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Lovers

2013. 12. 11. 22:57 from BBC Sherlock/단편

마레/단편

 

 

 건물 바깥으로 나선 레스트레이드는 예상 외로 추운 밤공기에 부르르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까 전까지의 뜨거운 정사로 노곤하게 풀린 몸이 찬바람에 순식간에 굳어버리는 것이 느껴진다. 내일 출근해야하는 것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마이크로프트의 침대에서 아침나절까지 곯아떨어져 있었겠지. 레스트레이드는 일말의 아쉬움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나이먹어서 연애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군.
 저도 모르게 낯부끄러운 생각을 떠올리고는 뺨을 몰래 붉히며 레스트레이드가 저만치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스트레이드!"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였다. 레스트레이드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옷을 입었는지 양복을 빠짐없이 갖춰입고 코트까지 걸친 마이크로프트가 손에 자신의 목도리를 든 채로 서있었다. 그때서야 자신이 마이크로프트의 집에 목도리를 놓고 왔음을 깨달은 레스트레이드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목도리를 받아들러 마이크로프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의 행동이 더 빨랐다. 레스트레이드가 뭐라 말을 하려 입을 열기 전에 마이크로프트가 레스트레이드에게 다가가 그를 부드럽게 질책했다.

 

 "런던의 밤은 추워요. 특히 이런 날에는 목을 내놓고 다니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큰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목도리를 매어주는 것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남들이 이런 광경을 보고 묘한 상상을 할까봐 두려워졌다. 아니, 사실 더욱 두려운 것은 뭇 사람들의 시선보다는, 그러한 지극히 성적이지 않은 접촉에도 갓 연애를 시작한 소녀처럼 꼬박꼬박 얼굴을 상기하며 두근거리는 자신이었다. 사소한 행동과 소소하기 그지없는 감정의 교환에도 일일히 동요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래서 늘그막에 불이 붙으면 위험하다는 것인가보다 싶어, 내리깐 마이크로프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더이상 견디지 못한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의 가슴팍에서 목도리의 매듭을 지으며 오가는 희고 우아한 손마디로 시선을 돌렸다.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스트레이드는 그가 매듭을 다 짓고 나서 어설프게 한 걸음 물러나며 화제를 돌렸다.

 

 "목도리때문에 굳이 나올 필요까진 없었는데..."

 

 내일 가지러 올 수도 있었고, 라고 말을 잇던 레스트레이드는 자칫하면 자신의 말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감사합니다, 로 말을 맺었다. 자신의 실언에 당혹한 눈빛을 하고 있는 레스트레이드를 바라보며 마이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목도리 때문만은 아니예요."

 

 그것때문이라면 번거롭게 옷을 다 입고 나올 이유가 없었겠죠, 라고 읊조리는 마이크로프트를 레스트레이드가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레스트레이드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마이크로프트가 왼손을 올려 아까 자신이 둘러준 목도리를 매만지며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을 집까지 바래다주려고 나온 겁니다."

 

 의외의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레스트레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칭 영국 정부라는 사람이 고작 경찰 하나 때문에 새벽이 다 되어가는 늦은 밤에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서다니. 수고를 끼친다는 생각에 레스트레이드가 마이크로프트를 만류했다.

 

 "꼭 그럴 필요까지는-"
 "당신이 거절한다면 내가 힘들게 옷까지 챙겨입은 게 헛수고로 돌아가겠군요."

 

 짐짓 상처받았다는 어조에 레스트레이드가 난감해하며 하던 말을 멈추었다. 마이크로프트가 그런 레스트레이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을 혼자 보내자니 내가 안심이 되지 않는군요.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으니 당신도 알겠지만...오늘 당신과 내가 좀 무리해서 일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나긋한 목소리로 아까 전에 있었던 정사를 상기하자 레스트레이드의 눈빛이 약간 흐려졌다. 그런 레스트레이드의 반응을 지켜보던 마이크로프트가 목에 얹고 있던 손을 살며시 올려 레스트레이드의 왼쪽 귓볼을 어루만졌다. 아까 깨문 자국이 선홍빛으로 남아있는 연하고 조그마한 살덩이를 손끝으로 주무르며 마이크로프트가 속삭이듯 말했다.

