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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11 [짐존]월후면 4
  2. 2013.12.11 [짐존]월후면 3
  3. 2013.12.11 [짐존]월후면 2
  4. 2013.12.11 [짐존]월후면 1

짐존/100제/포비아-자해

 

 그렇게 끝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거진 6개월 간을 지속되어왔던 그들의 기묘한 동거는 끝이 났다. 존과의 한바탕 말다툼 끝에 쫓기듯 호텔방을 빠져나온 짐은 차마 그 방으로 다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과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겨 그곳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상반된 의지가 대립하여 그는 길 한가운데에서 멈추어 서있다. 정지. 지나치는 인간들의 소음. 귀에 거슬리는 소음의 연속으로 머리가 어지럽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낸다.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고 나서야, 라이터를 호텔방에 놓고 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이 구실로 그 방에 돌아가면 안될까. 그는 생각한다. 불이 붙지 않은 담배의 필터를 살짝 깨물어 이빨 자국을 내며 그는 생각한다. 생각이란 놈이 아주 긴 시간을 잡아먹는다. 끝나지 않을 정도로 끈질기게 그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물러나지 않던 생각은 결국에는 끝을 맺는다. 길고 긴 생각의 결과가 보통 그렇듯, 진정으로 의미있는 결론은 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의문을 남길 뿐. 설령 그 방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정사의 흔적이 남은 침대만이 어지럽혀진 채 그대로 남겨져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 곳에 함께 뒹굴었던 사람의 온기는 사라진지 오래일 것이며 체취는 시간이 갈수록 잊혀져 객실 청소부가 시트를 갈러 온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건조한 비누 냄새를 풍기는 시트로 말끔히 갈아입혀질 것이었다. 그리고는 때묻지 않은, 무의 상태, 제로섬, 시작점으로 되돌아간다.
 그들의 관계는 망가져버린 채 그대로이겠지만.

 

*

 

 일주일 하고도 이틀 후 짐은 결국 그와 존이 머물던 호텔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예상했던 대로 온기 없이 싸늘한 빈 방이 그를 맞이한다. 침대 가장자리에 간신히 걸쳐 있는 구겨진 이불. 정사의 증거물이 곳곳에 남아 차갑게 굳은 채로 남아있는 침대 위. 그날 자신이 허겁지겁 벗겨내었던 존의 샤워 가운도 애벌레의 허물처럼 구깃하게 방바닥에 떨어져 있다. 침대 옆 협탁 위에는 그날 피우다 만 담배가 재떨이 안에서 끝부분이 꺾여 비벼진 채로 남아있다. 그대로이다. 다만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 아니, 그는 차라리 원래부터 없었어야 할 사람.
 천천히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자신의 구둣굽 소리가 방 안에서 생소하게 울린다. 짐은 코트를 벗어 살며시 의자 등걸이에 걸친다. 그리고 몸을 침대 위에 누인다. 원래 남겨져 있던 침대보의 주름이 변형될까 두려워 최대한 느릿하고 천천히 몸을 누인다. 천장을 응시한다. 그동안은 한 번도 천장에 관심을 기울일 까닭이 없었기에 짐이 이 호텔방의 천장을 보기는 처음이다. 단조로운 상아색. 몰개성한 상아색.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진하고 노란 빛을 띤 듯한 그 색은 어떤 이의 머리칼을 떠오르게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닮은 색상은 아닌데도, 그저 노란 빛깔의 일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괴롭히고 미치게 하는 것이다.
 눈 앞이 어지러워진 그는 천장에서 눈을 돌린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그는 코를 한 번 벌름거린다. 미약하게 남아있는 체향. 애틋하고 그리운... 그는 몸을 돌려 침대 위에 엎드린 후 탐욕스럽게 그 체향을 들이마신다. 그 자신과 존의 체향이 섞인 묘한 향기였다. 스읍, 하고 그가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는 죽은 듯이 침대 위에 사지를 늘어뜨린다.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이 향기에 갇혀 죽을 때까지 누워있고 싶었다. 슬픔과 더한 슬픔과 깊은 슬픔만을 품고 있는 향기.
 짐은 문득 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 웃음은 공허하다. 텅 비어있다 못해 그 깊이는 지저 깊은 곳까지 달한다. 음험한 구멍과도 같이 냉기어린 바람줄기를 내뿜는 웃음.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자에 놓아두었던 코트를 챙겨서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

