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마이크로프트/셜마/마이크로프트 오른쪽 합작 프로젝트 제출 원고/약수위

 

 

 금붕어의 꿈이었다.
 느리게 유영하는 금붕어.
 팔랑거리는 금빛 지느러미.
 희끗하게 거스러미가 일어난 몸뚱어리.
 헤엄칠수록 흐들흐들 떨어져나가는 비늘조각.
 현탁액의 응어리처럼 부유하는 파편.
 어항 바닥으로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는 비늘.
 이윽고 그는 힘없는 헤엄을 그치고 하얀 배를 수면에 떠올린다.
 그 순간,
 하얀 손가락이 수조 벽을 퉁퉁퉁 두드린다.
 그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었다.

 두통이 엄습한다. 최근 들어 드문드문 찾아오는 고통은 흔히 묘사하듯 두개골을 쪼갤 듯 강렬하진 않았으나 몹시 성가신 종류의 것이었다.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킨 마이크로프트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감싸고 숨을 내쉬었다. 억지로 물에서 건져올려진 금붕어의 아가미가 팔딱이는 듯한 가파른 호흡을 한 차례. 두통에 이어 찾아오는 미약한 호흡곤란 증상은 공황장애에 뒤따르는 증세의 일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마치 남의 일인듯 무감각하게 떠올려본다.
 발작과도 같은 두통을 겨우 진정시키고 나자 그를 꿈에서 깨워낸 소리가 다시 들렸다. 쿵쿵쿵.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세 차례. 이어진 목소리는 착각할래야 착각할 수 없는 이의 것이었다.

 나야.

 문 열어.

 하고 싶은 말은 잔뜩 있었다. 하고자 한다면 못할 말도 없었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니.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이렇게 밤늦게 오는 거 실례라는건 잘 알고 있을테지.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셜록 홈즈가, 알아주는 워커홀릭인 마이크로프트마저도 이미 깊이 잠들었을 시간에 그의 사저를 방문한다는 것은 웬만큼 다급하지 않고서야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라는 것을 셜록과 마이크로프트 모두 잘 안다. 또한 마이크로프트는 특히 이번 방문의 저변에 깔린 이유에 대해서만큼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아니 이미 어제의 일이 되어버린 결혼식 때문이리라.
 닥터 존 왓슨의 결혼식.
 서서히 맑아지는 정신으로 마이크로프트는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하며 나이트 가운을 걸쳤다. 매사에 정치적인 저울질을 하는 것이 일상화된 마이크로프트로서는 될 수 있으면 타인에게는 최대한 공적인 모습의 자신만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지금 대면할 상대는 복장을 가다듬는다고 해도 한꺼풀 아래의 이면을 간파해낼 수 있는 사람이므로 사소한 요소에 크게 집착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합리화에 가까운 생각으로 느슨한 옷차림으로 나서는 이유를 만들어내었다.
 옷매무새를 추스린 마이크로프트는 인터폰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전송되는 비디오 화면을 바라보았다. 색이 바랜 화면에 가득한 셜록이 렌즈를 통해 그를 마주 바라본다. 그답게 직선적이고 숨김없는 시선이지만 피로한 기색이 은연중에 엿보인다고 생각되는 것은 단순히 영상의 화질이 조악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이유에서일까.
 사형수의 고해 시간처럼 짧고도 긴 시간동안 조용히 화면을 응시하던 마이크로프트는 문을 열기 직전의 마지막 심호흡을 내쉰 후 현관 개폐 버튼을 눌렀다.

 도어벨의 카메라 LED는 그를 응시하는 것처럼 오래도 켜져있었다. 빨갛고 작은 불빛과 눈싸움을 하기를 수 분, 마침내 망설임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처럼 문이 조용히 열렸다.
 열린 문을 통해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인 셜록은 복도를 걷다 문득 피식 웃었다. 지나치게 물러진 자신에 대한 조소였다. 확실히 존의 결혼은 그에게 있어 큰 타격을 주었다. 규칙적이고 편안하게 정착한 일상의 틀을 깬다는 측면에서도, 무의식중에 존에게 의존하고 있었던 자신의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진정 귀중한 것의 가치는 그것이 사라졌을 때에야 실감할 수 있다는 다소 진부한 경구가 떠올랐다. 그에 한층 입가에 띤 쓴웃음의 기색을 짙게 하며 셜록은 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그는 존 왓슨을 사랑했던 것일까? 지금에 와서는 셜록이 존에게 품고 있던 감정의 정체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이 절친한 친구가 결혼하여 그만의 인생을 꾸린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인지 그렇지 않으면 미처 토로할 사이도 없이 종결을 맞은 짝사랑에서 비롯된 슬픔인지...
 확실한 것은 존은 셜록의 인생에 존재해왔던 기간에 비해 그의 인생에서 거대한 비중과 무게를 차지하고 있었고 셜록은 지금 그 굳건한 반석이 사라진 여파로 인해 몹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고 많은 곳 가운데 하필이면 마이크로프트의 집이라니. 갈 곳이 그렇게 없었던가. 심정적으로 괴롭다고 해서 곧장 마이크로프트에게로 향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마치 상처입은 짐승이 조용히 제 보금자리로 회귀하여 몸을 누이고 찢기어 피를 흘리는 환부를 핥아대는 것처럼, 그런 상냥한 위로를 기대하는 것인가. 마이크로프트에게서 그런 행동을 기대해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그 자신이 더욱 잘 아는데 말이다. 그는 동생의 심적 고민을 형답게 보듬어준다던가 할 수 있는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서로 상처가 곪아서 썩어들어간다 할지라도 차라리 부패해 죽고 말지언정 서로 약한 데를 드러내보이고 핥아준다는 건 불가능했다. 셜록과 마이크로프트 사이의 관계는 각자 개인의 특수성때문에 어느 형제보다도 밀접했지만 일반적인 형제 간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역학의 상궤에서는 한참 벗어난 것이었으니까.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셜록은 굳이 마이크로프트에게 올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의 성미를 반영하듯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메마르고 강퍅한 분위기를 떨치지 못한 복도과 방문들을 지나치며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한숨을 쉬는 그의 귓가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담배나 한 대 피우련?"

 마이크로프트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지극히 평온한 목소리와 담담한 어조에 적이 안심하며 셜록이 대꾸했다.

 "금연 중이야."

 셜록이 사양하자 그건 이미 집어치운지 꽤 되지 않았니, 라고 말한 마이크로프트는 외려 그 자신이 담배를 끄집어내어 입에 물었다. 잠시 침묵이 깔리는 동안 찰칵 하는 라이터의 발화음이 들렸다. 셜록은 작은 오렌지색 불길이 뱀처럼 쉿쉿거리는 소리를 내며 담배 끝부분을 태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겉담배만 피우는 주제에 꽤 맛있다는 듯이 필터를 빨아대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 셜록이 고개를 갸웃 하다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입을 열었다.

 "약은 먹고 있어?"

 마이크로프트가 담배를 문 채로 웅얼거렸다.

 "무슨 약?"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인걸. 문외한인 내 눈에도 형이 공황 장애를 겪고 있다는 게 뻔히 보이는데 말이지."

 문외한이라고 자칭하는 그 사람이 일반인의 범주에 분류하기에는 과분한 관찰력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또 모르는 일이지만, 하고 마이크로프트는 생각했다. 셜록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챈 셜록의 어조가 신랄해졌다.

 "그놈의 강박증 때문일 수도 있어. 알아들어?"
 "잔소리를 하려고 그 귀하신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행차하신 건 아닐텐데, 셜록."

 입에 문 담배를 내려놓으며 마이크로프트가 짜증이 어린 목소리로 일침을 놓았다. 셜록이 입을 다물었다. 평소처럼 한 마디 했을 뿐인데도 금세 수그러들어 상당히 풀이 죽은 기색의 셜록에게 어린애에게 화풀이를 한 듯한 미약한 죄책감을 느끼며 마이크로프트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정적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셜록의 코트자락에 가득 묻어들어온 밤공기의 찬내가 어느 정도 가셨을 때 즈음, 필터 가까이까지 타들어온 담배를 재떨이에 내려놓으며 마이크로프트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키스해줄까."

 속삭임은 바람에 날아갈 듯이 작고 가벼웠다.

 "예전처럼(Just like the old time's sake)."

 셜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무언의 승낙이라고 여긴 마이크로프트는 천천히 셜록에게 다가가 입술을 겹쳤다. 비슷한 키의 두 형제가 입맞춤을 하고 있는 모습은 어색해보이면서도 어쩐지 일상적이고 당연하다는 듯한 뉘앙스가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메마른 입술이 떨어져나갔다. 관능 따위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 단조로운 키스였지만 그에 오히려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즉시 셜록의 입술이 마이크로프트의 입술을 뒤쫓아갔다. 여전히 다물린 채인 마이크로프트의 입술 표면을 셜록의 혀가 부드럽게 핥았다. 가칠가칠한 입술을 타액으로 적시자 미동도 없던 입술이 살풋 열렸다. 그때까지도 셜록의 두 눈은 마이크로프트의 두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푸른 불길처럼 빛나는 두 눈의 광채를 견디지 못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입 안으로 침입한 혀의 노골적이고 색정적인 움직임 때문인지, 마이크로프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가 천천히 닫혔다.
 나약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소극적인 몸짓에 가학심이 불타오르는지 셜록의 키스가 차츰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적극적으로 마이크로프트의 입 안을 휘젓는 셜록과 이따금 안타까울 정도로 감질나게 그 움직임에 응하는 마이크로프트 간의 주고받음이 계속되었다.
 미묘한 기세 싸움처럼 팽팽하던 흐름에서 어느새 셜록이 우세를 점했다. 셜록은 더 못참겠다는 듯 마이크로프트를 벽쪽으로 세게 밀어붙였다. 조금도 만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단단하게 선 두 사람의 고간이 서로를 애무하는 움직임에 따라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비벼지며 사뭇 애달픈 쾌감을 자아냈다. 가운의 허리끈을 거칠게 풀어내면서도, 코트를 벗기고 벨트의 버클을 끌르면서도 두 사람의 입맞춤은 멈추지 않았다. 겨우 키스가 멈춘 것은 셜록과 마이크로프트가 그의 침실에 도착하고 난 뒤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셜록이었다. 욕망으로 창백한 뺨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다. 냉정하고 이지적인 눈빛은 수컷의 눈빛으로 돌변해 마이크로프트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이성을 끌어모아 마이크로프트의 의중을 파악하려 드는 것이 참으로 셜록다운 행동이었다. 그에 마이크로프트가 피식 웃었으나 그도 그다지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오랜만의 전희에 잊고 있었던 열기가 몸을 지배했고 심장이 필요 이상으로 두근거렸다. 빨라진 심장 박동에 다시금 숨소리가 가팔라졌고, 거칠 것없이 치솟아오르는 흥분에 고삐를 채우기 위해 애써 심호흡을 하며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현재로써는, 아무 생각도 없어."

 셜록의 눈빛이 의심으로 가득찼다. 언제나 모든 것에 안배를 하기를 좋아하는 마이크로프트에게 무계획적인 행동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계획적이라고 보기에는 더욱 무리였기 때문에 셜록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그의 혼란에 급제동을 걸기 위함인지, 아니면 엑셀러레이터를 밟는 것인지 마이크로프트가 다시금 입을 맞추어왔다. 반라의 몸이 가까이 다가오자 조금은 낯설고, 서늘하지만 아련한 향수를 불어일으키는 체취도 함께 가까워졌다. 마이크로프트의 몸을 더듬는 셜록의 손이 떨렸다. 추위에 곱은 손처럼 손마디마디가 둔해지는 느낌이었다. 나긋하게 휜 마이크로프트의 등줄기도 바르르 떨렸다. 감각의 극한에 다다른 예민한 쾌감을 미처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상한 위기감이 둘을 덮쳐왔다.
 마이크로프트가 숨을 헐떡였다. 셜록의 손이 그의 엉덩이를 가르고 들어온 탓이었다. 뜨거운지 차가운지도 모를 온도의 손가락이 오랫동안 아무도 들인 적 없는 입구를 파고드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연하게 다가왔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자제력을 잃어버릴 것같은 느낌에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의 어깨를 붙잡았다. 생명줄을 부여잡기라도 하듯 매달리는 마이크로프트를 안심시키려는듯 셜록이 쪼듯이 키스했다.
 다정한 키스가 퍼부어지는 가운데 셜록의 것이 마이크로프트의 안으로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셜록의 성기가 쿠퍼액으로 질척하게 젖어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윤활제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성급하게 삽입한 감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에 마이크로프트에게는 꽤나 커다란 압박감이 느껴졌다. 셜록에게도 그 압박감이 전해지는지 낮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벽이 딱딱한 살덩이에 짓눌리는 불편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의 허리에 다리를 휘감고 그를 끌어당겼다. 셜록이 혀를 차는 소리가 멀리서 울려퍼지는 듯 들려왔다. 하지만 그 어감에 약간의 다급함과 함께 욕망이 어려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이크로프트의 보챔에 응하듯, 천천히 진입하기만 하던 셜록의 것이 서서히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리게 진퇴를 반복하던 그것은 조금씩 속도를 붙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셜록이 피스톤질을 할 때마다 점막이 딸려나가는 느낌에 마이크로프트는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을 떨었다.
 사지를 불태우는 듯한 쾌감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더욱 갈구하게 된다. 떨리는 입술로 서로를 애타게 찾는다. 멈추지 않는 키스로 가쁜 숨결이지만 질식해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미친 생각마저 든다. 그렇게 둘은 세상에 둘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몸을 섞는다.

