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요."

 

 응접실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존은 소스라치게 깜짝 놀랐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의 청년이 자신을 무감정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가 완전히 낯설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 달 만의 재회에 놀란 존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당황한 채로 황망히 서있는 동안 그는 천천히 가죽장갑을 벗고, 여미고 있던 코트의 세워진 목깃을 내렸다. 존이 들어오기 전까지 안에서 그다지 오래 기다리지는 않은 듯 그에게서 숨길 수 없는 바깥 공기의 찬내음이 풍겼다. 세웠던 목깃을 내리자 하얀 목이 드러났다. 겨울, 특히 눈이 내리는 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존은 그의 목덜미가 허전한 까닭이 지난 달에 있었던 '그 일'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그 날 겪었던 일이 단순히 꿈이었을 거라고 치부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로 아무 사건도 없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건만, 한 달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가 다시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까닭을 존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마치 한 달이라는 시간이 도살장에 끌려가기 직전의 짐승에게 주어지는 유예기간이 아닌가 싶었던 존이 남자의 방문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것에 불안해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태연한 표정으로 서슴없이 방 안으로 들어와 응접실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앉으시죠."

 

 그가 앉은 뒤에도 오랫동안 존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천연덕스런 어조로 의자를 권한 후에야 존은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고서도 한동안 입을 차마 열지 못하던 존이 용기를 내어 말을 붙였다.

 

 "어...어떻게 들어온 거죠?"

 

 존의 물음에 남자가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많이 놀라셨나요?"

 

 극도로 긴장한 존과는 달리 그는 이 만남이 무척 즐거운 듯 했다. 그러나 존은 섣불리 남자의 기분에 맞추어 놀아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눈앞의 그는 지금은 귀족적이고 세련된 태도를 지닌 신사였지만 언제 괴물로 돌변하여 자신의 피를 취하려 달려들지 도통 짐작할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존이 더욱 불안한 이유는 또 있었다. 이전에 있었던 일 이후로 존도 달리 조사를 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흡혈을 하는 존재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며 알게 된 것은 무엇 하나 확신할 수는 없는 것들 뿐이었으나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흡혈귀는 초대받지 못한 집에 발을 들일 수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응접실로 소리소문없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나마 존을 지금까지 편하게 잠들도록 해주었던 단 하나의 사실조차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음에 틀림이 없으므로 더욱 방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짧은 순간 후다닥 지나가는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으로 지속적인 경계 태세를 보이며 표정이 굳어있는 존을 지켜보던 그는 후후 웃으며 존의 질문에 답했다.

 

 "인간들에게는 애석한 일입니다만...우리들은 설화 속의 존재들과는 다르게 집주인의 초대 없이도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답니다."

 

 존의 가정을 확실시해주는 말이었다. 존의 표정이 미미하게 구겨지는 것을 바라보며 남자는 조용히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두는 편이 당신네들의 심신의 안정에 더 도움이 되겠지요."

 

 일단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있을테니까요, 하고 남자가 상냥하게 읊조렸다. 남자의 말에 존은 바람빠지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짓는 존의 얼굴이 지나치게 경직되어있다고 느꼈는지 남자는 가벼운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햇빛은 우리들에게 쥐약이나 마찬가지라는 건 사실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존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생각하던 존재가 맞다는 것을 알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느새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도 지우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옷차림의 신사는 실내의 따스한 불빛을 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가 노랗게 보이기는 커녕 실핏줄이 비쳐보일 정도로 하얬으며 뺨에는 온기라곤 없어 보였다. 시체를 제외하고는, 그가 본 사람중에서 가장 창백한 얼굴을 가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혈색이 창백한 경우 자칫 맥아리가 없어 보일 수도 있었으나, 남자는 그런 결점이 있음에도 유난히 우아해보였다. 그의 외양 가운데 특히 존의 마음을 잡아끈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언뜻 보면 엷은 농도의 무채색인 그것은 빛을 받을 때마다 신비로운 푸른색이 어린 채 반짝였다. 존이 그의 눈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린 이유는 단순히 빛깔만 출중한 점에서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예리한 지성의 눈빛때문이었다. 마치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한 매혹적인 보석같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그가 자신의 피를 강제로-정말로 강제였는지 존은 확신할 수 없었다-빨아마셨던 그때의 끔찍하고 음산한 괴물이라고 간주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러나 존이 그에게 느끼는 것은 매혹뿐이 아니었다. 공포. 그는 아직도, 여전히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을 뿐더러, 그가 풍기는 악몽처럼 스산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멀쩡한 사고를 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바깥에서는 은은하게 캐롤이 울려퍼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활기차게 거리를 활보하며 즐겁게 성탄절 전야를 보내고 있건만, 눈앞의 남자가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오싹한 고립감을 느꼈다. 마치 응접실만이 바깥 공간과 뚝 떨어져있기 때문에 외부의 흥겨운 분위기가 섞여들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마 지금 그가 거리로 나선다 해도, 주변을 응시하는 그의 눈짓 한번으로 웃음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인간다움과는 동떨어진 존재였다.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이끌림이라는 상반된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존을 바라보며 남자는 다리를 꼬고 있던 방향을 바꾸었다. 사각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잦아든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동안 많이 알아보셨겠지만...혹시 또 알고 싶은 것이 있으신가요?...닥터 존 해미쉬 왓슨."

