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인]Love&Peace

2013. 12. 13. 02:09 from Mentalist/단편

조제인/발렌타인기념픽

 

 

 발렌타인 데이라고 해서 세상이 사랑과 평화로 가득찬다던가 하는 예외는 없었다. CBI는 오늘도 밀려드는 사건으로 바빴고 정시 퇴근은 바랄 수도 없었을 정도였으니까. 발렌타인 데이니 뭐니 해서 치정 사건만 두 배로 늘어난 데다가 바쁜 것은 두 배로 바빴으므로 조는 도대체 발렌타인 데이란 것이 왜 있는 것인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보통은 팀원들의 불평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맡던 리스본마저도 무려 하루동안 세 번째의 출동을 하고 나서는 '발렌타인 데이라면 그놈의 사랑의 힘으로 평화로워진 세상에서는 범죄율이 줄어들어야 정상 아니야? 근데 이게 뭐야!'하고 내뱉을 정도라면 말 다했지.
 최근 들어 CBI사옥의 다락방에서 둥지에 보물이라도 숨겨놓은 까마귀마냥 처박혀 있는 경우가 다반사인 제인은 웬일인지 오늘은 분주한 팀원들을 약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살랑거리는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잠시 들렀다가 그 후에는 어딜 갔는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서로에 대한 애정 표현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비밀 사내 커플에다가 슬슬 서로에게 무덤덤해질 때가 된 다년차 커플이라는 조건 하에서 교제를 이어나가다 보니 다른 일반적인 커플들마냥 몇 일 기념일, 몇 년 기념일 운운 하는 기념일 챙기기라거나 낭만적인 이벤트 따위는 멀리한 지 오래된 것이 사실이었으나, 하루종일 커플지옥을 함께 외치던 릭스비가 퇴근하려는 중에 사라가 찾아와서 커플 특유의 닭살돋는 애정행각과 함께 닭털을 사방으로 날려대는 것은 냉정한 남자 조로서도 어딘지 뒷맛이 썼다.
 빨리 집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을 제인과 오랜만에 연인다운 시간을 보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음날 홧병으로 출근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서둘러 발을 옮기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Agent Cho!"

 

 뒤를 돌아보자 웨이드 요원이 자신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난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다소 좋지 않게 헤어졌던지라 그녀의 웃음이 의외라고 생각되었지만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는 없었던지라 조는 예의바른 웃음을 띠며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오랜만입니다. CBI엔 어쩐 일이신지?"

 

 단도직입적인 조의 물음에 약간 당황했지만 그 놀람을 금방 극복한 그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쪽도 그랬겠지만 이쪽도 오늘 무척이나 바빴거든요. 연계 작업에 대한 서류를 처리하러 왔어요."

 

 그것뿐이라면 굳이 오늘 여기까지 올 이유는 없을텐데요, 라고 받아치려던 조에게 웨이드가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전해드리려고요."

 

 그녀가 내민 것은 포장한 초콜릿 상자였다. 자줏빛 포장지에 금색 리본으로 감싸인 작은 상자를 받아든 조는 이번에는 자신이 당황할 차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받아든 조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혹시-'라고 물으려는데 웨이드가 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예요. 걱정마세요. 당신이 걱정하는 그런-진지한...의미의 선물은 아니에요."

 

 자신이 정도 이상으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조가 표정을 풀고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친구에게 주는 발렌타인 초콜릿이죠."

 

 웨이드가 씩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애인이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뭐 골키퍼가 있다고 해서 골이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짖궂게 농담을 던지는 그녀에게 마지못해 웃음을 띠며 조가 말했다.

 

 "나도 초콜릿을 좀 사둘 걸 그랬습니다."
 "괜찮아요. 이건 뭐랄까...지난번에 제가 정도 이상으로 화를 내고 간 것같아서, 그에 대한 화해의 표시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그건 제 잘못에서 비롯된 일이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 조는 웨이드의 뒤에서 다정하게 팔짱을 낀 릭스비와 사라가 건물을 나서다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채 입을 벌리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내일이면 웨이드와 어디까지 진도를 나갔냐는 둥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설레발을 칠 릭스비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진 조는 빨리 이 자리를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웨이드와 어색하지 않게 자리를 파한 조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시간이 늦기 전에 제인을 근처 레스토랑으로라도 데리고 가서 연인다운 최소한의 행위-외식이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에 빠져 집 안에 불이 온통 켜져 있고 창문도 한두 개 열려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조는 안에 들어가서 난장판이 된 집 안의 광경을 보고 기함을 했다.

 

 "제인!"

 

 그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부엌에서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이 사태를 수습해보려는 발악이겠지만 아쉽게도 조는 제인에게 그럴 시간따위 주지 않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으로 가까이 가면 갈 수록 탄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느낀 조는 그제야 왜 집안 곳곳의 창문이 열려 있었는지 깨달았다. 탄냄새를 없애려 환기를 한 것이겠지. 제인답지 않게 사려깊은 행동이었다-아니, 이건 제인답게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티 안나게 감추려는 지극히 제인다운 행동에 불과했다.

 

 "조오..."

 

 제인이 탄 냄비를 손에 들고 울상을 지으며 뒤로 돌아섰다. 얼마나 부엌에서 악전고투를 치렀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머리칼은 평소와 달리 정리되지 않은 채로 헝클어져 있었고 파란 눈은 살짝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의 꼴은 더욱 가관이었는데,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넉넉한 하얀 와이셔츠 하나만 달랑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웃기는-하지만 몹시 섹시한 차림새에 하반신이 뿌듯해져오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조는 용서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 팔짱을 단단히 끼고 부엌 입구에 기대서서 위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어쩌다 부엌을 이꼴로 만든 거예요?"

 

 그 와중에도 제인이 들고 있는 냄비에서는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오고 있었다. 제인이 애써 연기를 흩으려 냄비를 흔들며 더듬더듬 말했다.

 

 "초콜릿..."

 

 또 그놈의 초콜릿 타령이란 말인가! 제인이 말을 이었다.

 

 "초콜릿을 녹이려고 했는데...자꾸 냄비 밑바닥부터 타고..."
 "그거 하나만 태운 겁니까?"

 

 제인 또한 나름대로 오랜만에 로맨틱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초콜릿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한 모양이었다. 그가 하고 있는 옷차림새-분명 인터넷으로 서툰 독수리 타법으로 더듬더듬 자판을 쳐서 '기념일에 연인을 불타오르게 하는 복장'등을 검색했을 것이 분명했다-에서 그것을 확신한 조는 제인을 꾸짖으려는 생각이 점차 누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도 조는 팔짱을 풀고 제인에게 다가가 그가 들고 있는 냄비를 받아들며 약간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제인은 약간 불안한 미소를 지으며 싱크대를 향해 턱짓을 했다.

 

 "사실 몇 개 더..."

 

 싱크대 안에 가득 들어찬 탄 냄비를 보고 만 조는 화가 누그러들다 말고 다시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길 잃은 아기너구리처럼 불쌍한 표정을 짓는 제인에게 차마 화를 낼 수 없었기에 조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일단 가서 창문 좀 닫고 와요."

 

 조가 그를 혼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는지 제인은 안도어린 미소를 만면에 가득 띠고는 활짝 열어둔 창문을 닫으러 걸음을 옮겼다.
 제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는 느슨하게 흘러내린 와이셔츠 밑으로 엉덩이가 보일락말락 하는 것을 잠시 넋 놓고 쳐다보다가 제인이 걸음을 멈추고 엣취, 하고 작게 기침하는 것에 정신을 차렸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제인의 뒤에 대고 조가 소리쳤다.

 

 "그리고 한겨울하고 어울리지 않는 그 옷차림도 어떻게 좀 하고 오십쇼."

 

*

 

 "거 보십쇼. 감기에 걸렸잖아요."

 

 특수부대 시절부터 다진 근육의 힘을 고작 냄비 밑바닥에 눌어붙은 탄 초콜릿을 긁어내고 검댕 자국을 한 점도 남김없이 지우는데에 낭비한 조는 제인을 따뜻한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나서 그를 이불로 꽁꽁 감싼 후에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냄비 태운 거야 그렇다 치고, 추운 날씨에 문 오래 열어놓고 있으니 당연히 감기에 걸리는 겁니다. 게다가 옷차림도 그게 뭡니까. 누가 들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잔소리를 하면서도 제인의 손에 손수 만든 핫 초콜릿을 들려주는 조를 제인은 헤헤 웃으며 올려다보았다.

 

 "뭘 잘했다고 웃습니까."

 

 차갑게 쏘아붙이면서도 제인이 앉은 거실 소파 바로 옆에 털썩 주저앉는 조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며 제인이 말했다.

 

 "그래도 좋았지?"

 "부정할 수는 없군요."

 

 살짝 제인을 외면하며 조가 중얼거리자 제인이 남자들이란, 하며 킥킥거렸다. 그가 웃자 조의 눈초리가 다시금 무서워지는 바람에 제인은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

 

 "초콜릿은 많이 받았어?"

 

 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웨이드 요원이 주더군요."
 "헤에."

 

 기울인 머리로 핫초코를 조심스럽게 홀짝이던 제인이 다시 물었다.

 

 "또?"
 "데스크 여직원 두 명. 그리고는 딱히 없었습니다."
 "흐응."

 

 다 마신 머그컵을 내려놓고 제인이 조에게 더욱 기대며 말했다.

 

 "나도 조한테 초콜릿 주려고 했는데."

 

 미묘하게 질투심이 어린 말에 기분이 좋아진 조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말해주지 않아도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초콜릿을 녹인다 어쩐다 하며 멀쩡한 냄비를 네 개나 망가뜨린 거겠죠. 대체 뭘 만들려고 그렇게 용을 써댄 겁니까?"

 

 조의 물음에 제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딱히 뭘 만들려고 그런건 아니고, 네가 일 끝나고 오면 초콜릿 녹인 걸 가지고-"

 

 제인이 조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하고 녹인 초콜릿을 가지고 두 연인이 할 수 있는 갖가지 일에 대해 속삭이기 시작했다. 귓가에 달착지근하게 와닿는 달콤하디 달콤한 속삭임에 그답지 않게 절로 뺨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조가 대꾸했다.

 

 "그거 참 아쉽군요."
 "그렇지?"
 "제가 초콜릿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말입니다."
 "Meh, 그러면 역할을 반대로 하면 되지. 내가 너한테 뿌리고 핥아먹으면 되겠네."

 

 쾌활하게 말하는 제인을 안으며 조가 말했다.

 

 "근데 그거 꼭 초콜릿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슬쩍 제인을 감싼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제인의 허리춤을 향하는 조의 손을 기분좋게 받아들이며 제인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니고 말고."