 

 "기억하죠?-그렉."

 

 밤바람에 차가워진 귓볼이 다시 따스해지고 나서 마이크로프트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레스트레이드를 포옹하듯 감싸고 그의 허리 부근으로 손을 옮긴 마이크로프트가 무시무시하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리도 무척 아플 거예요. 아까 힘들었죠? 내가 평소답지 않게...당신을 부드럽게 안지 못했으니까..."

 

 미안해요, 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조곤조곤 속삭이며 마이크로프트가 레스트레이드의 허리를 꾸욱 눌렀다. 정사가 끝나고 어느 정도 가시어 의식의 언저리에 머물던 쾌감이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며 레스트레이드의 욱신거리는 허리를 저릿하게 누른다. 부자연스러운 감각와 얼얼한 둔통에 어쩔 줄 모르고 떨리는 허리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듯 누르자 레스트레이드는 하아, 하고 숨을 토해내며 속수무책으로 마이크로프트의 품에 안겼다. 소심하게 내뻗어진 손이 마이크로프트를 밀어내듯 올라와 있었지만 손에 들어간 힘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약했다.
 레스트레이드가 자신의 품 안에서 끙끙거리는 것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즐기고 있던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의 귓가에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서 입술 사이로 혀를 살짝 내밀어 레스트레이드의 달아오른 귓바퀴를 싸악 핥았다. 선뜩하면서도 감미로운 감촉. 그러나 외려 레스트레이드는 그것에 정신이 들어 드디어 손에 힘을 주어 마이크로프트를 밀어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그만...!"

 

 너무나 쉽사리 뒤로 밀려난 마이크로프트가 빙글빙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레스트레이드가 원망하는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제발 밖에선 그러지 마십시오."

 

 레스트레이드가 불평하자 마이크로프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후후 웃었다. 그것에 더욱 약이 오른 레스트레이드가 돌아서려 하자 마이크로프트가 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

 

 또 뭡니까, 하고 레스트레이드가 그를 쳐다보자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데려다준다니까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그러고 싶어요."

 

 마이크로프트의 완고한 말에 레스트레이드는 결국 한숨을 푹 쉬며 다시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

 

 택시를 타고 레스트레이드의 집 앞까지 도착한 두 사람은 그때까지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누가 볼 지도 모르는 밖에서 끈적한 스킨십을 해댄 마이크로프트에게 화가 난 레스트레이드가 꿍하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에서 시작된 것뿐이었지만 마이크로프트는 역시 마이크로프트답게 딱히 레스트레이드의 기분을 풀어주기 뭐라고 말을 붙이지 않았다. 제풀에 지쳐 화가 식어버린 레스트레이드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고 마이크로프트도 자신의 옆에서 보조를 맞추어 따라오고 있었다.
 레스트레이드가 문득 발을 멈추었다.

 

 "다 왔어요."

 

 마이크로프트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말했다.

 

 "그렇군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동네 이웃들은 이미 지금쯤 모두들 곤하게 자고 있을 것이다. 쥐새끼 하나 지나가는 소리도 없이 조용한 거리가 그것을 반증했다. 그런데 마이크로프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돌아가려 하질 않았다.
 집까지 바래다 준다고 해놓고, 라고 생각하며 약간 혼란스러워진 레스트레이드는 머리가 아파왔다. 무겁게 자신을 옭아매는 침묵의 사슬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해보고자 레스트레이드는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 담뱃불을 붙였다. 레스트레이드가 담배를 하나 빼무는 것을 바라보던 자신도 입이 심심했는지 코트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빼들었다. 가느다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마이크로프트가 레스트레이드에게 말을 걸었다.

 

 "레스트레이드. 불 좀 빌려주시겠어요?"

 

 레스트레이드가 마이크로프트가 라이터를 챙기고 다니지 않는다니 별일이네, 라고 생각하며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주머니를 뒤적여 라이터를 꺼내려는데 마이크로프트가 성큼 다가와 자신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니, 그건 됬어요."