 

 남자의 연보랏빛에 가까운 입술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담자 존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것처럼 놀랐다. 동요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이름은 어떻게..."

 

 내뱉어진 존의 물음에 그가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이름만 아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인도에서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부상때문에 의가사제대를 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는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지요."

 

 단 한 문장으로 명료하게 존의 이력을 읊어내는 남자의 통찰력에 존은 문득 자신이 처한 상황마저 잊고 솔직하게 감탄을 토했다.

 

 "굉장하네요."

 

 존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약하게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아까 보았던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듯한 미소가 아닌, 좀더 인간다운 느낌의 어떤 것이었다. 그것을 본 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으나 그 미소는 금세 스쳐지나가듯 사라져버렸다.
 잠시 그의 말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는데 문득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뱀파이어들은 모두 당신처럼 사람을 꿰뚫어볼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조사를 하신 건가요?"

 

 그의 물음에 남자의 입가에 불쾌한 기색이 여실히 느껴지는 차가운 웃음이 어렸다. 남자가 천천히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마련이죠. 선입관을 제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쉬운 말로 하자면-"

 

 남자가 처음에 보인 만들어낸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관찰이라고 하는 겁니다."

 

 부드러운 어조로 그가 말을 맺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요?"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조근조근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서 지나칠 정도의 격식이 느껴져 더욱 위화감이 느껴졌다. 존은 자신이 무언가 알지 못할 부분에서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을 눈치챈 이상 더이상의 섣부른 언동을 하지 않는 편이 상책이었으니까. 그러나 남자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끝마친 후로는 별달리 다른 말을 하고 싶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결국 존은 한없이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지난 번과 같은 용건이면 어떡하나 라는 생각에 걱정이 된 나머지 존은 말을 더듬을 뻔한 것을 간신히 평상시의 어투로 말할 수 있었다. 남자는 선선히 대답했다.

 

 "제 목도리를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그리고 사과를 하려는 목적도 있고요."

 

 사과? 존은 그가 사과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다는 것을 의아히 생각했다. 그러나 일단은 목도리를 돌려달라는 말에 존은 일단 서랍을 열어 잘 접어 고이 넣어두었던 목도리를 꺼내어 남자에게 건넸다.

 

 "가지고 있으셨군요. 다행이네요."

 

 그는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을 뿐이었으나 존은 어쩐지 목도리를 소중히 챙기고 있었다는 것을 들킨 것만 같아 묘한 가책으로 가슴 한쪽이 쿡쿡 찔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요를 애써 감추며 남자를 바라본 존은 목도리를 돌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에서 나가지 않는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또 다른 용건이 있으신가요?"
 "아까 말했듯이 사과를 드리려고 합니다."
 "무슨..."
 "그날 일 말입니다."

 

 그가 의미심장한 어투로 그 날의 사건을 짚어 말하자 존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우셨겠죠. 많이 놀라셨을테고요."

