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그럼 이만 마치도록 합시다.”

 

 청진기를 갈무리하며 존이 말했다. 그 말에 레스트레이드는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슬쩍 존의 눈치를 살폈다. 레스트레이드가 이편을 연거푸 흘깃거리는 것을 알아차린 존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원하시는 대로 철분제 처방은 해드리죠. 하지만 과다복용은 좋지 않다는 점 유념하세요.”
 “감사합니다, 닥터 왓슨.”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렉 레스트레이드를 존은 몰래 염려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항상 지나치게 건강에 신경을 쓰는 이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위가 혹시라도 심기증의 초기 증상을 약하게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작은 의심에서 비롯된 걱정이었다. 하지만 반백으로 머리가 희끗희끗해져가는 중년의 남자가 스스로의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하지 못한 일일 터였다. 마음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작은 의심을-아직은-굳이 지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존은 적당한 인사치레를 마치고 경위의 방을 나섰다.
 진찰을 끝내고 왕진비를 받고 돌아가는 존의 눈이 언뜻 무의식적으로 레스트레이드의 책상으로 향했다. 어지럽게 서류가 쌓여있는 사이로 청동 잉크스탠드가 보였다. 경위의 방이 전형적인 헤플화이트 양식으로 화려한 곡선미의 가구가 놓인 훌륭하고 중후한 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직선적이고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모양의 잉크스탠드는 조금은 의외로 보이는 집기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존이 나가다 말고 그것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레스트레이드가 웃으며 말했다.

 

 “썩 어울리진 않지요? 선물로 받은 것이라서 말입니다.”

 

 겸연쩍어하는 듯한 그의 말에 존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요, 멋진데요.”

 

 그렇게 말하는 존의 시선은 이제 잉크스탠드 아래에 짓눌려 있는 어떤 편지봉투로 옮겨가 있었다. 익숙한 보라색의 편지봉투는 어디선가 분명히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하고 곰곰이 생각하며 기억을 더듬는데 레스트레이드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우회적인 축객령에 존은 멋쩍어하며 손에 든 왕진 가방의 손잡이를 고쳐 쥐고 방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원래는 조금 더 나중이었던 오늘의 진료 시간을 앞당긴 것도 이 뒤에 있을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라고 전해 들었었지. 사정을 알 만큼 알면서도 빠릿하게 행동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하긴 그 자신도 느긋하게 환자의 책상이나 훔쳐보고 있을 계제는 못되었다. 며칠 전 홈즈 저택에서의 연회 초대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홈즈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와서 존이 나름대로 조사를 한 결과 홈즈 저택은 템플 가든처럼 명랑한 이름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처럼 엄숙한 위명도 지니지 못했으나 다른 의미로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가문의 수완 덕분이었다. 홈즈 가문 특유의 은둔적인 성향과 대대로 작위를 물려받아온 세습 귀족들로서는 썩 달갑게만 여기지 않을법한 그들의 오만한 양태, 그리고 현재 당주인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병적으로 폐쇄적인 기질에도 불구하고 홈즈 가문은 영국을 움직이는 세력가들을 중재하는 의미로서의-이를테면, 가교 역할로 상류사회에서의 은근한 존재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서섹스에서 일가가 런던으로 이주한 지 근 백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신흥 젠트리 가문으로서 그만한 명성을 떨친다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매년 늦봄과 초여름의 경계에 한정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초대장이 돌아간다는 홈즈 가문의 연회는 간단히 말하자면 잠시도 쉬지 않고 요동치는 런던 사교계의 지각 변동과 함께 앞으로 성장 주가가 높은 우량주는 누구이며 누구에게 줄을 대어야 유리한지에 대한 정보를 한눈에 보여주는 지표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속사정을 아는 존 왓슨으로서는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초대받은 가문의 위력에 대한 간접적인 증명임과 동시에 어느 누구도 섣불리 초대를 거절하지 못한다는 대단한 연회가 열리는 날짜는 바로 오늘로, 존의 숙소로 마이크로프트가 마차를 보내주기로 했기 때문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집으로 가서 참석할 채비를 해야 했다.
 그런 닥터 왓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경위는 항상 의기소침해보였던 의사 선생이 오늘따라 들떠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느 때와는 다른 밝은 기색과 경쾌한 걸음걸이에 고개를 갸웃 하고 멀어지는 존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레스트레이드는 곧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도 연회에 갈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레스트레이드 또한 존과 마찬가지로 오랜만의 사교 행사에 초대받아 흥분했다는 것을 자각하지는 못한 채였다.
 그리고 그들의 육감이 전해준 미묘한 경고-심상치 않은 일치감을 무시한 결과, 잠시 후 그들은 몹시도 어색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됨은 물론이다.

