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인/레드존제인

 

 

 침실 안으로 들어간 조는 일단 이물질이 묻었다고 의심되는 침대 위의 시트며 이불을 싹 다 걷어서 빨래 통에 던져 넣었다. 세탁실을 나오며 벽에 걸린 시계를 문득 보는데 열한 시가 조금 넘었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모닝섹스를 한 셈이다. 첫 섹스는 좀 더 은밀한 저녁나절에 좋은 분위기 속에서 하고 싶었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까 전의 섹스를 돌이켜보았다.
 ...조는 제인에게 아주 짐승처럼 박아댄 자신을 떠올리고는 약간 안색이 붉어졌다. 남자가 자신의 뒤를 여는 모습이 역겨울 법도 한데 그 남자가 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엉덩이에 서슴없이 달라붙어 자신의 성기를 넣고 흔들다니. 게다가 마지막에는 제인의 안에 그냥 사정해버리지 않았는가.
 조가 다시 불끈거리려는 아들을 진정시키고 거실로 가자 제인이 맨몸에 시트를 두른 채 조를 향해 웃고 있다. 그 모습이 또 섹시하면서도 귀엽다. 수그러들락말락하던 아들이 다시 서버릴 것만 같은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제인이 시트 속에 파묻힌 채로 조를 향해 손을 내밀고 이리로 오라는 듯 까딱까딱 해댄다.
 조가 순순히 자기한테 오자 이제는 자기 옆에 앉으라는 듯 소파를 팡팡 친다. 조가 앉자 제인이 조의 팔뚝에 달라붙어 그의 단단한 근육을 살살 만지는 느낌이 부드럽다.

 

 "뭐라도 좀 먹어야지 않겠습니까?"

 

 조가 말하자 제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근데 어제부터 나한테 자꾸 뭘 먹이려는 거 같은데, 날 살찌워서 잡아먹으려고?"

 

 조가 말했다.

 

 "제인은 병원에 입원한 후부터 영 먹질 못했어요. 거울을 보면 알겠지만 살이 눈에 띄게 빠졌습니다."

 

 그렇구나...라고 제인이 멍하게 대꾸했다.

 

 조는 격한 섹스의 후유증으로 좀처럼 움직이질 못하는 제인을 욕실로 데려다 주었다. 제인은 엉덩이에서 흘러내리는 정액을 빼내면서 다음부터는 꼭 콘돔을 지참한 채로 섹스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조 바닥에 앉아서 뜨거운 물로 한참동안 목욕을 한 후에야 제인은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지만 간신히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욕조 가장자리, 수건걸이, 세면대를 차례로 잡고 겨우 똑바로 일어선 제인은 조가 말한 대로 자신이 정말 살이 빠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거울을 바라보았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턱살이 조금 얇아진 것 같기는 했다. 이런 정도의 변화를 알아채다니 조는 역시 예리한 관찰력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불규칙한 식습관에도 좀처럼 줄지 않던 몸무게가 줄었다니,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한 것인지 감이 조금 잡히는 듯 했다.
 어제 제인은 오랜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차만 줄창 마셔대며 수첩에 글씨를 끼적이며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과연 어떤 지뢰가 숨어 있을지 추론했다. 성과는 미미했지만 일단 조가 흘린 말에서 레드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알았으니 다소 범위를 좁힐 수는 있었다.
 그가 골머리를 썩이며 그가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 본 결과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신나게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주립병원에서 자신이 깨어났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높은 것은 납치. 상식적으로 그런 붐비는 장소에서, 그것도 CBI건물 바로 앞에서 CBI소속 수사 고문을 납치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었지만, 레드존은 CBI 수사본부에도 첩자를 두어서 한 팀 전원을 죽여 버린 전적도 있었던 터라 배제하기 어려운 선택지였다.
 또한 웬만한 정신적 충격은 거의 흘려버릴 수 있는 자신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릴 정도였으니, 그동안 어떤 형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종의 학대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단순한 육체적 학대라면 리스본이 그에게 말하기 꺼려할 까닭이 없으니, 생각하기도 싫지만 섹슈얼 하라스먼트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으니, 섣불리 단정 짓지는 않기로 했다.
 제인은 그 다음으로, 조에 관해 생각했다. 섹스는 만족스러웠고, 조가 겉으로는 냉정하지만 사실은 배려심있고 관계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남자라는 것을 제인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조에게도 자신은 레드존 문제에 대해서 조에게 털어놓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조는 자신을 제 옆에 가두기보다는, 자신이 레드존의 희미한 흔적을 쫓아가는 것에 필사적으로 따라올 것이다. 마치 같은 노선 상에서 운행하는 열차처럼. 차이점은 자신은 폭주하는 급행열차라는 것이고, 조는 일반 열차라는 것이다. 영원히 같은 곳을 보고 달리나 결코 합치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조 또한 상처받는다. 레드존에 의해서든, 아니면 자신의 방치에 의해서든.
 그렇다면 조와 사귀겠다는 결정을 내린 자체가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너무 오랜만에 맛보는 따스한 포옹에 취해서, 다신은 정말로 끔찍하게 살해당한 가족마저 망각해버린 걸까? 지금도 코 끝에는 사건이 발생한 당일, 불안하고 초조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니겠지 아니겠지 아닐거야 그럴 리 없어 라고 눈 앞에 보이는 그 모든 것과 자신이 항상 신뢰해왔던 직감을 깡그리 무시하고 스스로에게 잘못된 세뇌를 하며 문을 열었을 때 훅 끼쳐왔던 진한 피비린내의 환각이 느껴진다. 저도 모르게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그것이 거짓 감각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안도감을 느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릎이 꺾여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은 이 무거운 죄책감은 자신과 레드존 사이의 일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될 때까지 천로역정의 순례자처럼 감내하며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일 것이다. 다만 행선지가 천국이 아닌 지옥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 여정에서 제인에게 부여된 이 십자가는 온전히 자신만의 것,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고독을 벗 삼아 그 무게를 인 채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가는 것이 오직 자신만이 상처받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조를 위해서야, 라고 제인은 되뇌었다.
 맨몸으로 욕실 안에서 너무 오래 서있었던 제인은 조그맣게 기침을 하고 살짝 떨리는 몸을 큰 수건으로 닦고는 조가 어느 새인가 문 안쪽으로 갖다 준 속옷과 바지, 와이셔츠를 걸쳤다. 다시 한 번 거울을 보며 방긋 웃어 보인 후 욕실을 나갔다.

