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존짐/마레/월드오브다크니스크로스오버/뱀파이어더마스커레이드AU

 

 

 Blood is life; blood is utu; blood is death; blood is silent; utu is silent;

that was the rule; that is the rule; that will be the rule.

 

  

 해질녁이었다.
 저녁놀은 점점 붉게 타오르다가 다시 푸르게 희미해졌다. 닫힌 커튼 사이로 실낱같이 가느다란 햇빛줄기가 살며시 들어왔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피가 담긴 크리스털 유리잔이 놓인 탁자를 가운데 두고 셜록과 마이크로프트는 나른한 자세로 앉아서 공기 중의 색이 옅어지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곧이어 잿빛 어스름이 깔렸다. 밤의 산들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바람결에 떠밀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홀연히 달이 떠올랐다.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하얀 햇빛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마이크로프트는 입을 열었다.

 

 "뱀파이어는 죽음 그 자체이지."

 

 그는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 후 닫혀있던 커튼을 열었다. 이미 호흡이란 것을 할 필요가 없는 육신을 지닌 그였지만 커튼을 연 그는 막혀있던 숨통이 트이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빛이 스며드는 대신 저택의 열린 문틈과 창문으로 간간이 노란 빛이 새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검푸른 살얼음이 낀 연못의 표면에 불빛이 일그러진 형태로 비쳤다.
 자리로 돌아온 마이크로프트는 길고 긴 쉼표를 넘어 말을 이었다.

 

 "뱀파이어와 마주한 인간이 변변한 저항 하나 없이 순순히 목덜이를 내미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인간에게 제 일의 본능이란 생존 욕구라고 할 수 있지만, 이율배반적이게도, 그와 더불어 인간 정신에 내재한 또다른 본능은 죽음에의 열망이지. 그런 연유로 우리들의 존재는 그들에게 저항하려 해도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매혹이자 죽음의 환상을 그들의 상상 범위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보여주는 자들이 된단다."

 

 퀭하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청년이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오묘한 오팔 빛깔의 눈은 자신을 향해 막연한 동경을 품고 빛나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동경이란 말인가? 이미 완성된 존재인 그가 미완성의 존재를 보고 앞으로의 전도와 가능성에 대해 질투라도 한다는 말인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 다리를 꼰 채로 아무렇지 않게 앉아있는 듯한 그의 자세는 실은 완벽한 균형과 섬세한 관능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것은 이미 하나의 조형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토록 완벽한 그가 다른 이를 동경한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한없이 우아한 자태의 남자가 자애롭고 온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가르침을 주고 있건만 정작 당사자인 셜록은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의 병적인 무관심은 다름이 아니라 때아닌 우울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뱀파이어가 된 지 세 달이 막 지났을 뿐인 그는 최근 밤이 되어 깨어날 때마다 이상스레 침울했을 뿐만 아니라 나른한 탈력감에 종일 시달렸다. 무엇보다도 그를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붙는 그 기분을 도무지 떨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느끼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의 상태를 알고 있다는 것을 굳이 그에게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더욱 셜록의 내부를 장악하고 있는 공허감을 극한까지 부추기기 위해 그것을 고의로 외면하는 것을 택했다. 그는 유혹적인 어조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덕분에 우리는 인간들을 능동적으로 유혹할 필요가 없어."

 

 타오르는 모닥불에 이끌린 불나방들처럼 스스로 불길 속에 몸을 던지니까 말이야, 라고 마이크로프트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귓가를 가랑비처럼 적시는 마이크로프트의 속삭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셜록의 빈틈을 파고들었고 반대급부로 이유모를 울화가 속에서 치미는 것을 느끼며 셜록은 몸을 들썩였다.
 끝없이 그의 주위를 맴돌며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그 무언가의 정체를 셜록은 무의식적으로는 깨닫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의식적으로는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셜록도 마이크로프트의 장광설이 이유없이 이루어질 리는 없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미리 준비한 것이 분명한 길고 긴 대사는 분명 셜록의 안에 잠들어있는 무언가를 촉발시키기 위한 것일 터였다. 아직까지 한번도 그의 안에서 깨어난 적이 없는 피에 대한 욕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지금까지 속삭이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정교한 덫처럼 셜록을 잡아 무너뜨리기 위한 함정의 설계였다. 미숙한 뱀파이어인 셜록은 인간이 아닌 자로서의 심리적인 적응기를 거치고 있었던지라 외줄타기를 하는 광대마냥 불안한 상태였고 그렇기에 촘촘한 거미줄과도 같은 마이크로프트의 꼬드김에 쉽사리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동요된 마음의 틈새로 산 자의 피를 원하는 지독한 탐욕이 흘러나와 셜록의 냉정한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꺼지지 않는 반항심과 무턱대고 욕구를 좇지 않는 특유의 금욕적인 성미가 그를 잠시잠깐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셜록이 당장이라도 용수철처럼 자리를 튕기고 일어나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그러한 욕구를 참아내고 있는 것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던 마이크로프트가 미소지으며 속삭였다.