 

 멍한 머리. 도무지 이전처럼 돌아가지 않는 무거운 머리를 이고 그가 향한 곳은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 베이커 가 221B 였다. 너무나 예측 가능하게도 말이다.
 자신은 존의 자욱을 좇아 이곳까지 왔다.
 다시는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이곳으로.
 막상 그 앞에 도착했으나 그는 멍청하게 선 채로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서있던 그는 허드슨 부인의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점차 기다리는 사람도 무엇도 없이 그저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고 떠밀리듯 움직였다.

 

*

 

 "...존?"

 

 그는 221B에 있지 않았다. 짐은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처럼 더듬더듬 뒷걸음질쳐, 주인 잃은 삭막한 방이 주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서 문을 닫았다.

 

*

 

 그리고 그는 뛰었다.

 

*

 

 아아,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다.

 

*

 

 모든 것이 무너지는 파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구보다도 똑똑하다고 자부했건만 막상 자신에게 닥쳐오는 파멸의 전조는 눈곱만큼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우매함을 원망하며 그는 확연하게 덜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건물의 옥상과 계단참 사이를 가로막는 철문을 밀었다.
 거짓말처럼 존 왓슨이 서있다.
 맨 처음, 셜록과의 게임을 마무리짓기 위한 한 수로서 그를 납치했을 때와 놀랍도록 똑같은 차림새. 처음과 끝은 맞물린다지만, 이렇게까지 똑같을 필요는 없을 터인데.
 짐은 끼익 소리가 나도록 철문을 열어젖힌다. 그 소리에 존이 뒤를 돌아본다. 아마도 지금 짐이 선글라스로 가린 눈과 똑같을 것이 분명한, 허무감에 찬 두 눈이 그를 응시한다. 짐은 손의 떨림을 억제하며 선글라스를 벗어 가슴팍의 주머니에 넣는다.

 

 "짐."

 

 그의 이름을 발음하는 목소리는 여길 어떻게 찾아왔냐는 듯 당황이나 놀라움에 차 있지도 않았고 들켜버렸다는 체념도 없었으며 슬픔이나 애틋함과 같이 비극적인 감상 단 한조각도 담겨있지 않은 무덤덤 그 자체였다. 짐은 입을 열었다가, 심호흡을 작게 한 번 하고 대답했다.

 

 "그래. 나야."


 셜록이 생의 마지막 숨결을 내뿜었던 마지막 장소에서 둘은 재회한다. 이 무슨 얄궂은 상황인가 싶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당연하고도 탁월한 선택.
 존은 다시 고개를 돌려 짐을 외면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올 줄은 몰랐어."

 

 존의 목소리는 가볍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마냥 인간의 목소리라면 가져야 하는 감정과 온도가 없이 그저 음절의 조합일 뿐인 음성이다. 그는 단단한 시멘트 바닥에 잘 뿌리박힌 것처럼 서 있으나 어쩐지 위태한 기색이 그 뒷모습에 배어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짐은 존을 바라본다.

 그는 불현듯 초조해져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선다.

 

 "존."

 

 일단은, 이름을 부른다.

 

 "존 왓슨."

 

 존은 무어라 한 마디 말도 없다. 짐이 필사적으로 말을 잇는다.

 

 "내가...미안해."

 

 서 있던 존의 신형이 파르르 떨리는 듯 싶다. 짐은 이렇게 하면 존이 이쪽을 돌아봐주려나, 그 위험스런 건물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이쪽으로 와주려나, 싶어 계속 말한다.