 

 조는 제인이 길고 긴 시간 목욕을 하는 동안 조는 어제 제인이 한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제인에게 키스를 했다는 사실. 여기서 제인이 거짓말을 지어낼 이유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조에게는 전혀 그랬던 기억이 없다. 그 날 술에 어지간히 취했음이 분명하다.
 그의 생각은 혹시라도, 자신이 제인에게 레드존에 관한 뭔가를 실수로 말해버리지 않았을까 라는 쪽으로 흘러갔다. 아니길 바랐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인은 술자리가 있었던 다음날 곧바로 리스본에게 찾아갔다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돌아온 후 수첩과 노트를 챙겨나갔으며, 그리고 새벽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었다.
 조는 욕실 쪽을 힐끗 보았다. 욕실에서는 여전히 물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조는 소파 앞 탁자에 놓인 제인의 양복 재킷 안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집어넣었다. 수첩이 손에 잡혔다. 조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욕실 쪽의 동태를 살피고는 수첩을 꺼내어 빠르게 넘겨보았다. 어지럽게 여러 단어가 적힌 중간 중간에 생각의 전개 구조로 보이는 듯 한 화살표가 죽죽 그어져있었고, 맨 마지막으로 글씨가 적힌 페이지에는 펜으로 세게 내리눌러 엉망으로 무언가를 덮어버린 것이 보였다. 조는 뒷면을 천장 전등에 비춰보았다. 워낙 짙게 덮어버려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집중하여 자세히 보자 'sexual'이라고 고민하여 적은 것이 보였다. 직전 장에는 'harassment' 'violence'등이 적힌 것으로 미루어보아, 제인은 기억은 아직 되찾지 못했지만 추론 상으로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이 분명했다.
 조는 제인이 욕실을 나오기 전 원래 꽂혀있던 방향으로 수첩을 다시 양복 안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제인은 아직도 안에서 목욕을 하는 중이다. 적어도 들려오기에는 그랬다. 조는 제인이 샤워를 마친 후에 함께 식사를 하러 가기로 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옷을 챙겨 입었다.
 소파에 앉아 제인이 나오길 기다리며 조는 생각했다. 제인은 자신이 알아낸 결과를 결코 조와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나마 그가 무언가를 함께 공유하는 것은 리스본이 유일했다. 그러나 레드존에 관해서는 별개다. 또한 이 정도의 사안임에야, 당연히 조에게도, 그리고 리스본에게도 털어놓을 리 만무했다. 조는 제인을 사랑하고, 제인을 아끼며, 제인이 위험하다면 무엇이건 무릅쓰고 그에게로 달려가서 그를 상처 입히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막으려고 힘쓸 것이다. 또한 이번처럼 제인에게 이상이 생기더라도 자신이 버텨낼 수 있는 한 그의 곁에서 자리할 것이다. 그러나 제인의 일 순위는 언제가 되었든 레드존일 것이다. 레드존이 모습을 드러내면 피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언제든지 그의 뒤를 쫓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것이다.
 그는 조금 슬펐지만, 현재의 제인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아니면, 만족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절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제인이 옷을 다 갖춰 입은 채 싱그러운 미소를 띠며 문을 열고 욕실 바깥으로 나왔다. 조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갈까요?"
 "응."

 

 둘은 집을 나섰다.

 

(Love&Affair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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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

 

 

 리스본은 결국 제인의 끈질긴 추궁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이야기해주지 않은 채 제인과 헤어졌고, 제인은 소득 없이 조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딜 갔다 오는 겁니까?"

 

 마침 샤워를 끝내고 욕실에서 나오던 조가 집으로 돌아온 제인을 보고 물었다. 제인은 평상시의 구렁이 담 넘어가듯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리스본네 집에 다녀왔지 뭐."

 

 반장님 상태가 안 좋지 않던가요, 라면서 머리의 물기를 수건으로 턴 조는 방으로 들어갔다. 제인은 그런 그의 반응을 보고서 조는 지난밤의 일을 기억 못하는 게 확실하다고 단정했다.
 제인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갑자기 조가 문 밖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는 말했다.

 

 "제인, 점심은 먹었습니까?"
 "아니?"
 "뭐라도 좀 먹으러 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의 말투가 드물게도 강권하는 말투라는 것을 눈치 챈 제인은 속으로 궁금증을 품었지만 지금은 식사를 챙기는 것 말고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아니, 오늘은 잠깐 집에 들렀다 와야겠어. 늦어도 밤이면 다시 돌아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집에 들렀다 온다는 말에 조는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제인이 곧바로 책상에서 수첩과 펜을 챙겨 나가는 모습에 별 말은 하지 않고 다시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

 

 일요일 아침이다. 지난 밤 조가 잠이 들 때까지 집으로 되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제인이 밤사이에 돌아와 있었다. 그의 옆에 제인이 곤히 잠들어있는 모습을 본 조는 저도 모르게 살짝 제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와이셔츠만 입고 고개는 조 쪽으로 돌린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물 빠진 군청색 양복 재킷은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보이지 않았고 베스트는 침대 발목 부근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조는 제인의 긴 눈의 금빛 속눈썹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그의 머리카락 쪽으로 손을 옮겼다. 조가 정식으로 고백하고 사귄 지 두 달은 된 것 같은데, 그 사이 뭔가 이렇다 할 스킨십이 부족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는 아쉬운 마음에 배게 위에 흩어진 제인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제인이 세상모르고 자는 틈을 타 손가락 사이로 배배 꼬며 만져댔다.
 제인이 조가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작대는 것을 느꼈는지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의 깜박임에 따라 그의 연한 바닷물 빛깔의 눈의 초점이 서서히 잡혀갔다.

 

 "조...뭐하는 거야?"

 

 조는 아무 말 없이 제인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제인은 잠이 덜 깬 눈으로 후후 웃으며 조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해..."

 

 제인이 머뭇거리다가 조의 허리에 손을 살짝 걸쳤다. 조는 그것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뭉클해져 오는 것 같았다.

 

 "어제 몇 시에 온 겁니까."
 "모르겠어...세 시? 네 시? 그쯤이었을 거야..."
 "뭘 하다 그렇게 늦게 온 거예요..."

 

 나른하게 늘어지는 제인의 대답에 조의 목소리도 덩달아 늘어졌다. 제인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허리께에 느껴졌다.

 

 "생각을 해야만 했어."
 "무엇에 대해서요?"
 "이것저것, 살다 보면 깊은 생각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잖아."
 "그 생각 해야만 하는 일 중에 하나에 저에 관한 것도 있었겠죠."
 "부인할 수는 없네."

 

 조의 말에 제인이 대꾸하고는 키득키득 웃었다.

 

 "돌아왔다는 건 제게 희망이 있다는 뜻이네요."
 "조는 너무 눈치가 빨라."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하기 시작했다.

