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기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 분명한 넓은 살롱은 매우 신중하게 배치된 장식품과 벽에 적절한 간격으로 걸린 고풍스런 그림들로 무척이나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으나 지금 그 안에 그것을 즐길 사람이라고는 아쉽게도 단 한 명의 남자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욱 아쉽게도 그 남자는 방 안에 걸린 예술품을 느긋하게 즐기며 찬탄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어보였다. 대신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온다는 전갈도 보내지 않고 멋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온 것이지만, 남자는 저택의 주인이 곧 자신에게 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남자는 벽난로 앞의 소파에 앉아 화로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가만히 응시했다. 화염에 침식된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잿더미 위로 무너진다. 발갛게 물든 불씨가 허공 중에 휘날리다가 금세 빛을 잃고 가라앉는다. 남자는 발치에 놓인 장작을 들어 벽난로 안으로 던져넣었다. 잠시 잦아들었던 불은 새로운 먹이를 휘감고 기세를 더한다. 퍼지는 열기가 한층 강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의자에 더 깊이 몸을 묻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남자가 입은 트렌치코트가 지난밤부터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 물기로 촉촉했기 때문이었다. 물기에 젖어 원래의 색깔보다 약간 진하게 물든 소매 끝을 매만지며 그는 살롱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올 누군가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헛되지 않아, 커다란 문이 열리며 미약하게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가 기다리던 남자다. 고양이처럼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안에 들어온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스트레이드."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마이크로프트의 부름에 뒤를 돌아본 그렉 레스트레이드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불편한 심기로 얼룩져있었다. 살롱 안으로 막 발을 들인 남자처럼 지루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인성이 마모된 뱀파이어들이 그러한 감정의 징후를 보이는 경우는 극히 적었기에, 마이크로프트는 경탄과 호기심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걱정, 우려, 근심-고작해야 백년을 사는 인간이 몇천년이고 끄덕없이 존재하는 그들을 향해 그런 눈길을 보낸다는 것은 신기한 축에 속하는 일이다. 보통의 인간은 그들을 마주하며 공포, 불안, 거리낌-등의 감정을 보이므로 어느정도 그 상황에 적응한 자들은 으레 인간이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니까.

 마치 신기한 것을 관찰하는 듯한 그의 미소를 본 레스트레이드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지만, 자신의 감정과는 별개로 일단 예의를 갖추자고 생각한 듯 그는 남자의 인사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정중히 답했다.

 

 "마이크로프트."

 

 살롱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옆에 있는 또 하나의 소파에 앉을 때까지 백발의 남자는 아무런 말없이 기다렸다. 참을성을 발휘하던 그는 마이크로프트가 의자에 앉자마자 이제 더는 못참겠다는 것처럼 격하게 마이크로프트를 질책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너무 오래 살더니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나요?"

 

 다소 무례한 어투였지만 마이크로프트는 그에 별달리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고, 그 무심한 태도가 남자의 화를 더욱 돋웠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자각한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지금 소문이 파다합니다. 당신이 너무 오래 살더니 드디어 미쳤다는 둥, 노망이 났다는 둥-"
 "알고 있습니다."

 

 마이크로프트라고 불린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남자의 이어지는 말을 잘랐다. 하지만 남자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소문도 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프린스(Prince)가 허락되지 않은 혈족을 당신이 거두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텐데요."
 "그는 언제나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요. 그가 탐탁치않게 생각하리라는 것은 예상한 바입니다."

 

 그 무엇에도 괘념치 않는다는 듯한 남자의 태연한 표정에 더욱 초조해진 레스트레이드가 말했다.

 

 "소환 명령이 떨어졌단 말입니다."

 

 남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던진 수였지만 안타깝게도 당사자는 별반 동요된 기색이 아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지루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계속 말하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레스트레이드가 계속해서 말했다.

 

 "법정(The court)*으로요."
 "오."

 

 그제야 흥미로워졌다는 듯 마이크로프트가 눈을 빛냈다.

 

 "죄목은?"
 "하도 많아서 일일히 열거하기가 힘이 드는군요."

 

 냉담한 말투였지만 레스트레이드가 마이크로프트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마이크로프트 그 자신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레스트레이드. 뒷배만 믿고 설치는 애송이가 감히 법정을 연다고 해서 내가 순순히 형벌을 받을 정도로 무르리라고 생각하나요?"

 

 마이크로프트는 온화하게 레스트레이드는 다독이며 레스트레이드의 걱정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가 몸에 배인 상냥한 겉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레스트레이드는 그가 레스트레이드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던지는 것에 불과한 말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그만 하세요, 마이크로프트."

 

 거의 반 세기에 가까운 세월동안 마이크로프트의 곁에 머무르면서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에게 말로만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젊었을 적에는 마이크로프트의 신사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언변과 언뜻 엿보이는 우수에 찬 눈빛에 현혹된 나머지 그가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했었지만, 이제 중년의 남자가 된 레스트레이드는 그런 그의 암시적인 행동에 무마되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현명해졌던 것이다.
 지금도 그는 자신 앞에서 짐짓 인간다워 보이는 행동을 보이고는 있었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가 마음의 경박한 편린 따위를 드러낸 순간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그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뱀파이어여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뱀파이어이기 이전의 또다른 문제다. 어쩌면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레스트레이드의 기분은 이유모를 우울감으로 저 아래까지 곤두박질쳤다.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이 속이 상했다는 것을 마이크로프트가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싶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전, 당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겁니다."

 

 퉁명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후후 웃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십분의 일도 살지 못한 한낱 인간 따위가 같은 혈족의 일원보다도 훨씬 농도 짙은 관심과 근심어린 애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그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솔직하게 내가 걱정된다고 말해준다면 좋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어두운 기색의 레스트레이드를 바라보던 그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하긴 내가 침묵의 형벌(dead silence)*을 받는다면 당신도 무사하진 못하겠죠. 버들가지처럼 연약하기 그지없는 당신은...내가 건재하고 있는 동안에 당신에게 눈독을 들여온 탐욕스럽고 천박한 모기 무리의 간식거리가 될 것이고...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워지는군요."