 

 마이크로프트의 의미모를 말에 영문을 몰라하던 레스트레이드는 곧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손에 든 담배를 입에 물고 자신의 담배 끝에 마주댄 것이다. 눈꺼풀을 지그시 내리깐 채로 자신의 담배끝에서 반짝이는 불그스름한 불씨가 자신의 담배에 옮아붙는 것을 바라보는 눈길이 사뭇 냉랭해 보였으나 불꽃이 일렁이는 것이 아른아른하게 비치는지라 한편으로는 따스하게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담뱃불을 빌려달라는 것인줄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레스트레이드는 어색하게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그가 자신의 담배에 불을 옮겨붙이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끝이 맞물려 있던 담배는 비로소 떨어졌다. 그러나 적어도 레스트레이드에게만큼은 그 짧은 시간은 마치 천추와도 같이 긴 시간이었다. 직접적으로 입술을 포갠 것도 아닌데, 담배 두 개가 맞닿은 것만으로도 키스 못지않은 달큰한 감각이 혀끝에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담배를 잠시 손에 들고 큰 한숨을 내뱉는 레스트레이드에게서 고개를 돌려 담배를 세게 한 모금 빨아들인 마이크로프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군요."

 

 레스트레이드가 쳐다보자 마이크로프트가 그를 마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것, 나도 마찬가지로 출근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내일 아침에 멀쩡한 정신으로 일어나려면 지금 당장 잠자리에 들어도 늦었다는 걸 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당신을 이렇게 잡고 있는 건 참으로 바보같은 짓이란 것도 알고 있죠. 하지만..."

 

 마이크로프트가 입술을 아주 잠깐 앙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하고 함께 있는 이 시간을 끝내기가 싫군요."

 

 그 말을 넋을 놓고 듣고 있던 레스트레이드가 입을 열었다.

 

 "커피 한 잔 하고 가실래요?"

 

 막상 그런 말을 입밖에 내고 보니 부끄럽다못해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방금 전까지 몸을 맞대고 있던 사람인데,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또다시 유혹해버리고 만 것이다. 대체 마이크로프트는 얼마나 두꺼운 낯짝을 가지고 있길래 매번 자신을 달콤한 말로 구슬리고 노골적으로 유혹해오는 것인지, 조금은 존경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마이크로프트의 근사한 저택에 비하면 다락방, 아니 창고나 다름없는 자신의 방이 지금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그런 말을 해버리다니.

 레스트레이드가 말을 던져놓고 곤란해하는 기색을 알아채었는지 마이크로프트가 하하 웃었다. 레스트레이드의 말에 충분히 흡족해진 마이크로프트는 입가에 그답지않게 따뜻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 그건, 내일을 기약하기로 하죠."

 

 뺨에 서늘한 담배향이 어린 가벼운 키스를 남긴 마이크로프트가 돌아서서 멀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스트레이드는 담배의 필터까지 타들어가고 나서야 담배를 비벼 끄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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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전학생

2013. 12. 11. 22:56 from BBC Sherlock/단편

셜록존/리퀘

 

 

 학교는 작은 사회다.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학급은 그 안에서 임의로 나뉜 더 작은 사회이다. 그 안에 속한-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서른 명 남짓한 아이들은 소사회에서 저마다 다른 역할을 맡는다.
 존 왓슨은 학급의 16명의 남자아이들 중에서 가장 평범한 아이였다. 그의 흰 피부는 바깥놀이를 좋아하는 여느 아이마냥 적당히 그을려 있었다. 아마 카탈로그에 실린 어린이 모델처럼 복숭앗빛 뺨을 지녔다거나, 신경써서 길러진 귀족의 아이처럼 얄팍한 얼굴 윤곽에 건강한 살빛을 지녔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그의 홍채 빛깔이 흐린 하늘색이 아니라 대륙인의 것처럼 좀더 진하고 선명한 푸른빛이었다면 또 달랐을 것이다. 창고에 아무렇게나 쌓인 밀짚과 건초가 뒤섞인 듯 거무튀튀한 소년의 금발이, 햇빛을 가득 머금은 밝은 금발이었다면 사람들은 존에게 한번쯤 더 눈길을 주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 왓슨은 존 왓슨일 뿐이다. 영국 소년의 평균적인 외양과, 신장과, 체중을 가진 소년.


