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셜록을 뿌리치고 살롱을 나선 존이 가운데뜰의 정원으로 당도했을 때 푸르스레한 지평선은 이미 밤의 어둠으로 지워져 하늘과 땅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검게 변해있었다. 저택의 길게 늘어선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정원을 온통 희게 물들이는 통에 밤하늘에 깔린 어둠을 한 조각 떼어낸 틈새처럼 보이는 초라한 반달은 잿빛 구름무더기와 함께 힘없이 하늘을 떠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부셨다. 갑작스레 탁 트인 곳으로 나오자 눈앞에 보랏빛 점이 깜박거렸다. 초라히 빛나는 달빛마저도 휘황하게 느껴졌다.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어둠 속을 더듬어 걸었기 때문일까.
 어둠침침한 복도를 지나 장님이 된 것처럼 단단한 땅바닥을 디디어 가며 걸었다. 암석정원의 계단에서 다리가 꺾일 뻔하다 하고, 짧게 자른 주목 울타리에 발이 걸려 허둥거리기도 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걷고 또 걸으며 무사히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정원의 중심부를 향해 난 길을 따라 난 거뭇거뭇한 소나무의 형체가 드리운 그늘 밑에서 방황하다가 연못을 둘러싸고 둥글게 다듬어진 공터로 들어서니 환한 불빛에 눈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한없이 긴 꿈에서 가까스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축축했다. 정원을 휩싸고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는 짙은 안개가 흠뻑 묻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자신에게서 악몽을 꾸다 일어난 사람 특유의 찝찝한 식은땀 냄새가 풍기는 것 같다는 생각에 존은 기분이 나빠졌다.
 존은 뜻 모를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숨소리가 밤공기에 뒤섞이며 정적을 흐트러뜨렸다. 그러자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리며 겹겹이 둘러쳐진 베일이 걷힌 듯 시야도 맑아졌다. 저택에 도착할 무렵부터 사방에서 온통 옥죄여오는 분위기에 짓눌려있다가 풀려난 덕분인지 정교한 미관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상도 떠오르지 않던 머릿속이 한결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덕지덕지 낀 피로감이 조금이나마 풀리자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반투명한 유리가 사라지기라도 한 듯 주위 관물의 본래 색채가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낮이었다면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쳤을 진부한 밝은 색채들은 정제되어 곱게 갈린 안료처럼 본연의 선명한 빛깔로 빛을 발하고 있다. 바닥에 규칙적으로 깔린 판석은 수은처럼 싸늘한 푸른빛을 반사했다. 화강암 재질의 바닥돌에 고르게 퍼진 석영 조각들은 무기질적인 흰빛을 발산하고, 그 인위적인 느낌을 누그러뜨리려는 듯 곳곳에 놓인 이끼 낀 바윗덩어리들은 어스레한 밤빛 아래에서 보랏빛을 띤 초록색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목백일홍은 저마다 갓 봉오리를 틔워 올려 꽃잎이 활짝 벌어지기 전의 모양으로 야물게 오므라들어 있었고 연녹색의 잎사귀에서는 소박한 윤이 났다. 가지마다 다채로운 색색의 꽃송이를 매단 장미나무가 무리지어 있는 가운데 규칙적으로 주위를 둘러치고 있는 기둥의 홈에 도금된 세밀한 금녹색의 세공은 황야의 누런 모랫빛으로 생기가 없었으나 그것을 어지럽게 휘감고 도는 덩굴식물의 덩굴손은 어린아이의 손가락처럼 싱싱하기 그지없었다. 연못 둘레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휘감아 돌듯이 무리지어 핀 꽃들은 강렬한 색으로 빛나 보이기도 하고 또 달빛에 그 색조가 바래보이기도 했으며 복잡한 실루엣의 음영을 검불에 드리우며 자아내는 정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존은 그 순간 파우스트를 생각했다. 파우스트는 외친다. 멈추어라! 너 정말로 아름답구나! 감상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환호성이 잦아든 후의 나른한 공백처럼 공기마저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섬세하게 짜인 거미줄처럼 그를 가두고 있는 향기의 올가미에 갇힌 존은 얼치기처럼 서서 그를 둘러싼 비밀스럽고 낭만적인 분위기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존은 깨닫는다. 노상의 꽃들마저도 이 곳의 꽃들처럼 철저히 외면당하고, 무시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서 있는 공간을 점령한 비현실성을 자각하자마자 이제껏 기껍게 여겼던 고독이 도리어 소름끼치는 냉기로 돌변해 그의 등골을 싸하게 얼린다.
 도취의 나른한 여운이 산산이 깨어져내리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리는 성 싶었다.