 

 순간적으로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청회색 눈에 서린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송곳처럼 번뜩이는 것에 레스트레이드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가 이리도 쉽게 감정을 표출하는 뱀파이어였던가?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자신의 눈을 의심하던 레스트레이드가 다시 한 번 그의 눈을 바라보자 그 한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미 가셔있었다. 순전히 착시였을 뿐이었을거라고 치부한 레스트레이드가 아직 소름이 가라앉지 않은 팔을 문지르는데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마이크로프트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는 레스트레이드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나의 사람이니까요."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의미의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사람(human)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말하며 마이크로프트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레스트레이드는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직감하고 무어라 말하며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의자에서 일어난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가 자신의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앉아있는 의자로 가까이 다가서서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퇴로를 봉쇄하듯 그를 감싸안아 의자 위에 가둔 마이크로프트는 몸을 굽히어 레스트레이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소환 날짜는 언제죠?"

 

 마이크로프트의 물음에 섞여 나온 미지근한 숨결이 레스트레이드의 귓볼에 와닿았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드럽게 자신의 귓볼을 간지럽히는 달큰한 그것에 고스란히 직면하고 만 그는 바르르 떨며 말했다.

 

 "...내일 밤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는 레스트레이드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을듯이 가까이 다가선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목을 축일 시간은 충분하겠군요. 자...그럼, 그렉."

 

 그렉, 이라는 호칭에 레스트레이드는 몸을 떨었다. 그가 자신의 피를 마시기 전에는 꼭 그의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것을 레스트레이드는 알고 있었다. 마치 섹스를 할 때 이름을 부르며 성감을 돋우는 것처럼. 그리고 확실하게 그것은 레스트레이드를 더욱 무방비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어느 사이엔가 마이크로프트는 잠겨있던 레스트레이드의 셔츠 목깃을 풀어헤치고 하얗게 드러난 레스트레이드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식사는 하고 왔겠지요?"

 

 무언가를 예고하는 듯한 말투에 레스트레이드는 더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그 물음에 답하여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민한 살갗에 와닿는 숨결은 그 어떤 애무보다도 레스트레이드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닥쳐올 행위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등줄기가 쾌감에 대한 기대로 전율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가 산 자의 의태를 하는 것에 불과한 기계적이고 덧없는 호흡이 자신의 목덜미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설렘으로 두근거리며,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의 송곳니가 자신의 살을 찢고 혈관에 이를 박아넣고 피를 빨아들이기를 고대했고, 그의 기대가 배신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금방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법정: 흡혈귀들의 규칙을 어겼을 때 출두 명령이 내려짐. 불응 시 재판 없이 프린스의 주관으로 즉결처분됨.

*침묵의 형벌(dead silence): 일출을 강제로 보게 하는 소멸형刑.

 

*


 흔들리는 의식.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멀리 구석에서 촛불이 타들어가는 희미한 소리와 살며시 흔들리는 불빛 속에서 바닥에 촛농이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수고스럽게 촛불을 켠 이유는 자신 때문이리라. 레스트레이드와는 달리 그는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불이 밝혀진 곳에서처럼 잘 볼 수 있는 시력을 지녔으므로. 레스트레이드는 흐릿한 시야를 맑게 하려 눈을 수 차례 깜박였다.

 

 "쉬어요."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린다. 아픈 아이를 달래는 손길과도 같이 그의 손이 자신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배려심 넘치는 행위에 그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이크로프트 홈즈, 너무나도 오랜 세월 동안 인간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예삿일이 되어버린 그 뱀파이어는 그 자신의 배려가 레스트레이드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을까? 뜻없이 내민 손길이 그를 구름 위로 솟아오르도록 행복하게 만들었다가, 아무 의미 없이 거두어버린 손길이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레스트레이드는 눈을 감고 힘이 빠졌다는 사실을 핑계삼아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렸다. 어느 틈에 침실로 옮긴 것인지 새털처럼 부드러운 베개가 자신의 머리를 감싼다. 다행이야, 하고 레스트레이드는 생각했다. 혹시라도 눈물이 흘러나오더라도 베갯잇에 스며들어 흔적조차 남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마이크로프트에게 피를 빨리어 흐려진 의식 속에서 레스트레이드는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레스트레이드가 마이크로프트를 만난 것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의 어린 시절에 유일하게 선명하게 남은 족적이었다. 소년에 불과했던 그는 마이크로프트에게 외경심을 느끼면서도 왜 그런지를 몰랐다. 그가 지루하게 여겨왔던 일상과는 다른, 충만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 듯한 유심한 눈빛에 혹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뱀파이어 특유의 매료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는 지금에도 그를 연모하는 마음이 힘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의 마음 속에서 나날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있는 것은 그로서는 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눈 때문일까?
 푸른 눈.
 그 눈이 자신을 바라보아준다면...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나간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몸을 쓸어덮치는 피로의 파도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착각으로 여겨질 만큼 상냥한 손길이 그의 머리칼을 쓸어넘긴 것 같았다.