 존은 어린아이 특유의 이유없는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고, 공부에 매달리는 것은-반에서 일등을 놓치지 않는 왜소한 안경쟁이 유스터스같은-범생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앞에서 선생이 뭐라고 떠드는 것을 싹 무시한 채 교과서에 그려진 여자아이의 얼굴을 뿔과 털이 수북한 괴물로 만들고 있는데, 그의 책상으로 꼬깃꼬깃 접힌 쪽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쪽지가 날아든 방향을 힐끔 보니 반에서 제일 가는 장난꾸러기이자 말썽쟁이인 티미가 그에게 눈을 찡긋거리는 것이었다. 펜촉에서 새어나온 잉크가 묻어 지저분한 손으로 이미 몇 사람이 열어보았을 종잇조각을 펴자 삐뚤빼뚤한 글씨로 무언가가 쓰여있었다.

 

 'BIG NEWS! 전학생이 온대!!!'

 

 무려 느낌표가 세 개. 한 학기 동안 이미 서로에 대해 필요한 만큼은 속속들이 알게 된 아이들에게 전학생이란, 불청객이면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장난감이기도 했다. 존은 픽 웃으며 쪽지를 다시 접어 다른 누군가에게 던졌다.

 

*

 

 수업이 끝나고, 다른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존은 돌아가지 않았다. 늦게까지 일하는 부모, 그리고 엄마 아빠 몰래 집에 여자친구들을 끌어들여 방문을 잠그고 수상쩍인 짓을 하는 누나는 존이 집에 일찍 오든 늦게 오든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놀다 지쳐 교목 밑 벤치에 앉아있는데 교무실이 있는 건물의 문을 열고 누군가가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검은 머리의 남자아이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 멀리서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낮에 티미가 말해준 전학생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전학생에게 말을 걸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검은 고수머리의 남자아이도 존을 발견한 것인지 노을을 등지고 이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흰 점에 불과했던 얼굴이 차츰 가까워졌고, 존은 소년의 얼굴은 앳된 데에 비해 키는 껑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성장기가 오지 않아 작달막했던 존이 그를 부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데, 존이 달리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남자아이는 존이 앉은 벤치의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존은 소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신기하리만치 하얀 피부. 하지만 그런 피부에 으려 어려있을 법한 병색은 보이지 않았다. 날렵한 턱선을 바라보고 있는데 검은 머리의 소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집에 가기 싫어?"
 "응?"

 

 바보같이 반문을 하고 만 존은 어, 어, 하고 허둥거리다가 겨우 제대로 된 대답을 뱉어냈다.

 

 "응. 집에 가기 싫어...근데 어떻게 안 거야?"

 

 존이 왜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교정에 남아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꿰뚫어본 소년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소년은 묘한 눈초리로 존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다른 애들이 모두 집으로 간 지금까지도 학교에 남아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어?"

 

 대수롭잖다는 듯한 어투였다. 존이 와, 하고 입을 벌리고 감탄하고 있는 동안 소년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고 못다한 설명을 쏟아냈다.

 

 "일반적인 가정의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들에게 최대한 집으로 빨리 귀가하기를 요구받지. 그런 아이들이 집에 늦게 오면 혼이 나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 아이들은 하교 시간이 되고 나서 별다른 놀이 약속이 없는 한 집으로 빨리 되돌아가게 마련이야. 만약 네가 부모님의 지시를 어기고 지금까지 학교에 남아 놀고 있었다는 가정을 세울 순 있겠지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유괴와 폭행 등의 흉흉한 사건이 넘쳐나는 요즘에 이 시간이 되기까지 아이를 방치하는 것을 보면 부모님은 네게 신경을 써주지 못할 정도로 바쁘신게 분명해. 그렇다면 이제 남는 건 네 의사지. 하교 시간으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났을테니 그 사이에 넌 집에 돌아갈 수도 있었어. 하지만 넌 가지 않았지. 그러니까 넌 그냥 집에 가기 싫었던 거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논리정연한 말에 존의 눈과 벌어진 입이 더욱 커졌다. 경악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던 존이 눈을 깜박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우와 너 진짜..."