 

 깊숙하게 혀가 엉킴과 동시에 조는 제인의 와이셔츠를 거의 찢듯이 열어젖혔다. 조가 제인의 유두를 핥으려 고개를 아래쪽으로 숙이자 그제야 조에게서 끈질기도록 깊은 키스를 받고 있던 제인의 입술이 해방되었다. 제인은 숨차하며 말했다.

 

 "이러다가 죽겠어..."

 

 조는 유두를 자근자근 깨물며 말했다.

 

 "자제하겠습니다."
 "아니, 자제하라는 건 아냐, 절대...아..."

 

 제인이 흥분된 신음소리를 내자 조가 피식 웃고는 다른 쪽 유두를 손가락으로 살살 매만지며 말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겁니까."

 

 제인의 유두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로 조가 말하자 그의 입술이 미묘한 감촉을 피부에 남겼고 제인은 그 간지러움에 허리를 살짝 비틀었다.

 

 "어쩔 수 없잖아, 그렇게 키스를 잘 하는걸. 흐읏, 지난번에도 느낀 거지만..."
 "지난번이라고요?"

 

 조가 제인의 가슴에서 입을 떼고 물었다. 제인이 대답했다.

 

 "그저께...아니 어제 새벽에 나랑 키스한 거 역시 기억 안 나나보네?"

 

 그 날은 제인의 귀환 기념으로 리스본을 위시한 전 팀원들이 거하게 한 잔 걸친 날이었다. 어쩐지 다음 날 일어날 때 숙취도 심하지 않더라니, 제인과의 키스 덕분이었나, 라는 정신나간 생각이 언뜻 들었다.

 

 "술에 취했을 때의 제 키스가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그 때가 더 나았던 것 같아."

 

 잠시 잦아든 애무에 여유가 생긴 제인이 농담을 던졌고 조는 이렇게 응수했다.

 

 "분발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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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

 

 

 전날 실컷 음주를 한 덕분에 오전 내내 숙면을 취할 계획이었던 리스본은 누군가가 문을 부서져라 쿵쿵 두들겨대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대문을 열었다.

 

 "?...제인? 어쩐 일이야?"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른 사람 사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몰아붙이는, 이기적인 제인이다. 숙면을 방해당한 고통으로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리스본은 제인이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상기하고는 간신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제인, 지금은 별로 적절하지 못한 순간인 것 같으니 아예 점심 때 만나는 건 어때?"

 

 '나는 잠을 더 자고 싶단 말이닷!'을 극도로 우아하게 순화시킨 말이었다. 리스본이 그렇게까지 나오는 데에서야 제인도 한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리스본의 실룩이는 미간과 잔뜩 힘이 들어간 주먹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지금의 리스본을 건드리는 자는 분명히 호되게 당할 것이 눈에 뻔히 보였으니까.

 

 근처 카페에서 앉아 차 한 잔을 시키고 잡지 한 권 한 권을 자세히 정독한 후에야 리스본이 간신히 인간의 몰골을 하고 제인이 있는 카페에 도착했다. 더 이상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데에 이골이 난 제인은 산책을 제안했다.
 근처 공원을 걸으며 리스본이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천하의 패트릭 제인이 연애상담 따윌 하려고 날 꼭두새벽부터 깨운 건 아닌 것 같고."

 

 '연애상담'이란 말에 저도 모르게 흠칫 하는 기색을 드러낼 뻔 한 제인은 얼버무리는 듯 한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언젠간 리스본한테도 조와의 관계를 말하긴 해야 할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제법 날카롭게 질문을 던지는 제인이었다. 제 발에 저려 사실을 실토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리스본이 괜히 자타공인 제인의 보모 역할을 지난 몇 년 간 해온 것이 아니었다.

 

 "네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졸도한 후에 13일 동안 원인 불명으로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거 말이야? 그냥 말 그대로의 일이야. 우린 정말로 네 걱정을 많이 했다고, 제인."

 

 제인이 레드존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것을 안 순간 CBI전체는 기밀 보안 태세로 들어갔었다. 그가 사라진 아이스크림 가게는 말 그대로 CBI의 앞마당이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은 위치였다. 그런 장소에서 CBI의 수사 고문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노출되기라도 한다면...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3주에 걸친 기간 동안 제인이 납치되었다가 트라우마로 정신 병동에 입원한 것을 아는 이들은 CBI내부의 최측근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없었으며 보안도 유례없이 잘 유지되어왔다. 이렇게 된 김에 리스본은 제인이 모든 것을 스스로 기억해내기 전까지는 그를 섣불리 자극하여 기억을 되살리려고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사건을 제인이 기억해내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취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제인은 리스본의 그런 암중의 노력을 모두 수포로 돌려버리겠다는 듯 여지없이 수상한 점을 느끼고는 그에게서 드물게 발휘되는 행동력을 발휘하여 리스본에게 쳐들어왔다. 리스본은 이 순간만 잘 넘기리라 다짐하며 진실된 표정을 지어 보이려 노력했다.
 제인은 싱글거리며 웃었다.

 

 "왜 그렇게 웃는 거야?"
 "날 속이려 하지 마, 리스본. 너희들이 뭘 숨기고 있는 건 이미 알고 있다고. 문제는 내가 너희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건데, 난 지금 바로 알아낼 생각이거든."

 

 리스본이 발뺌하려 입만 벌렸는데 제인은 검지를 홰홰 저으며 말했다.

 

 "에에~나한테 거짓말을 하려고 하다니, 리스본 나쁜 아이가 되었구나!"

 

 그러고는 전화기를 꺼내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네가 안 말해주면 나 루더 국장한테 전화할거지롱~"

 

 리스본은 그 순간 만큼은 제인이 다시 기억상실에 걸렸으면 싶다는 음험한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리스본은 제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인, 난 너를 진심으로 걱정해. 그렇지만 네가 무슨 말을 하던지, 난 너에게 말해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 신변상에 무슨 일이 있기는 했다는 거군."
 "그래, 무슨 일이 있기는 했지만, 난 네가 기억해내기 전까지는 그 일을 알려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하지만 내가 사이비 영매 짓을 하면서 돌아다녔을 때, 내가 지금의 삶을 기억해내지 못하자 너는 내게 레드존의 표식을 보여줬지. 내가 다시 그러길 바라?"
 