 

 시간이 비껴간 듯 정지된 공간에서 모든 것이 침몰한다.

 

 존은 그 자신이 소름끼치도록 조용한 침묵 한가운데에 내던져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유모를 불쾌감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저택에서 새어나오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존의 귀를 간질이며 그의 옆에 아무도 없다는 공백감을 대신 채워주었었다. 나뭇가지에 달린 이파리들이 이따금 나부끼며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내었음은 물론이며 하다못해 발치에 나뒹구는 꽃가지들이 흔들리며 서로 스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그의 귓가를 울렸으나 지금은 달랐다. 존 혼자서만 뚝 떨어진 밀폐된 공간에 떨어진 것처럼 주위는 스산하리만큼 고요했다.
 하늘 귀퉁이에 비스듬히 걸린 달은 그저 무심하게 빛을 뿌리며 정원을 검푸른 색조로 물들일 뿐이었다.
 완전히 캄캄해진 연못의 수면 위에 비친 은빛의 달그림자가 부드럽게 너울너울 떨렸다. 연못 가운데에 설치된 새하얀 대리석 수반으로 떨어지는 분수의 물방울들이 튕겨오르며 공기 중을 떠도는 습기를 한층 무겁게 만들었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무더운 공기는 금방 비가 쏟아져내리고 벼락이 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보였다. 물결 한 점 일지 않는 수면은 얼어붙은 것처럼 매끈했다. 나선형으로 배배 꼬인 채로 자란 나무의 어둠은 그림자처럼 밤을 품고 있었으며 죽음을 연상시키는 검은빛 물속에 뿌리를 잠그고 연못에 드문드문 봉오리를 띄운 하얀 수련은 미동도 없는 조각처럼 생명력이 없어보였다.
 안개가 뭉덩이지며 흐릿하게 뭉친 빛무리에 반사된 풍경은 사실주의적인 흑백의 소묘처럼 무감했다. 고풍스런 멋이 물씬 풍기는 정원은 몹시 매력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비인간적인 무채색으로 얼룩져 음침해보였다. 텁텁하게 물감을 덧칠한 그림에서나 느껴질 법한 음습한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았던 존은 측백나무 아래의 낮은 벤치로 비칠비칠 걸음을 옮겨 엉덩이를 걸쳤다.
 존은 한숨 돌리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당장 떠오른 것은 셜록이었다. 간신히 정리되던 머리가 셜록에 대한 생각으로 다시 복잡하게 뒤엉키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생각을 하자 일말의 안도감이 든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또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몇 명이나 되는지도 모르는 흡혈귀들이 돌아다니는 괴물들의 아지트인 홈즈 가의 저택 안에서 그나마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셜록 하나뿐이라는 것을 존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건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셜록 홈즈도 존 왓슨의 두려움의 대상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셜록이 본연의 불친절한 성미를 최대한 억누르고 자신에게만큼은 최대한 상냥하게 대해주려는 노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모습의 셜록과 흡혈귀로서 존의 피를 탐하는 인간 외적 존재로서의 모습의 셜록 사이에서 느껴지는 간극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뱀파이어와 인간이라는 먹이사슬의 층위에서 포식자의 입장도 아니요 피식자의 입장이었으므로 더욱 그랬다.
 셜록과 부대끼며 느껴지기 시작한 일종의 감정적인 변화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자신이 셜록에게 느끼는 호감이 과연 흡혈행위를 당할 때 느껴지는 쾌감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나는 신체적인 증상인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진정으로 그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인지는 자의적인 판단으로만 잘라 판단하기에는 너무도 불확실한 일이었다.
 복잡한 생각으로 끙끙대던 와중 살롱을 빠져나올 때 가지 말라는 듯 자신을 바라보던 셜록의 처량한 눈빛이 문득 떠올랐다. 그로서는 분명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존 자신이 그때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군 것만은 확실했으니 다시 만나면 사과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처음으로 그를 물고 나서도 근 한 달 만에야 그를 찾아올 정도로 느긋한 셜록이다. 셜록의 괴팍스런 성미로 미루어 짐작해보아도 그가 아무런 언질없이 멋대로 몇 달이고 잠적하는 것도 그다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다. 잠적하면 오히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길 테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존."