 

 소년은 뒤이어 이어질 말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Freak. 아니면 잘 쳐주어봤자 nerd, 겠지. 하지만 설사 자신이 그런 말을 듣는다 해도 자업자득이었다. 모든 것을 명약관화하게 설명하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하여간 몇 번이고 경멸과 혐오가 섞인 시선을 받아왔지만 이 버릇은 고쳐지질 않는다니까, 라고 생각하며 소년은 벤치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소년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대단하다!"

 

 명백한 감탄이었다. Brilliant, 라는 긴 단어를 다소 혀짤배기 소리로 뱉어낸 눈앞의 금발 소년은 자신을 반짝반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바라본다 해도 저처럼 눈이 반짝이지는 않을텐데, 라고 다소 냉소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셜록은 생소한 반응으로 인해 뺨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예상 밖이네."

 

 검은 머리 소년의 말에 존이 물었다.

 

 "뭐가?"
 "보통은 그렇게들 말하지 않거든."
 "그럼?"

 

 소년이 피식 웃으며 존의 물음에 답했다.

 

 "재수없다고들 하지 아마."

 

 순간적으로 눈이 동그래졌던 존은 금방 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진짜 말도 안돼! 라고 말했다. 존의 웃음이 이어질수록 검은 머리 소년의 얼굴에도 서서히 웃음이 번졌다.

 

*

 

 "그래서, 이름이 뭐야?"
 "난 존, 해미쉬, 왓슨 이라고 해."

 

 존이 뽐내듯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누군가가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는 것이 오랜만이었던 존은 눈 앞의 소년이 살갑게 대화에 응하는 것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한편 소년도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을 보인 금발의 소년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멍청하리만큼 순진한 것도 아니면서 소년의 말에 이토록 순수한 감탄과 함께 호응해주는 것에, 소년의 마음 속에서는 이 남자아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나고 있었다.
 존 해미쉬 왓슨, 하고 입으로 그 이름을 한번 궁굴린 소년은 문득 건물 저편을 바라보았다. 전학 수속이 끝난 것인지, 익숙한 길쭉한 실루엣의 남자 하나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소년은 마음이 급해져 존에게 빠르게 물었다.

 

 "그럼 몇 반이야?"
 "난 3-B반이야. 넌 몇 반으로 전학오는 거야?"

 

 존의 물음에 검은 머리의 소년은 벤치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너랑 같은 반이 될거야."

 

 그 말에 와아! 하고 좋아하던 존은 소년이 벤치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가는 거야?"
 "응. 저기 우리 형이 오고 있거든."

 

 멀리서 이편을 바라보며 서 있는 인영을 가리키며 소년이 말했다.
 그럼 안녕, 하고 작별 인사를 던지고 멀어지는 소년의 이름을 미처 묻지 않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존이 다급하게 큰 소리로 외쳤다.

 

 "참! 넌 이름이 뭐야?"

 

 형을 향해 달려가던 소년이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셜록 홈즈!"

 

 그렇게 외친 소년, 셜록은 그의 형이라는 사람과 함께 학교를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존은 이윽고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내일부터는 학교가 조금 더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

 

 "누구니?"
 "친구."

 

 소년의 말에 소년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던 장신의 청년이 코웃음을 쳤다.

 

 "친구?"

 

 말도 안된다는 듯한 반응에 셜록이 바락 화를 냈다.

 

 "왜, 난 친구도 만들면 안되?"
 "아니, 아니야."

 

 사교성없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셜록 홈즈에게, 친구라니! 마이크로프트는 말도 안되는 말에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것을 기분나쁜 눈으로 올려다보면 셜록이 물었다.

 

 "근데 나 몇 반이야?"

 

 갑작스런 물음에 마이크로프트가 이상한 눈으로 셜록을 내려다보다가 대답했다.