 

 이불이 활짝 젖혀지고 조가 제인을 소파에 쓰러뜨리린 후 키스하기 시작했다. 간만의 키스에 둘 모두 적극적으로 서로를 탐했다. 한동안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길고 긴 키스를 나누면서도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숨이 모자랄 지경이 되어서야 둘은 입을 떼고 숨을 들이마셨다.
 조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제인에게 속삭였다.

 

 "외식은 내일 합시다."
 "좋아."
 "그리고 초콜릿 대신 블루베리 머핀이나 잔뜩 사자고요."
 "당연한 말씀을."

 

 제인이 조의 말에 응수하며 이번에는 먼저 조에게 키스했다. 평화롭고 느긋하게 키스를 나누며 조는 생각했다. 발렌타인 데이는 정말 좋은 날인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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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조제인

 

 오랜만의 언더커버 작업이다. 조는 위장을 위해 정말로 간만에 꺼내든 고급 양복의 깃을 어루만지는 척하며 무선 도청기의 위치를 조정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전달된 것인지 귀에 끼운 통신기로 누군가가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마."

 

 리스본의 차분하고도 사려깊은 목소리다. 쓸데없이 감도가 좋은 통신기 너머로 릭스비가 징징거리는 것이 들렸다.

 

 "왜 이런 일은 모두 조 선배 차지인거죠? 저도 위장엔 자신있다고요!"

 

 아마 여자들과 시시덕거려야 하는 것이 부러운 것일 게다. 애까지 있으면서 아직도 속편하게 여자 타령이나 하다니 릭스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스가 조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거야 릭스비 선배가 더 잘 알텐데요."

 

 이번 업무는 사교 틀럽의 파티에 잠입하는 것이었다.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속한 클럽의 응접실에서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뿐더러, 사건을 수사하는 동안 용의자가 클럽의 회원들로 좁혀졌기 때문이었다. 다소 폐쇄적인 고급 사교 클럽의 특성상 출입마저 자유롭지 않은지라 대담하게 클럽의 응접실에서 피해자를 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살인사건이 일어난 시간에 알리바이가 명확하지 않은 클럽 회원들일 것이었다.
 클럽의 본래 규정대로라면 외부 관계자인 조가 이 파티에 끼어드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었지만, 타이밍 좋게도 오늘 열리는 파티는 일명 '1+1 파티', 즉 클럽의 회원이 회원이 아닌 사람을 동행할 수 있는 파티였다. 파티의 원래 목적은 새로운 회원의 유입을 위한 것이었지만, 리스본의 팀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살인 사건의 가해자를 가려낼 생각이었다. 고로 팀원들 줄 하나가 클럽 회원의 지인으로 가장하며 가해자일 법한 인물들을 떠보기 위해 파티에 참석해야 했다. 맨 처음에 수사를 나갔던 리스본과 그레이스는 이미 기존 클럽 회원들에게 얼굴이 알려졌으므로 당연히 제외. 제인은 말썽을 부리지 않겠다는 확언을 한 후에야 파티에 참석해도 좋다는 리스본의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두 명, 릭스비와 조였다. 파티에 대한-게다가 이번 파티는 수영장 파티였고 늘씬하게 잘 빠진 미녀들이 비키니를 입고 무리지어 있을 것이라는-기대에 차있던 릭스비를 제외한 다른 모든 팀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조를 지명하는 것이 아닌가. 오랜만에 임무다운 임무-그리고 덤으로 비키니를 입은 미녀, 또는 섹시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 구경-를 수행하리라고 기대했던 릭스비로서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넌 화술이 딸려."

 

 리스본이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현명하게도 '넌 입만 열면 아들 이야기밖에 안하잖아'라는 이야기는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릭스비가 냄새나는 아기 토나 묻히고 파티장을 자랑스럽게 활보할 모습이 그녀의 눈에 선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함으로써 정곡을 찌를 순 있겠지만 릭스비의 푸념-징징-은 한층 커질 것이었고 리스본은 그런 성가신 사태는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조를 지명한 이유는 또 있었다. 물러진 자신을 대신해 제인의 행동을 제어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제인의 행동에 제동을 걸 줄 알았고 조는 모르는 척 제인이 하자는 대로 동조하는 편에 속했다. 그러나 조가 서머와 사귀기 몇 주 전부터, 그러니까 서머와의 연애 행각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를 때부터 그들은 거의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다. 은근히 붙어다니던 것도 완전히 그만두고 조는 릭스비하고만 수사를 다녔다. 그레이스와 릭스비의 관계가 하이타워에게 들통이 나서 릭스비가 상심한 것을 위로하려는 것인가, 싶었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연의 일치인 것일까? 라고 리스본은 생각했으나, 그녀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었다. 그 전까지의 친밀했던 둘의 관계가 단순히 우정 수준의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리스본은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릭스비와 그레이스의 관계가 파토가 나서 꾸리꾸리해진 사무실의 분위기에 한 번 더 초를 칠 용기는 그녀에게 없었다.
 일의 전말이 어찌된 것이든 간에, 최근 들어 우울한 듯한 제인에게 물러진 자신을 대신해서 조가 더욱 냉철하게 제인의 탈선에 제동을 걸 수 있으리라고 리스본은 기대했다. 이번 일로 말미암아 둘의 관계가 최소한 직장 동료의 수준으로 회복된다면 더욱 좋은 일이고. 리스본은 그렇게 생각하며 클럽의 수영장 근처 수풀에 설치한 몰래카메라의 감도를 조절했다.

 아직도 징징대는 릭스비의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을 무시하며 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티니 잔을 기울이는 척 하며 제인이 있는 곳을 슬쩍 쳐다보니 제인이 특유의 넉살을 발휘해 그럭저럭 훤칠한 사내의 혼을 빼놓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하도 입어 주름이 눌다시피 한 제인의 옷에 경멸하는 눈초리를 보내던 남자는 제인의 화려한 언변에 현혹되어 정신을 못차리는 듯 했다. 자신이 용의자 중 하나에 속하는 줄도 모른 채 수사관과 무방비하게 이러쿵저러쿵하는 모습을 보니 범인일 리는 없었다. 보통의 범인들은 수사관들에게 경계심을 품고 말을 거의 섞지 않으려하게 마련이다. 좀 더 교활한 부류는 '수사는 어떻게 되어가나요?'라는 호기심을 가장한 질문을 던지면서 그들이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알고 싶어 속을 떠보려한다. 제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자는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다.
 수사선상에서 제외해도 되렸다, 라고 조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조의 머리와는 달리, 조의 눈은 제인과 그 옆에 선 남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가 제인에게 보내는 눈빛이 점차 다른 종류의 것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감지한 까닭이었다. 게다가 저 개자식이-어느새 호칭도 비속어로 바뀌어있다는 것을 조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은근슬쩍 제인의 허리에 손을 두르는 것이 아닌가! 그 빌어먹을 손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제기랄, 조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제인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의 손이 자신의 엉덩이를 슬그머니 어루만지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었다. 아니, 천하의 패트릭 제인이 남자의 어프로치를 모를리 없었다. 아마 묵인하고 있는 것이겠지. 설마 즐기고 있지는 않겠지? 조는 이를 갈았다. 아직 이성을 차리고 있는 조의 차가운 머리 한 구석은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말도 안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와 제인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이었으므로 그가 오늘 저 한량과 원나잇 스탠드를 즐기던, 아니면 옆에 있는 여자까지 포함해 스리섬을 즐기던, 아니면 이 파티에 초대된 모두와 난교 파티를 벌이던 조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보란 듯이 제인과 결별한 후 먼저 서머와 사귄 것은 자기자신이 아니던가.
 손에 든 칵테일 잔의 손잡이가 부러져라 꽉 쥐며 조가 그답지 않게 수사는 뒷전으로 하고 슬슬 농밀해져 하는 남자의 스킨십과 그것을 기분좋게 받아들이는 듯한 제인의 뒷모습-엉덩이를 노려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못 보던 분이네요."

 

 여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조는 굳었던 입매를 풀며 답인사를 했다.

 

 "예. 친구와 함께 왔는데 어쩐지 그녀석은 보이지 않는군요."
 "여자친구인가요?"
 "아쉽게도 그건 아닙니다."

 

 전 남자친구-아니, 섹스파트너인가?-와 같이 오긴 했지만 말입니다. 조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서머와 비슷하게 간드러진 목소리를 지닌 여자가 짐짓 수줍은 척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긴, 제가 그쪽의 여자친구였다면 이렇게 멋진 분을 방치하고 갈 리가 없는걸요."

 

 여자의 머리는 게다가 금발이었다. 제인처럼 황금빛 금발이나, 서머처럼 새하얀 빛깔의 실버블론드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금발은 금발이었다. 어슴푸레한 수영장 위를 비추는 조명에 빛나는 그녀의 머리칼은 언뜻 보면 제인의 금발 머리와 비슷한 듯도 했다. 조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이 답없는 놈아!'라고 꾸짖고는 여자의 칭찬에 답례인사를 건넸다.

 

 "과찬이십니다."

 

 여자의 은근한 대시에 장단을 맞춰주는 조의 귀에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은 제인 킹스턴. 한 번 캐보세요. 진술에 모순도 없고, 알리바이도 있는데, 그 알리바이를 증명해준 사람이 갑자기 증발했거든요. 어제부터 행방불명이예요."

 

 의심의 여지가 있군, 하고 조는 다시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혼자 오셨나요?"
 "그래요."
 "이런 미녀를 외로이 내버려두다니 여기 있는 남자들이 보는 눈이 없나보군요."

 

 후후 웃으며 조의 칭찬에 기분좋아하는 그녀에게 조는 이미 알고 있는 답을 얻기 위해 질문을 건넸다.

 

 "이름이?"
 "제인이예요. 제인 킹스턴."
 "저는 렉스 창이라고 합니다."

 

 준비한 가명을 말한 조는 한참을 여자와 시시덕거렸다. 원래 여자와 한담을 나누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조였지만, 제인과 3년간 함께하면서 의도치 않게 늘어버린 말솜씨로 그녀를 살살 구슬리니 별의별 이야기가 다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얌전해 보이던 여자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상당한 가십 여왕이었다. 우아하게 자신은 쏙 빼놓고 남들을 은근히 욕하는 솜씨가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조는 약간의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이쯤 들어줬으면 됐겠지, 싶어 조는 슬슬 과감한 질문을 던지려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 했다.
 갑자기 비명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수영장에 풍덩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영장에 입수하여 자신의 물에 젖은 몸매를 뽐내려는 골빈 여자의 비명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패트릭 제인의 비명 소리였다. 비명을 지른 사람이 제인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즉시 조의 고개는 번개보다 빠르게 뒤로 돌아갔고 제인과 함께 수영장에 빠지는 다른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아까 전까지 제인의 엉덩이를 주물거리던 남자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는 일단 그쪽으로 즉시 달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조의 물음에 제인이 물을 먹었는지 콜록거리며 말했다.