 

*

 

 레스트레이드가 깊은 잠에 빠져들자 마이크로프트는 그제야 레스트레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망설이던 손끝이 부드러운 그의 은백색 머리칼에 닿았다.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감정을 느끼며 더없이 상냥하게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이 새긴 잇자국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목덜미에 시선이 미쳤다.
 눈 앞의 남자는 5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의 곁을 지켰다. 50년은 그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일부, 정말로 일부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동안 남자는 자그마한 검은 머리의 어린아이에서, 다정하고 활기찬 젊은이로, 그리고 은회색의 머리칼의 중년으로 변했다. 보드랍고 발그레했던 그의 뺨은 이제 더이상 팽팽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를 여전히 곁에 두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확실히 처음에는 아름다운 그에게 끌렸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중후한 성인 남성이 된 그가 여전히 아름다운가? 그는 자문했다.
 답은 하나다. 그는 여전히 아름답다. 세간의 미의식이 뭐라 말하든 간에 그가 마이크로프트의 눈에는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가가 커가고 늙어가는 과정을 시시각각으로 관찰하면서 무언지 알지 못하는 감정이 자신의 안에서 고개를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꽝꽝 언 얼음구덩이에서 미세한 균열이 일고, 그 틈새로 싹트는 무언가. 마이크로프트는 그것을 정의할 수 없다. 대신 마이크로프트는 정의한다. 레스트레이드는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이라도 잠자는 사이에 숨을 거둘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이크로프트는 그답지 않게 초조한 심정이 들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 감정을 무어라 명명하기에 마이크로프트는 인간이 그렇게도 연연해하는 감정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마음이 없는 괴물로서 너무 오랜 세월동안 살아온 탓일 것이다. 그 점을 마이크로프트는 애석하게 생각했다.
 -아니, 그는 단지 겁이 났을 뿐이다.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를 어루만지고 있던 손을 떼었다. 한 발짝만 더 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절벽에서 도망치는 것처럼 그는 자리를 떴다.

 

*

 

 눈을 뜬 그는 곧바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회중시계를 꺼냈다. 누가 봐도 옛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옛 사람들의 유물인 그것은 마이크로프트가 선사한 물건 중에 하나였다. 긴 바늘이 2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 있고, 짧은 바늘이 10 근처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레스트레이드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싶어 침대에서 급히 몸을 일으켰다.
 침실 바깥으로 나오자 마이크로프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 앞에 서 있었다. 만 하루에 가까운 시간 동안 휴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낯빛이 창백한 레스트레이드의 안색을 본 마이크로프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너무 내 욕심만 채웠나 보군요.-몸이 좋지 않으면 말해요."

 

 확실히 어제의 마이크로프트는 그답지 않게 레스트레이드의 피를 너무 많이 마신 감이 없지 않았다. 그동안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피를 빤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제 마이크로프트는 마치 레스트레이드의 내부의 모든 것을 삼켜버리겠다는 기색으로 그의 피를 마셨다. 마치 무언가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급하게, 그는 그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레스트레이드의 피를 마시는 것 같았다. 오랜 세월 동안 흡혈당하는 것에 적응된 레스트레이드가 겁을 더럭 집어먹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피를 마시다가 그를 죽일지언정, 그가 자신의 피를 마시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 더욱 싫었다. 마이크로프트가-표면적인 관심일뿐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걱정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레스트레이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괜찮습니다."
 "흐음."

 

 묘한 신음성을 흘린 마이크로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이 아닐지 두려웠던 레스트레이드는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어서 가셔야지요. 곧 재판이 시작됩니다."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줄곧 레스트레이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마이크로프트가 대답했다.

 

 "그 전에 당신 매무새나 좀 정리하는 게 좋겠군요. 자...이리 와요."

 

 그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레스트레이드를 자신 앞으로 가까이 끌어당긴 마이크로프트는 헝클어진 옷깃을 단정히 매만져주었다. 그가 손수 그리해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레스트레이드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하긴 그의 기준에서는 그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행위일 뿐인 것에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될 터였다. 마이크로프트는 미에 대한 탐닉이 피를 섭취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또레아도르일 뿐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떠올린 레스트레이드는 들떠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일부러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 나니 훨씬 진정되는 듯했다.
 마이크로프트가 온 신경을 집중해 그의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카락을 빗어주는 사이 레스트레이드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운 그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많은 혈족들이 모이는 법정에 출두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욱 신경을 썼는지 그는 신비스런 느낌을 자아내는 비둘기색 실크 턱시도 수트를 걸치고 있었다. 목 끝까지 채운 단추, 그리고 진주색 넥타이는 흡혈족에게 필연적으로 드리워져있는 죽음의 그림자에서 염세주의자가 느낄 법한 강렬한 그의 관능미를 경건하게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흠 잡을 데 없는 그 차림에 자신의 낡아빠진 코트와 평범하기 그지없는 차림새가 부끄러워진 그는 위축되는 자신을 감출 수 없었다.

 

 "다 되었군요."

 

 만족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마이크로프트의 시선에 레스트레이드는 그를 향하고 있던 질투의 시선을 거두었다. 그 질시의 감정은 레스트레이드가 마이크로프트를 사랑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류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우월한 자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에 불과했다. 질투를 해보았자 시대를 초월하여 변함이 없는 그의 우아함이 퇴색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갈까요."

 

 그는 검정 장우산을 집어들고 그것을 지팡이 삼아 앞뒤로 흔들며 레스트레이드에 앞서 걸었다. 레스트레이드는 그를 놓칠세라 황급히 걸음을 서둘렀다.

 

*

 

 음산한 분위기의 높은 천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여러 명의 남녀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더욱 똑똑히 들렸다. 콜로세움처럼 가운데의 원형의 공간만을 남긴 계단형의 강당에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착석해 가운데로 걸어나오는 마이크로프트와 레스트레이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남녀들이 그 둘을 바라보며 서로에게 귀엣말을 했다. 간간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방 안에 속삭임처럼 울려 퍼졌다. 모든 사람이 점점 이 사건이 주는 매력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간해서는 변화가 없는 그들의 무료한 일상에 이만큼이나 큰 파장을 일으킨 일은 오랜만이었으니까 말이다.
 마이크로프트가 가운데 피의자를 위한 의자가 마치 왕좌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앉자 비어있던 배심원석이 속속 들어차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은 런던 뱀파이어들의 수장인 프린스였다. 그가 도착하자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떠들던 목소리가 잦아들고 고요하고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압박적인 정적을 깨고 프린스가 입을 열었다.

