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셜록을 뿌리치고 살롱을 나선 존이 가운데뜰의 정원으로 당도했을 때 푸르스레한 지평선은 이미 밤의 어둠으로 지워져 하늘과 땅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검게 변해있었다. 저택의 길게 늘어선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정원을 온통 희게 물들이는 통에 밤하늘에 깔린 어둠을 한 조각 떼어낸 틈새처럼 보이는 초라한 반달은 잿빛 구름무더기와 함께 힘없이 하늘을 떠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부셨다. 갑작스레 탁 트인 곳으로 나오자 눈앞에 보랏빛 점이 깜박거렸다. 초라히 빛나는 달빛마저도 휘황하게 느껴졌다.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어둠 속을 더듬어 걸었기 때문일까.
 어둠침침한 복도를 지나 장님이 된 것처럼 단단한 땅바닥을 디디어 가며 걸었다. 암석정원의 계단에서 다리가 꺾일 뻔하다 하고, 짧게 자른 주목 울타리에 발이 걸려 허둥거리기도 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걷고 또 걸으며 무사히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정원의 중심부를 향해 난 길을 따라 난 거뭇거뭇한 소나무의 형체가 드리운 그늘 밑에서 방황하다가 연못을 둘러싸고 둥글게 다듬어진 공터로 들어서니 환한 불빛에 눈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한없이 긴 꿈에서 가까스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축축했다. 정원을 휩싸고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는 짙은 안개가 흠뻑 묻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자신에게서 악몽을 꾸다 일어난 사람 특유의 찝찝한 식은땀 냄새가 풍기는 것 같다는 생각에 존은 기분이 나빠졌다.
 존은 뜻 모를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숨소리가 밤공기에 뒤섞이며 정적을 흐트러뜨렸다. 그러자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리며 겹겹이 둘러쳐진 베일이 걷힌 듯 시야도 맑아졌다. 저택에 도착할 무렵부터 사방에서 온통 옥죄여오는 분위기에 짓눌려있다가 풀려난 덕분인지 정교한 미관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상도 떠오르지 않던 머릿속이 한결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덕지덕지 낀 피로감이 조금이나마 풀리자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반투명한 유리가 사라지기라도 한 듯 주위 관물의 본래 색채가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낮이었다면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쳤을 진부한 밝은 색채들은 정제되어 곱게 갈린 안료처럼 본연의 선명한 빛깔로 빛을 발하고 있다. 바닥에 규칙적으로 깔린 판석은 수은처럼 싸늘한 푸른빛을 반사했다. 화강암 재질의 바닥돌에 고르게 퍼진 석영 조각들은 무기질적인 흰빛을 발산하고, 그 인위적인 느낌을 누그러뜨리려는 듯 곳곳에 놓인 이끼 낀 바윗덩어리들은 어스레한 밤빛 아래에서 보랏빛을 띤 초록색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목백일홍은 저마다 갓 봉오리를 틔워 올려 꽃잎이 활짝 벌어지기 전의 모양으로 야물게 오므라들어 있었고 연녹색의 잎사귀에서는 소박한 윤이 났다. 가지마다 다채로운 색색의 꽃송이를 매단 장미나무가 무리지어 있는 가운데 규칙적으로 주위를 둘러치고 있는 기둥의 홈에 도금된 세밀한 금녹색의 세공은 황야의 누런 모랫빛으로 생기가 없었으나 그것을 어지럽게 휘감고 도는 덩굴식물의 덩굴손은 어린아이의 손가락처럼 싱싱하기 그지없었다. 연못 둘레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휘감아 돌듯이 무리지어 핀 꽃들은 강렬한 색으로 빛나 보이기도 하고 또 달빛에 그 색조가 바래보이기도 했으며 복잡한 실루엣의 음영을 검불에 드리우며 자아내는 정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존은 그 순간 파우스트를 생각했다. 파우스트는 외친다. 멈추어라! 너 정말로 아름답구나! 감상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환호성이 잦아든 후의 나른한 공백처럼 공기마저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섬세하게 짜인 거미줄처럼 그를 가두고 있는 향기의 올가미에 갇힌 존은 얼치기처럼 서서 그를 둘러싼 비밀스럽고 낭만적인 분위기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존은 깨닫는다. 노상의 꽃들마저도 이 곳의 꽃들처럼 철저히 외면당하고, 무시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서 있는 공간을 점령한 비현실성을 자각하자마자 이제껏 기껍게 여겼던 고독이 도리어 소름끼치는 냉기로 돌변해 그의 등골을 싸하게 얼린다.
 도취의 나른한 여운이 산산이 깨어져내리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리는 성 싶었다.

 

 시간이 비껴간 듯 정지된 공간에서 모든 것이 침몰한다.

 

 존은 그 자신이 소름끼치도록 조용한 침묵 한가운데에 내던져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유모를 불쾌감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저택에서 새어나오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존의 귀를 간질이며 그의 옆에 아무도 없다는 공백감을 대신 채워주었었다. 나뭇가지에 달린 이파리들이 이따금 나부끼며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내었음은 물론이며 하다못해 발치에 나뒹구는 꽃가지들이 흔들리며 서로 스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그의 귓가를 울렸으나 지금은 달랐다. 존 혼자서만 뚝 떨어진 밀폐된 공간에 떨어진 것처럼 주위는 스산하리만큼 고요했다.
 하늘 귀퉁이에 비스듬히 걸린 달은 그저 무심하게 빛을 뿌리며 정원을 검푸른 색조로 물들일 뿐이었다.
 완전히 캄캄해진 연못의 수면 위에 비친 은빛의 달그림자가 부드럽게 너울너울 떨렸다. 연못 가운데에 설치된 새하얀 대리석 수반으로 떨어지는 분수의 물방울들이 튕겨오르며 공기 중을 떠도는 습기를 한층 무겁게 만들었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무더운 공기는 금방 비가 쏟아져내리고 벼락이 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보였다. 물결 한 점 일지 않는 수면은 얼어붙은 것처럼 매끈했다. 나선형으로 배배 꼬인 채로 자란 나무의 어둠은 그림자처럼 밤을 품고 있었으며 죽음을 연상시키는 검은빛 물속에 뿌리를 잠그고 연못에 드문드문 봉오리를 띄운 하얀 수련은 미동도 없는 조각처럼 생명력이 없어보였다.
 안개가 뭉덩이지며 흐릿하게 뭉친 빛무리에 반사된 풍경은 사실주의적인 흑백의 소묘처럼 무감했다. 고풍스런 멋이 물씬 풍기는 정원은 몹시 매력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비인간적인 무채색으로 얼룩져 음침해보였다. 텁텁하게 물감을 덧칠한 그림에서나 느껴질 법한 음습한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았던 존은 측백나무 아래의 낮은 벤치로 비칠비칠 걸음을 옮겨 엉덩이를 걸쳤다.
 존은 한숨 돌리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당장 떠오른 것은 셜록이었다. 간신히 정리되던 머리가 셜록에 대한 생각으로 다시 복잡하게 뒤엉키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생각을 하자 일말의 안도감이 든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또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몇 명이나 되는지도 모르는 흡혈귀들이 돌아다니는 괴물들의 아지트인 홈즈 가의 저택 안에서 그나마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셜록 하나뿐이라는 것을 존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건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셜록 홈즈도 존 왓슨의 두려움의 대상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셜록이 본연의 불친절한 성미를 최대한 억누르고 자신에게만큼은 최대한 상냥하게 대해주려는 노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모습의 셜록과 흡혈귀로서 존의 피를 탐하는 인간 외적 존재로서의 모습의 셜록 사이에서 느껴지는 간극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뱀파이어와 인간이라는 먹이사슬의 층위에서 포식자의 입장도 아니요 피식자의 입장이었으므로 더욱 그랬다.
 셜록과 부대끼며 느껴지기 시작한 일종의 감정적인 변화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자신이 셜록에게 느끼는 호감이 과연 흡혈행위를 당할 때 느껴지는 쾌감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나는 신체적인 증상인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진정으로 그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인지는 자의적인 판단으로만 잘라 판단하기에는 너무도 불확실한 일이었다.
 복잡한 생각으로 끙끙대던 와중 살롱을 빠져나올 때 가지 말라는 듯 자신을 바라보던 셜록의 처량한 눈빛이 문득 떠올랐다. 그로서는 분명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존 자신이 그때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군 것만은 확실했으니 다시 만나면 사과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처음으로 그를 물고 나서도 근 한 달 만에야 그를 찾아올 정도로 느긋한 셜록이다. 셜록의 괴팍스런 성미로 미루어 짐작해보아도 그가 아무런 언질없이 멋대로 몇 달이고 잠적하는 것도 그다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다. 잠적하면 오히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길 테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존."


 거짓말처럼 셜록의 목소리가 들렸다.

 

*

 

 하늘 높이 뜬 달은 은빛을 더해가며 불안 속의 조화를 부추긴다. 왠지…불빛이 차가워진 것 같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나요.”


 평온한 어투.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을 대하는 듯 지극히 차분한 목소리에 존은 도리어 그 자신이 조바심을 치기 시작했다. 초조한 듯 입술을 몇 번 잘근거리다가 존은 다소 급하게 앉은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별로…아무것도.”


 한 박자 늦은 응답에도 셜록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 점이 존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렇군요.”


 달빛을 등진 사내의 시커먼 윤곽이 점차 가까워온다. 그의 등장을 신호탄으로 안개가 눈에 띄게 사라져갔다. 공기 중에 파랗고 투명한 유약을 한 꺼풀 바른 것처럼 자욱한 안개가 깨끗하게 물러가고 있다.
 드러난 그의 창백한 얼굴은 언제나처럼 금욕적인 인상을 풍긴다. 강철같은 회색 눈동자가 파랗게 빛난다. 존을 바라보는 셜록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지만 깊숙이 감춰진 무의식적인 오만한 기색은 그대로이다. 그 앞에서 존은 마치 뱀 앞에서 꼼짝 못하고 얼어붙은 사람처럼 얼이 빠진 채로 서있었다. 셜록이 난데없이 등장한 것에 놀란 것일까. 아니, 그건 아니다.
 존이 생각에 잠긴 사이 셜록을 그에게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 마치 키스를 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다. 이거야말로 놀랄 만한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존은 그다지 놀라지는 않는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굴던 셜록은 키스를 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서로의 숨결이 코끝에 끼칠 정도로 가까이 달라붙은 그 틈새-간격을 고수하며 입을 연다.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존.”


 미적지근한 숨결이 정수리에 가만히 떨어진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며 존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말해봐.”


 존의 허락이 떨어졌지만 셜록은 곧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존은 인내심을 가지고 셜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고독과 침묵에 싸인 정원의 한가운데를 둘러싸고 앞다투어 핀 장미들이 불빛을 받아 고운 호박색으로 반짝였다. 머리 위로 뜬 달이 움직이며 두 사람의 얼굴에 던져진 음영 또한 벌레가 기어가듯 뺨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셜록이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나는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있습니다.”


 메커니즘적인 측면에서 말이지요, 하고 셜록이 덧붙였다.


 “그들은 희생자들의 흐느낌, 애원, 고통에 찬 숨소리를 들으면서 희열을 느낍니다. 종반에 이루어지는 살인 행각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카타르시스의 절정 부분에 해당하지요. 표적의 생사를 좌지우지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다고 착각하는 것에서 살인자의 행동 동인이 시작되는 겁니다. 사디스틱하고, 어떻게 말하면 병적인 쾌감이 가미된 정신적 충만감이랄까요…….”


 둘 사이의 간격은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얇은 수트의 겉감이 만나며 나직한 사각거리는 소리를 낸다. 옷자락의 우아한 마찰음은 셜록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비밀스러운 속삭임에 맞먹을 정도로 커다랗게 존의 고막을 울린다. 차가운 밤공기에 식었던 체온이 천을 사이로 두고 서서히 덥혀진다.


 “그런 것을 추구하고 극대화하려는 과정에서 그는 점점 죄의식도 팽개치고 살인을 거듭하게 되지요. 더욱 극적인 폭력을 자행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셜록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점차 열이 오르는 듯 머릿속이 멍해져왔다. 만약 저것이 제삼자의 이야기를 빙자한 셜록 자신의 이야기라면 역겹기 그지없을 것일 게다. 헛헛한 속에서 뭔가 치밀어오르는 듯 역한 느낌이 일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존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이해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것에 더욱 가까웠다. 이해하는 순간 완전한 공포에 지배되어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이해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었다.
 존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휘청이는 존의 몸뚱이를 셜록이 감싸안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존을 품 안에 가두었다. 마음만 먹으면 금세 풀려날 수 있을 정도로 느슨한 속박이었다. 존은 팔을 뻗어 셜록을 밀어내려고 했다. 떨리는 팔을 들어올려 셜록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셜록은 허탈할 정도로 쉽게 존의 팔을 잡아채었다. 그다지 강한 악력을 발휘한 것도 아니건만, 아니 오히려 부드럽고 상냥한 몸짓 축에 들었건만 존의 반항은 시시하고 짧은 허우적거림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련의 계획된 과정처럼 물 흐르듯 이루어진 동작의 흐름이 끝나고 존은 진이 빠진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셜록의 손이 존을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등을 쓸어내렸다. 그 동작은 몹시 느리고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았다. 등을 쓸어내린 손은 축 늘어진 어깻죽지를 매만지고 살살 그의 팔꿈치를 쓰다듬다가 사뭇 다정하게 손을 잡아올렸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제 위치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존의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더듬어올리던 셜록은 잠깐 망설이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존의 손가락 사이로 끼워넣으며 깍지를 끼었다. 접촉한 살갗에서 전해져오는 묘하게 따스한 느낌이 안정감을 주었는지 가파르게 치닫던 존의 숨소리가 점차 조용해졌다.


 “두렵나요?”


 셜록이 재차 물었다.


 “내가 당신을 그렇게 여기고 있을까봐 두려운 게 아닌가요?”
 “그래!”


 존이 외쳤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날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가 없어. 두려워하지 않고 싶어도 두려워.”


 존은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흐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움직임에 셜록은 가만히 존을 더욱 가까이 당겨 안았다. 존은 딱히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어. 현실감이 들지 않았으니까. 의외로 냉정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알아요."


 그리고 그러한 비정상적인 평정심은 언제가 되었든 별안간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가득 차오른 수면에 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고, 예상치 못한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넘쳐흐르는 것처럼.
 그것에 대해 토로하려던 존은, 그러나 곧 입을 다물었다. 굳이 목소리를 내어 그가 느꼈던 복잡한 심경의 전말에 대해 내뱉지 않아도 셜록은 존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둘 사이에는 이해와 공감이 자리했다. 셜록과 존 모두 그것을 확연하게 느꼈다.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텅 빈 공허함이 아닌 안온함이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다. 거의 느껴지지 않는 셜록의 희미한 맥박과 크게 두근거리는 존의 맥박이 교차했다. 손을 뻗어 만지려고 한다면야 뚜렷하게 매듭지어진 그것을 정말로 만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따스한 정감이 넘치는 공기 속에 침잠해있던 둘 중에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사람은 셜록이었다.


 “기억해요, 존.”


 존은 셜록을 올려다보았다. 흰 이마 아래로 역광이 진 눈가. 섬세하고 가지런한 속눈썹 아래에서 빛나는 두 눈이 수많은 의미를 지닌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존은 홀린 듯이 셜록의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빨려들어갈듯이 멈추지 않는 시선의 마주침이 이어지고, 이어졌으며……
 아찔한 장미향기가 하나가 된 두 사람의 실루엣을 감쌌다. 홍조 띤 보드라운 어린 뺨처럼 연분홍색으로 발그레한 꽃망울이 무더기로 만발한 사이에서 마치 꽃봉오리가 순식간에 피어오르는 듯한 키스가 계속되었다.

 

 그렇게 입맞춤은 언제까지고 계속되고 당사자인 두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못할 것같았으나 모든 것에는 끝이 찾아온다. 그것도 느닷없이.
 그들이 서 있는 장미넝쿨 뒤편으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꿈결에 몸을 맡긴듯이 키스에 몰두해있던 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떼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존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들어갈까?"


 셜록은 미련없이 동조했다.


 "그러죠."

 

***

 

 루드밀라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뛰다시피 빠른 걸음걸이였다. 급히 움직이느라 드레스 자락에 성가신 나뭇가지가 걸리며 아슬아슬하게 찢어질 듯한 소리가 났지만 자리를 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살롱 안에 감도는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와 분 냄새에 금방이라도 현기증으로 쓰러질 듯한 기분이 들어 산책을 나왔다가 생각지도 못한 광경-홈즈 경의 동생과 그 주치의라는 남자가 입맞춤을 나누는 모습을 보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르탕스와 함께 그 둘의 이모저모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치던 참이었는데 난데없이 둘의 밀회 장면을 목격하게 되다니. 게다가 바보같이 수풀을 건드려서 둘을 놀라게 하기까지 했다. 얼마나 바보같은 자신이란 말인가!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며 생각했다. 그 둘의 사이가 보통 사이는 아닐 것이라고는 짐작했지만 역시나였다. 젊은 나이가 아닌데도 꽤나 귀여운 인상의 의사 선생을 은근히 마음에 들어하던 오르탕스와, 마치 연애 소설의 주인공처럼 차갑고 쌀쌀맞은 미남형의 홈즈 가의 차남이 왠지 모르게 눈 앞에서 아른거리던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안된 일이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이쯤이면 충분히 멀어졌겠지 싶어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추었다. 곱게만 자란 몸은 조금 뛴 것만으로도 심장이 곧 멎을 것처럼 힘들어했다. 상기된 뺨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작정 길이 보이는 대로 뛰다가 길을 잃은 듯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앞쪽의 수풀길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내보인 이의 정체를 알아차린 루드밀라가 약간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카른슈타인 여백작님?"


 그녀는 루드밀라의 부름에는 대답하지 않고 후후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지그시 갖다대며 쉿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 행동에 루드밀라는 저절로 목소리를 낮추며 다시 물었다.


 "여긴 어떻게?"
 "모라비아 공작 영애처럼 나도 좀 답답해서 말이지요. 바깥 바람을 쐬니 시원하고 좋지요?"


 카른슈타인 여백작이 싱긋이 웃으며 천천히 자신에게 가까워져오는 것을 보며 루드밀라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분명 자신은 아까 뛰면서 저택에서 멀어졌으면 멀어졌지 가까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파티장을 나올 때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카른슈타인 여백작으로서는 저 방향에서 걸어나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묘한 위화감에 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루드밀라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에 카르밀라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독수리에게 표정이 있다면, 그가 급강하하며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의 지을 법한 그런 미소였다.
 미소 띤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하얗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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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살롱 내부의 정경을 넋 놓고 바라보던 존은 멀리서 들려오는 요란한 웃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옅은 노랑과 푸르스름한 장미가 번갈아 넝쿨을 감고 있는 은은한 빛깔의 중국산 자개 병풍을 지나 일단의 숙녀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나중에 입장했지만 지금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이의의 여지없이 카른슈타인 여백작이었다. 웃는 그녀의 몸이 흔들리며 완벽한 두상 위로 커다랗게 물결치는 적색의 숱 많은 머리칼이 찰랑거리며 금빛을 발했다. 다소 크다 싶을 정도의 목소리로 웃고 있었지만 그 모습마저도 기막히게 우아하게 보였다. 그녀의 자태며, 대화를 이끌면서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방식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에게서 감도는 분위기에는 우아함이 섞여있었으며 자극적인 뒷맛을 남겼다. 비록 신사들에게는 그러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주는데 인색한 그녀였지만 멀찍이서 그녀가 소녀들에게만 베푸는 맑은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또한 신사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생명력 강한 들장미처럼 화사하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산하며 좌중을 장악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찌 보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미려했다. 때때로 그녀는 수백 년은 산 마녀처럼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사춘기 소녀처럼 풋풋하게도 보일 정도로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미모를 지녔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나 할까, 카른슈타인 여백작의 옆에 선 아이린 애들러는 살롱을 휘황하게 밝히고 있는 불빛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처럼 희미한 어둠을 품고 있었다. 검푸르게 빛나는 눈동자는 여독의 잔재로 피곤해보였지만 지적인 광채로 반짝였고 군살 없이 늘씬한 몸매에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검정 새틴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달밤 아래의 어둠에 묻힌 채로 핀 한 떨기의 달맞이꽃 같았다.
 미미한 존재감이었지만 어쩐지 존은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누군지 당장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존이 그녀를 지켜보는 사이 그녀는 다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살며시 몸을 일으켜 열띤 대화를 주고받는 숙녀들과 여백작이 동심원으로 둘러앉아있는 무리에서 천천히 벗어났다. 옆으로 언뜻 보이는 갸름하고 야윈 얼굴은 병적일 만큼 새하얬다. 느릿하고 나른한 움직임으로 저만치 걸어가는 그녀의 목을 감싼 장신구가 촛불의 어스름한 빛을 반사하며 아른거리는 광채를 내었다.
 어느 샌가 화이트 드부아의 상감 세공 장식장 곁을 지나치는 그녀를 줄곧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무뚝뚝한 음성이 들려왔다.


 “뭘 그렇게 유심히 보고 있는 겁니까?”


 아 그렇지, 셜록. 존은 셜록이 자신의 옆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찬 때부터 따분해하며 열의라곤 조금도 없는 태도를 고수하던 셜록은 살롱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흥겨운 분위기에 섞여들기는커녕 살롱의 외곽으로 물러나서는 조용히 주변을 응시하는 데에만 시간을 쏟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존이 뭐라고 대꾸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존의 시선이 머물던 쪽을 훑어본 셜록이 곧장 내뱉었다.


 “당신 취향도 아니잖아요.”
 “셜록!”


 조그맣게 셜록을 나무라며 존은 혹시 아이린이 셜록이 한 말을 들었을까 싶어 슬쩍 그녀가 서 있던 편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존은 아이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데없이 시선이 마주친 데에 당황한데다 다시 뭐라고 떠들어대려는 셜록을 제지하느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마치 이편의 정황을 모두 꿰고 있다는 듯이 태연자약하게 웃고 있었다.
 단순한 착각일까?
 그렇게 생각하려는 순간 셜록이 말했다.


 “착각이 아닐 겁니다.”


 의미심장한 말에 존이-셜록이 또다시 아무런 전조도 없이 존이 하고 있던 생각을 읽어내었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존의 질문에 셜록이 잠시 입술을 비죽거리다 대답했다.


 “그녀도 우리와 같은 무리에 속한 자이니까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지난 몇 개월간 셜록과 그런대로 친밀해진 존이었지만 뱀파이어와 함께 아무렇지도 않게 한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에게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그건 마치 줄곧 풀어놓고 키운 뱀이 독사라는 것을 방금 알아차린 사람이 느끼는 갑작스런 두려움과 같았으니까.
 더군다나 셜록이 귀띔해주기 전까지는 그녀가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 두려움은 더했다.


 “정확히는 반만요. 몽마가 흡혈귀의 정을 잉태한 것의 산물이라고 하더군요. 또 여백작은 마이크로프트와 같은 클랜의 일원이랍디다. 어린 여자아이라면 그저 사족을 못 쓰는-”


 아이린 애들러 뿐 아니라 저편에서 아직도 소녀들과 즐거이 수다를 떨고 있는 카른슈타인 여백작마저도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존을 엄습하는 공포감은 더욱 강해졌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해서 다르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소녀들의 발그스름한 뺨을 비추는 장미 모양의 등갓 아래로 흘러나오는 불빛도 핏빛으로 보였다.
 정찬이 끝날 무렵에 일어났던 해프닝이 떠올랐다. 마이크로프트가 가볍게 바람을 잡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아예 몸이 마비되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었지 않은가. 만약 그때 마음만 먹었더라면 연회에 초대된 사람들의 피를 모조리 빨 수도 있었으리라. 뱀파이어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찬이 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공포에 질려 굳어버린 사람들은 꼼짝없이 목덜미를 내밀고 있었을 것이며 그들은 양순한 먹잇감들의 동맥에서 힘차게 뿜어져나오는 피를 마음껏 포식할 수 있었겠지. 사람들이-이 자리에서 무사히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홈즈 경의 악취미적인 소행이라고 평하며 입에 올릴 것이 분명한 그 장난은 존의 마음속에서 또 다른 공포의 기억으로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 것도 없었다. 본색을 숨긴 채 독니를 감춘 뱀처럼 도사리고 소녀들의 육체에서 풍기는 신선한 향기를 전채요리 삼아 들이마시고 있는 여백작의 마음만 내킨다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저 소녀들도 그저 저항 하나 없이 조용히, 그리고 무력하게 숨을 거두고 말겠지.
 자신의 말에 존이 겁을 집어먹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 챈 셜록은 입을 다물었다. 일찍이 입을 꾹 닫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는 부러 신경질적인 태도로 툭툭거리는 등 어쨌든 그 딴에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달변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셜록이었지만 이런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는 데는 소질이 없었고 말을 그친 셜록은 계속해서 손을 쥐었다가 폈다 하거나 괜스레 그들이 앉아있는 의자에 놓인 반원형의 쿠션의 위치를 바꾸거나 하며 불안해했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고막으로는 활기찬 얘깃소리가 새어들어오고는 있었으나 그것은 마치 완벽하게 분리된 딴 세상의 이야기마냥 멀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존…….”


 셜록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으나 존은 매몰차게 그의 말을 자르고 일어서며 짧게 말했다.


 “잠깐 머리를 식히고 와야겠어.”


 놀랍도록 매끄러운 거절이었다. 셜록은 존이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살롱의 문이 조용히 닫히며 존의 모습이 한 자락도 보이지 않게 되자 셜록의 얼굴에서 혈색이 싹 가셨다. 갓 내린 눈처럼 창백하게 무표정으로 얼어붙은 그는 하얀 눈이 덮인 외길마냥 외로워보였다. 그나마 자리하고 있던 인간미조차도 한 조각도 남김없이 사라진, 깡마르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 내려앉은 것은 우울, 바로 그것이었다.


*

 

 포근하고 상쾌한 저녁이었다.
 조각조각 해진 구름이 하늘 위로 흘러가며 달빛을 가렸다. 그때마다 구름 그림자가 후원에 널린 폐허의 잔해 위에 우뚝 선 채로 부서져내린 흉벽을 뒤덮었다. 구름 아래로 드리운 뿌연 그림자 속에 선 나무들은 온통 회색으로 보였다. 달은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며 숲과 정원, 그리고 그 사이에 둥글게 자리한 공터를 우울한 빛깔로 물들였다.
 느릿하게 흐르는 달빛의 광채, 고인 물처럼 움직이지 않는 공기, 산들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무더운 초여름의 날씨.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 죽음같은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에서 세 뱀파이어들은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이날 밤의 모든 풍경 속에서는 무언가 아주 독특한 분위기가 풍겼다. 봄밤의 후텁지근한 공기와 습도가 만나 안개가 부풀어올랐고 그것은 미로처럼 심은 정원수 사이에 짙게 걸려 그렇지 않아도 희미한 그들의 형체를 더욱 분명치 않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세 명 모두 검정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놓인 등불이 꺼져가며 내뱉는 창백한 미광을 받아 거의 그림자처럼 보이는 어두운 실루엣으로 보였다.
 연기처럼 은밀하게 다가온 밤안개는 뱀파이어들의 기척을 잠재우는 한편으로 그들 주위의 잔디며 꽃나무를 베일로 감싼 것처럼 아늑하도록 엷은 색조로 감쌌다. 또한 흐릿한 달빛이 안개에 난반사되며 경치를 한층 은은하고 감미롭게 물들였다.
 그들을 둘러싼 경관은 기묘하기는 했지만 아름다웠다. 커다란 보리수가 신록의 잎사귀를 피워내고 있었고 고만고만한 키의 장미나무들이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것처럼 투박한 모양새로 가지를 뻗은 채로 그들 주위에 빽빽이 둘러서 있었다. 장미뿐만 아니라 발치에 무성하게 채송화와 데이지꽃과 민들레같은 풀꽃들이 만발한 모습은 우연히 잡초가 우아하게 우거진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보였다. 입구에 세워진 튜더식의 철제 아치를 제외하면 정원에서는 어수선하게 연출된 풍경화처럼 꾸밈없는 아름다움이 배어나왔다. 극도로 계산적이지만 전혀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도록 연출된 자연스러운 한 폭의 미관에 세 남녀는 녹아든 것처럼 잘 맞았다. 몹시도 현대적이며 말쑥한 옷차림의 그들이었지만, 마치 그들 자신이 세심하게 조경된 정원에 배치된 관물의 하나이기라도 하듯 그 장소의 분위기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다. 사방은 적막했다.
 무덤처럼 깊고 조용한 고요에 잠긴 세 사람은 주변의 매혹적인 전망에 깊은 감동이라도 받은 것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저마다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을 만큼 나른한 침묵에 파묻혀있는가 싶었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불안 속의 조화처럼, 서로에 대한 무심함을 가장한 그들의 침묵은 곧 무너질 모래성처럼 위태하기 그지없었다. 공기 중에는 무언가 긴장감이 어린 엄숙함 같은 것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요정들의 축제에 참석한 인간처럼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사이에 던져져 유리되고 동떨어진 채 겁에 질려 입을 다문 것도 아닌데 말이다.
 누구 하나가 먼저 말을 꺼내기만 하더라도 시작된 대화에 기분 좋게 빠져들 수도 있었겠지만 물론, 누구 하나도 가까스로 이룬 그 균형을 깨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숲의 지평선 너머로 기울어가는 달빛 아래에서 그들이 괴이한 엄숙함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도 저편의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초조하고 감미로운 음악의 소리는 끊어질듯 말듯 이어지며 고요한 밤공기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환락을 희구하는 사람들의 열망은 분별없는 태도와 몽롱한 사고가 함께 뒤섞인 이유 없는 열성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습관적으로 말초적인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에 오로지 교리적인 근거에서 비롯된 죄악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항상 그렇듯이 그들은 그러한 양심의 낌새가 조금이라도 고개를 쳐들만한 기회를 자신들에게 부여하는 것을 기피하다 못해 증오한다. 때문에 그러한 시간적인 틈새가 생겨나지 않도록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얼른 새로운 유희거리를 찾아내어야 한다는 부르주아적인 강박관념에 지나치게 젖어 있다.
 그러나 시작된 음악은 언젠가는 멈춘다. 한순간 정적이 찾아들고, 비어버린 공백을 틈타 한 줄기 혼란스러움이 빈 공간을 메운다.
 그 순간 산들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굳어있던 석상이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나른하게 한쪽으로 기대어 앉아있던 아이린 애들러가 단정한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움직임은 프레임 단위로 움직이는 사진 속의 인물처럼 사실적이면서도 부드러웠고 그래서 더욱 감각적이었다.
 핏빛 입술 사이로 나직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아가씨들 말이 맞아요.”

 

 목소리는 울림도 없고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이상했다. 왠지 유령처럼 들렸지만, 그러면서도 매력적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아이린의 말에 마이크로프트는 계속하라는 듯이 살짝 고갯짓을 했고 아이린은 입술을 말아올려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낡아빠졌다는 말 말이에요.”

 

 비단결 같은 칠흑의 속눈썹이 나비의 날개처럼 몇 차례 빠르게 깜박였다.

 

 “언제가 되었든 당신 저택에서는 항상 반쯤 죽은 꽃향기와 묵은 먼지 냄새가 진동을 하지요. 당신의 그 일관성 있는 취향은 도무지 변할 기미가 보이질 않는군요.”

 

 그녀는 영민하게 반짝이는 눈길을 셜록이 앉은 방향으로 살짝 보내었다가 다시 마이크로프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요 몇 년 사이 재미있는 일을 벌인다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 당신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네요.”

 

 마이크로프트가 느릿하고 현학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처음 얼굴을 마주했던 세상은 오래 전에 늙어버렸는데도 아이린, 당신은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군요.”
 “같은 말을 그대로 되돌려드리도록 하지요.”

 

 아이린은 그렇게 말하며 버드나무 가지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여 앞으로 흘러내린 검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들의 중간 지점에 놓인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그녀의 하얀 목과 실크 가운 사이로 드러난 어깨를 비췄다. 진한 버건디 색으로 물든 촉촉한 입술은 병색이 감도는 듯한 고운 크림색의 얼굴 위에서 미소짓고 있었으나 아치형으로 우아하게 휘어진 검은 눈썹 아래에 자리한 어둡고 무표정한 눈은 차갑게 빛났다.
 물수제비처럼 수면 위쪽만 통통 건드리던 대화는 결국 둔중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깊숙이 잠겨든다. 그러니까 아무리 본질과는 관계없는 쪽을 공연히 들추어낸다고 해도 결국에는 본심을 꺼내놓고야 말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셜록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간파하기란 힘이 들었으나, 지금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보헤미안 스캔들 때였지요?”

 

 아이린이 선수를 쳤다. 갑작스런 지적에 허를 찔린 것처럼 머뭇거리던 셜록은 곧이어 대꾸했다.

 

 “왜 왕위 계승자를 마다했는지 이제야 알겠군. 하긴 일개 변호사 따위와 정분이 나서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칠 리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영생을 얻게 되면 세속의 영욕 따위에는 한결 둔감해지게 되니까요. 하물며 그게 일개 소국의 왕자 따위라면 더욱.”
 “나이를 예측해내지 못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고 말이지.”

 

 셜록의 가시 돋친 말에 아이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아직도 염두에 두고 있었군요!”
 “마치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시치미 떼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아이린은 마이크로프트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재주도 좋군요. 당신하고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인간을 데려왔을 줄이야.”

 

 그녀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흐릿하게 웃음을 띠며 말했다.

 

 “셜록이 기분 나빠 할 겁니다.”

 

 그 말에 셜록이 쏘아붙였다.

 

 “사려 깊은 척 하지 마, 마이크로프트.”

 

 둘이 서로의 신경을 긁는 꼴을 보며 아이린은 무척 즐거워했다. 아예 둘의 말다툼을 관전하려는 자세를 취하기까지 하며 그녀는 촌평을 날렸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닮았군요.”

 

 그 말에 셜록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한편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그러던 말던 여전히 흐릿하게 미소를 띤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따지고 보면 나와 셜록보다는 당신과 셜록이 더욱 가까운 관계가 아닐까요. 휘프노스와 타나토스가 근연관계인 것처럼, 당신들도 그럴 테니까요. 1.”

 

 모종의 것을 암시하는 듯 의미심장한 어조의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이상하게 들떠오르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착 가라앉았다. 아이린은 푸른 눈에 색정적인 불꽃을 담은 채로 열정으로 파르르 떨리는 콧방울을 지닌 머리를 뒤로 젖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의 시선은 아주 잠시 셜록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고 곧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시선을 내리깔았다. 잔혹한 붉은색을 띤 입술만이 변함없이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정원의 모퉁이를 스치며 쏴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얕은 잠을 자고 있던 까마귀 떼가 놀라서 푸드덕 날아올랐다.
 밤하늘의 어둠 속으로 날아가는 까마귀들을 꿈꾸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며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그는 몹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더구나.”

 

 숲의 나무를 뒤흔들고 한층 약해진 바람이 날아와 셜록의 단정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셜록은 흥이 깨졌다는 듯이 혀를 찼다. 셜록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공터의 입구 쪽으로 몸을 돌리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전쟁을 겪은 사람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더욱 드물겠지.”

 

 셜록과 마이크로프트는 한 차례 눈빛을 교환했다. 아이린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둘 사이의 무언의 소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셜록은 무언가가 못마땅한 듯 떨어진 꽃잎 조각을 발뒤꿈치로 자근자근 짓밟더니 커다랗고 낮게 걸린 달을 등지고 파르스름한 실루엣으로 빛나는 나무들 사이로 성큼성큼 사라져버렸다. 어둠으로 뻗은 길을 따라 땅 속 깊이 박힌 철제 아치에 엉킨 장미 덩굴이 그치지 않는 미풍에 리듬을 타듯 움직이며 조용히 흔들렸다.

 

 

 


1.몽마인 아이린과 죽음과 관련된 혈족인 셜록과의 관계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꿈의 신인 휘프노스와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가 형제관계라는 것과 빗대어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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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그럼 이만 마치도록 합시다.”