 리스본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봐, 제인, 그건 정말...미안하게 되었어. 하지만, 그때의 행동도, 지금 내가 하는 행동도 나는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 사실만 알아둬."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고서는 등을 돌려 공원을 빠져 나갔다. 제인은 그녀의 등을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모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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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

 

 

 리스본은 휘하 팀원들에게 당분간은 제인이 함께 수사과정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나, 언제든지 그가 회복하는 대로 팀에 복귀하게 될 것임을 전했다. 제인의 외적 상태는 다른 팀원들도 돌아가면서 병문안을 갔다 오면서 알고 있었으므로 크게 놀라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무겁게 가라앉은 우울감을 떨쳐내기에는 제인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다.
 평소에는 장난삼아 월급 도둑이라거나 게으름뱅이라고 놀리기도 했었지만 그런 농담이 무색할 정도로, 제인이 없어서 생기는 피해는 컸다. 지금까지 약 두 주가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제인이 자리를 비운 것에 불과했지만, 수사의 진척 속도가 느린 것은 물론이고 팀 내 분위기도 활발하지 못했다. 특히 조는 누가 봐도 알 만큼의 다크 오오라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말수도 줄어들고 범인의 심문도 더욱 가혹해져, 릭스비가 이제 조가 '아이스맨'에서 '블리자드맨'으로 진화했다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웬만하면 각 부서의 행동 양태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루터 웨인라이트도 넌지시 우려의 의사를 표명할 정도였으니, 짐작할 만 할 것이다.
 
 조는 근무 외 시간에는 부지런히 병원에 들락날락하며 제인을 수발했다. 제인의 외상은 회복된 지 오래여서 제인을 만나려면 정신 병동 쪽으로 가야만 했다.
 조는 사랑하는 사람이 불치병에 걸렸다 해도 곧바로 내칠 만한 냉혈한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희망을 갖고 제인에게 지속적으로 방문하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모든 외부 자극에 무감각으로 일관하는 증세를 보였던 크리스티나와는 다르게 제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멍한 눈빛에 말이라곤 한 마디도 안했지만 조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1인용 병실에 들어간 조는 이맘때쯤이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서 창 밖을 바라보거나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제인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준 건 텅 빈 시트뿐이었다. 조가 막 간호사 소환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병실 안쪽의 화장실 문이 열렸다.

 

 "제인...?"

 

 문을 열고 나온 이는 패트릭 제인이었다. 납치되기 이전처럼 구겨진 양복을 나름대로 말쑥하게 차려입고는 싱긋 미소 지으며 조를 보고 있었다.
 조는 평소의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어벙벙한 표정으로 제인을 쳐다보았다. 간신히 충격에서 벗어난 조가 더듬거리며 제인에게 말했다.

 

 "제인 맞아요?"

 

 제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지 누구야. 그런데 말야, 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

 

 제인은 곧바로 CBI 수사본부로 향했고, 리스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환대를 받았다. 마침 다음날이 휴일이라는 경사까지 겹쳐, 다들 근처의 술집으로 향했다.
 평소에 술을 꺼려하던 리스본도 '오늘만큼은 마셔야지!'라고 호쾌하게 외치며 위스키 병을 잔에 기울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날 소파에 누워 뒹굴 거린다는 둥 온갖 잔소리를 도맡아 받았던 제인으로서는 즐겁기도 했지만 당황스럽기도 했다.

 

 "와아~이런 대접은 처음인 것 같네."
 "제인이 복귀했으니까 이 정도는 해야죠!"

 

 반 펠트가 오랜만에 경쾌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러니까 내가 13일 동안 아무 것도 못하는 멍한 상태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방금 회복됐다는 거야?"
 "맞아요."

 

 릭스비가 리스본과 짝짜꿍이 되어 꽉 찬 위스키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제인의 말에 맞장구를 친 그는 리스본의 부추김에 못이긴 척 하며 그 많고 독한 위스키를 입 안에 다 털어넣었다.
 
 "릭스비랑 모두들, 오늘 심하게 달리는데?"

 

 제인이 소곤거렸지만 아무도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없는 듯 했다. 제인은 난처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지만 모두들 웬일인지 너무나 흥겨워했기 때문에 딱히 딴죽을 걸지 않기로 했다.

 

*

 

 다들 만취한 상태였지만 어떻게든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눈치를 봐가며 슬슬 음주량을 조절한 제인이 가장 멀쩡한 상태였고, 흐느적대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눈의 초점이 살짝 풀린 것 같은 조를 데리고 조의 집으로 운전해가기 시작했다.

 

 "조 괜찮아?"
 "...네."

 

 반 박자 느린 대답에 제인이 웃음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다들 너무 흥분했나봐."
 "아녜요."

 

 조가 대답했다. 뭔가 입을 우물거리며 더 말하려는 기색에 제인은 기다렸다.

 

 "제인이 돌아왔잖습니까."
 "그래, 그래."
 "돌아왔어요."
 "그래, 나 돌아왔어."
 "제인, 다신 떠나지 마세요."
 "응, 안 떠날게. 이제 됐지? 이제 도착했는데 얼른 내려서 들어가자."

 

 제인이 웅얼거리는 조에게 얼른 대꾸한 후, 자신과 조의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 쪽 문을 열려는데 조가 갑자기 제인의 팔을 꽉 잡았다.

 

 "왜 그래 조?"

 

 조는 아무 말 없이 제인을 강하게 끌어당기더니 입을 맞추었다. 제인은 깜짝 놀라서 잠깐 움찔했지만 동조해주었다. 차 안의 차가운 밤 공기와 함께 술 때문에 달아오른 열기가 섞여 서로의 입 속에서 마구 엉겼다. 다소 거칠다 싶을 정도로 파고들어오는 혀 때문에 제인은 서서히 몽롱해져갔다. 문제는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멈추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일까.
 제기랄, 조는 정말이지 키스를 너무나 잘 했다.
 조는 제인이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에 그를 놔줬다. 제인은 눈이 풀린 채 헐떡이며 좌석에 기대었고 입가에 줄줄 흘러내린 타액을 닦았다. 제인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조, 이제 들어가자."

 

 조를 부축해서 침대에 거의 내던지듯이 내려놓은 제인은 조의 신발을 일단 벗기고 현관에 놓고 온 뒤,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뒤죽박죽이 된 것 같은 하루였다. 일어나보니 난데없는 정신 병동의 입원실인 데다가 CBI에 돌아와보니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듯 한 환영을 해주는 팀원들 때문에 정신없이 끌려 다녔지만 내일은 반드시 진상을 알아내겠다 다짐하며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조가 대자로 뻗어있는 것을 본 제인이 오늘은 소파 신세겠군, 이라고 생각하며 돌아서는 찰나 조가 언제 일어났는지 살짝 비켜서 제인이 누울 자리를 내주며 제인에게 말했다.

 

 "이리 와요."

 

 여전히 취한 듯 했지만 약간은 맑아진 목소리였다. 제인은 살짝 웃으며 조의 옆에 누웠다.

 

 "있지 조."
 "네."
 "너 키스 진짜 잘하더라."

 

 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인은 약간 짓궂은 심정으로 조에게 말했다.

 

 "한 번 더 해주면 안되?"