 

 "C반."

 

 그 말을 들은 셜록이 방방 뛰기 시작했다.

 

 "안돼! 난 B반 가야 해! 아까 걔랑 약속했단 말야!"

 

 누군지 모를 아이와의 약속을 들먹이며 발을 동동 구르면서 날뛰는 셜록의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마이크로프트는 순간 좋은 생각이 나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을 가다듬은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교장선생님한테 부탁하면 C반에서 B반으로 옮기는 건 일도 아니지. 하지만 너도 알지, 셜록? 자고로 부탁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마이크로프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리는 셜록의 시선을 즐기며 마이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오늘 집에 가서 내가 사준 옷 입어. 오늘 저녁 내내."

 

 셜록이 항의했다.

 

 "마이크로프트, 난 열 살이야! 반바지 정장 따윌 입을 나이는 지났다고!"

 

 떽떽거리며 반항하는 셜록에게 마이크로프트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정 입기 싫다면 할 수 없지."

 

 그리고 넌 얌전히 C반에 가야 할 걸, 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에 셜록은 엄청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고민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셜록이 힘없이 말했다.

 

 "...알았어, 입을게."

 

 마이크로프트가 이겼다는 듯 활짝 미소지었다. 드디어 열 살이 된 셜록의 반바지 정장 컬렉션이...!라고 남몰래 부르짖으며 그는 우아한 미소를 꾸며내어 입가에 머금었고, 셜록은 집으로 가는 내내 한숨만 푹푹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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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모]그날 밤

2013. 12. 11. 21:12 from BBC Sherlock/단편

마모/단편

 

 

 마이크로프트는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밤거리의 불빛은 휘황하고 지나치게 찬란하여 절로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였다.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이 차에 타고 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될 정도였다. 분홍색 불빛. 푸줏간에서 흔히 보이는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분홍색이었다. 거리를 채운 불빛 아래에는 고기들이 그득했다. 그 고기는 죽은 고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고기였다. 여자. 벌거벗다시피 맨 살갗을 드러낸 여자들이 덕지덕지 짓무른 화장으로 형체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술기운을 빌려 감히 어두운 골목으로 발을 들인 허랑한 사내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있었다. 여자들은 삼 분에 한 번씩은 같은 말을 내뱉을 것이었다. 어서 와, 오빠. 잘해 줄게. 마이크로프트는 선팅으로 한층 짙어진 차창 안에서도 능히 그 입모양이 만들어내는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금발, 흑발, 흑발, 다시 금발. 헝클어진 여인들의 머리칼 색을 되뇌이다 문득 마이크로프트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가 있었다. 여자로 가득한 이 거리에 드물게 보이는 남자였다. 본시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거리에서 남자는 더욱 어두웠다. 그러나 그들은 각기 다른 어둠을 품고 있었다. 시궁창처럼 뒤섞인 진창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흑진주처럼 남자의 존재는 이질적이었다. 캄캄한 밤처럼 은밀한 존재감을 풍기는 남자에게서 일종의 위화감을 느낀 마이크로프트는 차의 속도가 느려진 틈을 타 차창에 더욱 고개를 가까이하여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는 누군가를 짓밟고 있었다. 반듯한 양복 바지의 주름이 사정없이 접혔다 펴지길 반복하며, 바짓자락의 각진 주름이 가로등의 불빛을 날선 듯 반사하며 빛나고, 남자의 다리가 경쾌한 듯 움직이고, 남자의 발 아래에서는 이미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된 다른 이가 가만히 그 폭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마 처음에는 저 남자도 저항했으리라. 그러나 그가 반항의 기세를 늦추었음에도, 아니 이미 반항을 멈추었음에도 폭력을 가하는 남자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그것은 폭행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을 잃은 듯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일방적이고 이유 모를 폭력에 마이크로프트는 일순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러나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인간의 역겨운 호기심. 탠 브라운의 깔끔하게 재단된 구두에 짙은 얼룩이 진 것이 보였다. 얼룩의 정체는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고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피. 가벼운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휘파람을 불며 옷매무시를 가다듬던 남자는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남자의 옷자락에 피묻은 구둣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비벼 닦으며 문득 고개를 돌렸다. 느닷없이 시선이 마주친다. 마이크로프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유난히 검은 눈을 지닌 사내였다. 생각 외로 유순한 분위기의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는 이마로 가닥져 떨어진 흑갈색 머리칼을 뒤로 넘기곤 계속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마이크로프트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이 길이 트였는지 멈춰있다시피 하던 차가 갑자기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차창 밖의 풍경에 언뜻, 남자의 미소가 살풋 어린 것 같았다.

