는 선임이 아니지만, 조금만 있으면 그렇게 될 테니까 미리 편집장님의 집이 어딘지, 어디에 어떻게 안착시켜놓아야 하는지 알아놔야하지 않겠어?"

 

 그녀의 어조로 보건대 셜록이 그녀를 파리로 데려가는 대신 내건 조건에 넘어가긴 했지만 여전히 파리 행에 불참하게 된 데에는 불만이 있는 듯 싶었다. 그리고 셜록보다는 만만해보이는 존에게 그러한 불만을 해소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엉뚱한 데에다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둘째치고, '그 책'을 셜록의 집으로 가져가는 단순한 업무가 어째서 불만을 해소하는 방법이 되는지-물론 퇴근 후의 잡무라 성가시다는 점은 있지만-이해할 수가 없었던 존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침 도노반은 셜록의 집이 런던 어느 구석에 붙어있는지 설명하려던 참이었다.

 

 "편집장님의 집은-"
 "안 말해주셔도 되요. 저 편집장님 집 어딘지 알아요."

 

 말을 끝맺지 못한 도노반이 입을 어정쩡하게 벌린 채로 잠깐 입을 뻐끔거리다가 말했다.

 

 "그래?"
 "베이커가 221B...아닌가요?"

 

 도노반이 심하게 놀라는 바람에 되려 놀란 존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노반이 존의 대답을 듣더니 물었다.

 

 "거기가 맞는데...어떻게 알았어?"

 

 존이 그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린다는 듯 깊은 한숨을 후우 하고 내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번에 말이예요, 한밤중에 문자를 계속 보내시더라고요."

 

 도노반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뭐라고?"
 "오라고요. 처음엔 그냥 씹었는데, 위험할지도 몰라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계속 문자가 오길래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주소 불러달라고 그러고 택시타서 갔죠."

 

 차츰 흥미가 생긴 도노반이 존의 뒷말을 재촉했다.

 

 "그랬더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열이 받는지 잔뜩 분개한 어조로 존이 말했다.

 

 "그랬더니 글쎄, 웬 핑크색 아이폰 하나를 주더니 그 전화기로 자기가 불러주는 내용을 문자로 보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자하기가 귀찮아서 저한테 문자를 했다는 거죠. 내참 어이가 없어서. 그냥 자기가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면 되는데 그게 귀찮아서 런던 반대편에 있는 제 잠을 깨운겁니다!"

 

 게다가 제가 문자를 보낸 사람은 알고보니, 연쇄살인범이더라고요! 라고 화를 내는 존을 쳐다보며 도노반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존 왓슨이 말하는 셜록 홈즈가 내가 아는 셜록 홈즈랑 동일인물이 맞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린 도노반이 물었다.

 

 "그럼 집에 이미 들어가봤겠네?"
 "?...그런 셈이죠."

 

 도노반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들어가봤으니 안이 어떤 몰골인지는 벌써 알 테고, 내가 괜히 걱정했구나."
 "방 안이 왜요?"

 

 질문하는 존에게 도노반이 대답했다.

 

 "가봤으니 알 거 아냐. 온 방 안에 실험이랍시고 시체 쪼가리들 늘어놓고, 전자레인지에다가 사람 눈알을 돌려서 터뜨리질 않나, 실험쥐에다가 별 괴상망칙한 약품을 투여하기도 하고...그러고보니, 넌 뭘 봤는데?

 

 도노반이 늘어놓는 사례를 들으며 점차 표정이 일그러지던 존이 말했다.

 

 "제가 갔을 땐 그런 거 없었는데요?"

 

 도노반과 존은 서로 자기가 간 셜록 홈즈의 집이 과연 같은 베이커가의 221B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잠시 말이 없던 둘 중에 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좀 책들이 많이 쌓여있고...지저분하긴 했지만-그래서 제가 한소리하긴 했죠, 치우라고-, 그런...듣기만 해도 구역질나는 실험은 안했었는데..."

 

 갈 때마다 못 볼 꼴을 보고 나온 나는 대체 어딜 갔다온 거지? 앨리스의 토끼굴에라도 빠졌다 나온 건가? 라고 도노반은 생각했다. 설마하니, 이 편집장 놈이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고 자기가 갈 때마다 일부러 그런 일을 벌려놓은 거라면...
 방금 떠오른 가설에 힘을 실은 도노반의 마음 속에서 셜록 홈즈에 대한 적대감이 좀더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존과의 대화 이후 기분이 상당히 저조해진 도노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가, 존이 책을 들고 사무실을 나서려고 하자, 지친 목소리로 존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앞으로 택시 탈 일 있으면 법인카드로 계산해."

 

 어쩐지 이를 앙다문 듯 발음이 으깨진 목소리였지만, 존은 도노반이 급격히 기분이 나빠진 이유에 대해 자신이 나서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 일에 대해 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물론 도노반의 충고대로 앞으로의 택시 요금은 전부 회사 카드로 결제하기로 마음먹은 존은 무겁고 두꺼운 책을 들고도 가벼운 마음으로 택시를 잡아탔다. 그래, 셜록이야 편집장이니까 모르겠지만, 런던의 택시비는 어시스턴트에 불과한 존이 감당하기에는 살벌한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잠시 동안의 짧은 기다림 끝에 셜록의 플랫에 도착한 존은 책을 단단히 품에 안은 채로 택시에서 내려 플랫의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허드슨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어주며 존을 반갑게 맞이했다.

 

 "왔구나! 어머, 그 책이구나. 이제 네가 배달하는 거니?"
 "네."

 

 오랜 시간 동안 셜록의 하숙집 여주인 생활을 해왔던 여인답게 허드슨 부인은 단번에 존이 들고 있는 제본책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아마 지금-치우느라 정신이 없을 것 같긴 한데, 일단 올라가봐. 기다리고 있을 거야."

 

 허드슨 부인의 말에서-특히 '치우느라'라는 부분에서-미심쩍인 기색이 느껴지긴 했으나 존은 별 것 아니겠지, 라고 치부하고 셜록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셜록의 방으로 통하는 입구 앞에 선 존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셜록, 저예요."

 

 안에서는 뭔가가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와 그릇이 깨지는 것 같이 달그락거리는 등 위험천만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대답이 없는 셜록에게 존이 문 밖에서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셜록?"
 "안돼, 기다려!"

 

 존의 말소리에 뒤이어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방 주인인 셜록이 그렇게 말하는 데야 기다릴 도리밖에 없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을 벌리고 있는 것인지, 또는 어떤 일을 수습하고 있길래 저렇게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것일까? 존의 궁금증은 2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점점 증폭되어갔다.
 존이 호기심을 참다 못해 한 번 더 셜록의 이름을 외치며 문을 부수고서라도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셜록이 문을 열었다.

 

 "왔어, 존?"

 

 무슨 큰일이라도 마친 듯 휴우, 하고 숨을 몰아쉬는 셜록의 얼굴은 영문 모를 성취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문 가에서 셜록의 면전에 대고 아까 뭐하던거예요? 라고 차마 물어볼 수 없었던 존은 셜록의 안내에 따라 일단 방 안으로 따라들어가 그가 권하는 소파에 앉았다. 반대편 소파에 풀썩 앉은 셜록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오늘부터 존이 내 집에 올 거라고 도노반이 좀 더 일찍 알려줬으면 준비를 좀더 해놨을텐데."
 '준비?'