 

*   *   *

 

 어색하게 침묵을 지키던 두 사람 중 존이 먼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레스트레이드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쳤다.

 

 “저도 그렇습니다.”

 

 상투적인 인사를 주고받던 그들은 곧이어 입을 다시 다물었다. 의사와 환자의 사무적인 관계로만 서로를 인식하고 있던 두 사람에게는 지금의 예기치 못한 상황에 어찌 대처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둘을 잇는 것이 다른 연결고리도 아니고 무려 홈즈 가문이었다는 것 때문에 더욱 그랬다.
 존이 마차가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계단에서 내려왔을 때는 아직 가로등 불빛이 켜질 시각은 아니었다. 셜록과 만나고 나서부터는 절름거리는 정도가 덜했지만 그래도 지팡이를 놓고 다니기에는 아직 불안한 감이 있었기 때문에 전용 케인을 챙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인 것이 조금 시간을 잡아먹었다. 약간 숨이 거칠어진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존은 현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일반적인 연회는 정오 무렵에 시작하여 해가 지기 전에 마무리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홈즈 가의 연회는 가문 특유의 반골 기질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특이하게도 저녁 무렵에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지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덕 슈트를 걸치려던 존은 고민 끝에 클래식한 이브닝 슈트를 입기로 마음먹었고 건물 입구의 계단참에 잠시 서서 짙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진 거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지팡이 끝을 보도에 뭉개며 마차에 올라탄 존은 그와 마찬가지로 정석적인 검정 턱시도를 빼입은 레스트레이드와 마주치게 되었고 잠시 입을 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둘은 마부의 재촉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움직일 수 있었다.
 이것이 두 성인 남자가 같은 마차에 앉아서 수줍음을 타는 영애들 마냥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얌전히 앉아 있게 된 사태의 전모였다.

 

 “아까 본 편지 말입니다.”

 

 존이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보랏빛 편지봉투를 꺼내어 보이며 웃어보였다.

 

 “어쩐지 눈에 익은 것이다 싶더니 역시나였군요.”

 

 존의 손에 들린 편지봉투의 겉면에 쓰인 마이크로프트의 필적을 본 레스트레이드가 깜짝 놀라며 자신의 것도 꺼내들며 말했다.

 

 “아까 이상하게 유심히 살펴보신다 싶었습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전혀요.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존이 과감하게 대화의 물꼬를 텄으니 이어나가는 것은 레스트레이드의 몫이었다.

 

 “어느 쪽과 면식이 있으신 것인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저는 그러니까 동생 쪽과…주인분도 만나는 뵈었습니다만 친분이라고 할 만한 것은 딱히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존이 물어왔다.

 

 “경위님께서는?”
 “아, 그러니까 저는 형님 쪽과 어릴 적부터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대단하군요.”

 

 솔직하게 감탄하는 존의 말에 레스트레이드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야 고작 일개 경위일 뿐이고, 어렸을 적의 인연에 기대어 가외로 초대받는 처지인걸요.”
 “그렇다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한 존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형님분의 성정은 동생 쪽보다는 한결 온화하지만 어딘지 더욱 까다로운 면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 분과 오래 친분을 유지했다는 것 자체가 제겐 굉장하게 느껴지는걸요.”

 

 마이크로프트의 음흉한 성미를 은근하게 표현하는 말에 속이 시원해진 레스트레이드는 절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존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지요. 맞습니다. 그 말이 정확하군요.”

 

 그렇게 두 사람이 홈즈 형제의 괴팍스럽기 그지없는 성정에 대해 은밀하게 토로하며 공범으로서의 공감대를 쌓아가는 동안 마차는 열심히 움직여 홈즈 저택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가 흡혈귀의 마차가 아니랄까봐 햇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올 틈새도 없이 내려진 채로 꽉 닫혀 있는 덧창을 보고 후후 웃던 레스트레이드가 존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물어보았다.