 

 청진기를 갈무리하며 존이 말했다. 그 말에 레스트레이드는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슬쩍 존의 눈치를 살폈다. 레스트레이드가 이편을 연거푸 흘깃거리는 것을 알아차린 존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원하시는 대로 철분제 처방은 해드리죠. 하지만 과다복용은 좋지 않다는 점 유념하세요.”
 “감사합니다, 닥터 왓슨.”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렉 레스트레이드를 존은 몰래 염려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항상 지나치게 건강에 신경을 쓰는 이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위가 혹시라도 심기증의 초기 증상을 약하게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작은 의심에서 비롯된 걱정이었다. 하지만 반백으로 머리가 희끗희끗해져가는 중년의 남자가 스스로의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하지 못한 일일 터였다. 마음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작은 의심을-아직은-굳이 지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존은 적당한 인사치레를 마치고 경위의 방을 나섰다.
 진찰을 끝내고 왕진비를 받고 돌아가는 존의 눈이 언뜻 무의식적으로 레스트레이드의 책상으로 향했다. 어지럽게 서류가 쌓여있는 사이로 청동 잉크스탠드가 보였다. 경위의 방이 전형적인 헤플화이트 양식으로 화려한 곡선미의 가구가 놓인 훌륭하고 중후한 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직선적이고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모양의 잉크스탠드는 조금은 의외로 보이는 집기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존이 나가다 말고 그것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레스트레이드가 웃으며 말했다.

 

 “썩 어울리진 않지요? 선물로 받은 것이라서 말입니다.”

 

 겸연쩍어하는 듯한 그의 말에 존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요, 멋진데요.”

 

 그렇게 말하는 존의 시선은 이제 잉크스탠드 아래에 짓눌려 있는 어떤 편지봉투로 옮겨가 있었다. 익숙한 보라색의 편지봉투는 어디선가 분명히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하고 곰곰이 생각하며 기억을 더듬는데 레스트레이드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우회적인 축객령에 존은 멋쩍어하며 손에 든 왕진 가방의 손잡이를 고쳐 쥐고 방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원래는 조금 더 나중이었던 오늘의 진료 시간을 앞당긴 것도 이 뒤에 있을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라고 전해 들었었지. 사정을 알 만큼 알면서도 빠릿하게 행동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하긴 그 자신도 느긋하게 환자의 책상이나 훔쳐보고 있을 계제는 못되었다. 며칠 전 홈즈 저택에서의 연회 초대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홈즈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와서 존이 나름대로 조사를 한 결과 홈즈 저택은 템플 가든처럼 명랑한 이름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처럼 엄숙한 위명도 지니지 못했으나 다른 의미로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가문의 수완 덕분이었다. 홈즈 가문 특유의 은둔적인 성향과 대대로 작위를 물려받아온 세습 귀족들로서는 썩 달갑게만 여기지 않을법한 그들의 오만한 양태, 그리고 현재 당주인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병적으로 폐쇄적인 기질에도 불구하고 홈즈 가문은 영국을 움직이는 세력가들을 중재하는 의미로서의-이를테면, 가교 역할로 상류사회에서의 은근한 존재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서섹스에서 일가가 런던으로 이주한 지 근 백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신흥 젠트리 가문으로서 그만한 명성을 떨친다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매년 늦봄과 초여름의 경계에 한정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초대장이 돌아간다는 홈즈 가문의 연회는 간단히 말하자면 잠시도 쉬지 않고 요동치는 런던 사교계의 지각 변동과 함께 앞으로 성장 주가가 높은 우량주는 누구이며 누구에게 줄을 대어야 유리한지에 대한 정보를 한눈에 보여주는 지표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속사정을 아는 존 왓슨으로서는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초대받은 가문의 위력에 대한 간접적인 증명임과 동시에 어느 누구도 섣불리 초대를 거절하지 못한다는 대단한 연회가 열리는 날짜는 바로 오늘로, 존의 숙소로 마이크로프트가 마차를 보내주기로 했기 때문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집으로 가서 참석할 채비를 해야 했다.
 그런 닥터 왓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경위는 항상 의기소침해보였던 의사 선생이 오늘따라 들떠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느 때와는 다른 밝은 기색과 경쾌한 걸음걸이에 고개를 갸웃 하고 멀어지는 존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레스트레이드는 곧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도 연회에 갈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레스트레이드 또한 존과 마찬가지로 오랜만의 사교 행사에 초대받아 흥분했다는 것을 자각하지는 못한 채였다.
 그리고 그들의 육감이 전해준 미묘한 경고-심상치 않은 일치감을 무시한 결과, 잠시 후 그들은 몹시도 어색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됨은 물론이다.

 

*   *   *

 

 어색하게 침묵을 지키던 두 사람 중 존이 먼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레스트레이드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쳤다.

 

 “저도 그렇습니다.”

 

 상투적인 인사를 주고받던 그들은 곧이어 입을 다시 다물었다. 의사와 환자의 사무적인 관계로만 서로를 인식하고 있던 두 사람에게는 지금의 예기치 못한 상황에 어찌 대처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둘을 잇는 것이 다른 연결고리도 아니고 무려 홈즈 가문이었다는 것 때문에 더욱 그랬다.
 존이 마차가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계단에서 내려왔을 때는 아직 가로등 불빛이 켜질 시각은 아니었다. 셜록과 만나고 나서부터는 절름거리는 정도가 덜했지만 그래도 지팡이를 놓고 다니기에는 아직 불안한 감이 있었기 때문에 전용 케인을 챙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인 것이 조금 시간을 잡아먹었다. 약간 숨이 거칠어진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존은 현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일반적인 연회는 정오 무렵에 시작하여 해가 지기 전에 마무리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홈즈 가의 연회는 가문 특유의 반골 기질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특이하게도 저녁 무렵에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지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덕 슈트를 걸치려던 존은 고민 끝에 클래식한 이브닝 슈트를 입기로 마음먹었고 건물 입구의 계단참에 잠시 서서 짙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진 거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지팡이 끝을 보도에 뭉개며 마차에 올라탄 존은 그와 마찬가지로 정석적인 검정 턱시도를 빼입은 레스트레이드와 마주치게 되었고 잠시 입을 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둘은 마부의 재촉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움직일 수 있었다.
 이것이 두 성인 남자가 같은 마차에 앉아서 수줍음을 타는 영애들 마냥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얌전히 앉아 있게 된 사태의 전모였다.

 

 “아까 본 편지 말입니다.”

 

 존이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보랏빛 편지봉투를 꺼내어 보이며 웃어보였다.

 

 “어쩐지 눈에 익은 것이다 싶더니 역시나였군요.”

 

 존의 손에 들린 편지봉투의 겉면에 쓰인 마이크로프트의 필적을 본 레스트레이드가 깜짝 놀라며 자신의 것도 꺼내들며 말했다.

 

 “아까 이상하게 유심히 살펴보신다 싶었습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전혀요.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존이 과감하게 대화의 물꼬를 텄으니 이어나가는 것은 레스트레이드의 몫이었다.

 

 “어느 쪽과 면식이 있으신 것인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저는 그러니까 동생 쪽과…주인분도 만나는 뵈었습니다만 친분이라고 할 만한 것은 딱히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존이 물어왔다.

 

 “경위님께서는?”
 “아, 그러니까 저는 형님 쪽과 어릴 적부터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대단하군요.”

 

 솔직하게 감탄하는 존의 말에 레스트레이드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야 고작 일개 경위일 뿐이고, 어렸을 적의 인연에 기대어 가외로 초대받는 처지인걸요.”
 “그렇다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한 존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형님분의 성정은 동생 쪽보다는 한결 온화하지만 어딘지 더욱 까다로운 면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 분과 오래 친분을 유지했다는 것 자체가 제겐 굉장하게 느껴지는걸요.”

 

 마이크로프트의 음흉한 성미를 은근하게 표현하는 말에 속이 시원해진 레스트레이드는 절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존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지요. 맞습니다. 그 말이 정확하군요.”

 

 그렇게 두 사람이 홈즈 형제의 괴팍스럽기 그지없는 성정에 대해 은밀하게 토로하며 공범으로서의 공감대를 쌓아가는 동안 마차는 열심히 움직여 홈즈 저택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가 흡혈귀의 마차가 아니랄까봐 햇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올 틈새도 없이 내려진 채로 꽉 닫혀 있는 덧창을 보고 후후 웃던 레스트레이드가 존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물어보았다.

 

 “덧창을 올릴까요?”

 

 일종의 스무고개의 질문인 셈이었다. 존이 홈즈 저택의 비밀을 알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동요하는 기미가 비치겠지 싶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존도 레스트레이드가 무슨 의미에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인지 이해한 듯 살짝 표정을 굳히다가 금방 덧창을 올려도 좋다고 대답했다.
 덧창을 올리자 저녁놀빛을 받아 반짝이는 광대한 녹색 들판이 시야를 꽉 채웠다. 인적이 드문 풍경을 따라가다 보니 건물들의 자취는 점점 줄어들었고, 퇴색한 황혼과 서늘해지는 오후의 공기가 그들의 얼굴을 시원하게 때렸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지평선 위로 암담한 실루엣을 형성하고 있는 숲을 제외하면 밋밋하기만 한 풍경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나름의 정취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편에는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이 보였고, 위로 뾰족뾰족한 윤곽을 그리는 어두운 회색 숲 위로는 타는 듯 짙은 자줏빛 구름이 모여들었다. 붉게 빛나는 환한 햇살 아래에서는 늘 그렇듯 풍경의 색채는 빛과 어둠의 대비와 그로 인한 경계가 서로를 잠식하려는 듯 어두운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일몰의 마지막 빛은 녹지의 모퉁이에 아직 머무른 채로, 구불거리며 펼쳐지는 오솔길,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자리한 고저택을 그림처럼 아름답게 물들였다.
 그 광경을 멍하니 응시하던 존이 중얼거렸다.

 

 “홈즈 저택은, 이상하게도 말입니다, 늪이나 모래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자신마저도, 서서히 침몰하는 유사(流砂) 속으로 푹 꺼져 들어갈 것만 같았다.
 몇 개월 전의 기억이 빗물처럼 존의 머릿속으로 다시금 스며들어왔다. 저택 안의 어두운 회랑을 서성이며 음산하고 불길한 색채의 그림들이 그를 내려다보는 가운데 캄캄한 복도를 헤매었던 기억. 아니, 그 이전이다. 비밀스러운 광채를 품은 강철 같은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했을 때의 기억. 그 눈이 새파랗게 빛나며 자신의 영혼 깊숙이까지 사로잡았을 때의 기억. 분명 그때부터 중세의 지하 감옥 같은 저택의 그림자가 그에게로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존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존재를 무언의 형식으로 설명한 까닭과, 정체를 드러낼수록 더욱 두려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을 그에게 한 까닭을. 아무리 알맹이를 덮고 있는 겉껍데기를 벗겨낸다 할지라도 그것의 궁극적인 정체인, 이성의 인지 범주를 벗어난 공포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

  저택의 구관 정문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니 불이 드문드문 켜진 저택과 연못이며 분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레스트레이드는 그런 것들에 오래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볼거리가 있었다기보다는,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마이크로프트와 잠깐이라도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 복잡한 저택의 구조에 익숙하지 않을 존을 혼자 남겨두는 것에 대한 걱정이 들었으나 그 걱정은 다행히도 오래가지 않았다. 평소와는 영 다르게 품위 있는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존을 기다리던 셜록이 그와 존이 정문의 노커를 두드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참을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존을 낚아채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대놓고 레스트레이드를 무시한 채 마치 존과 단둘이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은근한 목소리로 그에게만 말을 걸었고, 깔끔한 암회색 장갑을 낀 셜록의 손에 붙들려가는 존은 약간 놀란 것 같았지만 기분나빠하는 기색은 없었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며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레스트레이드는 곧 몸을 돌려 옆쪽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고용인들이 닦아내고 거미줄을 걷어내어도 결국엔 방치되고 다시 지저분해지기 일쑤이던 계단은 밤새 묵을 손님들을 위해서인지 드물게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묵은 먼지를 벗겨내느라 깨나 고생했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2층에 일렬로 마련된 손님방을 지나쳐 3층으로 향했다.
 역시나 빈틈없이 꾸며진 복도를 조용히 걸어 마이크로프트의 개인실 앞에 도착한 레스트레이드가 문을 두드렸으나 웬일인지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발길을 돌릴까 망설이던 레스트레이드의 속에서 가끔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라는 대담한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저 안에 들어가서 그가 돌아오길 기다릴 참이었으니까 그다지 결례를 끼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 결심을 굳히자 몰래 나쁜 짓을 저지르는 쾌감 같은 것이 느껴져 레스트레이드는 오랜만에 소년같이 맑은 웃음을 지었다.
 심호흡을 하고 방문을 열자 우아하고 단정하게 꾸며진 다실이 보였다. 열린 커튼 틈으로 저녁 햇살이 가득 들어와 방 안을 오렌지색으로 밝혔고, 기다란 프랑스풍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나무는 잎사귀마다 녹색 빛이 스며들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다실에서 오른쪽의 커다란 문을 열면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적합한 응접실이 있고, 반대편으로 가면 의상실과 침실이 있다는 것을 레스트레이드는 잘 알았다. 하지만 주인 없는 방에 몰래 들어오는 것 이상의 일을 범하고 싶지는 않았던 레스트레이드는 다실 한가운데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앉는 것으로 만족했다.
 벨벳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고 차분한 색상의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화풍의 정물화의 둘레를 장식하는 금빛 액자 위로는 흐릿한 빛깔의 베일이 늘어져 있었다. 몇 번이고 본 그림이었기 때문에 거의 사물의 배치를 외울 지경이었지만 다실의 주인의 고집스러운 취향은 몇 년 동안이나 한결같았기 때문에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가 지평선으로 서서히 기울며 다실에 드리운 침묵과 어둠은 차차 깊어갔고, 모든 소리를 잠재운 듯한 고요함 속에서 레스트레이드는 인내심을 가지고 한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한가로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어느샌가 침실 쪽에서 바닥 판자가 작게 삐그덕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라일락 화장수의 향기가 다실로 느리게 스며들고 있다고 느낄 즈음에 문이 열리며 마이크로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이런 풍의 은백색 타이를 맨 그는 꼼꼼하게 다려진 실크 양복의 라펠을 살며시 매만지며 레스트레이드를 향해 다가왔고 경위는 다소간의 딱딱한 예의를 갖추며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그런 그를 향해 자리에 앉아도 좋다는 손짓을 하며 마이크로프트가 농담조로 말했다.


 “살금살금 들어와서 날 놀라게 하다니, 많이 늘었군요?”


 그렇게 말하는 마이크로프트의 어조는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졸음의 여운으로 나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열린 왼쪽 창문으로부터 막 지는 석양빛이 새어들어오고 있는 참이었고 그건 뱀파이어인 그에게 있어서 기상시간을 상당히 일찍 앞당긴 셈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있으면 손님들이 오실 테니 그걸 감안해서 조금 미리 찾아뵈었습니다.”


 레스트레이드가 말하자 마이크로프트가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헤아려주어서 고마워요, 그렉.”


 친밀한 호칭에 레스트레이드의 양볼이 언제나 그랬듯이 미미한 홍조를 띠었다. 그런 레스트레이드를 마이크로프트가 부드럽게 끌어당겨 이마에 입술을 살짝 대었다가 떼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옷맵시가 흐트러질까 두려워 얼른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마이크로프트가 은근하게 힘을 주어 그를 놓지 않는 것에 순순히 그가 강제하는 대로 가만히 동작을 멈추었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춘다. 서로를 향한 그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는 것처럼 달콤하고 안타까운 포옹은 달아오른 용광로에서 날리는 불티처럼 밝게 날아들던 해가 완전히 지고 방 안에 우울한 그림자만이 드리워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창밖으로 마차가 하나둘씩 도착해서 말발굽이 제자리를 두들기며 다그닥거리는 소리와 남녀가 쌍쌍이 흥분한 목소리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마이크로프트는 겨우 레스트레이드를 놓아주었다.
 못내 아쉽다는 듯이 입꼬리를 미묘하게 일그러뜨리던 마이크로프트가 나직이 말했다.


 “오늘은 저들뿐 아니라 조금 더 특별한 손님도 올 예정이랍니다.”


 마이크로프트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레스트레이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여자’인가 보군요.”
 “그래요. 서신으로 미리 각별한 주의를 주긴 했지만, 막상 도착해서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모르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몽마와 흡혈귀의 혼혈이니만큼 성격이 무척이나 제멋대로거든요, 라고 덧붙이며 그는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제야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의 안색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붉은 노을빛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눈을 날카롭게 빛내는 마이크로프트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올려다보던 레스트레이드의 얼굴에도 한 줄기 고통의 경련이 스쳤다. 레스트레이드의 시선을 감지한 마이크로프트는 평소와 같이 여유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꼭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를 바라보는 어머니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군요.”
 “그야, 걱정하고 있는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곧바로 이어진 레스트레이드의 대답에 마이크로프트의 창백했던 안색에 어렴풋한 핏기가 돌았다. 너무도 예절바르고 몸가짐이 바른 나머지 종종 그를 애타게 만드는 그의 연인은 때로는 이다지도 직설적으로 감정을 피력함으로써 그의 미묘한 정념의 구조를 자극하여 황홀하게 만드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비록 그 자신은 조금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욱 사랑스러웠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를 침대에 끌고 들어가 무자비하게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마이크로프트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난폭하게 들고일어나는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차분하게 한숨을 쉬며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그럼, 아래에서.”


 레스트레이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창문으로 스민 밤바람에 감긴 머리카락이 천천히, 꼭 살아있는 것처럼 흔들렸다.

 

*   *   *

 

 60피트쯤 되는 길이에 연한 베이지 색깔의 나무로 벽을 댄 실내의 정가운데에서 3단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 높은 원형의 천장에 가까운 높이에서부터 길고 가느다란 창문이 십자 모양으로 달려 있었다. 안팎으로 스며들고 흘러나오는 호박색 불빛 속에서 하인들이 천천히 원탁 주위를 돌면서 손님들의 와인잔을 채우고 음식을 덜어주었다.
 테이블 주변에 모여 속닥이는 사람들의 말소리, 낮아졌다 높아지기를 반복하는 웃음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등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홀의 네 외곽에 놓인 전축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가 잔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에 섞여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은 점잖으면서도 화려함이 돋보이는 옷을 입었고 하나같이 취한 것처럼 흥분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현란한 불빛 아래에서는 사람들의 얼굴도, 단단한 가죽 소파와 벽의 군데군데를 메우고 있는 책장도 오래되어 나긋이 닳은 것처럼 보였다. 곳곳에 적절한 배치로 놓인 램프와 등롱에서 발산되는 밝은 불빛과 그것을 반사하여 증폭시키는 빅토리아 초기 양식의 색유리들이 아니었더라면 꽃이 풍성하게 꽂힌 창가의 화병은 말할 것도 없고 엠파이어 풍의 책상이며 번쩍번쩍 빛나는 벽난로 위의 금박 장식품들을 비롯해 녹색 공작석 테이블까지 온갖 유서 깊고 값비싼 장식품들이 하나같이 닳아빠지고 유행이 지난 물건들처럼 보였겠지만, 세밀한 조명의 안배로 인해 그것들은 낡았다기보다는 과거를 향한 은은한 향수가 감돌고 우아함이 서린 우울함을 내포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그러한 감상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라도 하듯 누군가가 속삭이듯 내뱉었다.


 “낡아빠졌군요Vieux jeu.”


 그러고서는 저희들끼리 키들거리며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웃음을 참으려고 서로를 쿡쿡 찌르고 야단인 것이다. 프랑스 사립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귀국한 오길비 백작가의 영애 오르탕스 양과 그녀의 친구 루드밀라 모라비아 공작 영애였다. 스포드 사의 정찬용 디저트 접시를 두고 한 농담치고는 원색적인 언사에 그녀들의 건너편에 앉은 오길비 백작 부인이 급히 나무랐지만 한창의 젊음이라는 특권을 누리며 한껏 들떠있는 그 나이 또래의 사춘기 소녀들의 행실을 단속하기에는 무리였다.
 마이크로프트를 제외하면 가장 상석에 앉은 윌리엄 하그리브스 경은 그것을 보며 눈살을 조금 찌푸렸지만, 홈즈 경의 표정이 조금도 변치 않는 것을 보며 그 자신도 조용히 품위를 지키는 편을 택했다. 부유한 신사의 가문의 자손이라는 것보다도 보수적인 정책을 고수하는 런던의 부시장으로 더욱 유명한 그로서는 철없는 암망아지처럼 날뛰는 계집아이들을 탐탁하게 여길 리 만무했지만 나이가 지긋한 그가 섣불리 스스로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은 더욱 안 될 말이었으므로.
 대신 그는 사교계 행사에는 진력이 난 노신사답게 다른 화제를 입에 올림으로써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노련한 기술을 발휘하는 재치를 부렸다.


 “이 케이크는 무척 맛있군요. 요전에 포츠머스에서 열린 선상 무도회에서 비슷한 것을 먹어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쪽에서는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의 풍미가 그것보다 훨씬 낫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소.”


 십 년 전만 해도 손님들로 하여금 찬사를 받았을 그의 매너-고상한 주인으로서 식탁을 주관하며 서비스를 베풀고,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가도록 돕는 따위의 기술은 이제는 슬프게도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는 낡은 관행에 불과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효력을 톡톡히 발휘했다. 그렇지 않아도 막 포크로 하그리브스 경이 가리킨 둥근 원통형의 케이크를 찍어 올리고 있던 델라폰테인 남작 부인이 거들기 시작한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바랭이던가요?”


 남작이 핀잔을 주었다.


 “바바 오 롬(럼주에 적신 스펀지케이크)이야, 이 사람아.”


 장난스럽게 질책하는 남편에게 부인이 과장스럽게 우는 소리를 내었다.


 “내가 요리사도 아닌데 사바랭인지 바바 오 롬인지 알아서 무엇하겠어요, 여보. 그런 사소한 것으로 트집을 잡다니.”


 남작 부처가 밀고 당기며 가벼운 말싸움으로 분위기를 돋우는 한편으로 테이블 끝 쪽에 앉은 에드윈 스톤은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틈을 타 프랑스식 완두콩 요리를 양껏 접시로 퍼담고 있었다. 그는 내달이면 인도로 발령나도록 결정된 외교관으로 정계에서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그 평가를 대변하듯 그는 최근에 살이 오르기 시작한 몸을 멋있게 맞춰 입은 양복으로 감싸고 비교적 일찍 흰머리가 생기기 시작한 머리를 깨끗이 넘기기가 예사여서 늘 헤어토닉 향기를 풍기고 다녔다. 옅은 금발에 조각 같은 미모로 유명한 그의 약혼녀 로자먼드 홀 양은 처녀 특유의 걱정스런 얼굴로 야채 스튜를 깨작거리다가 뒤늦게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식의 현장을 알아차리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시작한 논쟁이 격화되어 점차 언성이 높아지는 와중에 하그리브스 경의 비서 자격으로 자리에 참석한 야심찬 젊은이 체스터 그린 군은 두 남녀가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것을 약간의 비웃음을 담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멀쩡하게 잘 부푼 슈크림을 찔러 구멍을 내고 흘러나오는 크림으로 반짝반짝 윤이 나는 은접시를 더럽히는 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케이크로 시작된 대화의 주제는 워터하우스 로지로 옮겨갔다.


 “가본 적이 있나요, 왓슨 선생?”


 존이 상이군인이라는 것에 일차적인 호감을 보인 델라폰테인 남작이 그에게 호기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존은 입 안에 물고 있던 송아지 고기를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예, 멀리서 본 적은 있습니다만…….”
 “나중에는 꼭 내부를 구경해보도록 해요. 버드나무 무늬가 그려진 벽지가 그렇게나 멋스럽더군.”


 아까 경솔한 발언으로 테이블 위에 일대 소란을 일으킨 레이디 오길비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 저도 좀 끼워주세요. 저희들도 런던에 오기 전에 갔다 온 참이라고요.”


 그다지 얌전한 축에 끼지 않는 어린 숙녀임에는 분명했으나 수레국화처럼 파랗게 빛나는 커다란 눈을 빛내며 애교스럽게 눈웃음을 치는 데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 옆에 앉은 레이디 모라비아 또한 검은 눈을 깜박이며 이편을 바라보았다.
 둘은 똑같이 재단한 듯이 비슷한 시프트 드레스 위에 비단으로 만든 길고 넉넉한 카디건을 걸쳤는데 오길비 양 쪽이 자잘한 레이스로 풍성한 느낌을 더했다면 모라비아 양은 가냘픈 목에 길고 가는 목걸이를 여러 겹 겹쳐 걸어 단순한 미적 감수성을 극대화시켰다는 데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처럼 두 소녀는 동갑에 동문이라는 것 이외에는 거의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차이점이 많았다.
 일단 오길비 양은 자연스럽게 굽이치는 짙은 갈색에 금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둥글게 말아 올리고 보석이 박힌 상아 빗을 꽂고 나머지는 목 부근으로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어느 남자라도 한번쯤은 그 희고 통통한 손목을 쥐어보고 싶어 할 만큼 보기 좋은 몸매를 가진 생기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다. 반면 모라비아 양은 검은 머리를 단아하게 틀어 묶고 선이 또렷한 얼굴에 지적인 이목구비를 가진데다가 날씬하고 키가 큰 편이었다. 신사들이 으레 찬양하기 마련인 전형적인 연약한 숙녀의 생김새라고 하기에는 도도해 보이는 콧날에 절도 있는 분위기를 지닌 그녀는 친구인 오길비 양보다 성숙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좀더 귀족다운 위엄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두 소녀는 파리의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모라비아 공작가가 있는 비엔나와 독일의 비스바덴을 거쳐 수많은 도시를 바삐 돌아다니다가 런던으로 온 참이었기 때문에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다양한 화제를 꺼낼 수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질 뻔한 식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워터하우스 로지를 비롯해서 최근에 유행하는 코티지 양식에 대한 한 차례 토론이 지나간 후 드디어 홈즈 저택이 화제의 물망으로 올랐다.


 “일찍이 1890년대 무렵에 선친께서 이 집을 사셨죠. 그때만 해도 으리으리한 대저택이었습니다. 밸모럴 성을 연상시키는 외관이었다고 전해 들었을 정도이니까요.”


 있지도 않은 선친 운운 하며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마이크로프트를 웃음기 어린 눈으로 힐끗거리며 존과 레스트레이드는 한 차례 눈빛을 교환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마이크로프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대에 이르러 워낙 손이 귀해진지라 지금 홈즈 가문에는 저와 동생밖에 없지요.”
 “천만에요. 군식구가 딸려있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델라폰테인 남작 부인이 와인을 마시며 말했다. 그에 마이크로프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도 외진 저택이라 무료한 것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제 오랜 친우인 레스트레이드 경위가 종종 찾아와주곤 하죠. 최근에는 제 동생의 주치의인 왓슨 박사도 함께요.”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른 화제로 넘어가죠.”


 아까부터 신사 숙녀를 막론하고 존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을 달갑잖게 생각하면서도 꾹 참고 있던 셜록이 결국에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괴팍스럽기 그지없는 그 행동에 신사들은 깜짝 놀랐지만 숙녀들은 다른 측면으로 그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명문가의 젊고 잘생긴 신사가 아직까지 독신이라는 것은 모든 레이디들의 관심을 한 몸에 집중시키게 마련이다. 아무래도 개업의 존 왓슨 보다는 홈즈 가의 차남인 셜록 홈즈가 구미가 당기는 신랑감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존에게 쏠린 관심을 분산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뜻밖에도 그 관심이 온통 자신에게 쏠려버린 것을 눈치 챈 셜록이 작게 혀를 찼다.

 

*


 제아무리 날고 기는 셜록이라도 다섯 여자-수선스런 부인네들과 말괄량이 숙녀들 뿐 아니라 말석에 앉아 얌전빼고 있던 홀 양도 은근슬쩍 공세에 가담한 탓이었다-의 수다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결국 그도 이 애매하고 불편한 상황에 순응하여 숙녀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표면적인 노력이나마 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노력에 힘입어 정찬의 분위기는 완전히 무르익었다. 또한 신사들의 환담도 끊임없이 이어져 분위기는 순조롭게 고조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깥 하늘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칠흑처럼 검어졌고 사라진 일몰의 흔적 대신 연회장 곳곳에 놓인 복숭앗빛 갓을 씌운 등불이 홀 안을 속속들이 비추었다. 누군가 저택 바깥에서 이편을 바라보면 마치 저택의 창문들이 하나같이 기괴한 바로크 시대의 보석처럼 마구 빛을 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었다. 부끄럼을 타는 레이디의 뺨처럼 발그스름한 조명의 덕택인지, 밤이 깊어졌지만 내객들의 태도는 더한 열기를 띠면 띠었지 덜해지지는 않았다. 영롱한 조명이 석조 벽난로, 하얀 테이블 커버와 늘씬한 제비꼬리처럼 우아하게 빠진 정장의 옷깃, 벨벳 야회복으로 감싸인 여자들의 둥그스름한 어깨를 아른거리며 비추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저녁 식사는 거의 끝나가는 참이었다. 홀 양의 참견에도 불구하고 스톤 씨가 마지막까지 오믈렛 오 샹피뇽(버섯 오믈렛)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적거리다가 포크를 놓은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누구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처지고 느슨해지기 시작할 즈음 지루함으로 몸부림치던 오길비 양이 선봉장이 되어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과감하게 입을 열었다.

 

 “홈즈 경? 이제 이 다음 순서를 진행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녀가 대담하게 마이크로프트를 지목하자 마이크로프트는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응대했다.

 

 “혹시 그거 아십니까, 오길비 양?”

 “뭘 말이에요?”

 “열세 명이 모인 자리에서는 제일 먼저 자리를 뜬 사람이 죽는다는 미신 말입니다.”

 

 마이크로프트의 갑작스런 발언에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지자 물결이 이는 것처럼 식탁 주위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 사이에도 한 차례 동요가 일었다. 담담하지만 암시적으로 불길한 징조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어조에서 풍기는 위험에 존은 불안한 표정으로 마이크로프트를 쳐다보았다.

 

 “자, 그러면 모두들 몇 명인지 한 번 세어보도록 합시다.”

 

 물론 좌중의 인원은 더도 덜도 말고 딱 열세 명이었다.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섬뜩한 무언가가 짙게 묻어나오는 그의 말을 부인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그래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려 홀을 둘러보았고 마이크로프트의 말이 옳다는 것만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참다못한 델라폰테인 남작이 입을 열었다.

 

 “자, 홈즈 경. 내 아내는 마음이 약해 무서운 놀이라면 질색이라오. 게다가 어린 숙녀분들도 계시니 농은 그만하십시다.”

 

 남작의 온건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로프트는 고의적으로 소름끼치는 공기를 증폭시키려는 듯 담배를 쥔 손가락 끝에 힘을 단단히 주고 강렬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구식인 사람인지라 미신을 아주 신봉하는 편이지요.”

 

 뒤이은 말에 누구도 토를 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장내는 정적에 휩싸였다. 지금의 상황은 누군가의 지독한 악취미가 틀림없다고 모두들 생각했다. 하지만 마이크로프트는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이 그저 사람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아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담배를 고쳐 물었고,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 끝부분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허공을 떠돌아 모호한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을 악마처럼 보이게 했다.

 존은 반사적으로 셜록을 바라보았다. 셜록은 냉정한 국외자처럼 이 모든 소란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난 채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 셜록의 모습은 존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건 간에 셜록은 결코 이렇게 얌전히 앉아있는 성미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인내심이라는 것을 발휘하는 데에 능숙치 않다. 또한 쉴 새 없이-그의 말에 따르면 악의는 없는-독설을 주위에 퍼부어 상대방의 계략이 무엇이든 여지없이 깨뜨려버리고는 금세 싫증을 내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셜록은 확실히 이상했다. 그것이 적지 않게 존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다음 순간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자 그럼,”

 

 그는 입술 사이로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놓고 술잔 손잡이를 빙글 돌렸다. 잔 안에 담겨 있던 노르스름한 샴페인이 샹들리에에서 떨어지는 빛무리를 반사했다. 손가락에 나란히 끼워져 있던 그리스 양식을 본뜬 묵직한 은반지도 그의 가슴 언저리에서 번쩍 빛났다.

 

 “미스 아이린 애들러와 미르칼라 폰 카른슈타인 여백작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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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이라고는 타원형의 유리창 위쪽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회색빛뿐이었다.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면서 새벽녘 특유의 빛으로 밤에 젖은 캔버스 위를 덧칠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었던 것인지 선명한 보랏빛 어둠이 허공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더해가는 햇빛으로 말미암아 하늘은 구석구석마다 푸른빛과 은빛으로 맑게 물들어갔다. 간밤에 그리도 아름답게 비추이던 달빛은 잿빛에 가까운 실루엣으로 하늘에 가까스로 머물다가 이미 사라진 별들의 뒤를 이어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창 밖에서 쏟아져들어오는 흐린 햇빛에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눈을 뜬 존은 자신의 옆에 셜록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딜 간 것일까, 하고 궁금해 하는 것도 잠시, 존은 창 너머로 보이는 납빛과 은빛이 뒤섞인 새벽 하늘빛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말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존은 창가로 다가갔다. 이상하리만치 상쾌하게 밝아오는 아침이었다. 존은 창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창턱에 얇게 덮인 눈을 흐트러트리고 묵직한 커튼을 흔들었다. 존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쨍한 바람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나른한 잠기운을 씻어냈다. 존은 차가운 바람이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벨벳 상자 속에 담긴 사파이어처럼 뭉근한 어둠을 띤 채 파랑색으로 빛나는 하늘 귀퉁이와 하얀 꽃잎이 흩뿌려진 것처럼 흰빛으로 드문드문 밝아오는 하늘의 차갑고 감미로운 색채는 몹시 아름다웠다. 이따금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하늘을 바탕으로 흩날리는 가루눈이 혼미함과 투명함을 동시에 띠고 있는 특이한 섬광을 반사하며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풍경에 존은 흠뻑 빠져든 채로 한동안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 몸을 맡기고 있던 존은 문득 귀가 멍멍해지는 듯한 환각을 느꼈다. 허공을 가득 메운 침묵.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빽빽하게 들어찬 채로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러한 감각을 느낌과 동시에 완벽한 패닉이 그를 덮쳤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물에 빠진 사람이 젖은 옷가지를 바삐 주섬주섬 챙기고 나오는 것처럼 존 또한 그를 둘러싸고 있던 나른한 새벽 공기와 감상적인 기분을 황급히 떨쳐 빠져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답게만 보이던 것들이 하나같이 섬뜩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간결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다고 생각했던 방안 사물들도 하나같이 낡아빠진 데다 색이 바랜 고물 더미들처럼 보였다. 천장 한가운데 외롭게 매달린 가스등 불빛에 어슴푸레하게 비친 방 안은 인기척뿐 아니라 인간미의 한 조각도 느껴지지 않는 둔중한 회색빛과 진청색의 덩어리일 뿐이었다. 지나치게 환상적이었던 꿈자락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존은 망연하게 웃었다. 뿌연 안개 속을 헤매다 갑자기 시야가 밝아져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된 듯, 화려한 색채를 띤 듯 했던 풍경에서 활기가 달아나고 창백하고 무미건조한 회색조로 온통 물이 빠진 것 같았다.
 이제 모든 것이 다 잘못된 것처럼 보였다.