 느리게 유영하는 금붕어.
 팔랑거리는 금빛 지느러미...
 아아, 같은 꿈이다.
 여간해서는 꿈을 꾸는 경우가 드문 마이크로프트로서는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꾼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마치 파노라마처럼 느리게 진행되는 꿈은 중반부까지는 동일한 전개를 이어나갔다.
 희끗하게 거스러미가 일어난 몸뚱어리.
 헤엄칠수록 흐들흐들 떨어져나가는 비늘조각.
 현탁액의 응어리처럼 부유하는 파편.
 어항 바닥으로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는 비늘-까지는 이미 보았던 대로였다.
 이제 금붕어는 눈꺼풀이 없는 검은 동공에 힘을 잃고 희디흰 배를 떠올리게 되리라.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쇠약한 금붕어는 힘겹게 고요한 물살 안에서 지느러미를 움직인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커튼자락처럼 부드럽게 물결치는 금빛 지느러미의 움직임을 끝으로-

 다시 한 번 잠에서 퍼뜩 깬다. 눈을 뜨자마자 찬 새벽공기에 잠기운이 깨끗하게 쓸려내려간다.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준다더니, 하고 속엣말을 중어린다.
 옆을 바라보았다. 새어들어오는 햇빛 아래에서 셜록이 자고 있다. 단정한 눈썹은 고뇌를 잊고 고요히 내리깔린 채로 잠의 무게를 이고 있다. 규칙적으로 들썩이는 가슴어림을 쳐다보며 저도 모르게 내 가련한 동생, 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마이크로프트는 어색하게 손을 내밀어 그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Sleep tight, brother 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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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셜록존/2ch 스레 번역 어레인지(원 링크: http://vip2ch.tistory.com/1459)

 

 

 이것은 고기능 소시오패스를 자처하던 세계 유일의 자문 탐정 셜록 홈즈가 퇴역 군의관 존 해미쉬 왓슨을 만나기 이전의 이야기이다. 

 

*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군요." 

 

 저녁 일곱시 반. 타종 시계만큼이나 정확했다. 오늘도 역시, 라고 고개를 주억이던 도노반과 앤더슨이 동시에 레스트레이드를 쳐다보았다. 레스트레이드가 '왜 날 봐?'하는 시선으로 그들을 째려보았으나 둘은 그에 굴하지 않고 '어서 물어봐요!'라는 의미가 듬뿍 담긴 눈빛을 보냈다.
 결국 두 후임의 눈빛 공세를 견디지 못한 레스트레이드가 주섬주섬 코트를 챙겨입는 셜록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셜록, 요즘 매일 그렇게 어딜 가는거야?" 

 

 코트를 반쯤 걸치던 셜록이 동작을 멈추고 레스트레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매몰차고 차가운 태도로 그건 경감님 알 바 아닌데요, 라고 대꾸할 줄 알았기에 긴장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레스트레이드였으나 그의 귀에 들린 대답은 예상 외였다. 

 

 "궁금하신 겁니까?" 

 

 예상과는 딴판으로, 냉정하지만 그렇다고 거부하는 듯한 태도는 아니었기에 용기를 얻은 레스트레이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궁금하다고 그러면 말해줄 건가보지?" 

 

 셜록은 다시 한 번 휴대폰을 보고 시간을 체크했다. 

 

 "5분 정도라면 괜찮겠군요...-그래서 뭐가 궁금하신 거죠?" 

 

 나름대로 허락이라고 할 만한 의사표시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앤더슨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뭐가요?"
 "매일같이 일곱시 반만 되면 야드에서 모습을 감추잖아."
 "전에는 자기가 야드 정직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야장천 붙어있었으면서."

 

 도노반이 거들었다. 쏟아지는 질문에 셜록이 한쪽 눈썹을 까딱 하며 말했다. 

 

 "취조라도 당하는 기분인데요." 

 

 원래부터 셜록을 자칭 고기능 소시오패스가 아닌 잠재 사이코패스로 여겨왔던 도노반은 갑작스런 셜록의 행동 반경의 변화가 범죄 행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실상은 정말로 취조를 하고 싶었으나 애써 그런 기색을 감추며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의 웃음을 본 셜록이 다 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레스트레이드가 도노반을 제치고 물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다구. 사건, 그것도 기묘하고 흥미로운 사건이라면 그렇게 좋다고 쫓아다니던 너였잖아. 그런데 요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사건도 고사하고 일곱시 반만 되면 종달새라도 되는 것처럼 정시퇴근이잖나." 

 

 설마 애인이라도 생긴건가? 라고 묻자 셜록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여자 친구같은 건 안 사귑니다." 

 

 도노반과 앤더슨의 시선이 무언가 다른 것을 시사하는 강렬한 의심으로 들어차자 셜록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남자 친구도 안 사귀긴 매한가지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마시죠."
 "그럼 뭐냐고? 멀쩡하고 훤칠한 30대 성인 남성이 매일 저녁마다 모습을 감추는데 애인이 아니면 뭐가 또 있겠냔 말이야." 

 

 레스트레이드의 거듭된 물음에 낮게 한숨을 쉰 셜록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별 건 아니지만, 그렇게 궁금하시다면야." 

 

 세 명의 귀가 쫑긋거렸다. 

 

 "플랫메이트를 구하고 있거든요." 

 

 폭탄 선언에 세 사람 보두 화들짝 놀랐다.
 아마 저 말을 한 사람이 셜록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말은 그저 일상적인 대화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셜록이? 사교성이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까칠한 셜록이 플랫메이트를 구한다고? 확실히 그건 폭탄 선언이었다.
 두 사람은 어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있었으며, 레스트레이드는 순간적으로 셜록이라면 미래의 플랫메이트 심층면접을 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가정을 입에 올리려 했으나 시계를 흘끗 본 셜록은 그가 말을 꺼낼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름은 존 왓슨. 미들네임은 알파벳 H로 시작하는데 그를 소개시켜 준다는 스탬포드도 모르고 있더군요. 후보로는 헨리, 험프리, 히긴스 등이 유력하지만 출생증명서를 떼어보기 전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다 어깨 부상으로 의가사 제대했고요. 하지만 특이하게도 어깨의 부상은 완벽하게 회복되었으나 대신 다리를 저는데, 그건 뭐 심리적인 트라우마라고 쉽게 추론할 수 있지요. 현재는 퇴역 군인 숙소에서 혼자 머물고 있고 누나가 한 명 있습니다. 누나 쪽에서는 존 왓슨을 아끼지만 존 왓슨은 그 누나라는 사람의 알코올 중독때문에 심리적 거리감이 있으니 플랫을 쉐어하기까지는 머지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앤더슨과 도노반의 벌린 입은 더욱 크게 벌어졌고 막 입을 열려던 레스트레이드의 입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동일했다.
 스.토.커.
 세 사람의 경악을 무시하고 셜록이 말을 이었다.
 

 

 "최근에는 스탬포드의 권유로 성 바로톨로뮤 병원에서 저녁 9시에 끝나는 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양이더군요. 존의 숙소와 바츠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15분에서 20분. 지금 야드에서 나가야 제시간에 맞춰갈 수 있습니다." 

 

 이제 가도 되나요? 라고 묻는 셜록의 어깨를 황급히 붙잡고 레스트레이드가 말했다. 

 

 "자, 잠깐. 셜록 너 설마 장래의 플랫메이트가 될 후보들을 전부 스토킹하고 다니기라도 하는 거야?" 

 

 기분나쁘지 않게 경위의 손을 어깨에서 치우며 셜록이 반박했다. 

 

 "스토킹이라뇨. 아무리 경위님이라도 말이 좀 심하시군요." 

 

 셜록의-뻔뻔스럽게 보일 정도로-단호한 태도에 도노반은 '그렇지만 너 아까 출생증명서를 떼어본다고까지 했었잖아! 자기가 한 말은 잊은 거냐!' 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도노반이 말을 고르는 사이 셜록이 말했다. 

 

 "왜 저를 스토커라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 정도의 정보는 딱 보면 나옵니다. 나머지는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이고요." 

 

 퍽도 우연이겠다, 하고 생각하며 레스트레이드는 혀를 찼다. 아무리 잘 봐줘도 이건 스토킹이다. 하는 말부터가 전형적인 스토커들의 변명과 같았다. 일단 무엇보다도 그렇게나 자세한 정보를 우연히 알아냈다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설마 우연히 그가 버린 쓰레기 봉투를 주워서 우연히 그 안에 있는 찢어진 메모나 서류를 찾은 후 우연히 셀로판 테이프로 붙여서 우연히 알았다는 전개는 아니겠지...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리고 후보는 그 하나뿐이예요. 많은 후보들 가운데에서 엄정한 기준을 거쳐 선발된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딱 보자마자 영 아니었거든요." 

 

 그 하고 많은 후보들 가운데 괴팍한 널 참아줄 정도로 착한 사람이 그 하나였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모두를 스쳐지나갔다.
 줄곧 가만히 있던 앤더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제시간에 맞춰간다는 건 무슨 소리야?" 

 

 간과하고 있던 점이 모두의 뇌리에 떠올랐다. 셜록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어투로 말했다. 

 

 "아, 그거요. 존의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마중이랄까, 플랫메이트가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해보려고요." 

 

 그러더니 셜록이 주섬주섬 코트 주머니에 종이쪽지를 하나 꺼냈다. 

 

 "그건 또 뭐야?"
 "존한테 가서 할 말을 적어봤는데 어떤지 한 번 들어보시고 말씀해주세요."
 

 

 그래 한 번 들어나 보자 하며 레스트레이드가 팔짱을 끼었다. 

 

 "'수고했어요. 시간도 늦었는데 같이 갈까요. 밤거리는 위험하니까 집까지 바래다드릴게요.'. 이렇게 말하면 어색하지 않겠죠?" 

 

 네가 제일 위험해!
 혼자 가는게 백배는 더 안전해!
 다시 한 번 세 사람의 생각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얼굴을 일부러 찡그리는 것처럼 우그러뜨린 어색한 미소라니. 나 위험한 사람이요 하고 얼굴에 써붙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모두가 셜록의 손에 당장이라도 수갑을 채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셜록은 휴대폰을 한 번 더 꺼내보더니 말했다.
 

 

 "아, 근무가 끝나가는 모양이군요. 얼른 나가야겠습니다. 직접 대면한 날 여러가지 이야기를 많이 나눴지만 여기서 말할 생각은 없으니 슬슬 가봐야겠네요." 

 

 핸드폰 액정을 보는 것뿐인데 근무가 끝나가는 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설마 모종의-비밀스럽고 불법적일 것이 자명할-수단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감시까지 하는 건가? 셜록과 자주 접촉하는 사람이라는 입장 상 셜록의 형이라는 작자와 반강제적으로 자주 만나보았던 레스트레이드는 그런 생각이 현실적이지도 않고 신빙성이 매우 적다는 것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게다가 '직접 대면한 날' 이라니, 뭔가 뉘앙스가 이상하다는 것을 캐치한 도노반이 물었다.
 

 

 "둘이 언제 처음 만났는데?" 

 

 셜록이 다시 시계를 쳐다보며 조급하다는 듯 뒷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며칠 전이요. 엄밀히 말하자면 5개월 전이지만." 

 

 그러니까, 직접 둘이 얼굴을 마주한 것은 며칠 전이지만 셜록이 일방적으로 그를 관찰한 것은 5개월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뭐, 괜찮잖아요. 그에게는 굳이 알리지 않았지만, 사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고." 

 

 세 사람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농담이라고 생각했건만, 정말로 스토킹일 줄이야...
 레스트레이드가 억지로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럼 오늘도...직접 대면이 아닌건가?" 

 

 레스트레이드의 억양과 음색으로 셜록은 겨우 세 사람이 자신을 추잡한 범죄자를 바라보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감정적인 면모를 거의 드러내보이지 않는 셜록이 오늘따라 발끈하며 말했다. 

 

 "그 표정은 뭡니까? 그와 저는 5개월 전부터 이런 관계를 지속하고 있단 말입니다.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말해보았더니 그런 반응이라뇨? 게다가 며칠 전 만났을 때 플랫메이트에 관해 이야기했더니 무척이나 긍정적인 반응이었다고요." 

 

 이제 뭐라고 말해도 세 사람의 얼굴에 실린 그늘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것을 본 셜록은 뭐라고 궁시렁거리더니 코트를 여미고는 훌쩍 자리를 떴다.
 셜록이 떠나간 자리에 남은 세 사람이 차례차례 입을 열었다.
 

 

 "스토커...지요?"
 "스토커...네요."
 "스토커...로군."
 

 

 한동안 묵묵히 서 있던 세 사람 가운데 누군가 중얼거렸다. 

 

 "기분 나빠..." 

 

 다시 침묵이 깔리고, 레스트레이드가 분위기를 추스르려는 듯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러지들 말고. 셜록의 감시 등급을 높이자고!" 