 거짓말처럼 셜록의 목소리가 들렸다.

 

*

 

 하늘 높이 뜬 달은 은빛을 더해가며 불안 속의 조화를 부추긴다. 왠지…불빛이 차가워진 것 같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나요.”


 평온한 어투.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을 대하는 듯 지극히 차분한 목소리에 존은 도리어 그 자신이 조바심을 치기 시작했다. 초조한 듯 입술을 몇 번 잘근거리다가 존은 다소 급하게 앉은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별로…아무것도.”


 한 박자 늦은 응답에도 셜록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 점이 존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렇군요.”


 달빛을 등진 사내의 시커먼 윤곽이 점차 가까워온다. 그의 등장을 신호탄으로 안개가 눈에 띄게 사라져갔다. 공기 중에 파랗고 투명한 유약을 한 꺼풀 바른 것처럼 자욱한 안개가 깨끗하게 물러가고 있다.
 드러난 그의 창백한 얼굴은 언제나처럼 금욕적인 인상을 풍긴다. 강철같은 회색 눈동자가 파랗게 빛난다. 존을 바라보는 셜록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지만 깊숙이 감춰진 무의식적인 오만한 기색은 그대로이다. 그 앞에서 존은 마치 뱀 앞에서 꼼짝 못하고 얼어붙은 사람처럼 얼이 빠진 채로 서있었다. 셜록이 난데없이 등장한 것에 놀란 것일까. 아니, 그건 아니다.
 존이 생각에 잠긴 사이 셜록을 그에게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 마치 키스를 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다. 이거야말로 놀랄 만한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존은 그다지 놀라지는 않는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굴던 셜록은 키스를 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서로의 숨결이 코끝에 끼칠 정도로 가까이 달라붙은 그 틈새-간격을 고수하며 입을 연다.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존.”


 미적지근한 숨결이 정수리에 가만히 떨어진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며 존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말해봐.”


 존의 허락이 떨어졌지만 셜록은 곧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존은 인내심을 가지고 셜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고독과 침묵에 싸인 정원의 한가운데를 둘러싸고 앞다투어 핀 장미들이 불빛을 받아 고운 호박색으로 반짝였다. 머리 위로 뜬 달이 움직이며 두 사람의 얼굴에 던져진 음영 또한 벌레가 기어가듯 뺨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셜록이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나는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있습니다.”


 메커니즘적인 측면에서 말이지요, 하고 셜록이 덧붙였다.


 “그들은 희생자들의 흐느낌, 애원, 고통에 찬 숨소리를 들으면서 희열을 느낍니다. 종반에 이루어지는 살인 행각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카타르시스의 절정 부분에 해당하지요. 표적의 생사를 좌지우지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다고 착각하는 것에서 살인자의 행동 동인이 시작되는 겁니다. 사디스틱하고, 어떻게 말하면 병적인 쾌감이 가미된 정신적 충만감이랄까요…….”