 

 "착석."


 프린스가 착석함에 따라 다른 뱀파이어들도 하나둘씩 자리에 앉았다. 조용해졌던 장내가 다시금 어수선해지는 것에 서기가 주의를 주었다.
 

 "정숙하세요."

 
  그러나 또레아도르 클랜의 프리모진-뱀파이어 클랜의 대표자-이자, 권위있는 엘더 가운데 하나이며, 런던에서 프린스 다음의 위명을 지닌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뱀파이어 법정에 피의자의 신분으로 출두했다는 것은 많은 뱀파이어들에게 소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을 둘러싼 이들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즐기기라도 하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들이 소란스러우면 소란스러울수록 휘하 뱀파이어 하나 똑바르게 통솔하지 못하는 프린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자신의 네임 밸류는 올라가는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프린스를 비롯한 판사 측에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이크로프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금어질수록 그들의 표정에는 불편한 심기가 번졌다. 그들과는 별개로 인간 조력자의 자격으로 법정 안에 입장한 레스트레이드 또한 마이크로프트가 부리는 만용과 같은 태도에 몹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저히 수습되지 않는 분위기를 보다못한 프린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마이크로프트의 혐의를 명시한다."

 

 그제야 쥐죽은 듯 조용해진 장내를 둘러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제 1혐의, 말살해야 마땅한 카이티프*를 보호하여 카마릴라의 안위를 불안하게 하였음.
  제 2혐의, 그러한 행동으로 섹트*과 섹트 내의 킨드레드*의 존립에 악영향을 미침.
  제 3혐의-"

 

 이어지는 말에 마이크로프트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내려갔다. 그가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의혹삼을 수 있는 혐의가 저 두 가지 말고 또 있단 말인가?
 그러한 의문은 마이크로프트 뿐만이 아니라 법정에 참석한 다른 뱀파이어들도 품게 된 것이어서 한순간 그들이 더욱 바삐 귀엣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린스는 그러한 소음따윈 무시하고 계속해서 혐의를 읊었다.

 

 "제 3혐의, 섹트의 안전을 수호하며, 프린스를 대신하는 스커지*의 행동을 제약하여 프린스의 권위를 무시함.
  제 4혐의, 클랜의 프리모진이라는 지위에 오르기 위해 디아블러리를 하였다는 제보를 접수했고, 정식 혐의로 인정. 따라서 이 법정은 이 네 가지의 혐의에 대하여 마이크로프트 홈즈 본인이 해명하기 위해 열렸음을 알린다."

 

 디아블러리, 라는 말이 프린스의 입에서 나오자 레스트레이드는 주먹이 하얗게 되도록 꽉 쥐었다.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몇몇의 헉 하고 놀란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디아블러리는 모든 뱀파이어들의 규칙에서 가장 준수되어야 하는 규칙 중에 하나로, 그것을 어기는 자는 정상참작의 여지라곤 없이 곧바로 침묵의 형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디아블러리란 자신보다 윗세대의 뱀파이어의 피를 마심으로서 세대의 위계를 거스르는 행위로, 디아블러리는 한 자는 당한 자의 지혜와 힘을 가질 수 있지만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됨과 동시에 섹트로부터 척살령을 발부받고 지명수배를 당하는 극악의 행위였다. 디아블러리에 대한 대처가 이토록 강력하다 보니 감히 전 뱀파이어 사회로부터 추살을 당하고 싶은 정신나간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에야 그것을 저지르는 일은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처벌이 해명의 기회 없이 즉결처분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뱀파이어들 간의 정치적인 세력 다툼에서 다른 뱀파이어가 그와 적대적인 뱀파이어를 디아블러리 혐의로 몰아 죽이는 일은 다반사였다. 마이크로프트가 그나마 재판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은 그가 워낙 유명하고 인지도가 높은 뱀파이어였기 때문에 그를 무턱대고 죽였다가는 세간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임을 인식한 엘더들의 판단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다른 뱀파이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는 마이크로프트의 명성을 질투한 프린스가 벌이는 단순한 위력 행사의 차원이 아니라, 프린스를 비롯한 런던의 뱀파이어들의 지도부가 마이크로프트를 심각하게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과 다름이 없었다. 파티라도 온 듯한 처음의 떠들썩한 분위기는 완전히 심각하게 가라앉아버렸다.
 조용한 가운데 프린스가 입을 열었다.

 

 "발언하세요, 마이크로프트."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다분히 의식하며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발언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깃털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해진 법정에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목을 가다듬은 마이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프린스여, 그리고 그와 더불어 경애받아야 마땅할 엘더들이시여. 부디 피가 흐르는 동안 끝없이 이어질 영광과 홍복을 누리소서. 저는 저에게 쏟아지는 이와 같이 터무니없는 의심들에 깊은 슬픔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나이다."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하자 좌중에 젊은 축에 속하는 뱀파이어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옛 브리타니아의 언어-즉 고대의 영어로 발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몇 백년도 더 지나 쓰일 일이 없었을 그때의 언어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연설문을 읽어내려가듯 말해내고 있다는 것은 다시 한번 그가 오랜 동안 영국의 터전을 다져온 유서 깊은 뱀파이어 일족 중에 하나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지능적인 장치의 하나였다. 스코틀랜드의 차디찬 계곡물이 하얗게 얼어버린 살얼음 사이로 흘러가는 것처럼 유창한 말이 이어졌다.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는 그의 말을 한 엘더가 중단시키고 말했다.

 

 "그대가 우리와 함께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을 잘 알겠소. 그러나 어린 뱀파이어들이 당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니 현대의 언어로 발언해주길 바라오."

 

 그의 말에 발언을 멈춘 마이크로프트가 한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다시 발언을 시작했다. 잠시 숨을 돌릴 만도 하련만 마이크로프트는 기다렸다는 듯 현대 영어로 다시 말을 계속했다.