 

 조는 그새 잠이 든 듯 잠시 반응이 없었다. 제인이 잠이 들었나봐, 라고 생각할 때 즈음 조의 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고개를 돌린 제인에게 부드럽게 손을 뻗어 제인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당황해서 조에게 리드 당했던 아까와는 달리 제인도 적극적으로 조의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어 조의 혀를 간질였다. 둘은 천천히 서로의 입술을 즐겼다. 길고 달콤한 키스. 느긋하게, 미온수를 욕조에 받아놓고 참방참방 물장구를 치며 노는 기분의 키스.
 쵹 하는 젖은 소리와 함께 입술을 뗀 그들은 기분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키스의 여운에 젖어서 침실에 깔린 정적마저 즐기고 있을 때 조가 문득 입을 열어 나직하게 말했다.

 

 "...제인."
 "응?"
 "제인이 어떤 일을 당했든 난 상관없어요. 난 정말로 제인이 좋아..."

 

 처음에는 그저 술에 취한 남자의 고백이라고 생각하고 넘기려던 제인은 조의 말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는 그에게 말했다.

 

 "어떤 일을 당했든...이라니? 내가 뭐라도 당했어?"

 

 제인은 까무룩 잠들어버린 조를 살짝 흔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대체 무슨 일인거야?"
 "...레드...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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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

 

 

 정신을 잃은 제인이 다시 깨어나길 리스본을 비롯한 팀원들은 끈질기게 기다렸지만 제인은 비정상적으로 긴 시간 동안 잠만 잤다. 거의 죽은 것처럼 보이는 가느다란 호흡과 창백한 안색의 상태의 제인을 둘러싼 팀원들은 모두들 걱정이 태산이었다.
 약 서른여섯 시간 동안의 수면 이후 제인은 의식을 회복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상태는 이상했다. 병실의 침대에 얌전히 누운 제인의 눈은 종종 안구의 수분을 보충하기 위한 최소한의 깜박임 외에는 보여주지 않았고 입도 굳게 다물려 있었다. 마치 크리스티나를 발견했을 때 그녀에게서 보이던 증상과 같았다. 리스본은 제인의 이런 상태를 곧바로 의료진에게 알렸다.
 몇 가지 검진이 끝나고 의료진은 리스본을 비밀리에 불렀다. 리스본은 조를 동행한 채로 의사와 대면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지난번 크리스티나 프라이 양의 상태와 상당히 일치한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그럼 회복이 불가능한...건가요?"
 "프라이 양도 현재까지 상태가 나아진 점이 없으나, 사람마다 트라우마의 극복 능력은 다릅니다. 그 점에 희망을 걸어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제인이 겪은 사건은 아무래도 CBI 관계 처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의사의 말에서는 아무래도 제인에겐 더 큰 트라우마가 있으니 이번 트라우마를 극복해낼 수 있을 거라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고 있었다. 결국 별다른 대안을 제시받지 못 한 채로 진료실을 나서는 리스본을 의사가 붙잡았다.

 

 "그리고 리스본 반장님께 은밀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인의 상태에 관련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 사람도 들어도 괜찮습니다. 어서 말씀해보세요."

 

 조가 위압적으로 팔짱을 끼고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을 연신 흘깃흘깃 보며 의사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제인 씨가 납치를 당한 동안, 성적 학대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뭐라고요?!"

 

 조가 갑자기 크게 소리치자 리스본도 의사도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조는 화난 기색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그들에게 말했다.

 

 "계속하시죠."

 

 리스본은 갑자기 리스본 자신보다도 더 흥분한 기색의 조를 미심쩍은 듯이 한 번 돌아보았으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다시 의사를 향해 부연 설명을 촉구했다.
 의사는 이런 것을 일일이 설명하는 상황이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히고 중간 중간 헛기침을 섞어가며 정황증거와 제인의 신체 검진 결과를 들어 설명했다. 이 정도쯤이면 가능성이 높은 정도가 아니라 확실하잖아, 라는 생각을 하며 리스본은 열에 뻗친 머리로 간신히 생각을 정리하고는 쿵쾅대는 발걸음으로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리스본 못지않게 침통한 기색의 조에게 리스본은 당부했다.

 

 "방금 들은 이야기는 함구해. 너의 입이 충분히 무겁단 걸 믿는다. 나는 본부에 들러서 국장님과 면담을 하고 와야하니 그동안은 네가 제인의 병실을 지키도록."

 

 리스본은 지시를 쏟아내고는 화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병원 복도를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그녀가 입 안으로 욕설을 씹어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조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과연 자신이 제인의 얼굴을 보고서도, 지금의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억제할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으나 그는 일단 병실로 들어갔다.


 일견 평온해 보이는 제인의 모습에 조는 오히려 맥이 빠진 채로 침대 옆의 철제 의자에 풀썩 앉았다. 제인은 환자복을 입고 간호사가 덮어준 이불의 형태를 그대로 둔 채 두 눈을 간간히 깜박거리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조는 아무렇게나 놓인 제인의 손을 찾아 쥐었다. 답답한 마음에 손을 강하게 쥐어도 제인은 반응이 없다. 조는 침대 위로 고개를 숙여 제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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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약수위

 

 

 눈을 뜨려고 했지만 여전히 머리는 아팠다. 대체 누군지는 몰라도 마취 약품의 남용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걸 모르는 종자가 분명하다고, 다소 낙천적인 생각을 하며 패트릭 제인은 힘겹게 실눈을 떴다.
 인질로 잡힐 때마다 느낀 거지만 일반적으로 인질이 처한 환경은 필요 이상으로 살풍경하다. 제인은 소 전용 전살기로 고문당했던 옛 기억을 떠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수사를 위해 약간의 말장난을 했다가 호되게 앙갚음당한 케이스였다. 이번에도 전기 충격을 받는다면 정말이지 끔찍할 것이라고 되뇌며 제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거친 시멘트 바닥을 예상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일반 주택에서 흔히 보이는 바닥재였다. 옆에는 창문이 있었으나 바깥 풍경을 봐도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발목에 감긴 수갑과 쇠사슬이었다. 오른쪽 발목에만 쇠사슬이 연결된 족쇄가 감겨있었는데, 의외로 허술한 처리에 제인은 다소간의 희망을 가지고 이것을 풀 만한 클립 같은 것을 찾았으나, 역시나 그런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취제의 기운을 이겨내는 데만 해도 많은 힘을 소모한 제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원래 자신이 누워있던 얇은 요에 돌아가서 몸을 둥그렇게 만 제인은 '지금은 도저히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

 