 

 그 말을 신호로 모두 흩어졌다.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셜록의 장래 플랫메이트라는 사람이 스토커 혐의로 셜록을 신고하기 전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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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단편/조각글

 

 

 셜록은 사실 존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존을 사랑하지 않았다.
 존이 셜록에 대해 품은 감정은 명백한 사랑이었지만 셜록이 존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우정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굳이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그것은 친애의 감정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셜록과 존은 종종 섹스를 했다. 성욕에 그다지 휘둘리지 않는 셜록이었지만 그런 그도 남자였기 때문에 성관계는 불가결한 것이었다. 존이 셜록에게 반한 것은 분명했기 때문에 셜록은 그답지 않게-아주 미량의-죄책감을 가지고 섹스에 임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창녀의 대용품인 셈이었지만 존은 셜록의 괴상하고도 유별난 성미를 무한한 관용으로 이해해 주는 듯 보였고 그는 곧 그러한 관계에서도 장점에만 눈을 돌리려 부단히 노력했다.
 셜록은 존이 그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감정에 보답해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와의 섹스는 좋아했다. 효율적이었으니까. 물론 섹스를 할 때 연인처럼 다정하게 굴어주면 존이 훨씬 좋은 반응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때로는 열정적인 연인 사이에서나 할 법한 달콤한 키스를 선사하기도 하고 지독하게 길고 지리한, 그러나 뜨거운 애무를 퍼부어주기도 했다.
 셜록만큼은 아니지만 영리한 축에 속하는 존은 셜록이 자신에게 잘 대해준다고 해서 자칭 고기능성 소시오패스의 마음 속에서 사랑이라는 달착지근한 감정이 생겨나리라고는 추호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 쓸쓸한 표정으로 셜록을 응시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물론 둘은 친구였다. 셜록은 존의, 존은 셜록의 하나뿐인 친구. 둘은 그 안정된 관계의 틀을 굳이 시험대에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셜록이 투신을 위장하는 날이 찾아왔다.
 존은 울었고 소리쳤고 절규했다.
 눈 앞에서 그가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으며 그가 분명히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이란 연약해서 그 불씨가 꺼지는 날도 언젠가는 찾아오게 마련이었다.
 
 있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재회의 날.
 식어버린 잿더미에서 되살아나온 불사조처럼 셜록은 건재했고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셜록은 존에 옆에 섰다. 셜록은 미소지었다. 존은 눈을 깜박였다.
 -존은 자신이 셜록을 사랑하기에는 너무 지쳤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셜록은 자신이 존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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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존마]애완인간

2013. 12. 13.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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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성추행/약수위

 

 

  셜록 홈즈는 여러 방면에서 박사 못지않은 박식함을 자랑하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측면에서만큼은 걸음마를 갓 뗀 아이와도 같았다. 그러한 점에 대해서는 그의 주변 환경적인 요인에서 받은 영향을 무시할 수가 없는데, 동생에 대한 과다한 애정을 필요 이상으로 과시하는 그의 형에 대한 저항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플랫메이트이자,-빌리를 제외하면-첫 번째로 사귄 친구이자, 또한 처음으로 사귄 연인인 존 왓슨을 제외하면 그가 이 정도로 깊은 감정적인 교분을 쌓은 사람 또한 처음이었기 때문에 셜록은 두 연인의 울퉁불퉁한 앞길에 무엇이 나타나든 서툴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사건에 대한 추리의 전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는 지금,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존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는 지금 셜록의-소위 말해-내적 갈등은 몹시 심화되고 있었다.
 사실 레스트레이드와 존, 그리고 자존심이 상한다는, 다시 말해 자신들의 주의력 결핍과 지적인 열등감을 자극한다는 사소한 이유로 자신에게 항상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도노반과 앤더슨-제발 좀 그 멍청한 면상을 치워주었으면 좋으련만!-앞에서 추리의 과정을 일일히 설명하고 있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하루를 억지로 흘려보내기 위해서 일상적으로 거쳐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셜록이 신경쓰이는 것은 도노반이나 앤더슨 따위가 아니었다. 벌판의 야생 소떼들처럼 몰려와 살인사건이 일어난 건물 바깥에서 온갖 불평을 쏟아내며 웅성이는 기자들 무리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존 때문이었다.
 사실 셜록은, 존이 눈을 반짝거리며 그를 쳐다볼 때마다 아랫배, 아니 배꼽 아래편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 감각은 몹시도 생소한 것이었다. 생소한 동시에 동물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은 더욱 나빴다.
 알다시피, 셜록은 약 삼십여년에 해당하는 그의 인생 내내 오직 냉철한 이성과 사각거리는 책장에 인쇄된 기계적인 이론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왔기 때문에 육체적인 욕구가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에 대해서 결벽증적인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말초적인 욕망에 몸을 맡긴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시시한 화학적인 작용에 의거한 결정을 한다는 것이 왜인지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셜록은 지금만큼은 그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욕구에 순응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젠장! 존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논리적인 추론 과정도 해내지 못하는 열등한 족속들을 배려한답시고 마지못해 소리내어 말하는 것뿐인, 자기만족을 위한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에 저렇게나 찬양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오다니 얼마나 순진하고 선량하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셜록은 더러운 마룻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향해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래, 한결 낫군. 죄지은 사람마냥 눈치를 보는 것처럼 존을 흘끔거리고 있던 아까보다 훨씬 나았다.
 입술이 무어라고 열심히 떠들고 있는 동안 셜록의 머릿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뭉게뭉게 떠오르고 있었다. 존을 만지고 싶다. 순간적으로 시선이 존의 둔부로 향했다. 어젯밤에만 해도...후. 셜록은 기억을 더듬기를 멈추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이 그의 욕망을 진화하기는 커녕 더욱 부추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차 가지를 뻗어나가며 무성해지는 욕망. 셜록은 마치 먹이를 앞에 두고 침만 흘리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저 살결을 만지면 얼마나 좋은 기분이 드는지 알기 때문에, 잘 느끼는 부분을 자극해주면 얼마나 멋진 신음을 뱉는지 알기 때문에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셜록은 그가 지극히 혐오하는 호르몬적인 욕망에 굴복하고 존을 향해 손을 뻗었다.

 

*

 

 등 뒤로 갑자기 닿아오는 차가운 손의 감촉에 존은 놀라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사건 현장에서 감히 이런 짓을 할 깜냥이 있는 사람은 오직 셜록뿐이라는 것을 그는 금방 알아차렸다. 하긴 셜록일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헛숨을 들이키는 데서 그쳤기에 사건 현장에서 난데없이 소리를 질러 모두를 놀라게 하는 것은 피했지만 셜록이 난데없이 자신의 허리를 주물럭대는 것은 좌시하고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나마 뒤에 아무도 서있지 않고 셜록의 넉넉한 코트 품이 그가 손을 어디에 집어넣고 있는 것인지 가리고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야드 식구들에게 얼마나 망신살을 뻗쳤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다가 누구한테 발각당하기라도 하면 freak 소리를 듣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겠지. 변태로 낙인을 찍히고 말것임에 분명했다.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단 존은 명백한 항의의 기색을 담은 눈길로 셜록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런데 셜록은 왠일인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뻔뻔스럽게 그의 셔츠 자락 안으로 슬그머니 파고들어 허리께를 매만지는게 아닌가.
 더욱 약이 오르는 것은 남몰래 존을 추행하는 와중에도 셜록의 언변은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자신의 추론 과정에 대한 설명을 차근차근 늘어놓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앤더슨에 대한 무자비한 조롱을 덧붙이고 도노반의 지저분한 남자 관계를 들추어내고 레스트레이드에 대한 놀림까지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대체 사건 현장에서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 살짝 젖혀진 셔츠 안으로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끼쳤고 존은 소름이 돋았다.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자 움직이던 셜록의 손이 멈췄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자신의 떨림을 셜록이 불건전한 방향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텐데!
 그리고 어김없이 존의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셜록의 손은 더욱 끈적끈적하게 자신의 허리춤을 지분대기 시작했다. 존은 티나지 않게 허리를 이리저리 피하며 그의 의사를 전달하려 노력했으나 셜록은 완고했다. 고집센 녀석 같으니! 하고 존은 투덜거렸다.
 그러기를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아니 몇십 초밖에 지나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불가피하게도 오직 셜록의 손길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되면서 존은 슬슬 셜록의 추행인지 애무인지 모를 행동에 간지럼 이외의 다른 감각도 느끼기 시작했다. 원래 존은 잠자리에서 셜록이 등줄기를 따라 키스를 해준다던가, 척추를 따라 그 길고 유려한 손가락으로 더듬어주는 등의 행위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셜록의 손은 감질나게도 허리에만 맴돌고 있으니 뭔가 아쉬운 기분이 서서히 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물론 야외에서 대뜸 옷을 벗긴다거나 하는 등의 본격적인 행동(?)에 돌입하는 것은 더더욱-절대!-있어서는 안될 일이긴 했지만 마치 사탕을 깨물어먹지 못하고 핥아서만 먹고 있는 듯한 이상한 부족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셜록의 손이 바지 안으로 쑥 들어왔다.

 

*

 

 존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는 것을 흘끗 바라보며 셜록은 애무에 박차를 가했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골덴 바지 아래에 동그마니 자리한 말랑말랑한 엉덩이의 감촉이 기분좋았다. 놀랐는지 엉덩이가 움찔거리는 것을 손바닥으로 꽉 잡았다. 그러자 이것만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존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셜록, 너 정말..."

 

 성이 난 듯 한껏 사나운 눈초리를 하고 기세좋게 입을 열었던 존은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셜록은 부러 느긋하고 평온한 어조로 대꾸했다.

 

 "왜 그러나, 존? 오늘따라 이상하군."

 

 존은 이상한 건 바로 너야! 하는 의미를 듬뿍 담아 자신을 노려보았다. 그를 쏘아보는 눈빛을 가뿐히 무시하며 셜록은 꽉 쥐었던 엉덩이를 놓고 살살 쓰다듬었다. 긴장한 엉덩이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엉덩이를 맘껏 주무르고 내키는 대로 비틀자 존은 점점 심통이 난 듯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존의 기분이 영 좋지 못한 듯 보이자 셜록은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하나, 라고 생각했지만 곧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한 달 전 쯤에 있었던 일이었다. 평소와 같이 오붓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아늑한 거실에서 어찌어찌 좋은 분위기로 키스에 몰입하다가 섹스를 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놓였을 때, 존이 입술을 떼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내일 아침 일찍 직장 면접이 있는데...' 하고 운을 떼었을 때 셜록은 미련없이 손을 떼며 '그럼 그만 하지 뭐.' 하고 말했던 것이다. 그때 존은 김이 팍 샜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셜록. 남자라면 이럴 땐 한 번쯤 더 밀어붙여야지.'
 '하지만 내일 직장 면접이 있다면서. 그것도 아침 일찍.'
 '그건 그냥 튕겨본 거란 말이야!'
 '그렇지만 내 경험상 내가 하고싶은 대로 밀어붙이고 나서 자네는 항상 불평을 하던데. 허리가 아프다는 둥, 나 때문에 잠도 못자고 면접에도 늦었다는 둥...'
 '셜록,'

 

 존은 약간 수줍어하는 기색으로, 그러나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내가 자네하고 섹스하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

 

 셜록은 그런 존의 얼굴을 한참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아니. 처음에는 마다하는 기색이었지만 항문 섹스와 그에 수반하는 잡다한 절차에 익숙해지고 나서부터는 아주 좋아하는-'
 '닥쳐 셜록. 너무 멀리 나가지 말라구.'

 

 그리고 존은 셜록을 소파에 밀어 쓰러트리며 그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의 아랫도리에 자신의 아랫도리를 비비적대며,

 

 '그리고...그냥 가면 이건 어떻게 처리하려고 그래?'

 

 그 뒤는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였다.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으니만큼, 셜록은 지금 와서 애무를 그만두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니면 계속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엉덩이를 만지는 것을 그만두었다가 존이 산통을 다 깼다는 둥 불평하면...(이미 셜록은 지금 자신이 서있는 곳이 사건현장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셜록은 또다시 존의 꾸중을 듣기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손에 쥔 엉덩이는 정말 부드러웠다.
 거기까지 생각한 셜록은 존의 엉덩이 골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다물린 엉덩이 사이에 손을 억지로 비집고 넣으니 엉덩이가 더욱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셜록은 그 저항을 무시하고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약간 젖은 듯한 항문 입구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어제도 혹사당한 애널 입구가 느슨하게 풀린 채로 셜록을 맞아주었다. 존이 서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애로사항이 있기는 했지만, 셜록은 손가락을 존의 항문 안으로 넣는 데에 성공했다.
 야들한 점막이 셜록의 손가락을 따끈하게 감쌌다. 무척이나 뜨겁고 음란한 온도가 손끝에서부터 전해져왔다.

 

*

 

 사건 개요에 대한 브리핑을 끝내고 나서 셜록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손을 거두었고 존은 무척 언짢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셜록이 따라오거나 말거나 성큼성큼 앞서가는 존을 뒤따라가던 셜록은 존의 등에서 '나 화났음' 이라는 표시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셜록이 먼저 랜드로버의 운전석에 앉고 존이 뒤따라 조수석에 앉기까지만 해도 셜록은 이번에야말로 두 번째 사과를 해야 하려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이 사납게 쾅 닫히고 나서 이어진 존의 행동은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Sherlock, you son of a..."

 

 존이 셜록에게 달려들어 키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뒤로 젖힌 좌석 위로 쓰러지다시피 넘어진 채로, 영문도 모르고 한참동안 키스를 하고 나서야 존은 셜록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존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제기랄...셜록. 너 미쳤어? 대체 무슨 생각에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것도 사건 현장에서!"

 

 그는 여전히 화난 기색이었다.

 

 "이유를 말해. 하찮은 핑계라도 좋으니까 뭐라도 말해보라고."

 

 하지만 순전히 화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셜록은 느낄 수 있었다. 셜록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게 다 자네 때문이야."
 "뭐?"
 "자네가 날 그런 눈으로 바라보니까 어쩔 수 없었단 말이네!"

 

 말을 마치고 셜록은 낮게 젠장, 하고 투덜거렸다. 잠깐동안 벙쪄 있던 존이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까 셜록 네가 내 엉덩이를 난데없이 주무른게 나때문이라고?"
 "...그래."
 "내가 자네를 경탄어린...흠흠, 어쨌든 그런 눈길로 쳐다봐서?"
 "그래. 두말하게 만들지마."

 

 셜록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나자 차 안 공기가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르고 셜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랑 함께 있으면 꼭 내가 밝힘증 환자가 된 기분이라구. 난 원래 질척질척한 스킨십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인데 자네랑 함께 있으면 자꾸만..."

 

 셜록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존이 난감함과 미소가 뒤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날 만지고 싶어진다고?"
 "...그래."