 

 "먼저 가장 먼저 제게 지워진 혐의에 대해 반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제 보호 아래에 들어온 그 혈족은 비록 대부에게 버림받긴 했지만, 그를 카이티프라고 칭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는 엄연히 카파도키안* 클랜에 속한 혈족이기 때문입니다."

 

 프린스의 뒤에 열을 지어 착석한 엘더들 가운데 하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카파도키안은 이미 절멸당했소! 선조의 무덤에 잠들어 있는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오! 설마 토퍼*에 빠지신 분이 그 카이티프를 자신의 아이로 삼았다는 억지를 주장하지는 않겠지요?"

 

 다른 엘더가 거들었다.

 

 "그 아이가 정말로 카파도키안이라면 더욱 큰 문제요. 카파도키안의 대부분은 우리의 섹트, 카마릴라*에 대적하는 사악한 사바트*에 가담하였던 전적이 있다는 것을 다들 잘 아실테지요. 아까 트레메레* 클랜의 프리모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카마릴라에 적대하지 않은 카파도키안 클랜의 혈족은 단 한 명만이 남아있을 뿐인데, 그 분 이외의 카파도키안이 그 인간을 자신의 자손으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필시 그로 하여금 우리 섹트를 염탐하게 하려는 의도일겁니다. 만약 그를 받아들였다가 생길 수 있는 사단의 경우의 수를 제가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터이니 더이상의 말은 아끼도록 하지요."

 

 자못 논리정연한 엘더들의 말에 레스트레이드와 몇몇 뱀파이어들은 우려 섞인 시선으로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 전혀 기가 죽지 않은 채로 꼿꼿이 서서 말을 이어나갔다.

 

 "벤트루* 클랜의 프리모진께서는 대체 무슨 근거로 대부에게 버림받은 채 길바닥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아이가 카마릴라를 염탐할 것이라고 간주하시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트레메레의 프리모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트레메레의 프리모진께서 사바트의 살아남은 카파도키안과 내통을 하지 않는 이상에야 그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무슨 망발을!"

 

 신랄한 비판에 앞서 발언한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발끈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마이크로프트는 빙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흥분하여 길길이 날뛰는 그를 지켜보았고, 그러한 그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난 남자는 아예 피고인석으로 뛰어나가 마이크로프트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으나 주변의 뱀파이어들이 말리는 바람에 그러한 행동은 무산되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카파도키안 클랜이 과거에 사바트에 가담하여 우리에게 적대하긴 했으나, 그는 엄연히 새로이 혈족이 된 사람이며, 그 대부에게 버림받기까지 한 아이입니다. 따라서 그가 일부 적대자들의 죄과를 대신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연좌제나 다름없는 처사입니다. 여기 계신 킨드레드들께서 다 아시는 것이겠지만 연좌제는 극도로 전근대적인 악습이며 지양되어야 할 폐습이지요."

 

 거기까지 말한 마이크로프트는 입을 다물고 뱀파이어들이 저들끼리 의논하는 것을 마치기를 기다렸고,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렇다면 서론은 충분히 길었던 것 같으니 이제는 제게 지워진 첫 번째와 두 번째 혐의를 완전히 벗기 위해 노력해보도록 하지요."

 

 마이크로프트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주위를 한번 휘 둘러보며 말했다.

 

 "사실 트레메레의 프리모진께서 걱정하시는 바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사바트 클랜에서 서서히 활동을 재개하여 우리의 영역으로 준동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저도 알기 때문이지요. 그 중에 특히 우리가 유념하고 상대하는 데에 있어 주의를 기해야 하는 이들은 바로 펠로워즈 오브 세트* 클랜이지요. 그들에게는 흡혈귀에 대한 강력한 매료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펠로워즈 오브 세트의 대항마가 있다면,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카파도키안들입니다. 펠로워즈 오브 세트는 세트, 즉 죽음의 신의 추종자이고, 세트를 섬기는 대가로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반면 카파도키안들은 죽음에 대한 연구에 특화되어있고, 그들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 존재들이기에 외양이 독특할 뿐 아니라 펠로워즈 오브 세트의 매료 능력에 면역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요. 그들이 카마릴라에 적었기에 지난번 대전쟁에서 카마릴라가 많은 희생을 대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제가 왜 그 연약한 아이를 거두어 제 보잘것없는 보살핌의 날개 아래에 두었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프린스가 입을 열었다.

 

 "따라서 그대의 행동은 킨드레드의 존립에 위태한 처사가 아니라 오히려 존립을 돕는 처사라는 말인가요?"

 

 마이크로프트가 프린스를 향해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제가 할 말을 프린스께서 대신해주시는군요."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엘더들이 웅성거렸다. 잠시 후 아직도 화가 덜 풀린 듯한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일어나 말했다.

 

 "좋소. 그대의 발언의 정당성을 인정하여 제 1혐의와 제 2혐의의 죄목은 거두도록 하겠소. 그렇다면 이외의 혐의에 대해서는 어찌 반박을 하실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하구려."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파닥이는 것을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잔인한 웃음을 머금은 그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마이크로프트가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그 어린 혈족을 보살피는데 스커지들이 기웃거리길래 자리를 피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한 일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군요."
 "내가 듣기로는 간곡히 부탁한 것이 아니라 그 알량한 위세를 믿고 위압적으로 스커지들을 압박했다고 들었소만?"

 

 자리에 앉은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이죽거리며 말하자 마이크로프트는 짐짓 선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못 아시는게 분명합니다. 프리모진께서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잘못 전한 말을 믿어버리신 게로군요."