 

 "네가 인간들 틈에 섞여있어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눈치채겠지. 네가 얼마나 아름답고도 위험한 존재인지-그들에게 단숨에 꺼져가는 죽음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고-반대로 그들이 그토록 바라는 영생을 선물할 수도 있으며-또한 그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없는 강렬한 쾌락을 줄 수도 있는 존재인지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마이크로프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셜록을 향해 몸을 수그리며 말했다.

 

 "나는 그저 알려주고 싶을 뿐이란다."

 

 우아한 동시에 냉혹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그가 속삭였다.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손쉽고도 당연한 일이라는 걸 말이다."

 

 열린 창문으로 달빛이 천천히 쏟아져들어왔다. 달빛을 등진 남자의 얼굴은 분명 교활한 미소로 얼룩져있을 것이다. 셜록은 남자에게, 또 남자의 세 치 혀에 속수무책으로 놀아나는 자신에게 분노하며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믿을 수 없군."

 

 셜록의 반박에 마이크로프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엇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그의 질문에 셜록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이 그토록 손쉬운 일이라면 당신은 어째서 인간 남자 한 명에게 연연하는 것이지? 그 이외에도 당신에게 피를 바칠 인간은 차고 넘칠텐데 말이야."

 

 순간 마이크로프트의 실루엣이 파르르 떨린 것도 같았다. 그러나 멀리 커튼을 여미고 있는 리본 끝이 밤바람에 움직여 방 안을 채우던 빛무리의 진로를 방해한 듯도 했으므로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밤하늘의 여행자 달이 위치를 바꾸어 더이상 방 안을 비추지 않게 될 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달빛이 걷히고 드러난 마이크로프트의 안색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변화라곤 한 점도 비추이지 않았다. 그저 담비털 붓으로 그린 듯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미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닫힌 입술이 열리며 속삭임을 뱉어냈다.

 

 "레스트레이드는-"

 

 그때 멀리서 저택의 철문이 끼이이 소리를 내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약한 소리일 뿐이었으나 셜록과 마이크로프트 둘 모두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가벼운 몸놀림과는 확연히 다른 걸음소리가 낯선 공기를 몰고 저택 안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이크로프트는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체취. 레스트레이드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하고 셜록이 속으로 혀를 차는데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찰나의 순간 속살을 보인 진솔함의 여운은 간데없고 평소의 무심한 목소리였다.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만 주의해야하는 것은 맞단다. 너무 빠져들지 않도록..."

 

 마이크로프트는 '무엇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다. '무엇'의 빈 자리를 어떤 단어가 채워도 상관없다는 뜻일까?

 그가 몸을 일으키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쩌면 네가 나보다 더 현명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거기까지 말한 그는 불빛 한 점 없는 복도에 오랜만에 불을 밝히러 천천히 방을 걸어나갔다.
 셜록도 이제는 익히 알고 있는 손님을 맞이하러 나간 마이크로프트마저 방을 떠나자 그렇지 않아도 을씨년스러운 방 안은 더욱 적막감이 떠돌았다. 셜록은 탁자를 바라보았다. 잔 내벽에 달라붙은 피가 응고되어 색이 한층 짙어진 것이 보였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 싸구려일 뿐 아니라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 뿐인 그것을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셜록은 손을 뻗어 걸쭉해진 그것을 단숨에 삼키고는 신경질적으로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비린 맛과 혈액 유화제의 인공적인 향내가 혓바닥을 깔깔하게 자극했다.
 배고픔도 달랬겠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궁상을 떨 이유가 없었다. 창가로 다가간 셜록은 창문을 열고 초겨울의 찬 기운을 음미한 후 고양이처럼 조용하게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미 한 사람의 훌륭한 밤의 식구가 된 그는 은밀하게 밤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