 

 셜록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고백하고 난 후에 차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셜록의 무릎 위에 올라타다시피 한 존은 묘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존의 아래에 깔린 셜록은 그의 얼굴에 어린 표정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존이 가만히 셜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뭘 망설여?"

 

 셜록은 멍청하게 존을 올려다보았다. 존이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좌석 뒤로 젖혀."

 

 셜록은 그 말이 내포한 의미를 몇 초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무언지 모를 기세에 밀려 셜록이 입도 뻥긋 하지 못하고 좌석을 뒤로 젖히고 나자존은 씩 미소지으며 셜록을 뒤로 밀어 눕히고, 그 위로 올라가 점퍼를 벗어 뒷좌석으로 던지며 말했다.

 

 "차에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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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3. 02:34 from BBC Sherlock/단편

셜록존/단편

 

 

 "뽑아보게."

 

 존의 어깨 너머로 셜록이 갑자기 휴지곽을 내밀었다. 느긋하게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존이 한발 늦게 반응하며 말했다.

 

 "뭔데?"
 "일단 뽑아보라니까."

 

 두 눈 가득 궁금증을 담은 존에게 셜록이 재촉했다. 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셜록의 행동에 담긴-제 딴에는 심오하다고 주장하는-의미 따위를 짐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것을 존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속편하게 장단을 맞춰주기로 결심한 존은 집요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셜록의 시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티슈상자의 틈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에는 접힌 종이조각들이 가득 들어있었고 서로 부딪히며 종잇장 특유의 가벼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대체 이게 뭐지?
 의문이 한층 증폭되는 가운데 셜록은 존이 집어든 종잇조각을 가져가더니 그것을 펴보고선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정해졌군. '자기'야."

 

 셜록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닭살돋는 호칭에 존은 마신 것도 없는데 사레가 들릴 뻔했다. 말의 내용은 둘째치고,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나 기계적인 어투로 뱉어낼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왕 저런 소리를 입에 담을 거라면 좀더 부드럽고 다정한 어조로 말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파충류처럼 표정이 없는 셜록에게서 할리퀸 소설의 남자주인공같은 어조의 달콤한 밀어가 흘러나오는 건 그것대로 상당히 기괴할 것같았다.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도 존은 당황스러움을 얼굴에서 채 지우지 못한 채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려주겠어?"

 

 셜록은 의외로 순순히 털어놓았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관계가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난 후인데도 그 전과 비교해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의아하게 느껴지더군. 그래서 마이크로프트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했지."

 

 마이크로프트, 라고 언급하는 순간부터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셜록은 평소에는 마이크로프트라면 치를 떨 정도로 질색하면서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마이크로프트에게 의존하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을 한껏 놀려먹으며 그동안 무시당한 만큼의 보복삼아 웃음거리로 만들곤 했다. 그러면 존까지 덩달아 휘말려 피곤해지는 것은 물론이었다.
 존은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부디 틀리길 바라며 셜록의 뒷말을 재촉하듯 올려다보았다.

 

 "그랬더니 마이크로프트가 말하길 서로에 대한 호칭을 좀더 다정한 것으로 바꾸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더군."
 "그래서 그 권고에 따라 행동한 것의 결과가 '자기'인건가?"
 "그렇지. 이제 자네는 날 자기야 라고 불러야 해."

 

 뭔가 정신줄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스트랄하다는 표현이 이런 때에 적절한 것이겠지...하고 넋을 놓을 뻔했지만 존은 간신히 정줄을 잡고 셜록의 일방적인 요구에 반박했다.

 

 "잠깐, 나는 그런 낯부끄럽기 그지없는 호칭으로 자네를 부를 생각이 추호도 없는데. 그것도 제비뽑기로 뽑은 거고. 완전 되는대로 아냐?"
 "'자기'가 맘에 들지 않는 거라면 다른 호칭도 많은데."

 

 존의 불평을 약간 다른 핀트로 받아들여 이해한 것인지 셜록이 휴지곽을 집어들고 거꾸로 뒤집어 테이블 위에 탈탈 털어 안에 든 종이조각들을 쏟아냈다. 그게 아니라! 하고 대꾸하려던 존은 자신이 너무 매몰차게 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순간 멈칫했다. 이왕 장단을 맞추기로 한 김에 조금만 더 맞춰주지 뭐,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존이 당장 쓸데없는 짓 집어치우라며 셜록에게 면박을 주지 않은 이유는 대체 마이크로프트가 제안한 애칭들이라는 것들이 또 얼마나 변태적일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대한 대로,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들고 펴자마자 존의 얼굴이 꾸깃꾸깃 구겨졌다.

 

 "'달링'? 진심이야, 셜록?"
 "아 그거. 레스트레이드가 적극 추천하던데."

 

 상식인이라고 여겼던 레스트레이드마저도 이런 병신미넘치는 애칭 궐기대회 나부랭이에 동참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마 그렉과 마이크로프트가 눈앞에서 서로를 달링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목격했다면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욕과 독설을 일삼았을 셜록은 막상 자기가 그런 애칭을 쓴다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는 듯했다.
 참 낯짝도 두껍지, 하고 혀를 차며 다른 종이조각들을 들추어보던 존은 점점 가관이 되어가는 애칭들에 눈살을 찌푸렸다.

 

 "허니비, 곰탱이, 애기, 꿀빵...대체 누가 이런...누가 이런 걸 주워섬긴..."
 "마이크로프트와 레스트레이드 뿐아니라 앤더슨과 도노반, 몰리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지. 심지어 안시아도 거들더군."

 

 얼굴이 빨개진 채로 말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더듬거리는 존을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셜록이 들고 있던 종이조각 하나를 건넸다.

 

 "참고로 내가 적은 것도 몇 개 있다네."

 

 셜록이 고안한 애칭이라면 그나마 좀 덜 오글거리려나, 싶어 받아든 종잇조각에는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것들이 적혀있었다.

 

 "'오빠'?"

 

 존은 온몸으로 너 미쳤어, 셜록? 하고 외치고 있었다. 존의 격한 거부반응에 셜록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주일 전에 침실에서는 날 잘도 그렇게 불렀잖은가."
 "...이잇! 그거야 네가 강요했기 때문이잖아! 너...넣어주지 않겠다고 별 말도 안되는 협박을 늘어놓으면서!"

 

 얼굴을 붉히면서 언성을 높이는 존에게 셜록은 얄미우리만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말투로 대답했다.

 

 "그리고 자네는 자네의 말마따나 말도 안되는 그 협박에 굴복했지. 그래서 마음에 들어할 줄 알았는데."
 "마음에 들기는 개뿔!"

 

 대화는 점점 수렁으로 빨려들어갔다.

 

 "'암퇘지'? 이건 도대체 누가 쓴 거야? 미친 거야?"
 "응? 이건 누가 쓴 건지 기억이 안 나는걸. 야드의 직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열성적으로 적어서 협조해주었기 때문에 누가 뭘 썼는지는 잘 모르겠군. 그런데 이건 자네가 날 부를 때 적절한 호칭은 아닌 것 같군. 그 반대라면 모를까."
 "뭣이!"

 

 그럼 난 셜록을 수퇘지라고 불러야 하는건가...하고 멍하니 생각하던 존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이러면 안돼, 존. 이런 정신나간 짓거리에 동참해서는 안된다고! 비록 상식과는 전혀 거리가 먼 셜록과 사귀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식인 포지션을 포기하기는 싫었다.
 그나저나 야드의 직원들도 다 안다 이거지. 앞으로 사건 자문에 동행할 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개망신이 따로 없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며 힙없이 종잇조각을 펴던 존이 동작을 멈추었다.

 

 <여보>

 

 이거 설마 간접적인 청혼은 아니겠지... 존은 얼굴이 다시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얼른 그 종이조각을 다시 접어 쪽지 무더기 속으로 던졌다. 셜록은 혼자 울그락불그락 하고 있는 존을 흘끗 보더니 다시 쪽지에 쓰인 애칭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집중했다.
 존이 왜 가만히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한 그 모습에 존은 약간 안심하면서도 어딘지 아주 아주 아주 약간은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때문에 약간은 뾰족해진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애칭 하나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법석이야? 참나..."
 "아까도 말했잖나. 어째 연인 관계인데도 변한 게 하나 없는 것같단 말이야."

 

 왠지 그의 목소리에 투정기가 어려 있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존은 의아해하며 대꾸했다.

 

 "변한게 없긴 뭐가 없어?"
 "그럼 자네가 말해봐. 우리의 현 상태가 섹스파트너에 가까운지 연인에 가까운지."

 

 언뜻 들으면 시비조로 착각할 수도 있는 퉁명스런 어조에 발끈하려던 존이었지만 셜록의 말에 내포된 진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셜록이 연애에 관해서 완전히 무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나름대로는 생각이 많은 것같았다. 무언가 가시적인 증표가 필요하다는 맥락에서 생각해낸 고육지책이겠지 싶었다. 존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서로 사랑하잖아."

 

 셜록의 창백한 뺨이 미미하게 홍조를 띠는 것을 보고 존도 따라서 미소지었다. 흠흠, 하고 가볍게 헛기침을 하던 셜록은 자세를 고쳐 앉기도 하고 어깨를 들썩거리기도 하고 손가락을 가만 놔두질 못하고 꿈질꿈질거리더니 영 간지럽다는 표정을 억누르며 테이블 위에 온통 흩뿌려져있는 종잇조각들을 주섬주섬 치우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도 치우네, 하고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존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근데 어젠가 그저껜가 티슈 새로 갖다놓았던거로 기억하는데. 벌써 다 썼어?"

 

 질문을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비참했다. 사나이 존 왓슨, 이제 주부 다 됐구나...
 한편 셜록은 한참 머뭇거리다 질문에 대답했다.

 

 "다 썼어."
 "뭐하느라?"

 

 존이 물어오는 것에 셜록은 눈썹을 한 번 까딱 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 거 없네."

 

 그답지않게 명확한 대답을 얼버무리는 뉘앙스에서 존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다음 순간 존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실마리 비슷한 것이 스쳐지나갔다. 그건 바로 존이 단기근무로 나가는 병원에서의 야근때문에 셜록이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금욕기간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존의 안면근육이 묘하게 씰룩거리는 것을 몰래 뜯어보던 셜록이 조그맣게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는 바가 맞을 거야."

 

 셜록은 존의 얼굴이 다시 시뻘개지도록 내버려두고 얼른 거실을 나섰다. 그래! 항상 부끄러움은 존 왓슨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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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셜존짐]유예

2013. 12. 13. 02:32 from BBC Sherlock/단편

셜존짐/멋진징조들크로스오버/천사시리즈

 

 

"...이 조그만 흠이, 글쎄 그걸 흠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름다움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소만, 하여튼 그것이 이 지상의 불완전성의 상징처럼 나에게 충격을 주는구려."
...(중략)...
"...지금의 저처럼 어중간한 정신적 성숙 단계에 이른 사람들에게 삶은 슬픈 소유물에 지나지 않아요. 차라리 제가 더 약하거나 맹목적이라면 삶은 행복일 수 있겠죠. 제가 만일 더 강하다면 삶은 행복일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 저의 상태를 보면 죽기에 가장 알맞는 것같아요."
"당신은 죽음을 맛볼 필요가 없는 천국에나 어울리는 사람이오!"

-나다니엘 호손, <반점> 에서 발췌

 

 

느긋한 오후였다. 방 안은 조용했고, 창가에서는 부드러운 햇빛이 들이치고 있었다. 이따금 산들바람이 들이치며 후텁지근한 공기를 몰아낼 뿐.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존은 조그만 손으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아침에 끓였던 차는 식은 지 오래였으나, 정오를 넘긴 시간에는 오히려 미지근한 찻물이 더 개운한 감이 있었다. 거리낌없이 미지근한 차를 호로록 삼키며 존은 셜록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셜록은 오랜만에 잠을 자고 있었다. 존의 체구에 딱 맞는 자그마한 사이즈의 침대에 그렇지 않아도 키가 큰 셜록이 몸을 오그리고 누워 있는 모습은 퍽 우스웠다. 게다가 등 뒤의 날개뼈가 있어야 할 부분에서는 정말로 날개가 뻗어나와서 마치 그것이 별개의 생물이라도 되는 듯이 까딱거리고 있었다.
 항상 의식적으로 날개를 접고 있던 셜록이 날개를 편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차피 일반적인 인간들은 천사와 악마의 날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펴고 다녀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때마침 셜록의 곁에는 그 날개를 꿰뚫어볼 수 있는 존이 있었기 때문에 셜록은 존을 위해 상시 날개를 숨긴 채로 다니곤 했다.
 그러나 잠이 들고 나니 그런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도 무색하게 날개는 오랜만에 숨통이 트인다는 듯이 제멋대로 뻗어나와 얼마 없는 바닥의 공간을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셜록의 날개 깃털은 꽤 깔끔하게 정리된 편이었지만 방바닥의 자리를 꾸역꾸역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꼭 깃털 뭉치가 한 무더기 쌓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존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조용히 덮고 셜록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존이 침대 귀퉁이에 걸터앉자 이미 과중한 무게를 이고 있던 침대가 작게 삐걱거렸다. 존은 낡은 매트리스의 출렁임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셜록의 호흡이 고른 것을 확인한 후 펼쳐진 채로 늘어져 있는 셜록의 날개로 손을 뻗었다. 무방비하게 활짝 펴진 모양으로 바닥까지 점령하고 있던 검은 날개는 존의 손길이 와닿자 놀란 토끼처럼 퍼덕거리다가 이내 얌전하게 존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존은 손가락으로 빗질을 하는 것처럼 셜록의 깃털을 결에 맞추어 쓰다듬어주었다. 날개는 고로롱거리는 고양이처럼 종종 움찔움찔거리며 존의 접촉을 기분좋게 음미했다.
 그렇게 한가로이 셜록의 날개를 만지작거리던 존은 문득 무언가가 자신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을 발견했다. 다 자란 깃털 아래에 막 새로 돋아올라오눈 어린 깃털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뿐이었다면 딱히 시선이 갈 이유도 없었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띤 색깔이었다.
 흰색.
 타락 천사의 날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고, 있어서도 안될 순백의 흰 깃털이 새까만 깃털들 사이에서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존의 얼굴에서는 천천히 미소가 사라졌다.
 착잡한 표정으로 그 깃털을 응시하던 존의 머릿속에서는 얼마 전의 만남이 떠오르고 있었다.

