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존]Call me baby

2013. 12. 13. 02:34 from BBC Sherlock/단편

셜록존/단편

 

 

 "뽑아보게."

 

 존의 어깨 너머로 셜록이 갑자기 휴지곽을 내밀었다. 느긋하게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존이 한발 늦게 반응하며 말했다.

 

 "뭔데?"
 "일단 뽑아보라니까."

 

 두 눈 가득 궁금증을 담은 존에게 셜록이 재촉했다. 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셜록의 행동에 담긴-제 딴에는 심오하다고 주장하는-의미 따위를 짐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것을 존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속편하게 장단을 맞춰주기로 결심한 존은 집요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셜록의 시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티슈상자의 틈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에는 접힌 종이조각들이 가득 들어있었고 서로 부딪히며 종잇장 특유의 가벼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대체 이게 뭐지?
 의문이 한층 증폭되는 가운데 셜록은 존이 집어든 종잇조각을 가져가더니 그것을 펴보고선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정해졌군. '자기'야."

 

 셜록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닭살돋는 호칭에 존은 마신 것도 없는데 사레가 들릴 뻔했다. 말의 내용은 둘째치고,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나 기계적인 어투로 뱉어낼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왕 저런 소리를 입에 담을 거라면 좀더 부드럽고 다정한 어조로 말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파충류처럼 표정이 없는 셜록에게서 할리퀸 소설의 남자주인공같은 어조의 달콤한 밀어가 흘러나오는 건 그것대로 상당히 기괴할 것같았다.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도 존은 당황스러움을 얼굴에서 채 지우지 못한 채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려주겠어?"

 

 셜록은 의외로 순순히 털어놓았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관계가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난 후인데도 그 전과 비교해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의아하게 느껴지더군. 그래서 마이크로프트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했지."

 

 마이크로프트, 라고 언급하는 순간부터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셜록은 평소에는 마이크로프트라면 치를 떨 정도로 질색하면서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마이크로프트에게 의존하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을 한껏 놀려먹으며 그동안 무시당한 만큼의 보복삼아 웃음거리로 만들곤 했다. 그러면 존까지 덩달아 휘말려 피곤해지는 것은 물론이었다.
 존은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부디 틀리길 바라며 셜록의 뒷말을 재촉하듯 올려다보았다.

 

 "그랬더니 마이크로프트가 말하길 서로에 대한 호칭을 좀더 다정한 것으로 바꾸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더군."
 "그래서 그 권고에 따라 행동한 것의 결과가 '자기'인건가?"
 "그렇지. 이제 자네는 날 자기야 라고 불러야 해."

 

 뭔가 정신줄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스트랄하다는 표현이 이런 때에 적절한 것이겠지...하고 넋을 놓을 뻔했지만 존은 간신히 정줄을 잡고 셜록의 일방적인 요구에 반박했다.

 

 "잠깐, 나는 그런 낯부끄럽기 그지없는 호칭으로 자네를 부를 생각이 추호도 없는데. 그것도 제비뽑기로 뽑은 거고. 완전 되는대로 아냐?"
 "'자기'가 맘에 들지 않는 거라면 다른 호칭도 많은데."

 

 존의 불평을 약간 다른 핀트로 받아들여 이해한 것인지 셜록이 휴지곽을 집어들고 거꾸로 뒤집어 테이블 위에 탈탈 털어 안에 든 종이조각들을 쏟아냈다. 그게 아니라! 하고 대꾸하려던 존은 자신이 너무 매몰차게 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순간 멈칫했다. 이왕 장단을 맞추기로 한 김에 조금만 더 맞춰주지 뭐,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존이 당장 쓸데없는 짓 집어치우라며 셜록에게 면박을 주지 않은 이유는 대체 마이크로프트가 제안한 애칭들이라는 것들이 또 얼마나 변태적일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대한 대로,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들고 펴자마자 존의 얼굴이 꾸깃꾸깃 구겨졌다.

 

 "'달링'? 진심이야, 셜록?"
 "아 그거. 레스트레이드가 적극 추천하던데."

 

 상식인이라고 여겼던 레스트레이드마저도 이런 병신미넘치는 애칭 궐기대회 나부랭이에 동참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마 그렉과 마이크로프트가 눈앞에서 서로를 달링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목격했다면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욕과 독설을 일삼았을 셜록은 막상 자기가 그런 애칭을 쓴다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는 듯했다.
 참 낯짝도 두껍지, 하고 혀를 차며 다른 종이조각들을 들추어보던 존은 점점 가관이 되어가는 애칭들에 눈살을 찌푸렸다.

 

 "허니비, 곰탱이, 애기, 꿀빵...대체 누가 이런...누가 이런 걸 주워섬긴..."
 "마이크로프트와 레스트레이드 뿐아니라 앤더슨과 도노반, 몰리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지. 심지어 안시아도 거들더군."

 

 얼굴이 빨개진 채로 말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더듬거리는 존을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셜록이 들고 있던 종이조각 하나를 건넸다.