 

 셜록이 무슨 준비를 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존은 방 안을 슬며시 둘러보았다. 뭔가...확실히 휑한 느낌이었다. 저번에 거듭된 문자질에 못이겨 셜록의 플랫에 들렀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꽉 찬 느낌이었는데...그래, 서류뭉치와 책들이 대책없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들이 싹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설마, 존이 방문한다고 해서 그 종이 무더기를 치운 건가? 어지럽히기는 즐겨해도 제 손으로 그 난장판을 정리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 셜록이? 셜록과 약 4개월 간 손발을 맞춰온 존은 셜록이 주변 정리를 지독히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의 이 상황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존을 바라보며 나 잘했지?라는 듯 미소짓고 있는 셜록에게 과연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애매한 미소만 짓고 있던 그때, 허드슨 부인이 문을 들어와 따스한 김을 올리는 차와 과자가 담긴 쟁반을 역시 말끔하게 치워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번 뿐이야, 셜록. 난 네 집주인이지 가정부가 아니란다."

 

 쟁반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허리를 핀 허드슨 부인은 방 안을 둘레둘레 보고는 말했다.

 

 "그러게 내가 진작에 치우라고 몇 번을 말했니? 조금만 손을 보니까 이렇게 깔끔하잖아. 어디 부엌도 치웠나 볼까..."

 

 부엌으로 향하는 허드슨 부인의 발걸음을 셜록이 급히 제지했다.

 

 "아니, 거긴 안돼요!"

 

 그러나 셜록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부엌으로 통하는 미닫이문을 연 부인은 안의 광경을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오, 셜록!"

 

 존이 등을 돌려 허드슨 부인의 등 뒤로 보이는 부엌 안을 보았다. 안의 꼴은...

 

 "치운답시고 한참을 돌아다니더니 결국 이 안으로 쓰레기들을 죄다 몰아넣었구나!"

 

 허드슨 부인이 부엌 바닥에 서류들과 책을 몽땅 급히 쑤셔박아놓은 범인이 분명한 셜록을 꾸짖었다. 셜록은 '그러게 내가 열지 말랬잖아요!'라면서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허드슨 부인의 열띤 잔소리를 막기 위해 셜록은 몸을 일으켜 허드슨 부인을 방 밖으로 몰아내고-정말이지 배은망덕한 행위였다-존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잠시 동안의 어색한 침묵 후에 존이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온다고 해서 저렇게...치운 시늉을 낸 건가요?"

 

 셜록의 입가가 움찔 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리라. 그는 최근의 말다툼과 무리한 사건 조사를 존에게 떠넘긴 것으로 인해 악화된 둘의 관계를 원상태로 회복시키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파리에 같이 갈 수행원으로 도노반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것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였지만, 지금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도노반이 책을 갖다주러 올 때와는 다르게 방을 깨끗하게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가 보이는 나름의 화해의 제스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존은 살짝 미소지으며 그를 칭찬해주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잘했어요."

 

 그 말에 별달리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그의 입꼬리가 확연하게 올라갔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 것을 본 존은 그런 셜록이 어쩐지 귀여워보였다. 바로 다음 순간 존은 남자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한 자신에게 화들짝 놀랐다.
 존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셜록."
 "왜? 벌써 가려고?"

 

 기껏 허드슨 부인께서 인심을 썼는데 차나 들고 가, 라고 존을 붙잡는 셜록에게 존이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가려던 건 아니고요."

 

 안심하는 셜록에게 존이 하고 싶던 질문을 했다.

 

 "파리에 수행원으로 가는 거 말이예요, 전 뭘 준비하면 되죠?"

 

 그러고보니, 그는 심지어 셜록과 동행한다는 파리 회동이 언제 열리는 지 날짜도 모르고 있었다. 셜록이 전혀 언질을 하지 않은 탓이다. 셜록은 항상 이것저것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너의 뇌세포가 펑펑 놀고 있는게 아깝다며 '관찰을 해, 관찰을! 눈은 뒀다 뭐에 쓰려고!'라고 핀잔주기 일쑤였기 때문에 어느새 그런 방식에 익숙해진 존은 미처 그 문제에 대해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셜록은 변화없는 여상한 목소리로 존의 질문에 대답했다.

 

 "준비할 건 없어. 보아하니 언제 가는지도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뭐 그건 날짜를 알려주지 않은 내 잘못이니 자넬 탓할 순 없지. 내일 오전 6시 20분에 출발이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네?"

 

 순간적으로 셜록이 쏟아낸 말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존은 멍청하게 반문했다. 셜록은 존의 놀란 표정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말을 계속했다.

 

 "왜 그리 놀라? 그나저나 차가 식어가는데 차나 한 잔 해."

 

 그러나 전혀 차를 들 생각이 들지 않았던 존은 셜록에게 다시 말했다.

 

 "그런데, 전 아직 짐도 못 쌌고-"
 "일 주일 전에 여자친구와 헤어져서 짐 싸가지고 오늘에서야 동거하던 집에서 나와서 여관에 짐을 부려둔 거 다 알고 있어. 그래서 아까 전에 내가 가서 자네 물건들 다 여기로 가져왔으니까 짐 싸는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아."

 

 도대체 존이 여자친구와 헤어진 것은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셜록 앞에서는 입도 뻥긋 하지 않았던 사안이었는데 말이다. 경악의 눈초리로 셜록을 보는 존에게 셜록이 손을 내저으며 설명하기조차 귀찮다는 어조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자네 하는 짓을 보면 다 알 수 있다고. 며칠 전부터 얼이 빠져가지고선 옷매무새에 신경을 쓰는 정도도 줄었고, 자주 만지던 핸드폰도 만지지 않고, 면도도 신경써서 하지 않더군. 귀 밑 턱 근처에 면도 거품 자국이 그대로 남은 채로 한숨만 푹푹 쉬어대고 있는데 자네가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걸 눈치 못 채는 사람이 멍청한 거 아닌가?"

 

 어찌 보면 무신경한 말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감흥 없이 여자친구와 헤어진 데에 대해 나름의 죄책감을 지니고 있던 존은 그 말에 오히려 자신이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아프긴 아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심이 되었다. 물론 여관에 맡겨놓은 짐을 본인도 아닌 주제에 어떻게 가져왔는지는 그 방법을 알아내기조차 무서웠으나 그 나름의 무뚝뚝한 배려에 존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찻잔을 들어 적당히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키는 존에게 셜록이 말을 걸었다.

 

 "어쨋든,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존이 물었다.

 

 "혹시 여분의 침대가 있나요?-없으면 소파라도 괜찮습니다."

 

 존의 조심스런 물음에 셜록은 태연한 얼굴로 응수했다.

 

 "여분의 침대라니? 내 침대에서 자면 되지."

 

 존은 셜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존의 얼굴에는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경악의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다행히도 차를 마시던 중은 아니었던지라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차를 푹 하고 셜록에 얼굴에 뿜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역시 셜록과 함께 있으면 잠시도 평온할 틈이 없다니까-라는 느긋한 감상을 할 틈도 없이 존은 황급히 그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 입을 벌렸으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어버버 하는 존에게 셜록이 휴, 하고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농담이야."

 

 하여튼 자넨 매사에 너무 진지해서 탈일세, 라고 말하는 셜록에게 그건 농담을 농담같지 않게 말하는 당신 탓이라고요!라고 존은 속으로 항변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셜록이 한 말 때문에 생각보다 충격이 컸던 탓일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에 존은 더이상 차를 마시고 싶다는 욕구를 잃어버리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저 우스갯소리일 뿐인 셜록의 의미없는 말에 순간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아직도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바쁜 자신에 대해 고찰하기는 잠시 미루기로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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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레존/마존/짐존/악마는프라다를입는다AU


 "당신 뭐냐고?"

 

 존의 말투가 위협적으로 바뀌었다. 남자는 이런 위압적인 상황에서도 밀리지 않는 기세를 보이는 존을 자못 즐거운 듯 바라보더니 말했다.