 

 "저, 저 사람 잡아!"

 

 제인과 같이 빠졌던 남자는 양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륜한 수영 실력을 과시하며 풀의 가장자리로 나오고 있었다. 조는 그쪽으로 달려가 남자를 다시 물 안으로 밀었다. 그 와중에 조도 수영장 안으로 빠지고 말았다. 물 속에서 첨벙거리며 두 사람이 육탄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릭스비가 감시실에서 달려나와 남자를 제압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니깐 죽은 남자와 저 남자-바비 포츠-는 섹스 파트너였던 거야. 순조롭게 이어지던 두 남자의 관계는 포츠의 사업이 하락세를 타게 되고 클럽에서 쫓겨나게 될 위기에 처하자 함께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지. 죽은 남자는 포츠와의 관계를 끝내고 싶어했고, 포츠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 그리고 사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돈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지."
 "그래. 난...화가 나서...화가 너무 나서...홧김에..."

 

 제인의 뻐기는 듯한 설명을 듣고 있던 바비 포츠가 더듬더듬 말했다.

 

 "범행 사실을 인정하셨군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증인이 되어 줄겁니다."

 

 리스본이 그 점을 짚자 포츠는 갑자기 흉폭해져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변호사! 변호사를 대동하지 않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거요!"

 

 그레이스는 남자를 단번에 제압하고는 그를 한심하단 듯 바라보며 미란다 원칙을 읊기 시작했다. 제인은 그 옆에서 특유의-범인들의 부아를 돋구는 전형적인 약올리는-말투로 감정조절장애라도 있으신가 본데, 감옥에서 몇 년 구르다 보면 자연히 나아질 걸요, 하고 조잘거렸다. 제인에게 달려들려는 포츠를 제지한 후 리스본과 힘을 합쳐 근처에 대기시켜놓은 경찰차에 그를 태운 릭스비가 조와 제인에게 소리쳤다.

 

 "사무실로 가요! case-closed 피자 먹어야죠."

 

 조가 그런 릭스비에게 자신의 몰골을 좀 보고 이야기하라는 듯이 자신을 가리켰다. 그도 그럴것이 조는 쫄딱 젖어 도저히 차에 탈 수가 없었다. 차 시트가 모조리 물에 젖어서 쭈글거리게 되는 것을 감수할 것이 아닌 이상 말이다.
 릭스비는 '그럼 늦게라도 와요. 치즈 피자 몇 조각은 남겨둘테니깐'하고 덧붙이고는 리스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뒤로하고, 일단 물의 무게 탓에 무거워진 양복 재킷을 벗었지만 상황은 그대로였다. 진한 색상의 와이셔츠를 입었기 때문에 딱 달라붙은 것이 덜 민망해서 다행이었다. 이 꼴을 어떻게 수습한담, 하고 고민에 빠진 조의 옆에서 조와 같이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하고 있던 제인이 클럽 건물 쪽으로 고개를 까닥이며 눈짓했다. 조가 그를 쳐다보니 제인이 한 손으로 젖어버린 곱슬머리를 털며 말했다.

 

 "따라와."

 

*


 파토가 난 파티의 잔해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인파를 비집고 용케 파티의 호스트를 찾아낸 제인은 그를 구슬려 여벌의 옷을 부탁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멍해있던 호스트는 제인의 구렁이 담 넘어가듯 청산유수같은 설득에 어렵지 않게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행히도 클럽 건물의 고용인들 전용 건물에는 웨이터를 위한 여벌의 양복 바지와 상의가 상비되어있었기에 개중에 사이즈가 맞는 것을 일단 골라 입고 나중에 다시 갖다주기로 약속한 그들은 건물 열쇠를 받아들고 락커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여벌옷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조의 물음에 제인이 메, 하는 특유의 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 서빙하던 사람들 중에 자기하고 안 맞는 사이즈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꽤 있길래 찍어본 것뿐이야. 그래도 예상이 맞아떨어져서 다행이지 뭐."

 

 그렇게 말하며 락커룸의 문을 연 제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음..."

 

 탈의실이 따로 없이 탁 트인 락커룸의 구조를 본 제인이 의미모를 신음성을 내었다. 한때나마 친밀했던-친밀하다 못해 서로의 성감대 등에 대해 속속들이 알기까지 하는-사이였던지라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함께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이 넉살좋은 제인으로서도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곤란함을 감추지 못하는 제인의 심정을 눈치챈 것인지 조가 먼저 라커룸 안으로 들어서며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어서 갈아입죠. 그대로 있다간 단단히 감기에 걸릴 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먼저 바지를 벗기 시작하는 조의 태도에 오히려 머쓱해진 제인은 괜히 의식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후회를 약간 느끼며 재킷을 천천히 벗었다.
 텅 빈 락커룸 안은 을씨년스러웠다. 미비한 조명 시설 탓에 간헐적으로 깜박이는 조명은 얼음처럼 차가운 빛을 뿌렸고 제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들 하고 떨었다. 제인은 문득 락커룸 한쪽 전면에 붙어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 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무람없이 옷을 훌렁훌렁 벗고 옷을 갈아입는 조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몰래 훔쳐보는 제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아까 자신과 포츠가 환담을 나누고 있을 때의 조의 시선을 눈치챈 탓이었다. 사실 그의 시선을 느꼈기에 물리쳐도 되었을 포츠의 희롱을 받아들인 감도 없잖아 있었다는 것을 제인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할 때의 마음 속에서 불쑥 올라온 망설임을 의식하고 나니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도 더욱 생각이 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CBI에 들어간 이유는 레드존을 잡기 위해서였잖아.
 제인은 자신에게 되뇌었다. 조에 대한 감정이 잔류하여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그 자신에게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레드존에 대한 집착 때문에 조와의 관계에 소홀했고, 화가 난 조의 이별 통보를 받은 것도 자신이었다. 말하자면 귀책 사유는 자신에게 있었기에 지금 와서 만회하고 싶다고 해서, 되돌리고 싶다고 해서 되돌려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몸뿐인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것뿐이었다. 제인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손을 재게 놀려 옷을 벗었다. 속옷까지 푹 젖은 하의는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기에 일단 상의부터 벗기로 한 제인은 되도록이면 조의 몸뚱이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조끼를 재빨리 벗고 와이셔츠의 단추까지 푸른 후 옷장 안에 걸린 와이셔츠를 향해 손을 뻗었다.

 

 "!"

 

 같은 옷걸이를 향해 뻗은 두 사람의 손이 부딪혔다. 무의식중에 서로 등을 돌린 채로 옷을 갈아입고 있느라 몰랐지만 조는 이미 하의는 전부 갈아입은 것인지 까만 웨이터용 정장 바지를 입고 상의는 벗은 채였다. 생각에 잠겨있느라 옷을 빨리 갈아입지 못한 제인이 여전히 젖은 상의와 하의를 걸친 상황이라는 걸 파악한 조가 먼저 손을 뒤로 물렸다.

 

 "먼저 입으십쇼."
 "-아, 고마워."

 

 조의 말에 제인이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며 옷걸이를 집어들어 젖은 셔츠를 벗고 하얀 와이셔츠를 걸쳤다. 그 모습을 곁눈으로 보고 있던 조는 계속 서있는 것에 지친 듯 락커들 사이에 놓인 길고 네모난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고 나서는 굳이 몰래 훔쳐보지 않겠다는 것처럼 대놓고 제인을 바라보기 시작한 조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던 제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단추를 잠그는 손이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여 단추가 제대로 꿰어지지 않는 것을 조는 놓치지 않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뭘 참을 수 없었는지는 조도 잘 몰랐다-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조는 제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뭘 그렇게 의식하는 겁니까?"

 

 찌르는 듯 날카로운 조의 말에 제인의 손이 멈추었다.

 

 "하하...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목소리는 쾌활했지만 제인 자신의 손이 멈췄다는 사실을 제인도, 조도 알아차리고 있었다. 제인이 급히 다시 손을 움직여 단추를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며 한숨을 쉰 조는 드물게 화가 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차인 건 난데, 왜 당신이 그렇게 동요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거듭 노력했지만 단추는 손아귀에서 도망가기라도 하듯 제대로 채워지지가 않았다. 제인은 단추를 똑바로 채우는 것은 포기하고 락커 한 편에 기대었다. 힘없이 몸을 기대는 것에 제인의 무게에 눌린 양철 락커가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었다.

 

 "헤어지자고 그런 건 너잖아."

 

 눈에 띄게 꺼져들어가는 듯 나직한 목소리. 눈을 내리깔고 입을 굳게 다문 제인의 표정에 한편으론 안타까움을 느끼는 조였지만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래요. 헤어지자고 말한 건 접니다. 하지만 그 상황으로 몰아간 건 당신이라는 걸 잘 알텐데요."
 "알지."

 

 신랄하기까지 한 조의 말에 제인은 더욱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소의 철면피같이 낯짝이 두꺼운 제인은 온데간데없었다. 조의 앞에 있는 건 검지손가락으로 누르면 푹푹 들어가버릴 것같은 푸딩같은 남자뿐이었다. 세상에, 푸딩같은 제인이라니! 전혀 제인답지 않은 그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난 조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제기랄,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처연한 표정의 제인을 당장이라도 품에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간신히 억누르는 대신에 조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이 경우엔 내가 피해자란 말입니다!"

 

 조의 기세에 눌린 제인은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어깨를 편 제인이 마주 소리쳤다.

 

 "뭘 잘했다고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너라고 뭐 다른 줄 아나 본데, 전혀 그렇지 않거든? 아까까지만 해도 처음보는 여자랑 놀아났던 주제에!"

 

 피해자는 무슨, 하고 중얼거리는 제인에게 조가 항변했다.

 

 "그건 수사때문에 그런 거잖습니까! 게다가 놀아났다니요. 놀아난 건 당신이죠!"
 "여자랑 아주 사이가 좋아보이더구만 뭘!"
 "당신도 범죄자따위가 당신 엉덩이를 주물거리게 냅뒀잖아요!"
 "누군 수사하는 중 아니었나? 나도 그 놈 낚으려고 그런 거거든?"
 "허 참, 굳이 당신 몸을 바쳐가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내가 보는 걸 다 알면서도, 아니 내가 그 모습을 보니까 더욱 보란듯이 시시덕댄건 당신 아닙니까!"
 "참내, 보란듯 시시덕댄건 너잖아? 그러고보니 너 나랑 헤어진 다음부터는 금발 여자만 보면 헤벌레해서 달려들더라? 아까 그 여자도 금발이었고, 전에 릭스비랑 셋이서 스트립 클럽에 갔을 때도 금발 스트리퍼한테만 팁을 더 지불했었지 아마? 다른 여자들보다 가슴도 작았는데 말이지!"
 "하! 그 스트립 클럽에 가서 스트리퍼도 아니고 기도를 꼬신 당신은 그럼 뭡니까?"