 얼마나 잤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바깥은 아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환하다. 그림자 방향이 달라져 있는 것이 시간이 지났음을 알려주었다. 짧은 수면 덕택에 그나마 두통이 누그러져서 제인은 아까보다는 맑은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발목의 족쇄부터 체크해 본 제인은 클립이나 쇳조각 등 여타 도구를 찾기 전까지는 족쇄를 풀어서 탈출하겠다는 안이한 생각을 단념하기로 했다.
 그 다음으로는 쇠사슬의 길이를 본 제인은 길이가 의외로 긴 것을 보고 놀랐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의 행동반경은 확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심한 제인은 그제야 요의를 느끼고 방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온 제인은 자신이 복층식의 주택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혹시나 하고 계단 쪽으로 가본 제인은 쇠사슬의 길이가 정확하게 계단 바로 직전까지 미치는 것을 보고 범인이 생각보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자신을 납치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런 걸 희망 고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쇠사슬의 범위가 닿는 대로 2층의 이 방 저 방 뒤지며 다니던 제인은 자신의 머릿속을 콕콕 찌르며 존재감을 증명하려는 기억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기억은 명확하지 않았고, 실마리를 잡으려던 제인은 포기하고 일단 매트리스와 요가 깔려 있는 첫 번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열고 안을 보는 순간, 제인은 깨달았다.
 크리스티나를 상징하는 붉은 머리칼의 인형이 있었던 그 방과 구조가 상응하는 이 집의 구조.
 레드존.

 어딘지 익숙했던 그 기시감, 자신의 뇌세포를 자극하던 그 느낌은 레드존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최근 조와 평온한 일상에 푹 빠져 있었던 탓인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독한 마취제의 효능이 잔존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레드존의 자취를 단번에 감지해내지 못한 제인은 자신을 원망하며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인기척은 없었으나 제인은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는 소리에 지레 놀라기도 하며 천천히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마도 납치된 지 이틀은 지났을 것이다. 평소라면 얼마든지 뜬 눈으로 낮과 밤을 지새웠을 것이나 레드존에게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인은 그 사실만으로도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

 

 삼 일째, 제인이 충혈된 눈을 깜박거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열린 방문을 살짝 밀어젖히며 들어왔다. 제인은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기 때문에 그다지 깜짝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장신의 실루엣, 그가 모습을 드러낸 여느 때와 다름없이 철저하게 자신의 모습을 가린 가면과 비닐옷.

 

 "안녕, 패트릭 제인."

 

 마치 변조된 듯, 아니면 그저 허스키할 뿐인 목소리인지 헷갈리는, 바로 그 목소리이다.

 

 "레드존."

 

*

 

 둘은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진다는 암묵적인 룰이라도 있는 것처럼 기싸움을 했다. 침묵이 극도로 무거워진 순간 레드존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지난번 내가 보여준 재주는 잘 감상했나?"

 

 산 호아킨 사건을 언급하며 레드존은 후후 웃었다. 제인은 짐작했었지만 레드존 본인의 입으로 사실을 확인하니 등골이 쭈뼛해져 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늙은이를 상대하기에는 넌 무리였겠지. 지금의 너라면 말이야. 옛날처럼 오만방자하고 위아래 모르던 시절의 너였다면 오히려 쉬웠을지도 모르겠군."

 

 레드존이 '옛날'을 언급하자 제인은 움찔했다.
 레드존은 먹잇감을 앞에 둔 뱀의 눈으로 제인의 면면을 훑어 내렸다.
 곱슬곱슬한 환한 금빛 머리카락,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색을 옮겨 칠한 듯 한 눈. 평소에는 긴장감 따윈 없이 사람의 마음을 뺏는 데에 적합한 아름다운 미소만을 짓는 데에 특화된 미형의 얼굴은 지금 그 앞에 서있는 레드존 자신으로 인해 차갑게 굳어있었다. 그에 레드존은 일말의 자부심어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너의 아름다움은 여전해... 그 때문에 내가 너를 특별히 주목했었지. 그 오랜 시간이 무색함을 보니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되는군."


 "티모시 카터는 너와 무슨 관계지?"

 

 제인이 묻자 레드존이 말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곧이어 조소와 함께 말했다.

 

 "네가 죽인 사람이라서 신경이 쓰이는 걸까나?"

 

 큭큭큭...하는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처진 눈에 잔뜩 힘을 주어 노려보는 제인을 보며 레드존은 계속해서 말했다.

 

 "내 재주를 봤으니, 너도 값을 치러야겠지?"

 

*

 

 패트릭 제인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통증에 대해 필요 이상의 두려움을 품고 있다. 그것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흡사하다. 그 때문에 제인은 일단 자신에게 위협이 가해지면 그 주체자에게 순종하는 습관이 있다. 그 습관은 지금까지 제인이 각종 인질극과 납치 사건 가운데서도 다친 곳 없이 살아나오는데 큰 공을 했었지만, 지금 그는 자신의 그런 습관을 원망하고 있었다.
 떨리는 허리를 붙들고 싶지만 이미 손발이 모두 구속된 후이다.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무시하고는 싶지만 강렬한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기에 눈꼬리에서 눈물이 스며 나온다.

 

 "제인, 정말 천박하군. 지금 네 꼴이 어떤지는 알겠어?"

 

 레드존은 이 상황이 매우 즐거운 듯 목소리의 톤이 높아져 있었다.
 제인의 조끼 단추는 뜯겨나가 방바닥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었고 단추 자리에는 실밥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셔츠가 풀어헤쳐진 것은 물론이고 가슴팍은 이미 레드존이 한 차례 괴롭힌 직후다. 이미 질릴 정도로 희롱당한 한 쪽 유두는 선정적인 빛깔로 부풀어 있었다. 제인은 레드존이 손대지 않은 다른 쪽 유두에 신경이 쏠리는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이제 레드존은 제인의 바지를 벗겨내고 하반신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의 애무는 연인 간의 애정 어린 그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방의 수치심과 쾌감을 동시에 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랜 시간의 숨바꼭질 동안 제인의 성감대라도 파악한 것인지 그는 능숙하게 제인이 느끼는 부위만을 골라 짚으며 제인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동시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지가 해졌군, 제인, 옷 한 벌 살 돈도 없을 정도로 궁핍해진 건가? 라던가, 그가 입은 흰색 면팬티를 보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조롱하기도 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드는 수치심에 난데없는 인내심의 시험을 받아야 했다.
 계속해서 레드존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제인은 질문을 던졌다.

 

 "크리스티나에게도 이렇게 한 건가?"

 

 제인이 힘겹게 묻자 레드존이 흥미로운 견해를 들은 듯 반문했다.

 

 "그랬다면?"

 

 콘돔을 낀 손가락이 제인의 직장의 점막을 휘저었다. 윽, 하고 신음을 참는 제인의 귓가에 레드존이 속삭였다.