 

 "셜록 홈즈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 중 하나죠."
 "셜록에게 관심이 있다고요? 당신은 그의 친구는 아닌 것 같은데."
 "당신도 알겠지만-그에게 친구가 많진 않아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비웃듯이 피식 웃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셜록 홈즈가 가질 수 있는 친구-와 비슷한 것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죠."
 "그게 뭡니까?"
 "적."
 "적?"
 "그는 그렇게 생각하죠. 그에게 물어본다면...그는 아마 저를 최대의 숙적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렇게 자칭하는 사람에게 제가 그의 사생활을 알려주어야 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차갑게 말하는 존에게 그가 갑자기 표정을 진지하게 굳히고 말했다.

 

 "그건 내가 그를 걱정하기 때문이지요...-아주 많이."

 

 존이 급격히 변한 그의 표정에 입을 다문 사이 그가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대외적 관계 때문에 제 걱정을 드러내놓지 못합니다."

 

 존은 말했다.

 

 "됐습니다."
 "뭐라고요?"
 "그 제안 거절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단호한 존의 말에 남자는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좋습니다."

 

 남자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파일은 가져가도 됩니다. 제-뭐랄까,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어느새 존이 근무하는 잡지사의 건물 앞에 도착한 것이다. 존이 내릴 채비를 하는데 남자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며 내밀고는 말했다.

 

 "이것도 가져가요."

 

 조그마한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는 존의 원래 휴대폰과 똑같은 기종의 핸드폰이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만남이 아주 잘 계획된 만남이라 이거군.
 존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남자에게 일별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

 

 존이 그날 밤 브루스 파딩턴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자, 셜록은 그가 해낼 줄은 몰랐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는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긴 보고서였지만 빠르게 종이를 넘기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점퍼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에 휴대폰이 잡히는 것에 존은 문득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다시 손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캐치한 셜록은 존에게 말했다.

 

 "뭐가 문제지?"
 "네?"
 "주머니에 든 휴대폰 말이야."

 

 아...하고 존은 잠시 고민하다가 완곡하게 돌려서 표현하기로 했다.

 

 "오늘 당신의 친구를 만났거든요."

 

 존의 말에 셜록은 굉장히 놀랍다는 표정으로 보고서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친구라고?"

 

 예상보다 큰 그의 반응에 존은 마저 털어놓았다.

 

 "적...이라고 하던데요."

 

 셜록은 그제야 안심하며(?) 되물었다.

 

 "오, 누군데?"

 

 존은 딴데를 응시하고 있던 고개를 돌려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신의 숙적이라고 하더군요."

 

 셜록이 존의 말을 듣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가 날 염탐하라고 돈을 제공했나?"

 

 셜록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행동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존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랬죠."
 "그 돈을 받기로 했나?"

 

 존은 그런 질문을 자기에게 해대는 셜록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요."

 

 셜록은 흐응, 하더니 말했다.

 

 "유감이네. 당신 월급도 적은데 그냥 받지 그랬어."

 

 존은 무의식적으로 웃음이 입가로 새어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질문했다.

 

 "그는 누구죠?"

 

 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존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순순히 말했다.

 

 "자네가 여지껏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위험한 남자지. 지금은 문젯거리가 아니지만-참, 휴대폰 좀 줘봐."

 

 존이 휴대폰을 내밀자, 셜록은 그것을 들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몸을 일으켜 편집장실을 나서는 그의 뒤를 존은 영문도 모르고 쫓아갔다.


 급하게 걸음을 옮긴 그가 도착한 곳은 건물 지하에 있는 과학실이었다. 셜록이 문을 벌컥 열고는 소리쳤다.

 

 "몰리!"

 

*

 

 "역시 도청기와 마이크로 카메라가 장착되어있군."

 

 몰리의 도움으로 엑스레이 기기를 사용해 휴대폰 내부를 스캔한 셜록은 그럼 그렇지, 라는 어조로 중얼거렸고, 존은 아까의 남자에 대한 분노가 다시금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셜록은 휴대폰을 쉽게도 분해하더니 문제의 부속품들을 분리해내고 그에게 다시 건넸다.

 

 "아마 저기에 인식되는 정보가 곧바로 그에게 전달되도록 해놓았을 거야. 그런고로 아마 성능은 기성 휴대폰보다 훨씬 좋을걸. 이를테면, 와이파이, 그게 아마 다른 것들보다 잘 터질 걸세."

 

 존은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그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과학실을 나서서 함께 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그 둘은 잠깐 동안 어색한 순간을 함께했다. 다행히도 셜록이 이번엔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수고했어."

 

 존의 고개가 그쪽으로 휙 돌아갔다. 셜록은 그동안 존이 한 일에 대해 입발린 공치사 한 번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칭찬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사흘도 되지 않아 마이크로프트가 직접 정보를 배달하게 만들다니,-어지간히 탐이 나나 보지."

 

 뒷말은 입 안에서 씹듯이 중얼거렸던 탓에 존에게 잘 들리진 않았지만, 어쨋든 존이 마이크로프트가 준 자료의 힘을 빌렸다는 것은 진작에 들통이 난 듯 싶었다. 존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셜록은 부속품을 손가락으로 궁굴리더니,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어, 라고 말하곤 존을 내버려둔 채 휭 하니 연구실을 나섰다. 존은 벙찐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몰리는 익숙하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셜록이 핸드폰을 분해한 잔해를 청소했다.

 

*

 

 우여곡절 끝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귀가한 존은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최근 들어 존이 새로운 직장 때문에 바빠지면서 그가 본 사라의 모습은 잠자는 모습 아니면 자기 직전의 모습뿐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사라에게 무관심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된 존은 미안함을 느끼며 사라의 옆으로 가서 뺨에 키스를 하며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존의 키스를 마지못해 받아들이긴 했지만, 사라의 기분은 여전히 저조해보였다. 존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사라, 아깐 미안해. 사건 관련 자료를 가져온 사람이 휴대폰을 날려버리는 바람에...뭐라고 했었어?"

 

 사라는 존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또 셜록 홈즈, 그 사람이 시킨 일 때문이겠지?"

 

 존은 사라가 하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기에 그냥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그래. 난 그의 어시스턴트니까."
 "아깐 그만둔다고 하더니?"
 "생각해보니까 지금 내 처지에 가릴 게 없잖아. 상사하고 트러블이 좀 있었지만, 지금은 해결됬고..."

 

 그 말을 듣고 잠시간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존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시 후 사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존...당신이랑 나랑 이렇게 마주보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지 벌써 한 달이 넘는 거 알아?"

 

 존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랬던가? 존은 알 수가 없었다. 사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사귀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건 당신도 잘 알거야."

 

 존이 사라의 말에 다급히 말했다. 그러나 어쩐지 쓸데없는 발버둥이라는 생각이 스스로도 들었다.

 

 "사라, 내가 미안해. 앞으로 더 잘 할테니-"
 "아니, 존."

 

 사라가 존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우리 헤어져."

 

*

 

 사라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존 그 자신의 심정이 너무나도 무덤덤했다는 것이다. 왜일까? 너무도 흥미진진한 사건 사고의 세계에 있다보니 평온한 관계에 대한 마음이 어느새 식어버린 것일까? 존 자신도 자기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저 그 순간 가장 먼저 생각이 난 것은, 셜록이 이를 알아채면 뭐라고 말할까,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날 이후 셜록은 일 주일 간 본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셜록이 보이지 않음에 따라 외근도 하지 않게 된 존은 도노반의 업무를 분담하여 골머리를 썩게 되었다.
 어느 오후, Coffee break time에 도노반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평소의 쌀쌀맞은 말투 대신 고양이처럼 상냥한 말투로 존에게 말을 걸었다.

 

 "존, 사내 공지사항 메일 읽었어?"
 "아니요? 그런 것도 있었어요?"

 

 도노반은 후훗, 하고 웃고는 말했다.