 

 안색이 바랜 존에게 그가 예의바른 어투로 말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당신을 엉망으로 내버리고 가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저도 그쪽 방면으로는 그다지 경험이 많지 않아서 당신에게 그런 일을 저지르고 나서 당황하고 말았거든요."

 

 존이 아 하고 남자의 말에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트를 여미고, 돌려받은 목도리를 목에 두른다. 존은 목도리를 두르는 그를 지켜보았다. 목도리를 목에 감고 그는 무언가 석연치않다는 듯 코를 몇 번 킁킁거렸다.

 

 "혹시 그날 이후로 이 목도리를 걸친 적이 있습니까?"

 

 갑작스럽고 뜬금없기까지 한 질문에 존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낮게 혀를 차며 말했다.

 

 "아쉽군요."

 

 무엇이 아쉽다는지 알 수 없었던 존은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존의 눈동자를 마주바라보며 남자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 냄새가 참 좋은데 말이지요."

 

 직감적으로 남자의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존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화악 붉어졌다. 그런 존의 표정을 본체만체하며 남자는 금세 미소를 지우고 혀끝으로 날카롭고 하얀 송곳니를 살짝 쓸었다. 그건 맛있는 요리접시를 앞에 두고 기다림 자체를 음미하면서 입맛을 다시는 행위와 같았다. 남자의 예의바른 태도에 잠시 망각할 뻔했지만, 그가 보인 무의식적인 행위는 존이 다시 그의 정체-인간을 먹잇감으로 삼는 포식자라는 것-를 깨닫는 데에 톡톡한 역할을 했다. 존의 얼굴이 다시금 하얗게 질리는 것에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존을 일별하며 나직한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응접실을 나섰다.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뒤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이유모를 아쉬움을 느낀 존이 그를 잠깐이나마 붙잡으려는 듯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끝인가요?"

 

 남자가 돌아서서 존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남자가 입술을 움직였다.

 

 "사과가 부족하신가요?"
 "아, 아니...그게 아니라..."

 

 존이 망설이다 계속해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더이상 만날 일은...없겠죠?"

 

 남자를 겨냥한 물음인지 자기 자신을 향한 자문인지 뉘앙스가 애매모호한 질문이었다. 존의 질문이 의외였는지 잠시 생각하던 그가 곧 미소지으며 답했다.

 

 "당신이 저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앞으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나긋하고 깊은 저음에 담긴 에로틱한 울림에 존이 저도 모르게 아...하고 탄성을 질렀다. 존이 무어라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이 남자는 끝까지 정중함을 잃지 않고 다시 고개를 숙인 후 응접실을 나갔다.

 

*
 

 꿈을 꾸었다.

 그는 또다시 칠흑같이 어두운 숲길 사이에 서 있었다. 마치 그날의 일을 재차 겪는 듯 뺨에 다가오는 바람 칼날 하나하나가 선명했다. 오래 걸어 피곤한 다리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둔통까지도 그날과 다름이 없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 온 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너무나도 실제적인 공간감과 당시의 장소를 그대로 옮긴 것처럼 생생한 풍경에 겁먹을 만도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존은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존은 이 꿈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맞았다.

 숲을 헤매는 사이, 다시 한 번 남자가 나타났다. 연기처럼 스르르 나타난 그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공기 중에 떠도는 남자의 알싸한 체취가 그를 더욱 강하게 사로잡는 것을 존은 느낄 수 있었다. 차게 풍겨오는 그의 향기에 존은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처럼 숨을 가쁘게 쉬었다.