 

*

 

 "난 셜록의 친구야."

 

 남자는 존의 '누구세요?'라는 질문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마치 너무도 익숙해진 거짓말을 되짚어 재생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존이 대답하지 않고 남자를 빤히 쳐다보자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변명조로 말했다.

 

 "그래그래, 사실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지. 하지만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구."

 

 간접적으로 처음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인정해버리고 만 사내는, 그렇다고 해서 인상을 찌푸린다던가 하는 초보적인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 존이 의심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준비된 또다른 거짓말을 뻔뻔스레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쉽사리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거리껴하지도 않는 남자. 그에게서는 처음부터 줄곧 꺼림칙한 분위기가 풍겨나왔고, 존은 그것을 피부로 확실히 느끼고 있었으며, 눈 앞의 남자도 존이 받은 인상을 눈치챈 것같았다.
 남자는 미소지으며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 오늘 우리가 이렇게 굳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이유는 딱히 너한테 위해를 끼치려고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구. 네가 셜록과 각별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깐."

 

 셜록과 각별하지 않았다면 위해를 끼치고 남았을 것이라는 말을 돌려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존이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로 서있자 남자는 곧장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너 그건 알고 있니."

"뭘 말이예요?"

 

 존이 그제야 입을 열어 묻자 남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유."

 

 존의 눈이 커졌다. 남자는 부러 깜짝 놀란 체를 하며 말했다.

 

 "몰랐구나. 너에 대해 오해할 뻔했네. 난 네가 일부러 셜록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줄로만 알았는데."
 "제가 왜 셜록을 붙잡는다는 거죠? 셜록은 자기가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요."
 "그거야, 셜록은 말이지...너도 알다시피, 냉정하고 감수성따위는 약에 쓸래도 없을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속내는 그 누구보다도 여리잖아. 웬만한 낭만주의자보다도 인연에 얽매이는게 그녀석인걸."

 

 남자는 한 박자 말을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자기가 널 떠나면 금방 죽을 걸 아는데, 셜록이 널 두고 가버릴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마음착한 녀석이 말이야, 하고 칭찬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뉘앙스로 남자가 중얼거리는 동안 존은 놀란 마음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입술이 저도 모르게 떨려왔다. 셜록이 자신의 옆에 머물렀기에, 금방이라도 세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자신의 몸 상태가 호전되었던 건가. 그래서였나. 이제야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가 명쾌하게 풀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존의 머릿속 생각의 흐름은 더욱 엉켜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셜록을 보내주어야 하나?
 하지만...
 살고 싶어.
 셜록을 끝내 붙들어놓더라도, 더 오래오래 살고 싶어.
 셜록과 함께 살아있고 싶어...
 존의 마음 속에서 휘돌아 맴도는 생각의 끈을 잡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입을 열었다.

 

 "셜록이 네 곁에 남아주길 원할 거야. 네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지."

 

 남자는 위로하듯 조곤조곤 말했다.

 

 "물론 셜록도 그걸 싫어하진 않을 거고. 어차피 셜록은 영겁의 시간을 가진 천사이기 때문에 몇십년 정도를 너에게 할애하는 정도는 유희에 불과할테니까."

 

 유희, 라는 말이 아프게 존을 찔렀다. 남자가 말하는 대로, 셜록이 자신의 곁에 머물러주는 것은 단시간의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는 일일까.
 존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지켜보며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가 본래 수명보다 오래 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남자와 존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눈 하나 깜박 하지 않고 말했다.

 

 "누군가가 너를 대신해서 죽는 거야."

 

 존의 눈빛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딘가의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확실한 건,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그 사람의 수명은 일분 일초 깎이고 있다는 거지. 본디 누려야 할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너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셜록은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을 위해 돌아가야 할 수도꼭지를 너한테 억지로 돌리고 있는거지. 네가 살아나가는 만큼 그 사람은 죽어가고 있는거고."

 

 고작 열 살을 겨우 넘긴 소년에게 자신의 존재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발판삼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몹시도 잔혹한 일이었다. 물론 남자는 고의적으로 그 점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눈 앞에서 생명체가 자신의 하루를 연장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꼴을 구경하는 것만한 재미는 없을 것이라고, 모리어티는 생각했다.

 하지만 속마음과는 정반대로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어내며 모리어티는 혼란에 빠져든 소년을 다독였다.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주렴."

 

 속이 시원하도록 낄낄거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모리어티는 다정하게 말했다.

 

 "아직 어린 너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세상은 세심한 계획에 의거해서 조밀하게 짜여진 채로 돌아가는 거란다. 천사도 악마도 세계의 안정을 위해서 바삐 일하는 거고. 한 명이라도 씨실과 날실의 자리에서 엇나가게 되면 모두의 삶이 위태로워져."

 

 모리어티는 부드럽게 선고했다.

 

 "그게 운명의 섭리라는 거야."

 

 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를 위해서라고 생각해."

 

 모리어티의 말이 끝나고서도 존은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지루해진 모리어티가 그럼 이만, 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존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언제죠?"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질문이었으나 모리어티는 금세 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3개월 정도, 유예를 줄까."
 "아뇨."

 

 존이 빠르게 말했다.

 

 "일주일. 그정도면 충분해요."

 

 여기에는 모리어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겨우 일주일? 네 생을 마감하는 시간으로서 부족하지 않겠어?"

 

 존이 쓸쓸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전 어려요. 제가 죽는다고 해봤자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여파도 얼마 없을 거고요. 저보다 중요한 사람들도 자기에게 얼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고 죽어가잖아요? 일주일이면...괜찮은 시간이죠."

 

 존이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저는 그래도 준비할 시간이라도 있으니까...축복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눈 앞에서 한없이 선한 고백을 하는 소년에게야, 모리어티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아무리 끔찍한 악이라도 천연의 순수 앞에서는 그 위명을 잃는 법. 모리어티도 마찬가지였다.
 잠깐동안 말을 잃고 소년을 바라보던 모리어티는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그럼, 하고 짧게 소년을 일별하고 날아가버렸다. 더이상 그 선량함을 눈앞에 두고 견뎌내기 힘들다는 듯이, 모리어티는 도망치고 만 것이다.

 

*

 

 그것이 나흘 전이었다.
 한참동안 날개깃을 만지작거리던 존은 갓 머리를 내민 하얀 깃털을 조심스럽게 뽑아냈다. 덜 여물어 말랑한 깃털은 생각보다 쉽게 뽑혀져나왔다. 깃털이 뽑히고 남은 구멍은 발갛게 물들었을 뿐이었다.
 존은 다시 주위의 검정 깃털을 모아 어린 깃털이 뽑혀나온 자리를 감추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깃털이 가지런하게 덮힌 그 모습을 보고, 존은 결국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셜록의 날개에 몸을 엎드렸다. 혹시라도 셜록이 잠에서 깨어날세라 조용히 숨죽여 우는 존을 위로하는 것처럼 날개가 푹신하게 존을 감쌌다. 그 따스한 느낌에 존의 눈에선 더욱 눈물이 흘러나왔다.

 

 울다 지친 존이 겨우 잠이 들고 나서야 셜록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날개에 푹 파묻힌 채로 불쌍하게 잠이 든 어린 소년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셜록은, 존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를 들어올려 침대에 누였다.
 서툴게 이불을 끌어올려 소년의 몸을 덮고, 셜록은 침대맡에 서서 조용히 존을 응시했다. 잠시 후 셜록은 결심을 한듯 입을 굳게 다물고 창가에 섰다. 창틀을 넘어가 위태하게 올라선 셜록은 날개를 활짝 펴고 몇 번 펄럭이다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아니, 모리어티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존과의 일대일 대면에서 꼴사납게 도망치는 꼴을 보이고 만 모리어티는 고작 열 살을 겨우 넘긴 꼬맹이에게 패퇴한 것과 같은 충격에 빠져 혹시라도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지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감시를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전혀 그답지 않은 주의력과 세심함이라고, 모리어티라는 사신의 진면목을 아는 악마라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그래, 전혀 나답지 않은 일이지.'

 

 젠장, 하고 입술을 깨물던 모리어티는 발로 허공을 몇 번 짓이겼다. 겨우 꼬마 따위에게 밀리고 만 것은 분명히 자신의 실책이었다. 일개 인간 아이가 그토록 착한 심성을 갖고 있으리라고 어느 악마가 감히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존에게 당하고 만 모리어티는 한 가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존의 영혼은 이미 천사의 반열에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순수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셜록을 만남으로써 그 승격이 늦추어졌다. 위편에서 그토록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는 희생심과 삶에 대한 적은 미련에도 불구하고 셜록의 존재가 곁에 있음으로써 존을 지상에 붙들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미녀의 희고 고운 뺨에 자리한 손바닥 모양의 붉은 반점처럼.
 존에게는 그 아이의 존재가 지속되는 것의 책임이 오로지 존 자신의 것으로만 여겨지도록 말해놓았지만, 그 점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저 셜록을 다른 곳으로 따돌리고 나서 영혼을 데려가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담을 수도 없는 것이니 아쉬운 입맛을 다실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셜록을 바라보았다. 셜록은 분명 그의 형에게로 가고 있는 것이겠지. 곤란활 때마다 형에게 달려가는 것은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로서는 다른 수가 없을 테니까 한 수 물러주는 셈 치고 내버려두고 있다. 따지고 보면, 셜록의 의외로 약한 면모를 목격하면서 모리어티의 방심이 초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자신과 만난 이후로 암중으로 갖은 노력을 하고 실패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지나치게 마음이 풀어졌던 것이다. 적그리스도에게도 뒤지지 않는 위엄과 그동안 인간들을 상대로 수많은 승리를 거둔 성과에 낙관한 나머지 오만한 태도를 견지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셜록으로 하여금 최고의 패를 뽑아내도록 한 것.
 지나치게 게임을 스릴있게 끌어나가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자충수를 두고 만 것이 아닐까.
 패를 보여주고 만 도박사처럼 전전긍긍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낯설 뿐 아니라 치욕적이었다. 스스로에게 들으라는 듯이 혀를 요란하게 차던 모리어티는 그러나 자신이 띄운 승부수를 믿기로 했다.
 모리어티는 셜록이 지옥으로 떠난 것을 확인하고 존의 집 창가로 다가갔다. 눈이 부어오른 채로 새근새근 잘도 자는 아이. 숨을 쉴 때마다 가냘프게 들썩거리는 여린 어깨. 당장에라도 저 아이의 얇디얇은 육체의 덧없는 껍데기를 찢어내면 그 속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을 영혼을 그 근원의 정수까지 남김없이 뽑아내고 싶다는 유혹에 몸서리가 쳐졌다. 얼마나 맛있을까! 어리고 야들야들한 소년의 천연스럽기 그지없는 선량한 영혼의 맛이란! 생각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하지만 마지막 자존심이 그를 말렸다. 도둑놈도 아니고 자는 사람의 영혼을 몰래 도적질하는 건 영 모리어티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궁지에 몰리더라도 말이다.
 과연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을 도울 수 있을까?
 천사라면 모를까, 같이 타락한 처지의 악마라면 승산은 이쪽에 있다. 비록 위세가 당당한 7대 악마의 수좌에 있다고는 하나 그림 리퍼인 자신에게 우선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리어티는 그제야 안심하고 키들키들 웃었다.
 그래, 이 승부의 승리는 자신의 것이다.
 상대가 고작 악마인 이상.
 천사라면 모를까...
 후후 웃던 모리어티는 조용히 마음 속으로 축배를 들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승리의 예감을 즐겼다.

 

 

*

 

 안시아가 문을 두들겼다.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아니,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이라고 해도 좋았다.
 잠시 기다리던 안시아는 망설임없이 곧장 문을 박차고 열었다.

 

 "바알제불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침대에 번데기마냥 웅크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덩어리에서 한동안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죽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다가 겨우 음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들렸다.

 

 "돌려보내."

 

 자고 있는 거 안 보이냐...등등의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안시아는 눈썹 하나 까딱 안하고 덩어리에서 흘러나오는 불평불만이 끝나길 기다렸다. 겨우 중얼거림이 잦아들자 안시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돌려보내죠."

 

 곧바로 돌아서는 안시아의 뒤로 덩어리가 멈칫했다.

 

 "뭔가 이상한데."
 "뭐가 말이십니까?"
 "네가 순순히 방문객을 돌려보낼리가 없는데 말이지."

 

 안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끙끙대던 덩어리가 뒤척이다가 물었다.

 

 "누군데?"

 

 돌아선 안시아가 아무런 감정의 기복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시던 분이요."

 

 그 대답을 곱씹던 덩어리가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갑자기 꿈틀꿈틀거리더니 인간의 형태로 변했다. 적갈색의 머리를 뒤로 넘기고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중년의 남자로 탈바꿈한 남자, 마이크로프트가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진작에 말했어야지!"

 

 당장에 뛰쳐나가려는 마이크로프트를 안시아가 제지했다.

 

 "왜!"
 "옷은 입고 가셔야죠. 또 동생분께 한소리 들으실려구요?"