 

  늦은 왕진을 마친 존 왓슨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마차는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날씨는 빌어먹도록 추웠다. 마차를 기다린답시고 정류장에 계속 앉아있다가는 마차는커녕 얼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존은 결국 걸어서 집으로 가기로 마음먹고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바람이 세지는 않아 어느정도 걷다보니 찬 공기에 적응이 된 것인지 초겨울 날씨치고는 추운 밤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목덜미를 스산하게 파고드는 바람은 견디기가 힘들었고 존은 고개를 움츠린 채로 한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존은 서서히 아파오는 한쪽 다리에 끄응 하고 신음하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다친 곳은 어깨이건만 아파오는 곳은 반대쪽 다리라는 모순적인 사실이 우스우면서도 슬프게 그의 마음을 찔렀다.
 미묘한 황색의 가로등 불빛만이 그를 내리비추었고 그날따라 런던의 밤거리는 소름끼치게 조용했다. 하긴 이런 날씨에 바깥을 돌아다니는 머저리는 나밖에 없겠지. 존은 자조했다. 뭐 부상으로 의가사제대하여 기반없이 급하게 자리를 잡은 의원인 자신이 가려서 손님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줄곧 수그리고 있던 목에 둔통이 느껴지는 것에 존은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고 좌우로 살살 움직였다. 그러면서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자신이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고개를 숙인 채로 걷다보니 잘못된 길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더 큰 문제는 존의 눈에 주변의 거리가 영 익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풍광에 당황한 존은 추위조차 잊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쩐다.'

 

 존은 속으로 낙담하며 한숨을 토했다. 하얀 입김이 사르르 허공 중으로 올라갔다.
 계속 멈춰서있을 수만도 없었으므로 존은 절뚝이는 다리로 걸음을 재촉했다. 점점 으슥한 수풀길이 그의 앞에 펼쳐졌고 존은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직감했다. 한번 길을 잘못 들어 가로등도 없이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 깔린 지대로 들어선 데다 밤눈이 어두운 편에 속하는 존은 어느 방향이 올바른 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기에 한참 헛수고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식은땀을 훔치던 그는 순간 저편에서 은은하게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저 멀리 저택으로 보이는 건물의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길을 헤메던 그에게 그 불빛은 너무나도 반가운 존재로 다가왔다. 어둠에 조금 익숙해진 눈으로 땅바닥을 유심히 살펴보니 저택으로 뻗은 길이 어렴풋이 보였다. 존은 몹시 기뻐하며 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심 불안했지만 저택의 주인이 인정머리없는 사람만 아니라면 하룻밤 추위를 지새게 해주는 정도야 허락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한결 속도를 붙여 걷기 시작했다.

 

*

 

 마이크로프트에게 자신을 의탁한 후로 한 번도 저택 밖으로 나온 적이 없는 셜록은 오랜만의 바깥 공기를 쐬자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다소 들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몇 주간 만성적으로 그를 짓누르던 우울감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택 안에서 체재하고 있을 때보다는 가벼운 기분이었다.
 손질이 되지 않아 불규칙적으로 자란 풀들이 발 아래에 푹신하게 밟히는 것을 느끼며 셜록은 정처없이 걸었다. 창백한 뺨을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뭇 차가운 공기였다. 인간이었다면 덜덜 떨었겠지. 하지만 이미 식어버린 몸은 코트 한 벌과 목도리를 대강 걸치는 것만으로도 겨울의 도입부를 예고하는 냉기에 무던하게 적응했다. 꽁꽁 싸맬 필요가 없어서 편리하군, 하고 낙천적인 생각을 하던 셜록은 문득 무언가가 다가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우뚝 멈춰섰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무거운 발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걸음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고 빨랐다 느려졌다 하는 것으로 보아 다리가 불편한 인간이었다.
 셜록은 다가오는 자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쪽으로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인간의 피에 대한 탐욕이 미미하다 싶을 정도로 적었기에 그가 인간 하나의 냄새에 끌려 이편으로 오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은거형을 받은 마이크로프트의 족쇄 역할을 수행하는 스커지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는 근방에 거동마저 불편한 인간이 돌아다니는 것을 그들이 알아차린다면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선 이 불쌍한 인간은 영문도 모른 채 순식간에 한 끼 식사거리가 되어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선한 피를 갈망하며 허덕였던 셜록이었으나, 다행히도 저택에서 나오기 직전에 피를 마셨기 때문에 인간을 다시 저들의 도시로 돌려보내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터였다.