 

 "하긴 존 씨는 아직 수습이니까 읽어봤자 소용없긴 하겠다. 이번에 범죄 잡지 부문의 편집장들의 회동이 파리에서 열려. 그리고 편집장들은 각자 수행원을 한 명씩 대동하지."

 

 존이 시큰둥한 기색으로 오, 하고 말하자 도노반은 안되겠다는 듯 더욱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회동은 이름이 따로 붙여지진 않았지만 영국의 그리다이언 클럽과 같은 수준의 모임이지. 말이 편집장들의 모임이지 영국 각계의 고위 인사들이 총출동하는 사교 행사거든. 거기에 수행원으로 뽑혀서 간다는 건 앞으로의 출세길은 보장되어있다는 거나 마찬가지지. 물론 수행원으로 뽑히려면 나 정도의,-"

 

 그녀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실성과 경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지."

 

 존은 영국에 그런 모임이 있다는 것도 몰랐으므로 도노반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매우 놀랐고 호기심이 생겼다. 잠시 눈을 반짝이던 존은 자신의 위치-수습 어시스턴트에 불과한-를 상기하고는 다시 어깨를 축 내려뜨렸다.

 

 "하긴 전 어차피 신입이니까요. 게다가 이 일 오래할 것도 아니고. 사실 사내 연애 때문에 전 직장에서 부당해고를 당해서 급하게 잡은 일자리거든요."

 

 존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뭐 그래봤자 이제 그녀와는 헤어졌지만..."

 

 존이 현재의 고충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것을 도노반은 듣고 있다가 말했다.

 

 "여기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다 그런 수순을 거치더라고. 혹시 담배를 피우게 되면 말해."
 "왜요?"
 "승진 직전의 증상이거든."

 

 자신이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그녀는 새 담뱃곽을 열어 담배 한 개피를 꺼내고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잠시 담배를 피우던 도노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존씨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는 줄은 지금 처음 알았네. 뭐 파리 회동에 가고싶어하는 경쟁자가 더 늘어날 필요는 없는 거니까 나로선 다행이네."

 

 그녀는 다소 차갑게 말을 끝맺었다. 자신이 너무했다고 느낀 것인지 어정쩡하게 커피를 한 모금 호록 들이킨 그녀는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뭐 억지로 잡은 일자리라고는 해도 지금까지 버틴 건 그래도 잘 하고 있단 뜻이니까, 열심히 하라고. 언젠간 존 씨도 파리에 갈 날이 오지 않겠어?"

 

*

 

 그랬던 그녀가 셜록이 돌아온 며칠 후, 셜록이 있는 편집장실에서 난리를 치고 있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록 존은 점점 쪼그라들었다.

 

 "편집장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언성을 높이는 도노반을 셜록이 의자에 앉은 채 쓱 올려다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뭐긴 뭐예요! 파리 회동에 데려가실 수행원 문제죠!"

 

 존은 소리를 질러대는 도노반의 기세에 밀려 눈치를 보며 쪼그라들었다.
 문제의 파리 회동에 동행할 수행원이 바로 존 왓슨, 그 자신이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선임인 절 제쳐놓고 수습에 신입에 말단에 불과한...!"

 

 마치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한다는 듯 더듬거리기까지 하는 그녀에게 셜록이 간단히 한 마디를 던졌다.

 

 "승진."

 

 셜록의 말을 들은 도노반이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잠시 셜록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범죄 부문 정식 에디터."

 

 셜록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도노반의 얼굴에 잠시 화색이 돌았으나 여기서 물러서기에는 파리 회동 수행원이라는 기회는 너무 큰 것이었기에 도노반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월급 인상."

 

 도노반이 깜짝 놀라 입을 헤 벌린 채 서있자 셜록이 결정타를 날렸다.

 

 "10%."

 

 셜록은 재고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마지막으로 못박았다.

 

 "이상."

 

 들어올 때 공룡처럼 쿵쾅거리던 도노반의 걸음걸이가 나갈 때는 아주 점잖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바뀌어서 나가는 것을 본 존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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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에서 도노반이 소란을 가라앉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수많은 인기척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와서 뭐라고 주의를 주는 것도 어색해진 셜록은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존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그 딴에는 바깥에 들리지 않게 하려는 시도였고, 다행히도 그 시도는 보답을 받아 셜록의 목소리는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어쨌든 존, 오늘 아침에는 내가 실례를 했어."

 

 그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사과...하고 싶군."

 

 존의 눈이 동그래졌다. 셜록이 설마 아침에 잠깐 벌어졌던 해프닝에 대해 사과를 하리라고는 짐작치 못했던 것이다. 사과, 라는 말에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존은 흡족하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뭘요. 제가 더 죄송합니다."

 

 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존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렇게 일이 스무스하게 잘 풀릴 줄이야, 라고 생각했다.
 그때 셜록의 눈이 잠깐 동안 가늘어지며 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워낙 찰나처럼 스쳐지나간 눈길이라 존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없는 동안 주어진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농땡이를 피운 것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군."

 

 차가운 셜록의 음성에 풀리려던 긴장의 끈을 다시금 잡아매고 존은 '네?'라고 반문했다.

 

 "게다가 직속 상사의 뒷담화를 하다니, 가중 처벌 감이지, 안 그런가?"

 

 셜록은 존과 레스트레이드가 나눈 대화의 내용에 대해서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으나 차마 그 오해를 풀어주기에는 내용이 낯부끄러운 것이어서 존은 입을 다물었다. 일부분은 상사의 뒷담화에 속했으므로 존은 어떻게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생각하고 셜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행동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셜록은 주머니 안쪽에서 두 번 접힌 서류 몇 장을 꺼내더니 존에게 툭 던졌다. 책상 끄트머리에 안착한 그 서류를 존은 집어들고 펴보았다.

 

 "브루스...파딩턴 살인 사건...?"
 "말 그대로야."

 

 셜록이 인위적인 미소를 존에게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 사건에 대해 수사를 해와. 어떤 수단을 써서든. 기한은 내일까지."
 "내일까지요? 저기-"

 

 화들짝 놀라 당황하며 뭐라 항변하려는 존에게 셜록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상."

 

 그 한 마디에 존은 거의 반자동으로 몸을 돌려 편집장실을 나왔다. 아니,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편집장실을 나오자 안의 상황을 훔쳐듣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문 앞에 몰려있다가 존의 안색이 시커매진 것을 애도하며 순식간에 흩어져 슬슬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존은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 찾기 위해 고개를 여기저기 돌려보았으나 안에서 한 대화를 이미 들은 사람들은 존과 눈을 맞추는 것을 거부하며 잽싸게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

 

 문제의 브루스 파딩턴 살인 사건은 터진 지가 한참이 지난 사건이었지만 정당 간의 갈등 문제와 섹스 스캔들이 얽혀 있는지라 워낙 사안이 중대하고 민감하기 그지없어 아직까지도 이슈가 되고 있는 미해결 사건이었다. 그런 사건을 존 단독으로 수사하라니, 이건 사표내고 나가란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사건 자료는 모두 인계받았고 하나하나 읽어보았지만, 존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관련 자료랍시고 건네받은 자료는 너무나 양이 방대했다. 개중에는 이게 브루스 파딩턴 사건과 관련되어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알 수가 없는 자료도 포함되어 있어 사무실 구석에 빼곡히 쌓인 자료들을 읽는 존의 마음은 시간이 갈 수록 무거워지기만 했다.

 사건의 수사를 이유로 외근을 허락받은 존은 막막한 마음에 일단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도 택시도 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던 존은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차라리 이 참에 관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매일같이 자신을 데리고 다니며 잘난 척하고 갈구는 것을 낙으로 삼는 상사에게 끌려다니는 것도 이만하면 많이 참아준 것이 아닐까? 존은 사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라."
 "존? 무슨 일이야. 근무 중 아니었어?"
 "나...음, 지금 다니는 곳 그만둘까 싶어서. 어떻게 생각해?"