 둘 사이의 간격은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얇은 수트의 겉감이 만나며 나직한 사각거리는 소리를 낸다. 옷자락의 우아한 마찰음은 셜록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비밀스러운 속삭임에 맞먹을 정도로 커다랗게 존의 고막을 울린다. 차가운 밤공기에 식었던 체온이 천을 사이로 두고 서서히 덥혀진다.


 “그런 것을 추구하고 극대화하려는 과정에서 그는 점점 죄의식도 팽개치고 살인을 거듭하게 되지요. 더욱 극적인 폭력을 자행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셜록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점차 열이 오르는 듯 머릿속이 멍해져왔다. 만약 저것이 제삼자의 이야기를 빙자한 셜록 자신의 이야기라면 역겹기 그지없을 것일 게다. 헛헛한 속에서 뭔가 치밀어오르는 듯 역한 느낌이 일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존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이해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것에 더욱 가까웠다. 이해하는 순간 완전한 공포에 지배되어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이해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었다.
 존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휘청이는 존의 몸뚱이를 셜록이 감싸안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존을 품 안에 가두었다. 마음만 먹으면 금세 풀려날 수 있을 정도로 느슨한 속박이었다. 존은 팔을 뻗어 셜록을 밀어내려고 했다. 떨리는 팔을 들어올려 셜록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셜록은 허탈할 정도로 쉽게 존의 팔을 잡아채었다. 그다지 강한 악력을 발휘한 것도 아니건만, 아니 오히려 부드럽고 상냥한 몸짓 축에 들었건만 존의 반항은 시시하고 짧은 허우적거림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련의 계획된 과정처럼 물 흐르듯 이루어진 동작의 흐름이 끝나고 존은 진이 빠진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셜록의 손이 존을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등을 쓸어내렸다. 그 동작은 몹시 느리고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았다. 등을 쓸어내린 손은 축 늘어진 어깻죽지를 매만지고 살살 그의 팔꿈치를 쓰다듬다가 사뭇 다정하게 손을 잡아올렸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제 위치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존의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더듬어올리던 셜록은 잠깐 망설이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존의 손가락 사이로 끼워넣으며 깍지를 끼었다. 접촉한 살갗에서 전해져오는 묘하게 따스한 느낌이 안정감을 주었는지 가파르게 치닫던 존의 숨소리가 점차 조용해졌다.


 “두렵나요?”


 셜록이 재차 물었다.


 “내가 당신을 그렇게 여기고 있을까봐 두려운 게 아닌가요?”
 “그래!”


 존이 외쳤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날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가 없어. 두려워하지 않고 싶어도 두려워.”


 존은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흐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움직임에 셜록은 가만히 존을 더욱 가까이 당겨 안았다. 존은 딱히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어. 현실감이 들지 않았으니까. 의외로 냉정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알아요."


 그리고 그러한 비정상적인 평정심은 언제가 되었든 별안간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가득 차오른 수면에 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고, 예상치 못한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넘쳐흐르는 것처럼.
 그것에 대해 토로하려던 존은, 그러나 곧 입을 다물었다. 굳이 목소리를 내어 그가 느꼈던 복잡한 심경의 전말에 대해 내뱉지 않아도 셜록은 존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둘 사이에는 이해와 공감이 자리했다. 셜록과 존 모두 그것을 확연하게 느꼈다.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텅 빈 공허함이 아닌 안온함이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다. 거의 느껴지지 않는 셜록의 희미한 맥박과 크게 두근거리는 존의 맥박이 교차했다. 손을 뻗어 만지려고 한다면야 뚜렷하게 매듭지어진 그것을 정말로 만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따스한 정감이 넘치는 공기 속에 침잠해있던 둘 중에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사람은 셜록이었다.


 “기억해요, 존.”