 

*

 

 저택으로 통하는 골목으로 향하는 왼편의 오솔길에 다다른 존은 고통을 호소하는 다리를 잠시 쉬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저택으로 곧장 통하는 길에는 가장자리에 잎을 다 떨군 채 바싹 마른 가지만 남은 검은 나무들이 줄세워 드리워져 있었고, 뭐라 말하기 힘든-살아있는 자들의 출입을 거부하는 듯한 불친절한 기색이 짙게 풍겼다. 존의 걸음을 늦출 정도로 으스스한 어둠을 품고 있으며 희끄무레한 안개마저 끼어 있는 길은 어린 시절에 침대맡 벽장 속의 괴물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원초적인 공포와도 같은 것을 되살리고 있었으나 존은 달아나려는 희망을 다시금 붙잡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일대에 얇은 장막처럼 떠도는 안개를 헤치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균일하지 못하게 끼인 안개에 가리운 사람의 윤곽이 그가 다가옴에 따라 점차 분명하게 드러났다.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본 존의 눈이 커졌다.

 

 "길을 잘못 드셨군요."

 

 나직하고 정중한 어투로 말하는 그의 얼굴은 피가 모두 증발해버린듯 충격적으로 새하얬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묘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석고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의 혈색없는 얼굴에 깜짝 놀란 존은 남자의 말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예. 왕진을 갔다 오는데 길을 잃어서..."

 

 뒷말을 흐리는 존에게 남자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제가 모셔다드리죠."

 

 그때 계속해서 존을 향해 불어오던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드러난 뺨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찬바람에 혹사당하던 얼굴이 역풍덕분에 약간은 따스해진 듯한 착각이 들어 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셜록은 역풍을 타고 자신의 콧속으로 스미는 향기에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눈 앞의 남자의 체취는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욕망을 능히 자제할 수 있으리라고 장담했던 그의 자신감을 산산조각내어버릴 정도로 향기로웠다. 아까 전 삼킨 피비린내의 잔향이 토하고 싶도록 역겹게 느껴질 정도로 남자의 냄새는 미치도록 좋았다. 무절제한 욕망과는 거리가 먼 그의 속내에서 탐심이 그득하게 고여올라왔다.
 메마른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셜록이 반사적으로 목울대를 움직였다. 아아. 셜록은 마음 속으로 절망 섞인 비명을 질렀다. 침을 삼키는 것은 식욕을 가라앉히기는 커녕 더욱 들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심한 허기가 그의 내부를 진탕시켰다.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무진 노력하고 있는 셜록에게 눈앞의 남자가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을 하고선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저쪽에 저택이 보이던데, 혹시 그곳에서 오신 건가요?"

 

 셜록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입을 움직였다.

 

 "...그렇습니다만."

 

 남자는 셜록을 올려다보며 살았다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셜록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남자가 셜록에게 말했다.

 

 "실례라는 건 압니다만, 오늘 밤만 신세를 져도 될까요? 밤이 깊어서 지금 돌아가긴 무리일 것 같은데..."

 

 호랑이 소굴로 스스로 얼굴을 들이미는 남자의 행동을 만류하고 싶었으나 셜록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뼘 남짓하는 거리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체향이 손쓸 수 없이 그의 후각을 자극했고, 셜록은 더이상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당장에라도 남자를 찢어발기고 하얀 살갗 사이로 샘솟아나올 핏물에 고개를 처박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셜록이 마지막 이성을 그러모아 입을 열었다.

 

 "그건...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같습니다."

 

 셜록의 완곡한 거절에 남자의 안색에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셜록의 소매를 붙잡고 매달렸다.

 

 "부탁입니다! 폐는 끼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존은 자신의 등골이 갑자기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맹수 앞에 맨몸으로 선 것처럼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돋아오르는 감각에 스스로 의아해하고 있는 그 순간 무섭도록 얼굴을 굳힌 남자가 자신을 잡고 쓰러뜨렸다.