 

 "또는 그렇지 않았다면?"

 

 잠시 제인의 애널을 희롱하던 그는 상냥하게 말하며 손가락으로는 사정없이 제인을 몰아붙였다.

 

 "크리스티나에게는 다른 즐거움을 줬다고만 해두지."
 "그거...흐윽! 안심되...네."

 

 제인이 신음소리를 억누르며 대꾸하자 레드존이 반박했다.

 

 "솔직해지라고, 제인."

 

 뭐에? 하는 의문과 함께 참을 수 없는 쾌감이 제인의 전신을 강타했다. 그 순간 그가 지금껏 억제해 오던 흥분이 한꺼번에 터져나왔고 그는 교성과 함께 사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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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

 

 

 "제인, 너 요즘 안색이 좋아 보인다."

 

 리스본이 말했다. 제인은 은근히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평소의 빙글거리는 미소로 적당히 넘겨버리고는 "그으래?"라고 반문하며 소파에 몸을 뉘였다.
 게으른 자태로 소파에 눌어붙은 제인을 향해 목발을 짚은 리스본이 험상궂은 표정을 짓는 사이 어디선가 조가 김을 올리는 찻잔을 들고 나타나 제인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이 최근 한 달간 새로 생긴 CBI내에서의 행태였다. 처음에는 조가 제인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줄 알고 수군대던 사람들이었지만 둘의 사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깔끔했기 때문에 어느 샌가 그 변화상에 적응해버려 이젠 아무도 뭐라 하지 않게 되었다.
 제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감탄하며 말했다.

 

 "오늘 차 진짜 환상이네. '나만큼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이제 수준급의 향취라고 할 수 있겠어."
 "조 선배 짱이네요. 내가 전에 제인씨가 시킨 대로 차 끓였을 땐 그런 소리는 못 들었었는데."

 

 조는 제인의 자아도취 섞인 찬사와 릭스비의 말을 흘려 넘긴 채로 다른 한 손에 든 서류를 리스본에게 내밀었다.

 

 "지문 감식반에서 감식 결과를 보내왔는데, 지문이 뭉개져 있어서 용의자 범위를 많이 축소시키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리스본이 소파 옆의 조그마한 나무 의자를 끌어다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은 후 서류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옆에서는 제인이 한가로이 차를 홀짝이며 얄밉게도 훈수를 두었다.

 

 "예전에 한 거 해봐."
 "뭐?"
 "감으로 용의자 선별하는 거. 먹히긴 먹혔잖아?"
 "그게 먹힌 거라고 보기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그건 사건이 필요 이상으로 꼬였기 때문이지, 결국 나쁜 놈을 검거했으니까 먹힌 거라고 봐도 무방하잖아."

 

 결국 제인의 강권으로 인해 리스본은 다시 끙끙대며 몸을 일으킨 후 화이트보드를 끌어다 사진을 하나하나 붙여놓고 산 호아킨 사건 당시 했던 일을 다시 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명의 사진과 프로파일을 릭스비와 조에게 넘긴 리스본은 탐문 수사를 지시하고 다시 목발을 짚고 어기적거리며 개인 사무실로 들어갔다.
 리스본이 절뚝이며 자리를 떠난 후 조가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물론 아주 사무적인 어조였다.

 

 "같이 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글쎄, 이번 사건 솔직히 지루하고, 리스본이 용의자를 두 명이나 찍어줬으니까 나는 안 가도 될 것같아. 게다가 지금은 소파가 더 땡겨."

 

 이미 소파에 누워있으면서 어떻게 소파가 더 땡길 수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는 알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릭스비랑 단 둘이 가야겠군요."

 

 평소답지 않게 무언가 사족을 덧붙인 후 뒤에서 릭스비가 저랑 나가는 게 그렇게도 싫다는 거예요 운운 하며 징징거리는 것을 조는 쿨쉭한 태도로 싹 무시하며 사무실 문 밖으로 나섰다.
 근데 지금, 방금 그거 데이트 신청이었나?
 조가 탐문 수사를 핑계로 비밀 데이트를 제안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인은 히죽히죽 웃으며 문 밖으로 나서는 조를 향해 말했다.

 

 "아 그리고 이 차 식기 전에 마셔야지. 차는 온도가 생명이란 말이야."

 

 제인이 덧붙인 말에 조는 제인 쪽을 돌아보았다. 제인이 조가 타준 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올려보이며 어깨를 으쓱 하는 것을 보고도 조는 무표정이었으나 데이트 신청이 거절당한 것으로 인해 가슴 속에 조그맣게 뭉칠 뻔 했던 의기소침함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꾸물대던 릭스비를 데리고 티격태격하며 탐문 수사를 나가는 조와 릭스비를 보며 제인은 마치 등교하는 아들 형제를 바라보듯 엄마 미소를 지었다.
 그런 제인을 향해 반 펠트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반장님 걱정이네요. 거의 다 나은 다리가 이번에는 금이 가기까지 해서..."

 

 한 달 전 리스본의 다리에 총탄이 스치는 사고가 난 이후 리스본은 지금까지 목발에 의존하는 신세였다. 다리의 상처 회복이 의외로 느렸던 데다가, 다 나아갈 즈음 캘리포니아에 내방한 외국의 귀빈의 경호를 맡다가 인파를 막던 경찰력이 뚫려 튀어나온 부분에 하필이면 리스본이 있었는데 과격화된 사람들 때문에 넘어진 리스본의 다리뼈가 금이 갔던 것이다. 덕분에 리스본은 최근 한 달 동안 외근이라곤 꿈도 못 꾸는 신세였다.
 그런 상황이 리스본 자신도 매우 답답해했고 다른 팀원들도 물론이고 제인도 염려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제인은 상냥하게 그레이스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그럼 난 뭣 좀 먹고 올게'라고 하며 CBI건물 밖으로 나갔다.

 

*

 

 오늘따라 제인의 단골 아이스크림 카페는 한산했다. 제인은 요즘 살이 찌려는지 먹성이 좋아지고 단 것이 마구 당겼다. 아몬드 크리스피와 초콜릿 시럽을 듬뿍 뿌린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앉아서 한 스푼 한 스푼 소중하게 떠먹으며 제인은 행복감을 만끽했다.
 제인은 스푼에 묻은 초콜릿 시럽을 핥으며 리스본이 아까 전 한 말을 떠올렸다.

 

 '제인, 너 요즘 안색이 좋아 보인다.'