 

 사라는 잠시 말이 없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

 

 만류할 줄 알았던 사라가 의외로 쉽게 동의하는 것에 존이 오히려 당황하여 말했다.

 

 "뭐?"
 "그러라고. 그러려고 생각하고 나한테 전화한 거 아니야?"
 "아...나는 자기가 반대할 줄 알았거든."

 

 수화기 너머로 사라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있지, 자기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그 잡지사에 들어간 후로 나한테 소홀해졌어. 매일이 일이고 근무 중에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 못 보내다시피하는데다가, 항상 편집장이랑 붙어다니고, 퇴근하고서도 그 사람 문자 하나하나에 쩔쩔매잖아. 그 사람은 여자 친구 없대? 왜 애꿎은 당신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 거야?"

 

 쌓아놓은 불만이 많았는지 그녀의 토로는 한참 이어졌다. 어느새 존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말을 듣느라 멍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쿨하고 어떤 경우에는 존보다 더욱 호탕하기까지 한 그녀가 이 정도로 그에 대한 불평을 쌓아두고 있었던 것이 놀라워서였다.

 

 "오, 사라."

 

 사라의 말이 끝나고 존이 말했다.

 

 "정말 미안해."
 "..."
 "새 직장에 적응하는게 힘들답시고 당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어."
 "..."
 "용서해 줘."

 

 한참 말이 없던 그녀가 뭐라 입을 여는 순간 웬 키 큰 형체가 다가와 존에게 부딪혔다. 그 때문에 휴대폰을 손에서 놓친 존은 사라의 말을 듣지 못했다.


 황급히 휴대폰을 주우려 고개를 내린 존은 휴대폰이 하필이면 더러운 웅덩이에 푹 잠긴 것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몸을 숙인 그의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이런. 죄송합니다."

 

 고개를 들고 따지려던 존은 두 가지 점 때문에 그에게 삿대질을 할 수가 없었다. 첫 번째는 그가 의외로 순순히 사과를 했다는 것, 그리고 그의 키가 존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컸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셜록도 그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키였는데 그는 그것보다도 더 큰 키였던 것이었다.
 그는 보드라워 보이는 다갈색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 딱 보기에도 최고급 수제 양복으로 보이는 옷을 걸치고 손에는 검정 장우산을 들고 있었다. 우산의 손잡이를 흘낏 살핀 존은 그 우산 또한 매우 비싼 브랜드의 것임을 간파하고 어쩐지 움츠러들었다. 딱히 돈이며 권력에 아첨하거나 구애되지 않는 존이라 해도 부자 앞에서는 기가 죽는 한낱 서민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존은 그에게서 풍겨나오는 기품과 위압감에 숙이고 들어가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하지만...그건 회사에서 구비해준 전화라...곤란하군요."
 "제가 하나 사드릴 테니, 걱정마세요."

 

 휴대폰의 배상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약간 기분이 상한 존은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으나 코 끝에 찬 것이 내려앉는 느낌에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

 

 첫눈이었다. 첫눈답지 않게 거칠게 눈을 쏟아내는 하늘은 금세 그늘진 듯 어두워졌다. 존이 황급히 우산을 찾으려 가방을 뒤적이는데 그의 위로 더욱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문제의 남자가 우산을 펼쳐 그의 위에 씌운 것이었다.
 존은 왜 낯선 남자가 서슴없이 자기에게 우산을 씌워주는지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아...감사합니다."
 "뭘요. 셜록의 어시스턴트신데, 이렇게 해드려야 마땅하죠."

 

 남자의 말에 존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존에게 셜록을 언급하며 접근하는 작자들 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 없었다. 존이 의심스런 눈길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싱긋 웃으며 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자, 존."

 

 그는 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존이 흠칫 하는 것을 미묘하게 즐거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지금 당신을 비추고 있는 CCTV는 총 네 개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호텔의 입구에 달린 저것과, 도로 저편의 가로등에 달린 저것, 당신 좌측의 공중전화 옆의 신호등에 달린 저것, 그리고 우측의, 제가 가리키는 저것. 그런데 말이죠, 제가 이렇게-"

 

 그는 손을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자 시간차를 두고 각 CCTV들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해 다른 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존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남자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시겠어요?"

 

 그 말과 때를 맞추어 그들 앞으로 검은색의 세단 하나가 굴러와 멈춰섰다. 존은 차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존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당당하게 차로 걸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존의 뒤를 따라 차에 올라탄 그는 편안한 자세로 등받이에 기댄 후 말했다.

 

 "당신이 브루스 파딩턴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이런, 존이 속으로 혀를 츳 하고 찼다. 자기가 사건을 맡은 것이 전날 오후이고 지금은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저녁인데 벌써 그런 하잘 것 없는 소문이 관련자들의 귀에 들어간 것 같았다. 지금 자신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가하여 차에 태운 이 남자 또한 브루스 파딩턴 사건의 조사를 지연시키려는 수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며 존은 절대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다졌다. 백미러로 존의 얼굴을 살핀 남자가 말했다.

 

 "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당신의 수사를 방해하려는 게 아니예요."

 

 그는 문장의 끝을 살짝 끌다가 말을 맺었다.

 

 "오히려 도와주려는 거지요."

 

 그의 말을 들은 존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일면식도 없는 남자가 왜 자신을 도와주려고 한단 말인가? 게다가 어떻게?
 남자는 앞좌석의 수납함을 열어 안에 미리 준비해놓은 듯한 파일을 꺼내어 존에게 슬쩍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가 내미는 파일을 받아 겉표지를 펼친 존은 안에 든 종이에 쓰인 내용을 읽고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써 노력했다.
 파일에 든 서류는 '브루스 파딩턴 사건 개요'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그 사건의 상세한 전모를 담고 있는 것이 분명한 그 서류를 빠르게 훑다가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존은 고개를 쳐들었다.
 존은 한 템포 쉬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것을 제게 보여주는 의도가 뭡니까."

 

 분명 놀랐을 것이 분명한데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존의 담대함에 그의 눈에 이채가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가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셜록의 비서, 아니 어시스턴트지요."

 

 확정적인 말투에 그가 자신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존은 고개를 더욱 빳빳이 쳐들고 그래서 뭐?라는 태도를 보였다. 앞좌석의 남자가 말했다.

 

 "셜록 홈즈에게 가장 가까이 접해 있는 사람은 당신이지요. 당신이 그에 관해 한 가지 도움을 준다면...기꺼이 상당한 액수의 금전적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위험천만한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입꼬리를 쓰윽 끌어올리는 그에게 존이 말했다.

 

 "그 도움이란 건 뭐지요?"
 "정보. 그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사건을 수사한다면 어떤 사건을 수사하는지, 그런-사소한 정보말입니다."

 

 존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과 강하게 빛나는 존의 눈빛이 백미러에서 마주쳤다. 찬찬히 그를 살피던 존이 물었다.

 

 "당신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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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대화를 훔쳐듣는 것이 글렀다는 것을 알게 되자 셜록은 기분이 나쁘다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는 쿵쾅대는 발걸음으로 그들 가까이에 다가와 말했다.

 

 "레스트레이드, 일이 모자란가? 그래, 이렇게 노닥대는 것을 보니 확실히 그래보이는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셜록에게 레스트레이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제스처를 하며 말했다.

 

 "좀 봐달라고, 셜록."

 

 장난스럼게 손을 싹싹 비비는 레스트레이드에게 셜록은 인상을 팍 썼다. 그리고 셜록은 코트 옆주머니에 쑤셔넣었던 종이조각 뭉치를 그에게 던지듯 건네며 말했다.