 존은 셜록을 올려다보았다. 흰 이마 아래로 역광이 진 눈가. 섬세하고 가지런한 속눈썹 아래에서 빛나는 두 눈이 수많은 의미를 지닌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존은 홀린 듯이 셜록의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빨려들어갈듯이 멈추지 않는 시선의 마주침이 이어지고, 이어졌으며……
 아찔한 장미향기가 하나가 된 두 사람의 실루엣을 감쌌다. 홍조 띤 보드라운 어린 뺨처럼 연분홍색으로 발그레한 꽃망울이 무더기로 만발한 사이에서 마치 꽃봉오리가 순식간에 피어오르는 듯한 키스가 계속되었다.

 

 그렇게 입맞춤은 언제까지고 계속되고 당사자인 두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못할 것같았으나 모든 것에는 끝이 찾아온다. 그것도 느닷없이.
 그들이 서 있는 장미넝쿨 뒤편으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꿈결에 몸을 맡긴듯이 키스에 몰두해있던 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떼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존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들어갈까?"


 셜록은 미련없이 동조했다.


 "그러죠."

 

***

 

 루드밀라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뛰다시피 빠른 걸음걸이였다. 급히 움직이느라 드레스 자락에 성가신 나뭇가지가 걸리며 아슬아슬하게 찢어질 듯한 소리가 났지만 자리를 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살롱 안에 감도는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와 분 냄새에 금방이라도 현기증으로 쓰러질 듯한 기분이 들어 산책을 나왔다가 생각지도 못한 광경-홈즈 경의 동생과 그 주치의라는 남자가 입맞춤을 나누는 모습을 보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르탕스와 함께 그 둘의 이모저모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치던 참이었는데 난데없이 둘의 밀회 장면을 목격하게 되다니. 게다가 바보같이 수풀을 건드려서 둘을 놀라게 하기까지 했다. 얼마나 바보같은 자신이란 말인가!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며 생각했다. 그 둘의 사이가 보통 사이는 아닐 것이라고는 짐작했지만 역시나였다. 젊은 나이가 아닌데도 꽤나 귀여운 인상의 의사 선생을 은근히 마음에 들어하던 오르탕스와, 마치 연애 소설의 주인공처럼 차갑고 쌀쌀맞은 미남형의 홈즈 가의 차남이 왠지 모르게 눈 앞에서 아른거리던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안된 일이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이쯤이면 충분히 멀어졌겠지 싶어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추었다. 곱게만 자란 몸은 조금 뛴 것만으로도 심장이 곧 멎을 것처럼 힘들어했다. 상기된 뺨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작정 길이 보이는 대로 뛰다가 길을 잃은 듯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앞쪽의 수풀길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내보인 이의 정체를 알아차린 루드밀라가 약간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카른슈타인 여백작님?"


 그녀는 루드밀라의 부름에는 대답하지 않고 후후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지그시 갖다대며 쉿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 행동에 루드밀라는 저절로 목소리를 낮추며 다시 물었다.


 "여긴 어떻게?"
 "모라비아 공작 영애처럼 나도 좀 답답해서 말이지요. 바깥 바람을 쐬니 시원하고 좋지요?"


 카른슈타인 여백작이 싱긋이 웃으며 천천히 자신에게 가까워져오는 것을 보며 루드밀라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분명 자신은 아까 뛰면서 저택에서 멀어졌으면 멀어졌지 가까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파티장을 나올 때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카른슈타인 여백작으로서는 저 방향에서 걸어나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묘한 위화감에 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루드밀라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에 카르밀라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독수리에게 표정이 있다면, 그가 급강하하며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의 지을 법한 그런 미소였다.
 미소 띤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하얗게 빛났다.

 

'BBC Sherlock > Nocturn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셜존짐/마레]Nocturne 21+22  (0) 2013.12.13
[셜존짐/마레]Nocturne 19+20  (0) 2013.12.13
[셜존짐/마레]Nocturne 16+17+18  (0) 2013.12.13
[셜존짐/마레]Nocturne 13+14+15  (0) 2013.12.13
[셜존짐/마레]Nocturne 10+11+12  (0) 2013.12.13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