 

 "다 내 잘못이야. 이제 네 말대로 할게. 나쁜 일은 그만둘게. 존, 그러니 제발-"
 "거짓말!"

 

 그가 거칠게 고개를 돌려 짐을 향해 소리쳤다.

 

 "나에게 거짓말하지마!"

 

 순간적으로 크게 소리친 그는 그런 자신에게 놀라 입을 다물고, 짐도 갑작스런 그의 외침에 놀라 뭐라고 더 말하려던 입을 닫았다. 잠시의 휴지 끝에 존은 억제된 음조로 목소리를 내어 말한다.

 

 "이제, 서로에게 거짓말은 그만 하도록 해."

 

 침을 한 번 삼키고, 존이 말했다.

 

 "너는 변하지 않아. 나도 변하지 않아. 너는 네 말마따나, 자문 범죄자이고, 나는 추락한 사기꾼의 조수로...그대로일 거라고. 서로에게 기대할 수 없는 걸 기대한 우리가 잘못한 거라는 걸, 모르겠어?"

 

 존이 가냘픈 목소리로 짐에게 속삭였다.

 

 "거짓으로 덮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똑똑한 너라면 잘 알거야."

 

 존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차분함이 덧씌워진 어조로 말했다.

 

 "우린 그동안 서로에게 거짓말을 해왔어. 그리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연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끝낼 때가 온 것 같아."

 

 선언과도 같이 확고한 어조에 짐이 한 발짝 다가서며 손을 뻗는다.

 

 "존-"
 "더이상 다가오지 마."

 

 존이 짐의 말을 자르고 단호하게 말했다. 짐은 그 말을 무시하고,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간다.

 

 "제발, 존..."

 

 애원하듯 말한다. 그렇게 애원하듯 말할 뿐 아니라 진정으로 그는 애원하고 있다. 자부심을 넘어산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그가, 존 왓슨이라는 남자의 다음 움직임을 막기 위해 애원한다. 짐은 조심스럽게 존과의 거리를 좁히며 말했다.

 

 "일단 거기서 떨어져."

 

 단단한 시멘트 바닥의 끝자락에 서 있는 인영. 그 위로 익숙한 기억이 오버랩된다. 코트를 입은 키 큰 남자의 실루엣이 금발의 키 작은 남자의 실루엣과 겹쳐진다. 형편없이 깨어져 금이 간 유리가 아슬아슬하게 부서져내리지 않고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깨지기 직전의 금발의 남자는, 네모난 시멘트 건물 꼭대기에서도 끝의 끝 부분에 한 발을 걸쳤다.

 

 "거기서 떨어지란 말야!"

 

 짐이 존의 뒤에서 소리치지만 존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침착하게 남은 한 발을 올린다.

 

 "날, 버리지 마-"
 "잘 있어, 짐."

 

 두 목소리가 한 순간 겹쳐지고, 남자는 아래로-낙하, 추락, 비상...그 어떤 말을 써도 무방한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단절.

 

*

 

 깨어진 유리 조각은 하얗게 비산하며 빛을 흩날린다.

 

*

 

 침묵 속의 비명.

 

*

 