 

*

 

 존은 일단 방을 빠져나왔다. 끝없이 이어져 그의 앞을 번번이 가로막던 숲을 빠져나온 것도 기적이었고, 환각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아니, 믿고 싶었던-남자, 셜록 홈즈와 다시 만나게 된 것도 기적이었다. 그렇다면 어제 몇 번이고 있었던 기적의 일환이 오늘까지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물론 지금 존이 의미하는 기적이란 인간이 아닌 자들에게 들키기 전에 저택을 무사히 빠져나가 다시 한 번 숲을 지나서 마을로 도착하는 그 모든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셜록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혼자 놓아두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저택을 나가려는 지금 그의 그러한 조치는 존에게 호재였다.
 닫혀있던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연 존은 고개를 내밀어 복도를 살폈다. 창문이 있을 법한 위치에는 어김없이 커튼이 단단하게 쳐져 있었다. 그 대신인지 등불이 하나 침침하게 켜져 있을 뿐이었으나 시야를 확보하는 데는 다행히 문제가 없을 정도의 밝기였다. 존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복도로 발을 디뎠다. 복도 전체에 깔린 두꺼운 융단이 푹신하게 구두창을 감싸며 발소리를 삼켰다.
 주욱 이어진 통로에는 단조로운 문양의 벽지가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간간이 벽에 걸려 있는 시커멓고 우울한 양상의 그림들은 색이 바래기 이전에 선명한 녹색과 금색으로 빛났을 벽지의 지나치게 활달한 색조를 한층 장중하게 누르기 위해 배치했을 것이었겠지만 하나같이 칙칙한 금빛으로 퇴색해버린 지금에 와서는 그저 암담한 분위기를 가중시킬 뿐이었다. 복도가 길어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세워져 있는 책장이나 자그마한 장식품과 낡은 램프가 놓인 작은 장식용 탁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손질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윤기를 띠기는커녕 초록색의 녹으로 온통 점철된 청동 촛대에 꽂힌 양초에 누군가 불을 붙여놓긴 했으나 그나마도 불꽃이 심지에 거의 근접해가고 있어 가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최소한의 관물들과 그것들이 자아내는 퇴락한 화려함마저도 없었다면 존이 걸어가는 이 통로는 전형적인 지하 감옥처럼 보였을 것이었다는 점에서 안심 아닌 안심을 느껴야 했다.
 먼지가 내려앉은 부서진 초기 빅토리아 시대 양식의 거울 틀을 마지막으로 통로가 끝나고 계단이 나타났다. 희미한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은 바에 따르면 이 자리에는 내리막의 비좁은 나선형 계단이 있어야 했으나 뜻밖에도 그의 앞에 놓인 계단은 오르막으로 된 계단이었다. 존은 그가 반대편으로 왔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미 돌아가기엔 늦은 것같다고 판단한 그는 그대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존은 금방 그가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깨달았다. 계단은 폭이 좁고 천장에서 샌 물로 인해 여기저기가 부식된 채로 깨져있어 불안했으며 난간도 온통 녹슬어 있었다. 덕분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끼익 거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먼지가 엉겨 붙어 완전히 낡고 더러워진 채로 장정 도서의 표지처럼 딱딱해진 카펫이라도 밟으면 요란한 쇳소리가 좀 덜할까 싶어 궁여지책으로 카펫이 깔린 부분에만 발을 디뎌보기까지 한 존이었으나 심지어 카펫을 밟을 때조차 귀에 거슬리는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존은 조금이라도 소리가 덜 나도록 걸어볼까 하는 노력을 거두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계단의 삐걱거리는 소리는 도무지 가라앉지도 않고 귀에 익숙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아서 혹시라도 자신이 저택을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두려워하던 존의 심장을 덜컹덜컹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렇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계단의 끝에 다다른 존은 약간의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계단의 끝에는 텅 빈 종루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바람에 풍화되어 자연적으로 마모된 석조 종루의 돌난간에는 까마귀들이 몇 마리 옹기종기 모여앉아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인 존을 향해 까악까악 울어댔다. 까만 눈을 무심하게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까마귀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는 피해망상적인 생각과, 아무도 없는 종루에 다다르기까지 괜히 쓸데없는 긴장을 했다 싶어 약간 부아가 치민 존이었으나 자신이 올라온 쪽의 계단 통로 외에도 하나의 통로가 더 있다는 것에 존은 그쪽으로 내려가는 시도를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존이 올라온 계단 통로와 직각으로 방향이 갈리는 층계는 아까까지 올라온 낡아빠진 계단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다. 층계는 자단나무로 되어 있고 까만 양탄자가 계단을 따라 빙글빙글 돌아가며 깔려있었다. 내려가는 내내 총계에는 황홀할 정도로 정교한 짜임새로 맞물린 난간이 둥글게 둘러쳐져 있었고 벽에는 기하학적인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벽에 새겨진 지루한 형태의 조각에 슬슬 질리고, 끝도 없이 원을 그리며 내려가는 계단에 어질어질해질 무렵 계단은 갑자기 뚝 끊겨버렸다. 다시 한 번 긴 복도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양편으로 길이 나뉘어 있다는 점이 달랐다. 생각보다 크고 복잡하기까지 한 저택을 돌아다니는 것에 굉장히 부정적인 감흥을 느끼기 시작한 존이었으나 이제는 달리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길을 모색하는 수밖에는.
 왼쪽으로 난 복도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그보다는 밝은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벽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설치된 인공 조명등이 마치 어서 오라는 듯 복도 전체를 훤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 한 점 없이 어두운 복도와 밝은 불빛이 점등된 복도의 지나치게 선명하고 양극적인 대비는 존을 갈등하게 만들었다. 조금의 타협이나 영합의 여지도 없이 완벽하게 갈린 선택지 두 개가 놓여있는 상황은 마치 존을 겨냥하고 미리 꾸며둔 상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의 안에 있는-정석적인 상식인이자 순종적인 군인인 존과 남몰래 탈선을 꿈꾸며 반골 기질을 간직하고 있는 존-두 가지의 상반된 성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을 과시하듯 말이다.
 고민하던 존은 결국 불이 켜진 복도 대신 반대편 복도를 선택했다. 통로를 걸어갈수록 빛을 등지게 되고 눈앞은 점점 캄캄해진다. 간간이 문이 열린 채로 방치된 방들이 보였다. 칸이 분리된 특별실이 계단에서부터 대여섯 개가 있었다. 대개 흡연실이 아니면 카드룸이었다. 안쪽에는 가스난로를 밝혀 놓은 듯 쉿쉿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냉기 어린 복도가 완전히 얼음장이 되지 않도록 일부러 온기가 새어나오도록 한 듯했다. 역시나 창문이 있을 자리에는 햇빛 한 점 들지 않도록 커튼이 쳐져 있었고 복도에 만연한 정적을 더했다.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존은 멈춰서서 복도를 둘러보았다. 시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처럼 시계는 단 한 개도 놓여있지 않았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거쳐 온 다른 복도도 그랬다는 것을 존은 알아차렸다. 그 흔한 괘종시계나 벽시계, 하다못해 뻐꾹 시계도 없었다. 시간을 초월한 채 버려진 곳처럼 인적이라곤 없는 이곳에는 영생을 누리는 자들의 오만과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모독이 서려있다는 것을 존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감각이 오히려 무뎌지는 듯했다. 간간히 가스 난방기 안에서 불꽃이 으르렁거리며 타오르는 소리만 멀리서 들려오거나 환청처럼 웅웅거리는 억눌린 듯한 낮은 소음이 존의 귓가를 부드럽게 자극했다. 하지만 대리석 바닥에 깔린 붉은 빛깔의 카펫이 그마저도 흡수하고 더욱 침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심해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 카펫의 붉은색만이 선명하여 어딘지 섬뜩했다.
 벽에는 군청색과 은색 실로 짠 칙칙한 색조의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세월을 이겨낸 태피스트리는 원래의 색을 거진 잃은 데다가 진한 어둠 속에서 보니 광택이 나는 녹색처럼 보였다. 복도 전체가 방음벽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너무나 조용했다. 숨 막힐 듯한 정적 때문인지 공기 중에 불안한 기운이 떠다니며 지나는 이들에게 경고를 던지는 느낌이었다.
 복도의 중간에 다다랐을 무렵 복도를 감싼 어둠은 최고조를 달렸다. 잉크를 통째로 쏟아부은 듯한 어둠. 존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워보았다. 그러나 그의 숨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크게 숨을 들이키자 어딘가에서 텁텁한 향기가 느껴졌다. 언뜻 담배 연기인 것처럼 생각되었으나 그보다는 좀더 진한 향내가 코끝으로 스며들어왔다. 진하다 못해 역겨울 정도였다. 끔찍하면서도 달콤한 그 향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어디서 흘러나오는지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작은 틈새를 두고 열린 방문이 보였다. 존의 바로 앞에서 도사리고 있는 어둠과 향기, 그리고 그에 한데 뭉쳐있는 위험이 그의 마음속에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존은 약간 충동적으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마약 같은 향기에 정신이 몽롱해진 존은 그 자그마한 냉기 덕에 조금이나마 맑은 정신을 되돌이킬 수 있었다. 존은 몸서리치며 그대로 잠깐 동안 서 있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야 존은 그것이 용연향과 베르가못 향을 비롯해 이런저런 향료를 섞은 채로 태운 향초에서 나는 향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길도 모르는 채로 줄곧 방황하다 보니 감각 신경이 교란된 것처럼 작은 변화에도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듯했다. 그러나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와 그가 서있는 복도를 비롯해서 저택 전체에 무언가 위험한 공기가 떠돌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암흑 속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을까.
 차가운 문손잡이를 잡은 감각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이었다. 돌아서야 한다고 냉기가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택 전체에 깊이 배인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존으로 하여금 냉정한 사고력을 앗아가고 있었다. 확실히 이곳에는 분방하고 대담한 행동을 유발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방문 틈으로 달빛처럼 흐릿한 빛이 새어나왔다. 만용을 부리는 셈 치고 존은 문을 약간, 아주 약간 열어보았다. 빛은 베네치아 풍의 청동 램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존은 결국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

 

 문을 열자 뒤엉켜 뭉친 향기가 화악 밀려들었다. 방 안의 온기에 뜨끈하게 달아오른 향기가 존의 코끝으로 지독하게 끼쳐들었다. 한데 고여있던 향내가 바깥으로 밀려나가길 기다렸다가 존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도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등잔의 심지가 한껏 돋우어져 있었고 방 안은 은은한 불빛에 잠겨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신사의 내실이라는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곳이었다. 그러나 호화롭고 세련되면서도 동시에 기묘한 분위기가 어린 곳이기도 했다. 온 시대를 망라한 듯 가지각색의 고풍스런 과거의 유물들과 손때도 채 타지 않은 현대식의 물건들이 남루한 전리품마냥 한데 뒤섞인 채로 쌓여있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네모꼴의 커다란 방의 사면은 고아한 느낌의 적색 벽지로 덮여있었다. 옛 로마 황제들의 망토에 쓰였을 법한 보랏빛이 살짝 어린 붉은색 벽에는 베니스 풍의 등롱이 불이 밝혀진 채로 나무의 잔가지처럼 매달린 채로 느슨하게 아래로 늘어져 방 안 구석구석을 어렴풋이 비추었다. 어슴푸레한 누런 불빛들 옆의 한쪽 벽에는 오래된 구릿빛 장검과 방패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쭉 뻗은 레이피어나 뾰족한 사브르, 터키의 장검들을 비롯해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아직 예리함을 잃지 않은 날붙이들이 빛을 받아 파랗게 빛났다. 그 아래의 빈 공간에는 주철로 만든 조상, 흉측한 생김새의 괴물 조각, 어딘지 음험한 눈빛의 대리석 두상들이 되는대로 쌓여 용케도 무너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놓여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만물상을 건너뛰고 두툼하게 주름진 검정색 벨벳 커튼이 닫힌 창가를 지나자 건너편에는 비스듬이 놓인 거울과 온갖 물건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놓인 테이블과 옷가지가 걸쳐진 긴 소파가 놓여있었다. 암갈색의 떡갈나무 재목으로 짜인 테이블은 호화찬란하기 그지없는 다른 가구들과는 달리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평평한 윗면에서 튀어나온 가장자리에 플로렌스 풍의 느낌을 살짝 가미한 세공이 살짝 되어있는 정도였기 때문에 전면에 걸쳐 정밀한 세공이 깃들어있는 류의 다른 고색창연한 물품들에 비하면 밋밋할 정도로 소박하고 간소했다.
 넓은 테이블 위에는 남색과 보라색이 오묘하게 섞인 광택의 벨루어 탁자보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일렬로 죽 놓인 화장수, 아스트린젠트, 헤어토닉을 비롯해 브러시와 칼라 버튼, 갖가지 색상의 보석 커프스가 난잡하게 널려 있었다. 그 외에도 책상 위는 붉은 유리 덮개의 램프, 열쇠 묶음, 각국의 지폐와 은전, 동전, 촉에 잉크가 묻은 채로 놓인 만년필과 철필, 연한 살구색의 편지 봉투까지 놓여 있어 혼돈의 극치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한데 놓인 테이블에서는 기분좋은 무절제함이라고 칭할 수 있을 법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이 장소는 아름답고 독특하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늘이 드리운 것처럼 창백하고 우울한 느낌에 휩싸인 채였다. 밝지만 무거운 암담함이 죽은 물고기처럼 하얀 배를 드러내고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존이 방 안에 들어온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마치 몇 시간, 또는 며칠이 지난 듯 느껴졌다. 그 자신이 방 안을 걸어다니느라 나는 발걸음소리까지 호숫물이 꾸르륵거리는 것처럼 침울하게 들렸다.
 존은 암울한 감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두어번 흔들었다. 이 방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는 생각이 든 존은 나갈까 마음을 먹었으나 문득 테이블 위에 있는 편지에 시선이 미쳤다. 하나같이 원색적인 색감으로 물들어있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엷은 색조를 띤 것이었기 때문이다. 손목에 다는 끈도 없고 초침도 멈춘 채로 쌓여있는 손목시계의 크로노그래피들을 살짝 옆으로 밀치고 편지를 손에 든 존은 편지를 밀봉했던 밀랍에 커다란 A가 박혀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 편지봉투를 뒤로 돌리자 발신인의 이름이 적힌 자리에 밀랍 인장과 비슷하게 아름다운 필체로 Irene Addler라는 여성의 필적이 남아있었다. 존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수신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마이크로프트...홈즈?"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그 이름을 읽은 존은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펄쩍 뛸듯이 놀라고 말았다.
 

 "제 이름입니다."
 

 존은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잘못 듣기라도 한 듯 뒤편의 어둠 속은 성당의 납골당처럼 고요했다. 다리와 등골을 타고 한기가 줄달음을 쳤다.
 그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울렸다.
 

 "마이크로프트 홈즈라고 합니다."

 

*


 "그러니까, 당신이 바로 존 왓슨이군요."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분명 그의 실루엣은 가까워지고 있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언뜻 보기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같이 보였다. 그 정도로 남자의 움직임은 우아하고 고요했으며, 날개를 접고 있는 독수리처럼 위엄이 넘쳤다.
 팔을 뻗으면 존에게 닿을락말락한 거리에서 남자는 멈춰섰다. 그는 키가 큰 편이었고 마른 축에는 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비대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그의 자세가 유달리 곧고 민첩한 덕분인 것같았다. 남자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무게감이 있고 예의바른 태도였다. 일종의 호감을 이끌어내려는 데에 특화된 듯한 조용하고 온화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있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목소리에는 오랫동안 지배자의 위엄을 지니고 존경받아온 사람처럼 명령하는데 익숙한, 그러나 겸양을 갖춘 조용한 자부심같은 것이 배어있었다. 미묘하게 사람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느껴지면서도 조금도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은 채 표정은 기분나쁠만큼 평온한 것에 존은 어렴풋한 위화감을 느꼈다.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이을 때까지 정적이 그곳을 감싸고 있었다.
 

 "포트 와인이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난데없는 제안에 놀란 존은 고개를 살짝 쳐들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미소짓고 있었다. 결례가 됨을 알면서도 존은 마이크로프트의 면면을 뜯어보았다. 어렴풋하지만 확실하게 느껴지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아색의 혈색은 기묘했지만 그렇다고 병약해보이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존은 마이크로프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둠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빛이 들지 않아 동공과 홍채의 경게가 구분이 되지 않았고 검은자위가 온통 새까맣게 보였다. 그러나 그 눈에서 섬뜩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단지 그것이 띤 색채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물린 입술만큼이나 과묵하게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는 눈은 웃고 있었지만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뱀처럼 차가운 그 눈을 마주하고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목도한 존의 몸이 떨렸다.
 그것을 알아차린 마이크로프트가 잔잔하면서도 약간은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존에게 말했다.
 

 "내키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예의상의 서운한 티를 살짝 드러내었으나 말 그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의상의 제스처일 뿐이었다. 마이크로프트는 다시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렇다면 산책은 어떠신지요. 보셨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근방은 수색(樹色)이 뛰어나죠. 아직 아침이 되지 않았으니 저도 새벽 공기를 쐰다면 즐거울 것같군요."
 

 잘생겼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투박한 외양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세련된 음성이었다. 다소 시적인 리듬까지 가미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의사를 더이상 거절하기 어려웠던 존은 간신히 그의 정중한 제안에 승낙의 표시를 건넬 수 있었다.
 

 그들이 빅토리안 고딕 양식의 저택을 나와 부지로 들어선 것은 아침이 다 되어가는 새벽 다섯 시쯤이었다. 그들 앞에는 별로 섬세하지는 않지만 탄탄하고 장엄한 모양으로 잘린 돌로 포장된 길이 똑바로 나 있었다. 서서히 떠오르는 햇빛을 등진 낡은 종탑이 이편으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어둠 속에서 빛의 윤곽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저택과 신축된 건물을 잇는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 존의 입에서는 절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화강암 판석이 반듯하게 깔린 통로 양 옆으로 규칙적으로 늘어선 아치형 돌기둥을 차치하더라도 탁 트인 풍광은 과연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말대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저택을 둘러싼 나무들은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꿋꿋한 자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간밤에 영락없이 어린 소년의 연한 살점을 탐하는 마녀의 손가락처럼 오그라든 검은 실루엣처럼 보이던 나무들은 희미한 초록색으로 밝아오는 새벽하늘 아래에서 깨끗한 은빛으로 빛났다. 부드러운 은색을 띤 나무들은 겹겹이 저택을 감싸고 밀도 높은 청회색으로 짙어지며 저편의 검푸른 산의 그림자까지 이어졌다.
 얇은 구름이 낀 하늘에서 스러져가는 금성이 반짝이고 있었다. 초록색으로, 회색으로, 파란색으로 색이 뒤바뀌며 점차 밝아지고 있는 허공에서 그것은 흐릿하지만 따스한 온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한 색유리같은 공기에 선명한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그러나 정작 그 하늘을 바라보는 존은 그 모든 것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폐부로 생기 넘치는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면서도, 아름다운 석조 통로의 기둥 사이를 한발 한발 나이가면서도 존은 혼란스럽고 소름끼치는 무언가가 잊혀진 채 뒤에 남겨져 있는 것 같은 꺼림칙한 감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건 아마도 자신을 반강제로 기묘한 새벽 산책에 끌어들인 남자 때문이리라.
 멀어졌던 시선을 다시 가까이로, 앞서 걸어가고 있는 남자에게로 옮겼다. 한눈에 봐도 귀족적인 풍모가 확실히 느껴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차림새도 점잖았다. 언뜻 보아서는 수수해 보이는 그의 검정 인버네스케이프는 고급 양복점에서 맞춰 입은 옷이었고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나는 검은담비털이 달린 깃의 접힌 부분에는 아스트라한 모직 안감이 붙어있었다. 장신에 호리호리한 몸집을 감싼 그 길고 어두운 빛깔의 코트는 최신 유행에 편승한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대에 뒤떨어질 정도로 고답적인 차림새는 아니었다. 존이 보기에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그의 옷차림은 실상은 꽤나 고풍스러운 것으로 요즈음의 젊은 영국 신사들에게 유행하는 스타일보다는 한층 전통적이고 역사적이라고 할 만한 구석이 역력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둘은 어느새 건너편 건물의 입구에 도착했다. 존이 아까까지 헤매던 건물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모양새인 것과는 달리 눈앞의 건물은 기능성을 살린 현대식 구조로 깎아지른 듯한 모양으로 지어져 있었고, 지금까지 걸어온 로마식의 아치형 복도와 어울리지 않게 불투명한 유리창이 달린 이중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문손잡이의 열쇠구멍에 열쇠를 돌려 넣는 그의 동작은 교향악단 지휘자의 동작처럼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그의 와이셔츠 소맷부리에서 에매랄드 버튼이 반짝반짝 빛났다.

 

 “겨울이라 경관이 보잘것없어 보여드릴 것이 얼마 없군요.”

 

 그렇게 말하며 마이크로프트는 뒤따라오는 존을 흘깃 쳐다보았다. 자신의 말이 일으키는 반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비록 얌전하게 그의 제의에 응하기는 했지만 언제까지고 순순한 태도로 일관하고 싶지는 않았던 존은 지금이 그가 왜 뜬금없는 산책 따위의 제안을 건넨 것인지 그 진의를 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교계에서 으레 하듯이 예의바른 방식으로 몇 초간 머뭇거리는 체 하던 존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제게 산책을 제의하신 겁니까?”

 

 지나치게 전투적인 서두였을까 싶어 급히 덧붙였다.

 

 “관대한 제안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또한 지나치게 숙이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다.

 

 “굳이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마이크로프트가 주의 깊게 지켜보는 가운데 존은 애써 당당한 태도를 고수하며 말을 맺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과 쌀쌀맞은 눈빛은 절로 그를 움츠러들게 했지만 존은 어깨를 곧게 펴려 노력했다.
 잠시 말이 없던 마이크로프트는 방금 전까지의 냉랭한 표정을 싹 지우고 입매를 슬쩍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글쎄요.”

 

 미봉책에 불과한 그 대답에 존이 무어라 반박하려는 찰나 마이크로프트는 부러 달칵 소리가 나도록 손잡이를 돌렸고, 존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다시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는 마이크로프트의 뒤를 따라 들어가야 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를 급히 뒤쫓아 가니 현관이 순식간에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이크로프트는 곧장 응접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맞은편으로는 커튼이 쳐진 창문들이 정문 쪽에 위치한 바깥 정원을 면해있었고, 오른쪽에는 개별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칸막이 방들이 몇 개, 왼쪽에는 작은 문이 하나 보였다. 선뜻 응접실로 따라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서성이던 존은 다행히도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생각보다 금방 방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마이크로프트가 알맞게 풀을 먹인 검정 실크햇과 손에 쥔 장우산을 들어보였다.

 

 “일단은 이것 때문입니다.”

 

 급히 파리에 갈 일이 있어서요, 라고 즐거운 듯이 말하는 그에게서 아까까지만 해도 표정에 명백하게 어려 있었던 미묘한 적대감이 마치 어슴푸레한 새벽 속으로 녹아들어갔거나 아침 바람에 쓸려가 버린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통 종잡을 수가 없는 그의 말투와 표정에 존이 헷갈려하는 사이 다시 마이크로프트는 응접실 왼쪽으로 나 있는 쪽문으로 나갔다.
 그들은 열려있는 문으로 나와서 모퉁이를 돌아 제멋대로 자란 관목들이 듬성듬성 늘어선 돌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후원의 산책로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의 주위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막무가내로 모아서 쌓아 놓은 수석, 균열이 가고 깨어진 천사와 님프의 조각상, 원래 있었던 땅에서 통째로 파서 옮겨놓은 듯한 폐허의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스산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존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나마 현대식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건물마저 음침하고 색 바랜 일출에 물든 것처럼 희미한 회색을 띠고 있었다. 낡은 돌을 가져다가 외벽에 쪼개 붙인 것이 분명한 연회색의 건물 돌벽에는 이끼가 아래에서부터 벽을 잠식하고 있었고, 방금 전 그들이 열고 나온 쪽문의 위에는 과거의 유물을 되는대로 가져다가 붙인 것처럼 옛 문양이 새겨진 채광창이 붙어 있었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황량함과 마주치자 흠칫 놀란 존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돌을 깐 뜰과 한옆에 놓인 낡은 벽돌 무더기 사이로 죽어가는 나무가 기다렸다는 듯 구부러진 가지를 쭉 내밀고 있는 것을 보자 존은 저택 주인이 지닌 그로테스크한 미적 관념에 대한 체념마저 들었다.
 멀리 보이는 숲에는 영구차를 장식하는 까마귀 깃털처럼 검은 소나무들이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마치 군집한 까마귀들 한 무리가 모여 있는 것처럼 어둠이 짙게 배인 그 숲에는 그리스의 고전 비극에나 묘사되었을 법한 필연적이면서도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 분위기는 이미 사라져버린 무언가가 풍겨내는 상실감, 영원히 가시지 않을 슬픔, 현실적이지 않아 치유될 수도 없는 고뇌-그 어느 것이라고 칭해도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저택 뒤편의 들판 한가운데 선 수양버들과 황록색의 덩굴로 칭칭 감긴 나무둥치를 지나치며 마이크로프트가 문득 입을 열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이건 순전히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미로 정원 안에서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는 마치 무덤 안에서 들리는 메아리처럼 낮게 울렸다. 늘어진 수양버들의 줄기는 가느다란 발을 촘촘히 내건 것처럼 늘어진 채로 새벽 공기의 유유한 흐름에 따라 이따금 물결쳤다.

 

 “이 대화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지요.”

 

 제가 말하고도 궁색하기 그지없지만 말입니다, 라고 짐짓 유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마이크로프트의 눈빛에 존은 작게 몸을 떨었다. 틈을 보이면 먹잇감을 곧바로 급습하려는 뱀처럼 싸늘하고 소름끼치는 눈빛이었다. 눈매는 웃음을 가장하듯 휘어져 있었으나 시선은 노려보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렇게도 차가운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세련되고 정확하게 다듬은 억양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 또한 다른 종류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두려움을 떨치려는 한편으로 자신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그 눈빛에 떠밀린 것처럼 존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군요.”

 

 이채를 띤 채로 존을 옭아매어 질식시킬 것처럼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마이크로프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서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요…….”

 

 덧문이 모두 내려진 쓸쓸한 저택이 그들 뒤로 점점 멀어졌다. 앞으로는 점점 빈번하게 보이는 갖은 장식물들과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로 엉킨 미로가 있었다. 그들은 그 좁고 어두운 길 안으로 스며들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마이크로프트는 앞에 놓인 석조 아치문에 손을 올리며 다시 존을 흘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당신은 순순히 저를 따라왔군요. 그렇게나 공포에 질려서 떨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마이크로프트는 싱긋이 웃었다. 조용하고 온화한 웃음이었으나 존은 몸이 오싹해져 옴을 느꼈다. 그의 입가에 어린 웃음 때문에 오히려 표정은 더욱 부드럽게 변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으나 그의 푸른 눈 깊숙이에서 번득이는 강한 타산의 빛은 존을 긴장시켰다. 왜 지금까지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야 상황파악이라는 것이 되는 것처럼 온 몸이 긴장하며 싸늘하게 굳으며 무뎌진 신경이 다시 곤두섰다.
 시대가 엉망으로 뒤섞인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느낌이 다시금 그를 감쌌다. 그들을 둘러싼 장소는 중세인 동시에 현대이기도 한 이상한 곳이었다. 안개에 젖은 가스등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처럼 푸른 새벽안개를 바탕으로 마이크로프트가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홍채와 동공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검어 소름끼쳐 보였던 그의 눈은 비쳐드는 햇볕 아래에서 보자 맑은 파란색이었다. 그가 기대선 아치형 돌문이 눈에 들어왔다. 웅크린 악마의 부조의 요철은 풍파에 시달려 흐릿하게 자취만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딕 양식 특유의 냉소적이고 오싹한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인 그것은 마이크로프트가 발산하고 있는 악마적인 분위기와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기이하면서도 오싹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진 것을 알아차린 마이크로프트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고양이가 아니고 당신도 쥐가 아니잖습니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겐 먹지도 않을 사냥감을 데리고 노리갯감으로 삼는 악취미는 없으니까요.”

 

 존의 무의식적인 우려를 정확히 간파한 말이었다. 너무도 정확하게 그의 속내를 짚어내었다는 것에 발끈하여 존이 대꾸했다.

 

 “제가 당신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그는 주의깊게 존의 면모를 찬찬히 살피고 신중하게 결론을 내렸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부인하는 그의 목소리는 고상하고 품위가 넘쳤다. 교육을 많이 받은 영국인만이 낼수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정교하게 조율된 악기처럼 감미롭기까지 했다. 그 달콤한 울림에 존은 압도당하는 자신을 느꼈다.
 어둑어둑한 정원 한가운데에 잠시 정적이 머물렀다. 마이크로프트는 아무 감정도 싣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존 왓슨 선생, 당신은 참으로 용감하군요.”

 

 존의 눈썹이 까딱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이크로프트는 말을 이었다.

 

 “용기란 무모함의 동의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이 든 뱀파이어의 물음은 어딘지 섬뜩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달관한 듯한 그 초연함이 존의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에 존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문했다.

 

 “무슨 뜻이죠?”

 

 날카롭게 되묻자,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젯밤의 일을 말하는 겁니다. 미궁처럼 얽힌 숲을 헤치고 단서 한 조각 없이 저택을 찾아나서는 모험을 감행하는 당신의 대담함은 절로 찬탄을 불러일으키더군요. 마치 용에게 사로잡힌 공주를 구하러 나선 용감한 기사나 할 법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악의를 품었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런 낌새를 은근히 풍기고 있었다. 고의적으로 그런 기색을 풍긴다는 것을 존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확실하게 알 길은 없었다.
 존이 말했다. 

 

 “제가 이곳을 찾아낸 것에 대해 탐탁찮게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오!”

 

 그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였다.

 

 “실상은 말입니다, 그 정반대랍니다, 닥터 왓슨. 그 반대라고요.”

 

 마이크로프트가 자못 인자한 태도로 웃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저는 셜록이 당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입장을 바꿔 말하자면 당신이 셜록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 정말이지 반가웠답니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등장이 아닙니까? 성탄절 전야에 다시 만난 운명의 두 사람!-끔찍하게 진부하고 신물이 날 정도로 통속적이지만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데에 대한 효과가 보증된 상황이지요. 그 애는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는 있지만 누구보다도 쉽게 그런 낭만에 매료되곤 하니까요.”

 

 지금까지의 적대적인 태도는 완벽하게 꾸며낸 것일까 싶을 정도로 환영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존은 어리둥절했다. 그의 장광설에 포함된 어휘는 하나같이 학구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었기 때문에 책에서 곧장 걸어 나온 사람이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침 저택의 생활이 지겨워질 때도 되었으니까 정말이지 시기적절했던 겁니다. 박수를 쳐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집요한 찬사에는 어딘지 비정상적인 데가 있었다. 존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마이크로프트를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존이 예상한 대로 마이크로프트는 잔잔하고-약간은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제가 어째서 이 모든 사실들을 가감 없이 알려드리는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마이크로프트는 더할 나위 없이 나긋한 설교조로 존에게 말했다.

 

 “진실로 신비한 것은 정체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모두 드러내는 법이랍니다. 설혹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낸다 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그 부분이 진정으로 신비함의 정수가 되는 것이지요.”

 

 존이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그는 사색에 잠긴 것과 같은 편안한 표정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중에도, 고목이 나이테를 더해가듯 햇빛은 시간의 줄기를 타고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워온다는 것을 깨달은 마이크로프트는 아치문을 넘어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언덕을 걸어가며 말했다.

 

 “아직 이해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저택의 후문으로 이어진 길로 걸어가는 동안에는 주욱 침묵이 이어졌다. 마이크로프트의 말이 존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마이크로프트가 털어놓은 모호한 진실은, 베일 뒤에서 움직이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처럼 흐리멍덩할 뿐이었다. 게다가 다시 만날 때까지, 라니. 그건 재회를 전제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존이 입을 열었다.

 

 “난…….”

 

 존이 입을 열자 마이크로프트가 멈추어 섰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마이크로프트가 물었다.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요?"

 

 왠지 모르게 허술하게 대답했다가는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존은 벌렸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정말입니까?”

 

 존은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존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듯, 당신의 까다롭고 솔직한 성정이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지요, 라고 마이크로프트가 속삭이며 혀를 찼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속삭임의 여운이 사라진 후 마이크로프트가 또박또박 말했다.

 

 “나라면 그런 방향으로 조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진심으로 충고합니다.”

 

 부드러운 어조임에도 불구하고 섬뜩한 무언가가 존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기에 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분명히 직접적인 악담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악의가 충분히 들어 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살짝 존을 향해 뒤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다시 뻣뻣하게 굳어버린 존을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이어나가며 마이크로프트가 사뭇 이해심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요. 한 번 더 생각해보세요. 성급하면 오히려 독이 되죠.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세요. 결심이 서면 다시 찾아오면 됩니다. 절대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충분히 가지세요.”

 

 중립적인 입장에 선 사람마냥 냉정하고 간결한 말씨였지만 말투가 모호하다는 점이 존의 육감을 자극했다.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찜찜했다. 마이크로프트는 그의 말처럼 존 자신을 썩 마음에 들어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존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점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데도 그는 셜록 때문에 존의 존재를 용인하고 있었다. 그는 대체 왜 셜록 홈즈의 존재가 이 저택에 붙박여있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것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이 문제는 충분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니까요.”
 “제 입장에서 본다면, 한 가지 관점으로 볼 수밖에 없을 텐데요?”

 

 존이 겨우 입을 열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방울뱀의 최면에서 풀려난 새처럼 끽끽거리는 것 같았다. 그야 당연했다.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는 쪽은 셜록이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그에 반해 마이크로프트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건 그 이상의 문제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신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완고하시군요.”

 

 존이 거듭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은근하게 위협하는 태도를 취하리라고 생각하고 존은 지레 몸을 굳혔지만 예측을 저버리고 그는 변함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은 곧 우리를 필요로 하게 될 거예요.”
 “왜 내가 당신들을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정말로 모르겠습니까?”

 

 그의 말이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존은 움찔했지만, 마이크로프트는 생각지도 못한 점을 지적했다.

 

 “셜록과 당신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요. 특히 권태와 안정에 지독한 염증을 느끼는 점이 말이죠!”

 

*

 

 저택 후문에 도착하자 셜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존을. 마이크로프트가 그에게 쓸데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냐며 경계 태세를 보이는 것에 마이크로프트는 언제나 그래왔다는 듯이 느물느물하게 화제를 돌리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이상하게도 존을 조금이나마 안심하도록 도와주었다.


 “어제 꽤나 힘든 방법으로 저택을 찾아오셨기 때문에 갈 때는 조금 편하게 가시라고 마차를 구했습니다. 셜록과 저는 여간해서는 저택 바깥출입을 하질 않는 터라 마차도 구비해놓지 않고 있었는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적당한 사륜마차 하나 정도는 들여야겠군요."


 암시적으로 존의 재방문을 권유하는 것에 존의 인상이 미미하게 구겨졌지만 옆에 셜록이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인지 마이크로프트와 존 모두 아까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셜록은 무언가를 어렴풋이 눈치챈 듯 눈빛이 날카로워졌으나 일단은 넘어가기로 한 듯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서 있던 이륜마차에 존이 올라탔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상당히 높게 떠올라 있었기 때문에 밤하늘을 수놓던 별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난 후였다. 때문에 셜록은 존을 배웅하고 나서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짙푸른 역광이 어려 검게 보이는 저택으로 향하는 셜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존은 무언가가 마차 창문을 톡톡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창문을 내렸다. 창문을 내리자 장우산을 손에 든 마이크로프트가 미소 짓고 있었다.


 “달리 뭐라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존이 입술을 달싹였으나 마이크로프트가 더 빨랐다.


 “답은 당신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존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극적인 반응이었으나 마이크로프트는 만족한 기색으로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부디 안녕히 가시길. 다음에 또 만나 뵙길 바라지요.”


 정중한 인사를 끝으로 마이크로프트가 손을 내밀었다. 진절머리 날 정도로 압박적이고 일방적이었던 대화를 얼른 끝내고 싶었던 데다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가 싶은 여상한 그의 태도에 존이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밀자 그가 난데없이 존의 손등에 키스를 해왔다. 메마르고 미지근한 감촉에 존이 앉은자리에서 펄쩍 뛸 듯이 놀라는 찰나 마이크로프트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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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요."

 

 응접실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존은 소스라치게 깜짝 놀랐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의 청년이 자신을 무감정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가 완전히 낯설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 달 만의 재회에 놀란 존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당황한 채로 황망히 서있는 동안 그는 천천히 가죽장갑을 벗고, 여미고 있던 코트의 세워진 목깃을 내렸다. 존이 들어오기 전까지 안에서 그다지 오래 기다리지는 않은 듯 그에게서 숨길 수 없는 바깥 공기의 찬내음이 풍겼다. 세웠던 목깃을 내리자 하얀 목이 드러났다. 겨울, 특히 눈이 내리는 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존은 그의 목덜미가 허전한 까닭이 지난 달에 있었던 '그 일'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그 날 겪었던 일이 단순히 꿈이었을 거라고 치부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로 아무 사건도 없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건만, 한 달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가 다시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까닭을 존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마치 한 달이라는 시간이 도살장에 끌려가기 직전의 짐승에게 주어지는 유예기간이 아닌가 싶었던 존이 남자의 방문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것에 불안해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태연한 표정으로 서슴없이 방 안으로 들어와 응접실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앉으시죠."