 

 “덧창을 올릴까요?”

 

 일종의 스무고개의 질문인 셈이었다. 존이 홈즈 저택의 비밀을 알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동요하는 기미가 비치겠지 싶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존도 레스트레이드가 무슨 의미에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인지 이해한 듯 살짝 표정을 굳히다가 금방 덧창을 올려도 좋다고 대답했다.
 덧창을 올리자 저녁놀빛을 받아 반짝이는 광대한 녹색 들판이 시야를 꽉 채웠다. 인적이 드문 풍경을 따라가다 보니 건물들의 자취는 점점 줄어들었고, 퇴색한 황혼과 서늘해지는 오후의 공기가 그들의 얼굴을 시원하게 때렸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지평선 위로 암담한 실루엣을 형성하고 있는 숲을 제외하면 밋밋하기만 한 풍경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나름의 정취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편에는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이 보였고, 위로 뾰족뾰족한 윤곽을 그리는 어두운 회색 숲 위로는 타는 듯 짙은 자줏빛 구름이 모여들었다. 붉게 빛나는 환한 햇살 아래에서는 늘 그렇듯 풍경의 색채는 빛과 어둠의 대비와 그로 인한 경계가 서로를 잠식하려는 듯 어두운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일몰의 마지막 빛은 녹지의 모퉁이에 아직 머무른 채로, 구불거리며 펼쳐지는 오솔길,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자리한 고저택을 그림처럼 아름답게 물들였다.
 그 광경을 멍하니 응시하던 존이 중얼거렸다.

 

 “홈즈 저택은, 이상하게도 말입니다, 늪이나 모래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자신마저도, 서서히 침몰하는 유사(流砂) 속으로 푹 꺼져 들어갈 것만 같았다.
 몇 개월 전의 기억이 빗물처럼 존의 머릿속으로 다시금 스며들어왔다. 저택 안의 어두운 회랑을 서성이며 음산하고 불길한 색채의 그림들이 그를 내려다보는 가운데 캄캄한 복도를 헤매었던 기억. 아니, 그 이전이다. 비밀스러운 광채를 품은 강철 같은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했을 때의 기억. 그 눈이 새파랗게 빛나며 자신의 영혼 깊숙이까지 사로잡았을 때의 기억. 분명 그때부터 중세의 지하 감옥 같은 저택의 그림자가 그에게로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존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존재를 무언의 형식으로 설명한 까닭과, 정체를 드러낼수록 더욱 두려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을 그에게 한 까닭을. 아무리 알맹이를 덮고 있는 겉껍데기를 벗겨낸다 할지라도 그것의 궁극적인 정체인, 이성의 인지 범주를 벗어난 공포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