 

*

 

 신문에는 묻지마 폭행 살인 건으로 뒷골목에서 한 남자가 사망했다는 단신이 실렸다.

 

*

 

 마이크로프트는 남자가 지었던 미소를 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지었던 미소에서는 비열함이 듬뿍 묻어나왔다. 붉은 신호등처럼 위험한 그의 미소가 마이크로프트의 눈 앞에서 환각처럼 깜박였다.

 

 "어제 갔던 길로 가지."

 

 지난 밤은 갑작스런 도로 공사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창가를 지날 수 밖에 없었다. 운전수는 혹시나 마이크로프트가 어제 본 사창가 여자 중 하나에게 눈독을 들인 것이 아닌가 짐작했다. 그러나 그는 섣부르고 천박하기까지 한 그 가정을 입 밖으로 내어 농짓거리를 할 정도로 허투루 교육받은 자가 아니었다. 간단한 지시를 입 밖으로 낸 후 다시 냉담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마이크로프트의 표정을 백미러로 흘끗 쳐다보며 남자는 운전대를 돌렸다.

 

*

 

 마이크로프트는 창 밖을 조용히 내다보았다. 비슷비슷한 풍경이 색감만 조금 달리한채 다시 스쳐지나간다. 어제와 다름없이 지저분한 거리. 그리고 그의 머릿속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너저분했다. 다시 이 거리로 온다고 해서 어제의 그 남자를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도 마이크로프트는 굳이 이 길로 오기를 고집했다. 예감이라도 느낀 것인가? 마이크로프트가 그토록 혐오하는 비이성적인 것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이끌린 것일까? 어제 남자를 목격했던 바로 그 골목에 다다랐다. 역시 남자는 없다. 바닥에 쓰러져 두들겨 맞고 있던 남자 또한 없다. 변변한 핏자국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아스팔트 바닥은 마이크로프트가 어제 본 광경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기묘한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려다 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으로 대신했다. 운전석의 앉아 착실하게 앉아있는 고용인이 유달리 마이크로프트 자신의 눈길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내려는 눈굴림이 분주했다. 그 자신이 자초한 것이니 주의를 주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겠지. 남자를 찾길 포기한 마이크로프트는 줄곧 바깥으로 향하고 있던 시선을 안으로 물리고 일부러 느린 속력을 내고 있던 운전수에게 막 입을 열어 '됐어. 집으로 가지.'라고 말하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마이크로프트가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놀랍게도, 어제 본 남자가 서 있었다. 어제 보았던 미소와 똑같은 미소를 지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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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술

2013. 12. 11. 21:05 from BBC Sherlock/단편

셜록존/100제

 

 존이 찬거리를 가지고 플랫에 돌아왔을 때 셜록은 온데간데 없었다. 마트에 가기 전까지 그가 입고 있었던 가운만 아무렇게나 벗어젖혀진 채로 소파 위에 덩그러니 남아있다.
 들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허전한 구석을 메우기 위해 존은 혼잣말을 했다.

 

 "대체 어딜 간 거야?"

 

 사건이 들어왔다면 존을 빼놓고 갈 리가 없다. 설령 존이 마트를 간 사이에 의뢰가 들어왔다고 해도 존이 에섹스에 간 것이 아닌 이상 그를 대동하고 현장으로 출발했을 것이다.
 의문을 품은 채로 존은 식료품을 냉장고 안에 채워넣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안에는 유통기한이 다 되가는 음식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긴, 부탁한다고 순순히 들어주는 편이 더 이상하다. 셜록 홈즈라는 남자에게 이골이 날 정도로 그를 잘 아는 존은 그저 피식 웃고는 냉장고 정리를 시작했다.