 그래. 그들은 섣불리 가까워져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셜록, 존, 그리고 짐. 그들이 이루고 있었던 삼각의 관계는 마치 숯덩이와 재무더기를 담고 있는 삼발이와도 같아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쓰러져 깨지고야 마는 것이었다. 각각의 다리는 연약하나 셋이 모여야만 비로소 삶이라는 것을 영위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셜록이라는 삼발이의 한쪽 다리는 부서져버렸다. 다리 하나가 빠진 삼발이는 무너지면서 남은 다리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뜨거운 잿더미를 쏟아놓는다. 하나의 다리가 무너진 즉시 다른 두 다리도 그 잿더미가 품고 있던 감당할 수 없는 불기운에 불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이루고 있던 삼각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는 이미 한참 전에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들이 그 사실을 외면하고 허위로 관계가 무너진 잔해를 포장하여 그럴 듯 하게 만들어놓았을 뿐. 존도, 짐도, 셜록이 사실은 살아있을 것임을 믿었다. 눈 앞에서 죽은 자의 죽음마저 불신하는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근거도 없이, 모래사장 위에 세운 누각처럼 허황한 믿음. 그러한 믿음을 가졌던 대가는 컸다.
 짐 모리어티는, 아니 한낱 어리석은 남자에 불과한 그 남자는 등줄기를 오그린 채 차오르는 고통을 삼켰다. 허위를 허위로 인식할 수 있게 되자 숨막힐 듯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마치 사실이라는 것이 칼날이 되어 그의 손목을 가르고 안의 동맥을 가르고 그의 차갑기 그지없는 생명을 담고 있는 뜨거운 피를 쉴 새없이 흘려내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누워서 그저 인내할 수밖에 없는 류의 고통이었다. 후...후후. 바람 빠지는 듯 짐이 웃었다. 자초한 것이었다. 스스로의 손목이 끊겨나가는 듯한 고통을 인내하며 짐은 더러운 침대 위에 누워 몸을 웅크린 채 조용히 웃었다. 한동안 그렇게.


 침대가 뜨끈한 무언가에 젖어 붉게 물들어가는가? 침대 위 남자의 손목은 피를 흘리어 창백해졌는가? 그 무엇도 확실치 않다. 진실이란 것은 본래 확실치 않은 것이므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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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짐존/100제/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독재

 

 짐 모리어티가 존 왓슨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이후 존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곱 개의 자물쇠가 달린 금고처럼 열리지 않는 존의 입은 짐과 섹스를 하면서 내는 신음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게 되었다. 짐은 존이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 것이 조금 심심했지만 존이 잠자코 자신의 곁에 머물러주는 것에 만족했다. 이후 짐은 존에게 약물을 투약하는 것을 중단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존에게 굳이 밝히진 않았다. 혹시 그가 달아날까 겁나서, 라고 스스로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솔직히 이유를 말하자면 그랬다.
 짐은 삭막한 방에서 존을 꺼내어 보안과 방음 시설이 잘 되어있는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존을 옮겼다. 존이 언제나 우울한 눈으로 방 안에 있는 몇 안 되는 가구를 훑어보는 것이 신경 쓰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호텔로 거처를 옮긴 이후 짐은 존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룸서비스로 주문할 수 있도록 호텔 측에 조처해놓았으므로 존은 자유 외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상태로 방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 존에게 마음을 쓰는 것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자신은 존에게 반해버린 것인가? 아니야, 하고 짐은 부인했다. 요즘 들어 습관적으로 존에게 중얼거리는 사랑해, 라는 말을 입 안에서 한 번 궁굴려 보았다. 그건 존을 구슬리기 위한 미끼에 불과해. 짐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존을 생각하면 무언가가 텅 빈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무시할 뿐이었다.

 

*

 

 짐이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나서 존이 있는 스위트룸으로 돌아와 단 하나뿐인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

 

 "귀여운 존, 얌전히 잘 있었어?"

 