  저택의 구관 정문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니 불이 드문드문 켜진 저택과 연못이며 분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레스트레이드는 그런 것들에 오래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볼거리가 있었다기보다는,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마이크로프트와 잠깐이라도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 복잡한 저택의 구조에 익숙하지 않을 존을 혼자 남겨두는 것에 대한 걱정이 들었으나 그 걱정은 다행히도 오래가지 않았다. 평소와는 영 다르게 품위 있는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존을 기다리던 셜록이 그와 존이 정문의 노커를 두드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참을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존을 낚아채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대놓고 레스트레이드를 무시한 채 마치 존과 단둘이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은근한 목소리로 그에게만 말을 걸었고, 깔끔한 암회색 장갑을 낀 셜록의 손에 붙들려가는 존은 약간 놀란 것 같았지만 기분나빠하는 기색은 없었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며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레스트레이드는 곧 몸을 돌려 옆쪽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고용인들이 닦아내고 거미줄을 걷어내어도 결국엔 방치되고 다시 지저분해지기 일쑤이던 계단은 밤새 묵을 손님들을 위해서인지 드물게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묵은 먼지를 벗겨내느라 깨나 고생했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2층에 일렬로 마련된 손님방을 지나쳐 3층으로 향했다.
 역시나 빈틈없이 꾸며진 복도를 조용히 걸어 마이크로프트의 개인실 앞에 도착한 레스트레이드가 문을 두드렸으나 웬일인지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발길을 돌릴까 망설이던 레스트레이드의 속에서 가끔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라는 대담한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저 안에 들어가서 그가 돌아오길 기다릴 참이었으니까 그다지 결례를 끼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 결심을 굳히자 몰래 나쁜 짓을 저지르는 쾌감 같은 것이 느껴져 레스트레이드는 오랜만에 소년같이 맑은 웃음을 지었다.
 심호흡을 하고 방문을 열자 우아하고 단정하게 꾸며진 다실이 보였다. 열린 커튼 틈으로 저녁 햇살이 가득 들어와 방 안을 오렌지색으로 밝혔고, 기다란 프랑스풍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나무는 잎사귀마다 녹색 빛이 스며들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다실에서 오른쪽의 커다란 문을 열면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적합한 응접실이 있고, 반대편으로 가면 의상실과 침실이 있다는 것을 레스트레이드는 잘 알았다. 하지만 주인 없는 방에 몰래 들어오는 것 이상의 일을 범하고 싶지는 않았던 레스트레이드는 다실 한가운데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앉는 것으로 만족했다.
 벨벳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고 차분한 색상의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화풍의 정물화의 둘레를 장식하는 금빛 액자 위로는 흐릿한 빛깔의 베일이 늘어져 있었다. 몇 번이고 본 그림이었기 때문에 거의 사물의 배치를 외울 지경이었지만 다실의 주인의 고집스러운 취향은 몇 년 동안이나 한결같았기 때문에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가 지평선으로 서서히 기울며 다실에 드리운 침묵과 어둠은 차차 깊어갔고, 모든 소리를 잠재운 듯한 고요함 속에서 레스트레이드는 인내심을 가지고 한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한가로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어느샌가 침실 쪽에서 바닥 판자가 작게 삐그덕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라일락 화장수의 향기가 다실로 느리게 스며들고 있다고 느낄 즈음에 문이 열리며 마이크로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이런 풍의 은백색 타이를 맨 그는 꼼꼼하게 다려진 실크 양복의 라펠을 살며시 매만지며 레스트레이드를 향해 다가왔고 경위는 다소간의 딱딱한 예의를 갖추며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그런 그를 향해 자리에 앉아도 좋다는 손짓을 하며 마이크로프트가 농담조로 말했다.


 “살금살금 들어와서 날 놀라게 하다니, 많이 늘었군요?”


 그렇게 말하는 마이크로프트의 어조는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졸음의 여운으로 나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열린 왼쪽 창문으로부터 막 지는 석양빛이 새어들어오고 있는 참이었고 그건 뱀파이어인 그에게 있어서 기상시간을 상당히 일찍 앞당긴 셈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있으면 손님들이 오실 테니 그걸 감안해서 조금 미리 찾아뵈었습니다.”


 레스트레이드가 말하자 마이크로프트가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헤아려주어서 고마워요, 그렉.”


 친밀한 호칭에 레스트레이드의 양볼이 언제나 그랬듯이 미미한 홍조를 띠었다. 그런 레스트레이드를 마이크로프트가 부드럽게 끌어당겨 이마에 입술을 살짝 대었다가 떼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옷맵시가 흐트러질까 두려워 얼른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마이크로프트가 은근하게 힘을 주어 그를 놓지 않는 것에 순순히 그가 강제하는 대로 가만히 동작을 멈추었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춘다. 서로를 향한 그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는 것처럼 달콤하고 안타까운 포옹은 달아오른 용광로에서 날리는 불티처럼 밝게 날아들던 해가 완전히 지고 방 안에 우울한 그림자만이 드리워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창밖으로 마차가 하나둘씩 도착해서 말발굽이 제자리를 두들기며 다그닥거리는 소리와 남녀가 쌍쌍이 흥분한 목소리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마이크로프트는 겨우 레스트레이드를 놓아주었다.
 못내 아쉽다는 듯이 입꼬리를 미묘하게 일그러뜨리던 마이크로프트가 나직이 말했다.


 “오늘은 저들뿐 아니라 조금 더 특별한 손님도 올 예정이랍니다.”