 

 그가 앉은 뒤에도 오랫동안 존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천연덕스런 어조로 의자를 권한 후에야 존은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고서도 한동안 입을 차마 열지 못하던 존이 용기를 내어 말을 붙였다.

 

 "어...어떻게 들어온 거죠?"

 

 존의 물음에 남자가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많이 놀라셨나요?"

 

 극도로 긴장한 존과는 달리 그는 이 만남이 무척 즐거운 듯 했다. 그러나 존은 섣불리 남자의 기분에 맞추어 놀아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눈앞의 그는 지금은 귀족적이고 세련된 태도를 지닌 신사였지만 언제 괴물로 돌변하여 자신의 피를 취하려 달려들지 도통 짐작할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존이 더욱 불안한 이유는 또 있었다. 이전에 있었던 일 이후로 존도 달리 조사를 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흡혈을 하는 존재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며 알게 된 것은 무엇 하나 확신할 수는 없는 것들 뿐이었으나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흡혈귀는 초대받지 못한 집에 발을 들일 수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응접실로 소리소문없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나마 존을 지금까지 편하게 잠들도록 해주었던 단 하나의 사실조차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음에 틀림이 없으므로 더욱 방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짧은 순간 후다닥 지나가는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으로 지속적인 경계 태세를 보이며 표정이 굳어있는 존을 지켜보던 그는 후후 웃으며 존의 질문에 답했다.

 

 "인간들에게는 애석한 일입니다만...우리들은 설화 속의 존재들과는 다르게 집주인의 초대 없이도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답니다."

 

 존의 가정을 확실시해주는 말이었다. 존의 표정이 미미하게 구겨지는 것을 바라보며 남자는 조용히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두는 편이 당신네들의 심신의 안정에 더 도움이 되겠지요."

 

 일단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있을테니까요, 하고 남자가 상냥하게 읊조렸다. 남자의 말에 존은 바람빠지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짓는 존의 얼굴이 지나치게 경직되어있다고 느꼈는지 남자는 가벼운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햇빛은 우리들에게 쥐약이나 마찬가지라는 건 사실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존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생각하던 존재가 맞다는 것을 알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느새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도 지우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옷차림의 신사는 실내의 따스한 불빛을 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가 노랗게 보이기는 커녕 실핏줄이 비쳐보일 정도로 하얬으며 뺨에는 온기라곤 없어 보였다. 시체를 제외하고는, 그가 본 사람중에서 가장 창백한 얼굴을 가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혈색이 창백한 경우 자칫 맥아리가 없어 보일 수도 있었으나, 남자는 그런 결점이 있음에도 유난히 우아해보였다. 그의 외양 가운데 특히 존의 마음을 잡아끈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언뜻 보면 엷은 농도의 무채색인 그것은 빛을 받을 때마다 신비로운 푸른색이 어린 채 반짝였다. 존이 그의 눈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린 이유는 단순히 빛깔만 출중한 점에서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예리한 지성의 눈빛때문이었다. 마치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한 매혹적인 보석같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그가 자신의 피를 강제로-정말로 강제였는지 존은 확신할 수 없었다-빨아마셨던 그때의 끔찍하고 음산한 괴물이라고 간주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러나 존이 그에게 느끼는 것은 매혹뿐이 아니었다. 공포. 그는 아직도, 여전히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을 뿐더러, 그가 풍기는 악몽처럼 스산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멀쩡한 사고를 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바깥에서는 은은하게 캐롤이 울려퍼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활기차게 거리를 활보하며 즐겁게 성탄절 전야를 보내고 있건만, 눈앞의 남자가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오싹한 고립감을 느꼈다. 마치 응접실만이 바깥 공간과 뚝 떨어져있기 때문에 외부의 흥겨운 분위기가 섞여들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마 지금 그가 거리로 나선다 해도, 주변을 응시하는 그의 눈짓 한번으로 웃음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인간다움과는 동떨어진 존재였다.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이끌림이라는 상반된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존을 바라보며 남자는 다리를 꼬고 있던 방향을 바꾸었다. 사각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잦아든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동안 많이 알아보셨겠지만...혹시 또 알고 싶은 것이 있으신가요?...닥터 존 해미쉬 왓슨."

 

 남자의 연보랏빛에 가까운 입술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담자 존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것처럼 놀랐다. 동요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이름은 어떻게..."

 

 내뱉어진 존의 물음에 그가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이름만 아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인도에서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부상때문에 의가사제대를 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는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지요."

 

 단 한 문장으로 명료하게 존의 이력을 읊어내는 남자의 통찰력에 존은 문득 자신이 처한 상황마저 잊고 솔직하게 감탄을 토했다.

 

 "굉장하네요."

 

 존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약하게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아까 보았던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듯한 미소가 아닌, 좀더 인간다운 느낌의 어떤 것이었다. 그것을 본 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으나 그 미소는 금세 스쳐지나가듯 사라져버렸다.
 잠시 그의 말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는데 문득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뱀파이어들은 모두 당신처럼 사람을 꿰뚫어볼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조사를 하신 건가요?"

 

 그의 물음에 남자의 입가에 불쾌한 기색이 여실히 느껴지는 차가운 웃음이 어렸다. 남자가 천천히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마련이죠. 선입관을 제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쉬운 말로 하자면-"

 

 남자가 처음에 보인 만들어낸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관찰이라고 하는 겁니다."

 

 부드러운 어조로 그가 말을 맺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요?"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조근조근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서 지나칠 정도의 격식이 느껴져 더욱 위화감이 느껴졌다. 존은 자신이 무언가 알지 못할 부분에서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을 눈치챈 이상 더이상의 섣부른 언동을 하지 않는 편이 상책이었으니까. 그러나 남자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끝마친 후로는 별달리 다른 말을 하고 싶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결국 존은 한없이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지난 번과 같은 용건이면 어떡하나 라는 생각에 걱정이 된 나머지 존은 말을 더듬을 뻔한 것을 간신히 평상시의 어투로 말할 수 있었다. 남자는 선선히 대답했다.

 

 "제 목도리를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그리고 사과를 하려는 목적도 있고요."

 

 사과? 존은 그가 사과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다는 것을 의아히 생각했다. 그러나 일단은 목도리를 돌려달라는 말에 존은 일단 서랍을 열어 잘 접어 고이 넣어두었던 목도리를 꺼내어 남자에게 건넸다.

 

 "가지고 있으셨군요. 다행이네요."

 

 그는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을 뿐이었으나 존은 어쩐지 목도리를 소중히 챙기고 있었다는 것을 들킨 것만 같아 묘한 가책으로 가슴 한쪽이 쿡쿡 찔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요를 애써 감추며 남자를 바라본 존은 목도리를 돌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에서 나가지 않는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또 다른 용건이 있으신가요?"
 "아까 말했듯이 사과를 드리려고 합니다."
 "무슨..."
 "그날 일 말입니다."

 

 그가 의미심장한 어투로 그 날의 사건을 짚어 말하자 존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우셨겠죠. 많이 놀라셨을테고요."

 

 안색이 바랜 존에게 그가 예의바른 어투로 말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당신을 엉망으로 내버리고 가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저도 그쪽 방면으로는 그다지 경험이 많지 않아서 당신에게 그런 일을 저지르고 나서 당황하고 말았거든요."

 

 존이 아 하고 남자의 말에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트를 여미고, 돌려받은 목도리를 목에 두른다. 존은 목도리를 두르는 그를 지켜보았다. 목도리를 목에 감고 그는 무언가 석연치않다는 듯 코를 몇 번 킁킁거렸다.

 

 "혹시 그날 이후로 이 목도리를 걸친 적이 있습니까?"

 

 갑작스럽고 뜬금없기까지 한 질문에 존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낮게 혀를 차며 말했다.

 

 "아쉽군요."

 

 무엇이 아쉽다는지 알 수 없었던 존은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존의 눈동자를 마주바라보며 남자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 냄새가 참 좋은데 말이지요."

 

 직감적으로 남자의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존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화악 붉어졌다. 그런 존의 표정을 본체만체하며 남자는 금세 미소를 지우고 혀끝으로 날카롭고 하얀 송곳니를 살짝 쓸었다. 그건 맛있는 요리접시를 앞에 두고 기다림 자체를 음미하면서 입맛을 다시는 행위와 같았다. 남자의 예의바른 태도에 잠시 망각할 뻔했지만, 그가 보인 무의식적인 행위는 존이 다시 그의 정체-인간을 먹잇감으로 삼는 포식자라는 것-를 깨닫는 데에 톡톡한 역할을 했다. 존의 얼굴이 다시금 하얗게 질리는 것에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존을 일별하며 나직한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응접실을 나섰다.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뒤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이유모를 아쉬움을 느낀 존이 그를 잠깐이나마 붙잡으려는 듯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끝인가요?"

 

 남자가 돌아서서 존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남자가 입술을 움직였다.

 

 "사과가 부족하신가요?"
 "아, 아니...그게 아니라..."

 

 존이 망설이다 계속해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더이상 만날 일은...없겠죠?"

 

 남자를 겨냥한 물음인지 자기 자신을 향한 자문인지 뉘앙스가 애매모호한 질문이었다. 존의 질문이 의외였는지 잠시 생각하던 그가 곧 미소지으며 답했다.

 

 "당신이 저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앞으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나긋하고 깊은 저음에 담긴 에로틱한 울림에 존이 저도 모르게 아...하고 탄성을 질렀다. 존이 무어라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이 남자는 끝까지 정중함을 잃지 않고 다시 고개를 숙인 후 응접실을 나갔다.

 

*
 

 꿈을 꾸었다.

 그는 또다시 칠흑같이 어두운 숲길 사이에 서 있었다. 마치 그날의 일을 재차 겪는 듯 뺨에 다가오는 바람 칼날 하나하나가 선명했다. 오래 걸어 피곤한 다리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둔통까지도 그날과 다름이 없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 온 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너무나도 실제적인 공간감과 당시의 장소를 그대로 옮긴 것처럼 생생한 풍경에 겁먹을 만도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존은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존은 이 꿈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맞았다.

 숲을 헤매는 사이, 다시 한 번 남자가 나타났다. 연기처럼 스르르 나타난 그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공기 중에 떠도는 남자의 알싸한 체취가 그를 더욱 강하게 사로잡는 것을 존은 느낄 수 있었다. 차게 풍겨오는 그의 향기에 존은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처럼 숨을 가쁘게 쉬었다.

 존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는 동안, 이전의 꿈에서 몇 번이고 그랬던 것처럼 그는 존을 제 품 안에 가두고 그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살갗을 꿰뚫는 것에 존이 신음했다. 느껴질리 없는 그의 존재의 흔적이 존의 몸 구석구석에 낙인찍힌 것처럼 되살아나며 강한 쾌락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꿈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속으로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초현실적이고 어찌 보면 과장되게까지 느껴지는 뜨거운 쾌감이 자신을 향해 몰려올 때면 존은 어찌 할 바 모르고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쾌감의 물결은 거센 파도처럼 점점 더 강하게 자신을 향해 부딪혀왔다. 존은 백사장의 모래알갱이처럼 힘없이 부서져 바닷물 속으로 서서히 쓸려내려갔다. 제어를 벗어난 몸을 물결치는 푸른 바다에 맡기고, 그는 차갑고 포근한 바다를 떠다녔다. 바다거품이 잘게 일었다가 보글거리며 사라진다. 움직이는 물결에 몸을 싣는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솨아아 하며 멀어진다. 물색이 깊어진다. 자신을 둘러싼 물이 연한 청록 빛에서 푸른 하늘빛으로 그리고 끝 간 데 모르는 남색으로 바뀐다. 더 깊은 곳으로 하강한다. 평온하다. 더 이상 아무런 잡음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 느릿느릿하게, 때로는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린다. 무겁게 무겁게 가라앉는다. 자신을 잃고 아래로, 아득한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지는 느낌에 존은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었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쳐내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눈발이 내리고 있다. 존은 비칠비칠 세면대로 걸어갔다. 중간에 한 번 넘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는다. 수도꼭지를 비틀어 연다. 쏟아지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았다. 그는 깨달았다.

 그에게 가야 한다.

 

*

 

 조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에 점차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북쪽 저편에서 다가온 거대한 젖빛 구름이 천천히 하늘을 덮었다. 강렬한 석양의 빛깔이 탁한 색조로 물들었다. 노 저어오듯 가만가만히 기어온 구름이 붉게 빛나다가 해가 지평선에 가까워지는 것과 함께 서서히 아래쪽부터 어두워졌다. 드리워진 커다란 구름의 그림자가 가장자리부터 진해지며 정원 위로 낮게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다.

 주홍빛의 황혼이 긴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희미하게 회색이 감도는 햇살이 내실의 커다란 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마이크로프트도 레스트레이드도 그것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자연스러운 침묵이 기분 좋게 두 사람을 감쌌다. 마이크로프트는 그날따라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는 공상에 잠겨 눈을 감은 채로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손가락을 까딱이고 있었다. 그로서는 몹시 드문 일이었다. 때때로-매우 계산적인 명목에서이기는 했지만-낭만이라는 것을 즐기기도 하는 마이크로프트와는 다르게 레스트레이드는 공상은 공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이크로프트가 무슨 생각에 그토록 골몰해있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고 또한 감히 짐작하려 들지도 않았다. 셜록이 자리를 비운 것과 연관되었을까 하는 가벼운 추측이 레스트레이드의 뇌리를 스쳤다.

 그때 마이크로프트가 눈을 떴다. 눈꺼풀을 가볍게 올려 뜬 그는 검푸르게 변한 구름이 멀리 있는 숲의 뾰족뾰족한 모서리를 스멀스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며 다소 경쾌하게 입을 열었다.

 

 “눈이 올 것 같군요.”

 

 셜록이 존을 방문하기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

 

 북부 런던의 교외지역의 외곽으로 빠져나갈수록 인적은 드물어지는 대신 포장도로가 없는 공터가 눈에 띄는 횟수가 빈번해졌다. 마지막 포장도로가 끊긴 흙길을 더듬어나가자 곧 히스가 무성하게 돋아난 채로 방치된 불모지, 그리고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숲과 그 사이로 난 길이 나타났다.

 존이 숲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해가 다 지고 난 후였기 때문에 언덕진 길 너머에는 짙게 어둠이 서려 한층 더 음산해보였다.

하늘에는 구름이 두텁게 깔려있었으며 달은 여전히 기를 펴지 못하고 간간이 몇 가닥의 빛만 뿌리며 스쳐갔다. 그렇게 빛 한 줄기 들이치지 않는 시커먼 숲의 안으로 발을 들인다는 것은 웬만한 강심장이라도 꺼릴 일이었으나, 존은 무엇에 홀린 것처럼 숲 속에 난 길을 따라 무작정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숲 안쪽은 생각 외로 밝았는데, 그 이유는 나무가 무성하지 않고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숲길의 트인 부분의 하늘로 설핏 내리쪼이는 별빛에 비친 수천 그루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음침한 잿빛을 띠고 있었고 이따금 나뭇가지에 달린 수백만 개의 잎사귀가 바람에 일렁이며 은빛으로 빛났다. 침엽수 특유의 가느다란 잎사귀에는 간간이 서리가 맺혀 흔들릴 때마다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부서져내렸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나무들의 밀집도가 높아지며 존이 가는 길가를 겹겹이 둘러친 나무들은 주위를 벽처럼 뒤덮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발에는 촘촘하게 자란 들풀이 덫처럼 얽혀오는 바람에 헛발질도 수차례였다. 숲 전체가 늪처럼 그를 가두어왔다.

 숲 가운데 완전히 그늘진 한 곳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수백 미터에 걸친 검은 숲이 바람결에 흔들려 흑해의 파도처럼 쓸쓸한 소리를 울리자 존은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때까지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져 있었던 존이 놀라 고개를 들자 탁한 파란색과 초록빛이 엉긴 청회색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을 가리던 구름은 점차 자리에서 비켜나고 있었고 그 틈새로 경직된 별빛들이 깨진 얼음조각처럼 간신히 스며나왔다. 먹구름을 뚫고 나온 달빛은 무척이나 쓸쓸해서 길을 밝히는 한편으로 음울한 정취를 더해갔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의 하부를 방황했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존 앞에는 굽이진 길목이 있었다. 그때 남자와 조우했던 장소가 여기였던가? 사실 그는 이 길을 지났었는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바람도 잦아들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오싹함은 더해만 갔다. 죽음처럼 조용한 숲 한복판에 서 있자니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무서워서인지 추위 때문인지 존의 몸에 덜덜 떨렸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 누군지도 모르는 이를 찾기 위해 질퍽이는 어둠 속을 배회하는 무의미한 일에 발을 들인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된 존이 막 뒤로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나무둥치와 나무줄기가 엉킨 듯 보이는 어두운 저편에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렸다.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춘 존은 그 남자일까 하고 생각했다. 자신을 부르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당장 떠오르는 가능성만 해도 무궁무진했다. 자신의 발걸음소리가 메아리친 것을 착각한 것일 수도 있으며, 순전히 그를 만났으면 하는 자신의 염원이 지어낸 소리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존은 그 희미한 소리에 약간의 기대를 걸어보기로 하고 다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꺾인 모퉁이를 돌자 끝없이 이어진 듯했던 나무들의 무리가 갈수록 듬성듬성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꼭 누군가가 정돈이라도 한 것처럼, 아까까지만 해도 길 한가운데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자란 히스 덤불은 길과의 경계를 뚜렷이 하고 있었으며 숲 가장자리에 다다를수록 키 큰 나무들은 드문 대신 작은 관목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갑자기 숲길이 뚝 끊겨 탁 트인 황야로 나온 존은 밝은 은빛으로 물든 풍경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불빛은 저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둠이라는 불협화음에 막 익숙해졌던 눈이 다시 밝은 불빛을 접하자 오히려 적응이 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저 멀리 무채색의 달빛 아래 푸르게 빛나는 신비스러운 저택을 마주하자 존은 마치 동화 속에 빨려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미로의 막다른 길에 자리한 것처럼 존의 시야를 꽉 채운 저택과 정원에서 밝힌 불빛이 더하여갈수록 막막했던 어둠이 걷히고 푸른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빛이 지금까지 죽 이어져왔던 강렬한 음습한 분위기를 망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눈앞의 저택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느낌은 단적으로 수려한 경관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겁게 패여 있는 세월의 주름과 차분하게 갈무리된 채 내려앉아있는 귀족다운 긍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저택 주변에는 몇 번이고 부수고 고쳐 지은 흔적처럼 군데군데 폐허의 잔해가 보였고 가파르게 뾰족한 지붕의 첨탑이 반쯤 부서진 채로 남아있었다. 조각난 채 파편만 남아 거꾸로 처박혀 있는 연록색의 석판은 비바람을 맞아 색이 한껏 바랜 데다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보이기까지 했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그러나 지은 지 백년은 족히 지났을 저택은 성을 왼편에 두고 있었는데, 가라앉은 회색으로 어슴푸레하여 옛 성보다도 못하게 희미해보였다. 안개처럼 몽롱한 저택이 환각이 아닌 실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등지고 있는 숲이었다. 저택의 뒷배경으로 그림자처럼 자리한 숲은 저택과는 대조적으로 수많은 갈가마귀 떼가 무리지어 모인 듯 새까맸다. 빛과 그림자, 고저택과 달, 바람과 별-그 모든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결과 저택은 비밀스럽고 쓸쓸한 인상을 풍겼다.

 더없이 아름답고도 황폐한 저택을 바라보며, 구름도 거진 다 걷힌 하늘에 뜬 달이 사위를 환하게 비추는 아래에서 우뚝 선 채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존의 앞에 기다렸다는 듯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는 검은 머리칼에 핏기 없는 뺨을 하고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거울에 반사된 환영을 보는 것처럼 검정 고수머리, 흰 얼굴 윤곽만 간신히 분간이 가는 정도였으나, 망자와 같은 납빛의 안색이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등지고 희끄무레하게 빛났다. 생기가 다 빠져나간 듯 창백한 얼굴의 남자는 그러나 무감각하게 죽어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눈만은 모종의 열정을 간직하고 이채를 띤 채였다. 그는 애원하는 듯한 태도로, 사뭇 우울하고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서 존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존의 피를 마시는 데에 대한 동의를 구하려 안달하는 것처럼 그는 존에게서 연민이라는 감정을 강요하고 있었다.

 존은 밤보다도 더욱 어두운 침묵 속에서 그를 무심히 비켜보았다. 그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은 탓일까, 아니면 그도 모르게 인근의 우울하기 그지없는 공기의 떨림에 감화된 탓일까. 존이 그 자신이 제삼자가 되어 멀리서 추이를 지켜보는 것처럼 별다른 감흥 없이 남자의 흐릿한 실루엣을 바라보는 동안 남자는 존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길게 자란 잔디가 그의 발밑에 채여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할 것 없다는 듯 느긋한 걸음걸이였다. 그러나 존에게 그의 존재는 마음 놓고 지켜볼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그가 존에게로 가까워올수록 존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며 본능이 막연한 불안감을 호소했다. 그건 천둥이 치기 직전의 고요한 긴장감과도 비슷했다. 어서 피하라고, 그에게서 멀리 멀리 달아나라고 힘껏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존은, 대체로 그러한 본능적인 직감을 신뢰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에게서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존은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일정하고 규칙적인 속도로 거리를 좁혀왔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그는 존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이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빛에 찔려 죽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홉 발짝. 열 발짝. 열한 발짝. 열두 발짝.

 둘 사이의 거리는 팔을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로 좁혀져 있었다. 때문에 푸르스름한 물이 든 유리같이 맑은 눈이 또렷하게 존을 응시하는 것이며, 환상에 취한 듯 확장된 동공이 미묘한 감수성에 젖어 흔들리는 것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의 존재감은 새벽별처럼 흐릿해졌고, 오로지 그만이 존의 앞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먹구름이 달을 스치며 사위가 캄캄해졌을 때 남자는 존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내디뎠다. 두려웠다. 그에게 이끌리면서도 그에게서 풍기는 지독한 냉기에 심장까지 성에가 끼고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남자가 손을 뻗어 겁에 질린 존을 끌어안았다. 존은 놀랍도록 손쉽게 그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그 순간 구름이 지나가며 달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중천에 뜬 달은 그 어느 것보다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시각각 달빛의 세기가 강해지며, 사위가 온통 선명한 은빛 광채로 물들었다. 존은 달빛에 환히 드러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또한 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남자의 눈동자가 그에게 마법이라도 건 것처럼, 그의 눈동자에 사로잡힌 존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꼼짝없이 남자에게 잡힌 존은 남자의 눈동자가 서늘한 열기를 띠고 바짝 다가오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조심스럽게 존에게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닿은 입술이 존의 다물린 입술을 살며시 열고 혀를 얽어왔다. 유령에게 홀린 듯 존은 그에 순종적으로 응했다. 이미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듯, 존은 그의 숨결이 뜨거운지 차가운지도 느낄 수 없었으며, 제 입술에 부비어 오는 그의 입술이 불타는 듯 뜨거운 것인지 아니면 얼음장처럼 차가운지도 몰랐다. 그의 손가락이 그의 허리를 붙잡아 오는 감각은 너무나도 선명했으나 한계 이상으로 전해져 오는 느낌에 그의 허리가 화염에 불태워진 듯, 또는 서릿발이 파고든 맨살에 동상이 걸린 듯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존의 수용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길고 긴 키스마저 그랬다.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사랑처럼, 지상에서 영원까지 죽 이어지던 키스는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으나 허무하고 잔잔하게 잦아들었다. 존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처럼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남자는 존의 뺨과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키스로 온기를 되찾은 따스한 입술이 존의 목덜미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목에 이른 입술은 금방 떠나갈 것처럼 느껴졌으나 오히려 아까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애무의 여운에 휩쓸린 존은 그의 이빨이 자신의 살갗을 파고드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듯 셜록이 존을 좀 더 세게 끌어안고, 동시에 이빨을 더욱 세게 박았을 때 치닫던 쾌감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고통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존은 목이 졸린 듯 가늘게 흐느꼈다. 숨결이 높아졌다가 푹 꺼지듯 가라앉았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내리는 꽃잎처럼 그는 끝없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심한 경련과 함께 존은 감각과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잃긴 했으나 간간이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했다. 고장 난 영사기처럼 간헐적으로 빛과 암전이 이어졌다 끊어지곤 했다. 흐릿한 시야에 남자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뭔가를 반추하는 듯 심각하고 무섭기까지 한 표정으로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존은 왜 그러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몸은커녕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기억과 망각의 사이를 오가면서도 존은 그의 입맞춤을 또다시 갈망하고 있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남자가 자신을 들쳐 안은 채로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존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그 미약한 움직임을 알아차렸는지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존이 힘들어하자 남자는 존을 자신의 품에서 내려놓았다. 잠시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되찾자 남자는 잠시 걱정이 어린 듯한 눈으로 존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앞장섰다. 존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말없이 암록색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흑백의 타일이 깔린 복도가 나타났다. 호박색 불빛이 그들의 앞길을 밝혔다. 그에게 이끌려 가면서도 억지로 끌려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인양 존은 말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느껴지는 터무니없는 비현실감과 꿈결처럼 아련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모든 일련의 상황을 그가 납득할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정말로 꿈일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남자가 발을 멈추었다. 멈춰선 자리에서 존을 흘깃 쳐다본 남자는 닫힌 문을 열었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문이 열리며 방 안에 떠돌던 밤공기가 복도로 밀려나왔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존을 쳐다보았다. 돌아가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듯, 잠시 존을 바라보며 숨을 돌리던 남자는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존은 낮게 코웃음 쳤다. 선택권을 주겠다는 듯 존에게 마지막 한 걸음의 결정을 떠넘기는 그의 태도가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돌아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존은 망설임 없이 그의 뒤를 따라들어갔다.

 

*

 

 낮은 격자무늬 창으로 을씨년스러운 은회색의 달빛이 간신히 스며들어왔다. 지금까지 미처 눈치채지 못했으나 하늘에서는 눈발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작은 격자창을 통해 비추이는 침울한 빛깔의 별빛이 겨우 방 안에 들어찬 어둠을 밝히는 정도였다. 달빛보다도 흐릿한 빈약한 햇살이 삼백년 전의 볼품없는 가구에 들이쳤을 광경을 그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방은 지나치게 천장이 높아 불균형한 조형감이 몹시 불안정했다. 장식품 하나하나는 아름다웠으나 멋대로 쑤셔박아놓은 것처럼 조야한 배치로 놓여있었다.

 세련되지 못할 뿐더러 투박하고 침침하기까지 한 방의 한가운데에 선 존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요?”

 

 미약했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이건 불공평해요.”

 

 당혹스런 듯한 목소리였다. 남자가 조용히 되물었다.

 

 “뭐가 말인가요.”

 

 존이 눈을 불안하게 깜박이다가 말했다.

 

 “난…아직 당신의 이름도 모른단 말입니다.”

 

 존이 쥐어짜내듯 소리쳤다.

 

 “반면에 당신은 나에 대해 뭐든 알지 않습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중얼거리듯 이었다.

 

 “정말로 모르겠다고요.”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혀끝이 건조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 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용기를 내어 가슴 속 깊이 자리하던 의문을 토로했다.

 

 “왜 내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 거지요?”

 

 질문하는 그의 목소리는 자제되어 있었으나 어딘지 불안정하고 날카롭게 들렸다. 길고 긴장된 공기가 방 안을 흐르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겨울바람이 스며드는 싸늘한 방 안에서 어스레한 달빛에 둘러싸인 남자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나직하고 느릿하게 목소리가 울렸다.

 

 “-나에 대해서 궁금해 하기를 바랐으니까요.”

 

 언뜻 보기엔 우월감에 가득 찬 듯 오만한 말투였으나 존은 어렴풋하게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말의 의미를 짐작해낼 수 있었다. 자신이 줄곧 느껴왔던 초조함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또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자신의 목줄기를 뜯어낼 수 있는 흡혈귀인 그도 존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 또한 두려웠던 것이다.

 

 눈이 더욱 심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창으로 눈송이들이 달려와 유리창을 때렸다. 굵은 눈이 창문을 이따금 뒤흔들었다. 방 안에 유일하게 켜져 있던 자그마한 초의 심지가 바닥까지 다다르며 불꽃이 깃발처럼 흔들렸다. 조그만 불빛에 비친 존의 눈에는 엄연한 공포심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두려워 떠는 순간에도 기이하고 모순된 감정이 존을 사로잡았다. 존은 떨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이름을 말해줘요.”

 

 남자가 존을 응시했다. 존은 거침없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눈빛에서부터 곧장 느낄 수 있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공포와 혐오가 뒤섞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미묘하면서도 격렬한 흥분이 그의 사지를 내달렸다.

 자못 엄숙한 태도로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은 셜록 홈즈입니다.”

 

 존이 그 이름을 또박또박 되뇌었다.

 

 “…셜록 홈즈.”

 

 그의 이름을 따라 말하는 존을 바라보는 셜록의 여윈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으나 꽤 만족스러워하는 인상이었다. 실제로 셜록은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 존의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고 혀로 굴리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셜록이 말했다.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불러줘요.”

 

 셜록이 요구했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거칠게 엉켜들었다. 방 안은 분명 추웠으나 두 사람을 감싼 공기는 열기를 띠고 있었다. 존은 숨을 한 번 들이켜고, 토해내듯 말했다.

 

 “셜록.”

 

 그 이름을 부름으로서 마지막으로 그러모았던 존의 이성이 송두리째 허물어졌다. 이제는 반항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자신이 그러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동물적인 육감으로 그것을 알아차린 셜록은 존을 그의 침대에 부드럽게 눕혔다. 매끈하게 덮여 있던 남색의 벨벳 침대보가 존의 실루엣을 따라 숙 꺼져들며 가장자리에 달린 금색 술이 화려하게 흩어졌다.

 존의 위에 올라탄 셜록은 무릎을 꿇고 몸을 수그렸다.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존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는 역겹지만 동시에 황홀하기도 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메마른 입술을 핥는 그의 모습에는 다분히 의도적인 관능미가 있었다. 은회색의 달빛을 등진 그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하얀 이와, 그것을 핥는 촉촉한 붉은 혀가 보였다. 먹잇감을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표범 같았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살짝 벌린 채 다가온 입술이 존의 목덜미 위에 멈추었다. 존은 그의 목에 닿는 셜록의 뜨거운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진홍색의 혀가 자신의 치열을 쓸어내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각성제처럼 존의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웠다. 셜록이 천천히 존의 목에 입을 맞췄다. 극도로 민감해진 목의 얇은 피부 위로 그의 입술이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러웠다. 입술이 열리며, 그 안에 도사린 두 개의 단단한 치아 기둥이 이제 막 존의 목을 건드렸다가 존이 움찔거리자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기력을 빼앗기는 듯 온몸이 느른해져왔다. 그의 생명력이 셜록에게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당연하게 예비되어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마땅한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존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나른한 황홀경 속에서 눈을 감고 기다렸다.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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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높은 창문 위로 빛이 쏟아지고 있다.
당신의 엄숙한 얼굴 역시
둥근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조용한 은빛 달이 이토록이나
나를 감동시켰던 밤은 없었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노래 중의 노래가
말할 수 없이 감미롭다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잠자코 있다 나도 잠자코 있다
침묵 또한 빛 속으로 사라져 갔다
호수 위 한 쌍의 백조와 머리 위의 별 외에는
달리 생명 있는 것이라곤 없다

 

당신은 창문으로 몸을 내밀었다
당신이 내민 손과
당신의 가는 목덜미를
은빛 달이 곱게 물들였다.

 

-헤르만 헤세

  

 

 저택에 들어서면서도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이 지금 마이크로프트를 찾아가는 것이 올바른 처사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고뇌를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레스트레이드는 걸음을 멈추었다. 멈춰선 그의 뒤로 앙상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챙 하는 쇳소리가 그를 떠밀듯 울렸으나 레스트레이드는 못박힌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망설임은 마이크로프트에 대한 너무나도 깊은 그리움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 지 그는 가늠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마음 속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오랜 시간동안 뱀파이어들과 가까이 지내온 레스트레이드는 그들의 특성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이 때때로 특정한 사람에 대해 사랑과 비슷한 열정에 사로잡히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열정의 대상이 되는 이를 뱀파이어들은 '죽음의 신부'라고 칭했다. 뱀파이어들이 죽음의 신부를 맞이하게 되면 결과는 대체로 두 가지였다. 죽음이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거나, 아니면 언약과도 같이 죽음으로 맺어지거나. 확률은 반반이었다.
 섬약한 뱀파이어들은 마음에 둔 인간의 죽음에 크게 상처입고 그를 따라 소멸을 택하거나 한동안 광란의 발작 또는 깊은 토퍼(수면)에 빠져드는 것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했다. 인간을 동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엘더와 프린스의 허락을 받는 등의 만만치 않은 절차를 필요로 했으나 또한 많은 뱀파이어들이 택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그들의 사랑을 깨뜨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권태였다. 오랜 세월을 누리는 그들은 쉽게 서로에게 질렸고 끝은 좋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였다. 레스트레이드는 반세기 남짓밖에 살지 못한 인간이었으나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많은 뱀파이어들이 그렇게 하찮고도 지저분한 감정 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자주 보아왔다.
 마이크로프트가 내놓고 말을 하진 않았으나 레스트레이드는 그가 하고 많은 인간들 중에서 자신을 유별나게 아끼는 이유가 자신이 그의 죽음의 신부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레스트레이드는 또한 그가 자신에게 영생을 선사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뱀파이어가 인간을 혈족으로 변화시키는 순간을 그 인간이 가장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시기를 골라 택했으며 레스트레이드 자신은 이미 젊음을 잃은지 한참도 더 지난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불멸의 동반자로 삼으리라는 희망을 오래 전부터 저버리고 있었다.
 한때는 그와 영원을 살아가리라는 치기어린 희망을 품기도 한 그였지만 이제 현실과의 타협이라는 것을 할 줄 알게 된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먼저 자신을 저버리지 않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3개월 전 주제넘게도 마이크로프트에게 투정을 부리듯 화를 내고 그의 곁을 떠난 자신이 이제야 그에게 돌아간다고 해서 그가 과연 기뻐할 것인가? 천성이 냉정한 데다 자기자신에 대한 자긍심으로 충만한 마이크로프트를 떠올리니 그가 돌아온 자신을 다시 받아줄 것이라는 것에 대해 점점 자신감이 사라졌다. 냉대를 받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미 그는 자신은 안중에도 없을지도 모른다. 다른 인간을 총애하고 싱싱한 젊은이를 골라 그의 피를 맛보는 데에 맛들였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옅어진 레스트레이드는 지금이라도 저택을 나가 모습을 감추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련이라는 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미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이 저택 안으로 들어온 것을 눈치채었을 터, 조금만 더 머무르며 그가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려도 무리한 선택은 아닐 것이다, 라고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의 미련을 합리화하며 한옆에 정원을 향해 발을 돌렸다. 그러나 초겨울 날씨에 이미 혹사당한 바깥쪽 정원에는 추위에 강한 관목만 흔적처럼 남아있었고 그나마도 무성히 자라 야생의 수풀과 별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래서야 정원을 구경한다는 핑계도 댈 수 없겠군, 하고 자조하던 레스트레이드가 무심코 고개를 돌린 곳에는 새장처럼 서있는 유리온실이 보였다. 흐린 유리창 너머로 홍조처럼 붉은 빛깔이 언뜻 보이는 것에 레스트레이드는 그 안으로 향했다.

 

 온실을 들어서자마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풀내와 잔향처럼 남은 장미향기가 레스트레이드를 감쌌다. 안은 전혀 손질되지 않은 장미넝쿨이 엉망으로 엉켜 무턱대고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꽃송이를 떨어뜨리지 않은 몇 떨기의 장미가 남아 최소한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버려진 지 오래되어 퇴색할 대로 퇴색한 정원의 모양새와 동질감을 느낀 레스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정원 안을 거닐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의 자태가 피어있던 모양 그대로 시들어버린 듯 바랜 주홍색의 장미가 레스트레이드가 뻗은 손가락에 닿아 바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간신히 붙어있던 꽃잎을 떨구었다. 반쯤 시든 장미향의 관능에 취한 레스트레이드는 머리가 아찔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꽃향기로 가득한 곳에 오래 있으니 현기증이 일었다. 레스트레이드는 아파오는 머리를 무시하고 마이크로프트가 결국엔 와주지 않으려나 하고 온실 안을 초조히 거닐었다.