 

 진지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로를 헐뜯는 성토장으로 변해버렸다. 아까 전의 애틋한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조와 제인은 열이 잔뜩 받은 채로 서로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삽시간에 조는-제인의 말에 따르면-금발 백인 여자만 보면 환장을 하는 색마로 몰려버렸고 간간이 내뱉는 조의 해명은 변명으로 치부되어버렸다. 제인도 역시-조의 말에 따르면-근육질 남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방탕하고 엉덩이 가벼운 게이가 되어버렸음은 물론이다(조는 이게 모함이 아닌 것만 같다는 생각은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진흙탕 싸움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말다툼의 대미는 역시 제인이 장식했다.

 

 "어차피 나랑 헤어져도 나 닮은 여자밖에 못 만날 거면서!"

 

 그 말을 들은 조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자마자 실수했다는 것을 자각한 제인은 조가 정말로 화가 났다는 것을 감지하고 아차 싶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몇 발짝 가다 못해 락커가 등에 부딪혔고 제인은 조의 주먹이 날아올 것을 대비해 눈을 꼭 감았다.
 쾅!
 요란한 소리가 제인의 귀 바로 옆에서 울렸다. 순간적으로 눈을 더욱 질끈 감았던 제인은 기다리고 있던 통증이 느껴지지 않자 살며시 눈을 떠 소리가 울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조의 주먹이 자리하고 있는 락커가 형편없이 찌그러져 있었다. 저 주먹이 자신의 면상에 내리꽃혔다면 멍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조."

 

 조가 겁먹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인을 바라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당신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그게 무슨-하고 물으려던 제인의 입을 조의 입이 막았다. 조가 제인의 입술을 집어삼키듯이 난폭한 키스를 하는 것에 몇 번 반항같지도 않은 반항을 하던 제인은 곧 씩 미소지으며 조의 허리를 끌어안고 적극적으로 그 키스에 답했다.
 몇 분 간 이어진 키스가 가까스로 끝나고 입을 뗀 두 사람의 입술 모두 서로의 타액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길게 이어진 키스에 탈진한 제인이 머리를 뒤쪽으로 기대고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했다.

 

 "...미안해."

 

 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인이 계속해서 말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야."
 "사과치고는 참 성의가 없군요."

 

 조가 투덜거렸다. 제인이 피식 웃었다. 입가에 가득 묻은 타액을 닦아내던 조는 갑자기 키스를 퍼부은 것이 민망해진 듯 제인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저도 죄송합니다."
 "뭐가?"
 "몸 좋은 남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고 해서요."

 

 조의 말에 제인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사과할 필요 없어."

 

 조가 묻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제인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난 정말로 몸 좋은 남자를 좋아하거든."

 

 제인의 말에 벙찐 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제인이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건데, 아까 너가 수영장에 뛰어들었을 때 진짜 멋있었다구."

 

 꼭 제임스 본드 같았어, 라고 익살스럽게 말하는 제인에게 조는 웃음기라곤 하나도 없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 우리 다시 사귀는 겁니까?"

 

 조가 직구를 던지는 것에 제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를 잠시 바라보다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입담이 늘었네."
 "제 앞에 있는 누구 덕분이죠. 이렇게 확언을 받아놓지 않으면 또 어떤 핑계를 대서 빠져나갈지 모르거든요."

 

 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 제인은 생각에 잠겼다. 그와 다시 사귄다 해도 지난번과 같은 이유로 또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제인은 잘 알고 있었다. 레드존에 대한 그 자신의 집착은 이미 그 자신조차 어찌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와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제인은 락커룸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워 조를 향해 다가가 그의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그래."

 

 결국엔 제인은 이성보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선택을 하고 말았다. 자신이 갈등했다는 사실에 대해 조에게 미안해진 제인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작게 말했다.

 

 "이번엔 나도 잘해볼테니까."

 

 그 말을 들은 조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제인을 꼭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화가 완전히 다 풀려버렸다는 것을 제인이 눈치채도록 하기 싫었기 때문에 그를 안아주는 대신 제인의 젖은 곱슬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당신만 잘하면 됩니다. 그나저나, 제 몸때문에 다시 사귀는 건 아니겠죠?"
 "아니거든!"

 

 곧바로 대꾸했으나, 스스로도 찔렸는지 '그 이유가 아예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말이야'라고 중얼거리던 제인이 말했다.

 

 "아 진짜, 말발이 너무 느니까 수줍은 맛이 없어졌어."

 

 입가에 약한 미소를 띠고 계속해서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기는 조에게 제인이 불평했다. 그러나 불평도 잠시, 제인은 조의 허리에 올리고 있던 손을 꼼지락거리며 조가 입은 바짓자락을 간질이더니 끈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보니 너...안에 팬티 안입었지?"

 

 락커룸에서 하는 거 스릴넘칠 거 같지 않아? 라고 조의 귓가에 속삭이는 제인에게 조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했다가 들켰다간 후폭풍이 장난아닐 겁니다."
 "하긴 그렇지?"

 

 일을 치르다가 들키기라도 하면-조와 제인의 체면은 둘째치고 CBI의 위명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점을 상기한 제인은 입맛을 다시며 락커룸에서의 박진감넘치는 섹스를 단념했다.

 

 "대신 집에 가는 길에 콘돔사서 갑시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콘돔을 사러 가자는 말을 하는 조를 다시 한번 휘둥그레진 눈으로 올려다본 제인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로 투덜거렸다.

 

 "진짜 너무 능숙해졌다니깐."
 "다 당신한테 배운거라니까요."

 

 그렇게 말한 조는 제인의 이마에 쪽 하고 뽀뽀를 해주곤 다시 말했다.

 

 "빨리 옷 입고 집에 갑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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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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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3. 02:06 from Mentalist/단편

조제인

 

 

 그러니까 그건, 패트릭 제인이 용의자에게 게이냐는 물음을 받고 웃어넘겨버린 일, 그리고 킴벌 조가 제인이 입혀준 섹시한 수트를 입고 바에서 여자를 후리는 임무를 맡았던 때에서 한참 나중의 일이다.
 그날 제인과 조는 제인의 스카이블루 색의 시트로엥에, 리스본을 비롯한 나머지는 CBI의 밴에 탄 채로 사건 현장으로 이동했다. 반은 사막인 지형에 차를 굴리니 자갈 때문에 차체 아래에서 드르륵, 하고 돌이 튕기고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낡은 시트로엥은 거기에 더해 돌무더기를 지나칠 때마다 심하게 덜컹거리기까지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건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제인의 시트로엥의 뒤쪽 바퀴가 펑크가 났다.
 리스본이 그러니까 미리미리 차 수리도 받고 그랬어야지, 라는 말을 꺼내려는 찰나,

 

 "그러게 내가 진작 차 점검 좀 하라고 그랬죠."

 

 라고 조가 말했다. 리스본은 어쩐지 멋적은 느낌에 반쯤 열었던 입을 다물고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조의 타박에 제인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이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하필 이런 곳에서 펑크가 날 줄 누가 알았겠어."

 

 예비 타이어는 있어요? 뒷트렁크에 하나 있는 것 같았는데...조와 제인의 대화가 사뭇 다정다감하고 매끄럽게 이어졌다. 펑크난 바퀴에 대해 뭔가 말을 하고 싶었던 릭스비, 반 펠트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어쩐지 제인과 조, 둘 만의 세상을 방해하는 불청객이 된 느낌이 들어 슬금슬금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펑크난 바퀴도 바퀴였지만, 무더운 날씨에 금방이라도 부패할 지도 모르는 시체를 보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제인은 일단 시체를 살피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지역적 특성 탓도 있겠지만, 언제나 화창한 캘리포니아의 날씨의 특성과도 결합되어 사건 현장은 매우 더웠다. 사건 수사의 총책임자인 리스본이 외투를 벗는 것을 시작으로 다들 하나 둘씩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는 와중에도 제인은 주변의 온도를 느끼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전히 스리피스 차림을 고수하고 있었다.
 어느새 재킷을 벗고 소매까지 둘둘 감아올린 릭스비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제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제인, 안 더워요?"

 

 제인은 허리를 굽혀 시신의 이모저모를 살피며 말했다.

 

 "별로?"

 

 어느샌가 릭스비의 뒤쪽으로 온 조가 말했다.

 

 "제인은 원래 그래."

 

 기척도 없이 나타난 조때문에 깜짝 놀란 릭스비가 뒤를 돌아보며 더듬거렸다.

 

 "조...조 선배. 언제 오신 거예요."
 "방금."

 

 릭스비는 우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갑자기 나타나시면 저 놀라요."

 

 조는 그런 릭스비를 덩칫값 좀 하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때 제인이 말했다.

 

 "있잖아, 이건 사건이고 뭐고가 성립되지 않는 것 같아."

 

 머리 고무줄이 없어 손으로 머리를 모아쥐고 있던 리스본이 제인에게 말했다.

 

 "설명해."

 

 제인은 시체 감식반 중 한 명에서 시체를 뒤집어달라고 부탁했다. 냄새는 잘도 맡으면서 직접 만지기는 아무래도 꺼림칙한 모양이다. 하긴 제인은 수사 자문가라는 직함에 걸맞지 않게 겁이-드럽게-많으며 조금만 위협해도-깨갱 하며-얌전해진다는 특성이 있다는 것은 리스본의 팀이라면 누누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시체의 뒷모습만 보았을 때는 상당히 남성적이었다. 구겨진 가죽 자켓, 때에 전 티셔츠, 해지고 낙낙한 청바지, 키도 어지간히 큰 데다 거의 손질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 것 같은 헝클어진 짧은 밤색 머리를 보면 조금 여윈 체격의 남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뒤집힌 시체에게는 봉긋한 가슴이 확연히 보였으므로 여자로 판명이 났다. 제인은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바지 주머니에서 삐져나와있는 열쇠고리, 그리고 재킷에 달린 와펜과 뱃지를 보라구. 캘리포니아 사막 트래킹 협회(CDTA). 고인은 생전에 이런 오프로드 트래킹을 아주 즐겨하셨던 모양이야. 내가 알기로는 이렇게 험한 사막 지형에서 트래킹을 할 때는 2륜, 보통은 3륜 구동 전동차를 타고 한다고 하더라고. 게다가 고글이 부착된 헬멧도 필수이고 말야. 눈에 먼지가 들어가면..."