 마이크로프트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레스트레이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여자’인가 보군요.”
 “그래요. 서신으로 미리 각별한 주의를 주긴 했지만, 막상 도착해서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모르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몽마와 흡혈귀의 혼혈이니만큼 성격이 무척이나 제멋대로거든요, 라고 덧붙이며 그는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제야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의 안색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붉은 노을빛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눈을 날카롭게 빛내는 마이크로프트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올려다보던 레스트레이드의 얼굴에도 한 줄기 고통의 경련이 스쳤다. 레스트레이드의 시선을 감지한 마이크로프트는 평소와 같이 여유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꼭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를 바라보는 어머니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군요.”
 “그야, 걱정하고 있는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곧바로 이어진 레스트레이드의 대답에 마이크로프트의 창백했던 안색에 어렴풋한 핏기가 돌았다. 너무도 예절바르고 몸가짐이 바른 나머지 종종 그를 애타게 만드는 그의 연인은 때로는 이다지도 직설적으로 감정을 피력함으로써 그의 미묘한 정념의 구조를 자극하여 황홀하게 만드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비록 그 자신은 조금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욱 사랑스러웠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를 침대에 끌고 들어가 무자비하게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마이크로프트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난폭하게 들고일어나는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차분하게 한숨을 쉬며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그럼, 아래에서.”


 레스트레이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창문으로 스민 밤바람에 감긴 머리카락이 천천히, 꼭 살아있는 것처럼 흔들렸다.

 

*   *   *

 

 60피트쯤 되는 길이에 연한 베이지 색깔의 나무로 벽을 댄 실내의 정가운데에서 3단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 높은 원형의 천장에 가까운 높이에서부터 길고 가느다란 창문이 십자 모양으로 달려 있었다. 안팎으로 스며들고 흘러나오는 호박색 불빛 속에서 하인들이 천천히 원탁 주위를 돌면서 손님들의 와인잔을 채우고 음식을 덜어주었다.
 테이블 주변에 모여 속닥이는 사람들의 말소리, 낮아졌다 높아지기를 반복하는 웃음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등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홀의 네 외곽에 놓인 전축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가 잔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에 섞여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은 점잖으면서도 화려함이 돋보이는 옷을 입었고 하나같이 취한 것처럼 흥분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현란한 불빛 아래에서는 사람들의 얼굴도, 단단한 가죽 소파와 벽의 군데군데를 메우고 있는 책장도 오래되어 나긋이 닳은 것처럼 보였다. 곳곳에 적절한 배치로 놓인 램프와 등롱에서 발산되는 밝은 불빛과 그것을 반사하여 증폭시키는 빅토리아 초기 양식의 색유리들이 아니었더라면 꽃이 풍성하게 꽂힌 창가의 화병은 말할 것도 없고 엠파이어 풍의 책상이며 번쩍번쩍 빛나는 벽난로 위의 금박 장식품들을 비롯해 녹색 공작석 테이블까지 온갖 유서 깊고 값비싼 장식품들이 하나같이 닳아빠지고 유행이 지난 물건들처럼 보였겠지만, 세밀한 조명의 안배로 인해 그것들은 낡았다기보다는 과거를 향한 은은한 향수가 감돌고 우아함이 서린 우울함을 내포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그러한 감상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라도 하듯 누군가가 속삭이듯 내뱉었다.


 “낡아빠졌군요Vieux jeu.”


 그러고서는 저희들끼리 키들거리며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웃음을 참으려고 서로를 쿡쿡 찌르고 야단인 것이다. 프랑스 사립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귀국한 오길비 백작가의 영애 오르탕스 양과 그녀의 친구 루드밀라 모라비아 공작 영애였다. 스포드 사의 정찬용 디저트 접시를 두고 한 농담치고는 원색적인 언사에 그녀들의 건너편에 앉은 오길비 백작 부인이 급히 나무랐지만 한창의 젊음이라는 특권을 누리며 한껏 들떠있는 그 나이 또래의 사춘기 소녀들의 행실을 단속하기에는 무리였다.
 마이크로프트를 제외하면 가장 상석에 앉은 윌리엄 하그리브스 경은 그것을 보며 눈살을 조금 찌푸렸지만, 홈즈 경의 표정이 조금도 변치 않는 것을 보며 그 자신도 조용히 품위를 지키는 편을 택했다. 부유한 신사의 가문의 자손이라는 것보다도 보수적인 정책을 고수하는 런던의 부시장으로 더욱 유명한 그로서는 철없는 암망아지처럼 날뛰는 계집아이들을 탐탁하게 여길 리 만무했지만 나이가 지긋한 그가 섣불리 스스로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은 더욱 안 될 말이었으므로.
 대신 그는 사교계 행사에는 진력이 난 노신사답게 다른 화제를 입에 올림으로써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노련한 기술을 발휘하는 재치를 부렸다.