 

 "이거나 검토해."

 

 셜록이 건넨 구겨진 종잇조각을 펴서 안에 적힌 내용을 쓱 살펴본 레스트레이드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아...새 단서로군."
 "그리고 결정적인 단서지."

 

 셜록이 뻐기는 태도로 말하며 코트 깃을 추켜세웠다. 의도하는 바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셜록은 그가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을 때나 남들 앞에서 편집장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려 할 때 종종 저렇게 코트깃을 턱까지 올려 여미곤 했다. 레스트레이드는 그가 잘난 척을 해대는 것을 신물이 날 정도 봐왔기 때문에 그가 코트깃을 추켜올리건 말건 그다지 신경쓰고 싶지 않았으므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잘했어, 셜록. 그리고 말인데, 직원들 겁이나 주면서 온 건물을 싸돌아다니지 말고 사무실에나 가서 좀 앉아있게."

 

 셜록은 레스트레이드가 그걸 알 줄은 몰랐는지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 자기가 놀랐다는 기색을 들키기 싫었던 그는 눈을 한 번 깜작여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자네같이 둔한 사람이 그걸 어찌 알았는지 모르겠군."
 "지금 내 핸드폰을 울리게 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

 

 레스트레이드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보이며 들어올린 핸드폰에는 문자메시지가 속속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내용은 하나같이 '맙소사, 편집장님이야!' 또는 '편집장 주의보!' 또는 '오늘 편집장 기분 안 좋은 듯, 다들 조심해!'라는 사내 통신망들의 발빠른 알림이었다. 셜록은 입술을 삐죽였고, 레스트레이드는 알 만 하다는 듯 고개를 연극적으로 절레절레 저었다.

 

 "어때, 회사 건물을 한 바퀴 돌며 사원들에게 차례로 겁을 주고 오니까 좀 마음이 풀리나?"
 "그렇다는 걸 부인할 수 없군."

 

 셜록은 전혀 마음이 풀리지 않은 심통맞은 어조로 말했다.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의 반응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셜록은 레스트레이드가 의뭉한 표정으로 웃는 것을 싹 무시하며 존의 팔을 붙잡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레스트레이드가 존을 불렀다.

 

 "존!"

 

 레스트레이드의 부름에 존이 고개를 돌렸다. 사실 아직도 기분이 썩 좋아보이지 않는 셜록에게 질질 끌려가기보다 레스트레이드의 곁으로 몸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셜록이 자신의 팔을 틀어쥔 손아귀의 힘이 여간 센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머리만 그쪽으로 돌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존과 눈이 마주치자 레스트레이드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수고해, 라고 말했다. 그러나 존의 눈에는 그 미소가 전혀 자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셜록의 등쌀에 시달릴 존에 대한 애도의 의미이리라. 존은 울상이 된 채로 에디팅 룸에서 반강제로 끌려나갔다.

 

*

 

 언제나 그렇듯이 셜록이 한 뭉치 수집해온 증거물들과 서류들을 분류하고 있는 도노반의 책상을 지나 셜록과 존이 편집장실로 들어섰다. 셜록은 존을 편집장실의 책상 앞에 세우고 자신은 평소에는 거의 내팽개치다시피하는 방치된 커다란 사장실용 가죽 의자에 앉아 다리를 날렵하게 꼰 채로 그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이건 마치 면접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한데?라고 존은 순간 생각했다. 그러나 찌르듯이 그를 쏘아보는 셜록의 기세에 그는 잡생각을 그만두고 자세를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아프간 귀환병이라는 자랑스런 경력은 어디다 팔아먹은 것인지 존은 셜록 앞에서만큼은 고양이 앞에 쥐, 뱀 앞의 토끼만큼 겁을 먹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존은 저도 모르게 선임 앞에 도열한 후임병들처럼 똑바른 군인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

 

 아직도 군인 시절의 버릇을 떨치지 못한 그 모습을 보는 셜록은 아침에 났던 화가 저도 모르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존은 사정을 모르니 자신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도 모를 터다. 그런 이상에야 그에게 화를 내는 것은 공연한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셜록은 어째서인지 이제서야 깨달았다.
 아침에 셜록은 전날부터 골몰하던 사건에 대한 실마리가 영 풀리지 않아 기분이 저조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존이 자신에게 비아냥대자 셜록은 저도 모르게 존에게 화풀이를 해버렸다. 그리고 셜록에게는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원인 제공인은 정말로 존이기도 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지지난 주에 끽연을 넘어서 폭연을 하는 셜록의 모습을 본 존은 셜록에게 '그러다가 건강 망쳐요'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셜록은 그 말을 듣고서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금연을 남몰래 시도하게 되었다. 약 일 주일 정도는-금연 선배인 레스트레이드가 추천해 준-니코틴 패치로 어느 정도 버텨낼 수 있었으나 어쩐지 입이 심심한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셜록은 그러한 느낌이 금단 증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에 금단 증상은 극에 달해, 아무리 니코틴 패치의 갯수를 늘려도 도통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기에 이르렀다. 그 때문에 날밤을 샌 셜록의 신경은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셜록은 존의 말 한 마디에 금연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속으로는 존 때문에 머리속이 정리가 안된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고, 결국엔 가벼이 넘어갈 수 있는 존의 비아냥에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버린 것이다. 이것이 셜록이 존에게 쏘아붙인 일말의 해프닝의 경위였다.
 존에게 화를 낸 셜록은 사무실을 뛰쳐나가 온 런던을 쏘다니며 노숙자들을 달달 볶아 정보를 캐내고, 자기가 약삭빠른 축에 속한다고 자부하던 잡범들을 뒤에서 덮쳐 온갖 방법으로 갈구며 기분을 푸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기의 출현만으로도 빙하기라도 마주한 마냥 윗니와 아랫니를 달달 떨며 부딪치는 휘하의 부하 사원들을 괴롭히기로 마음먹고 건물의 1층부터 자신의 사무실인 편집장실과 레스트레이드가 근무하는 에디팅 룸이 있는 최상층까지 단 하나의 방도 빼놓지 않고 돌아다니며 사원들이 화들짝 놀라 갑자기 바쁜 척을 하거나 자기를 피해다니려고 애를 쓰는 군상을 보며 냉소를 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화가 풀렸다 싶어 이젠 존을 밝은 낯빛으로 마주할 수 있겠거니 싶어 편집장실로 향하던 셜록은 이제까지 간신히 억지로나마 좋게 만든 기분이 다시금 나빠지게 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존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그를 은밀하게 노리는 레스트레이드와 노닥노닥거리며 정담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레스트레이드는 존의 어깨를 친밀한 손길로 도닥이며 존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다.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내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내려 했으나 레스트레이드의 고개가 반쯤 돌아가 있어 뭐라 말하는지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셜록이 눈에 불을 키고 둘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존은 잔뜩 기가 죽어 옅은 파란색의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레스트레이드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처량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에 셜록은 그가 그런 상태인 이유가 자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존이 왜 저러지?'라는 생각을 하며 유리창 너머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때 레스트레이드가 존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셜록은 정도가 지나치게(?) 밀착적인(?!) 그의 스킨십에 화가 나 레스트레이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레스트레이드의 다정한 눈에는 애정의 표시가 확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저 행동은 위로의 행동을 가장한 대시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존은 그의 행동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마냥 좋아만 한다는 것이었다. 근심이 어려있었던 그의 얼굴에는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는 사실을 보았을 때 레스트레이드의 위로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존이 레스트레이드의 스킨십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둘째치고, 셜록은 그 상황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셜록이 그를 노려보는 것을 알아챘는지 레스트레이드는 존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이보란 듯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셜록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승리감을 보고 약이 올라 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는 들으란 듯 이런 말까지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그도 철이 들겠지."
 '이 능구렁이 아저씨가 어디에 대고 지금 철이 드니 마니 떠들어대는거야!'