 짐은 다정하게 말하며 현관으로 들어왔다. 마치 집에 들어온 가장이 자식들이 나와 자신을 반겨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짐은 가만히 서서 존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평소 같으면 존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자신은 미소를 지으며 존의 손을 끌어당겨 그를 품 속에 가두고 몇 번이고 진한 키스를 나누었을 것인데, 그런데...
 방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짐은 갑자기 화가 났다. 이렇게나 화가 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머리 속이 폭발 직전의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잘해줬는데, 감히 도망을 갔단 말이야? 역시 잘해주지 말 걸 그랬다. 이렇게 배신을 할 줄 알았다면 말이다.
 짐은 신발을 엉망으로 벗어던지고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왔다. 침대 매트리스가 출렁거릴 정도로 몸을 세게 던진 모리어티는 잘 꾸민 매무새가 흐트러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거칠게 좌우로 저었다. 열화가 치밀어오르는 그의 머리 속에서는 뇌세포들이 열심히 움직여 존을 되찾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마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몇 푼 쥐어주며 존 왓슨을 찾아오라고 한다면 반나절도 못 가 잡힐 게 분명했다. 혹시 모르니 생포하라는 지시를 해야겠군, 하고 생각하며 짐이 혀 끝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쓸었다. 사냥감을 눈 앞에 둔 사냥개가 느낄 법한 스릴이 심장을 강하게 때렸다. 이번에 데려오게 되면 호텔 방 안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발목에는 쇠사슬을 감아두어야겠다고 짐은 결심했다.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며 상반신을 일으킨 짐의 눈 앞에는-
 -존이 서 있었다. 목욕을 하고 나온 것인지 머리에선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샤워 가운을 걸친 채였다. 짐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존은 짐의 내부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살의 따위는 전혀 모르는 맑은 눈으로 그를 마주 응시해왔다. 존을 생포하겠다는 이런저런 조잡한 계획 따위가 돌아다니던 머릿속은 깔끔히, 계획 나부랭이를 치워버렸다. 다만 한 가지 생각과 한 가지 감정이 자리를 대신했다. 목욕을 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 그리고 안도감. 존은 그를 빤히 바라보는 짐에게 의아한 눈길을 보내며 수건으로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그 일상적인 평범한 몸짓이 왜 그리 큰 기쁨을 짐에게 선사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짐은 벌떡 일어나 존을 안아서 침대 위로 쓰러뜨리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목에 걸린 거추장스런 스카프며 넥타이를 풀어서 침대 바깥으로 던져버리며 짐은 존에게 씨익 미소지었다. 난처한 기색의 존이 자신의 아래에 깔려있는 모습에 새삼 흥분하며 짐은 존을 잡아먹을 듯이 입맞추었다.

 

*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으로 존을 안은 짐은 침대 아래쪽에 널브러져 있는 자켓 주머니를 뒤져 담뱃곽을 꺼냈다. 본래 담배를 많이 피우진 않지만 섹스 후의 담배의 맛은 각별했기에 그는 담뱃곽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고 라이터로 끝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한 모금 빤 그는 담배를 들고 있지 않은 한 손으로 옆에 누워있는 존을 어루만졌다. 그날따라 존은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대었다. 짐이 담배를 다시 한 번 깊게 빨며 말했다.

 

 "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그는 손가락을 존의 입술에 갖다대어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괜한 입술 물어뜯지 말고."

 

 존이 짐에 독려에 입을 열었다. 근 5개월 만에 입을 연 것이었기에 목소리를 낸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약간 잠긴 목소리로 존이 말했다.

 

 "오늘도...일 하고 온 거야?"
 "응."

 

 당연하단 듯 답하는 짐에게 존이 다시 물었다.

 

 "내가 아는...그런 일?"

 

 짐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입에서 내려놓고 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솔직히 대답해주길 원해?"

 

 존이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존을 슬쩍 외면하며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 일이 맞아."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짐이 존에게 사뭇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건 신경쓰지마. 음...오늘 오랜만에 함께 목욕할까?"

 

 망설이던 존이 입을 열었다.

 

 "짐."

 

 존이 처음으로 짐 모리어티의 퍼스트 네임을 입에 담았다. 그 사실에 짐은 기뻤지만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존이 다음에 입에 올릴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짐이 미처 만류하기 전에 존이 말을 이었다.

 

 "그 일...그만두면 안될까?"

 

 존이 꺼낸 말에 짐은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달콤하기 그지없던 담배 맛이 절로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장초를 협탁 위에 올려진 재떨이에 비벼끈 짐은 심호흡을 했다. 짐의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존의 표정이 덩달아 딱딱하게 굳었다.
 짐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알겠군."
 "뭘 알겠다는 거야?"