 

 막 인간의 모습을 취한 마이크로프트가 홀딱 벗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시아의 침착한 제지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로프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녀석이 제발로 들어올리가 없는데 이렇게 순순히 지옥으로 돌아온 걸 보면 뻔한게 아니겠나? 뭔가 거리끼는 게 있거나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지."

 

 형의 맨몸을 보는 것쯤이야 충분히 참아줘야지 않겠어! 하고 개소리를 지껄이던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기다리는 곳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뒤에서 안시아가 무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것쯤은 덤이다.

 

*

 

 "오랜만이구나 동생아!"

 

 응접실에 앉아있던 셜록은 요란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질색하며 쏘아붙이기를 기대하며 만면에 웃음을 띤 채로 셜록을 쳐다보았으나 셜록은 예상외로 눈 하나 깜짝 않고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야 형. 어서 와서 앉지 그래."

 

 아주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자리에 앉으라는 둥 이야기를 해대는 셜록을 보고 실망한 마이크로프트는 쳇 하고 혀를 차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마이크로프트의 몸 위에 한순간에 옷이 나타났다. 깔끔한 양복을 갖춰입은 마이크로프트는 투덜거리며 셜록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반응이 시원찮구나. 재미없어."
 "별로. 웬 천사랑 비역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내게 들켰을 때 이미 형의 알몸을 지겹도록 봐서 말이야."

 

 셜록의 지적에 움찔하던 마이크로프트가 항변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사는 치르지도 못했단다! 갑자기 밀고들어온 너 때문에!"
 "아 그러셔."
"그리고 그 천사는 내 눈앞에서 쪼르라니 도망가버렸지! 맛있게 먹어치우기 직전이었는데 말이다. 위쪽에서 도통 얼굴을 보일 기미도 없고..."

 "그렇게 아쉬워?"

 "그럼 아쉽고 말고."


 "그럼 내가 사과할 겸, 그 천사랑 다시 얼굴을 마주할 기회를 주지."

 

 셜록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흠칫 하며 팔짱을 꼈다. 응접실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조용히 머리를 굴리던 마이크로프트가 생각을 정리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네가 정말 나 잘되라고 그런 일을 제안할 성격이 아니란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셜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셜록을 바라보던 마이크로프트가 질문했다.

 

 "무슨 일인데?"
 "웬 악마가 인간의 영혼을 탐내고 있거든."

 

 마이크로프트는 부러 하품을 하며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야 메피스토펠레스 이전에도 숱하게 있었던 일이지. 위쪽에서는 엄금하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천사들의 눈을 피해 인간의 영혼 하나쯤 슬쩍하는 건 일도 아닌데-아니, 거의 본업이라고 봐도 무방하지-왜 하필 네가 나서는 거냐?"

 

 셜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로 마이크로프트를 응시하는 셜록을 보고 마이크로프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하긴 네가 나한테까지 찾아온 이유가 그것때문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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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차tea."

 

 문이 삐걱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셜록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셜록이 존의 집에 거처한지도-달리 말하자면, 백수마냥 눌러붙은지도 이제 근 2년째였다. 셜록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음식물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지만 차만큼은 상당히 즐기는 편이었기 때문에 애꿎은 존을 전용 티포트마냥 부려먹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토록 시켜댄 덕분에 존이 차를 끓이는 솜씨는 나날이 일취월장해서, 이제는 존이 탄 차가 아니면 도저히 입에 맞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때문에 셜록은 존이 있든 없든 차를 타달라고 땡깡을 부려대기 일쑤였고, 존은 '제발 나 없을 땐 셜록이 타 마시란 말이예요!' '손이 없어요 발이 없어요!'하고 불평하면서도 꼬박꼬박 셜록의 차를 타주는, 그런 평온하기 그지없는 생활이 지속되고 있었다.

 

 "존-"

 

 오늘따라 이상하게 대꾸 한 마디 없는 존에게 셜록이 다시 한번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재촉하려는 찰나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문틈을 파고들어오는 가느다랗고 음습한 한기처럼 소름끼치는 그 무엇.
 그때 열린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순간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안온한 기운이 삽시간에 밀려나고 뼛골이 시려오는 한기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그와 동시에 여태까지 침대에서 뒹굴고 있던 셜록은 오후 늦게까지 빈둥대고 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렵하게 몸을 일으켰다. 마치 적의 침입을 알아차린 고양이가 털을 세우고 가르랑거리는 것처럼, 셜록은 아까까지와 다르게 똑바른 자세로 일어나 뒤로 천천히 돌아섰다.

 

 "누구지?"

 

 차분한 목소리가 허공을 때렸다. 어느새 방 안의 공기를 장악한 채로 문가에 조용히 서 있던 남자는 셜록의 물음에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며 자못 정중한 태도로 인사했다.

 

 "모리어티라고 해. 반가워!"

 

 옷차림에 비하자면 무척이나 경망스러운 목소리였다. 단정한 빛깔의 은회색 수트를 깔끔하게 걸치고 머리를 넘긴 남자는 검은 눈으로 셜록을 응시하며 기분나쁘게 킥킥거렸다. 차림새는 몹시 우아한 데 비해 입가엔 비실대는 기묘한 웃음이 맺혀있는 그 간극에 묘하게 기분이 나빠진 셜록은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려 했으나 냉정하게 표정을 관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아아, 이야기나 좀 할까 하고."
 "난 그쪽과 할 이야기가 없어."

 

 셜록이 차갑게 대꾸하며 축객령을 내리려는 순간 모리어티가 눈을 위험하게 번득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난 할 이야기가 있는걸?"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강조되어 울려퍼지는 것같은 느낌에 셜록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의 이름을 모리어티라고 밝힌 남자는 셜록의 반응을 지켜보겠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웃고 있었다. 둘 사이에 침묵과 함께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윽고 셜록이 말했다.

 

 "이야기를 듣는 정도라면 거절할 이유는 없지."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깐."

 

 히죽대는 모리어티에게 셜록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족은 빼고 용건만 이야기하고 당장 나가도록 해."

 

 모리어티는 놀랐다는 듯이 눈을 깜박거리더니 과장된 제스처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워, 워, 워우. 사나우셔라. 저기, 너무한거 아냐? 그쪽은 나한테 고맙다고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인데, 조금이라도 상냥하게 굴어보라구."

 

 셜록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지?"

 

 모리어티가 킬킬 웃더니 속삭였다.

 

 "마이크로프트가 이제까지 널 내버려둔 거, 아니 찾아내지 못한 거 말이야, 우연이라고 생각해?"
 "..."

 

 이제는 셜록이 놀랄 차례였다. 애써 동요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저쪽은 이미 셜록이 자신의 마이크로프트에 대한 언급 때문에 당황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표정을 숨겨보았자 발악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모리어티는 셜록을 향해 즐겁다는 듯 미소지으며 약을 올리듯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손님에 대한 예의를 갖출 생각이 들어?"

 

 예를 들며 의자를 갖춘다던가, 하고 얄밉게 덧붙이는 그에게 셜록은 마음대로 하시지, 라고 말하며 그 자신도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았다.
 의자에 앉은 모리어티는 다리를 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때 널 처음 보고 깜짝 놀랐지 뭐야. 넌 그때 이 집의 소년과 환담을 나누고 있어서 몰랐겠지만 말이야."

 

 그때?
 모리어티가 말하는 그때가 언제인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셜록은 일단 잠자코 듣고 있기로 했다. 마음내키는 대로 떠들어대는 것을 참고 봐주는 것은 불쾌한 일임에 틀림없었지만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휘둘리는 꼴을 보이는 것은 더한 치욕일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동생이 내 앞에 나타나다니! 생각도 못했지. 그 내로라하는 악마의 동생이 어정쩡한 반푼이 천사인 것도 모자라서 겨우 타락천사 하나한테 어쩔 줄 모르고 휘둘린다는게 인상깊어서인지 언뜻 수배서만 본 것뿐인데도 바로 알겠더라고."

 

 어정쩡, 반푼이...물론, 일부러 도발하기 위해 고른 단어가 분명했다. 그는 대놓고 셜록의 표정을 관찰하며 보란 듯이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의혹은 확실하게 판명되었다.
 셜록은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 위를 몇 번 톡톡 소리가 나게 두들기고서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뭘 말하고 싶은거지? 내가 마이크로프트의 동생이라는 점에 대해서 토론하고 싶은 건 아닐테고."
 "물론 아니지! 사실...부탁이 있거든."

 

 셜록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부탁이라. 네가 내 소재를 마이크로프트에게 알리지 않은 데에 대한 보답을 하라는 뜻인가?"
 "그렇게 받아들여도 무리는 아니지. 그렇지만 여기엔 네가 아직 모르는 뒷사정이 있다고. 그 점에 대해 미리 밝혀도 될까?"
 "빨리 해Make it quick."

 

 본론으로 쉽사리 들어가지 않고 미적대는 모리어티의 말에 노골적으로 피로한 기색을 보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셜록을 바라보며 모리어티가 미소지었다.

 

 "네가 애지중지하는 그 꼬마에 대한 이야기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듣는게 좋을 걸."
 "존?"

 

 셜록은 부러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키워드를 던진다고 해서 바로바로 반응을 보이는 것만큼 우스워 보이는 일도 없을테니까, 이를테면 페이크를 친 셈이었다. 하지만 모리어티는 아랑곳하는 것같지 않았다.

 

 "그래. 네가 그토록 아끼는 선량하고 순수한 소년, 존 해미시 왓슨 말이야."

 

 셜록과 모리어티의 시선이 마주쳤다. 강하게 마주닿은 시선이 날카롭게 서로를 겨누었다. 모리어티는 셜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네가 그 소년과 첫 대면하던 날, 나는 그 소년의 영혼을 수확하기 위해 이 집에 도착해 있었지. 그 귀여운 소년은 말이지, 그때 몹시도 절망에 빠져있었거든. 너도 들었겠지만, 도무지 공감할 수는 없는 하고 많은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말이야..."

 

 모리어티가 뒷말을 흐리는 사이, 셜록이 등을 곧게 펴며 끼어들었다.

 

 "그 애의 영혼을 수확한다니? 그 앤 아직 죽기엔 한참 멀었어."
 "모르는 소리 마."

 

 모리어티의 얼굴에 더욱 진한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일부러 지어낸 안면 근육의 그로테스크한 굴곡에 더 가까웠다.

 

 "너도 몰랐구나? 그 앤 말이지, 가변 수명을 갖고 있더라고."

 

 셜록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아주 잠깐의 정적 후에 셜록이 곧장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가변적 수명이란 건 몹시 드물지. 그림 리퍼Grim Reaper 노릇을 꽤 오래 해왔던 나로서도 직접 접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게다가 그 애에겐 더욱 놀라운 점이 있더라고!"

 

 모리어티가 아리아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듯 외쳤다.

 

 "희망을 갖고 있으면 그 앤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는 거야!"

 

 웃기지? 그따위 희망이 뭐라고-하고 모리어티가 키들키들 웃었다. 셜록이 할 말을 잃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금세 웃기를 그친 모리어티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절망하게 되면, 그만큼 죽음의 시간이 가까워지지. 2년 전 그 날이 바로 그런 경우였고. 거기다가 불치병까지 지니고 있으니, 그때야말로 그 애의 영혼을 수확하기에 딱 적기였는데 말이지..."

 

 아쉬운 듯 뒷말을 흐리는 모리어티에게 정신을 차린 셜록이 물었다.

 

 "병이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병세가 깊어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잠복기로 평생 유지될 줄 알았지...그것까지 의지의 영역으로 미룰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고? 그건...!"

 

 모리어티가 첨언했다.

 

 "의지가 아니라 희망이라고 하더군."

 

 입술을 파들파들 떠는 셜록에게 모리어티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당황해도 나무라지 않아. 비웃지도 않을게. 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놀라서 어쩔 줄 몰랐으니까."

 

 모리어티가 말을 마친 후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셜록은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해주는 이유가 뭐지?"
 "이유? 아, 그거야,"

 

 모리어티가 활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애의 영혼을 내가 먹을 수 있게 협조해달라고."

 

 셜록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꼴사나운 표정으로 모리어티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간신히 제정신이 든 셜록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마!"

"그렇지 않아, 셜록.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니라고. 애초에 그 먹음직스런 영혼에 눈독을 들인 것도 내가 먼저고, 따지고 보면 네가 교활하게 가로채간 거나 다름없지. 게다가...지금 그 애가 그 몸을 하고도 계속해서 살아나가는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 응?"

 

 일부러 잠깐 뜸을 들인 후 모리어티가 천천히 말했다.

 

 "바로 너. 네가 그 원인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나는 그때 그 애의 영혼을 무사히 수확해서 돌아갔을테고. 너는 너대로 네 갈 길을 갔겠지. 그 애는 운명의 흐름에 따른 평온한 안식으로 회귀했을 거고 말이야."

 

 느릿한 속삭임 끝에 모리어티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나는 네가 금방 그 애한테 질려서 떠날 줄 알았어. 아무리 봐도 재미라곤 없는 애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네가 떠나는 대로 그 애가 다시 절망에 빠지면 적당히 영혼을 데려가려고 했단 말이지. 그런데 2년씩이나 버티고 있어도 너는 좀처럼 떠날 기미도 안 보이고, 그 애는 너한테 매달려서 잘만 살아가고 있고 말이야. 이건 정말 내 계산 밖이었다구. 알아? 이거 칭찬이다? 넌 정말 대단해. 이 나를 몸소 나서게 하다니."
 "참을성이 부족한 모양이군. 네가 나서지만 않았어도 난 아마 내년 즈음이면 존과 헤어졌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 얘기를 듣고도 내가 존을 떠날 거라고 생각하나?"
 "미안하지만 2년도 충분히 길었어. 물론 난 참을성이 많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이 촌구석에 박혀서 지겹게 너희가 노닥거리는 꼴만 엿보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 내 성미하고는 맞지 않는다구."
 "그럼 포기하던가."
 "기세가 좋은걸. 그치만,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네가 원하는 방향대로 상황이 진척될 거라는 기대는 버리는 게 좋아."