 “이 케이크는 무척 맛있군요. 요전에 포츠머스에서 열린 선상 무도회에서 비슷한 것을 먹어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쪽에서는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의 풍미가 그것보다 훨씬 낫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소.”


 십 년 전만 해도 손님들로 하여금 찬사를 받았을 그의 매너-고상한 주인으로서 식탁을 주관하며 서비스를 베풀고,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가도록 돕는 따위의 기술은 이제는 슬프게도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는 낡은 관행에 불과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효력을 톡톡히 발휘했다. 그렇지 않아도 막 포크로 하그리브스 경이 가리킨 둥근 원통형의 케이크를 찍어 올리고 있던 델라폰테인 남작 부인이 거들기 시작한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바랭이던가요?”


 남작이 핀잔을 주었다.


 “바바 오 롬(럼주에 적신 스펀지케이크)이야, 이 사람아.”


 장난스럽게 질책하는 남편에게 부인이 과장스럽게 우는 소리를 내었다.


 “내가 요리사도 아닌데 사바랭인지 바바 오 롬인지 알아서 무엇하겠어요, 여보. 그런 사소한 것으로 트집을 잡다니.”


 남작 부처가 밀고 당기며 가벼운 말싸움으로 분위기를 돋우는 한편으로 테이블 끝 쪽에 앉은 에드윈 스톤은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틈을 타 프랑스식 완두콩 요리를 양껏 접시로 퍼담고 있었다. 그는 내달이면 인도로 발령나도록 결정된 외교관으로 정계에서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그 평가를 대변하듯 그는 최근에 살이 오르기 시작한 몸을 멋있게 맞춰 입은 양복으로 감싸고 비교적 일찍 흰머리가 생기기 시작한 머리를 깨끗이 넘기기가 예사여서 늘 헤어토닉 향기를 풍기고 다녔다. 옅은 금발에 조각 같은 미모로 유명한 그의 약혼녀 로자먼드 홀 양은 처녀 특유의 걱정스런 얼굴로 야채 스튜를 깨작거리다가 뒤늦게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식의 현장을 알아차리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시작한 논쟁이 격화되어 점차 언성이 높아지는 와중에 하그리브스 경의 비서 자격으로 자리에 참석한 야심찬 젊은이 체스터 그린 군은 두 남녀가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것을 약간의 비웃음을 담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멀쩡하게 잘 부푼 슈크림을 찔러 구멍을 내고 흘러나오는 크림으로 반짝반짝 윤이 나는 은접시를 더럽히는 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케이크로 시작된 대화의 주제는 워터하우스 로지로 옮겨갔다.


 “가본 적이 있나요, 왓슨 선생?”


 존이 상이군인이라는 것에 일차적인 호감을 보인 델라폰테인 남작이 그에게 호기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존은 입 안에 물고 있던 송아지 고기를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예, 멀리서 본 적은 있습니다만…….”
 “나중에는 꼭 내부를 구경해보도록 해요. 버드나무 무늬가 그려진 벽지가 그렇게나 멋스럽더군.”


 아까 경솔한 발언으로 테이블 위에 일대 소란을 일으킨 레이디 오길비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 저도 좀 끼워주세요. 저희들도 런던에 오기 전에 갔다 온 참이라고요.”