 존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는 동안, 이전의 꿈에서 몇 번이고 그랬던 것처럼 그는 존을 제 품 안에 가두고 그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살갗을 꿰뚫는 것에 존이 신음했다. 느껴질리 없는 그의 존재의 흔적이 존의 몸 구석구석에 낙인찍힌 것처럼 되살아나며 강한 쾌락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꿈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속으로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초현실적이고 어찌 보면 과장되게까지 느껴지는 뜨거운 쾌감이 자신을 향해 몰려올 때면 존은 어찌 할 바 모르고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쾌감의 물결은 거센 파도처럼 점점 더 강하게 자신을 향해 부딪혀왔다. 존은 백사장의 모래알갱이처럼 힘없이 부서져 바닷물 속으로 서서히 쓸려내려갔다. 제어를 벗어난 몸을 물결치는 푸른 바다에 맡기고, 그는 차갑고 포근한 바다를 떠다녔다. 바다거품이 잘게 일었다가 보글거리며 사라진다. 움직이는 물결에 몸을 싣는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솨아아 하며 멀어진다. 물색이 깊어진다. 자신을 둘러싼 물이 연한 청록 빛에서 푸른 하늘빛으로 그리고 끝 간 데 모르는 남색으로 바뀐다. 더 깊은 곳으로 하강한다. 평온하다. 더 이상 아무런 잡음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 느릿느릿하게, 때로는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린다. 무겁게 무겁게 가라앉는다. 자신을 잃고 아래로, 아득한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지는 느낌에 존은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었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쳐내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눈발이 내리고 있다. 존은 비칠비칠 세면대로 걸어갔다. 중간에 한 번 넘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는다. 수도꼭지를 비틀어 연다. 쏟아지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았다. 그는 깨달았다.

 그에게 가야 한다.

 

*

 

 조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에 점차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북쪽 저편에서 다가온 거대한 젖빛 구름이 천천히 하늘을 덮었다. 강렬한 석양의 빛깔이 탁한 색조로 물들었다. 노 저어오듯 가만가만히 기어온 구름이 붉게 빛나다가 해가 지평선에 가까워지는 것과 함께 서서히 아래쪽부터 어두워졌다. 드리워진 커다란 구름의 그림자가 가장자리부터 진해지며 정원 위로 낮게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다.

 주홍빛의 황혼이 긴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희미하게 회색이 감도는 햇살이 내실의 커다란 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마이크로프트도 레스트레이드도 그것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자연스러운 침묵이 기분 좋게 두 사람을 감쌌다. 마이크로프트는 그날따라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는 공상에 잠겨 눈을 감은 채로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손가락을 까딱이고 있었다. 그로서는 몹시 드문 일이었다. 때때로-매우 계산적인 명목에서이기는 했지만-낭만이라는 것을 즐기기도 하는 마이크로프트와는 다르게 레스트레이드는 공상은 공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이크로프트가 무슨 생각에 그토록 골몰해있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고 또한 감히 짐작하려 들지도 않았다. 셜록이 자리를 비운 것과 연관되었을까 하는 가벼운 추측이 레스트레이드의 뇌리를 스쳤다.

 그때 마이크로프트가 눈을 떴다. 눈꺼풀을 가볍게 올려 뜬 그는 검푸르게 변한 구름이 멀리 있는 숲의 뾰족뾰족한 모서리를 스멀스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며 다소 경쾌하게 입을 열었다.

 

 “눈이 올 것 같군요.”

 

 셜록이 존을 방문하기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

 

 북부 런던의 교외지역의 외곽으로 빠져나갈수록 인적은 드물어지는 대신 포장도로가 없는 공터가 눈에 띄는 횟수가 빈번해졌다. 마지막 포장도로가 끊긴 흙길을 더듬어나가자 곧 히스가 무성하게 돋아난 채로 방치된 불모지, 그리고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숲과 그 사이로 난 길이 나타났다.

 존이 숲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해가 다 지고 난 후였기 때문에 언덕진 길 너머에는 짙게 어둠이 서려 한층 더 음산해보였다.

하늘에는 구름이 두텁게 깔려있었으며 달은 여전히 기를 펴지 못하고 간간이 몇 가닥의 빛만 뿌리며 스쳐갔다. 그렇게 빛 한 줄기 들이치지 않는 시커먼 숲의 안으로 발을 들인다는 것은 웬만한 강심장이라도 꺼릴 일이었으나, 존은 무엇에 홀린 것처럼 숲 속에 난 길을 따라 무작정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숲 안쪽은 생각 외로 밝았는데, 그 이유는 나무가 무성하지 않고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숲길의 트인 부분의 하늘로 설핏 내리쪼이는 별빛에 비친 수천 그루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음침한 잿빛을 띠고 있었고 이따금 나뭇가지에 달린 수백만 개의 잎사귀가 바람에 일렁이며 은빛으로 빛났다. 침엽수 특유의 가느다란 잎사귀에는 간간이 서리가 맺혀 흔들릴 때마다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부서져내렸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나무들의 밀집도가 높아지며 존이 가는 길가를 겹겹이 둘러친 나무들은 주위를 벽처럼 뒤덮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발에는 촘촘하게 자란 들풀이 덫처럼 얽혀오는 바람에 헛발질도 수차례였다. 숲 전체가 늪처럼 그를 가두어왔다.