 

 일견 유감스럽다는 듯 말하고는 있었으나, 마이크로프트가 한 말에 남이 한 말을 의심없이 믿는 당신은 천하의 바보 멍텅구리, 라는 뉘앙스가 듬뿍 들어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는 없었다. 법정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오자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의 얼굴이 다시 벌개지기 시작했다. 장내가 다시 시끄러워지는 것에 서기가 소리쳤다.

 

 "정숙!"

 

 간신히 정리된 분위기가 다시 들떠오르기 전에 마이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스커지들의 행동을 방해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무고한 혈족을 재미삼아 몰이 사냥을 하듯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잔인한 처사를 보이지 않았다면 저도 아마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었을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워낙 시끄럽게 날뛰기에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길래 그렇게 즐거워하는지 궁금해서 다가갔고, 죽어가는 혈족을 발견했지요. 그 이후에 제가 한 일에 대해서는 이미 다들 잘 아실겁니다."
 "그렇다면 제 3혐의에 대해서 인정하고 순순히 죄를 청한단 말씀이십니까?"

 

 엘더 중 하나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분개하는 척 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프린스와 따로 이야기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이런 공개 석상에서 제 행동에 대해 비난을 하는 이가 하나 둘이 아니니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겠군요."

 

 마이크로프트가 프린스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런던에 터를 잡은 뱀파이어들이라면, 다른 이의 영역에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되며, 다른 이의 영역에 발을 들일 시에는 그 영역의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출입을 청하는 것이 오랜 관습이며, 그 관습에 따라 출입을 청한 혈족을 환대하고 그 청을 허락하는 것이 우리들의 규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프린스의 스커지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공무를 집행하느라 미처 허락을 취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으시겠지요. 하지만 불쌍한 어린 아이를 마치 장난감삼아 갖고 놀듯이 느긋하게 사냥을 하는 그들은 아주 시간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특별한 경우였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제 영역에 그대의 스커지들이 인사 한 마디 없이 쳐들어와 장난삼아 인간을 사냥하는 행위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어왔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그러나 저는 그것에 토를 단 적이 없습니다. 왜냐고요? 당신의 수족이며 당신을 대신하여 대외적인 행동을 담당하는 수하들이기 때문에 섣불리 제가 질책하는 것을 삼간 것입니다. 잘못 이야기가 와전되면 내가 당신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고려한 처사였습니다."

 

 빈틈없이 짜인 논변을 이어나가던 마이크로프트가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이로써 내가 얼마나 프린스의 권위에 복종하고 있는지, 잘 설명이 되겠지요."

 

 법정의 뱀파이어들은 말이 없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혐의는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군요. 또레아도르 클랜뿐 아니라 저와 같은 세대 위의 선대들은 지금 모두 토퍼에 빠져 계신 걸 다들 알텐데요? 제 대부도 잠들어 계신 선대 중 하나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감히 디아블러리라는 용서받지 못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는 선조의 무덤으로 남몰래 잠입하여 들어가서 잠든 선조를 깨우고, 감히 선대 혈족의 피를 마시고, 다시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선조의 무덤을 빠져나와 런던 외곽 중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제 저택으로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는 것에 성공한 채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군요."

 

 마이크로프트가 냉엄한 어조로 말을 잇다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누가 감히 그러한 거짓 제보를 했단 말입니까? 선대들께서 영면해계신 곳에 누가 들어가보기라도 했나보지요? 그곳이 금지구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프린스가 손에 든 깃펜을 움직여 무언가를 끄적이고 자기 앞에 놓인 종이 몇 장을 펄럭펄럭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항변을 마이크로프트는 천천히 의자에 다시 앉았다.
 정적을 깨고 프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혐의."

 

 그가 입을 열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가장무도회의 규칙*을 어겼소. 그는 인간을 사사로이 곁에 두고 그에게 인간이 알아서는 안되는 밤의 질서를 가르쳤으며 뱀파이어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게 하여 훗날 그들이 밤의 세계를 침략할 때 사용할 앞잡이로 길러냈소."

 

 법정에 앉아있던 뱀파이어들의 시선이 한순간 레스트레이드를 향해 쏠렸다. 마이크로프트가 그렉 레스트레이드라는 인간을 총애하여 한시도 빠짐이 없이 그의 곁에 둔다는 것은 알만한 뱀파이어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의심, 혐오, 식욕이 뒤섞여 번뜩이는 그들의 눈초리가 무섭게 레스트레이드를 꿰뚫었다. 그러한 가운데 프린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라는 제보 또한 들어왔다. 마이크로프트 홈즈에게 제보의 신빙성을 반박할 것을 요구한다."

 

 프린스가 자리에 앉자 마이크로프트가 기가 차다는 듯 대꾸했다.

 

"하! 언제부터 그것이 그리도 큰 죄가 되었단 말입니까? 예로부터 선대들께서도, 그리고 누구라 이름부를 수는 없지만 지금도 수많은 혈족들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도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인간들이 우리를 정복하는 것에 일조하기 위함이 아니요, 햇빛이 미치지 않는 밤에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우리들이 인간 세상에 잘 녹아들도록 하기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잖습니까? 그리고 인간들이 밤의 세계로 감히 침략을 한다는 유언비어는 대체 누가 퍼뜨렸지요? 그런 근거없는 낭설로 킨드레드를 부화뇌동시키는 자를 엄벌해야합니다."

 

 마이크로프트가 몸을 일으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므로 저는 프린스께서 공의회(엘리시움*)를 여실 것을 제안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일어나 소리쳤다.

 

 "공의회의 수장은 당신이 아니오! 키퍼 오브 엘리시움*이 당신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는 줄 아시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군!"
 "그렇게 흥분하시는 이유가 없을 텐데요. 어딘가 뒤가 구린 구석이라도 있소?"

 

 여태껏 가만히 사태가 돌아가는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브루하*의 프리모진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입을 다물었고, 브루하의 프리모진이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떳떳하오. 프린스께서 엘리시움을 여는 것을 허가하고 마이크로프트가 그 집정관이 된다고 해도 나를 비롯한 브루하의 일족은 우리의 수호자 달빛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울 일이 없을 것이오."