 그다지 얌전한 축에 끼지 않는 어린 숙녀임에는 분명했으나 수레국화처럼 파랗게 빛나는 커다란 눈을 빛내며 애교스럽게 눈웃음을 치는 데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 옆에 앉은 레이디 모라비아 또한 검은 눈을 깜박이며 이편을 바라보았다.
 둘은 똑같이 재단한 듯이 비슷한 시프트 드레스 위에 비단으로 만든 길고 넉넉한 카디건을 걸쳤는데 오길비 양 쪽이 자잘한 레이스로 풍성한 느낌을 더했다면 모라비아 양은 가냘픈 목에 길고 가는 목걸이를 여러 겹 겹쳐 걸어 단순한 미적 감수성을 극대화시켰다는 데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처럼 두 소녀는 동갑에 동문이라는 것 이외에는 거의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차이점이 많았다.
 일단 오길비 양은 자연스럽게 굽이치는 짙은 갈색에 금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둥글게 말아 올리고 보석이 박힌 상아 빗을 꽂고 나머지는 목 부근으로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어느 남자라도 한번쯤은 그 희고 통통한 손목을 쥐어보고 싶어 할 만큼 보기 좋은 몸매를 가진 생기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다. 반면 모라비아 양은 검은 머리를 단아하게 틀어 묶고 선이 또렷한 얼굴에 지적인 이목구비를 가진데다가 날씬하고 키가 큰 편이었다. 신사들이 으레 찬양하기 마련인 전형적인 연약한 숙녀의 생김새라고 하기에는 도도해 보이는 콧날에 절도 있는 분위기를 지닌 그녀는 친구인 오길비 양보다 성숙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좀더 귀족다운 위엄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두 소녀는 파리의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모라비아 공작가가 있는 비엔나와 독일의 비스바덴을 거쳐 수많은 도시를 바삐 돌아다니다가 런던으로 온 참이었기 때문에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다양한 화제를 꺼낼 수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질 뻔한 식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워터하우스 로지를 비롯해서 최근에 유행하는 코티지 양식에 대한 한 차례 토론이 지나간 후 드디어 홈즈 저택이 화제의 물망으로 올랐다.


 “일찍이 1890년대 무렵에 선친께서 이 집을 사셨죠. 그때만 해도 으리으리한 대저택이었습니다. 밸모럴 성을 연상시키는 외관이었다고 전해 들었을 정도이니까요.”


 있지도 않은 선친 운운 하며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마이크로프트를 웃음기 어린 눈으로 힐끗거리며 존과 레스트레이드는 한 차례 눈빛을 교환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마이크로프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대에 이르러 워낙 손이 귀해진지라 지금 홈즈 가문에는 저와 동생밖에 없지요.”
 “천만에요. 군식구가 딸려있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델라폰테인 남작 부인이 와인을 마시며 말했다. 그에 마이크로프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도 외진 저택이라 무료한 것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제 오랜 친우인 레스트레이드 경위가 종종 찾아와주곤 하죠. 최근에는 제 동생의 주치의인 왓슨 박사도 함께요.”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른 화제로 넘어가죠.”


 아까부터 신사 숙녀를 막론하고 존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을 달갑잖게 생각하면서도 꾹 참고 있던 셜록이 결국에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괴팍스럽기 그지없는 그 행동에 신사들은 깜짝 놀랐지만 숙녀들은 다른 측면으로 그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명문가의 젊고 잘생긴 신사가 아직까지 독신이라는 것은 모든 레이디들의 관심을 한 몸에 집중시키게 마련이다. 아무래도 개업의 존 왓슨 보다는 홈즈 가의 차남인 셜록 홈즈가 구미가 당기는 신랑감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존에게 쏠린 관심을 분산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뜻밖에도 그 관심이 온통 자신에게 쏠려버린 것을 눈치 챈 셜록이 작게 혀를 찼다.

 