 숲 가운데 완전히 그늘진 한 곳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수백 미터에 걸친 검은 숲이 바람결에 흔들려 흑해의 파도처럼 쓸쓸한 소리를 울리자 존은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때까지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져 있었던 존이 놀라 고개를 들자 탁한 파란색과 초록빛이 엉긴 청회색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을 가리던 구름은 점차 자리에서 비켜나고 있었고 그 틈새로 경직된 별빛들이 깨진 얼음조각처럼 간신히 스며나왔다. 먹구름을 뚫고 나온 달빛은 무척이나 쓸쓸해서 길을 밝히는 한편으로 음울한 정취를 더해갔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의 하부를 방황했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존 앞에는 굽이진 길목이 있었다. 그때 남자와 조우했던 장소가 여기였던가? 사실 그는 이 길을 지났었는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바람도 잦아들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오싹함은 더해만 갔다. 죽음처럼 조용한 숲 한복판에 서 있자니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무서워서인지 추위 때문인지 존의 몸에 덜덜 떨렸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 누군지도 모르는 이를 찾기 위해 질퍽이는 어둠 속을 배회하는 무의미한 일에 발을 들인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된 존이 막 뒤로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나무둥치와 나무줄기가 엉킨 듯 보이는 어두운 저편에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렸다.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춘 존은 그 남자일까 하고 생각했다. 자신을 부르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당장 떠오르는 가능성만 해도 무궁무진했다. 자신의 발걸음소리가 메아리친 것을 착각한 것일 수도 있으며, 순전히 그를 만났으면 하는 자신의 염원이 지어낸 소리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존은 그 희미한 소리에 약간의 기대를 걸어보기로 하고 다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꺾인 모퉁이를 돌자 끝없이 이어진 듯했던 나무들의 무리가 갈수록 듬성듬성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꼭 누군가가 정돈이라도 한 것처럼, 아까까지만 해도 길 한가운데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자란 히스 덤불은 길과의 경계를 뚜렷이 하고 있었으며 숲 가장자리에 다다를수록 키 큰 나무들은 드문 대신 작은 관목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갑자기 숲길이 뚝 끊겨 탁 트인 황야로 나온 존은 밝은 은빛으로 물든 풍경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불빛은 저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둠이라는 불협화음에 막 익숙해졌던 눈이 다시 밝은 불빛을 접하자 오히려 적응이 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저 멀리 무채색의 달빛 아래 푸르게 빛나는 신비스러운 저택을 마주하자 존은 마치 동화 속에 빨려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미로의 막다른 길에 자리한 것처럼 존의 시야를 꽉 채운 저택과 정원에서 밝힌 불빛이 더하여갈수록 막막했던 어둠이 걷히고 푸른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빛이 지금까지 죽 이어져왔던 강렬한 음습한 분위기를 망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눈앞의 저택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느낌은 단적으로 수려한 경관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겁게 패여 있는 세월의 주름과 차분하게 갈무리된 채 내려앉아있는 귀족다운 긍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저택 주변에는 몇 번이고 부수고 고쳐 지은 흔적처럼 군데군데 폐허의 잔해가 보였고 가파르게 뾰족한 지붕의 첨탑이 반쯤 부서진 채로 남아있었다. 조각난 채 파편만 남아 거꾸로 처박혀 있는 연록색의 석판은 비바람을 맞아 색이 한껏 바랜 데다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보이기까지 했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그러나 지은 지 백년은 족히 지났을 저택은 성을 왼편에 두고 있었는데, 가라앉은 회색으로 어슴푸레하여 옛 성보다도 못하게 희미해보였다. 안개처럼 몽롱한 저택이 환각이 아닌 실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등지고 있는 숲이었다. 저택의 뒷배경으로 그림자처럼 자리한 숲은 저택과는 대조적으로 수많은 갈가마귀 떼가 무리지어 모인 듯 새까맸다. 빛과 그림자, 고저택과 달, 바람과 별-그 모든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결과 저택은 비밀스럽고 쓸쓸한 인상을 풍겼다.