 

 "참고로 내가 적은 것도 몇 개 있다네."

 

 셜록이 고안한 애칭이라면 그나마 좀 덜 오글거리려나, 싶어 받아든 종잇조각에는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것들이 적혀있었다.

 

 "'오빠'?"

 

 존은 온몸으로 너 미쳤어, 셜록? 하고 외치고 있었다. 존의 격한 거부반응에 셜록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주일 전에 침실에서는 날 잘도 그렇게 불렀잖은가."
 "...이잇! 그거야 네가 강요했기 때문이잖아! 너...넣어주지 않겠다고 별 말도 안되는 협박을 늘어놓으면서!"

 

 얼굴을 붉히면서 언성을 높이는 존에게 셜록은 얄미우리만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말투로 대답했다.

 

 "그리고 자네는 자네의 말마따나 말도 안되는 그 협박에 굴복했지. 그래서 마음에 들어할 줄 알았는데."
 "마음에 들기는 개뿔!"

 

 대화는 점점 수렁으로 빨려들어갔다.

 

 "'암퇘지'? 이건 도대체 누가 쓴 거야? 미친 거야?"
 "응? 이건 누가 쓴 건지 기억이 안 나는걸. 야드의 직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열성적으로 적어서 협조해주었기 때문에 누가 뭘 썼는지는 잘 모르겠군. 그런데 이건 자네가 날 부를 때 적절한 호칭은 아닌 것 같군. 그 반대라면 모를까."
 "뭣이!"

 

 그럼 난 셜록을 수퇘지라고 불러야 하는건가...하고 멍하니 생각하던 존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이러면 안돼, 존. 이런 정신나간 짓거리에 동참해서는 안된다고! 비록 상식과는 전혀 거리가 먼 셜록과 사귀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식인 포지션을 포기하기는 싫었다.
 그나저나 야드의 직원들도 다 안다 이거지. 앞으로 사건 자문에 동행할 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개망신이 따로 없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며 힙없이 종잇조각을 펴던 존이 동작을 멈추었다.

 

 <여보>

 

 이거 설마 간접적인 청혼은 아니겠지... 존은 얼굴이 다시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얼른 그 종이조각을 다시 접어 쪽지 무더기 속으로 던졌다. 셜록은 혼자 울그락불그락 하고 있는 존을 흘끗 보더니 다시 쪽지에 쓰인 애칭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집중했다.
 존이 왜 가만히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한 그 모습에 존은 약간 안심하면서도 어딘지 아주 아주 아주 약간은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때문에 약간은 뾰족해진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애칭 하나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법석이야? 참나..."
 "아까도 말했잖나. 어째 연인 관계인데도 변한 게 하나 없는 것같단 말이야."

 

 왠지 그의 목소리에 투정기가 어려 있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존은 의아해하며 대꾸했다.

 

 "변한게 없긴 뭐가 없어?"
 "그럼 자네가 말해봐. 우리의 현 상태가 섹스파트너에 가까운지 연인에 가까운지."

 

 언뜻 들으면 시비조로 착각할 수도 있는 퉁명스런 어조에 발끈하려던 존이었지만 셜록의 말에 내포된 진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셜록이 연애에 관해서 완전히 무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나름대로는 생각이 많은 것같았다. 무언가 가시적인 증표가 필요하다는 맥락에서 생각해낸 고육지책이겠지 싶었다. 존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서로 사랑하잖아."

 

 셜록의 창백한 뺨이 미미하게 홍조를 띠는 것을 보고 존도 따라서 미소지었다. 흠흠, 하고 가볍게 헛기침을 하던 셜록은 자세를 고쳐 앉기도 하고 어깨를 들썩거리기도 하고 손가락을 가만 놔두질 못하고 꿈질꿈질거리더니 영 간지럽다는 표정을 억누르며 테이블 위에 온통 흩뿌려져있는 종잇조각들을 주섬주섬 치우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도 치우네, 하고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존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근데 어젠가 그저껜가 티슈 새로 갖다놓았던거로 기억하는데. 벌써 다 썼어?"

 

 질문을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비참했다. 사나이 존 왓슨, 이제 주부 다 됐구나...
 한편 셜록은 한참 머뭇거리다 질문에 대답했다.

 

 "다 썼어."
 "뭐하느라?"

 

 존이 물어오는 것에 셜록은 눈썹을 한 번 까딱 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 거 없네."

 

 그답지않게 명확한 대답을 얼버무리는 뉘앙스에서 존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다음 순간 존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실마리 비슷한 것이 스쳐지나갔다. 그건 바로 존이 단기근무로 나가는 병원에서의 야근때문에 셜록이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금욕기간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존의 안면근육이 묘하게 씰룩거리는 것을 몰래 뜯어보던 셜록이 조그맣게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는 바가 맞을 거야."

 

 셜록은 존의 얼굴이 다시 시뻘개지도록 내버려두고 얼른 거실을 나섰다. 그래! 항상 부끄러움은 존 왓슨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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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