 

 그의 진지한 태도에 다들 수그러드는 찰나에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쳇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죄인의 혐의를 지닌 이가 공의회의 수장이라니, 말세로군, 말세야!"

 

 그 말을 놓치지 않은 마이크로프트가 나직이 말했다.

 

 "그건 선대들께서 나에게 허용하신 직위입니다. 만일 여기에 그때 나에게 키퍼 오브 엘리시움의 권위를 쥐어주신 이보다 높은 이가 있다면 감히 그 권한을 회수해가도 좋습니다."

 

 그들 세대보다 높은 선대의 혈족이 모두 잠들어있는 데에야, 감히 마이크로프트에게서 그 권리를 뺏을 수 있는 이가 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다. 우아하게 입꼬리를 올려 그를 향해 미소지은 마이크로프트는 곧 프린스를 향해 몸을 돌려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천천히 말했다.

 

 "엘리시움은 열지 않는다."

 

 이어서 그가 말했다.

 

 "판결을 내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 결과가 빤히 보이는 일이었고, 그 판결을 짐작하는 이도 없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프린스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가 선언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 무혐의."

 

 레스트레이드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뱀파이어들 중 일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일부는 원성을 토해냈으며, 일부는 차분하게 무표정을 지킨 채였다. 그러나 프린스의 말을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러나 배심원 중 일부의 의견을 수용하여 법정 모독죄 혐의는 인정. 따라서 3개월의 칩거를 명한다."

 

 재판 내내 마이크로프트에게 맺힌 것이 많았던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은 프린스의 처사가 지나치게 너그럽다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프린스의 의사는 확고부동했다. 엄정한 품위를 유지한 채로 프린스는 자리를 떴고, 그 정도의 제재도 감수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던-더한 처분도 예상했었으므로-마이크로프트는 경의를 표하듯 그의 뒷모습을 향해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그 날 밤의 재판은 다소 싱겁게 끝났다.

 

*

 

 재판이 끝나고 재판정을 빠져나온 마이크로프트와 레스트레이드는 아무런 말 없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레스트레이드는 무언가 수심에 잠긴 기색이었고, 레스트레이드가 급작스레 기분이 나빠진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마이크로프트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모든 혐의에서 자유로워진 마이크로프트 자신에게 안도의 미소라도 지어줄 줄 알았건만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거는 것조차 거부하는 고통스런 안색이었다.
 밤은 어느덧 끝자락에 다다라, 하늘을 보니 달빛이 시시각각으로 선명해져 사위는 온통 부드러운 은빛으로 환해져 있었다. 새벽녘이 되기 직전의 마지막 반짝임을 뽐내는 별들의 장막이 하늘에서 듬성듬성 반짝였고, 그 아래에 선 그들은 저택의 정원에 들어서 걸음을 멈추었다.

 

 "레스트레이드."

 

 마이크로프트가 먼저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무슨 연유로 그렇게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나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겠어요?"

 

 그답지 않게 극도로 정중한 말투였다. 레스트레이드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쳤다.

 

 "수단이라고요? 수단이라고요?"

 

 그제야 레스트레이드가 무엇에 화가 난 것인지 알아챈 마이크로프트가 그를 진정시키려 팔을 뻗었다. 아까 전 재판 과정에서 레스트레이드를 인간의 삶에 녹아들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했던 것에 대해 그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마이크로프트가 레스트레이드의 어깨를 잡으려고 노력했으나 놀랍게도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의 손을 쳐내었다. 깜짝 놀란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레스트레이드, 진정해요."
 "제가 겨우 수단에 불과했던 거군요? 아주 잘 알겠습니다."
 "레스트레이드!"

 

 흥분하여 평소의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행동과 언사를 뱉어내는 레스트레이드에게 마이크로프트가 소리쳤다. 그제야 레스트레이드가 비아냥대는 것을 멈추었다. 잠시 그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고르는 소리만이 고요한 저택을 채웠다.
 마이크로프트가 차분하게 말했다.

 

 "거기엔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요. 만약-"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미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말을 듣는 데에 자신의 온 생애를 쏟아왔고, 그것은 기나긴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고통만을 그에게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에 진력이 나고 만 것이다.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가로막고 레스트레이드가 말했다.

 

 "됐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말뿐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절 달래느라 마음쓰실 필요 없어요."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가 그렇게 말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천하의 마이크로프트가 할 말을 잃고 바보처럼 가만히 서있을 뿐인 그 모습에 약간의 고소함과 양심의 가책이 동시에 자신의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며 레스트레이드가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저는 적어도, 그보다는 나은 것을 바랐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다가 곧 끊어졌다.

 

 "그건 그렇게 큰 욕심이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아니었나보군요."

 

 마이크로프트는 입술만 뻐끔거렸고, 레스트레이드는 더이상 그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앞으로 3개월 동안 형기를 치르실테니 저는 필요하지 않겠죠. 그 동안에는 절 필요로 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레스트레이드!"

 

 뒤늦게 마이크로프트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불렀으나 레스트레이드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을 떠나가버렸다.

 

 "그렉…."

 

 그가 떠나간 후에야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가 돌아서서 가버린 뒤로 공허한 그림자만이 잠시 맴돌다 사라진다.
 마이크로프트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오랜 동안 축적되어 아픔에 젖은 절규를 토해내고 레스트레이드는 떠나버렸다. 그런 그를 차마 잡을 수 없었다. 잡아야 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그가 떠남과 동시에 무너지듯 주저앉을것만 같았지만 마이크로프트는 그러지도 못했다.
 무겁게 눈을 감는다.

 도저히 그에게 할 수 없었던 고백을 그가 떠난 뒤에서야 읊조린다.