 더없이 아름답고도 황폐한 저택을 바라보며, 구름도 거진 다 걷힌 하늘에 뜬 달이 사위를 환하게 비추는 아래에서 우뚝 선 채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존의 앞에 기다렸다는 듯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는 검은 머리칼에 핏기 없는 뺨을 하고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거울에 반사된 환영을 보는 것처럼 검정 고수머리, 흰 얼굴 윤곽만 간신히 분간이 가는 정도였으나, 망자와 같은 납빛의 안색이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등지고 희끄무레하게 빛났다. 생기가 다 빠져나간 듯 창백한 얼굴의 남자는 그러나 무감각하게 죽어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눈만은 모종의 열정을 간직하고 이채를 띤 채였다. 그는 애원하는 듯한 태도로, 사뭇 우울하고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서 존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존의 피를 마시는 데에 대한 동의를 구하려 안달하는 것처럼 그는 존에게서 연민이라는 감정을 강요하고 있었다.

 존은 밤보다도 더욱 어두운 침묵 속에서 그를 무심히 비켜보았다. 그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은 탓일까, 아니면 그도 모르게 인근의 우울하기 그지없는 공기의 떨림에 감화된 탓일까. 존이 그 자신이 제삼자가 되어 멀리서 추이를 지켜보는 것처럼 별다른 감흥 없이 남자의 흐릿한 실루엣을 바라보는 동안 남자는 존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길게 자란 잔디가 그의 발밑에 채여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할 것 없다는 듯 느긋한 걸음걸이였다. 그러나 존에게 그의 존재는 마음 놓고 지켜볼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그가 존에게로 가까워올수록 존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며 본능이 막연한 불안감을 호소했다. 그건 천둥이 치기 직전의 고요한 긴장감과도 비슷했다. 어서 피하라고, 그에게서 멀리 멀리 달아나라고 힘껏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존은, 대체로 그러한 본능적인 직감을 신뢰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에게서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존은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일정하고 규칙적인 속도로 거리를 좁혀왔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그는 존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이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빛에 찔려 죽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홉 발짝. 열 발짝. 열한 발짝. 열두 발짝.