 

 존이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체념조가 섞여있었다. 짐이 하하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 옆에 지금까지 얌전히 숨 죽이고 있었던 이유를 말이야!!!"

 

 짐이 소리쳤다. 분노가 깃든 그 목소리가 방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존이 그를 진정시키려 손을 뻗으며 말했다.

 

 "짐, 진정해-"
 "나보고 진정하라고?"

 

 짐이 기가 차다는 듯 소리쳤다.

 

 "네가, 지금, 나보고, 진정하라고 말하는 거야?"

 

 짐이 소리치자 존이 말했다.

 

 "그래."
 "하!"

 

 짐이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걸치기 시작했다. 존이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내가 여기, 네 곁에 머물러 있던 이유가 뭔데?"
 "뭐?"

 

 난데없는 존의 질문에 짐이 바지 지퍼를 올리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바지 지퍼를 마저 올린 짐이 고개를 들고 반문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뭐라고 했는지 들었잖아. 난 그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으니까, 네 입으로 한 번 말해봐."

 

 존의 질문에 잠시 벙쪄 있던 짐이 숨을 몰아쉬고는 말했다.

 

 "넌 날 빌어먹을 '착한 어린이'로 개조하려는 속셈이었잖아! 셜록 홈즈처럼!"

 

 '셜록 홈즈'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존의 눈에 슬픔이 차올랐다. 닿을 수 없는 자를 향한 간절한 감정이 감긴 그 눈을 보며, 짐은 그동안 아무에게도 느껴본 적이 없는 질투라는 감정을 깨달았다. 존은 지금껏 자신과 몸을 섞으면서도 그 죽은 남자에 대한 사랑을 간직해왔던 것이다. 짐은 앞으로도 존의 열망이 향하는 곳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었다. 짐의 마음을 생전 처음 느끼는 질투가 좀먹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짐은 대수롭지 않은 듯 피식 미소지으며 구겨진 셔츠를 집어들어 팔에 끼우며 말했다.

 

 "나를 교묘히 속여서 천사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다니, 좋은 시도였어. 하지만 백년은 이르다고."
 "짐, 내 말 좀 들어봐."

 

 존이 말했지만 짐은 듣지 않고 계속해서 지껄였다.

 

 "너 그거 알아?"

 

 짐이 셔츠 단추를 꿰며 미친 사람처럼 낄낄 웃었다. 짐을 진정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존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셜록은, 너를 지키기 위해 죽었어."

 

 존의 눈이 커졌다. 입술이 달싹였지만 제대로 된 형태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짐이 큭큭거리며 웃어댔다. 눈 앞의 남자는 자신을 덮쳐오는 죄책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서슴없이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쏘아죽이고도 멀쩡할 수 있는 남자가, 그 남자 하나의 죽음으로 인해 끔찍하리만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여흥거리였다. 짐이 키득거리며 웃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존은 십년도 더 나이를 먹은 듯 피로한 인상이 되어버렸다. 죄책감이라는 거대한 호수에 잡아먹힌 남자. 짐은 남자를 보며 웃었다. 그는 남자를 철저히 무너뜨리기 위해 2차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네가 생각해봤는지는 모르겠는데,-"

 

 짐이 셔츠 깃을 단정하게 정리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셜록은 말이지, 분명히 어딘가에서 살아있을 거라고. 내가 다시 멀쩡히 살아돌아온 걸 보면, 그 녀석도 모종의 수를 써서 숨어있을 거야. 아직까지 내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고 잘도 숨어다니고는 있지만...분명 그 형이란 작자가 도와주고 있는 거겠지. 성가셔 죽겠다니깐."

 

 존의 안색이 짐의 말에 조금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보며 짐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지만 거짓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말했다.

 

 "그런데 널 찾아오지 않는 이유는, 필시-네게 질렸기 때문일걸."