 

 빠른 공방. 모리어티가 무슨 이유로 그렇게 자신감에 차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셜록이 말없이 모리어티를 바라보자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내년이 아마 끝이 될 거야."

 

 모리어티가 셜록에게 조근조근 말했다.

 

 "내가 직접 명부에 가서 문의했으니까 확실해. 아니, 정확히는 내가 건의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 인간 따위가 몇십년이나 되는 기간을 희망 따위로 좌우할 수는 없는 거라고, 인류 전체에 적용되는 시간축에도 영향을 미칠 거라고 했더니 흔쾌히 조정해주더군?"

 

 셜록이 벌떡 일어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왜 그 사실을 내게 말해주는 거지?"

 

 부들부들 떠는 셜록의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모리어티가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았다. 양복 바짓단이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를 바로잡은 모리어티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그렇게 말한 모리어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느긋하게 구김이 간 재킷의 매무새를 다듬고, 아랫단추를 채운다. 셜록은 분노에 찬 눈길을 모리어티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모리어티는 온몸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그 시선을 즐기며 일부러 구둣발 소리를 선명하게 내면서 점차 셜록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둘의 거리가 다음 순간 0으로 수렴했다.

 모리어티가 셜록의 귓가에 대고 입술을 움직였다.

 

 "네가 그 애를 살린답시고 발버둥치는 꼴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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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존짐/멋진징조들크로스오버/천사시리즈

 

*본편에서 악마, 타락천사, 사신은 혼용해서 쓰이는 동일한 개념입니다.

 

 

 "...천사님?"

 

 파란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코를 훌쩍거리며 중얼거리는 소년에게 셜록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천사 좋아하네."

 

 차가운 대답에 놀랐는지 소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셜록도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성격이 개차반인 그로서도 생판 처음 보는 꼬마아이에게 가차없이 비꼬아댄 것은 너무했다고 여긴 것인지 답지않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그것도 잠시, 소년에게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딸꾹!"

 

 어찌나 놀랐는지 딸꾹질을 하기 시작한 소년은 막상 딸꾹질을 하는 자신이 더 깜짝 놀랐다는 것처럼 눈이 왕방울만해져서 셜록을 올려다보았다. 탁한 금발이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를 최대한 치켜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을 응시하던 셜록은 한숨을 푹 쉬고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사탕 먹을래?"

 

*

 

 "정말 천사 아니예요?"

 

 한동안 묵묵히 막대사탕을 빨던 소년이 다시 물었다. 셜록이 곧장 부정했다.

 

 "아니라니까."
 "그치만, 날개가 있는데."

 

 보도블럭에 앉은 채로 다리를 쭉 펴고 까딱거리던 존이 셜록의 부정에 조그맣게 항의했다. 셜록이 혀를 차며 되물었다.

 

 "너 이 날개가 하얗게 보이냐? 혹시 장님...은 아니겠지. 내가 보이고, 내 날개도 보인다니까...잠깐, 그러고보니 어떻게 내가 보이는 거지?"

 

 10초도 안되는 시간동안 핀잔과 독백과 질문을 거쳐가는 정신없는 셜록의 말의 흐름을 채 반도 따라가지 못한 존은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입 안에서 사탕을 굴렸다.
 한편 얼떨결에 이름도 모르는 꼬마애에게 휘말려 사탕까지 뺏기고 보도블럭에 엉거주춤하게 앉아있는 신세가 된 셜록은 대체 평범한 인간 꼬마가 어째서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의 정리를 마치고 나서 옆을 쳐다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사탕을 오도독 소리나게 깨물며 소처럼 눈만 끔벅거리는 아이를 쳐다보던 셜록은 은근히 부아가 치솟았다.

 

 "바보같으니idiot."

 

 혀뿌리에 단단히 달라붙은 욕설을 뱉어내며 셜록은 소년이 화를 내길 기대했다. 당장 일어서서 훌훌 떨치고 가기에는 어색한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서 그답지 않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 또한 그의 천성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년이 화를 내면 자신은 나름대로 떳떳하게(?) 소년을 내버려두고 갈 명목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소년의 반응은 셜록이 예상한 바와는 딴판이었다.

 

 "맞아요. 다들 나보고 바보라고 해요."

 

 담담하게 말하며 소년은 입에서 사탕막대를 뺐다. 자근자근 씹어 너덜해진 막대 끝에는 체리물이 거진 다 빠져 처량한 연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쪼글쪼글해진 사탕막대를 빤히 쳐다보던 셜록은 소년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엄마도 아빠도 없고, 학교에 가도 친구도 없구요."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입술을 깨물며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는 아이의 신세한탄을 듣는 것보단 말이다. 이런 곤혹스런 사정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강림한 것인데, 하필이면 현신하자마자 처음으로 만난 대상이 천사와 악마의 모습을 그대로 꿰뚫어볼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라니.
 돌겠군...하고 셜록은 속으로 중얼거리는 한편으로 끙 하고 신음했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흘러내리는 코를 훔치며 하소연하고 있었다.

 

 "그리고요, 누나는 계집애들하고나 키스하니까 저도 날 때부터 호모자식일거라고도 해요. 누나가 레즈비언인거랑 제가 호모인거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난 게이도 아닌데."
 "전형적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군."

 

 혼잣말로 셜록이 중얼거리자 소년이 셜록을 향해 돌아보았다.

 

 "전형적...인...성급...오류...?"

 

 소년이 더듬거렸다. 셜록은 속엣말을 입에 올렸다는 것을 깨닫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더이상 상황이 악화되는 것은 막고 싶었기 때문에 고분고분 대답해주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너희 누나가 동성애자라고 해서 너까지 동성애자로 치부하는 건 논리적인 결함을 지닌 논법이라는 뜻이지. 그 두 가지 명제 사이의 관련성은 전무하다고. 동일 유전자를 나눠가진 사람들 간에 같은 유형의 성적 지향이 발현된다는 것도 참인 것으로 증명되지도 않았고 말이야."

 

 거기까지 나불대던 셜록은 문득 소년의 열렬한 시선을 느끼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 꼬마는 뺨이 상기된 채로 자신을 엄청나게 뜨거운 눈빛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을 잇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왠지 멋쩍어진 셜록은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일부러 과격하게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그런 멍청한 놈들이 하는 소리는 다 개소리bullshit다 이거야."

 

 셜록이 말을 마치자 소년은 참아왔던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우와는 무슨 우와야."
 "역시 천사님은 너무 멋져요."
 "글쎄 나 천사 아니라니까."

 

 셜록의 거듭된 부정에 아이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럼 왜 등에 깜장 날개를 달고 있는 건데요?"

 

 망설이던 셜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천사가 아니라고 했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왜냐면 난..."

 

 셜록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맺었다.

 

 "...타락천사거든."

 

 의외로 꼬마는 놀라는 기색도 셜록을 두려워하거나 그를 피하려는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인간 세상에 나오니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군 하며 셜록은 은근히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지옥이나 연옥에서 죽칠 때에는 하나같이 딱딱하고 지루한 꼰대들뿐이었는데 나오자마자 이렇게 하나같이 예상을 빗겨가는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무료하기 그지없었던 셜록에게는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이 따로없었다.
 셜록이 서서히 지금의 상황에 몰입하기 시작하는 동안 소년이 종알거렸다.

 

 "나도 타락천사 뭔지 알아요! 해리엇이 그러는데 크롤리랑 아라이1가 떡치는shagging 사이라고 했어요."

 

 순간 셜록은 먹은 것도 없는데 사레가 들리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한동안 쿨럭거리던 셜록이 등을 두들겨주는 아이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기침을 가라앉히고 나서, 셜록은 벌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쬐끄만 게 못하는 말이 없군."
 "아, 미안해요."
 "그런 천박한 말을 쓰는 주제에 용케 나를 볼 수 있군 그래. 그나저나 크롤리...크로울리2는 알겠는데 아라이는 누구지?"
 "몰라요. 누나 말로는 천사인데 천상 게이랬어요. 그리고 크롤리는 타락천사구요. 둘이 사귄다고 그러던데요."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군..."

 

 투덜거리던 셜록은 곧 코트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잠시 깔짝거리더니 어떤 화면을 내보이며 물었다.

 

 "네가 말하는 크롤리가 이 남자냐?"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셜록은 곧바로 다시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화면을 두드리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설마 네가 말하는 아라이가 아지라파엘...이냐?"
 "네 맞아요! 아지라파엘! 이름이 너무 길어서 까먹었다..."

 

 도대체 어디를 어떻게 생략하면 아지라파엘이 아라이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셜록은 사소한 문제는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활기찬 대화를 제공하는 인간 꼬마애를 울리기는 싫었으니까.
 한편 소년은 눈을 빛내며 셜록에게 질문하기 바빴다.

 

 "그럼 왜 여기 온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인간계에 강림했을 때에 있었던 좌표로 곧장 날아든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소년에게 그런 하잘것없는 이유를 댐으로써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셜록은 머리를 굴리다가 곧-그의 생각에는 대단하기 짝이 없는-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난 사실 널 타락시키러 왔단다."

 

 존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커졌다.

 

 "저를요?"
 "그래."
 "저는 나쁜 아이가 아닌걸요?"

 

 항변하는 아이에게 셜록이 씩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미 못된 아이를 타락시켜봐야 뭐가 재미있겠어? 착한 아이를 나쁜 아이로 타락시켜야 보람차지."

 

 소년의 동요를 드러내듯 파란 눈의 초점이 흔들렸다. 셜록은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저급한 희열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셜록의 반듯한 입매가 일그러지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나는 현대의 악마들보다는 전통적인 방식을 선호하지. 꼬마야, 바보 이반 이야기를 알고 있니? 악마들은 우직한 이반은 꼬드기지 못했지만, 그 형들인 세묜과 탈라스는 성공적으로 제 편으로 만들었지. 그리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반보다는 어리석은 세묜과 탈라스와 더 닮았고 말이야. 앞으로 난 네 옆에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성심성의껏 타락하게 만들어 줄 계획이란다. 고리타분하지만 그편이 확실하거든."

 

 모범적인 악마다운 태도로-사악함이 듬뿍 묻어나면서도 한없이 유혹적으로 속삭여주자 눈앞의 소년은 당황한 듯 멍하니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셜록은 마침표를 찍듯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려 미소지어보였다.
 이제야 타락천사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군, 하고 셜록은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쉬운 기미가 들기도 했다. 이제 소년은 그를 내팽개치고 이 자리를 도망가려 들겠지. 그러면 오랜만에 나눈 즐거운 대화도 이제 안녕일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그 소년은, 놀랍게도 오늘 하루동안 셜록의 예상을 무려 세 번이나 비껴가게 하는 위업을 달성해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다행이다. 난 또..."

 

 소년이 뭐라고 말하려다가 뒷말을 삼켰다. 셜록이 그 심상치 않은 생략에 의아해할 틈도 주지 않고 꼬마는 말을 이었다.

 

 "그럼 앞으로 내 옆에 계속 있을 건가요?"
 "...그렇게 되는 셈인가?"

 

 당황한 셜록이 얼떨떨하게 내뱉은 모호한 대답에도 소년은 세상을 다 얻은 것마냥 좋아라 소리를 질러대며 셜록을 꼭 껴안았다. 

 

 "와 신난다!"

 

 작은 소년의 팔이 굳어버린 셜록을 감싸안았다. 무표정이 일상화된 셜록의 얼굴과는 달리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등 뒤에서 어쩔 줄 모르며 움찔거리던 검은 날개에 소년이 얼굴을 폭 묻었다. 작고 보드라운 코끝이 깃털 뭉치 사이로 파묻혀서 속살에 간지럽게 와닿았다. 아까까지 울던 아이의 얼굴에 덜 지워진 채 남아있던 콧물이 윤기나는 깃털을 적시고 말았지만 왠지 기분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은...뭔가 이상했다.

 

 "...내 이름은 셜록 홈즈라고 한다."

 

 다소 무감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에도 소년의 환희는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셜록을 더욱 세게 껴안으며 소년이 살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존 왓슨이라고 해요. 미스터 홈즈."
 "장난하냐? 셜록이라고 불러."

 

 자못 아무렇지 않은 듯 핀잔을 주면서도 셜록은 느끼고 있었다.
 그래. 뭔가가 이상하다. 이 모든 상황의 기점이 어디선가부터 비틀려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셜록은, 지금 당장은 그 점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1.뒤에 나오겠지만, 아지라파엘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2.Anthony J. Crowley(<멋진 징조들>의 등장 타락천사이자 악마)와 Aleister Crowley를 헷갈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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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마레/SCP재단크로스오버

 

*SCP재단 산하의 윤리 위원회에 대한 참고 링크: http://mirror.enha.kr/wiki/SCP%20%EC%9E%AC%EB%8B%A8/%EC%9C%A4%EB%A6%AC%20%EC%9C%84%EC%9B%90%ED%9A%8C

*본편은 해당 링크에 있는 대화를 99% 복붙하였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하얗게 빛나는 문손잡이를 밀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회의실 안에 고인 침울한 냉기가 존의 가운에 스며들어 그는 반사적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드러난 손목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일상적일 마찰음일 뿐인데, 방 안에 서린 찬 기운때문인지 그것마저도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천천히 회의실 가운데로 나아가는데 뒤에서 문이 그극 하고 기묘하게 어긋나 돌아가며 닫혔다. 회의실 안은 이제 천장 한 가운데의 오렌지빛 조명이 내리쬐는 약한 빛 외에는 무거운 어둠과 침묵뿐이었다.
 지레 겁을 먹고 만 존이 등 뒤로 시선을 주는데 앞쪽, 흐릿한 어둠 속의 실루엣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앉으시죠."