 둘 사이의 거리는 팔을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로 좁혀져 있었다. 때문에 푸르스름한 물이 든 유리같이 맑은 눈이 또렷하게 존을 응시하는 것이며, 환상에 취한 듯 확장된 동공이 미묘한 감수성에 젖어 흔들리는 것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의 존재감은 새벽별처럼 흐릿해졌고, 오로지 그만이 존의 앞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먹구름이 달을 스치며 사위가 캄캄해졌을 때 남자는 존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내디뎠다. 두려웠다. 그에게 이끌리면서도 그에게서 풍기는 지독한 냉기에 심장까지 성에가 끼고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남자가 손을 뻗어 겁에 질린 존을 끌어안았다. 존은 놀랍도록 손쉽게 그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그 순간 구름이 지나가며 달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중천에 뜬 달은 그 어느 것보다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시각각 달빛의 세기가 강해지며, 사위가 온통 선명한 은빛 광채로 물들었다. 존은 달빛에 환히 드러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또한 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남자의 눈동자가 그에게 마법이라도 건 것처럼, 그의 눈동자에 사로잡힌 존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꼼짝없이 남자에게 잡힌 존은 남자의 눈동자가 서늘한 열기를 띠고 바짝 다가오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조심스럽게 존에게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닿은 입술이 존의 다물린 입술을 살며시 열고 혀를 얽어왔다. 유령에게 홀린 듯 존은 그에 순종적으로 응했다. 이미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듯, 존은 그의 숨결이 뜨거운지 차가운지도 느낄 수 없었으며, 제 입술에 부비어 오는 그의 입술이 불타는 듯 뜨거운 것인지 아니면 얼음장처럼 차가운지도 몰랐다. 그의 손가락이 그의 허리를 붙잡아 오는 감각은 너무나도 선명했으나 한계 이상으로 전해져 오는 느낌에 그의 허리가 화염에 불태워진 듯, 또는 서릿발이 파고든 맨살에 동상이 걸린 듯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존의 수용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길고 긴 키스마저 그랬다.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사랑처럼, 지상에서 영원까지 죽 이어지던 키스는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으나 허무하고 잔잔하게 잦아들었다. 존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처럼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남자는 존의 뺨과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키스로 온기를 되찾은 따스한 입술이 존의 목덜미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목에 이른 입술은 금방 떠나갈 것처럼 느껴졌으나 오히려 아까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애무의 여운에 휩쓸린 존은 그의 이빨이 자신의 살갗을 파고드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듯 셜록이 존을 좀 더 세게 끌어안고, 동시에 이빨을 더욱 세게 박았을 때 치닫던 쾌감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고통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존은 목이 졸린 듯 가늘게 흐느꼈다. 숨결이 높아졌다가 푹 꺼지듯 가라앉았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내리는 꽃잎처럼 그는 끝없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심한 경련과 함께 존은 감각과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잃긴 했으나 간간이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했다. 고장 난 영사기처럼 간헐적으로 빛과 암전이 이어졌다 끊어지곤 했다. 흐릿한 시야에 남자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뭔가를 반추하는 듯 심각하고 무섭기까지 한 표정으로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존은 왜 그러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몸은커녕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기억과 망각의 사이를 오가면서도 존은 그의 입맞춤을 또다시 갈망하고 있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남자가 자신을 들쳐 안은 채로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존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그 미약한 움직임을 알아차렸는지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존이 힘들어하자 남자는 존을 자신의 품에서 내려놓았다. 잠시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되찾자 남자는 잠시 걱정이 어린 듯한 눈으로 존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앞장섰다. 존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말없이 암록색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흑백의 타일이 깔린 복도가 나타났다. 호박색 불빛이 그들의 앞길을 밝혔다. 그에게 이끌려 가면서도 억지로 끌려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인양 존은 말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느껴지는 터무니없는 비현실감과 꿈결처럼 아련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모든 일련의 상황을 그가 납득할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정말로 꿈일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남자가 발을 멈추었다. 멈춰선 자리에서 존을 흘깃 쳐다본 남자는 닫힌 문을 열었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문이 열리며 방 안에 떠돌던 밤공기가 복도로 밀려나왔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존을 쳐다보았다. 돌아가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듯, 잠시 존을 바라보며 숨을 돌리던 남자는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존은 낮게 코웃음 쳤다. 선택권을 주겠다는 듯 존에게 마지막 한 걸음의 결정을 떠넘기는 그의 태도가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돌아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존은 망설임 없이 그의 뒤를 따라들어갔다.

 

*

 

 낮은 격자무늬 창으로 을씨년스러운 은회색의 달빛이 간신히 스며들어왔다. 지금까지 미처 눈치채지 못했으나 하늘에서는 눈발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작은 격자창을 통해 비추이는 침울한 빛깔의 별빛이 겨우 방 안에 들어찬 어둠을 밝히는 정도였다. 달빛보다도 흐릿한 빈약한 햇살이 삼백년 전의 볼품없는 가구에 들이쳤을 광경을 그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방은 지나치게 천장이 높아 불균형한 조형감이 몹시 불안정했다. 장식품 하나하나는 아름다웠으나 멋대로 쑤셔박아놓은 것처럼 조야한 배치로 놓여있었다.

 세련되지 못할 뿐더러 투박하고 침침하기까지 한 방의 한가운데에 선 존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요?”

 

 미약했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이건 불공평해요.”

 

 당혹스런 듯한 목소리였다. 남자가 조용히 되물었다.

 

 “뭐가 말인가요.”

 

 존이 눈을 불안하게 깜박이다가 말했다.

 

 “난…아직 당신의 이름도 모른단 말입니다.”

 

 존이 쥐어짜내듯 소리쳤다.