 

 "내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 가지 말아요…."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깊은 고요에 감싸인 매혹적인 저택, 그리고 저택을 둘러싼 은은한 달빛만이 외로이 선 그를 비추었다. 햇빛이 들이치기 전까지, 그는 그렇게 망부석처럼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카이티프: Caitiff. 정상적인 클랜이나 블러드라인 소속의 대부가 포옹했으나, 클랜의 특질을 결정짓는 요소가 전달되지 않았던지 부족하게 만들어지는 등의 기타 이유로 무언가 잘못되어 클랜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진 자를 카이티프라고 한다. 이들은 뱀파이어이기는 하지만 클랜의 아무런 특징도 갖지 못하므로, 클랜의 약점도 없고 클랜 디시플린도 얻지 못하며 정상적인 혈족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정상적인 대부라면 자신의 책임을 다해 자식을 지켜볼테니 카이티프는 없는 존재이거나 만들어지더라도 대부의 손에 금새 처리되어야 마땅하지만… 카마릴라 내에서도 종종 엘더의 허락없이 막무가내로 포옹해놓고 버려놓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카이티프가 만들어져서 노숙자처럼 연명하는 경우가 가끔 있으며, 프린스는 카이티프가 발견되면 스커지를 보내서 청소해버린다.


*섹트: 뱀파이어 사회의 파벌. 카마릴라와 사바트로 나뉜다.

*킨드레드: 혈족의 이르는 다른 명칭


*스커지: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뱀파이어나 뜨내기들을 수색해서 무력으로 처리하는 프린스(도시의 지배자 뱀파이어)의 사조직

*카파도키안: Cappadocian. 죽음과 영혼에 대해 연구하던 금욕적인 클랜이었으나, 아우구스투스 죠반니의 쿠데타에 의해 절멸했다. 보통의 뱀파이어에 비해 외모가 훨씬 시체스럽게 보인다

*토퍼: 뱀파이어의 나이가 많이 들었거나 입은 상처가 지나치게 깊으면 그것을 재생할 때까지 죽은듯한 깊은 잠에 빠져드는데 이 수면을 토퍼(Torpor)라고 한다. 뱀파이어가 오래 될수록 토퍼의 기간이 길어지는데, 고대 시절의 정말로 오래된 뱀파이어는 토퍼를 수백년에서 천년까지 빠져드는 경우도 있다.

*카마릴라: 카마릴라(Camarilla)는 마스커레이드(가장무도회의 법칙, 하단 참조)를 지키고 인간성을 보존하는 것에 대체적으로 찬동하는 클랜들로 구성되어있다. 브루하, 강그렐, 말카비언, 노스페라투, 또레아도르, 트레메레, 벤트루가 카마릴라에 속해있다. 카마릴라의 구성원은 가장무도회의 법칙을 비롯해 몇가지 전통(Tradition)이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사바트: 사바트(Sabbat)는 뱀파이어가 인간보다 우월한 종임을 드러내고자 인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놓고 습격하며, 또한 앞으로 닥쳐올 게헨나의 날에 돌아와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할 카인의 검이 되어(한마디로 적극적으로 앞잡이가 되어서) 세상을 휩쓸어버리자는 게헨나 컬트적인 클랜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바트는 자기네 클랜의 앤티딜루비안(선대)을 살해하는데 성공하고 클랜의 주도권을 틀어쥔 라솜브라, 쯔미시 클랜을 핵심으로, 카마릴라 클랜 출신이지만 반골적인 성격을 가져서 뛰쳐나온 앤티트리뷰(Antitribu)들이 추가되어있다.

*트레메레: Tremere. 트레미어는 한때 인간 마법사의 학파였으나, 영생을 추구해 스스로 뱀파이어가 되었다. 강력한 피의 마법을 사용해서 카마릴라를 지탱하는 중추이지만, 중세 때부터 수많은 적을 두었기 때문에 클랜 조직에 대한 충성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한다. 카마릴라 내부에서는 이들을 미심쩍게 보는 시선이 많다

*펠로워즈 오브 세트: Followers of Set. 그들의 클랜 선조가 이집트 신 세트(Set)라고 믿는 그 후예들. 언젠가 돌아올 절대적인 악의 신 세트의 앞길을 닦아놓는 것에 비밀스럽게 전념하고 있다. 영혼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대면하고 있으며 타락과 유혹의 달인이므로 그 어떤 혈족에 비해도 악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암흑의 존재이기 때문에 빛에 극도로 민감하며 태양광선이 아니라도 강한 빛에 괴로워한다. 중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악의 축.

(소설의 흐름상 이집트의 악신 세트를 죽음의 신으로 묘사했으나 사실 이집트의 죽음의 신은 아누비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백과사전에 따르면 아누비스=명계의 신, 오시리스=사자死者의 신, 세트=악의 신이군요. 그런데 이집트 신화는 상이집트-중이집트-하이집트를 거쳐오면서 변화가 상당히 많이 일어났거든요. 신들의 역할이 이집트 왕조의 입맛대로 변형도 되고...이런 묘사를 그런 변화의 갈래 중에 하나로 보아주십사...하는 건 무리겠지만, 여튼 이해해주세요)

*가장무도회의 법칙: Masquerade. 인간에게 정체가 밝혀져서는 안된다.
*엘리시움: 뱀파이어들 사회에서의 정치의 장. 공의회.


*키퍼 오브 엘리시움: Kepper of Elysium. 엘리시움의 평온을 위해 엘리시움 내 모든 것을 관리하는 담당관. 작중에서는 공의회의 수장, 의회의 의장 역할.

*브루하: Brujah. 한때 위대한 철학을 겸비한 강력한 전사였으나, 많은 좌절을 겪은 현재는 반항적인 정치 행동주의자가 되었다. 강력한 전사적 능력을 갖추었으며 카리스마적인 연설가이기도 하나 광포화하기 쉬운 약점을 갖고 있다.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