 

 셜록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에디팅 룸 문가에 발을 들여놓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그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네를 많이 아낀다네. 안 그런가, 셜록?"

 

 존이 무언가를 물어보고 있었고, 레스트레이드가 대답하며 셜록을 향해 눈짓을 했다. 레스트레이드가 말하는 '그'가 누구지? 오늘 하루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두뇌 회전을 한 결과 '그'가 자신이란 것을 추론해낸 셜록은 레스트레이드에게 그날 줏어온 단서 쪼가리를 던져주고 존을 데리고 에디팅 룸을 나섰다.

 

*

 

 편집장실 밖에서는 도노반과 한 떼의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란 편집장실로 혼자 불려간-끌려갔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지만-존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원들의 무리였다.

 

 "어떻게 된 거래요?"
 "편집장님이 존을 잡아먹지나 않을런지 몰라!"
 "오늘 안 그래도 험악하시던데."

 

 하루 종일 사무실에 박혀 전송되는 자료를 정리한 죄밖에 없는 도노반은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이 짜증났으나 한편으로는 편집장이 무슨 이유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존을 편집장실에 데리고 들어가 콕 박혀서 나오지 않는지 궁금했기에 사람들의 소란을 참아주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속닥거림때문인지 편집장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문틈으로 들리기는 커녕 이런 광경을 셜록에게 들킬까봐 걱정되기 시작한 도노반은 검지를 입술에 대며 쉿 하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금세 그 의미를 알아채고 소리를 죽였다.

 

*

 

 한편 안에서는 셜록과 존이 묘한 대치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지속되던 상황에 존의 몸을 굳기 직전이었고, 셜록의 눈치를 보며 그가 몰래 몸을 지탱하던 발을 왼발에서 오른발로 바꾸려는 순간 셜록이 입을 열었다.

 

 "에디팅 룸에서 뭘 하고 있었지, 존?"

 

 순간 휘청하고 자세가 흐트러질 뻔한 존은 간신히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고 대답을 해냈다.

 

 "그렉 씨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요?"

 

 셜록이 자신들이 하는 대화를 듣지 못한 거라고 생각한 존은 시치미를 떼기로 마음먹었다. 셜록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들의 대화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라는 의심이 마음 한 구석에서 차오를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 셜록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렉이 누구지?"

 

 존은 순간 편집장 자식이 미쳤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신히 거친 말을 안으로 갈무리한 존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레스트레이드 씨를 말하는 건데요."

 

 셜록이 미심쩍은 듯 물었다.

 

 "암호명같은 게 아니고?"
 "레스트레이드 씨 이름-"

 

 순간 편집장실 바깥에서 왁 하고 웃음이 터졌다. 잠시뿐이었지만 편집장실 안에 있던 두 사람 모두 알아챌 정도로 큰 웃음이었다. 웃음소리는 금방 잦아들어 숨죽인 킥킥거림으로 바뀌었지만 셜록과 존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는 냉각될 대로 냉각되어 존으로서는 도저히 돌이킬 수가 없었다.

 

 '젠장!'

 

 존은 속으로 외쳤다. 아주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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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루해(Boring)!"

 

 간신히 영국의 끔찍한 실업률을 극복하고 재취업에 성공한 지 3개월이 지난 존의 하루는 저 한 마디로 점철되어있었다. 아니, 그가 말끝마다 빼먹지 않는 '이상(That's all).'도 포함하면 세 마디가 맞을 것이다.
 이쯤에서 S.O.D 편집장인 셜록 홈즈의 어시스턴트 존 왓슨의 일과를 들여다보기로 하자.
 존의 하루는 셜록 홈즈가 하루 종일 들이킬 만큼의 스타벅스 커피를 아침 출근 인파를 뚫고 이고 지고 사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셜록이 식은 커피도 잘 마신다는 것이었다. 그가 만약 막 끓여낸 커피 아니면 절대 마시지 않는 상사였다면 더욱 피곤해지는 건 존뿐이니까 그건 무척 다행이었다. 그에 더해 존은 런던에 출판되는 일간지 전부를 하나하나 통독하며 셜록 홈즈에게 사건의 낌새가 느껴지는 기사를 하나하나 읽어주어야 했다. 단순히 서류 정리나 단순 작업을 예상하고 이 직종에 뛰어든 존에게는 컬쳐 쇼크나 다름없을 만큼 피터지는 일거리-말 그대로 피가 터지는 경우도 많았다-가 매일같이 쏟아졌다.
 아침 일간지를 빠짐없이 확인하고 나면 그는 혼자서, 또는 존을 대동하고 사건 취재를 위해 외근을 나간다. 석간 신문을 미리 사놓는 것은 도노반의 몫이다. 물론 거기서 사건이 될 만한 꺼리를 추려내어 읽어주는 것은 역시 존의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존이 기사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셜록은 '지루해'란 말을 연신 내뱉었다. 너무 뻔한 사건이어서 멍청한 경찰들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거였다. 물론 자신이 그 사건에 손대면 해결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야 단축되겠지만, 하고 그는 일말의 자부심 어린 어조로 덧붙였다. (그리고 존은 어지간히 잘난 척 하길 좋아하는군, 이라고 생각했다. 사건 현장에 함께 가서 그의 능력이 어떤지 익히 눈으로 확인했던 존이었지만 그가 사춘기 소년처럼 뻐기는 데에는 도저히 웃지 않고 배겨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찮은 사건에 손을 대지 않는 이유는 런던 경찰청과의 관계가 더이상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존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런던 경찰청으로 접수되는 사건 중 적어도 5퍼센트는 셜록의 자문을 거쳐 해결되었으나 최종 사건 개요 발표에는 언제나 셜록의 이름은 빠져 있다는 것도 말이다.
 도노반의 업무는 어찌 보면 존보다 단순한 것이었지만 바쁘기는 엄청 바빴다. 셜록 홈즈가 사건 취재에서 녹음해온 것, 수집한 자료 등을 전부 문서 자료로 환원시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면 그 자료를 휘하의 각종 부서로 분류하여 내려보내는 것까지가 그녀의 업무였다. 또한 셜록 홈즈가 미처 생각지 못한 그 외의 자료를 검색하는 것까지 그녀는 군말 않고 해냈다. 그 방대한 자료들을 단 한 차례의 누락도 없이 다뤄내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능력이었다. 주변에서는 일반 어시스턴트일 때부터 그녀의 업무가 변함이 없는 것에 대해 신입인 존 왓슨에게 밀려난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말을 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의 선임이었던 그렉 레스트레이드가 맡고 있던 셜록 홈즈의 뒷치닥거리 업무가 존에게 그대로 승계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셜록은 그런 루머를 단 한 번의 발언으로 일축했다.

 

 "사람은 다 자기에게 맞는 일이 있지."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공식적인 셜록 전용 보모가 된 존은 오늘 아침에도 졸린 눈을 부비고 커피 한 판을 운반한 후 지금은 셜록과 마주보고 앉아서-사실 이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셜록은 편집장실 한쪽에 놓인 소파에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었기 때문에-기사를 들춰보고 있는 중이었다.

 

 "런던 근교 주택가에 실종 아동-"
 "지루해."
 "연쇄 빈집털이범-"
 "식상해."

 

 이런 대화가 약 30분 가량 이어졌고 존은 더이상 읽을 기사가 없다는 이유로 펄럭 소리를 내며 신문지를 덮어 한쪽으로 던져놓았다. 셜록은 '으으으'하는 괴상한 신음소리를 지르더니 벌떡 일어나서 소파 위에서 방방 뛰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리볼버를 꺼내서 레몬색 스프레이로 그린 스마일 마크에 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지루해! 지루하다고!"