 

 "오랜만이예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온실 내벽을 울렸다. 레스트레이드는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향한 곳에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마이크로프트가 서있었다.
 은거하는 동안 수심에 잠기지나 않았을까 걱정했던 레스트레이드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그의 핏기도 홍조도 한 점 없는 이목구비는 여전했다. 온 몸에 배인 위엄도 조금도 퇴색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전히 퇴색해버린지 오래된 정원 한복판에 결코 퇴색하지 않는 우아함을 지닌 남자가 서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이러닉했다.
 레스트레이드가 떨리는 입술을 열려다가 다시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마이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못 본 사이 수척해졌군요."

 

 지극히 일상적인 말을 차분한 어조로 말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의 얼굴에 드리운 일말의 순결한 우울과 애절한 고뇌로 말미암아 매우 중요한 듯한 울림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레스트레이드는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고 마이크로프트의 생기를 잃은 붉은 입술도 이윽고 닫혀버렸다.
 재회의 순간을 기쁨이 아닌 무겁기 그지없는 침묵이 점령하고 말았다. 악마의 저주처럼 그들을 짓누르는 침묵의 그늘을 미처 걷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길고 긴 시선의 조우 끝에 레스트레이드가 먼저 눈을 돌렸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레스트레이드가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강하시니 되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레스트레이드가 몸을 돌려 온실을 나가려는 것을 마이크로프트가 가로막고 말했다.

 

 "내 안부만을 확인하러 온 건 아닐텐데요?...그렉."

 

 망설이다 뱉어낸 이름에 더이상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레스트레이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반복하여 말했다.

 

 "그것뿐입니다. 그것뿐이라고요."

 

 마이크로프트는 흠씬 두들겨맞은 어린애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레스트레이드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열려던 마이크로프트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억지로 자신을 외면하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한 레스트레이드를 한동안 응시하던 마이크로프트가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정말로 납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레스트레이드의 속마음을 마이크로프트가 입 밖으로 내어버린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을 없을 것이었으니까. 레스트레이드는 안도섞인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간다고요, 그렉?"

 

 또다시 이름을 불러온다.
 레스트레이드는 더이상 마이크로프트를 피하지 못하고 그와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긴 했으나 어깨를 간헐적으로 떨고 있는 레스트레이드에게 마이크로프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알 수 없는 눈길로 레스트레이드를 바라보던 그는 눈앞의 반백이 다 된 남자를 품에 안았다. 난데없는 포옹에 레스트레이드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가 꼼지락거리던 손을 살그머니 올려 마이크로프트를 마주 안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은 정말 어렵군요."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표정을 보려 했으나 마이크로프트는 팔의 구속을 풀지 않았다.
 일일천추라고 했던가.
 그를 만나지 못했던 삼 개월은 오랜 기간을 살아온 마이크로프트에게도 고문과 다름이 없는 시간이었다. 마치 존재의 한 조각이 영영 떨어져나간 것처럼 활기도 의욕도 없는 하루하루는 그 이전까지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을까 싶을 정도로 공허한 시간들이었고, 마이크로프트는 권태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버렸던 수많은 기억 속의 혈족들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부유감을 떠안고 간신히 시간을 흘려보내던 중, 레스트레이드가 저택에 당도한 순간이 되어서야 마이크로프트는 다시 능동적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자각하자 씁쓸한 조소가 치밀었다. 그렇게 자기혐오의 감정이 들면서도 레스트레이드를 막상 품에 안으니 이렇게 기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이크로프트의 심정을 더욱 착잡하게 만들었다.
 무슨 심경에서 하는 말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모호한 어조로 마이크로프트가 레스트레이드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이 나를-자신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지요."

 

 간접적으로 레스트레이드에게 그 자신이 그의 속내를 파악했음을 알리자 마이크로프트에게 안길 때부터 빨라진 심장의 고동이 한층 더 빨라졌다. 레스트레이드가 오길 기다리며 저택의 불을 밝힌 마이크로프트. 일부러 저택이 아닌 정원으로 발길을 돌린 레스트레이드. 결국 레스트레이드가 있는 곳으로 움직인 것은 마이크로프트가 먼저였다. 그것을 지금 굳이 언급한 이유는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레스트레이드에게만큼은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것을 은밀히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레스트레이드의 두 뺨에 홍조가 몰렸다. 사탕발림과도 같이 달콤하기만 한 그의 속삭임에 레스트레이드는 그가 지금 하는 말의 진실성에 대한 불안함을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었지만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을 먼저 찾아주고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레스트레이드를 감격하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에 따라 소심하게 손을 등 뒤로 올리는 것에 불과했던 그의 포옹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그런 한없이 순수하고 솔직한 그를 꼭 안은 채로 마이크로프트는 야비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띠었다. 지금 이 순간 끔찍하고 기괴한 소유욕으로 얼룩졌을 자신의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는 좀더 단단히 그를 끌어안았다. 레스트레이드는 한낱 보잘것없는 인간에 불과했으나 그가 힘들여 자신을 향한 마음을 토해낼 때 마이크로프트는 어디에서도 그보다 더한 희열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레스트레이드를 안심시킬 수 있는 자신의 친절하고 상냥한 가면을 계속해서 덮어쓰고 있기로 했다.
 레스트레이드의 등을 쓸어내리며 마이크로프트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들어요."

 

 새빨갛게 되었을 얼굴을 들기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쳐들게 한 후 그 입술에 부드럽게 입맞추며 마이크로프트가 속삭였다.

 

 "나의 그렉..."

 

 마이크로프트의 속삭임을 들은 레스트레이드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에게 짧은 키스를 한 마이크로프트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그에게 키스했다. 수줍지만 분명히 적극적인 몸짓으로 레스트레이드가 화답했다.
 신사적인 입맞춤으로 시작되었던 키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스트레이드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깊어졌다. 오랜만에 맛보는 입 안의 점막을 하나하나 느끼려는 것처럼 깊숙이 혀를 집어넣은 마이크로프트는 입 안에서 난폭하게 분탕질을 쳤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것처럼 진득한 키스가 이어졌다. 간간이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마이크로프트가 나의 그렉, 을 연신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소유를 재확인하듯 연신 낭만적인 속삭임을 퍼부으며 마이크로프트는 키스를 계속했다. 집착처럼 끈질기게 이어지는 입맞춤에 숨이 가빠온 레스트레이드가 잠깐, 하고 고개를 뒤로 물리려고 했지만 마이크로프트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오히려 바들바들 떨리는 그의 구강 점막을 한계까지 유린하는 데에 집중했다.
 호흡의 주도권마저 마이크로프트에게 박탈당해 힘이 빠져 축 늘어진 레스트레이드를 지탱하듯 안고 마이크로프트는 만족스럽게 키스를 마치고 입술을 떼었다. 사랑스럽다는 듯이 레스트레이드의 뺨을 어루만지며 마이크로프트가 못박듯이 말했다.

 

 "당신은 내것이지요?"

 

 키스의 여운으로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레스트레이드가 대답했다.

 

 "...네."

 

 솔직한 대답에 마이크로프트가 미소지었다. 웬만해서는 개인적인 희노의 감정이 얼굴에 나타나는 일이 적은 마이크로프트로서는 커다란 감정 표현인 셈이었다.
 온실 안으로 은은한 달빛이 들어와 두 사람을 감쌌다. 달빛을 따라 더욱 농도를 더했을 고독의 유혹은 이제 간데없었다. 대신 마이크로프트는 아직도 헐떡이는 레스트레이드를 끌어안고는 달이 완전히 기울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가 회포를 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장미 온실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달빛의 파도가 흠뻑 적셨다.

 

*


 아침이 가까워왔고, 레스트레이드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피를 빨린 목덜미가 욱신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사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둔통이 더 심했지만 그건 달리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밤의 행위를 되새기듯 허리를 살살 매만지며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의 옆에 누운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흡사 죽은 사람처럼 숨도 쉬지 않고 얌전히 누워있는 마이크로프트의 모습은 레스트레이드에게는 익숙하면서도 굉장히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다정한 시선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던 레스트레이드는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저택 복도에 햇빛이 비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저택의 주인이 뱀파이어이니만큼 아침이 되기 전까지 반드시 저택 안으로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으나 간밤에 문을 열어놓고 닫는 것을 잊어버렸는지 지금 저택 안으로는 여느 인간들이 사는 곳처럼 무방비하게 햇빛이 쏟아져들어오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레스트레이드는 급히 침대에서 내려서다 허리를 삐끗할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일어선 그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옷을 줏어 대충 걸치고 방을 나서려다 무언가를 기억해낸듯 다시 뒤돌아서 마이크로프트가 누워있는 침대로 향했다. 흡혈의 효능으로 약간 발그스름하게 혈색이 도는 마이크로프트의 뺨에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입을 맞춘 레스트레이드는 시트를 끌어당겨 그를 덮어주고 침대 매무새를 다듬어주는 것까지 끝마친 후에야 방을 빠져나갔다.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젖혀져있는 커튼을 하나하나 닫던 레스트레이드가 문득 그 자리에 멈춰섰다. 깊은 밤 등 뒤에서 신경을 묘하게 곤두서게 만드는 이상한 기척이 바스락바스락 들려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방 안의 분위기가 으슬으슬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간임에도 오한이 든다는 것은 확실히 기이한 것이었기에 레스트레이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한 차례 몸을 떨고 다시 손을 움직여 열려있던 마지막 커튼을 틈새 없이 여몄다. 커튼을 닫고 뒤로 돌아선 레스트레이드는 그제서야 그가 이유모를 불안감을 느끼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셜록 홈즈. 마이크로프트의 호의를 입어 저택에서 함께 지내게 된 신생 뱀파이어. 언제나 활력없이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흘깃 바라보고 지나치던 남자가 어째서  지금 자신의 뒤에서 수상쩍은 눈빛을 보내오고 있는지 레스트레이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물건을 품평하듯 위아래로 자신을 훑어보는 셜록의 시선에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레스트레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그의 나이가 분명 자신보다 어리다는 것을 레스트레이드는 알고 있었지만 그는 엄연히 포식자의 입장이었고 자신은 그 반대의 입장이라는 것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행동일 것이라고 결론지었고 따라서 셜록에게 다소 과도할 정도로 예의를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당황하지 않고 자신을 마주 바라보며 태연하게 말을 거는 레스트레이드의 의연한 대처에 셜록이 오히려 당황한 듯 잠시 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배가 고픈데요."

 

 그가 입을 여는 순간 훅 끼치는 피냄새에 레스트레이드가 본능적으로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기묘하고도 따뜻한 냄새가 짙게 풍겨왔다. 왜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도록 진한 피냄새였다. 급작스레 변하는 상황에 위기감이 든 레스트레이드는 기민한 관찰력을 동원해 멀리 떨어져 있는 그를 관찰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가 매끈한 돌바닥에 남긴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피바다에 푹 빠졌다 나온 것처럼 핏물로 그려진 발자국이 회색 대리석 바닥에 선명했다. 셜록의 상반신으로 시선을 향하자 피에 푹 젖은 채로 목덜미에 달라붙어 있는 와인색의 셔츠깃이 보였다. 과연 그 셔츠가 본디 와인색이었을지, 그렇지 않으면 피에 젖어 와인색으로 변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더욱 무서웠다. 언뜻 보기에도 몸 전체에 피범벅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였지만 신기하게도 얼굴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아 보랏빛으로 창백하게 보였다.
 셜록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살짝 벌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어정쩡하게 입을 벌리고 있다가 멋쩍었는지 혀로 메마른 입술을 쓸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레스트레이드는 그 입 안이 위험한 붉은색으로 물들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겁이 더럭 난 그는 약간 급하다 싶게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곤란해요."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셜록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한옆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던 고개가 다시 똑바르게 들려 그를 바라보는 것에 레스트레이드는 괜히 입을 열었다 싶었지만 어쩔 수없이 말을 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아까 전까지 마셨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소립니다."

 

 사실 지금도 머리가 조금 아픕니다만, 하고 말을 끝맺는 레스트레이드에게 셜록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예요. 사실 지금 배가 고프다는 것이 저로서도 의외이긴 한데..."

 

 셜록이 말을 흐리며 곤란한 듯 손을 올려 머리를 긁적였다. 가만히 늘어뜨리고 있던 팔을 갑자기 위로 들어올리자 피가 엉겨붙어 한층 짙은 검은색으로 변한 재킷 소매에서 핏방울이 몇 초의 간격을 두고 간헐적으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손에 피가 묻은 것도 모르고 있었는지 찐득하게 핏자국이 달라붙은 손으로 머리를 만지다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 달라붙는 것에 당황하는 셜록을 보는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허술한 모습에 다소 안심이 되면서도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왜 저 남자를 받아들인 걸까? 그는 마이크로프트와 일견 닮은 듯한 분위기를 지니긴 했으나 마이크로프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레스트레이드는 두 흡혈귀의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마이크로프트가 특유의 기품과 식견으로 타인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라면, 셜록은 그보다 복잡미묘한 존재였다. 두렵지만 동시에 연민이 뒤섞인 모순된 감정을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품게 한다고나 할까. 아직 인간의 피를 앗아 자신의 생을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하지 못한 젊은 흡혈귀에게서 흔히 보이는 인간성의 잔재때문인지 아니면...
 방황하는 레스트레이드의 상념의 끈을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셜록이 입을 열었다.

 

 "사실 아까까지 한 인간의 피를 마시고 돌아왔거든요."

 

 딱 보기에도 그래보입니다, 라고 답하려고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인간의 몸 속의 피를 남김없이 뽑아낸다고 해도 저렇게 피에 푹 절도록 할 만큼의 양은 되지 못했다. 그러면 어디서, 라고 물어보려던 레스트레이드가 미처 질문하기 전에 셜록이 해답을 주었다.

 

 "그런데도 배가 고파서 저택 지하실에 있는 혈액보관함에서 몇 팩 꺼내마셨죠."

 

 피로 가득 채운 욕조에 담갔다 꺼냈다고 해도 믿을만한 그의 몰골을 보면 몇 팩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일이었지만 레스트레이드는 대화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길 원하지 않았기에 적당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대신했다.

 

 "인간의 피를 언제 마셨는데요?"
 "어젯밤이었습니다."

 

 셜록의 대답에 레스트레이드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벌써 목이 마를 이유가 없을텐데요."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셜록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고 말했다. 격앙되던 목소리는 금세 힘을 잃고 나직하게 잦아들었다.

 

 "그런데 갈증이 가시질 않아요."

 

 내뱉은 탄식에는 절박함이 어려있었고,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이 섣불리 자신의 피를 마시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하필 마이크로프트가 자고 있을 때 이런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단 말인가. 흡혈귀의 생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기는 했지만 명색이 형제인 마이크로프트가 마땅히 이런 돌발상황에 관여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레스트레이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시기에 갑작스레 젊은 뱀파이어의 상담역이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한숨을 내쉰 레스트레이드는 입을 열었다.

 

 "일단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그 몸부터 어떻게 합시다.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하죠."

 

 그의 옆을 지나치던 레스트레이드가 다시 돌아서 셜록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함부로 뭐 만지지 말아요. 그 꼴로 이 집 물건에 손댔다간 마이크로프트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하나하나가 적어도 몇 십년의 세월을 지닌 물건들이니까요, 라고 말한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이 목마름을 해소한답시고 엉망진창으로 피를 튀겨놓았을 지하창고를 청소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

 

 셜록이 깨끗이 씻고, 레스트레이드가 피범벅이 된 지하실을 청소하고 나자 정오가 훌쩍 지나있었다. 셜록은 여전히 갈증이 치미는지 종종 목을 만져대긴 했으나 그 비정상적인 갈증을 풀기 위해 레스트레이드를 습격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게다가 뱀파이어들의 힘이 약해지는 낮시간이었으므로 그는 졸음을 간신히 참는 사람처럼 소파에 몸을 나른하게 누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뱀파이어의 우월한 신체 능력이 어딜 가는 것이 아니었고, 만의 하나의 상황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었기에 레스트레이드는 그와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레스트레이드의 모습을 본 셜록은 쓴웃음을 지었으나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지라 달리 무어라고 말은 하지 못했다.
 아침부터 이런저런 상황에 휩쓸리느라 식사도 하지 못한 레스트레이드는 혼자만을 위한 애프터눈 티타임을 가지며 셜록의 설명을 들었다. 셜록은 초조해하는 기색이었으나 금방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초지종을 듣게 된 레스트레이드는 당혹스러웠다.
 그의 말에 따르면 셜록은 한 인간의 냄새를 맡았고, 주체할 수 없는 욕구를 느낀 끝에 그 남자의 피를 빨았다고 했다. 하지만 흡혈귀의 흡혈은 본래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들의 신원 조회 절차가 복잡화되면서 시체를 유기하는 것이 어려워진 지금 흡혈귀들은 욕구에 몸을 맡긴 채로 인간을 습격하는 원시적 사냥 방식을 버리고 좀더 교묘한 방법을 택했다. 보통은 밤거리에서 흥청망청대는 인간들이 제 일의 목표물이었다. 술이나 약에 취해있을 것이므로 설사 기억을 한다 해도 환각으로 치부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적합한 사냥감이 없을 경우에는 좀더 번거로운 방법을 썼는데, 상대방을 유혹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방법이었다. 물론 뱀파이어가 소유한 강한 매료 능력이 그 작업에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매료 능력만 발휘한다고 해서 인간이 흡혈귀의 수중에 쉽사리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의심이 극도로 많아진 현대 인간들을 속이기 위해서는 책략을 구사할 줄 아는 지성과 그것을 줄기차게 지속해낼 수 있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했다. 그건 마치 사랑과도 같은 일련의 과정이었다. 물론 기간이 하루에서 이틀 정도로 무척이나 짧다는 것과, 결과가 흡혈로 끝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셜록이 털어놓은 바는 그와는 확연히 달랐다. 처음부터 상대방을 제압하여 꼼짝 못하게 만들고 흡혈을 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매료 능력이 웬만큼 강해서는 먹히지 않는 수법이다. 또한 흡혈을 하고 나서도 욕구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특이한 반응은 단 한 가지 특정한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을 죽음의 신부로 낙점지은 것처럼, 셜록이 그 남자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반려나 다름없는 죽음의 신부는 보통은 뱀파이어가 된지 한참 지나고도 한 명을 발견할까 말까 한 것이었다. 그런데 혈족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가, 그것도 첫 흡혈을 한 대상에게서 그것을 느끼다니, 우연이 겹친다 해도 이리도 절묘할 수는 없었다.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에게 그 점을 셜명하고선 말했다.

 

 "...그런 상황이 닥칠 수 있지. 네가 지금 겪고 있는 증상이 그 상황에 따른 것이라면, 불행하게도 너로서는 억제할 방법이 없어."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레스트레이드의 말투는 자연스럽게 반말조로 바뀌어 있었으나 딱히 셜록은 그에 신경쓰는 것같지는 않았다. 레스트레이드가 말해준 사실들이 충격적이었는지 그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억제할 수 없다고요, 라는 말을 한숨과 함께 중얼거릴 뿐이었다. 감성을 배제하고 이성에 입각한 합리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셜록에게는 자신으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원인에 의해 뜻하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 못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셜록이 왜 절망하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자의로 흡혈귀가 된 것도 아닌데다가 통제불능의 상황에 휩싸인 그의 혼란스러움만큼은 레스트레이드는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그를 위로하고 싶었던 레스트레이드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이크로프트와 나도 그런 관계야."

 

 네가 상상하는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하고 중얼거리며 후후 웃는 그에게 셜록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유난히 친밀해보였던 까닭이 있었군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레스트레이드를 쳐다본 셜록은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굳이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당신은 그와 함께하고 싶은 것같은데요."

 

 이유는 당신이 더 잘 알테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하고 말한 후 셜록은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 얼굴을 마주칠 때에도 소 닭보듯 데면데면하게 굴며 그다지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듯 싶었던 셜록이 자신과 마이크로프트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의외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에 놀란 레스트레이드는 급히 말을 돌렸다.

 

 "사실 이런 것은 내가 아닌 마이크로프트와 의논해야 하는 것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주의할 점만 간단히 알려주지."

 

 레스트레이드가 말을 이었다.

 

 "두 가지만 주의하면 돼. 하나는 그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

 

 셜록이 레스트레이드를 바라보자 그가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그와 같은 입장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그렇게 말한 레스트레이드는 표정을 심각하게 굳히고 말을 이었다.

 

 "사실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는 죽음의 신부라는 개념 자체를 말만 번드르르하지 실상은 전속 수혈팩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건 모르고들 하는 소리거든. 그가 죽으면 너도 상처를 받게 돼. 그런 뱀파이어들을 여럿 보아온 내가 하는 말이니 믿어도 되네."

 

 셜록은 수긍하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태도로 레스트레이드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레스트레이드가 당부했다.

 

 "육체적인 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말이야."

 

 딴에는 걱정이 되어 해주는 말이었지만 셜록은 그에 말을 영 진지하게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기껏 말해주었더니 정작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에 한편으로는 화가 났지만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던지라 레스트레이드는 그저 몇 마디 덧붙이는 정도로 이야기를 마치려 했다.

 

 "아마 자신은 괜찮을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견딜 수 없을지도 몰라.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게 좋겠지."
 "굳이 당신이 당부하지 않더라도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겁니다."

 

 거듭된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셜록이 툴툴거리듯 답했다. 레스트레이드는 곧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두 번째는 그 인간에게 당신의 피를 먹여서는 안된다는 거야."

 

 레스트레이드의 목소리는 한층 진지해졌다.

 

 "그를 혈족으로 탈바꿈하려면 웃전의 허락을 얻어야 해. 엘더들 말이야. 그렇지만 당신은 탄생부터가 그들에게 밉보였으니 그들이 허락해주지 않을게 뻔하지. 허락 없이 그를 뱀파이어로 만들었다간 그는 한때 당신이 처했던 상황을 겪게 되겠지. 이번에도 마이크로프트가 비호해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레스트레이드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단 한 방울도 먹여서는 안돼."

 

 '단 한 방울도'를 강조하는 레스트레이드에게 셜록이 이유를 물었다.

 

 "한 방울 정도로는 인간이 뱀파이어로 변하기엔 부족하잖습니까. 당신이 그 점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을테지요?"

 

 레스트레이드가 셜록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몰라. 마이크로프트도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알려주지 않더군. 내가 알아보았자 소용이 없는 사실이라면서 말이야."

 

 확신이 없는 어조에 셜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당신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사실을 그토록 강조하는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웃기지 않나요?"

 

 시비조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셜록의 말에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레스트레이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의 말을 믿나요?"

 

 명백히 도발적인 어조에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다지 확신이 담긴 눈빛은 아니었으나 아까처럼 시선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셜록이 파란 안광을 빛내며 마주 바라보는 것에 그는 곧 고개를 돌리며 약한 어조로 말했다.

 

 "믿고 말고."

 

 레스트레이드가 말을 맺었다.

 

 "그리고 믿어야 하고 말이지."

 

*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간신히 눈을 떴다. 줄곧 감고 있던 눈에는 옅은 햇빛도 고통스러웠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눈을 떴다가, 손가락 사이를 천천히 벌려 눈이 햇빛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그런 후에야 존은 겨우 눈을 똑바로 뜰 수 있었다.
 눈은 떴지만 몸은 흙 속에 묻히기라도 한 듯 딱딱하게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밤새 온몸을 엄습했을 냉기에 사지가 굳은 듯 팔다리를 까딱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장시간 노력한 끝에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존의 발 아래로 무언가가 스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동시에 싸늘한 아침 공기가 목덜미를 파고드는 것에 존은 부르르 떨었다. 그는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목도리였다. 처음 보는 색상과 질감의 그것은 당연히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남자의 눈동자 색깔을 한층 짙게 한 후 가라앉힌 듯한 톤의-
 목도리를 보고 곰곰히 생각하는 동안 흐려졌던 어제의 기억이 다시금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길을 잃고 이름모를 저택으로 향하던 중 한 남자를 만났고, 무뚝뚝하지만 다소 정중한 태도의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덫에 발꿈치가 씹힌 것처럼 도망칠 수가 없었던 어젯밤.
 존은 급히 자신의 목덜미를 만졌다. 신기하게도 어제 남자에게 잘근잘근 씹혔던 그곳은 빠르게 아물어 손끝에는 다소 울퉁불퉁한 자국만이 남아있었다. 살갗 위로 느껴지는 다소간의 요철감만이 그가 어제 당했던 일이 단지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하하하 하고 허탈한 웃음소리가 존의 입술로 새어나왔다. 한여름밤의 꿈도 아니고, 라는 다소 낙천적인 중얼거림이 존의 머리를 맴돌았다. 아니, 따지고 보면 한여름밤의 꿈보다 더욱 질이 나쁘다. 적어도 거기선 남녀간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라도 했잖은가? 그것도 세 쌍이나. 이왕 당할거면 미녀한테 당했으면 좋았으련만, 하고 존은 애써 가볍게 생각하려 했다.
 잊자, 잊어, 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의 시야에 다시 목도리가 들어왔다. 그는 땅바닥에 흩어진 그것을 집어들었다. 어젯밤 자신을 습격한 남자가 남기고 간 것이 분명했다. 대체 왜 그런 뜬금없는 호의를 베풀었는지는 존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추위에 굳은 손가락에 목도리가 감겨왔다. 고급스런 질감에, 밤새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던 부드럽고 따뜻한 목도리. 아직 자신의 온기를 머금고 있는 그것을 손에 들고 존은 망설였다.
 그는 그것을 길바닥에 내버릴 수도 있었다.
 한동안 망설이던 그는 남들의 눈치를 보듯 좌우를 흘깃 둘러보고 빠르게 왕진 가방 안에 목도리를 쑤셔넣었다. 자신을 습격한 자가 남긴 목도리를 당장에 내팽개치기는 커녕 소중하게 챙긴 자신의 행동은 순전히 고급 머플러를 내버리기 아까워서였을 뿐이다 라고 합리화하며 존은 숫제 누가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바삐 걸음을 옮겼다.

*

 

불쌍한 의사양반 존 왓슨이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가 따끈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침대에 누워 간밤에 있었던 일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결심하던 그때 마이크로프트는 막 오수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빈틈없이 완벽한 차림새를 한 그는 셜록이 거처하는 작은 방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덧창과 커튼까지 빠짐없이 전부 내려져 빛이라곤 한 점도 들어오지 않는 저택의 컴컴한 복도를 걷는 그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입가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셜록의 방문 앞에 다다른 마이크로프트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셜록의 방은 천장이 높은 탓에 실제의 넓이보다 다소 좁아보이는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벽에 나 있는 단 하나의 유일한 창문은 17세기 후반에 유행한 타원형 양식을 본뜬 것이었다. 이 창문은 저택의 채광 방향과 건물 주위를 둘러싼 숲의 조감에 대한 고려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창문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하늘을 직접 볼 수 없고 연못에서 반사되는 위치의 하늘만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낮은 위치의 창문으로 약한 저녁 노을빛이 희미하게 비쳐들었다. 램프 하나도 심지어 촛불 하나도 켜져 있지 않은 어둠침침한 방은 밤이 다가오고 유일한 광원이라 할 수 있었던 햇빛마저 스러져가면서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셜록은 방의 가장자리에 놓인 의자에 심란한 기분으로 앉아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의기소침해보이는 셜록을 향해 다가가며 연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내 사랑하는 동생아."

 

 막이 오르고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처럼 거창한 서두였다.

 

 "이 무슨 우울하고 낙심천만한 사태란 말이냐?"

 

 마이크로프트의 말은 셜록의 주의를 자신 쪽으로 잡아끄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셜록은 잠시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본 후 황망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늘진 어둠 속에 침잠한 채로 연못의 잔잔한 표면에서 반사되는 석양빛을 응시하는 셜록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죄를 저질러 순수를 상실한 어린아이의 비애감이 배어있었다.
 그런 셜록을 바라보며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인간의 피를 마신 것이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니?"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에게 건넨 말은 폐부 깊이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건만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몰래 엿듣기라도 한 것인가? 혐오감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셜록이 물으려 하자 마이크로프트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듯 곧바로 말했다.

 

 "이 저택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 눈과 귀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란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니? 하고 말하며 마이크로프트가 웃었다.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방 안을 낮게 떠돌다 가라앉아 사라졌다. 웃음소리의 잔향이 사라지고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에게 말했다.

 

 "그럼 충격적인 전모를 한 번 들어볼까."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셜록은 발작하듯 소리쳤다.

 

 "충격적이지 않으면? 충격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건가?"

 

 셜록이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

 

 이성을 잃고 짐승같은 욕망에 몸을 맡긴 것이 충격적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마이크로프트가 그 점을 모르고 셜록에게 그렇게 자못 순진한 뉘앙스의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첫 흡혈이란 본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흠 하나 없이 결백한 인간성이 난생 처음으로 흔들리고 점차 괴물의 길로 접어드는 첫걸음이니만큼 셜록의 동요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으로, 자신이 몇 백년 전에 이미 끝마친 고민에 새로이 잠겨 허우적대는 셜록을 보는 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루하기도 했다. 마이크로프트는 방 한 편에 놓인 침대 가장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침대를 덮은 남색의 벨벳이 사각거리며 부드러운 감촉을 주었다. 얼마쯤 그대로 앉아 있던 사내의 어깨가 마치 목이 메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금씩 들먹거리며 흔들렸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셜록이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본 셜록의 얼굴은 곧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왜 웃는 거지?"

 

 셜록이 물었으나 마이크로프트는 좀처럼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셜록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간신히 웃기를 멈춘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을 향해 다정스레 말했다.

 

 "오, 순진한 아이야."

 

 셜록이 파랗게 안광을 빛내며 마이크로프트를 노려보았다. 마이크로프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셜록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린 인간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존재들이 아니야."

 

 아니고 말고, 라고 마이크로프트는 잔혹하게 중얼거렸다.

 

 "우리들이 고귀한 혈통을 가진 우아한 귀족이라고 생각하나? 절대 그렇지 않아. 조금의 수고도 없이 여인들이 우리에게 기꺼이 목덜미를 바치고 우리의 발치에 엎드려 굴복하며 우리의 존재를 갈구하리라고 생각해? 부분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이지. 하지만 그건 우리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서가 아니야."

 

 마이크로프트가 속삭였다.

 

 "본질적으로 말이다, 우리는 더럽고 야비한 악당에 지나지 않는단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한밤중에 타인의 목숨을 몰래 빼앗고, 무덤에서 일어나 자기자신의 수의를 갈가리 찢어 씹어먹는 괴물이란 거야. 폭력과 죽음, 그것의 결정체일 뿐이라고...그 가운데의 하나가 된 너조차도 자신의 본모습을 이때껏 깨닫지 못한 것이로구나."

 

 셜록뿐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까지 가차없이 비하하는 조롱을 내뱉으며 즐거워하는 마이크로프트는 변함없이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단정한 자태로 앉아 있는 그의 얼굴에 창문으로 스며들어오는 투명하고 아득한 햇빛이 비쳤다. 태양의 황금빛, 보랏빛을 띤 구름의 색조, 서서히 떠오르는 별들의 선홍빛이 타오르는 듯 선명하게 창문가로 스며들며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믿기지 않게도, 추악하게 일그러져 셜록은 물론이고 그 자신까지도 비웃는 그의 모습은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첫 난관을 넘어서지 못하고 절망으로 주저앉는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 스스로 햇빛 속으로 몸을 던지는 이들도 많단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입을 열어 셜록에게 말했다.

 

 "살고 싶지 않다면 당장 저 일몰로 나서면 된단다."

 

 그가 유혹하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놀라울 정도로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우리보다 한참은 더 연약한 인간들은 갖은 방법을 다해 죽음에 다가가려고 노력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말이다. 성공하더라도 남은 이들에게 몹시 추한 꼴을 남기고 갈 때도 많지 않니.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우아하면서도 간단한 방법으로 존재의 소멸을 택할 수 있다니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마이크로프트는 마침 그 절정에 달하여 있는 석양의 태양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그 치명적인 빛의 물결 속으로 몸을 던지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의 눈빛은 아련한 기미를 담고 있었다.

 

 "물론 네가 죽음을 택한다면 난 무척 아쉬울 거란다. 넌 내 무료함을 잠시나마 달래주었지 않니. 더이상 그럴 수 없다면 난 다시 나를 즐거이 해줄 수 있는 또다른 누군가를 찾아나서야 할 테고."

 

 철저히 이기주의에 매몰된 사고방식으로 점철된 말에 셜록이 인상을 찡그렸다. 마이크로프트도 셜록의 표정 변화를 눈치챘는지 어조를 다소 다정하게 바꾸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알겠지."

 

 마이크로프트가 조용히 말했다.

 

 "고통은 한순간이란다."

 

 충격으로 잠시 말문이 막혀 있던 셜록은 곧 냉정을 되찾았다. 마이크로프트에게 야릇하고 복합적인 면이 숨겨져있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냉혹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한없이 감상적으로 돌변할 때도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의 본모습에 놀란 것은 예상치 못한 야습에 놀란 적군의 심정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더이상 감정에 휘둘려 절망하는 것은 그에게 치욕적일 터였다. 냉정하게 동요를 수습한 셜록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속이 메스꺼워질 정도로 추악하군."

 

 셜록의 중얼거림에 마이크로프트가 웃음을 그치고 차분히 동조했다.

 

 "옳은 말이구나."

 

 그리고 잠시, 둘 사이의 대화가 끊겼다. 오가는 대화가 사라진 공간을 메운 것은 그날의 안녕을 고하는 햇빛이었다. 창에서 들어오는 빛은 아직 불그스름한 낙조의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마지막으로 저무는 햇살이 길게 구릿빛을 드리우다가 그날따라 푸르다기보다는 꺼멓게까지 보이는 어두운 하늘로 흔적없이 사라졌다. 빛줄기가 잠시 머물렀다 떠나버린 하늘에는 아직 주홍빛이 간간이 남아있었으나 셜록의 방 안은 그와는 대조되는 어둠이 한층 짙게 내려앉아, 셜록과 마이크로프트의 실루엣은 마치 그림자 무언극에 나오는 윤곽처럼 보였다.
 완전한 어둠에 잠긴 채로 묵묵하게 앉아있던 마이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네가 거리끼지만 않는다면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주도록 하지."

 

 셜록은 코웃음쳤다. 무엇에 대한 조언이란 말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의 피를 효율적으로 강탈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조언?
 마이크로프트를 도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셜록이 말했다.

 

 "그런 당신을 두둔하려는 자가 불쌍하군."

 

 셜록이 지칭하는 사람이 레스트레이드라는 것을 알아차린 마이크로프트는 잠시 침묵한 후 대답했다.

 

 "그가 내게 과분한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지."

 

 마이크로프트가 슬픈듯이 덧붙였다.

 

 "저주받은 긴 세월 속에서 그 하나만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빛이자 천사였는데 그는 이제 늙어가고 있구나."

 

 셜록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내가 보기엔 무척이나 간단해 보이는데. 그에게 영생을 선물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 또한 당신의 혈족이 되는 것을 원하고 있는 듯 보이던데."

 

 셜록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미소지었다.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야."

 

 답답하기 짝이 없군, 하고 중얼거린 셜록이 약간 언성을 높여 말했다.

 

 "뭐가 문제인 것인지 모르겠군. 당신과 대립하고 있는 다른 흡혈귀들이 문제인 건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당신이 그 정도의 반발을 통제하지 못할 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따위 사소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를 당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도 말이 되지 않아. 마이크로프트 당신은 현명한 척 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누구보다도 겁이 많고 어리석은 사람이야."

 

 셜록은 줄곧 앉아있던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차갑게 말했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어. 이제 당신의 혀끝에 섣불리 놀아나지 않을 거야. 당신이야말로 당신 자신의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게 좋을 걸. 빛이니 천사이니 하는 닭살돋는 고백은 내 앞에서 하지 말고 당사자 앞에서 하란 말이야."

 

 매몰차게 쏘아붙인 후 셜록은 코트를 걸친 후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불빛 한 점 없는 어둠에 파묻힌 방 안에서 마이크로프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이미 그를 죽일 뻔했어."

 

 그가 느닷없이 중얼거렸다.

 

 "그런 내가, 내 욕심 때문에 그를 또다시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단다."

 

 예전의 두통이 희미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마이크로프트는 고개를 숙였다. 참회하는 신도처럼 경건하게 고개를 숙인 마이크로프트는 정적 속에 몸을 맡겼다. 흐린 별빛만이 비쳐들어 순간적인 신기루처럼 그림자와 어둠이 먼 과거의 백일몽처럼 어른거리는 방 안에서 그는 뚜렷한 검은 윤곽의 하나가 되어버린 채로 밤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Posted by 에스MK-2 :

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Blood is life; blood is utu; blood is death; blood is silent; utu is silent;

that was the rule; that is the rule; that will be the rule.