 

 제인인 눈이 쓰리다는 표정을 지어내보이며 웃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지? 그런데 이분을 보면 목에 졸린 자국이 있고, 고글도 없고 헬멧도 없고 전동차도 없어. 그러니까 고인은 지나치게 신나게 사막을 주행하다가 2륜 구동인지 3륜 구동 차에서 튕겨나와서 목이 부러져 사망한 것 같아."

 

 리스본이 말했다.

 

 "목이 졸린 자국이 있다면 타살 가능성도 있지 않아? 사막에서는 아무래도 족적이 쉽게 지워지게 마련이니까 그런 점을 노린 사람의 소행일수도 있잖아."

 

 제인이 손가락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아니, 목이 부러질 정도로 조르면 저렇게 밴드에 묶인 것처럼 자국이 나진 않잖아. 가정이지만, 차에서 튕겨나올 때 느슨하게 묶고 있던 헬멧이 고인의 사인일 확률이 높아. 헬멧 끈이 목을 졸랐을 때 자국이 생기고, 바닥에 떨어졌을 때 목이 부러졌을 거야. 그리고 즉사한거지. 내 생각엔 이 주변 모래언덕을 조금 파헤치다 보면 헬멧이랑 3륜 구동이 나올 것같아."

 

 그렇게 마무리를 지은 제인은 씨익 웃어보이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휘적휘적 걸어갔고 제인의 말을 들은 수사팀과 그 외 인원들은 수색을 시작했다.

 

 주변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먼 언덕을 파헤친 결과 제인의 말처럼 하도 타서 너덜너덜하게까지 보이는 3륜 구동차와 헬멧은 찾아낸 수색팀은 제인을 신기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제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외면하며 홀연히(?) 사라지고 싶었으나 제인의 애마인 시트로엥은 현재 한 바퀴가 푹 주저앉은 상태. 다행히 예비 타이어를 트렁크에 넣어놓았던 것이 시간을 절약해주기는 하였다. 그러나 웬만하나 기계는 혼자서도 잘 고치는 제인이 현재 처한 상황은...
 ...허리가 아프다.
 매우.
 어젯밤 조와 제인은 여타 다른 밤들과 마찬가지로 화끈하게 불타올라 침대에서-물론...다른 곳에서도-거사를 쿵떡쿵떡 벌렸던 것이다. CBI 모두가 알아주는 근육맨인 조는 평소에 단련해둔 강철같은 체력과 힘을 애꿎은(?) 제인에게 발산하는 덕분에 제인은 현재 타이어를 드는 건 물론이고 갈아끼는 것은 더욱 무리인 상황이었다.
 제인이 타이어를 보며 망설이고 있자 조가 다가와서 타이어를 번쩍 들고 제인의 차 뒷바퀴 쪽으로 갔다. 사실 지금까지 어젯밤 유난히 자신의 위에서 열심이었던 조를 욕하고 있던 제인은 조금 마음이 누그러져 조의 곁에 주저앉아 조가 하는 일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 수색이 끝나 할 일이 없던 수색팀의 여직원 한둘과 리스본 팀도 둘러서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조 또한 기계치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름 수월하게 퍼진 바퀴를 떼어내고 있었다. 성가시게도 그 바퀴는 퍼진 바퀴주제에 차체에 고정되어서 빠지지도 않아, 조는 미간에 힘을 살짝 주며 양 팔로 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뙇!!!!!!!
 조의 단단한 팔뚝의 근육이 부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까지 빠지지 않을 것만 같던 바퀴가 쑥 하고 빠져나왔다. 제인을 비롯해 둘러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여담이지만 조의 팔근육은 보디빌더의 그것처럼 울룩불룩 부담스럽지는 않아서, 부풀어 올라도-제인의 눈에는-남자답고 멋져보이기만 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다른 여직원들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지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눈이 풀린 채 조의 팔뚝을 핥을 듯이 쳐다보았다. 빼낸 바퀴를 저편으로 치운 조는 금세 간이 공구를 가지고 뚝딱뚝딱 하더니 새 바퀴를 차체에 붙였다. 언뜻 보기에는 펑크 나기 전의 차처럼 멀쩡해 보였다. 제인이 물었다.

 

 "근데 조, 전직이 카센터 수리공이라도 되는 거야?"

 

 조는 아주 잠깐, 말이 없다가 말했다.

 

 "...예전에 차나 오토바이를 자주 다뤄봤어서요."

 

 '예전에'라는 말이 조가 폭주족 갱 멤버였을 시절이라는 것을 간파한 제인은 해죽해죽 웃으며 그렇구나, 라고 말했다.
 조의 팔뚝에 홀딱 반한 여자들은 수줍게 소근거리며 조를 힐끔힐끔 훔쳐보기 시작했다. 그러한 시선은 리스본의 팀 전체가 사막 지대를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

 

 조와 제인이 시트로엥으로 CBI본부까지 가는 동안 나머지 팀원들은 밴 안에서 쑥덕거렸다.

 

 "조 선배는 분명 여러 여자 울려왔음에 분명해요."

 

 릭스비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자 반 펠트가 말했다.

 

 "에이, 말도 안되요. 아까 여자들 중에 조 선배 번호따려고 은근히 접근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조 선배는 그런 시도 자체를 모르는 것 같던데요?"
 "아니야, 아니야. 조 선배는 모르는 척 하면서 능숙하게 대시를 거절한 거라고."

 

 반 펠트가 그런가?라고 중얼거리자 릭스비가 리스본까지 설득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세요, 반장님. 그동안 조 선배가 사무실에 데려온 미녀들을요."

 

 사실 그렇게 많이 데려온 적은 없지만, 릭스비가 그렇게 말하니 많아보인다는 생각도 들었다. 리스본이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자, 릭스비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때까지 조 선배가 여자가 궁해서 소개팅을 시켜달라던가, 그런 이야기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요."
 "그래, 너와는 달리 말이야."

 

 리스본이 놀리며 말하자 릭스비가 발끈하다가 하던 말을 이었다.

 

 "어쨌든 말이죠, 그렇게 혈기왕성한 남자가 애인 하나 없다는 거는 숨겨놓은 애인이 있거나, 그동안 너무 여자를 많이 사귀어봐서 질렸다거나, 아니면...게이이거나 이렇게 세 가지거든요."

 

 두 여자는 릭스비가 말한 세 번째 경우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이, 그건 진짜 말도 안되."
 "그래요. 게다가 조 선배 할머님께서 조 선배 결혼시키려고 얼마나 애를 쓰신다는데, 설마 게이라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릭스비가 두 여자의 맹렬한 비판에 약간 수그러든 어조로 말했다.

 

 "그러면 여자가 있거나 예전에 아주 많았거나, 두 가진데 지금 조 선배는 애인이 없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리스본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그건 그래. 딱히 너처럼 회의 시간에 책상 아래에서 문자질하는 건 못 본 거 같다."

 

 반펠트가 리스본이 한 말에 킬킬거리자 릭스비는 또다시 발끈하였다.

 

 "저 안그랬거든요!"
 "안그러긴 뭘 안그래."

 

 잠깐 동안 쪼인 릭스비가 다시 말했다.

 

 "반장님이랑 다들, 조 선배 연애경력이 궁금하지 않아요? 사실 우리 조 선배 사생활도 잘 모르고 그렇잖아요."
 "나는 아는데. 난 반장이니까."

 

 오늘따라 호구 노릇을 잘해주는 릭스비 놀리기에 맛들린 리스본이 쿨한 어조로 말했다. 반 펠트는 킥킥거리다 못해 배꼽을 잡기 시작했다.

 

*

 

 밴에서 수군거리며 조의 과거 연애사를 알아낼 계략을 짜낸 세 명은 시끌벅적 떠들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실 안에 제인은 없고-분명 차를 타러 간 것이 분명했다-조 하나만 남아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 조의 책상 곁으로 다가간 릭스비가 물었다.

 

 "조 선배, 키스 몇 번 해봤어요?"

 

 조가 별 이상한 질문을 다 한다는 표정으로 릭스비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

 

 질문 자체를 무시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셋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평상의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밴 안에서 내기를 했거든. 릭스비는 조 네가 엄청난 카사노바일거라고 주장하고 있고, 반 펠트는 네가 순정파 민들레일거라고 주장하고 있거든."

 

 자, 20달러가 걸린 내기라고 어서 대답해, 라고 리스본이 말했다. 다들 갑자기 와서 웬 내기를 걸었다고 하니 영문을 모르는 조가 가만히 셋을 쳐다보기만 했다.
 사실 이건 조의 탐문과 심문 능력을 익히 알고 있는 리스본의 계책이었다. 거짓말을 하면 바로 들통이 날 것이 뻔하니, 그냥 내기를 기정사실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의심은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으니 이제 조의 저 꾹 다물린 입을 릭스비가 열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조 선배,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거니까 빨리 말해줘요. 왠지 많을 것 같은데."

 

 쓸데없이 길게 말하는 릭스비의 옆구리를 반 펠트가 꼬집었다. 릭스비를 수상쩍다는 듯 보던 조는 다시 서류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별로(Not a few)."

 

 조의 대답을 들은 릭스비가 빙글빙글 이겼다는 미소를 지으며 반펠트를 보며 으쓱거렸다.

 

 "거봐, 내가 그랬지? 역시 선배 키스 잘하나 봐요?"

 

 조가 릭스비 쪽을 흘끗 째려보며 말했다.

 

 "해볼래?"

 

 릭스비가 워워, 라고 말하며 한 발 물러나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예요."

 

 그리고 리스본이 마지막으로 뭐라고 쐐기를 박으려던 찰나-

 

 "조 진짜 키스 잘해."

 

 모두의 뒤를 쥐도새도 모르게 기척도 없이 쓱 지나간 제인이 소파에 털썩 앉아 찻잔을 들어 호록 들이키며 말했다.
 그리고, 모두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잠깐의, 아니 긴 시간 동안 침묵이 흘렀다.
 북풍한설처럼 싸늘한 정적이 사무실 전체를 내리눌렀다.
 릭스비, 리스본, 반 펠트가 동시에 말했다.

 

 "...어떻게 알아요?"(물론 리스본은 요 자를 붙이지 않았겠지만...)

 

 차에 정신이 팔려있던 제인이 셋의 질문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셋의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그 표정과 얼굴 전체에 'Shit!'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써붙인 조의 표정을 번갈아 쳐다본 제인은 제인의 사전에 위기탈출 넘버원 수칙인 아이같이 순진하고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특유의 살랑살랑한 몸짓으로 소파에서 일어나서 슬금슬금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어...실수했네."