*


 제아무리 날고 기는 셜록이라도 다섯 여자-수선스런 부인네들과 말괄량이 숙녀들 뿐 아니라 말석에 앉아 얌전빼고 있던 홀 양도 은근슬쩍 공세에 가담한 탓이었다-의 수다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결국 그도 이 애매하고 불편한 상황에 순응하여 숙녀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표면적인 노력이나마 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노력에 힘입어 정찬의 분위기는 완전히 무르익었다. 또한 신사들의 환담도 끊임없이 이어져 분위기는 순조롭게 고조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깥 하늘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칠흑처럼 검어졌고 사라진 일몰의 흔적 대신 연회장 곳곳에 놓인 복숭앗빛 갓을 씌운 등불이 홀 안을 속속들이 비추었다. 누군가 저택 바깥에서 이편을 바라보면 마치 저택의 창문들이 하나같이 기괴한 바로크 시대의 보석처럼 마구 빛을 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었다. 부끄럼을 타는 레이디의 뺨처럼 발그스름한 조명의 덕택인지, 밤이 깊어졌지만 내객들의 태도는 더한 열기를 띠면 띠었지 덜해지지는 않았다. 영롱한 조명이 석조 벽난로, 하얀 테이블 커버와 늘씬한 제비꼬리처럼 우아하게 빠진 정장의 옷깃, 벨벳 야회복으로 감싸인 여자들의 둥그스름한 어깨를 아른거리며 비추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저녁 식사는 거의 끝나가는 참이었다. 홀 양의 참견에도 불구하고 스톤 씨가 마지막까지 오믈렛 오 샹피뇽(버섯 오믈렛)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적거리다가 포크를 놓은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누구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처지고 느슨해지기 시작할 즈음 지루함으로 몸부림치던 오길비 양이 선봉장이 되어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과감하게 입을 열었다.

 

 “홈즈 경? 이제 이 다음 순서를 진행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녀가 대담하게 마이크로프트를 지목하자 마이크로프트는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응대했다.

 

 “혹시 그거 아십니까, 오길비 양?”

 “뭘 말이에요?”

 “열세 명이 모인 자리에서는 제일 먼저 자리를 뜬 사람이 죽는다는 미신 말입니다.”

 

 마이크로프트의 갑작스런 발언에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지자 물결이 이는 것처럼 식탁 주위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 사이에도 한 차례 동요가 일었다. 담담하지만 암시적으로 불길한 징조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어조에서 풍기는 위험에 존은 불안한 표정으로 마이크로프트를 쳐다보았다.

 

 “자, 그러면 모두들 몇 명인지 한 번 세어보도록 합시다.”

 

 물론 좌중의 인원은 더도 덜도 말고 딱 열세 명이었다.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섬뜩한 무언가가 짙게 묻어나오는 그의 말을 부인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그래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려 홀을 둘러보았고 마이크로프트의 말이 옳다는 것만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참다못한 델라폰테인 남작이 입을 열었다.

 

 “자, 홈즈 경. 내 아내는 마음이 약해 무서운 놀이라면 질색이라오. 게다가 어린 숙녀분들도 계시니 농은 그만하십시다.”

 

 남작의 온건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로프트는 고의적으로 소름끼치는 공기를 증폭시키려는 듯 담배를 쥔 손가락 끝에 힘을 단단히 주고 강렬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구식인 사람인지라 미신을 아주 신봉하는 편이지요.”

 

 뒤이은 말에 누구도 토를 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장내는 정적에 휩싸였다. 지금의 상황은 누군가의 지독한 악취미가 틀림없다고 모두들 생각했다. 하지만 마이크로프트는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이 그저 사람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아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담배를 고쳐 물었고,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 끝부분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허공을 떠돌아 모호한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을 악마처럼 보이게 했다.

 존은 반사적으로 셜록을 바라보았다. 셜록은 냉정한 국외자처럼 이 모든 소란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난 채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 셜록의 모습은 존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건 간에 셜록은 결코 이렇게 얌전히 앉아있는 성미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인내심이라는 것을 발휘하는 데에 능숙치 않다. 또한 쉴 새 없이-그의 말에 따르면 악의는 없는-독설을 주위에 퍼부어 상대방의 계략이 무엇이든 여지없이 깨뜨려버리고는 금세 싫증을 내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셜록은 확실히 이상했다. 그것이 적지 않게 존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다음 순간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자 그럼,”

 

 그는 입술 사이로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놓고 술잔 손잡이를 빙글 돌렸다. 잔 안에 담겨 있던 노르스름한 샴페인이 샹들리에에서 떨어지는 빛무리를 반사했다. 손가락에 나란히 끼워져 있던 그리스 양식을 본뜬 묵직한 은반지도 그의 가슴 언저리에서 번쩍 빛났다.

 

 “미스 아이린 애들러와 미르칼라 폰 카른슈타인 여백작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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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