 

  

 해질녁이었다.
 저녁놀은 점점 붉게 타오르다가 다시 푸르게 희미해졌다. 닫힌 커튼 사이로 실낱같이 가느다란 햇빛줄기가 살며시 들어왔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피가 담긴 크리스털 유리잔이 놓인 탁자를 가운데 두고 셜록과 마이크로프트는 나른한 자세로 앉아서 공기 중의 색이 옅어지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곧이어 잿빛 어스름이 깔렸다. 밤의 산들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바람결에 떠밀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홀연히 달이 떠올랐다.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하얀 햇빛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마이크로프트는 입을 열었다.

 

 "뱀파이어는 죽음 그 자체이지."

 

 그는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 후 닫혀있던 커튼을 열었다. 이미 호흡이란 것을 할 필요가 없는 육신을 지닌 그였지만 커튼을 연 그는 막혀있던 숨통이 트이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빛이 스며드는 대신 저택의 열린 문틈과 창문으로 간간이 노란 빛이 새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검푸른 살얼음이 낀 연못의 표면에 불빛이 일그러진 형태로 비쳤다.
 자리로 돌아온 마이크로프트는 길고 긴 쉼표를 넘어 말을 이었다.

 

 "뱀파이어와 마주한 인간이 변변한 저항 하나 없이 순순히 목덜이를 내미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인간에게 제 일의 본능이란 생존 욕구라고 할 수 있지만, 이율배반적이게도, 그와 더불어 인간 정신에 내재한 또다른 본능은 죽음에의 열망이지. 그런 연유로 우리들의 존재는 그들에게 저항하려 해도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매혹이자 죽음의 환상을 그들의 상상 범위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보여주는 자들이 된단다."

 

 퀭하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청년이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오묘한 오팔 빛깔의 눈은 자신을 향해 막연한 동경을 품고 빛나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동경이란 말인가? 이미 완성된 존재인 그가 미완성의 존재를 보고 앞으로의 전도와 가능성에 대해 질투라도 한다는 말인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 다리를 꼰 채로 아무렇지 않게 앉아있는 듯한 그의 자세는 실은 완벽한 균형과 섬세한 관능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것은 이미 하나의 조형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토록 완벽한 그가 다른 이를 동경한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한없이 우아한 자태의 남자가 자애롭고 온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가르침을 주고 있건만 정작 당사자인 셜록은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의 병적인 무관심은 다름이 아니라 때아닌 우울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뱀파이어가 된 지 세 달이 막 지났을 뿐인 그는 최근 밤이 되어 깨어날 때마다 이상스레 침울했을 뿐만 아니라 나른한 탈력감에 종일 시달렸다. 무엇보다도 그를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붙는 그 기분을 도무지 떨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느끼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의 상태를 알고 있다는 것을 굳이 그에게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더욱 셜록의 내부를 장악하고 있는 공허감을 극한까지 부추기기 위해 그것을 고의로 외면하는 것을 택했다. 그는 유혹적인 어조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덕분에 우리는 인간들을 능동적으로 유혹할 필요가 없어."

 

 타오르는 모닥불에 이끌린 불나방들처럼 스스로 불길 속에 몸을 던지니까 말이야, 라고 마이크로프트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귓가를 가랑비처럼 적시는 마이크로프트의 속삭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셜록의 빈틈을 파고들었고 반대급부로 이유모를 울화가 속에서 치미는 것을 느끼며 셜록은 몸을 들썩였다.
 끝없이 그의 주위를 맴돌며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그 무언가의 정체를 셜록은 무의식적으로는 깨닫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의식적으로는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셜록도 마이크로프트의 장광설이 이유없이 이루어질 리는 없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미리 준비한 것이 분명한 길고 긴 대사는 분명 셜록의 안에 잠들어있는 무언가를 촉발시키기 위한 것일 터였다. 아직까지 한번도 그의 안에서 깨어난 적이 없는 피에 대한 욕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지금까지 속삭이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정교한 덫처럼 셜록을 잡아 무너뜨리기 위한 함정의 설계였다. 미숙한 뱀파이어인 셜록은 인간이 아닌 자로서의 심리적인 적응기를 거치고 있었던지라 외줄타기를 하는 광대마냥 불안한 상태였고 그렇기에 촘촘한 거미줄과도 같은 마이크로프트의 꼬드김에 쉽사리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동요된 마음의 틈새로 산 자의 피를 원하는 지독한 탐욕이 흘러나와 셜록의 냉정한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꺼지지 않는 반항심과 무턱대고 욕구를 좇지 않는 특유의 금욕적인 성미가 그를 잠시잠깐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셜록이 당장이라도 용수철처럼 자리를 튕기고 일어나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그러한 욕구를 참아내고 있는 것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던 마이크로프트가 미소지으며 속삭였다.

 

 "네가 인간들 틈에 섞여있어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눈치채겠지. 네가 얼마나 아름답고도 위험한 존재인지-그들에게 단숨에 꺼져가는 죽음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고-반대로 그들이 그토록 바라는 영생을 선물할 수도 있으며-또한 그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없는 강렬한 쾌락을 줄 수도 있는 존재인지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마이크로프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셜록을 향해 몸을 수그리며 말했다.

 

 "나는 그저 알려주고 싶을 뿐이란다."

 

 우아한 동시에 냉혹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그가 속삭였다.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손쉽고도 당연한 일이라는 걸 말이다."

 

 열린 창문으로 달빛이 천천히 쏟아져들어왔다. 달빛을 등진 남자의 얼굴은 분명 교활한 미소로 얼룩져있을 것이다. 셜록은 남자에게, 또 남자의 세 치 혀에 속수무책으로 놀아나는 자신에게 분노하며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믿을 수 없군."

 

 셜록의 반박에 마이크로프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엇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그의 질문에 셜록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이 그토록 손쉬운 일이라면 당신은 어째서 인간 남자 한 명에게 연연하는 것이지? 그 이외에도 당신에게 피를 바칠 인간은 차고 넘칠텐데 말이야."

 

 순간 마이크로프트의 실루엣이 파르르 떨린 것도 같았다. 그러나 멀리 커튼을 여미고 있는 리본 끝이 밤바람에 움직여 방 안을 채우던 빛무리의 진로를 방해한 듯도 했으므로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밤하늘의 여행자 달이 위치를 바꾸어 더이상 방 안을 비추지 않게 될 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달빛이 걷히고 드러난 마이크로프트의 안색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변화라곤 한 점도 비추이지 않았다. 그저 담비털 붓으로 그린 듯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미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닫힌 입술이 열리며 속삭임을 뱉어냈다.

 

 "레스트레이드는-"

 

 그때 멀리서 저택의 철문이 끼이이 소리를 내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약한 소리일 뿐이었으나 셜록과 마이크로프트 둘 모두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가벼운 몸놀림과는 확연히 다른 걸음소리가 낯선 공기를 몰고 저택 안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이크로프트는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체취. 레스트레이드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하고 셜록이 속으로 혀를 차는데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찰나의 순간 속살을 보인 진솔함의 여운은 간데없고 평소의 무심한 목소리였다.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만 주의해야하는 것은 맞단다. 너무 빠져들지 않도록..."

 

 마이크로프트는 '무엇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다. '무엇'의 빈 자리를 어떤 단어가 채워도 상관없다는 뜻일까?

 그가 몸을 일으키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쩌면 네가 나보다 더 현명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거기까지 말한 그는 불빛 한 점 없는 복도에 오랜만에 불을 밝히러 천천히 방을 걸어나갔다.
 셜록도 이제는 익히 알고 있는 손님을 맞이하러 나간 마이크로프트마저 방을 떠나자 그렇지 않아도 을씨년스러운 방 안은 더욱 적막감이 떠돌았다. 셜록은 탁자를 바라보았다. 잔 내벽에 달라붙은 피가 응고되어 색이 한층 짙어진 것이 보였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 싸구려일 뿐 아니라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 뿐인 그것을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셜록은 손을 뻗어 걸쭉해진 그것을 단숨에 삼키고는 신경질적으로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비린 맛과 혈액 유화제의 인공적인 향내가 혓바닥을 깔깔하게 자극했다.
 배고픔도 달랬겠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궁상을 떨 이유가 없었다. 창가로 다가간 셜록은 창문을 열고 초겨울의 찬 기운을 음미한 후 고양이처럼 조용하게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미 한 사람의 훌륭한 밤의 식구가 된 그는 은밀하게 밤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

 

  늦은 왕진을 마친 존 왓슨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마차는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날씨는 빌어먹도록 추웠다. 마차를 기다린답시고 정류장에 계속 앉아있다가는 마차는커녕 얼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존은 결국 걸어서 집으로 가기로 마음먹고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바람이 세지는 않아 어느정도 걷다보니 찬 공기에 적응이 된 것인지 초겨울 날씨치고는 추운 밤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목덜미를 스산하게 파고드는 바람은 견디기가 힘들었고 존은 고개를 움츠린 채로 한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존은 서서히 아파오는 한쪽 다리에 끄응 하고 신음하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다친 곳은 어깨이건만 아파오는 곳은 반대쪽 다리라는 모순적인 사실이 우스우면서도 슬프게 그의 마음을 찔렀다.
 미묘한 황색의 가로등 불빛만이 그를 내리비추었고 그날따라 런던의 밤거리는 소름끼치게 조용했다. 하긴 이런 날씨에 바깥을 돌아다니는 머저리는 나밖에 없겠지. 존은 자조했다. 뭐 부상으로 의가사제대하여 기반없이 급하게 자리를 잡은 의원인 자신이 가려서 손님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줄곧 수그리고 있던 목에 둔통이 느껴지는 것에 존은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고 좌우로 살살 움직였다. 그러면서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자신이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고개를 숙인 채로 걷다보니 잘못된 길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더 큰 문제는 존의 눈에 주변의 거리가 영 익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풍광에 당황한 존은 추위조차 잊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쩐다.'

 

 존은 속으로 낙담하며 한숨을 토했다. 하얀 입김이 사르르 허공 중으로 올라갔다.
 계속 멈춰서있을 수만도 없었으므로 존은 절뚝이는 다리로 걸음을 재촉했다. 점점 으슥한 수풀길이 그의 앞에 펼쳐졌고 존은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직감했다. 한번 길을 잘못 들어 가로등도 없이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 깔린 지대로 들어선 데다 밤눈이 어두운 편에 속하는 존은 어느 방향이 올바른 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기에 한참 헛수고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식은땀을 훔치던 그는 순간 저편에서 은은하게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저 멀리 저택으로 보이는 건물의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길을 헤메던 그에게 그 불빛은 너무나도 반가운 존재로 다가왔다. 어둠에 조금 익숙해진 눈으로 땅바닥을 유심히 살펴보니 저택으로 뻗은 길이 어렴풋이 보였다. 존은 몹시 기뻐하며 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심 불안했지만 저택의 주인이 인정머리없는 사람만 아니라면 하룻밤 추위를 지새게 해주는 정도야 허락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한결 속도를 붙여 걷기 시작했다.

 

*

 

 마이크로프트에게 자신을 의탁한 후로 한 번도 저택 밖으로 나온 적이 없는 셜록은 오랜만의 바깥 공기를 쐬자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다소 들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몇 주간 만성적으로 그를 짓누르던 우울감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택 안에서 체재하고 있을 때보다는 가벼운 기분이었다.
 손질이 되지 않아 불규칙적으로 자란 풀들이 발 아래에 푹신하게 밟히는 것을 느끼며 셜록은 정처없이 걸었다. 창백한 뺨을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뭇 차가운 공기였다. 인간이었다면 덜덜 떨었겠지. 하지만 이미 식어버린 몸은 코트 한 벌과 목도리를 대강 걸치는 것만으로도 겨울의 도입부를 예고하는 냉기에 무던하게 적응했다. 꽁꽁 싸맬 필요가 없어서 편리하군, 하고 낙천적인 생각을 하던 셜록은 문득 무언가가 다가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우뚝 멈춰섰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무거운 발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걸음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고 빨랐다 느려졌다 하는 것으로 보아 다리가 불편한 인간이었다.
 셜록은 다가오는 자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쪽으로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인간의 피에 대한 탐욕이 미미하다 싶을 정도로 적었기에 그가 인간 하나의 냄새에 끌려 이편으로 오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은거형을 받은 마이크로프트의 족쇄 역할을 수행하는 스커지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는 근방에 거동마저 불편한 인간이 돌아다니는 것을 그들이 알아차린다면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선 이 불쌍한 인간은 영문도 모른 채 순식간에 한 끼 식사거리가 되어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선한 피를 갈망하며 허덕였던 셜록이었으나, 다행히도 저택에서 나오기 직전에 피를 마셨기 때문에 인간을 다시 저들의 도시로 돌려보내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터였다.

 

*

 

 저택으로 통하는 골목으로 향하는 왼편의 오솔길에 다다른 존은 고통을 호소하는 다리를 잠시 쉬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저택으로 곧장 통하는 길에는 가장자리에 잎을 다 떨군 채 바싹 마른 가지만 남은 검은 나무들이 줄세워 드리워져 있었고, 뭐라 말하기 힘든-살아있는 자들의 출입을 거부하는 듯한 불친절한 기색이 짙게 풍겼다. 존의 걸음을 늦출 정도로 으스스한 어둠을 품고 있으며 희끄무레한 안개마저 끼어 있는 길은 어린 시절에 침대맡 벽장 속의 괴물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원초적인 공포와도 같은 것을 되살리고 있었으나 존은 달아나려는 희망을 다시금 붙잡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일대에 얇은 장막처럼 떠도는 안개를 헤치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균일하지 못하게 끼인 안개에 가리운 사람의 윤곽이 그가 다가옴에 따라 점차 분명하게 드러났다.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본 존의 눈이 커졌다.

 

 "길을 잘못 드셨군요."

 

 나직하고 정중한 어투로 말하는 그의 얼굴은 피가 모두 증발해버린듯 충격적으로 새하얬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묘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석고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의 혈색없는 얼굴에 깜짝 놀란 존은 남자의 말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예. 왕진을 갔다 오는데 길을 잃어서..."

 

 뒷말을 흐리는 존에게 남자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제가 모셔다드리죠."

 

 그때 계속해서 존을 향해 불어오던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드러난 뺨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찬바람에 혹사당하던 얼굴이 역풍덕분에 약간은 따스해진 듯한 착각이 들어 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셜록은 역풍을 타고 자신의 콧속으로 스미는 향기에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눈 앞의 남자의 체취는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욕망을 능히 자제할 수 있으리라고 장담했던 그의 자신감을 산산조각내어버릴 정도로 향기로웠다. 아까 전 삼킨 피비린내의 잔향이 토하고 싶도록 역겹게 느껴질 정도로 남자의 냄새는 미치도록 좋았다. 무절제한 욕망과는 거리가 먼 그의 속내에서 탐심이 그득하게 고여올라왔다.
 메마른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셜록이 반사적으로 목울대를 움직였다. 아아. 셜록은 마음 속으로 절망 섞인 비명을 질렀다. 침을 삼키는 것은 식욕을 가라앉히기는 커녕 더욱 들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심한 허기가 그의 내부를 진탕시켰다.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무진 노력하고 있는 셜록에게 눈앞의 남자가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을 하고선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저쪽에 저택이 보이던데, 혹시 그곳에서 오신 건가요?"

 

 셜록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입을 움직였다.

 

 "...그렇습니다만."

 

 남자는 셜록을 올려다보며 살았다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셜록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남자가 셜록에게 말했다.

 

 "실례라는 건 압니다만, 오늘 밤만 신세를 져도 될까요? 밤이 깊어서 지금 돌아가긴 무리일 것 같은데..."

 

 호랑이 소굴로 스스로 얼굴을 들이미는 남자의 행동을 만류하고 싶었으나 셜록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뼘 남짓하는 거리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체향이 손쓸 수 없이 그의 후각을 자극했고, 셜록은 더이상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당장에라도 남자를 찢어발기고 하얀 살갗 사이로 샘솟아나올 핏물에 고개를 처박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셜록이 마지막 이성을 그러모아 입을 열었다.

 

 "그건...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같습니다."

 

 셜록의 완곡한 거절에 남자의 안색에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셜록의 소매를 붙잡고 매달렸다.

 

 "부탁입니다! 폐는 끼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존은 자신의 등골이 갑자기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맹수 앞에 맨몸으로 선 것처럼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돋아오르는 감각에 스스로 의아해하고 있는 그 순간 무섭도록 얼굴을 굳힌 남자가 자신을 잡고 쓰러뜨렸다.

 

*


 남자에게 떠밀려 난데없이 풀숲으로 넘어진 존은 항의를 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막상 남자의 얼굴을 마주한 존은 하려던 말을 잊은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무표정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존의 심장을 멎게 만들 것처럼 조여왔다. 눈에 띄게 묘한 남자의 분위기는 비단 창백한 안색때문만은 아니었다.
 오싹하리만치 하얀 얼굴에 섬뜩한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찌르듯이 바라보았다. 존은 더이상 남자가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는 이 상황을 웃어넘길 수 없었다. 전장에서 단련된 존의 육감이 눈앞의 남자는 말 그대로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맹수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공포에 사로잡혀 몸이 덜덜 떨리는 가운데에서도 존은 남자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었으나 사실이 그랬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납빛으로 물든 뺨을 하고선 무기력하게 서있던 남자가 자신을 무언지 알 수 없는 강렬한 열정으로 물든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어서였을까? 아니, 그것은 지금의 정황과는 동떨어진 차원의 이야기였다. 남자의 존재 자체가 존에게 너무나도 고혹적이고 센슈얼한 분위기를 풍겼고 존으로 하여금 그러한 기분에 동화되게끔 한 것이다.
 존이 초점이 풀린 눈으로 남자에게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핏기없는 남자의 얼굴선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얼굴은 그의 이마에 입술을 살포시 갖다대었다. 차가운 입술이었다. 이마에 입술을 내리누른 채로 코를 자신의 땀에 젖은 머리칼에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이 느껴졌다. 존은 어쩐지 울고 싶었다.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분명 냄새가 지독할 거야. 존은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남자는 존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그가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잦아드는 하프 현의 떨림처럼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은 공포와 상반되는 나른한 안도감에 존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멀어졌던 남자의 얼굴이 다시 거리를 좁혔다. 이번에는 이마가 아니었다. 입술도 아니었다. 그의 가벼운 키스가 내려앉은 곳은 존의 목이었다. 어느새 옷깃을 풀어헤쳤는지 여린 목덜미가 활짝 드러나있었다. 한없이 부드럽게 시작된 키스는 어느 순간 날카로운 아픔으로 변모했다. 남자가 육식동물처럼 자신의 목을 물어뜯는 것이 느껴졌다. 환촉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아픔에 존은 나직하게 비명을 질렀다. 상처입은 목과 찢긴 혈관으로 뜨거운 피가 몰리고 남자의 입 안으로 빨려나가는 느낌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생경했다. 존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절할 것만 같았지만 용케도 기절은 하지 않은 채로 존은 그것을 견뎌냈다.
 한순간 존이 눈을 번쩍 떴다.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은 더이상 시커먼 어둠이 아니었다. 황금빛의 황홀경이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시야가 번쩍 열리며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남자 이외의 존재는 순식간에 흐릿하게 존재감을 잃었다. 쾌감과 황홀의 경계에서 존이 숨을 토했다.

 

 "하으..."

 

 남자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한층 명료해진 존의 시야에 들어온 남자의 모습은 새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천사처럼 도드라져보였다. 그러나 눈앞의 천사에게 고결한 자비는 없었다. 대신 그의 얼굴은 달랠 길이 없는 지독한 굶주림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남자의 눈동자가 내뿜는 마력에 홀려 그의 품 안에 갇힌 존은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욕망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와 대조를 이루며 드리워진 검은 속눈썹 아래로 그의 맑은 눈동자가 더욱 분명하게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온전한 회색이 아니었다. 서늘한 코발트 블루 빛깔이 감도는 청회색이었다. 청량한 내음이 끼치도록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존은 빨려들어갈 것처럼 그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가 안심을 시키려는 듯이 눈꼬리를 휘었다. 자신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어린 새의 속깃털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존에게 여전히 그는 무서운 존재였다. 처음에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물어뜯은 것을 제외하고는 남자는 사뭇 다정하고 친절한 방식으로 자신을 마셨지만 엄습하는 본능적인 공포를 이길 수는 없었다. 남자는 다시 자신의 어깻죽지에 고개를 파묻었다. 체액이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쾌감인지 전율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이 퍼졌다. 남자에게 사로잡힌 채로 섬뜩한 공황 상태에 빠져든 그는 이윽고 정신을 잃었다.

 

*

 

 남자의 체향이 한층 강렬하게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느끼며 이성을 완전히 놓아버린 셜록은 짐승처럼 남자를 덮쳤다. 만만찮을 것처럼 보였던 남자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나자 완전히 힘을 잃고 늘어져버렸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흐린 하늘 빛깔의 눈동자가 순종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한결 여유가 생긴 셜록은 먼저 남자의 체취를 한껏 음미했다. 진한 향기가 그의 후각을 마비시킬 것만 같았다. 살과 살을 조금의 틈새도 없이 밀착하고 있자니 그의 온몸을 타고 흐르며 두근두근 울리는 혈류의 흐름, 살아있는 피를 펌프질하는 심장의 박동, 그리고 약간 가팔라진 그의 숨소리와 함께 발산된 체향이 셜록을 감쌌다. 식욕과 함께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그 향기를 계속해서 맡고 있었다가는 남자를 뼈째로 씹어먹어버렸을지도 몰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셜록의 아래에 깔린 남자가 아직 정신이 남아있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저었다. 셜록은 고개를 들었다. 물기가 살짝 어린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상냥하게 말했다.

 

 "가만히..."

 

 거부하는 기색은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 반사적으로 머리를 돌린 것 같았다. 남자의 체향은 충분히 즐긴 셜록은 이제 그의 본능이 이끄는 바대로 남자의 피를 마시기로 했다.
 여전히 미약한 저항의 기색 하나 없는 남자의 목덜미를 덮고 있는 옷자락을 손쉽게 풀어내리고, 아무도 맛본 적이 없는 남자의 처녀지에 이빨을 박았다. 남자가 고통으로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의 셜록에게 배려라던가 그런 체면치레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잇새로 흘러들어오는 진하고 따뜻한 혈액에 매료된 셜록은 더욱 세게 그를 물었다. 난생 처음 즐기는 신선한 인간의 피는 생각보다 역겹지 않았다. 오히려 극상의 맛이었다. 그 맛을 한결 좋게 만드는 것은 이 인간에게 처음으로 이빨을 박은 뱀파이어가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먹이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니. 셜록은 피 한 방울이라도 새어나갈세라 세게 남자의 목덜미를 흡입했다. 상처가 남을 것이다. 그러나 셜록은 그 사실을 반가이 여겼다. 이 순결한 영토에 맨 처음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발자국을 새기고 아프도록 더럽히고 싶었다.

 

 "하으..."

 

 남자가 신음을 토했다. 놀랍도록 색정적인 신음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자신의 귓볼마저 달아오를 정도로. 피를 마시는 데에 몰두해있던 셜록이 순간 정신을 차리고 남자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남자의 하얀 목덜미에는 끔찍하게 검푸른 멍이 들어있었고 자신의 이빨 자국에 따라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자신이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남자에게 이정도로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에 놀란 셜록은 남자를 쓰다듬어주며 추스르려는 동시에 자신을 눈물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초점이 없이 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눈. 셜록은 다시 한 번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남자의 목덜미에 격정적으로 얼굴을 박았다.
 온몸으로 흘러들어오는 활력이 느껴졌다. 그가 원기를 차릴수록 자신의 몸 아래에서 신음하는 남자의 생기는 가냘파지고 있었다. 이쯤하면 만족할 만도 하련만 셜록의 본능은 더 많은 피를 원하고 있었다. 첫 번째 흡혈을 통해 어느 정도 허기를 충족한 셜록은 산 자의 피를 원하는 지독한 탐욕이 더이상 자신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게 하려 노력했다. 자신에게 이러한 왕성한 욕망이 있었으리라고는 자각하지 못했던 셜록은 약간 당혹스런 심정으로 두 번째 흡혈을 끝낸 후 힘겹게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남자에게서 자신이 억지로 피를 강탈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범죄라도 저지른 듯한 죄악감에 기분이 나빠진 셜록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남자는 그 사이 완전히 정신을 잃은 채였다. 셜록은 망설이다가, 남자를 들쳐안고 인간들이 사는 곳 근처로 향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른 셜록은 남자를 수풀 속에 내려놓고 돌아서려다가 남자의 드러난 목과 그곳에 난 선명한 잇자국에 생각이 미쳤다. 한동안 갈등하던 셜록은 멀리서 동이 터오르는 것을 보고 더이상 생각에 잠겨있을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더이상의 고민을 그만두고 급히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쓰러진 남자의 목에 감아준 후 저택으로 향했다.

 

 

Posted by 에스MK-2 :

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기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 분명한 넓은 살롱은 매우 신중하게 배치된 장식품과 벽에 적절한 간격으로 걸린 고풍스런 그림들로 무척이나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으나 지금 그 안에 그것을 즐길 사람이라고는 아쉽게도 단 한 명의 남자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욱 아쉽게도 그 남자는 방 안에 걸린 예술품을 느긋하게 즐기며 찬탄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어보였다. 대신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온다는 전갈도 보내지 않고 멋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온 것이지만, 남자는 저택의 주인이 곧 자신에게 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남자는 벽난로 앞의 소파에 앉아 화로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가만히 응시했다. 화염에 침식된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잿더미 위로 무너진다. 발갛게 물든 불씨가 허공 중에 휘날리다가 금세 빛을 잃고 가라앉는다. 남자는 발치에 놓인 장작을 들어 벽난로 안으로 던져넣었다. 잠시 잦아들었던 불은 새로운 먹이를 휘감고 기세를 더한다. 퍼지는 열기가 한층 강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의자에 더 깊이 몸을 묻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남자가 입은 트렌치코트가 지난밤부터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 물기로 촉촉했기 때문이었다. 물기에 젖어 원래의 색깔보다 약간 진하게 물든 소매 끝을 매만지며 그는 살롱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올 누군가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헛되지 않아, 커다란 문이 열리며 미약하게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가 기다리던 남자다. 고양이처럼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안에 들어온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스트레이드."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마이크로프트의 부름에 뒤를 돌아본 그렉 레스트레이드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불편한 심기로 얼룩져있었다. 살롱 안으로 막 발을 들인 남자처럼 지루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인성이 마모된 뱀파이어들이 그러한 감정의 징후를 보이는 경우는 극히 적었기에, 마이크로프트는 경탄과 호기심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걱정, 우려, 근심-고작해야 백년을 사는 인간이 몇천년이고 끄덕없이 존재하는 그들을 향해 그런 눈길을 보낸다는 것은 신기한 축에 속하는 일이다. 보통의 인간은 그들을 마주하며 공포, 불안, 거리낌-등의 감정을 보이므로 어느정도 그 상황에 적응한 자들은 으레 인간이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니까.

 마치 신기한 것을 관찰하는 듯한 그의 미소를 본 레스트레이드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지만, 자신의 감정과는 별개로 일단 예의를 갖추자고 생각한 듯 그는 남자의 인사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정중히 답했다.

 

 "마이크로프트."

 

 살롱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옆에 있는 또 하나의 소파에 앉을 때까지 백발의 남자는 아무런 말없이 기다렸다. 참을성을 발휘하던 그는 마이크로프트가 의자에 앉자마자 이제 더는 못참겠다는 것처럼 격하게 마이크로프트를 질책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너무 오래 살더니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나요?"

 

 다소 무례한 어투였지만 마이크로프트는 그에 별달리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고, 그 무심한 태도가 남자의 화를 더욱 돋웠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자각한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지금 소문이 파다합니다. 당신이 너무 오래 살더니 드디어 미쳤다는 둥, 노망이 났다는 둥-"
 "알고 있습니다."

 

 마이크로프트라고 불린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남자의 이어지는 말을 잘랐다. 하지만 남자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소문도 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프린스(Prince)가 허락되지 않은 혈족을 당신이 거두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텐데요."
 "그는 언제나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요. 그가 탐탁치않게 생각하리라는 것은 예상한 바입니다."

 

 그 무엇에도 괘념치 않는다는 듯한 남자의 태연한 표정에 더욱 초조해진 레스트레이드가 말했다.

 

 "소환 명령이 떨어졌단 말입니다."

 

 남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던진 수였지만 안타깝게도 당사자는 별반 동요된 기색이 아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지루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계속 말하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레스트레이드가 계속해서 말했다.

 

 "법정(The court)*으로요."
 "오."

 

 그제야 흥미로워졌다는 듯 마이크로프트가 눈을 빛냈다.

 

 "죄목은?"
 "하도 많아서 일일히 열거하기가 힘이 드는군요."

 

 냉담한 말투였지만 레스트레이드가 마이크로프트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마이크로프트 그 자신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레스트레이드. 뒷배만 믿고 설치는 애송이가 감히 법정을 연다고 해서 내가 순순히 형벌을 받을 정도로 무르리라고 생각하나요?"

 

 마이크로프트는 온화하게 레스트레이드는 다독이며 레스트레이드의 걱정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가 몸에 배인 상냥한 겉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레스트레이드는 그가 레스트레이드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던지는 것에 불과한 말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그만 하세요, 마이크로프트."

 

 거의 반 세기에 가까운 세월동안 마이크로프트의 곁에 머무르면서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에게 말로만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젊었을 적에는 마이크로프트의 신사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언변과 언뜻 엿보이는 우수에 찬 눈빛에 현혹된 나머지 그가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했었지만, 이제 중년의 남자가 된 레스트레이드는 그런 그의 암시적인 행동에 무마되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현명해졌던 것이다.
 지금도 그는 자신 앞에서 짐짓 인간다워 보이는 행동을 보이고는 있었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가 마음의 경박한 편린 따위를 드러낸 순간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그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뱀파이어여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뱀파이어이기 이전의 또다른 문제다. 어쩌면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레스트레이드의 기분은 이유모를 우울감으로 저 아래까지 곤두박질쳤다.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이 속이 상했다는 것을 마이크로프트가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싶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전, 당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겁니다."

 

 퉁명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후후 웃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십분의 일도 살지 못한 한낱 인간 따위가 같은 혈족의 일원보다도 훨씬 농도 짙은 관심과 근심어린 애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그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솔직하게 내가 걱정된다고 말해준다면 좋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어두운 기색의 레스트레이드를 바라보던 그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하긴 내가 침묵의 형벌(dead silence)*을 받는다면 당신도 무사하진 못하겠죠. 버들가지처럼 연약하기 그지없는 당신은...내가 건재하고 있는 동안에 당신에게 눈독을 들여온 탐욕스럽고 천박한 모기 무리의 간식거리가 될 것이고...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워지는군요."

 

 순간적으로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청회색 눈에 서린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송곳처럼 번뜩이는 것에 레스트레이드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가 이리도 쉽게 감정을 표출하는 뱀파이어였던가?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자신의 눈을 의심하던 레스트레이드가 다시 한 번 그의 눈을 바라보자 그 한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미 가셔있었다. 순전히 착시였을 뿐이었을거라고 치부한 레스트레이드가 아직 소름이 가라앉지 않은 팔을 문지르는데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마이크로프트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는 레스트레이드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나의 사람이니까요."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의미의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사람(human)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말하며 마이크로프트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레스트레이드는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직감하고 무어라 말하며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의자에서 일어난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가 자신의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앉아있는 의자로 가까이 다가서서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퇴로를 봉쇄하듯 그를 감싸안아 의자 위에 가둔 마이크로프트는 몸을 굽히어 레스트레이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소환 날짜는 언제죠?"

 

 마이크로프트의 물음에 섞여 나온 미지근한 숨결이 레스트레이드의 귓볼에 와닿았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드럽게 자신의 귓볼을 간지럽히는 달큰한 그것에 고스란히 직면하고 만 그는 바르르 떨며 말했다.

 

 "...내일 밤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는 레스트레이드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을듯이 가까이 다가선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목을 축일 시간은 충분하겠군요. 자...그럼, 그렉."

 

 그렉, 이라는 호칭에 레스트레이드는 몸을 떨었다. 그가 자신의 피를 마시기 전에는 꼭 그의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것을 레스트레이드는 알고 있었다. 마치 섹스를 할 때 이름을 부르며 성감을 돋우는 것처럼. 그리고 확실하게 그것은 레스트레이드를 더욱 무방비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어느 사이엔가 마이크로프트는 잠겨있던 레스트레이드의 셔츠 목깃을 풀어헤치고 하얗게 드러난 레스트레이드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식사는 하고 왔겠지요?"

 

 무언가를 예고하는 듯한 말투에 레스트레이드는 더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그 물음에 답하여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민한 살갗에 와닿는 숨결은 그 어떤 애무보다도 레스트레이드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닥쳐올 행위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등줄기가 쾌감에 대한 기대로 전율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가 산 자의 의태를 하는 것에 불과한 기계적이고 덧없는 호흡이 자신의 목덜미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설렘으로 두근거리며,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의 송곳니가 자신의 살을 찢고 혈관에 이를 박아넣고 피를 빨아들이기를 고대했고, 그의 기대가 배신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금방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법정: 흡혈귀들의 규칙을 어겼을 때 출두 명령이 내려짐. 불응 시 재판 없이 프린스의 주관으로 즉결처분됨.

*침묵의 형벌(dead silence): 일출을 강제로 보게 하는 소멸형刑.

 

*


 흔들리는 의식.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멀리 구석에서 촛불이 타들어가는 희미한 소리와 살며시 흔들리는 불빛 속에서 바닥에 촛농이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수고스럽게 촛불을 켠 이유는 자신 때문이리라. 레스트레이드와는 달리 그는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불이 밝혀진 곳에서처럼 잘 볼 수 있는 시력을 지녔으므로. 레스트레이드는 흐릿한 시야를 맑게 하려 눈을 수 차례 깜박였다.

 

 "쉬어요."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린다. 아픈 아이를 달래는 손길과도 같이 그의 손이 자신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배려심 넘치는 행위에 그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이크로프트 홈즈, 너무나도 오랜 세월 동안 인간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예삿일이 되어버린 그 뱀파이어는 그 자신의 배려가 레스트레이드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을까? 뜻없이 내민 손길이 그를 구름 위로 솟아오르도록 행복하게 만들었다가, 아무 의미 없이 거두어버린 손길이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레스트레이드는 눈을 감고 힘이 빠졌다는 사실을 핑계삼아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렸다. 어느 틈에 침실로 옮긴 것인지 새털처럼 부드러운 베개가 자신의 머리를 감싼다. 다행이야, 하고 레스트레이드는 생각했다. 혹시라도 눈물이 흘러나오더라도 베갯잇에 스며들어 흔적조차 남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마이크로프트에게 피를 빨리어 흐려진 의식 속에서 레스트레이드는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레스트레이드가 마이크로프트를 만난 것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의 어린 시절에 유일하게 선명하게 남은 족적이었다. 소년에 불과했던 그는 마이크로프트에게 외경심을 느끼면서도 왜 그런지를 몰랐다. 그가 지루하게 여겨왔던 일상과는 다른, 충만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 듯한 유심한 눈빛에 혹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뱀파이어 특유의 매료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는 지금에도 그를 연모하는 마음이 힘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의 마음 속에서 나날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있는 것은 그로서는 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눈 때문일까?
 푸른 눈.
 그 눈이 자신을 바라보아준다면...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나간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몸을 쓸어덮치는 피로의 파도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착각으로 여겨질 만큼 상냥한 손길이 그의 머리칼을 쓸어넘긴 것 같았다.