 

 문가에 서서 데헷☆하는 미소와 함께 한쪽 눈을 찡긋한 제인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그답지 않게 잽싼 몸놀림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뒤에서는 조가 아이고 두야...라며 머리를 싸맸고, 리스본은 잠깐 제인! 하고 제인을 붙잡으려다 실패했고, 다른 둘은 조와 제인을 번갈아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CBI의 오래된 전설이 있다.

 

 그리고, 제인이 문제의 발언을 하고 사무실이 초토화가 됬을 당시, 투명드래곤 급의 존재감을 지닌 루터 웨인라이트 국장이 사무실에 왔다가 뭔지 모를 분위기에 밀려서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는 전설도...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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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

 

 

 침실 안으로 들어간 조는 일단 이물질이 묻었다고 의심되는 침대 위의 시트며 이불을 싹 다 걷어서 빨래 통에 던져 넣었다. 세탁실을 나오며 벽에 걸린 시계를 문득 보는데 열한 시가 조금 넘었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모닝섹스를 한 셈이다. 첫 섹스는 좀 더 은밀한 저녁나절에 좋은 분위기 속에서 하고 싶었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까 전의 섹스를 돌이켜보았다.
 ...조는 제인에게 아주 짐승처럼 박아댄 자신을 떠올리고는 약간 안색이 붉어졌다. 남자가 자신의 뒤를 여는 모습이 역겨울 법도 한데 그 남자가 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엉덩이에 서슴없이 달라붙어 자신의 성기를 넣고 흔들다니. 게다가 마지막에는 제인의 안에 그냥 사정해버리지 않았는가.
 조가 다시 불끈거리려는 아들을 진정시키고 거실로 가자 제인이 맨몸에 시트를 두른 채 조를 향해 웃고 있다. 그 모습이 또 섹시하면서도 귀엽다. 수그러들락말락하던 아들이 다시 서버릴 것만 같은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제인이 시트 속에 파묻힌 채로 조를 향해 손을 내밀고 이리로 오라는 듯 까딱까딱 해댄다.
 조가 순순히 자기한테 오자 이제는 자기 옆에 앉으라는 듯 소파를 팡팡 친다. 조가 앉자 제인이 조의 팔뚝에 달라붙어 그의 단단한 근육을 살살 만지는 느낌이 부드럽다.

 

 "뭐라도 좀 먹어야지 않겠습니까?"

 

 조가 말하자 제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근데 어제부터 나한테 자꾸 뭘 먹이려는 거 같은데, 날 살찌워서 잡아먹으려고?"

 

 조가 말했다.

 

 "제인은 병원에 입원한 후부터 영 먹질 못했어요. 거울을 보면 알겠지만 살이 눈에 띄게 빠졌습니다."

 

 그렇구나...라고 제인이 멍하게 대꾸했다.

 

 조는 격한 섹스의 후유증으로 좀처럼 움직이질 못하는 제인을 욕실로 데려다 주었다. 제인은 엉덩이에서 흘러내리는 정액을 빼내면서 다음부터는 꼭 콘돔을 지참한 채로 섹스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조 바닥에 앉아서 뜨거운 물로 한참동안 목욕을 한 후에야 제인은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지만 간신히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욕조 가장자리, 수건걸이, 세면대를 차례로 잡고 겨우 똑바로 일어선 제인은 조가 말한 대로 자신이 정말 살이 빠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거울을 바라보았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턱살이 조금 얇아진 것 같기는 했다. 이런 정도의 변화를 알아채다니 조는 역시 예리한 관찰력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불규칙한 식습관에도 좀처럼 줄지 않던 몸무게가 줄었다니,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한 것인지 감이 조금 잡히는 듯 했다.
 어제 제인은 오랜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차만 줄창 마셔대며 수첩에 글씨를 끼적이며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과연 어떤 지뢰가 숨어 있을지 추론했다. 성과는 미미했지만 일단 조가 흘린 말에서 레드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알았으니 다소 범위를 좁힐 수는 있었다.
 그가 골머리를 썩이며 그가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 본 결과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신나게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주립병원에서 자신이 깨어났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높은 것은 납치. 상식적으로 그런 붐비는 장소에서, 그것도 CBI건물 바로 앞에서 CBI소속 수사 고문을 납치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었지만, 레드존은 CBI 수사본부에도 첩자를 두어서 한 팀 전원을 죽여 버린 전적도 있었던 터라 배제하기 어려운 선택지였다.
 또한 웬만한 정신적 충격은 거의 흘려버릴 수 있는 자신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릴 정도였으니, 그동안 어떤 형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종의 학대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단순한 육체적 학대라면 리스본이 그에게 말하기 꺼려할 까닭이 없으니, 생각하기도 싫지만 섹슈얼 하라스먼트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으니, 섣불리 단정 짓지는 않기로 했다.
 제인은 그 다음으로, 조에 관해 생각했다. 섹스는 만족스러웠고, 조가 겉으로는 냉정하지만 사실은 배려심있고 관계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남자라는 것을 제인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조에게도 자신은 레드존 문제에 대해서 조에게 털어놓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조는 자신을 제 옆에 가두기보다는, 자신이 레드존의 희미한 흔적을 쫓아가는 것에 필사적으로 따라올 것이다. 마치 같은 노선 상에서 운행하는 열차처럼. 차이점은 자신은 폭주하는 급행열차라는 것이고, 조는 일반 열차라는 것이다. 영원히 같은 곳을 보고 달리나 결코 합치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조 또한 상처받는다. 레드존에 의해서든, 아니면 자신의 방치에 의해서든.
 그렇다면 조와 사귀겠다는 결정을 내린 자체가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너무 오랜만에 맛보는 따스한 포옹에 취해서, 다신은 정말로 끔찍하게 살해당한 가족마저 망각해버린 걸까? 지금도 코 끝에는 사건이 발생한 당일, 불안하고 초조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니겠지 아니겠지 아닐거야 그럴 리 없어 라고 눈 앞에 보이는 그 모든 것과 자신이 항상 신뢰해왔던 직감을 깡그리 무시하고 스스로에게 잘못된 세뇌를 하며 문을 열었을 때 훅 끼쳐왔던 진한 피비린내의 환각이 느껴진다. 저도 모르게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그것이 거짓 감각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안도감을 느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릎이 꺾여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은 이 무거운 죄책감은 자신과 레드존 사이의 일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될 때까지 천로역정의 순례자처럼 감내하며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일 것이다. 다만 행선지가 천국이 아닌 지옥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 여정에서 제인에게 부여된 이 십자가는 온전히 자신만의 것,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고독을 벗 삼아 그 무게를 인 채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가는 것이 오직 자신만이 상처받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조를 위해서야, 라고 제인은 되뇌었다.
 맨몸으로 욕실 안에서 너무 오래 서있었던 제인은 조그맣게 기침을 하고 살짝 떨리는 몸을 큰 수건으로 닦고는 조가 어느 새인가 문 안쪽으로 갖다 준 속옷과 바지, 와이셔츠를 걸쳤다. 다시 한 번 거울을 보며 방긋 웃어 보인 후 욕실을 나갔다.

 

 조는 제인이 길고 긴 시간 목욕을 하는 동안 조는 어제 제인이 한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제인에게 키스를 했다는 사실. 여기서 제인이 거짓말을 지어낼 이유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조에게는 전혀 그랬던 기억이 없다. 그 날 술에 어지간히 취했음이 분명하다.
 그의 생각은 혹시라도, 자신이 제인에게 레드존에 관한 뭔가를 실수로 말해버리지 않았을까 라는 쪽으로 흘러갔다. 아니길 바랐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인은 술자리가 있었던 다음날 곧바로 리스본에게 찾아갔다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돌아온 후 수첩과 노트를 챙겨나갔으며, 그리고 새벽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었다.
 조는 욕실 쪽을 힐끗 보았다. 욕실에서는 여전히 물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조는 소파 앞 탁자에 놓인 제인의 양복 재킷 안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집어넣었다. 수첩이 손에 잡혔다. 조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욕실 쪽의 동태를 살피고는 수첩을 꺼내어 빠르게 넘겨보았다. 어지럽게 여러 단어가 적힌 중간 중간에 생각의 전개 구조로 보이는 듯 한 화살표가 죽죽 그어져있었고, 맨 마지막으로 글씨가 적힌 페이지에는 펜으로 세게 내리눌러 엉망으로 무언가를 덮어버린 것이 보였다. 조는 뒷면을 천장 전등에 비춰보았다. 워낙 짙게 덮어버려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집중하여 자세히 보자 'sexual'이라고 고민하여 적은 것이 보였다. 직전 장에는 'harassment' 'violence'등이 적힌 것으로 미루어보아, 제인은 기억은 아직 되찾지 못했지만 추론 상으로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이 분명했다.
 조는 제인이 욕실을 나오기 전 원래 꽂혀있던 방향으로 수첩을 다시 양복 안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제인은 아직도 안에서 목욕을 하는 중이다. 적어도 들려오기에는 그랬다. 조는 제인이 샤워를 마친 후에 함께 식사를 하러 가기로 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옷을 챙겨 입었다.
 소파에 앉아 제인이 나오길 기다리며 조는 생각했다. 제인은 자신이 알아낸 결과를 결코 조와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나마 그가 무언가를 함께 공유하는 것은 리스본이 유일했다. 그러나 레드존에 관해서는 별개다. 또한 이 정도의 사안임에야, 당연히 조에게도, 그리고 리스본에게도 털어놓을 리 만무했다. 조는 제인을 사랑하고, 제인을 아끼며, 제인이 위험하다면 무엇이건 무릅쓰고 그에게로 달려가서 그를 상처 입히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막으려고 힘쓸 것이다. 또한 이번처럼 제인에게 이상이 생기더라도 자신이 버텨낼 수 있는 한 그의 곁에서 자리할 것이다. 그러나 제인의 일 순위는 언제가 되었든 레드존일 것이다. 레드존이 모습을 드러내면 피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언제든지 그의 뒤를 쫓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것이다.
 그는 조금 슬펐지만, 현재의 제인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아니면, 만족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절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제인이 옷을 다 갖춰 입은 채 싱그러운 미소를 띠며 문을 열고 욕실 바깥으로 나왔다. 조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갈까요?"
 "응."

 

 둘은 집을 나섰다.

 

(Love&Affair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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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

 

 

 리스본은 결국 제인의 끈질긴 추궁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이야기해주지 않은 채 제인과 헤어졌고, 제인은 소득 없이 조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딜 갔다 오는 겁니까?"

 

 마침 샤워를 끝내고 욕실에서 나오던 조가 집으로 돌아온 제인을 보고 물었다. 제인은 평상시의 구렁이 담 넘어가듯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리스본네 집에 다녀왔지 뭐."