 

 그에 대해선 짚이는 바가 있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조와 사귀게 된 후부터 조의 권유로 가구도 별로 없고 티백 말고는 먹을거리도 없는 살벌한 저택에서 나와 조의 집에서 밤을 지내는 날 수가 늘어났다. 처음에는 조가 소파에서 자기도 했지만 곧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잔지가 까마득했던 제인은 처음에는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어느새 쿨쿨 잘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조와 잘 때의 제인은 평소에 그토록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것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금세 잠에 들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제인도 그 전에 비해-안색과 성격 모두-놀랄 만큼 밝아져서, 일단 고질적인 수면 문제가 해결되자 제인 자신의 정신적인 건강도 한층 호전되는가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조와 사귀는 것은 의외로 평범하고 단조롭다고 봐도 무방했으나, 제인은 현재로서 그다지 파란만장한 연애 담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 제인이 진지하게 둘의 관계를 고려한다고 판단한 조는 둘만 있을 때에는 굉장히 다정하고 세심하게 행동해서 제인 스스로도 굉장히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 전의 연인들에게도 이렇게 다정하게 대했을까, 라는 의문도 떠올랐지만 그 질문은 시기상조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는 제인은 당분간은 조와의 말랑말랑한 관계를 즐기기로 했다.
 이런 낙천적인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정말 조가 제인 자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하며 제인은 혼자서 피식 웃었다.
 아직 조와 진도를 많이 나가진 않았지만 원래부터 제인은 조의 탄탄한 근육질의 육체며-특히 단단한 팔뚝-단정한 얼굴에 호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가다간 정말 정이 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제인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뭉갰다.
 순간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아이스크림을 급하게 먹지는 않았는데, 라며 스푼을 쟁반에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제인은 주변에서 수상함을 느꼈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산하긴 했지만 몇몇 사람이 있던 가게 안이 텅 비어있다. 깨질 듯한 머리를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것을 참고 가게의 유리벽 너머를 보았지만 정말이지 거리 전체에는 쥐 죽은 듯이 사람 기척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눈앞이 가물가물한 원인이 분명한 아이스크림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며 제인은 테이블 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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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

 

 

 "제인..."

 

 조가 말했다.
 제인은 반쯤은 기대되는, 반쯤은 실망한 기분으로 조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헤프게 굴지 마십쇼."

 

 과연, CBI 최고의 인격 살인마라고 불리는 킴벌 조의 촌철살인같은 한 마디였다. 당연히 조가 제인의 유혹에 못이겨 키스라던가 그 외의 다른 행동(?)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제인은 마치 자기 자신이 창녀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괜히 패트릭 제인이 아니었다.

 

 "난 조가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제인을 보며 조는 속으로 '정말이지...'라며 탄식했다. 진짜로 반한 사람에게만 보여줄 듯한 촉촉히 젖은 페일 블루의 눈동자를 보며 조는 금방이라도 제인을 포옹해버릴 것만 같은 자신을 억제했다.

 

 "제인, 저는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조가 입을 열자 제인은 갑자기 뒤로 돌아 빠르게 자기 집으로 발을 옮겼다. 그에 벙찐 조가 제인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뭐하는 겁니까?"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어."

 

 제인이 뒤따라오는 조를 흘낏 보며 말했다.

 

 "여긴 밖이잖아. 이러다가 파파라치한테 사진찍혀서 <CBI 요원들의 은밀한 일상>이라는 타이틀로 지역 신문에

게재될 지도 몰라."

 

 농담같은 말이었지만 왠지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도 일단 함께 집으로 가는 것이니 적어도 회피는 아니라는 안도 섞인 생각을 하며 조 또한 제인을 따라 제인의 집으로 향했다.

 

*

 

 "차 마실래?"
 "물이면 됩니다."

 

 포트에 물을 끓이는 사이 제인은 유리컵에 냉수를 담아 조에게 내밀었다. 조는 물컵을 받아들고 입술을 축였다. 그새 다 끓은 물을 컵에 붓고 티백을 꺼내 물에 담그며 말했다.

 

 "그니깐 조는 나를..."
 "사랑합니다."

 

 제인의 손이 움찔 했다. 컵을 들고 있지 않았길래 망정이지, 컵을 들고 있었다면 멀쩡한 바닥에 떨어뜨릴 뻔 했던 것이다.

 

 "조는 참 솔직하다니깐."

 

 제인은 살짝 굳은 얼굴로 미소지었다. 조의 까만 눈이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에 조가 말했다.

 

 "제인 상황은 저도 알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달라고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까처럼 장난으로 넘어가진 마십쇼."


 제인은 차를 홀짝 들이키며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조는 인내심을 가지고 제인이 뭔가 말을 하길 기다렸다. 제인은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차만 마시다가 문득 말을 꺼냈다.

 

 "언제부터야?"
 "그런 게 중요합니까?"

 

 조의 무뚝뚝한 말에 제인은 반대로 그 속의 담긴 진심을 그제서야 체감했다. 겉으로는 전혀 표출되지 않겠지만 조는 이 마음을 자신에게 털어놓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무척 긴장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머릿속에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생각이 떠올랐다. 한 번 해볼까, 라는 생각. 이는 레드존 사건 이후에 진지한 관계를 피해왔던 제인에게는 그 나름의 큰 도약이었다. 제인은 한 번쯤 충동에 몸을 맡겨 보기로 결심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는 지금 당장 결론을 내려주길 바라는게 아니-"
 "좋아, 조."

 

 조의 말을 가로막은 제인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한 번 사귀어 보자, 진지하게."

 

*
 
 다음날 리스본 휘하의 요원들은 모두가 전날의 음주가무로 퀭한 기색이었다. 물론 언제나 상큼한 안색의 패트릭 제인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조도 어젯밤 제인의 집에 들렀다가 자기 집으로 가는 바람에 잠이 부족한지 오늘따라 그늘진 눈가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전날 종료된 케이스만 정리하면 당분간은 맡은 사건이 없으므로 릭스비를 비롯한 팀원들은 서류 정리에 주력했다.
 맡은 보고서를 팀원들 중 가장 먼저 마무리지은 조는 CBI 내의 주방으로 가서 간단히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다른 팀원들이 서류 작업을 하느라 끙끙대는 동안 전용 소파에서 뒹굴대거나 딴지를 거는데 주력하던 제인은 조가 부엌에 가자 잠시 후에 뒤따라가서 찻잔을 새로 채울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담긴 주전자가 끓자 컵에 물을 붓던 제인에게 조가 말했다.

 

 "제인, 접시 꺼내게 잠시만 비켜주시겠습니까."

 

 제인은 비키는 대신 뒤돌아서 찬장에 손을 뻗는 조와 마주봤다. 그리고 눈을 찡긋 하더니 조의 귓가에 속삭였다.

 

 "생각해보니 우리 사내연애다?"

 

 조가 기습적인 제인의 달콤한 말에 동요하는 사이 제인이 쏙 빠져나가 찻잔을 들고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부엌을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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