 

 “반면에 당신은 나에 대해 뭐든 알지 않습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중얼거리듯 이었다.

 

 “정말로 모르겠다고요.”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혀끝이 건조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 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용기를 내어 가슴 속 깊이 자리하던 의문을 토로했다.

 

 “왜 내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 거지요?”

 

 질문하는 그의 목소리는 자제되어 있었으나 어딘지 불안정하고 날카롭게 들렸다. 길고 긴장된 공기가 방 안을 흐르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겨울바람이 스며드는 싸늘한 방 안에서 어스레한 달빛에 둘러싸인 남자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나직하고 느릿하게 목소리가 울렸다.

 

 “-나에 대해서 궁금해 하기를 바랐으니까요.”

 

 언뜻 보기엔 우월감에 가득 찬 듯 오만한 말투였으나 존은 어렴풋하게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말의 의미를 짐작해낼 수 있었다. 자신이 줄곧 느껴왔던 초조함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또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자신의 목줄기를 뜯어낼 수 있는 흡혈귀인 그도 존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 또한 두려웠던 것이다.

 

 눈이 더욱 심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창으로 눈송이들이 달려와 유리창을 때렸다. 굵은 눈이 창문을 이따금 뒤흔들었다. 방 안에 유일하게 켜져 있던 자그마한 초의 심지가 바닥까지 다다르며 불꽃이 깃발처럼 흔들렸다. 조그만 불빛에 비친 존의 눈에는 엄연한 공포심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두려워 떠는 순간에도 기이하고 모순된 감정이 존을 사로잡았다. 존은 떨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이름을 말해줘요.”

 

 남자가 존을 응시했다. 존은 거침없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눈빛에서부터 곧장 느낄 수 있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공포와 혐오가 뒤섞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미묘하면서도 격렬한 흥분이 그의 사지를 내달렸다.

 자못 엄숙한 태도로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은 셜록 홈즈입니다.”

 

 존이 그 이름을 또박또박 되뇌었다.

 

 “…셜록 홈즈.”

 

 그의 이름을 따라 말하는 존을 바라보는 셜록의 여윈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으나 꽤 만족스러워하는 인상이었다. 실제로 셜록은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 존의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고 혀로 굴리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셜록이 말했다.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불러줘요.”

 

 셜록이 요구했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거칠게 엉켜들었다. 방 안은 분명 추웠으나 두 사람을 감싼 공기는 열기를 띠고 있었다. 존은 숨을 한 번 들이켜고, 토해내듯 말했다.

 

 “셜록.”

 

 그 이름을 부름으로서 마지막으로 그러모았던 존의 이성이 송두리째 허물어졌다. 이제는 반항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자신이 그러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동물적인 육감으로 그것을 알아차린 셜록은 존을 그의 침대에 부드럽게 눕혔다. 매끈하게 덮여 있던 남색의 벨벳 침대보가 존의 실루엣을 따라 숙 꺼져들며 가장자리에 달린 금색 술이 화려하게 흩어졌다.

 존의 위에 올라탄 셜록은 무릎을 꿇고 몸을 수그렸다.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존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는 역겹지만 동시에 황홀하기도 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메마른 입술을 핥는 그의 모습에는 다분히 의도적인 관능미가 있었다. 은회색의 달빛을 등진 그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하얀 이와, 그것을 핥는 촉촉한 붉은 혀가 보였다. 먹잇감을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표범 같았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살짝 벌린 채 다가온 입술이 존의 목덜미 위에 멈추었다. 존은 그의 목에 닿는 셜록의 뜨거운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진홍색의 혀가 자신의 치열을 쓸어내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각성제처럼 존의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웠다. 셜록이 천천히 존의 목에 입을 맞췄다. 극도로 민감해진 목의 얇은 피부 위로 그의 입술이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러웠다. 입술이 열리며, 그 안에 도사린 두 개의 단단한 치아 기둥이 이제 막 존의 목을 건드렸다가 존이 움찔거리자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기력을 빼앗기는 듯 온몸이 느른해져왔다. 그의 생명력이 셜록에게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당연하게 예비되어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마땅한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존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나른한 황홀경 속에서 눈을 감고 기다렸다.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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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