 

 반장님 상태가 안 좋지 않던가요, 라면서 머리의 물기를 수건으로 턴 조는 방으로 들어갔다. 제인은 그런 그의 반응을 보고서 조는 지난밤의 일을 기억 못하는 게 확실하다고 단정했다.
 제인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갑자기 조가 문 밖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는 말했다.

 

 "제인, 점심은 먹었습니까?"
 "아니?"
 "뭐라도 좀 먹으러 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의 말투가 드물게도 강권하는 말투라는 것을 눈치 챈 제인은 속으로 궁금증을 품었지만 지금은 식사를 챙기는 것 말고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아니, 오늘은 잠깐 집에 들렀다 와야겠어. 늦어도 밤이면 다시 돌아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집에 들렀다 온다는 말에 조는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제인이 곧바로 책상에서 수첩과 펜을 챙겨 나가는 모습에 별 말은 하지 않고 다시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

 

 일요일 아침이다. 지난 밤 조가 잠이 들 때까지 집으로 되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제인이 밤사이에 돌아와 있었다. 그의 옆에 제인이 곤히 잠들어있는 모습을 본 조는 저도 모르게 살짝 제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와이셔츠만 입고 고개는 조 쪽으로 돌린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물 빠진 군청색 양복 재킷은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보이지 않았고 베스트는 침대 발목 부근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조는 제인의 긴 눈의 금빛 속눈썹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그의 머리카락 쪽으로 손을 옮겼다. 조가 정식으로 고백하고 사귄 지 두 달은 된 것 같은데, 그 사이 뭔가 이렇다 할 스킨십이 부족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는 아쉬운 마음에 배게 위에 흩어진 제인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제인이 세상모르고 자는 틈을 타 손가락 사이로 배배 꼬며 만져댔다.
 제인이 조가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작대는 것을 느꼈는지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의 깜박임에 따라 그의 연한 바닷물 빛깔의 눈의 초점이 서서히 잡혀갔다.

 

 "조...뭐하는 거야?"

 

 조는 아무 말 없이 제인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제인은 잠이 덜 깬 눈으로 후후 웃으며 조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해..."

 

 제인이 머뭇거리다가 조의 허리에 손을 살짝 걸쳤다. 조는 그것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뭉클해져 오는 것 같았다.

 

 "어제 몇 시에 온 겁니까."
 "모르겠어...세 시? 네 시? 그쯤이었을 거야..."
 "뭘 하다 그렇게 늦게 온 거예요..."

 

 나른하게 늘어지는 제인의 대답에 조의 목소리도 덩달아 늘어졌다. 제인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허리께에 느껴졌다.

 

 "생각을 해야만 했어."
 "무엇에 대해서요?"
 "이것저것, 살다 보면 깊은 생각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잖아."
 "그 생각 해야만 하는 일 중에 하나에 저에 관한 것도 있었겠죠."
 "부인할 수는 없네."

 

 조의 말에 제인이 대꾸하고는 키득키득 웃었다.

 

 "돌아왔다는 건 제게 희망이 있다는 뜻이네요."
 "조는 너무 눈치가 빨라."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하기 시작했다.

 

 깊숙하게 혀가 엉킴과 동시에 조는 제인의 와이셔츠를 거의 찢듯이 열어젖혔다. 조가 제인의 유두를 핥으려 고개를 아래쪽으로 숙이자 그제야 조에게서 끈질기도록 깊은 키스를 받고 있던 제인의 입술이 해방되었다. 제인은 숨차하며 말했다.

 

 "이러다가 죽겠어..."

 

 조는 유두를 자근자근 깨물며 말했다.

 

 "자제하겠습니다."
 "아니, 자제하라는 건 아냐, 절대...아..."

 

 제인이 흥분된 신음소리를 내자 조가 피식 웃고는 다른 쪽 유두를 손가락으로 살살 매만지며 말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겁니까."

 

 제인의 유두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로 조가 말하자 그의 입술이 미묘한 감촉을 피부에 남겼고 제인은 그 간지러움에 허리를 살짝 비틀었다.

 

 "어쩔 수 없잖아, 그렇게 키스를 잘 하는걸. 흐읏, 지난번에도 느낀 거지만..."
 "지난번이라고요?"

 

 조가 제인의 가슴에서 입을 떼고 물었다. 제인이 대답했다.

 

 "그저께...아니 어제 새벽에 나랑 키스한 거 역시 기억 안 나나보네?"

 

 그 날은 제인의 귀환 기념으로 리스본을 위시한 전 팀원들이 거하게 한 잔 걸친 날이었다. 어쩐지 다음 날 일어날 때 숙취도 심하지 않더라니, 제인과의 키스 덕분이었나, 라는 정신나간 생각이 언뜻 들었다.

 

 "술에 취했을 때의 제 키스가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그 때가 더 나았던 것 같아."

 

 잠시 잦아든 애무에 여유가 생긴 제인이 농담을 던졌고 조는 이렇게 응수했다.

 

 "분발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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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

 

 

 전날 실컷 음주를 한 덕분에 오전 내내 숙면을 취할 계획이었던 리스본은 누군가가 문을 부서져라 쿵쿵 두들겨대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대문을 열었다.

 

 "?...제인? 어쩐 일이야?"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른 사람 사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몰아붙이는, 이기적인 제인이다. 숙면을 방해당한 고통으로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리스본은 제인이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상기하고는 간신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제인, 지금은 별로 적절하지 못한 순간인 것 같으니 아예 점심 때 만나는 건 어때?"

 

 '나는 잠을 더 자고 싶단 말이닷!'을 극도로 우아하게 순화시킨 말이었다. 리스본이 그렇게까지 나오는 데에서야 제인도 한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리스본의 실룩이는 미간과 잔뜩 힘이 들어간 주먹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지금의 리스본을 건드리는 자는 분명히 호되게 당할 것이 눈에 뻔히 보였으니까.

 

 근처 카페에서 앉아 차 한 잔을 시키고 잡지 한 권 한 권을 자세히 정독한 후에야 리스본이 간신히 인간의 몰골을 하고 제인이 있는 카페에 도착했다. 더 이상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데에 이골이 난 제인은 산책을 제안했다.
 근처 공원을 걸으며 리스본이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천하의 패트릭 제인이 연애상담 따윌 하려고 날 꼭두새벽부터 깨운 건 아닌 것 같고."

 

 '연애상담'이란 말에 저도 모르게 흠칫 하는 기색을 드러낼 뻔 한 제인은 얼버무리는 듯 한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언젠간 리스본한테도 조와의 관계를 말하긴 해야 할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제법 날카롭게 질문을 던지는 제인이었다. 제 발에 저려 사실을 실토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리스본이 괜히 자타공인 제인의 보모 역할을 지난 몇 년 간 해온 것이 아니었다.

 

 "네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졸도한 후에 13일 동안 원인 불명으로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거 말이야? 그냥 말 그대로의 일이야. 우린 정말로 네 걱정을 많이 했다고, 제인."

 

 제인이 레드존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것을 안 순간 CBI전체는 기밀 보안 태세로 들어갔었다. 그가 사라진 아이스크림 가게는 말 그대로 CBI의 앞마당이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은 위치였다. 그런 장소에서 CBI의 수사 고문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노출되기라도 한다면...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3주에 걸친 기간 동안 제인이 납치되었다가 트라우마로 정신 병동에 입원한 것을 아는 이들은 CBI내부의 최측근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없었으며 보안도 유례없이 잘 유지되어왔다. 이렇게 된 김에 리스본은 제인이 모든 것을 스스로 기억해내기 전까지는 그를 섣불리 자극하여 기억을 되살리려고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사건을 제인이 기억해내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취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제인은 리스본의 그런 암중의 노력을 모두 수포로 돌려버리겠다는 듯 여지없이 수상한 점을 느끼고는 그에게서 드물게 발휘되는 행동력을 발휘하여 리스본에게 쳐들어왔다. 리스본은 이 순간만 잘 넘기리라 다짐하며 진실된 표정을 지어 보이려 노력했다.
 제인은 싱글거리며 웃었다.

 

 "왜 그렇게 웃는 거야?"
 "날 속이려 하지 마, 리스본. 너희들이 뭘 숨기고 있는 건 이미 알고 있다고. 문제는 내가 너희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건데, 난 지금 바로 알아낼 생각이거든."

 

 리스본이 발뺌하려 입만 벌렸는데 제인은 검지를 홰홰 저으며 말했다.

 

 "에에~나한테 거짓말을 하려고 하다니, 리스본 나쁜 아이가 되었구나!"

 

 그러고는 전화기를 꺼내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네가 안 말해주면 나 루더 국장한테 전화할거지롱~"

 

 리스본은 그 순간 만큼은 제인이 다시 기억상실에 걸렸으면 싶다는 음험한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리스본은 제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인, 난 너를 진심으로 걱정해. 그렇지만 네가 무슨 말을 하던지, 난 너에게 말해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 신변상에 무슨 일이 있기는 했다는 거군."
 "그래, 무슨 일이 있기는 했지만, 난 네가 기억해내기 전까지는 그 일을 알려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하지만 내가 사이비 영매 짓을 하면서 돌아다녔을 때, 내가 지금의 삶을 기억해내지 못하자 너는 내게 레드존의 표식을 보여줬지. 내가 다시 그러길 바라?"
 
 리스본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봐, 제인, 그건 정말...미안하게 되었어. 하지만, 그때의 행동도, 지금 내가 하는 행동도 나는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 사실만 알아둬."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고서는 등을 돌려 공원을 빠져 나갔다. 제인은 그녀의 등을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모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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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

 

 

 리스본은 휘하 팀원들에게 당분간은 제인이 함께 수사과정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나, 언제든지 그가 회복하는 대로 팀에 복귀하게 될 것임을 전했다. 제인의 외적 상태는 다른 팀원들도 돌아가면서 병문안을 갔다 오면서 알고 있었으므로 크게 놀라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무겁게 가라앉은 우울감을 떨쳐내기에는 제인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다.
 평소에는 장난삼아 월급 도둑이라거나 게으름뱅이라고 놀리기도 했었지만 그런 농담이 무색할 정도로, 제인이 없어서 생기는 피해는 컸다. 지금까지 약 두 주가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제인이 자리를 비운 것에 불과했지만, 수사의 진척 속도가 느린 것은 물론이고 팀 내 분위기도 활발하지 못했다. 특히 조는 누가 봐도 알 만큼의 다크 오오라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말수도 줄어들고 범인의 심문도 더욱 가혹해져, 릭스비가 이제 조가 '아이스맨'에서 '블리자드맨'으로 진화했다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웬만하면 각 부서의 행동 양태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루터 웨인라이트도 넌지시 우려의 의사를 표명할 정도였으니, 짐작할 만 할 것이다.
 