 

 총신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났다. 탄창에 꽉 차있던 총탄을 어느새 다 썼다는 신호였다. 몇 번 방아쇠를 더 당기던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총을 한 구석에 내던지고는 존을 향해 휙 돌아서면서 소리쳤다.

 

 "아니, 런던이 이렇게 지루한 도시였나? 어째 쓸 만한 범죄가 하나도 없군 그래!"

 

 편집장의 신경질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존은 공연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편집장님이 원하신다고 해서 범죄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고요! 게다가 범죄가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닙니까! 존은 셜록의 윤리 관념이 제대로 된 것이 맞는지 한 번 저 인간의 머릿속을 해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니면 편집장의 심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납치라던가 살인이라도 저질러야 하는 건가?
 존은 피곤한 머리로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처음에 마이크 스탬포드가 이 일을 얻기 위해 지원자들이 사람이라도 죽일 수 있을 거라는 말을 그제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존이 웃는 것을 본 셜록이 물었다.

 

 "왜 웃는 거지?"
 "아...조금 웃겨서요."
 "뭐가?"

 

 존이 머뭇거리다 둘러대었다.

 

 "범죄가 없으면 좋은 거 아닌가요? '쓸만한 범죄가 없다'니, 범죄 행위를 옹호라도 하시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말하다 보니 깊은 곳의 본심이 드러나버렸다. 그의 얼굴에 너무 노골적으로 비웃는 기색이 드러난 듯, 셜록은 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는 존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을 정확히 따라지어보였다. 그건 마치 존을 조롱하는 듯 보였다. 셜록은 잠시 그런 표정으로 존을 응시하다가 순식간에 냉랭한 표정으로 싹 변해 웃음기라곤 얼굴에서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차갑게 굳은 얼굴로 셜록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존 왓슨, 자네는 범죄가 '보이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셜록은 구부정한 자세를 고쳐세우고 가운을 벗어들어 옷걸이에 걸며 말을 이었다.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범죄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일어난다는 거야. 그게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말이야. 왜인지 알아? 아, 원래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자네가 알 턱이 없나?"

 

 냉소가 섞인 어조로 셜록이 구겨진 와이셔츠의 칼라를 매만지며 말했다.

 

 "왜냐하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꼭 있게 마련이거든. 이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했을 때, 사람들이 범죄가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아는 편이 그들에게 유익할까, 아니면 모르는 편이 유익할까? 확실히 모르는 편이 한심할 정도로 부주의한 일반인들의 정신건강상으로는 유익하겠지. 그들의 신경은 그래뵈도 퍽 예민한 편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자네도 뇌가 있으면 생각을 할 수 있겠지? 범죄 사실을 아는 것이 그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일부 게으른 경찰들의 방심과 태업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속사포로 쏘아붙인 셜록 홈즈는 옷걸이에 걸려있던 진회색 코트를 집어들며 느닷없는 비난에 당황한 존의 꼴사나운 표정을 흘깃 하고 바라보았다.

 

 "물론 자네의 뇌가 임무를 방기하고 펑펑 놀고있지 않다면야 그 정도 쯤이야 능히 짐작할 수 있겠지?"

 

 셜록은 코트를 걸치고 편집장실을 나가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오늘은 내근일세. 이상(That's all)."

 

*

 

 셜록의 냉대에 풀이 죽은 존은 형사 사건부의 에디팅 룸으로 향했다. 때마침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과학 수사국에서 보내온 증거 자료 분석문을 읽는 중이었다. 레스트레이드는 S.O.D.가 창간된 이래로 3개월 전까지 셜록의 어시스턴트 역할을 감당하면서 쌓아온 인내심과 관용으로 편집장인 셜록의 등쌀에 시달리는 부하 직원들을 다독이는 완충제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존이 문을 열고 에디팅 룸으로 들어서자마자 레스트레이드는 분석문에서 고개를 돌리는 시늉도 하지 않고 눈을 아래로 고정시킨 채 말했다.

 

 "내 관할 아님(Not my division)."
 "레스트레이드, 저예요."

 

 타 부서에서 떠맡기는 일거리가 아니란 걸 알게 되자 레스트레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사실상 직원 관리와 일 분배, 그리고 사건의 낌새를 찾아 싸돌아다니는 것 이외에는 하는 일이 없는 이름만 편집장인 셜록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총괄하는 레스트레이드였으니만큼 형사과 외의 타 부서에서 그에게 자문을 구하는 경우-사실상 일 떠맏기기-가 많았으므로 레스트레이드는 가끔 아무 뜻도 없는 이면지를 붙잡고 바쁜 척 하기가 일쑤였다. 존은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애써 밝은 척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풀이 죽은 기색의 존을 보고 레스트레이드는 그가 왜 찾아왔는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레스트레이드는 언젠간 존이 이런 일로 찾아올 줄 알았다는 듯한 미소를 슬쩍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그는 서류를 잠시 내려놓고 편한 자세로 앉으며 경청하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존은 작은 의자를 레스트레이드의 맞은편에 놓고 풀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후, 하고 짧은 한숨을 쉬며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그에게 레스트레이드가 상냥하게 웃으며 응? 하고 말을 재촉했다.
 존의 의기소침한 투로 말했다.

 

 "혼났어요."
 "뭐, 셜록한테?"
 "그럼 달리 누구한테 혼나겠어요."

 

 불쌍할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존의 어깨를 다독이며 레스트레이드가 말했다.
 
 "오, 존. 너무 마음쓰지 말라고. 셜록은 종종 히스테리를 부릴 때가 있으니까 말이야."
 "아니요, 이번엔 제가 잘못한 거였어요."

 

 존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존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레스트레이드는 존에게 물었다.

 

 "그래서 존, 지금 걱정되는 게 어떤거야? 직장에서 해고될까봐 그러는 거야?"
 
 존이 레스트레이드의 말을 듣고 움찔 하더니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 가능성을 잊고 있었네요..."

 

 레스트레이드는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존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자네도 알겠지만 셜록이 그런 일 가지고 사람을 자를 리 없잖나."

 

 사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셜록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존은 절대로 잘릴 리 없다는 것을 레스트레이드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정년 퇴임 연령이 지나도 계속 자기 옆에 두려고 하지 않을까? 문제는 존이 자신이 총애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다시금 표정이 풀린 존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안색은 어두웠다. 존이 레스트레이드를 보며 떠듬떠듬 물었다.

 

 "레스트레이드 씨는 역시 셜록에 대해 잘 아시죠?"

 

 레스트레이드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선 대답했다.

 

 "아무래도. 5년 전부터 알던 사이니까 그럴 법도 하겠지."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을 처음 보았을 때를 잠시 회상하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많아. 그는 나에 대해서 속속들히 잘 알고 있겠지만 말야. 워낙에 눈썰미-이 말을 하며 레스트레이드는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좋은 친구니까."

 

 레스트레이드가 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찌 됐든 말야, 존."

 

 그렇게 말하며 레스트레이드는 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문득 그의 짧은 금발 머리가 덮인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귀여운 사내를 고민하게 만드는 셜록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약간의 질투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레스트레이드는 쾌활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심란해하지 말라고. 기삿거리가 없어 예민해진 것 뿐일 거야. 언젠가는 그도 철이 들겠지-그리고, 내 생각에 그는 이미 화가 풀렸을 거 같군."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존이 애타게 물었다. 레스트레이드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럼. 그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네를 많이 아낀다네. 안 그런가, 셜록?"

 

 레스트레이드가 말하며 존의 뒤쪽을 웃으며 쳐다보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란 존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문가에 셜록이 기대서서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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