 

 짐은 바닥에서 넥타이를 주워들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넥타이를 목에 매는 동시에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침대에 앉아있는 존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정말이지 상처받은 표정. 버림받아 길을 떠돌며 비에 쫄딱 젖은 강아지같이 처량한 표정이다. 짐은 그 표정을 보고 떠오르는 바를 이용해 존을 조롱했다.

 

 "하긴 애완동물이란 건 먹여주고 씻겨주고 돌보기 여간 귀찮은 족속들이니까. 셜록도 네 뒷치닥거리하는 게 지금쯤 질릴 때가 됬겠지. 2년 정도면 충분히 갖고 논 거니까 말이야, 안 그래?"
 "난...애완동물이 아니야."

 

 존이 미약한 목소리로 항변했지만 짐은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만약 셜록이 널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이런 널 과연 좋아할 수 있을까? 남자에게 엉덩이를 뚫리며 허리를 흔들고 좋아죽는-"

 

 존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짐의 말을 자르고 소리쳤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아니."

 

 짐이 넥타이를 말끔하게 매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변한 거야."

 

 한동안 방 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이라는 강한 무형의 것이 두 사람을 사정없이 짓눌러온다. 쉴새없이 떠들던 짐조차 말이 없다. 존이 침묵을 힘들게 떨치고 입을 열었다.

 

 "좋아. 네가 옳다고...치자."

 

 차마 직접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지, 라고 짐은 생각했다. 피를 뿜어내고 들이키는 기관일 뿐인 멍청한 심장이 바늘에 콕콕 찔리듯 아파왔지만 짐은 그 아픔을 무시하고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너도 날 속였잖아?"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존이 짐을 향해 말했다.

 

 "...'사랑해'라고 말하면서 나를 속였어."
 
 짐은 존이 이런 추궁을 해 올 때를 대비해 준비해놓은 대답을 말했다-아니, 말하려 했다. '그래, 그건 모두 거짓말이야. 그 말을 믿다니 정말 순진하군!'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입술을 떨며, 짐이 더듬거렸다.

 

 "그, 그건-"
 "네 말대로, 난 셜록을 사랑해. 그건 여전해."

 

 존의 말에 짐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존이 말했다.

 

 "하지만 네가 날 사랑한다고 했을 때, 난 생각했지."

 

 짐이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 존이 말을 계속했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좋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존이 그 말을 하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자기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렇지만...그래, 너도 알다시피...내가 틀렸어. 넌...사람 마음이나 갖고 노는 하찮은 일개 사기꾼에 불과했던 거야. 인간 군상들을 가지고 놀며, 네 딴에는 지배한답시고 우월한 기분에 젖어 사는 것이 네 유일한 즐거움이겠지."

 

 신랄한 비판을 퍼붓던 존이 문득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참 멍청하지...네 말을 믿다니 말이야."

 

 존이 눈가를 문지르며 짐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조그맣게 말했다.

 

 "어쩌면...계속 믿고 있는 편이 좋았을지도 몰라. 그랬다면..."

 

 존이 말을 맺었다.

 

 "정말로 너를 사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헛된 믿음이 나를 너무나도 아프게 해...


 존의 마지막 말이 짐의 두개골을 부술 듯 웅웅 울렸다. 그 울림은 어딘지 슬프고 기묘한 현기증을 동반하며 짐을 제자리에 못박힌 듯 가만히 서 있도록 만들었다.
 멍청하게 서있는 짐에게 일별도 하지 않고서 존은 침대를 벗어났다. 벗은 몸에 새 가운을 꺼내 걸치고, 존이 차가운 목소리로 짐에게 말했다.

 

 "나가는 거 아니었어?"

 

 지배를 부정당한 독재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머지 옷을 주워입고 초라한 뒷모습으로 호텔방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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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짐존]월후면 2

2013. 12. 1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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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존]월후면 1

2013. 12. 11.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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