 

*

 

 레스트레이드가 깊은 잠에 빠져들자 마이크로프트는 그제야 레스트레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망설이던 손끝이 부드러운 그의 은백색 머리칼에 닿았다.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감정을 느끼며 더없이 상냥하게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이 새긴 잇자국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목덜미에 시선이 미쳤다.
 눈 앞의 남자는 5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의 곁을 지켰다. 50년은 그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일부, 정말로 일부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동안 남자는 자그마한 검은 머리의 어린아이에서, 다정하고 활기찬 젊은이로, 그리고 은회색의 머리칼의 중년으로 변했다. 보드랍고 발그레했던 그의 뺨은 이제 더이상 팽팽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를 여전히 곁에 두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확실히 처음에는 아름다운 그에게 끌렸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중후한 성인 남성이 된 그가 여전히 아름다운가? 그는 자문했다.
 답은 하나다. 그는 여전히 아름답다. 세간의 미의식이 뭐라 말하든 간에 그가 마이크로프트의 눈에는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가가 커가고 늙어가는 과정을 시시각각으로 관찰하면서 무언지 알지 못하는 감정이 자신의 안에서 고개를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꽝꽝 언 얼음구덩이에서 미세한 균열이 일고, 그 틈새로 싹트는 무언가. 마이크로프트는 그것을 정의할 수 없다. 대신 마이크로프트는 정의한다. 레스트레이드는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이라도 잠자는 사이에 숨을 거둘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이크로프트는 그답지 않게 초조한 심정이 들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 감정을 무어라 명명하기에 마이크로프트는 인간이 그렇게도 연연해하는 감정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마음이 없는 괴물로서 너무 오랜 세월동안 살아온 탓일 것이다. 그 점을 마이크로프트는 애석하게 생각했다.
 -아니, 그는 단지 겁이 났을 뿐이다.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를 어루만지고 있던 손을 떼었다. 한 발짝만 더 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절벽에서 도망치는 것처럼 그는 자리를 떴다.

 

*

 

 눈을 뜬 그는 곧바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회중시계를 꺼냈다. 누가 봐도 옛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옛 사람들의 유물인 그것은 마이크로프트가 선사한 물건 중에 하나였다. 긴 바늘이 2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 있고, 짧은 바늘이 10 근처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레스트레이드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싶어 침대에서 급히 몸을 일으켰다.
 침실 바깥으로 나오자 마이크로프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 앞에 서 있었다. 만 하루에 가까운 시간 동안 휴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낯빛이 창백한 레스트레이드의 안색을 본 마이크로프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너무 내 욕심만 채웠나 보군요.-몸이 좋지 않으면 말해요."

 

 확실히 어제의 마이크로프트는 그답지 않게 레스트레이드의 피를 너무 많이 마신 감이 없지 않았다. 그동안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피를 빤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제 마이크로프트는 마치 레스트레이드의 내부의 모든 것을 삼켜버리겠다는 기색으로 그의 피를 마셨다. 마치 무언가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급하게, 그는 그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레스트레이드의 피를 마시는 것 같았다. 오랜 세월 동안 흡혈당하는 것에 적응된 레스트레이드가 겁을 더럭 집어먹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피를 마시다가 그를 죽일지언정, 그가 자신의 피를 마시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 더욱 싫었다. 마이크로프트가-표면적인 관심일뿐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걱정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레스트레이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괜찮습니다."
 "흐음."

 

 묘한 신음성을 흘린 마이크로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이 아닐지 두려웠던 레스트레이드는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어서 가셔야지요. 곧 재판이 시작됩니다."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줄곧 레스트레이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마이크로프트가 대답했다.

 

 "그 전에 당신 매무새나 좀 정리하는 게 좋겠군요. 자...이리 와요."

 

 그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레스트레이드를 자신 앞으로 가까이 끌어당긴 마이크로프트는 헝클어진 옷깃을 단정히 매만져주었다. 그가 손수 그리해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레스트레이드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하긴 그의 기준에서는 그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행위일 뿐인 것에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될 터였다. 마이크로프트는 미에 대한 탐닉이 피를 섭취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또레아도르일 뿐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떠올린 레스트레이드는 들떠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일부러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 나니 훨씬 진정되는 듯했다.
 마이크로프트가 온 신경을 집중해 그의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카락을 빗어주는 사이 레스트레이드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운 그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많은 혈족들이 모이는 법정에 출두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욱 신경을 썼는지 그는 신비스런 느낌을 자아내는 비둘기색 실크 턱시도 수트를 걸치고 있었다. 목 끝까지 채운 단추, 그리고 진주색 넥타이는 흡혈족에게 필연적으로 드리워져있는 죽음의 그림자에서 염세주의자가 느낄 법한 강렬한 그의 관능미를 경건하게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흠 잡을 데 없는 그 차림에 자신의 낡아빠진 코트와 평범하기 그지없는 차림새가 부끄러워진 그는 위축되는 자신을 감출 수 없었다.

 

 "다 되었군요."

 

 만족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마이크로프트의 시선에 레스트레이드는 그를 향하고 있던 질투의 시선을 거두었다. 그 질시의 감정은 레스트레이드가 마이크로프트를 사랑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류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우월한 자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에 불과했다. 질투를 해보았자 시대를 초월하여 변함이 없는 그의 우아함이 퇴색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갈까요."

 

 그는 검정 장우산을 집어들고 그것을 지팡이 삼아 앞뒤로 흔들며 레스트레이드에 앞서 걸었다. 레스트레이드는 그를 놓칠세라 황급히 걸음을 서둘렀다.

 

*

 

 음산한 분위기의 높은 천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여러 명의 남녀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더욱 똑똑히 들렸다. 콜로세움처럼 가운데의 원형의 공간만을 남긴 계단형의 강당에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착석해 가운데로 걸어나오는 마이크로프트와 레스트레이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남녀들이 그 둘을 바라보며 서로에게 귀엣말을 했다. 간간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방 안에 속삭임처럼 울려 퍼졌다. 모든 사람이 점점 이 사건이 주는 매력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간해서는 변화가 없는 그들의 무료한 일상에 이만큼이나 큰 파장을 일으킨 일은 오랜만이었으니까 말이다.
 마이크로프트가 가운데 피의자를 위한 의자가 마치 왕좌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앉자 비어있던 배심원석이 속속 들어차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은 런던 뱀파이어들의 수장인 프린스였다. 그가 도착하자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떠들던 목소리가 잦아들고 고요하고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압박적인 정적을 깨고 프린스가 입을 열었다.

 

 "착석."


 프린스가 착석함에 따라 다른 뱀파이어들도 하나둘씩 자리에 앉았다. 조용해졌던 장내가 다시금 어수선해지는 것에 서기가 주의를 주었다.
 

 "정숙하세요."

 
  그러나 또레아도르 클랜의 프리모진-뱀파이어 클랜의 대표자-이자, 권위있는 엘더 가운데 하나이며, 런던에서 프린스 다음의 위명을 지닌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뱀파이어 법정에 피의자의 신분으로 출두했다는 것은 많은 뱀파이어들에게 소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을 둘러싼 이들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즐기기라도 하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들이 소란스러우면 소란스러울수록 휘하 뱀파이어 하나 똑바르게 통솔하지 못하는 프린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자신의 네임 밸류는 올라가는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프린스를 비롯한 판사 측에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이크로프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금어질수록 그들의 표정에는 불편한 심기가 번졌다. 그들과는 별개로 인간 조력자의 자격으로 법정 안에 입장한 레스트레이드 또한 마이크로프트가 부리는 만용과 같은 태도에 몹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저히 수습되지 않는 분위기를 보다못한 프린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마이크로프트의 혐의를 명시한다."

 

 그제야 쥐죽은 듯 조용해진 장내를 둘러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제 1혐의, 말살해야 마땅한 카이티프*를 보호하여 카마릴라의 안위를 불안하게 하였음.
  제 2혐의, 그러한 행동으로 섹트*과 섹트 내의 킨드레드*의 존립에 악영향을 미침.
  제 3혐의-"

 

 이어지는 말에 마이크로프트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내려갔다. 그가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의혹삼을 수 있는 혐의가 저 두 가지 말고 또 있단 말인가?
 그러한 의문은 마이크로프트 뿐만이 아니라 법정에 참석한 다른 뱀파이어들도 품게 된 것이어서 한순간 그들이 더욱 바삐 귀엣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린스는 그러한 소음따윈 무시하고 계속해서 혐의를 읊었다.

 

 "제 3혐의, 섹트의 안전을 수호하며, 프린스를 대신하는 스커지*의 행동을 제약하여 프린스의 권위를 무시함.
  제 4혐의, 클랜의 프리모진이라는 지위에 오르기 위해 디아블러리를 하였다는 제보를 접수했고, 정식 혐의로 인정. 따라서 이 법정은 이 네 가지의 혐의에 대하여 마이크로프트 홈즈 본인이 해명하기 위해 열렸음을 알린다."

 

 디아블러리, 라는 말이 프린스의 입에서 나오자 레스트레이드는 주먹이 하얗게 되도록 꽉 쥐었다.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몇몇의 헉 하고 놀란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디아블러리는 모든 뱀파이어들의 규칙에서 가장 준수되어야 하는 규칙 중에 하나로, 그것을 어기는 자는 정상참작의 여지라곤 없이 곧바로 침묵의 형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디아블러리란 자신보다 윗세대의 뱀파이어의 피를 마심으로서 세대의 위계를 거스르는 행위로, 디아블러리는 한 자는 당한 자의 지혜와 힘을 가질 수 있지만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됨과 동시에 섹트로부터 척살령을 발부받고 지명수배를 당하는 극악의 행위였다. 디아블러리에 대한 대처가 이토록 강력하다 보니 감히 전 뱀파이어 사회로부터 추살을 당하고 싶은 정신나간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에야 그것을 저지르는 일은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처벌이 해명의 기회 없이 즉결처분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뱀파이어들 간의 정치적인 세력 다툼에서 다른 뱀파이어가 그와 적대적인 뱀파이어를 디아블러리 혐의로 몰아 죽이는 일은 다반사였다. 마이크로프트가 그나마 재판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은 그가 워낙 유명하고 인지도가 높은 뱀파이어였기 때문에 그를 무턱대고 죽였다가는 세간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임을 인식한 엘더들의 판단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다른 뱀파이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는 마이크로프트의 명성을 질투한 프린스가 벌이는 단순한 위력 행사의 차원이 아니라, 프린스를 비롯한 런던의 뱀파이어들의 지도부가 마이크로프트를 심각하게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과 다름이 없었다. 파티라도 온 듯한 처음의 떠들썩한 분위기는 완전히 심각하게 가라앉아버렸다.
 조용한 가운데 프린스가 입을 열었다.

 

 "발언하세요, 마이크로프트."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다분히 의식하며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발언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깃털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해진 법정에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목을 가다듬은 마이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프린스여, 그리고 그와 더불어 경애받아야 마땅할 엘더들이시여. 부디 피가 흐르는 동안 끝없이 이어질 영광과 홍복을 누리소서. 저는 저에게 쏟아지는 이와 같이 터무니없는 의심들에 깊은 슬픔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나이다."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하자 좌중에 젊은 축에 속하는 뱀파이어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옛 브리타니아의 언어-즉 고대의 영어로 발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몇 백년도 더 지나 쓰일 일이 없었을 그때의 언어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연설문을 읽어내려가듯 말해내고 있다는 것은 다시 한번 그가 오랜 동안 영국의 터전을 다져온 유서 깊은 뱀파이어 일족 중에 하나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지능적인 장치의 하나였다. 스코틀랜드의 차디찬 계곡물이 하얗게 얼어버린 살얼음 사이로 흘러가는 것처럼 유창한 말이 이어졌다.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는 그의 말을 한 엘더가 중단시키고 말했다.

 

 "그대가 우리와 함께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을 잘 알겠소. 그러나 어린 뱀파이어들이 당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니 현대의 언어로 발언해주길 바라오."

 

 그의 말에 발언을 멈춘 마이크로프트가 한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다시 발언을 시작했다. 잠시 숨을 돌릴 만도 하련만 마이크로프트는 기다렸다는 듯 현대 영어로 다시 말을 계속했다.

 

 "먼저 가장 먼저 제게 지워진 혐의에 대해 반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제 보호 아래에 들어온 그 혈족은 비록 대부에게 버림받긴 했지만, 그를 카이티프라고 칭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는 엄연히 카파도키안* 클랜에 속한 혈족이기 때문입니다."

 

 프린스의 뒤에 열을 지어 착석한 엘더들 가운데 하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카파도키안은 이미 절멸당했소! 선조의 무덤에 잠들어 있는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오! 설마 토퍼*에 빠지신 분이 그 카이티프를 자신의 아이로 삼았다는 억지를 주장하지는 않겠지요?"

 

 다른 엘더가 거들었다.

 

 "그 아이가 정말로 카파도키안이라면 더욱 큰 문제요. 카파도키안의 대부분은 우리의 섹트, 카마릴라*에 대적하는 사악한 사바트*에 가담하였던 전적이 있다는 것을 다들 잘 아실테지요. 아까 트레메레* 클랜의 프리모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카마릴라에 적대하지 않은 카파도키안 클랜의 혈족은 단 한 명만이 남아있을 뿐인데, 그 분 이외의 카파도키안이 그 인간을 자신의 자손으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필시 그로 하여금 우리 섹트를 염탐하게 하려는 의도일겁니다. 만약 그를 받아들였다가 생길 수 있는 사단의 경우의 수를 제가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터이니 더이상의 말은 아끼도록 하지요."

 

 자못 논리정연한 엘더들의 말에 레스트레이드와 몇몇 뱀파이어들은 우려 섞인 시선으로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 전혀 기가 죽지 않은 채로 꼿꼿이 서서 말을 이어나갔다.

 

 "벤트루* 클랜의 프리모진께서는 대체 무슨 근거로 대부에게 버림받은 채 길바닥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아이가 카마릴라를 염탐할 것이라고 간주하시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트레메레의 프리모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트레메레의 프리모진께서 사바트의 살아남은 카파도키안과 내통을 하지 않는 이상에야 그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무슨 망발을!"

 

 신랄한 비판에 앞서 발언한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발끈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마이크로프트는 빙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흥분하여 길길이 날뛰는 그를 지켜보았고, 그러한 그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난 남자는 아예 피고인석으로 뛰어나가 마이크로프트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으나 주변의 뱀파이어들이 말리는 바람에 그러한 행동은 무산되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카파도키안 클랜이 과거에 사바트에 가담하여 우리에게 적대하긴 했으나, 그는 엄연히 새로이 혈족이 된 사람이며, 그 대부에게 버림받기까지 한 아이입니다. 따라서 그가 일부 적대자들의 죄과를 대신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연좌제나 다름없는 처사입니다. 여기 계신 킨드레드들께서 다 아시는 것이겠지만 연좌제는 극도로 전근대적인 악습이며 지양되어야 할 폐습이지요."

 

 거기까지 말한 마이크로프트는 입을 다물고 뱀파이어들이 저들끼리 의논하는 것을 마치기를 기다렸고,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렇다면 서론은 충분히 길었던 것 같으니 이제는 제게 지워진 첫 번째와 두 번째 혐의를 완전히 벗기 위해 노력해보도록 하지요."

 

 마이크로프트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주위를 한번 휘 둘러보며 말했다.

 

 "사실 트레메레의 프리모진께서 걱정하시는 바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사바트 클랜에서 서서히 활동을 재개하여 우리의 영역으로 준동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저도 알기 때문이지요. 그 중에 특히 우리가 유념하고 상대하는 데에 있어 주의를 기해야 하는 이들은 바로 펠로워즈 오브 세트* 클랜이지요. 그들에게는 흡혈귀에 대한 강력한 매료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펠로워즈 오브 세트의 대항마가 있다면,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카파도키안들입니다. 펠로워즈 오브 세트는 세트, 즉 죽음의 신의 추종자이고, 세트를 섬기는 대가로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반면 카파도키안들은 죽음에 대한 연구에 특화되어있고, 그들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 존재들이기에 외양이 독특할 뿐 아니라 펠로워즈 오브 세트의 매료 능력에 면역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요. 그들이 카마릴라에 적었기에 지난번 대전쟁에서 카마릴라가 많은 희생을 대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제가 왜 그 연약한 아이를 거두어 제 보잘것없는 보살핌의 날개 아래에 두었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프린스가 입을 열었다.

 

 "따라서 그대의 행동은 킨드레드의 존립에 위태한 처사가 아니라 오히려 존립을 돕는 처사라는 말인가요?"

 

 마이크로프트가 프린스를 향해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제가 할 말을 프린스께서 대신해주시는군요."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엘더들이 웅성거렸다. 잠시 후 아직도 화가 덜 풀린 듯한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일어나 말했다.

 

 "좋소. 그대의 발언의 정당성을 인정하여 제 1혐의와 제 2혐의의 죄목은 거두도록 하겠소. 그렇다면 이외의 혐의에 대해서는 어찌 반박을 하실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하구려."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파닥이는 것을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잔인한 웃음을 머금은 그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마이크로프트가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그 어린 혈족을 보살피는데 스커지들이 기웃거리길래 자리를 피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한 일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군요."
 "내가 듣기로는 간곡히 부탁한 것이 아니라 그 알량한 위세를 믿고 위압적으로 스커지들을 압박했다고 들었소만?"

 

 자리에 앉은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이죽거리며 말하자 마이크로프트는 짐짓 선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못 아시는게 분명합니다. 프리모진께서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잘못 전한 말을 믿어버리신 게로군요."

 

 일견 유감스럽다는 듯 말하고는 있었으나, 마이크로프트가 한 말에 남이 한 말을 의심없이 믿는 당신은 천하의 바보 멍텅구리, 라는 뉘앙스가 듬뿍 들어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는 없었다. 법정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오자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의 얼굴이 다시 벌개지기 시작했다. 장내가 다시 시끄러워지는 것에 서기가 소리쳤다.

 

 "정숙!"

 

 간신히 정리된 분위기가 다시 들떠오르기 전에 마이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스커지들의 행동을 방해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무고한 혈족을 재미삼아 몰이 사냥을 하듯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잔인한 처사를 보이지 않았다면 저도 아마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었을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워낙 시끄럽게 날뛰기에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길래 그렇게 즐거워하는지 궁금해서 다가갔고, 죽어가는 혈족을 발견했지요. 그 이후에 제가 한 일에 대해서는 이미 다들 잘 아실겁니다."
 "그렇다면 제 3혐의에 대해서 인정하고 순순히 죄를 청한단 말씀이십니까?"

 

 엘더 중 하나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분개하는 척 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프린스와 따로 이야기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이런 공개 석상에서 제 행동에 대해 비난을 하는 이가 하나 둘이 아니니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겠군요."

 

 마이크로프트가 프린스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런던에 터를 잡은 뱀파이어들이라면, 다른 이의 영역에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되며, 다른 이의 영역에 발을 들일 시에는 그 영역의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출입을 청하는 것이 오랜 관습이며, 그 관습에 따라 출입을 청한 혈족을 환대하고 그 청을 허락하는 것이 우리들의 규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프린스의 스커지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공무를 집행하느라 미처 허락을 취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으시겠지요. 하지만 불쌍한 어린 아이를 마치 장난감삼아 갖고 놀듯이 느긋하게 사냥을 하는 그들은 아주 시간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특별한 경우였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제 영역에 그대의 스커지들이 인사 한 마디 없이 쳐들어와 장난삼아 인간을 사냥하는 행위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어왔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그러나 저는 그것에 토를 단 적이 없습니다. 왜냐고요? 당신의 수족이며 당신을 대신하여 대외적인 행동을 담당하는 수하들이기 때문에 섣불리 제가 질책하는 것을 삼간 것입니다. 잘못 이야기가 와전되면 내가 당신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고려한 처사였습니다."

 

 빈틈없이 짜인 논변을 이어나가던 마이크로프트가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이로써 내가 얼마나 프린스의 권위에 복종하고 있는지, 잘 설명이 되겠지요."

 

 법정의 뱀파이어들은 말이 없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혐의는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군요. 또레아도르 클랜뿐 아니라 저와 같은 세대 위의 선대들은 지금 모두 토퍼에 빠져 계신 걸 다들 알텐데요? 제 대부도 잠들어 계신 선대 중 하나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감히 디아블러리라는 용서받지 못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는 선조의 무덤으로 남몰래 잠입하여 들어가서 잠든 선조를 깨우고, 감히 선대 혈족의 피를 마시고, 다시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선조의 무덤을 빠져나와 런던 외곽 중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제 저택으로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는 것에 성공한 채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군요."

 

 마이크로프트가 냉엄한 어조로 말을 잇다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누가 감히 그러한 거짓 제보를 했단 말입니까? 선대들께서 영면해계신 곳에 누가 들어가보기라도 했나보지요? 그곳이 금지구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프린스가 손에 든 깃펜을 움직여 무언가를 끄적이고 자기 앞에 놓인 종이 몇 장을 펄럭펄럭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항변을 마이크로프트는 천천히 의자에 다시 앉았다.
 정적을 깨고 프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혐의."

 

 그가 입을 열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가장무도회의 규칙*을 어겼소. 그는 인간을 사사로이 곁에 두고 그에게 인간이 알아서는 안되는 밤의 질서를 가르쳤으며 뱀파이어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게 하여 훗날 그들이 밤의 세계를 침략할 때 사용할 앞잡이로 길러냈소."

 

 법정에 앉아있던 뱀파이어들의 시선이 한순간 레스트레이드를 향해 쏠렸다. 마이크로프트가 그렉 레스트레이드라는 인간을 총애하여 한시도 빠짐이 없이 그의 곁에 둔다는 것은 알만한 뱀파이어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의심, 혐오, 식욕이 뒤섞여 번뜩이는 그들의 눈초리가 무섭게 레스트레이드를 꿰뚫었다. 그러한 가운데 프린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라는 제보 또한 들어왔다. 마이크로프트 홈즈에게 제보의 신빙성을 반박할 것을 요구한다."

 

 프린스가 자리에 앉자 마이크로프트가 기가 차다는 듯 대꾸했다.

 

"하! 언제부터 그것이 그리도 큰 죄가 되었단 말입니까? 예로부터 선대들께서도, 그리고 누구라 이름부를 수는 없지만 지금도 수많은 혈족들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도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인간들이 우리를 정복하는 것에 일조하기 위함이 아니요, 햇빛이 미치지 않는 밤에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우리들이 인간 세상에 잘 녹아들도록 하기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잖습니까? 그리고 인간들이 밤의 세계로 감히 침략을 한다는 유언비어는 대체 누가 퍼뜨렸지요? 그런 근거없는 낭설로 킨드레드를 부화뇌동시키는 자를 엄벌해야합니다."

 

 마이크로프트가 몸을 일으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므로 저는 프린스께서 공의회(엘리시움*)를 여실 것을 제안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일어나 소리쳤다.

 

 "공의회의 수장은 당신이 아니오! 키퍼 오브 엘리시움*이 당신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는 줄 아시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군!"
 "그렇게 흥분하시는 이유가 없을 텐데요. 어딘가 뒤가 구린 구석이라도 있소?"

 

 여태껏 가만히 사태가 돌아가는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브루하*의 프리모진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입을 다물었고, 브루하의 프리모진이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떳떳하오. 프린스께서 엘리시움을 여는 것을 허가하고 마이크로프트가 그 집정관이 된다고 해도 나를 비롯한 브루하의 일족은 우리의 수호자 달빛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울 일이 없을 것이오."

 

 그의 진지한 태도에 다들 수그러드는 찰나에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이 쳇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죄인의 혐의를 지닌 이가 공의회의 수장이라니, 말세로군, 말세야!"

 

 그 말을 놓치지 않은 마이크로프트가 나직이 말했다.

 

 "그건 선대들께서 나에게 허용하신 직위입니다. 만일 여기에 그때 나에게 키퍼 오브 엘리시움의 권위를 쥐어주신 이보다 높은 이가 있다면 감히 그 권한을 회수해가도 좋습니다."

 

 그들 세대보다 높은 선대의 혈족이 모두 잠들어있는 데에야, 감히 마이크로프트에게서 그 권리를 뺏을 수 있는 이가 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다. 우아하게 입꼬리를 올려 그를 향해 미소지은 마이크로프트는 곧 프린스를 향해 몸을 돌려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천천히 말했다.

 

 "엘리시움은 열지 않는다."

 

 이어서 그가 말했다.

 

 "판결을 내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 결과가 빤히 보이는 일이었고, 그 판결을 짐작하는 이도 없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프린스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가 선언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 무혐의."

 

 레스트레이드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뱀파이어들 중 일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일부는 원성을 토해냈으며, 일부는 차분하게 무표정을 지킨 채였다. 그러나 프린스의 말을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러나 배심원 중 일부의 의견을 수용하여 법정 모독죄 혐의는 인정. 따라서 3개월의 칩거를 명한다."

 

 재판 내내 마이크로프트에게 맺힌 것이 많았던 트레메레의 프리모진은 프린스의 처사가 지나치게 너그럽다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프린스의 의사는 확고부동했다. 엄정한 품위를 유지한 채로 프린스는 자리를 떴고, 그 정도의 제재도 감수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던-더한 처분도 예상했었으므로-마이크로프트는 경의를 표하듯 그의 뒷모습을 향해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그 날 밤의 재판은 다소 싱겁게 끝났다.

 

*

 

 재판이 끝나고 재판정을 빠져나온 마이크로프트와 레스트레이드는 아무런 말 없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레스트레이드는 무언가 수심에 잠긴 기색이었고, 레스트레이드가 급작스레 기분이 나빠진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마이크로프트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모든 혐의에서 자유로워진 마이크로프트 자신에게 안도의 미소라도 지어줄 줄 알았건만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거는 것조차 거부하는 고통스런 안색이었다.
 밤은 어느덧 끝자락에 다다라, 하늘을 보니 달빛이 시시각각으로 선명해져 사위는 온통 부드러운 은빛으로 환해져 있었다. 새벽녘이 되기 직전의 마지막 반짝임을 뽐내는 별들의 장막이 하늘에서 듬성듬성 반짝였고, 그 아래에 선 그들은 저택의 정원에 들어서 걸음을 멈추었다.

 

 "레스트레이드."

 

 마이크로프트가 먼저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무슨 연유로 그렇게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나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겠어요?"

 

 그답지 않게 극도로 정중한 말투였다. 레스트레이드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쳤다.

 

 "수단이라고요? 수단이라고요?"

 

 그제야 레스트레이드가 무엇에 화가 난 것인지 알아챈 마이크로프트가 그를 진정시키려 팔을 뻗었다. 아까 전 재판 과정에서 레스트레이드를 인간의 삶에 녹아들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했던 것에 대해 그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마이크로프트가 레스트레이드의 어깨를 잡으려고 노력했으나 놀랍게도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의 손을 쳐내었다. 깜짝 놀란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레스트레이드, 진정해요."
 "제가 겨우 수단에 불과했던 거군요? 아주 잘 알겠습니다."
 "레스트레이드!"

 

 흥분하여 평소의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행동과 언사를 뱉어내는 레스트레이드에게 마이크로프트가 소리쳤다. 그제야 레스트레이드가 비아냥대는 것을 멈추었다. 잠시 그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고르는 소리만이 고요한 저택을 채웠다.
 마이크로프트가 차분하게 말했다.

 

 "거기엔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요. 만약-"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미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말을 듣는 데에 자신의 온 생애를 쏟아왔고, 그것은 기나긴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고통만을 그에게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에 진력이 나고 만 것이다.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가로막고 레스트레이드가 말했다.

 

 "됐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말뿐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절 달래느라 마음쓰실 필요 없어요."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가 그렇게 말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천하의 마이크로프트가 할 말을 잃고 바보처럼 가만히 서있을 뿐인 그 모습에 약간의 고소함과 양심의 가책이 동시에 자신의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며 레스트레이드가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저는 적어도, 그보다는 나은 것을 바랐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다가 곧 끊어졌다.

 

 "그건 그렇게 큰 욕심이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아니었나보군요."

 

 마이크로프트는 입술만 뻐끔거렸고, 레스트레이드는 더이상 그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앞으로 3개월 동안 형기를 치르실테니 저는 필요하지 않겠죠. 그 동안에는 절 필요로 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레스트레이드!"

 

 뒤늦게 마이크로프트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불렀으나 레스트레이드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을 떠나가버렸다.

 

 "그렉…."

 

 그가 떠나간 후에야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가 돌아서서 가버린 뒤로 공허한 그림자만이 잠시 맴돌다 사라진다.
 마이크로프트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오랜 동안 축적되어 아픔에 젖은 절규를 토해내고 레스트레이드는 떠나버렸다. 그런 그를 차마 잡을 수 없었다. 잡아야 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그가 떠남과 동시에 무너지듯 주저앉을것만 같았지만 마이크로프트는 그러지도 못했다.
 무겁게 눈을 감는다.

 도저히 그에게 할 수 없었던 고백을 그가 떠난 뒤에서야 읊조린다.

 

 "내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 가지 말아요…."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깊은 고요에 감싸인 매혹적인 저택, 그리고 저택을 둘러싼 은은한 달빛만이 외로이 선 그를 비추었다. 햇빛이 들이치기 전까지, 그는 그렇게 망부석처럼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카이티프: Caitiff. 정상적인 클랜이나 블러드라인 소속의 대부가 포옹했으나, 클랜의 특질을 결정짓는 요소가 전달되지 않았던지 부족하게 만들어지는 등의 기타 이유로 무언가 잘못되어 클랜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진 자를 카이티프라고 한다. 이들은 뱀파이어이기는 하지만 클랜의 아무런 특징도 갖지 못하므로, 클랜의 약점도 없고 클랜 디시플린도 얻지 못하며 정상적인 혈족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정상적인 대부라면 자신의 책임을 다해 자식을 지켜볼테니 카이티프는 없는 존재이거나 만들어지더라도 대부의 손에 금새 처리되어야 마땅하지만… 카마릴라 내에서도 종종 엘더의 허락없이 막무가내로 포옹해놓고 버려놓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카이티프가 만들어져서 노숙자처럼 연명하는 경우가 가끔 있으며, 프린스는 카이티프가 발견되면 스커지를 보내서 청소해버린다.


*섹트: 뱀파이어 사회의 파벌. 카마릴라와 사바트로 나뉜다.

*킨드레드: 혈족의 이르는 다른 명칭


*스커지: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뱀파이어나 뜨내기들을 수색해서 무력으로 처리하는 프린스(도시의 지배자 뱀파이어)의 사조직

*카파도키안: Cappadocian. 죽음과 영혼에 대해 연구하던 금욕적인 클랜이었으나, 아우구스투스 죠반니의 쿠데타에 의해 절멸했다. 보통의 뱀파이어에 비해 외모가 훨씬 시체스럽게 보인다

*토퍼: 뱀파이어의 나이가 많이 들었거나 입은 상처가 지나치게 깊으면 그것을 재생할 때까지 죽은듯한 깊은 잠에 빠져드는데 이 수면을 토퍼(Torpor)라고 한다. 뱀파이어가 오래 될수록 토퍼의 기간이 길어지는데, 고대 시절의 정말로 오래된 뱀파이어는 토퍼를 수백년에서 천년까지 빠져드는 경우도 있다.

*카마릴라: 카마릴라(Camarilla)는 마스커레이드(가장무도회의 법칙, 하단 참조)를 지키고 인간성을 보존하는 것에 대체적으로 찬동하는 클랜들로 구성되어있다. 브루하, 강그렐, 말카비언, 노스페라투, 또레아도르, 트레메레, 벤트루가 카마릴라에 속해있다. 카마릴라의 구성원은 가장무도회의 법칙을 비롯해 몇가지 전통(Tradition)이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사바트: 사바트(Sabbat)는 뱀파이어가 인간보다 우월한 종임을 드러내고자 인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놓고 습격하며, 또한 앞으로 닥쳐올 게헨나의 날에 돌아와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할 카인의 검이 되어(한마디로 적극적으로 앞잡이가 되어서) 세상을 휩쓸어버리자는 게헨나 컬트적인 클랜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바트는 자기네 클랜의 앤티딜루비안(선대)을 살해하는데 성공하고 클랜의 주도권을 틀어쥔 라솜브라, 쯔미시 클랜을 핵심으로, 카마릴라 클랜 출신이지만 반골적인 성격을 가져서 뛰쳐나온 앤티트리뷰(Antitribu)들이 추가되어있다.

*트레메레: Tremere. 트레미어는 한때 인간 마법사의 학파였으나, 영생을 추구해 스스로 뱀파이어가 되었다. 강력한 피의 마법을 사용해서 카마릴라를 지탱하는 중추이지만, 중세 때부터 수많은 적을 두었기 때문에 클랜 조직에 대한 충성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한다. 카마릴라 내부에서는 이들을 미심쩍게 보는 시선이 많다

*펠로워즈 오브 세트: Followers of Set. 그들의 클랜 선조가 이집트 신 세트(Set)라고 믿는 그 후예들. 언젠가 돌아올 절대적인 악의 신 세트의 앞길을 닦아놓는 것에 비밀스럽게 전념하고 있다. 영혼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대면하고 있으며 타락과 유혹의 달인이므로 그 어떤 혈족에 비해도 악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암흑의 존재이기 때문에 빛에 극도로 민감하며 태양광선이 아니라도 강한 빛에 괴로워한다. 중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악의 축.

(소설의 흐름상 이집트의 악신 세트를 죽음의 신으로 묘사했으나 사실 이집트의 죽음의 신은 아누비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백과사전에 따르면 아누비스=명계의 신, 오시리스=사자死者의 신, 세트=악의 신이군요. 그런데 이집트 신화는 상이집트-중이집트-하이집트를 거쳐오면서 변화가 상당히 많이 일어났거든요. 신들의 역할이 이집트 왕조의 입맛대로 변형도 되고...이런 묘사를 그런 변화의 갈래 중에 하나로 보아주십사...하는 건 무리겠지만, 여튼 이해해주세요)

*가장무도회의 법칙: Masquerade. 인간에게 정체가 밝혀져서는 안된다.
*엘리시움: 뱀파이어들 사회에서의 정치의 장. 공의회.


*키퍼 오브 엘리시움: Kepper of Elysium. 엘리시움의 평온을 위해 엘리시움 내 모든 것을 관리하는 담당관. 작중에서는 공의회의 수장, 의회의 의장 역할.

*브루하: Brujah. 한때 위대한 철학을 겸비한 강력한 전사였으나, 많은 좌절을 겪은 현재는 반항적인 정치 행동주의자가 되었다. 강력한 전사적 능력을 갖추었으며 카리스마적인 연설가이기도 하나 광포화하기 쉬운 약점을 갖고 있다.

Posted by 에스MK-2 :

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피의 본능은 유혹,

진한 향기는 와인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은 키스보다 황홀하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사랑처럼 달콤하다.

 

  

밤비가 차갑다.
 유례없이 거세게 내리는 비가 따갑다.
 비 내리는 거리를 가득 메운 비, 빗물, 빗방울, 빗줄기, 빗소리-커졌다 작아졌다 간헐적으로 후드드 울어대는 빗소리, 사정없이 떨어지는 빗줄기, 우산자락에 내려앉았다 둔탁한 파공음을 내며 튕겨나가는 빗방울, 흘러내려 땅바닥에 고인 빗물, 바닥을 적신 빗물로 깜깜한 아스팔트 바닥은 퇴색한 별빛마냥 조근조근 빛나는데 그마저도 가로등 불빛에 가리워 죽어버리는 반사광이 처량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런던의 밤거리에 가득한 어둠과 비 속에서 한 남자가 무너져버릴 것만 같이 위태하게 서 있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는 감옥처럼 그를 짓누르고 어슴푸레하게 깔린 비안개가 하얗게 그의 숨통을 조이고 보도블럭을 때리는 빗소리가 마치 상처입은 호랑이의 신음소리처럼 울부짖으며 온 밤하늘을 울린다. 검푸른 빛깔의 하늘을 바탕으로 길게도 내리는 빗줄기의 불협화음에 가까운 군무가 달빛을 받아 간간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둥글게 뜬 만월은 구름을 베일삼아 그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갓 남편을 잃은 미망인처럼 조용히 숨죽이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오랜 동안 비를 맞고 서 있었기 때문에 흠뻑 젖어버린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서는 물방울이 맺혀 뚝뚝 흐른다. 본디도 창백한 안색이었을 성 싶은 남자의 하얀 얼굴은 찬 비 때문인지 더할 나위 없이 파랗게 질려 흡사 익사체를 보는 듯 기묘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여윈 뺨의 윤곽이 파르스름하게 날 선 칼처럼 매몰차다.
 빗줄기 하나가 그의 뺨을 타고 흐르며 눈물처럼 투명한 궤적을 남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는 유리알같은 눈은 그 무엇도 담지 않는다. 그 눈꺼풀 위를 비가 무겁게 누른다. 무게감에 잠시 눈을 감는다.

 

 "비를 맞는 기분은 어떤가?"