 

익숙한 목소리였다.

 

"...마이크로프트?"

 

 회의실 가운데의 공터에서부터 계단식으로 짜인 회랑 위편에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앉아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이크로프트 뿐만이 아니었다. 생소한 얼굴들이 그를 둘러싼 채로 관찰하고 있었다.
 조용한 위압감에 압도되는 것도 잠시, 지금의 상황은 마이크로프트의 질 나쁜 장난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그는 윤리 위원회의 부름을 받았는데 이건 그가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마이크로프트를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존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시죠? 아니 그것보다...당신이 날 호출한 건가요?"

 

 마이크로프트 옆에서 시립해있던 안시아가 입을 열었다.

 

 "맞게 오신 거에요. 닥터 존 왓슨."

 

 언제나처럼 미리 녹음해놓은 음성 파일을 재생하는 듯한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존은 불편한 심기를 여실히 드러내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마이크로프트는 여전히 의뭉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또 하나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이 다음에 있을 D등급 요원 투입 실험 일정이 어그러질까 신경이 쓰이는 거라면, 그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네."
 "그렉...?"

 

 방 안의 침침한 조명 때문에 회랑의 귀퉁이 자리에 앉아있는 레스트레이드의 존재를 미처 알아채지 못한 존이 깜짝 놀랐다. 레스트레이드는 약간 지쳐보이는 얼굴로 웃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라고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마이크로프트가 그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위원회가 끝났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이 방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존은 뭐라고 항변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실험이라도 하듯 냉정하고 침착한 눈초리로 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험용 흰쥐가 꼬물거리는 것을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같은 눈빛에 존은 순간적으로 화를 벌컥 낼 뻔했다. 하지만 그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라고 존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당장의 상황만 봐도, 자신이 소환된 이 윤리 위원회라는 단체가, 재단 내부에 알려진 것만큼 무기력하고 만만한 단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는 찰나 존의 속내를 꿰뚫어본듯이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문은 이미 잠겼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박사님이 집중하시는 겁니다."

 

 존은 도전적인 눈빛으로 마이크로프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누구 하나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존은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천천히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무표정으로 존을 응시하던 마이크로프트가 슬쩍 입꼬리를 올려보이며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좋아요."

 

 그렇게 말한 마이크로프트는 그 뒤로 이어지는 짧은 침묵의 여운을 즐기듯 느릿하게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질 좋은 종이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으로 맨 앞의 서류를 집어든 마이크로프트는 정적을 깨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박사님은 지금부터 SCP재단 윤리 위원회의 위원이십니다. 이건 좌천이 아니에요."

 

 무감정한 목소리로, 태평하기 짝이 없는 어투로 그 말을 뱉어내는 마이크로프트를 보며 존은 기어이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게 좌천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존의 모습에도 마이크로프트는 하등 동요하는 기색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존이 화를 내는 꼴을 바라보던 마이크로프트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주시죠."

 

 그 목소리에 담긴 차가운 위협의 기색에 존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독사가 목을 부풀리고 날카로운 독니를 내보이며 은밀하게 쉿쉿거리는 것처럼 나직한 속삭임. 순간 존은 등줄기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자신을 내리누르는 은연중의 압력에 저항이라도 하듯 고개를 쳐들고 마이크로프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않고 눈을 빛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악의.
 존은 힘없이, 무너져내리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풀썩 소리와 함께 가운이 처량하게 부스럭대는 소리를 냈다. 마이크로프트는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존을 쳐다보았다. 아까 전까지 쌩 하게 감돌던 냉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압니다, 놀라셨겠죠. 아마 무슨 실패 때문에 처벌 받는 거라고 생각하시겠지요, 판단 착오나, 박사님이 연관된 끔찍한 재해 때문에요."

 

 'Sherlock Holmes' 때문일까? 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일명 SCP-221-B(blocked: 정보 차단 등급). 최근에 일어났던 일련의 보안 사고의 과정이 생생하게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듯 했다. 국제적인 악질 해커 크루 MORIARTY에 의한, 등급 책정 보류 중이던 인간형 SCP의 외부로의 정보 유출. 그리고 사망을 가장한 폐기. 분명 그것때문이리라. 지금의 일방적인 인사 조치는.
 왜냐하면 SCP-221-B는-마이크로프트 홈즈의 친혈육이므로.
 존의 얼굴이 서서히 공포에 질려 창백해지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이크로프트는 나긋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박사님의 재단 경력은 끝났다고 생각하실겁니다. 아마도 심지어 '윤리 위원회로의 전근'은 '사망'의 완곡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죠. 이건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제거'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재단에서 '제거'란 하루에도 수백 수천 건씩 처리되는 사안이었다. 즉 일상적인 감원 과정으로,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누구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존 또한 수많은 D등급 요원들을 '제거'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제거'란 그저 종이에 사인을 하는 절차일 뿐이었다. 그저 펜을 잉크 글씨를 몇 자 휘갈기는 것만으로도 종이 위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이제는 존이 죽어나갈 차례인 것일까?

 

 "박사님은 제가 '제거'대신에 '사망'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셨을겁니다. 고의적인 단어선택입니다. 윤리 위원회에서는 완곡어법을 쓰지 않아요."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이었다.

 

 "SCP재단이 하는 일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재단이 윤리위원회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그저 질 나쁜 농담으로만 여깁니다. 아니면 그들이 위원회가 존재하는 것을 알더라도, 우리가 그냥 쓸데없는 웃음거리밖에 안될거라는 느낌을 받겠지요. 반대라는 말은 할 줄도 모르고 고무도장으로 '승인함'이라는 도장만 찍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리만 채우고 있는 그런 이미지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박사님이 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구를 바꾸려면 몇 명의 윤리 위원회 사람들이 있어야 할까? 답은 아무도 없다!야. 왜냐하면 윤리 위원회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니까!'"

 

 존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평소에만 해도 일종의 레퍼토리처럼 반복해대고 서로서로 바리에이션까지 만들어내면서 바보처럼 웃어대던 조크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저걸 재밌다고 하면서 시도때도 없이 웃어댔던 거지? 재미는 커녕 당장이라도 속이 뒤집어질 것같았다. 내장이 울렁거렸다.
 마이크로프트가 일견 이해심 넘치는 투로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웃으실 수도 있죠. 저희는 사람들이 저희가 쓸모없다는 느낌을 받게하기 위해서 계속 노력했으니까요. 왜냐하면 저희는 SCP재단의 숨은 권력이기 때문이죠."

 

 O5가 아니라?
 존이 하지만-하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마이크로프트가 제지했다.

 

 "앉아계세요."

 

 존은 또다시, 그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존이 고분고분하게 자리에 앉자 마이크로프트가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요, O5가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안전한가 안전하지 않은가 판단하지요. 그것은 필수적이고 필요한 기능입니다. 하지만..."

 

 마이크로프트가 두 팔을 활짝 벌려 위쪽 연단 좌석에 앉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들은 O5에게 무엇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면 안될지 충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입꼬리를 올려 미소짓는 마이크로프트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박사님은 지금까지 재단에서 일하시면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부정하려고 하지 마세요, 박사님. 저희 또한 재단에서 일할 때 그런 일들을 했습니다. SCP들과 일하다 보면 결국 피할 수 없는 결론을 하나 내리게 되죠. 그리고 그 경우에, 아마도 궁금해 하실겁니다. '만약 재단이, 말하자면, 악당이라면? 글쎄, 재단은 악당이 아니야.' 바로 그것이 윤리 위원회가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박사님의 첫번째 교훈입니다. 이해하셨나요?"

 

 존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마이크로프트 또한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세요: 재단은 사악하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그냥' 사람을 고문하지 않습니다. 또한 저희들은 불필요한 잔인한 행동을 반대합니다. 그 말은 누군가가 잔인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결정할 때에만 행동한다는겁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란 바로 저희입니다...오, 이런. 떨고 계시는 군요. 떨지 마세요."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뚝 하고 눈썹 위로 떨어졌다. 눈을 깜작이자 땀이 눈으로 스몄다. 따끔한 느낌에 눈을 수 차례 깜박였다. 누군가가 옆에서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수건을 내미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채 존은 기계적으로 일단 받아들었다. 땀을 닦고 나니 어지러운 열기가 가시고 오한이 밀려왔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박사님, 두번째 교훈입니다. 중요하니까 잘 기억하세요.
 재단은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 재단은 세계에 봉사한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일반인들의 생각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하는 일, 즉 재단이 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최고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야말로 독선의 극치였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그 독단어린 발언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진심을 담고 있다는 것과, 회의장에서 존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그에 전폭적으로 동조의 기색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요, 저는 박사님이 이미 깨달으셨을거라 확신합니다...하지만 박사님은 더 깊은 의미에 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으셨을겁니다. 박사님은 이 모든 고문과 살인은 더 큰 선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시면서 자기 자신을 위로하시겠죠. 이 말은 더 큰 선이 있다면... 작은 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다양하고 독특한 선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측량될 수 있어야 하고 비교 될 수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바로 윤리 위원회에서 우리들이 하는 일입니다."

 

 목소리가 열정적으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억제된 환희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우리들은 재단이 하는 모든 일과 그 도덕적 비용의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용들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가치를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박사님? 이 말은 우리는 재단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수정되고 말소된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글자 하나까지요."

 

 존이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 데이터 말소 ]...에 대해서도 말인가요?"
 "그래요, 저희들은 SCP-447-2가 시체와 접촉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 지도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110-몬탁 절차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있고요.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디자인한 인물들 중 하나니까요."

 

 110-몬탁 절차. 존이 재단의 연구진으로 채용되었을 당시 견학이라는 명목으로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 격리 절차였다. 그때 존과 동행했던 신참들은...하나같이 구토를 했다. 안내원 역할의 박사들과 격리 절차를 수행중이던 요원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기록하거나 속엣것을 게워내는 그네들을 보며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존은 또다시, 안에서 치밀어오르는 토기를 참지 못하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회의장 안에서는 존이 우욱, 웩 하고 속에서 역류하는 것들을 뱉어내는 소리만 질척거리며 울렸다. 안시아가 토하는 존을 보며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더니 몸을 숙여 마이크로프트에게 속삭였다.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인사조치를 철회하셔도 됩니다. 왓슨 박사가 입을 놀리고 다니는 것이 걱정이긴 하지만...아, 마침 오늘이 D등급 요원 처리일자와 겹치니 소각장으로 이송시킬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소각 운운하는 안시아에게 마이크로프트가 자못 자애로운 태도로 말했다.

 

 "아니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일반적인 반응이에요. 아마 점심 직후에 이 만남 일정을 잡지 않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제 생각엔 말이죠-자, 왓슨 박사님께 수건을 새로 갖다드리도록 하세요. 물도 한 컵 떠다드리고요."

 

 상황이 어느정도 진정이 되고 나서의 존의 안색은 해골처럼 해쓱해져있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눈 아래가 푹 패여 그늘까지 진 것을 전혀 내색하지 않으며 마이크로프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박사님은 이제 적극적으로 연구에 참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사님은 본인이 일반적인 연구원이라고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한 프로젝트에서 다른 프로젝트로 옮겨 다니고, 한 사이트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마음대로 말입니다. 이건 비밀이 아닙니다. 박사님은 자유롭게 박사님의 친구분들께 박사님이 윤리 위원회로 전근가게 됬다고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만약 그 농담들과 동정을 견뎌내실 수 있다면요."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러나 존은 웃지 않았다. 의자에 몸을 늘어뜨리고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조용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박사님은 연구를 관찰하시고, 참가자들과-자신에게-물어보시면 됩니다. 이 실험이 행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요. 박사님이 느끼시기에 어떤 점이라도 무언가가 과도하다거나, 불필요하다거나 잘못되었을시에는, 저희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관계자들을 소환해서 그들에게 질문 할 것입니다. 박사님의 동료들이 조롱했던 온화하고 효과없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고는, O5에 내려가는 보고는 걸러내 질겁니다, 저희 관료제의 많은 단계를 거치면서요. 그리고 저 비윤리적인 사람들은 징계받고 그 기록이 영구적으로 남겨지겠지요. 아니면 감봉당하던가, 강등당하던가. 아니면 다른 프로젝트로 전근처리 될겁니다."

 

 마이크로프트는 한 박자 쉬었다가 말했다.

 

 "어쩌면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혐의로 총살 당할 수도 있지요."

 

 살짝 윙크를 곁들이며 말하는 것에 존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익살이랍시고 던지는 말에 다시금 구역질이 났다. 존의 눈동자에 떠오른 어렴풋한 혐오의 기색에도 마이크로프트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세번째 교훈입니다. 기억하세요. SCP재단의 'P'는 '보호하다(Protect)'를 상징합니다. 재단은 인류를 SCP로부터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재단을 그 자체로부터 보호하지요. 우리는 재단이 하는 일 중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을지 판단합니다. 우리는 악의 균형을 대체적으로 잡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악은 최소화될 겁니다."

 

 얼음장같은 침묵이 내리깔렸다. 존은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다 마쳤다는 것을 잠깐동안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같았다. 불안하게 눈을 깜박거리던 존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마지막 단말마처럼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저는...저는...!"

 

 무어라고 말하려는 존에게 마이크로프트가 진하게 미소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안됩니다, 박사님은 위원회에 들어오시는 것에 대해서 선택권을 행사하실 수 없습니다."

 

 아아...하고 한숨처럼 탄식하며 존 왓슨이 다시 의자에 주저앉는 것을 보고, 마이크로프트 또한 숨을 내쉬었다. 희열의 여운에 젖은 목소리로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래요, 아이러니 한 것은 사랑스럽지요,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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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