 조는 근무 외 시간에는 부지런히 병원에 들락날락하며 제인을 수발했다. 제인의 외상은 회복된 지 오래여서 제인을 만나려면 정신 병동 쪽으로 가야만 했다.
 조는 사랑하는 사람이 불치병에 걸렸다 해도 곧바로 내칠 만한 냉혈한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희망을 갖고 제인에게 지속적으로 방문하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모든 외부 자극에 무감각으로 일관하는 증세를 보였던 크리스티나와는 다르게 제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멍한 눈빛에 말이라곤 한 마디도 안했지만 조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1인용 병실에 들어간 조는 이맘때쯤이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서 창 밖을 바라보거나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제인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준 건 텅 빈 시트뿐이었다. 조가 막 간호사 소환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병실 안쪽의 화장실 문이 열렸다.

 

 "제인...?"

 

 문을 열고 나온 이는 패트릭 제인이었다. 납치되기 이전처럼 구겨진 양복을 나름대로 말쑥하게 차려입고는 싱긋 미소 지으며 조를 보고 있었다.
 조는 평소의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어벙벙한 표정으로 제인을 쳐다보았다. 간신히 충격에서 벗어난 조가 더듬거리며 제인에게 말했다.

 

 "제인 맞아요?"

 

 제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지 누구야. 그런데 말야, 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

 

 제인은 곧바로 CBI 수사본부로 향했고, 리스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환대를 받았다. 마침 다음날이 휴일이라는 경사까지 겹쳐, 다들 근처의 술집으로 향했다.
 평소에 술을 꺼려하던 리스본도 '오늘만큼은 마셔야지!'라고 호쾌하게 외치며 위스키 병을 잔에 기울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날 소파에 누워 뒹굴 거린다는 둥 온갖 잔소리를 도맡아 받았던 제인으로서는 즐겁기도 했지만 당황스럽기도 했다.

 

 "와아~이런 대접은 처음인 것 같네."
 "제인이 복귀했으니까 이 정도는 해야죠!"

 

 반 펠트가 오랜만에 경쾌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러니까 내가 13일 동안 아무 것도 못하는 멍한 상태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방금 회복됐다는 거야?"
 "맞아요."

 

 릭스비가 리스본과 짝짜꿍이 되어 꽉 찬 위스키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제인의 말에 맞장구를 친 그는 리스본의 부추김에 못이긴 척 하며 그 많고 독한 위스키를 입 안에 다 털어넣었다.
 
 "릭스비랑 모두들, 오늘 심하게 달리는데?"

 

 제인이 소곤거렸지만 아무도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없는 듯 했다. 제인은 난처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지만 모두들 웬일인지 너무나 흥겨워했기 때문에 딱히 딴죽을 걸지 않기로 했다.

 

*

 

 다들 만취한 상태였지만 어떻게든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눈치를 봐가며 슬슬 음주량을 조절한 제인이 가장 멀쩡한 상태였고, 흐느적대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눈의 초점이 살짝 풀린 것 같은 조를 데리고 조의 집으로 운전해가기 시작했다.

 

 "조 괜찮아?"
 "...네."

 

 반 박자 느린 대답에 제인이 웃음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다들 너무 흥분했나봐."
 "아녜요."

 

 조가 대답했다. 뭔가 입을 우물거리며 더 말하려는 기색에 제인은 기다렸다.

 

 "제인이 돌아왔잖습니까."
 "그래, 그래."
 "돌아왔어요."
 "그래, 나 돌아왔어."
 "제인, 다신 떠나지 마세요."
 "응, 안 떠날게. 이제 됐지? 이제 도착했는데 얼른 내려서 들어가자."

 

 제인이 웅얼거리는 조에게 얼른 대꾸한 후, 자신과 조의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 쪽 문을 열려는데 조가 갑자기 제인의 팔을 꽉 잡았다.

 

 "왜 그래 조?"

 

 조는 아무 말 없이 제인을 강하게 끌어당기더니 입을 맞추었다. 제인은 깜짝 놀라서 잠깐 움찔했지만 동조해주었다. 차 안의 차가운 밤 공기와 함께 술 때문에 달아오른 열기가 섞여 서로의 입 속에서 마구 엉겼다. 다소 거칠다 싶을 정도로 파고들어오는 혀 때문에 제인은 서서히 몽롱해져갔다. 문제는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멈추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일까.
 제기랄, 조는 정말이지 키스를 너무나 잘 했다.
 조는 제인이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에 그를 놔줬다. 제인은 눈이 풀린 채 헐떡이며 좌석에 기대었고 입가에 줄줄 흘러내린 타액을 닦았다. 제인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조, 이제 들어가자."

 

 조를 부축해서 침대에 거의 내던지듯이 내려놓은 제인은 조의 신발을 일단 벗기고 현관에 놓고 온 뒤,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뒤죽박죽이 된 것 같은 하루였다. 일어나보니 난데없는 정신 병동의 입원실인 데다가 CBI에 돌아와보니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듯 한 환영을 해주는 팀원들 때문에 정신없이 끌려 다녔지만 내일은 반드시 진상을 알아내겠다 다짐하며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조가 대자로 뻗어있는 것을 본 제인이 오늘은 소파 신세겠군, 이라고 생각하며 돌아서는 찰나 조가 언제 일어났는지 살짝 비켜서 제인이 누울 자리를 내주며 제인에게 말했다.

 

 "이리 와요."

 

 여전히 취한 듯 했지만 약간은 맑아진 목소리였다. 제인은 살짝 웃으며 조의 옆에 누웠다.

 

 "있지 조."
 "네."
 "너 키스 진짜 잘하더라."

 

 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인은 약간 짓궂은 심정으로 조에게 말했다.

 

 "한 번 더 해주면 안되?"

 

 조는 그새 잠이 든 듯 잠시 반응이 없었다. 제인이 잠이 들었나봐, 라고 생각할 때 즈음 조의 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고개를 돌린 제인에게 부드럽게 손을 뻗어 제인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당황해서 조에게 리드 당했던 아까와는 달리 제인도 적극적으로 조의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어 조의 혀를 간질였다. 둘은 천천히 서로의 입술을 즐겼다. 길고 달콤한 키스. 느긋하게, 미온수를 욕조에 받아놓고 참방참방 물장구를 치며 노는 기분의 키스.
 쵹 하는 젖은 소리와 함께 입술을 뗀 그들은 기분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키스의 여운에 젖어서 침실에 깔린 정적마저 즐기고 있을 때 조가 문득 입을 열어 나직하게 말했다.

 

 "...제인."
 "응?"
 "제인이 어떤 일을 당했든 난 상관없어요. 난 정말로 제인이 좋아..."

 

 처음에는 그저 술에 취한 남자의 고백이라고 생각하고 넘기려던 제인은 조의 말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는 그에게 말했다.

 

 "어떤 일을 당했든...이라니? 내가 뭐라도 당했어?"

 

 제인은 까무룩 잠들어버린 조를 살짝 흔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대체 무슨 일인거야?"
 "...레드...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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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을 잃은 제인이 다시 깨어나길 리스본을 비롯한 팀원들은 끈질기게 기다렸지만 제인은 비정상적으로 긴 시간 동안 잠만 잤다. 거의 죽은 것처럼 보이는 가느다란 호흡과 창백한 안색의 상태의 제인을 둘러싼 팀원들은 모두들 걱정이 태산이었다.
 약 서른여섯 시간 동안의 수면 이후 제인은 의식을 회복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상태는 이상했다. 병실의 침대에 얌전히 누운 제인의 눈은 종종 안구의 수분을 보충하기 위한 최소한의 깜박임 외에는 보여주지 않았고 입도 굳게 다물려 있었다. 마치 크리스티나를 발견했을 때 그녀에게서 보이던 증상과 같았다. 리스본은 제인의 이런 상태를 곧바로 의료진에게 알렸다.
 몇 가지 검진이 끝나고 의료진은 리스본을 비밀리에 불렀다. 리스본은 조를 동행한 채로 의사와 대면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지난번 크리스티나 프라이 양의 상태와 상당히 일치한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그럼 회복이 불가능한...건가요?"
 "프라이 양도 현재까지 상태가 나아진 점이 없으나, 사람마다 트라우마의 극복 능력은 다릅니다. 그 점에 희망을 걸어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제인이 겪은 사건은 아무래도 CBI 관계 처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의사의 말에서는 아무래도 제인에겐 더 큰 트라우마가 있으니 이번 트라우마를 극복해낼 수 있을 거라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고 있었다. 결국 별다른 대안을 제시받지 못 한 채로 진료실을 나서는 리스본을 의사가 붙잡았다.

 

 "그리고 리스본 반장님께 은밀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인의 상태에 관련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 사람도 들어도 괜찮습니다. 어서 말씀해보세요."

 

 조가 위압적으로 팔짱을 끼고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을 연신 흘깃흘깃 보며 의사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제인 씨가 납치를 당한 동안, 성적 학대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뭐라고요?!"

 

 조가 갑자기 크게 소리치자 리스본도 의사도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조는 화난 기색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그들에게 말했다.

 

 "계속하시죠."

 

 리스본은 갑자기 리스본 자신보다도 더 흥분한 기색의 조를 미심쩍은 듯이 한 번 돌아보았으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다시 의사를 향해 부연 설명을 촉구했다.
 의사는 이런 것을 일일이 설명하는 상황이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히고 중간 중간 헛기침을 섞어가며 정황증거와 제인의 신체 검진 결과를 들어 설명했다. 이 정도쯤이면 가능성이 높은 정도가 아니라 확실하잖아, 라는 생각을 하며 리스본은 열에 뻗친 머리로 간신히 생각을 정리하고는 쿵쾅대는 발걸음으로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리스본 못지않게 침통한 기색의 조에게 리스본은 당부했다.

 

 "방금 들은 이야기는 함구해. 너의 입이 충분히 무겁단 걸 믿는다. 나는 본부에 들러서 국장님과 면담을 하고 와야하니 그동안은 네가 제인의 병실을 지키도록."

 

 리스본은 지시를 쏟아내고는 화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병원 복도를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그녀가 입 안으로 욕설을 씹어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조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과연 자신이 제인의 얼굴을 보고서도, 지금의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억제할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으나 그는 일단 병실로 들어갔다.


 일견 평온해 보이는 제인의 모습에 조는 오히려 맥이 빠진 채로 침대 옆의 철제 의자에 풀썩 앉았다. 제인은 환자복을 입고 간호사가 덮어준 이불의 형태를 그대로 둔 채 두 눈을 간간히 깜박거리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조는 아무렇게나 놓인 제인의 손을 찾아 쥐었다. 답답한 마음에 손을 강하게 쥐어도 제인은 반응이 없다. 조는 침대 위로 고개를 숙여 제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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