 

*


 남자에게 떠밀려 난데없이 풀숲으로 넘어진 존은 항의를 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막상 남자의 얼굴을 마주한 존은 하려던 말을 잊은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무표정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존의 심장을 멎게 만들 것처럼 조여왔다. 눈에 띄게 묘한 남자의 분위기는 비단 창백한 안색때문만은 아니었다.
 오싹하리만치 하얀 얼굴에 섬뜩한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찌르듯이 바라보았다. 존은 더이상 남자가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는 이 상황을 웃어넘길 수 없었다. 전장에서 단련된 존의 육감이 눈앞의 남자는 말 그대로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맹수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공포에 사로잡혀 몸이 덜덜 떨리는 가운데에서도 존은 남자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었으나 사실이 그랬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납빛으로 물든 뺨을 하고선 무기력하게 서있던 남자가 자신을 무언지 알 수 없는 강렬한 열정으로 물든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어서였을까? 아니, 그것은 지금의 정황과는 동떨어진 차원의 이야기였다. 남자의 존재 자체가 존에게 너무나도 고혹적이고 센슈얼한 분위기를 풍겼고 존으로 하여금 그러한 기분에 동화되게끔 한 것이다.
 존이 초점이 풀린 눈으로 남자에게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핏기없는 남자의 얼굴선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얼굴은 그의 이마에 입술을 살포시 갖다대었다. 차가운 입술이었다. 이마에 입술을 내리누른 채로 코를 자신의 땀에 젖은 머리칼에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이 느껴졌다. 존은 어쩐지 울고 싶었다.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분명 냄새가 지독할 거야. 존은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남자는 존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그가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잦아드는 하프 현의 떨림처럼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은 공포와 상반되는 나른한 안도감에 존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멀어졌던 남자의 얼굴이 다시 거리를 좁혔다. 이번에는 이마가 아니었다. 입술도 아니었다. 그의 가벼운 키스가 내려앉은 곳은 존의 목이었다. 어느새 옷깃을 풀어헤쳤는지 여린 목덜미가 활짝 드러나있었다. 한없이 부드럽게 시작된 키스는 어느 순간 날카로운 아픔으로 변모했다. 남자가 육식동물처럼 자신의 목을 물어뜯는 것이 느껴졌다. 환촉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아픔에 존은 나직하게 비명을 질렀다. 상처입은 목과 찢긴 혈관으로 뜨거운 피가 몰리고 남자의 입 안으로 빨려나가는 느낌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생경했다. 존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절할 것만 같았지만 용케도 기절은 하지 않은 채로 존은 그것을 견뎌냈다.
 한순간 존이 눈을 번쩍 떴다.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은 더이상 시커먼 어둠이 아니었다. 황금빛의 황홀경이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시야가 번쩍 열리며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남자 이외의 존재는 순식간에 흐릿하게 존재감을 잃었다. 쾌감과 황홀의 경계에서 존이 숨을 토했다.

 

 "하으..."

 

 남자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한층 명료해진 존의 시야에 들어온 남자의 모습은 새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천사처럼 도드라져보였다. 그러나 눈앞의 천사에게 고결한 자비는 없었다. 대신 그의 얼굴은 달랠 길이 없는 지독한 굶주림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남자의 눈동자가 내뿜는 마력에 홀려 그의 품 안에 갇힌 존은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욕망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와 대조를 이루며 드리워진 검은 속눈썹 아래로 그의 맑은 눈동자가 더욱 분명하게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온전한 회색이 아니었다. 서늘한 코발트 블루 빛깔이 감도는 청회색이었다. 청량한 내음이 끼치도록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존은 빨려들어갈 것처럼 그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가 안심을 시키려는 듯이 눈꼬리를 휘었다. 자신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어린 새의 속깃털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존에게 여전히 그는 무서운 존재였다. 처음에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물어뜯은 것을 제외하고는 남자는 사뭇 다정하고 친절한 방식으로 자신을 마셨지만 엄습하는 본능적인 공포를 이길 수는 없었다. 남자는 다시 자신의 어깻죽지에 고개를 파묻었다. 체액이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쾌감인지 전율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이 퍼졌다. 남자에게 사로잡힌 채로 섬뜩한 공황 상태에 빠져든 그는 이윽고 정신을 잃었다.