 옆에서 어떤 차분한 목소리가 말한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음역대의 그 목소리와 함께 수많은 감각이 일깨워져 그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농탕질을 치는 와중에도 그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부드럽고 나긋한 첼로의 선율과도 같이 우아한 어조.
 대답없는 그에게 남자는 다른 물음을 던졌다.


 "생명이 사그라지는 기분은 어떤가?"


 신기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질문한다. 그 질문에 비를 맞고 있던 남자-셜록 홈즈는 불현듯 눈을 떴다.
 그렇다. 셜록 홈즈는 죽어가고 있다.
 도무지 현실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는 남자의 질문을 무시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눈꺼풀로 시야가 가려지는 대신 다른 감각이 명활해진다. 몸을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의 활력을 다른 무언가가 앗아가고, 바다 깊은 곳의 느릿하고 고요한 해류 속을 헤엄치는 미지의 생물체의 태동처럼 소름끼치게 차가운 감각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남자의 말대로 이것이 죽음일까. 이것이 바로 죽어가는 느낌인가. 그렇지 않으면 새로이 태어나는 과정인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셜록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안에 존재하고 있던 연약하디 연약한 필멸의 인간이 지닌 생기, 생명, 활기, 정기가 깨어진 그릇에 담긴 물처럼 셜록의 몸에서 새어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그 느낌은 어쩐지 슬픈 느낌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그 순간을 기억하게."
  

 나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으나-라고 남자는 애상적으로 말을 흐렸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순간이 이렇듯 허무하게 끝난다는 인식은 분명 태생적으로 감성이라는 것에 면역이 되어 있는 셜록에게마저 사뭇 중대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과는 별개로 온 몸이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잠식되는 감각은 결코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몸부림과 단말마처럼 서서히 사그라드는 생. 느린 파도처럼 다가오던 그것은 점차 빨라져 해일처럼 무참하게 그의 인간성을 휩쓸고 그 사라짐에 애도를 표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빠르게 지나쳐간다. 그리고 부스러기처럼 남아있는 잔해가 뒹구는 자리를, 끝없는 어둠이 차지한다. 조용하고 신속하게 그 과정은 진행되었고, 완성되었다.
 셜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뱀파이어가 된 건가?"


 애써 동요하지 않으려 무덤덤한 어조를 고수했으나 음성이 조금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그를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답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떴다. 흐릿한 별무리. 비를 맞긴 했지만 그의 눈가는 여태 건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고 있는 자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이지러진 그 별무리는 무척이나 애달팠다.
 셜록은 그를 줄곧 바라보고 있던 남자를 향해 들고 있던 고개를 내렸다.
 남자는 검은 장우산을 들고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말끔한 모습으로 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정하게 갖추어 입은 남자에게서는 아무에게서나 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기품이 느껴졌다. 우아한 광택이 일품인 검은색의 양복과 진홍색의 실크 넥타이는 그에게 맞춤복처럼 잘 어울렸다. 그가 걸친 고풍스런 느낌의 회중시계와 넥타이핀도 한눈에 봐도 수제품이겠거니 싶은 고급이었다. 단순히 옷만 잘 차려입은 신사가 아니라 모종의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가 가진 권위를 충분히 활용할 수완과 능력이 있는 자만이 가지고 있는 위엄이 풍겨나오는 모습이었다. 셜록의 날카로운 눈썰미는 그의 옷에 단 한 점의 먼지와 주름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간파했다. 또한 무슨 수를 썼는지 빗물이 흐르고 있는 바닥에 발을 디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고 있는 신발에는 물방울 하나도 묻지 않고 있었다. 분명 강박적으로 결벽을 추구하거나 그런 종류의 미학을 추구하는 부류이리라.
 한편 그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음습한 향기가 풍겼다. 해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 그림자 속에 안주하는 이 도시의 숨겨진 맹수. 귀족적인 미소로 그 정체를 위장하고 다물린 입 안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숨긴 채 살아가는 존재. 인간의 피를 탐닉하며 뜨거운 햇살 아래 약동하는 그들의 생기에 기생하는 인간이 아닌 것들 특유의 향기.
 그리고 그 자신과 같이 완연한 뱀파이어의 풍모를 지니게 된 셜록 홈즈와 시선이 마주친 남자의 눈은 이내 이채를 띠었다.


 "아름답군."


 경탄어린 찬사였지만 그 말을 듣는 당사자인 셜록 홈즈는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납빛 안색의 그는 무척이나 피로해보였다. 경멸 어린 시선이 남자에게 되돌아왔지만 도취된 남자는 그에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남자는 오히려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서 셜록 홈즈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섰다. 남자의 눈은 오래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볼 법한 고색창연한 진푸른 빛을 발했다. 세월의 흔적이 여과없이 느껴지는 깊은 눈. 오랜 세월과 시간을 감당해온 자의 눈빛으로 그는 셜록을 압도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셜록은 그의 접근에 무척이나 불편한 기색이었으나 그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그는 멈추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남자는 셜록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나와 함께 가자꾸나."


 미소지으며 남자가 말했다. 유혹하듯 달콤한 목소리가 불안정한 셜록의 마음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이어진 셜록의 대답은 남자가 바란 대답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싫어."


 단호한 거절을 표한 셜록은 남자를 외면하며 뒤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그 당당한 기세가 무색하게도, 입 밖으로 거부 의사를 내뱉은 직후 그는 제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남자가 그에게 뭐라 말하는 것이 셜록의 귓가에 불분명한 음조로 울렸다.


 "기껏 살려놓았는데 죽으려 들면 안되지."


 그것이 셜록이 정신을 완전히 잃기 전에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영문 모를 말을 하던 남자는 순간 정신을 잃고 무기력하게 쓰러진 셜록이 길바닥에 나뒹굴기 직전에 그를 용케 잡아채어 그를 끌어안았다. 남자에게 안겨 그가 쓰고 있던 우산 속으로 들어온 셜록은 더이상 비를 맞지 않았다. 다만 힘없이 늘어진 셜록이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옷을 적시고 축축한 감촉을 남길 뿐이었다. 그를 부축한 남자는 품에 안긴 셜록을 뭐라 형언할 수 없이 음울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어깨에 무겁게 자리한 그의 머리칼을 흰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그는 우산을 슬쩍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그렇게나 내리는데도 하늘에는 달이 오롯히 자리하고 있다. 햇빛의 미약한 반사체에 불과한 그것이 내리쬐는 그 보잘 것 없는 자연광에 매혹된 그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멋진 밤이군……."

 

*


 눈을 뜨자 낮선 샹들리에가 달린 천장이 보였다. 원형을 기본 구조로 하여 잘 세공된 다이아몬드처럼 수많은 단면을 지닌 크고 작은 크리스탈이 모여 층층이 겹쳐진 눈의 결정들처럼 아름다운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불 붙은 촛불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에 샹들리에의 구조를 이루는 크리스탈의 단면이 은은하게 빛을 반사했다. 천장에는 샹들리에의 빛과 그림자가 섞여 난반사를 이루며 기하학적인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조그마한 빛과 열기에 불과한 그것이 투명한 수정을 통과하면서 보석처럼 오색 찬란하게 빛을 퍼뜨리는 광경은 무척 아름다웠으나 한편으로는 어떤 이의 두통을 가중시켰다. 인간이었을 적의 그라면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을 터이지만, 지금 그의 눈으로 날아드는 그 빛무리들은 너무나 환한 빛을 내리쪼이며 쏟아지는 바늘처럼 그의 망막에 날카롭게 박혀들어왔다. 마치 그 눈부신 광채를 각인이라도 하려는 듯.
 지나치게 선명한 감각이 오히려 셜록에게는 고통으로 작용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의 한계보다 수백 수천배는 예민하게 변한 오감은 특히나 그처럼 예민한 이에게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끓는 주전자가 자신의 속에 들어찬 열띤 증기를 이기지 못하고 삐익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셜록도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을 뒤틀며 작게 신음했다.
 멀리서 속삭이는 것처럼 나직한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

 

 "한동안은 그렇게 고통스러울 걸세."

 

 셜록은 힘들게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손에 글라스를 든 채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 우산을 쓰고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는 의자에 몸을 편안히 누인 채 다리를 우아하게 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걱정인지 근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약하게 어려있는 것 같았으나 꼿꼿하게 세운 자세, 치켜든 고개와 더불어 내려다보는 듯 다소 거만한 시선 때문에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이 어떤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는 정체모를 붉은 액체가 담긴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잔에 든 것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그는 잔을 든 팔을 의자의 팔걸이 위에 나른하게 늘어뜨렸다. 그가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움켜쥐고 있던 잔을 좌우로 살짝 흔들자 안에서 저희들끼리 뭉쳐있던 얼음 조각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들릴락 말락한 소리였지만 그런 작은 소음조차 지금의 셜록에게는 천둥번개처럼 커다랗게 들렸고 심한 두통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남자가 잔을 흔듦에 따라 잔 속에 얇게 깔려있던 적색의 액체에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몇 안되는 기포의 생성과 소멸조차 힘껏 북 치는 소리처럼 그의 고막을 터뜨릴 듯 괴롭혔다. 셜록은 더 참지 못하고 귀를 막았다. 남자는 그런 셜록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얄미울 정도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나약한 이들은 그마저도 버티지 못하고 자살하기도 하지."

 

 약간의 조롱기가 섞인 오만한 어조로 그 말을 내뱉은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자네는 잘 견뎌낼 거야."

 

 그는 잔 바닥에 남은 것을 마저 들이키고는 침대 위에서 몸부림치는 셜록을 홀로 방 안에 내버려둔 채 문을 닫고 나갔다.
 남자가 나가고 혼자 남은 셜록은 태중의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아 시시각각 그를 괴롭히는 외부 자극들을 무시하려 해보았으나 그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새로운 감각까지 기존의 소리 그리고 떨림과 합세한 모든 것들은 그가 편하게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수군거리는 이들의 크고 작은 웅얼거림, 위층에서 걸어다니는 누군가의 발소리뿐만 아니라 혈관을 흐르는 피가 점점 그 열기를 잃어가며 차갑게 식고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느릿하지만 강하게 맥동하는 울림, 자기자신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흉곽이 오르내리는 그 움직임마저 그에게는 커다란 재난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카페트 안에서 열심히 기어다니는 좀벌레의 다리 중 하나만 까딱 해도 셜록에게는 엄청난 소리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셜록은 빠르게 돌아가는 팽이였다. 그 회전 속도는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뾰족한 끝을 바닥에 디디고 팽팽 돌고는 있지만 금방이라도 중심을 잃고 넘어져버릴 것같이 불안하다. 지금 이 순간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하면 결말이 좋지 못하리라는 것을 셜록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수습하고 똑바로 이성을 끌어올리려고 할수록 쇠망치로 그를 후려치는 것과 같은 간헐적인 강렬한 고통이 더욱 명료하게 그의 온 몸을 엄습했고 한동안 그런 줄다리기와도 같은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한 순간, 모든 것이 숨이 멎는-여명과도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 지는 알 수 없었으나 바깥에는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장대비가 흐린 유리창에 이따금 와닿으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쉬지 않고 내리는 빗소리는 노이즈처럼 셜록의 귓바퀴에 쟁쟁 울렸으나 더이상 크게 신경쓸 거리는 못되었다.
 셜록은 남자가 붙여준 시종의 도움을 물리고 건네어진 옷을 스스로 천천히 걸쳤다. 자못 엄숙한 태도로 연한 하늘색의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며 든 생각은-이와 같은 빛깔의 하늘 아래를 더이상 자유로이 활보할 수 없게 된 것이구나, 라는 다소 감상적인 것이었다. 셜록은 스스로에게 코웃음을 치며 허무감만을 안겨줄 뿐인 그 생각을 뇌리에서 몰아냈다. 대신 셜록은 그가 걸치고 있는 옷에 신경을 집중했다. 아직 아까 겪은 고통의 후유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그의 손은 종종 경련하며 셔츠의 앞단추를 꿰려는 그의 노력을 수포로 돌리고 있었다.
 옷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그는 아까 남자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서 남자가 다시 자신을 찾기를 기다렸다. 쉬지 않고 닥쳐오는 원인 모를 상황들에 휩쓸린 나머지 지쳐버린 것일까, 목적 의식이 결여되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의지도 생각도 들지 않는 것에 그는 내심 당황하면서도 여전히 기운은 차리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있다가 문득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긴 손에 불거진 혈관이 시리게 푸르렀다.
 혈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대리석처럼 하얀 그것에서 신비스러움보다는 오히려 혐오감을 느낀 그는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 시선을 둘 곳이 없다는 것을 이내 깨닫고 말았지만.
 뱀파이어의 발달된 신경과 감각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통제할 수 있게 되자, 마치 그를 가두고 있던 몇 겹이나 되는 장막에서 벗어난 것처럼 온 몸이 상쾌하고 한결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적인 부분에 한해서였고, 셜록의 기분은 물에 푹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게 저조한 기분 상태는 그가 무의식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난 이후로부터 쭉 지속되고 있었다. 그는 자학과도 같은 심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거울 앞으로 섰다.
 조각상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한 남자의 흉상이 매끄러운 거울 표면에 비쳤다. 호흡하는 것처럼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으로 간신히 그가 무정의 물체가 아님을 알 수 있었으나 그 호흡하는 행위마저도 그동안 인간으로 살아온 세월의 여운으로 인한 의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니 그의 기분은 더욱 울적하게 침몰해갔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마치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뱀파이어의 모습 그대로였다. 소위 말해서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에 여위어버린 얼굴, 묘한 안광을 발하는 청회색의 눈, 그리고 퇴폐적으로 아무렇게나 늘어진 검은 곱슬머리. 습관적으로 무심하게 풀어내린 목 깃 사이로 보이는 쇄골과 홍조 한 점 없이 병적으로 바래어버린 뺨과 반듯한 이마 위에 흘러내린 암흑보다 새카만 머리카락, 그리고 방 안의 은은한 불빛의 일렁임이 그의 얼굴에 더욱 진한 그늘을 드리운 가운데서 데카당스풍이라고 칭할 만한 기이한 종류의 관능미와 문란함이 언뜻 풍겨나오는 듯 보였다면 착각일까.

 

 '이미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얼굴이군…….'

 

 루스벤 경도 아닌데 말이야, 라고 생각하며 그가 죽음처럼 그늘진 얼굴이 비친 거울의 표면에 저도 모르게 손을 갖다 대어 어루만지고 있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남자가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셜록은 거울 너머로 비치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거울을 바라보며 셜록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던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셜록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셜록의 흐트러진 머리결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부드럽게 뒤로 넘기며 말했다.

 

 "기분은 어떤가?"

 

 셜록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그렇군..."

 

 남자는 셜록의 모호한 대답을 곱씹으며 셜록의 머리카락을 다시 한 번 뒤로 넘겼다. 셜록은 남자가 하는 행동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었다. 셜록이 거울 속에 비치는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는 가운데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셜록의 머리를 손으로 몇 번이고 매만지던 남자는 셜록의 검은 머리칼이 그의 이마 위로 자연스러우면서도-미적인 측면에 문외한이라고 칠 수 있는 셜록마저 인정할 정도로-예술적이라고 할 만한 형태로 흘러내렸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만족한 웃음을 입가에 띠며 손을 내렸다.

 

 "완벽해."

 

 그는 셜록의 어깨에 양 손을 올려놓으며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셜록은 남자가 보이는 미(美)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냈으나 남자는 그에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남자는 거울 속의 셜록의 모습을 바라보며 특유의 느릿하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내 이름은 마이크로프트라고 하네."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굉장히 예민해진 셜록의 귀에도 흠잡을 데 없는 발성으로 들리는 그 소리에는 실수 하나 없이 연주되는 현약 사중주의 화음저럼 아름다운 음조가 내재되어 있었고 마치 세이렌의 노래처럼 듣는 이를 현혹시키는 마력이 있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자네의 이름은?"

 

 셜록은 그 목소리의 힘에 굴복하여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셜록 홈즈..."
 "셜록 홈즈. 아마 자네는 지금 궁금한 것이 많을 거야."

 

 셜록의 풀네임을 한번 읊조린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셜록을 다독였다.
 과연 그 말대로 셜록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굳이 남자-마이크로프트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받아들인 이유도 그의 면면을 분석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셜록의 남다른 관찰력으로도 남자의 정확한 나이를 추정할 수가 없었다. 겉보기에는 분명 30대 후반의 나이였으나 그의 눈빛은 절절히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의 노숙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인간 세계의 이면 속에서 밤의 지배자로서 살아왔을지 셜록은 차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셜록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나한테 왜 이렇게 해주는 거지?"

 

 셜록의 질문을 받은 남자는 셜록이 존대어를 쓰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마음쓰지 않는 듯 했다. 그는 일종의 친밀감의 표현인지, 셜록의 어깨를 살짝 매만지며 말했다.

 

 "자네가 아름답기 때문이지."

 

 셜록의 표정이 묘해지는 것을 본 남자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비록 생의 굴레에서 벗어난지 오래되어 인간의 욕망과는 멀어진 나이지만, 인간이었을 적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집착하는 바는 단 한 가지, 바로 지고의 '미(美)'라네...게다가 운명의 장난인지, 내가 속한 혈족의 본성 또한 묘하게도 미에 대한 탐닉이지...만약 내가 노스페라투(Nosferatu. 노스페라투는 포옹되는 순간부터 외모가 끔찍하게 뒤틀리기 시작해서, 섬뜩할 정도로 추한 괴물이 된다. 그들은 타인의 눈을 피해 하수구에서 살아간다. 숨어서 정보를 모으는 데에 능숙하기 때문에 정보 중개인으로 악명높다.) 일족이 되었다면 아마 나는 곧바로 내 자신의 목숨을 버렸을지도 모르지."

 

 '혈족'이니, '노스페라투'니, 셜록으로서는 의미를 섣불리 짐작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남자의 말에 끼어들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셜록의 표정이 어지럽게 변했다. 딴에는 농담이랍시고 한 말인지 짐짓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셜록에게 다정하게, 일면 연민어린 목소리로 셜록에게 말했다.

 

 "아직 밤의 일족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차차 배우게 될 거야. 불쌍한 어린 것..."

 

 본디 남에게 동정받는 것에 익숙치 않은 데다가 자존심마저 강한 셜록은 남이 자신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썩 기분좋지만은 않았다. 여기서 발끈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잠자코 있어야 하는 것인지, 두 가지의 선택지 사이에서 망설이는 셜록을 가만히 바라보며 남자는 오늘 저녁 식사는 농어 구이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근대의 뱀파이어들의 사회에서는-옛 시대의 뱀파이어들처럼 지나가는 인간을 내키는 대로 잡아 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네. 인간들이 말하는 암흑 시대에 뱀파이어들은 영주의 자리에서, 인간의 지도자에게 군사와 금력을 지원하는 대신 각자가 지배하는 영토에서 구미가 당기는 인간들을 성으로 불러들여 한 끼 식사거리로 삼곤 했지. 어린 처녀의 피를 특히나 좋아하는 몇몇 뱀파이어는 초야권이란 것을 만들어서-정말 기발한 생각 아닌가? 응?-곧 다른 남자의 것이 될 소녀의 순결을 빼앗고 그 피를 취한 후 남편 될 이에게 돌려주는 낙을 누리기도 했지...영토를 소유하지 못하고 외따로 떨어져 사는 이들은 길 가는 나그네를 현혹하여 근근이 생을 이어나갔고 말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자유로웠지. 그야말로 진정한 지배자의 삶이라고나 할까..."

 

 서사시를 읊는 것처럼 노래하듯 말하던 남자는 일순 향수어린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했다. 그 당시에 즐거운 추억거리라도 얽혀있는 것일까, 그윽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이 잠시 회상으로 흐려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자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지배자와의 협약은 협약을 맺었던 지배자들의 혈손이 끊기면서, 협약의 존재를 알고 있던 왕조가 교체되면서, 협약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지배자의 자리에 앉으면서, 그리고...일부, 지나치게 욕심껏 인간들의 피를 탐닉하는 데에 열을 올리던 몇몇의 행동이 도를 지나치게 되면서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게 되고 말았지. 그리고 마녀 사냥이 일어났어."

 

 바이올린의 현이 퉁 하고 끊어진 것처럼, 다소 이상한 음조로 남자의 말이 멎었다. 셜록은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남자의 표정은 '무(無)' 그 자체였다. 하긴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남자의 말에 따르면 적어도 중세 시대부터 살아와 인간의 감정과 표현이라곤 모조리 마모되어 생전의 기억을 의태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을 노괴물에게서 어떤 단서가 될 만한 표정이라도 얻어내려고 한 셜록의 생각 자체가 실수일는지도 모른다.
 잠깐의 정적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였던 혈족을 두 동강내었지. 어리석은 내분으로 제 힘을 깎아 내버리고 지쳐버린 뱀파이어들은 이제 가장무도회(masquerade)의 법칙에 따라 마치 범죄자라도 되는 양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인간으로 가장하여 삶을 영위해나가야만 했고. 인간에게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금지되는 것은 물론, 식사도 마음대로 하지 못해. 그나마 이전부터 자신의 영역을 유지해왔던 이들이야 사정이 나았지. 세력을 불리고 영역을 확장하고 그 안에서 인간들을 꼬드겨 피를 마시면 되었으니까. 그러나 자유로웠던 이들은 거지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어, 심지어 피를 마시지 못해 굶어죽는 일까지 생겼다네. 생각해 보게, 거지에게 돈을 적선하는 이야 있지만, 피를 적선하는 이는 없지 않은가..."

 

 애가(哀歌)조의 음성으로 말하던 남자는 약간 사무적인 어조로 바꾸어 이야기를 이었다.

 

 "그리고 이 가장무도회의 법칙에 의하면 뱀파이어가 다른 인간을 같은 혈족으로 만드는 행위, '포옹(embrace)'은 각 섹트(sect)의 엘더(elder)들이 허락하지 않는 한 금지된다네. 특히 현재 런던에 거주하는 뱀파이어들의 인구수는 과밀 상태이기 때문에 그 어떤 규칙보다도 더욱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지."

 

 마지막 문장의 동사는 과거형이었다. '있었지'를 은근히 힘주어 발음하며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눈웃음을 띠던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셜록의 어깨에 짚고 있던 한 손을 가볍게 들어 셜록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네가 나타난 거야."

 

 우울했던 기색은 간데 없고, 마이크로프트는 의뭉한 눈빛으로 셜록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은밀한 즐거움을 곱씹는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셜록을 바라보던 마이크로프트의 눈이 순간적으로 냉혹한 광채로 빛났다. 셜록이 그 안광과 마주한 것은 그야말로 아주 찰나간일 뿐이었지만 셜록은 이미 식어버린 자신의 몸이 더욱 차가워지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맹수가 자신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방금 막 알아챈 연약한 초식 동물이 바르르 떠는 것처럼 셜록의 검은 머리카락이 공중에서 미묘하게 움직였다.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상냥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까 이미 말했다시피 혈족을 늘리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는데, 그 이유인즉슨 이 이상으로 뱀파이어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우리들 간의 영역 다툼이 표면화될 뿐 아니라 원인 불명의 실종 사건의 증가로 인간들에게 정체가 발각되고 토벌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네. 그렇기에 각 섹트(sect)의 엘더들이 허락하지 않는 한 포옹당한 이는 발견 즉시 곧바로 사살되는 것이 원칙이야. 특히 자네처럼 포옹한 주체가 없는 경우를 카이티프(caitiff)라고 하며, 그들에게는 공식적인 척살령이 떨어지게 되지."

 

 여기까지 말한 그가 셜록에게 물었다.

 

 "지난 밤 자네를 쫓던 두 명이 기억나나?"

 

 셜록은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었다. 지난밤,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을 구하기 전의 자신은 두 남자에게 추격당하고 있었다. 이유 모를 현기증을 참으며 런던의 지도를 머리 속에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그때를 떠올리자 미약하게 표정이 구겨진 셜록은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생각이 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로프트가 그런 셜록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들은 스커지(scourge)라고 하는데 엘더들 중 도시의 우두머리인 프린스(prince)가 지니는 사적인 무력 집단일세. 간단히 말해 사병이지."
 "계속해서 그들에게 쫓겨다녀야 하는 건가?"

 

 내가 바라지도 않았던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이유로 말이야-라고 덧붙이려던 셜록은 그 말을 도로 삼켰다. 밤의 세계에서 군림하는 저들에게는 벌레의 투정 따위는 귀기울일 가치도 없을 터이니. 셜록이 염세주의자였다면 자신의 목숨 따위는 내버려도 상관이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셜록은 한심한 염세주의자 따위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한심하게도, 삶에서 어떤 즐거움이라도 찾아보려고 발버둥 치는 부류에 더욱 가까웠으니까.

 

 "여기에서 나간다면, 그렇겠지. 그러나 나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프린스의 권위로는 감히 너를 해할 수 없다."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의 물음에 매우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단언에 셜록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동안 두 남자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아 사위가 무척이나 고요해졌을 무렵, 셜록을 줄곧 바라보고 있던 마이크로프트가 문득 커튼이 쳐진 창문쪽을 바라보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커튼을 살짝 젖힌 그는 빛 한 점 없이 어두운 하늘, 그리고 그 가운데 외로이 홀로 빛을 발하는 반쪽 달을 올려다보더니 커튼을 완전히 좌우로 젖혔다. 반달이 내리비추는 빛이 방 안을 한 움큼 노란색으로 물들였다.

 

 "달..."

 

 셜록이 무의식 중에 중얼거렸다. 달빛은 창문 앞에 선 남자의 얼굴 한 켠도 아리땁게 물들였으나 남자는 금세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다시 방 안의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실내를 침범한 빛은 그러나 부드럽고도 조심스럽게 방 구석구석을 밝히어 셜록은 침침한 어둠 속에 가리어있던 방 안의 사물과 구조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셜록은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의 '영역'이란 건 어디까지지? 설마 이 방뿐인건 아니겠지."

 

 고의로 무례하게 대하려는 생각은 없었으나 셜록의 반골 기질은 지나치게 나긋하고 자상한 체 하는 남자의 태도를 용납하지 못했는지 저절로 비아냥대는 듯한 말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셜록의 질문을 들은 마이크로프트는 입에 배인 것과도 같이, 어떤 형상으로 치환되어 보이기까지 하는 모호한 미소를 띠고 셜록에게 말했다.

 

 "갓 태어난 카파도키안(cappadocian)이여, 식사나 하러 가세나."

 

 카파도키안?
 남자가 자신을 지칭한 명사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도 잠시, 셜록은 자신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온 몸을 안쪽에서부터 긁어내리며 피를 갈급하는 내부의 허기.
 어느새 남자는 자취 하나 없이 방 안에서 사라져 있었고, 밀폐된 공간인것만 같았던 방의 한쪽 편에는 살그머니 문이 열려 있었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한 제스처에 셜록은 이젠 '나를 먹어봐!'라는 케이크 한 조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상상하며 작게 실소를 흘리고는 잔잔한 달빛이 들어찬 방을 걸어나갔다.

 

*

 

 달빛을 반사하여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희뿌연 빛깔의 나무 껍질이 군데군데 벗겨져 반점이 어린 것마냥 보이는 측백나무의 잎사귀가 드리운 아래에 철제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 옆에는 남자가 셜록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땅에 길다랗고 곧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로 서있었다. 저 멀리로 바스락거리는 발자국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이 들렸다.

 

 "인간 시종 중에 하나일세."

 

 셜록은 흘끗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방 안에서 스스로 걷은 커튼 너머의 달빛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남자의 실루엣과 얼굴 윤곽은 지금에 와서는 더한 그림자에 파묻혀 표정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일말의 웃음기는 띠고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어둠이라는 장막의 힘을 빌려 추악한 괴물의 표정없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셜록으로서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셜록이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자 남자가 비로소 입을 열어 말했다.

 

 "앉게."

 

 그제서야 셜록은 테이블 위에 놓인 크리스탈 유리잔 두 개를 발견했다. 잔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그러나 셜록을 동하게 하는 향긋한 냄새로 인해 단번에 그 정체가 짐작이 가는-액체가 삼분지 이쯤 차 있었다. 남자의 짧은 말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과 동시에 그 액체-혈액에서 풍겨나오는 온기어린 비릿한 향이 셜록을 테이블 옆에 놓인 의자로 잡아끌었다.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에 실린 반향이 미약처럼 셜록의 오감을 어지럽히는 것에 저항하느라 셜록은 잔에 담긴 피가 아까 자리에서 벗어난 인간 시종의 피가 아닐지 의심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그러나 셜록은 다른 한 가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카파도키안이 뭐지?"

 

 흐느적거리며 의자에 몸을 걸칠 때만 해도 셜록을 무감하게 바라보던 마이크로프트였지만 정곡을 찌르는 셜록의 물음에 마이크로프트의 눈동자에 다시금 이채가 감돌았다.

 

 "자네가 속한 클랜의 이름-이라고 나는 짐작하고 있지. 아까 말한 노스페라투, 그리고 내가 속한 또레아도르(Toreador)처럼, 각 혈족(clan)은 각자의 이름과 고유한 자질을 지니고 있다네. 그 중에 하나가 카파도키안이고."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셜록이 말했다.

 

 "그렇다면 카파도키안, 이라는 클랜의 일원 가운데 하나가 나를 뱀파이어로 만든 것이겠군."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지...내가 짐작하는 바가 맞다면 자네를 포옹한 자를 찾는 것은 쉬울 수도 있고, 아니면 어려울 수도 있어."

 

 확신에 찬 듯 셜록을 카파도키안으로 정의한 남자의 말이 의외로 아리송한 구석을 띠자 셜록이 항의하려 입을 벌렸으나 이어진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셜록의 입은 다시 다물렸다.

 

 "내가 알기로 카파도키안 클랜은 멸절되어 그 권속이 남아있지 않거든."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내가 카파도키안이라는 것을 알지?"
 "과거에 직접 본 적이 있으니까."

 

 마이크로프트가 단언했다.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손톱 끝으로 테이블 철구조를 규칙적으로 두들기는 것에서 파생된 작은 마찰음이 그의 목소리 중간중간 끼어들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쇳소리의 음조를 즐기는 것인지 잠시 입을 열지 않고 있던 그는 짧게 덧붙였다.

 

 "단 한 명뿐이었지만."

 

 셜록이 눈빛으로 마이크로프트의 설명을 재촉하자 마이크로프트는 여전히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그들은 지금의 다른-자제할 줄 모르는-혈족들처럼 포옹을 남발하지 않았던 탓에 원래 그 수가 적었는데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종적을 감추고 말았어. 거의 몇 세기 간 모습이 드러났다고 알려진 적이 없으니 공식적으로는 절멸되었다고 선포되었지만...자네가 나타남으로서 상황이 달라진 것이네."
 "그 때문에 웃전에서 나를 제거하려는 건가 보군."
 "자네를 '게헨나의 시작'이라고 부르더군. 카파도키안을 본 적도 없는 애송이들이 나잇살 좀 먹었답시고 엘더 노릇을 하려고 드니 불필요한 소요가 발생하는 것이야."

 

 자못 불만스러운 듯 툴툴거리던 남자에게 셜록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그런 쪽으로 내게 관심이 있는 건가?"

 

 이 남자의 의도를 알 수 없다.
 오갈데 없는 자신을 어째서 거두어들이겠다는 것인지.
 '게헨나의 시작'이고 뭐고에는 셜록은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남들에게 휘둘리는 것이 딱 질색인 성미의 셜록은 이 남자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꿍꿍이가 있다면 목숨을 위협받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생각이었다.
 경계어린 눈초리로 남자를 쳐다보는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본 것인지 마이크로프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자네가 걱정하는 것과 같은 계교따윈 품고 있지 않다네."

 

 남자는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그저 내가 바라는 것은-자네가 내 곁에 머무르며, 수십 년간 나를 좀먹어왔던 무료함을 조금이나마 쫓아주길 소망하는 것, 그뿐일세. 이만하면 계략이랄 것도 없지 않나?"

 

 차분하게 미소지으며 말하는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던 셜록은 묘하게 안정되는 기분을 느끼고 찌푸렸던 미간을 풀었다. 알 수 없는 남자의 속마음을 알아내려고 지나치게 머리를 쓴 탓인지 약간의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고개를 떨군 셜록의 눈에 잔에 담긴 붉은 액체의 표면에 떠오른 반달의 뭉개진 모양이 빛무리처럼 떠올랐다. 바알간 색으로 이지러진 반달을 한참을 바라보던 셜록이 문득 입을 열었다.

 

 "왜 나를 이렇게 만든 이는, 나를 죽게 내버려둔 것일까."

 

 마이크로프트를 향한 질문은 그만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셜록 자신을 향한 질문이기도 했다. 피를 빨린 것을 둘째치고 자신을 이렇게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든 주제에 책임감이라곤 없이 내팽개쳐 죽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것이 셜록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존재가 부정당하고 버림받은 고통.
 그의 목소리에 담긴 공허감을 읽은 것인지 마이크로프트가 그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절대 너를 버리지 않는다."

 

 남자가 우아한 발음으로 다정한 목소리를 내어 셜록에게 말했다.

 

 "네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 되어주지. 아버지를 원한다면 아버지가 되어주고, 연인을 원한다면 연인이 되어줄 것이며, 스승을 원한다면 미력하나마 스승 노릇을 해줄 것이다."

 

 셜록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셜록 홈즈, 네겐 형제가 있나?"

 

 마이크로프트의 질문에 셜록이 고개를 저어 답했다. 셜록을 보며 마이크로프트는 만족한 기색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네겐 있어본 적이 없었던 네 형이 되어주마. 보다시피, 이 세상은 고독한 뱀파이어로 살아가기엔 너무나 적막하거든..."

 

 감상적으로 말끝을 흐린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의 손에 피가 담긴 크리스털 잔 하나를 쥐어주고, 그 자신도 남은 잔 하나를 든 후 말했다.

 

 "이 밤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의 밤을 위해 건배."

 

 두 뱀파이어의 입술을 미지근한 피가 적셨다. 그들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적색의 달(crimson moon)이 흘러들어갔다.

 

  

 

 

*한 도시의 지배자인 혈족을 프린스(Prince)라고 한다. 대개 엘더 중에서 영향력의 정점에 서 있는 자가 맡으며, 킨드레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전통을 수호하기 위한 각종 권리를 갖고 있다.
              -도시의 구성원들에게 사냥터를 분배한다. 뱀파이어에게 있어 먹고 사는 중요한 문제.
              -뱀파이어들의 중립지대이자 정치의 장인 엘리시움을 열고 닫는 권리.
              -대부가 새 자식을 갖도록 허락하는 권리. 뱀파이어는 포식자이기 때문에 인간 인구에 맞춰서 숫자가 제약되어야 한다.
              -가장무도회의 전통을 깨트린 자에 대한 처벌.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 피의 사냥(Blood Hunt)을 선포.
              -각종 중재.

 

*Caitiff. 정상적인 클랜이나 블러드라인 소속의 대부가 포옹했으나, 클랜의 특질을 결정짓는 요소가 전달되지 않았던지 부족하게 만들어지는 등의 기타 이유로 무언가 잘못되어 클랜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진 자를 카이티프라고 한다. 이들은 뱀파이어이기는 하지만 클랜의 아무런 특징도 갖지 못하므로, 클랜의 약점도 없고 클랜 디시플린도 얻지 못하며 정상적인 혈족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정상적인 대부라면 자신의 책임을 다해 자식을 지켜볼테니 카이티프는 없는 존재이거나 만들어지더라도 대부의 손에 금새 처리되어야 마땅하지만… 카마릴라 내에서도 종종 엘더의 허락없이 막무가내로 포옹해놓고 버려놓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카이티프가 만들어져서 노숙자처럼 연명하는 경우가 가끔 있으며, 프린스는 카이티프가 발견되면 스커지를 보내서 청소해버린다.

 대체적으로 온갖 편견을 받으면서 물흐리는 사생아 집단으로 취급하며 극단적인 경우 멸망의 전조라고 여겨져 죽이기까지 한다.

 

*Toreador. 토레아도는 예술과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는 예술가이자 비평가이며, 사교의 달인으로 정치계의 꽃이다. 예술과 아름다운 것을 보면 도취되어 꼼짝도 못하게 된다.

 

*Cappadocian. 죽음과 영혼에 대해 연구하던 금욕적인 클랜이었으나, 아우구스투스 죠반니의 쿠데타에 의해 절멸했다. 보통의 뱀파이어에 비해 외모가 훨씬 시체스럽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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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