 

*

 

 남자의 체향이 한층 강렬하게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느끼며 이성을 완전히 놓아버린 셜록은 짐승처럼 남자를 덮쳤다. 만만찮을 것처럼 보였던 남자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나자 완전히 힘을 잃고 늘어져버렸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흐린 하늘 빛깔의 눈동자가 순종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한결 여유가 생긴 셜록은 먼저 남자의 체취를 한껏 음미했다. 진한 향기가 그의 후각을 마비시킬 것만 같았다. 살과 살을 조금의 틈새도 없이 밀착하고 있자니 그의 온몸을 타고 흐르며 두근두근 울리는 혈류의 흐름, 살아있는 피를 펌프질하는 심장의 박동, 그리고 약간 가팔라진 그의 숨소리와 함께 발산된 체향이 셜록을 감쌌다. 식욕과 함께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그 향기를 계속해서 맡고 있었다가는 남자를 뼈째로 씹어먹어버렸을지도 몰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셜록의 아래에 깔린 남자가 아직 정신이 남아있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저었다. 셜록은 고개를 들었다. 물기가 살짝 어린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상냥하게 말했다.

 

 "가만히..."

 

 거부하는 기색은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 반사적으로 머리를 돌린 것 같았다. 남자의 체향은 충분히 즐긴 셜록은 이제 그의 본능이 이끄는 바대로 남자의 피를 마시기로 했다.
 여전히 미약한 저항의 기색 하나 없는 남자의 목덜미를 덮고 있는 옷자락을 손쉽게 풀어내리고, 아무도 맛본 적이 없는 남자의 처녀지에 이빨을 박았다. 남자가 고통으로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의 셜록에게 배려라던가 그런 체면치레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잇새로 흘러들어오는 진하고 따뜻한 혈액에 매료된 셜록은 더욱 세게 그를 물었다. 난생 처음 즐기는 신선한 인간의 피는 생각보다 역겹지 않았다. 오히려 극상의 맛이었다. 그 맛을 한결 좋게 만드는 것은 이 인간에게 처음으로 이빨을 박은 뱀파이어가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먹이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니. 셜록은 피 한 방울이라도 새어나갈세라 세게 남자의 목덜미를 흡입했다. 상처가 남을 것이다. 그러나 셜록은 그 사실을 반가이 여겼다. 이 순결한 영토에 맨 처음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발자국을 새기고 아프도록 더럽히고 싶었다.

 

 "하으..."

 

 남자가 신음을 토했다. 놀랍도록 색정적인 신음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자신의 귓볼마저 달아오를 정도로. 피를 마시는 데에 몰두해있던 셜록이 순간 정신을 차리고 남자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남자의 하얀 목덜미에는 끔찍하게 검푸른 멍이 들어있었고 자신의 이빨 자국에 따라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자신이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남자에게 이정도로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에 놀란 셜록은 남자를 쓰다듬어주며 추스르려는 동시에 자신을 눈물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초점이 없이 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눈. 셜록은 다시 한 번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남자의 목덜미에 격정적으로 얼굴을 박았다.
 온몸으로 흘러들어오는 활력이 느껴졌다. 그가 원기를 차릴수록 자신의 몸 아래에서 신음하는 남자의 생기는 가냘파지고 있었다. 이쯤하면 만족할 만도 하련만 셜록의 본능은 더 많은 피를 원하고 있었다. 첫 번째 흡혈을 통해 어느 정도 허기를 충족한 셜록은 산 자의 피를 원하는 지독한 탐욕이 더이상 자신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게 하려 노력했다. 자신에게 이러한 왕성한 욕망이 있었으리라고는 자각하지 못했던 셜록은 약간 당혹스런 심정으로 두 번째 흡혈을 끝낸 후 힘겹게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남자에게서 자신이 억지로 피를 강탈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범죄라도 저지른 듯한 죄악감에 기분이 나빠진 셜록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남자는 그 사이 완전히 정신을 잃은 채였다. 셜록은 망설이다가, 남자를 들쳐안고 인간들이 사는 곳 근처로 향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른 셜록은 남자를 수풀 속에 내려놓고 돌아서려다가 남자의 드러난 목과 그곳에 난 선명한 잇자국에 생각이 미쳤다. 한동안 갈등하던 셜록은 멀리서 동이 터오르는 것을 보고 더이상 생각에 잠겨있을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더이상의 고민을 그만두고 급히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쓰러진 남자의 목에 감아준 후 저택으로 향했다.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