 

*

 

 열두 시가 넘었다. 존이 셜록의 신변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날 즈음, 밑에서 쿠당탕 하고 무언가 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셜록일 것만 같은 직감이 들어 문을 열고 아랫층을 살피자, 아니나다를까, 셜록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널브러져 있었다. 허드슨 부인은 그를 일으켜세우려다 실패하고 그에게 꾸중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이렇게 술에 떡이 돼서 온 거야!"
 "제가 할게요. 이 멍청이는 저한테 맡기시고 부인은 들어가서 쉬세요."

 

 존은 급히 계단을 내려가 셜록을 부축했다. 허드슨 부인은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고 방 안으로 돌아갔다.
 
 "셜록? 정신 좀 차려봐."

 

 술통에 몸을 담갔다 나오기라도 한 것인지 그의 반경 일 미터는 술 냄새로 진동했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참으며 존은 셜록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일으켜세우려고 했다.
 안그래도 자신보다 키가 큰 그가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자신에게 기대자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의 팔 아래에 자신의 어깨를 집어넣고 억지로 그를 일으켜서 계단을 올라가는 일은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쳐 버릴 것 같은 셜록을 힘써 다독이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그의 몸이 휘청이는 것을 바로잡느라 존은 죽을 맛이었다.
 간신히 계단을 다 올라와서 보니 방문을 닫아놓고 내려온 것 때문에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존은 속으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셜록을 잠시 벽에 기대어놓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잠시 동안에도 바닥으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셜록을 다시 일으켜세우느라 고생한 존은 셜록을 재빨리 안으로 밀어넣고 문을 닫았다.

 

 "정말...이게 무슨 일이람."

 

 셜록이 이토록 술에 취한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존은 당황과 놀람이 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해보니 술에 취한 모습뿐아니라 술을 마시는 모습도 본 적이 없긴 했다.
 어쨌건 셜록을 끌고 플랫으로 올라오느라 땀이 배어나올 정도로 고생한 존은 셜록을 소파에 대충 눕히고 자신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존은 셜록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호리호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의 무게를 감당해보니 꽤나 무거웠다. 의외로 근육량이 상당할지도, 라는 생각을 하는 참에 반쯤 열린 셜록의 입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음..."
 "정신이 들어?"

 

 존은 별로 기대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셜록은 끙 소리를 내며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정신을 차린 것 같았지만 여전히 눈빛은 흐린 것이 아직도 술에 취해있는 것 같았다.
 하긴 벌써 정신을 차릴 리 없지. 저렇게 술에 절어가지고 왔는데 말이야. 속으로 독백한 존은 차분하게 셜록에게 말을 걸었다.

 

 "늦었어. 일단 옷부터 벗고 침대로 가서 자."

 

 존의 말을 들은건지, 셜록이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침대...?"
 "그래. 소파에서 잘 셈이야? 내일 숙취 장난 아닐텐데, 잠이라도 편한 곳에서 자야지."

 

 설득력있는 존의 말에 셜록은 완전한 제정신이 아님에도 약간은 납득한 건지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이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균형감각을 잃은 몸은 비틀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일어서질 못했다.

 

 "도와주게, 존."

 

 어린애같이 칭얼거리는 말투로 말하는 셜록에게 조금 놀란 존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셜록을 향해 다가갔다.

 

 "네가 어지간히 취하긴 취한 모양이구나. 도와달란 소리도 하고."

 

 술에 취한 셜록은 굉장히 무겁고 성가시다는 것만 빼면 꽤나 귀여운 면모를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 존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셜록은 대답이 없었다. 다시 잠에 든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는 말이 없었다. 존은 그를 향해 다가가 그의 상체를 향해 몸을 숙여 그를 일으키려 팔을 뻗었다.
 그때 셜록이 눈을 떴다.
 셜록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친 존은 깜짝 놀라 그를 향해 뻗던 손을 미처 거두지도 못하고 자연스럽게 그를 안아올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셜록이 싱긋 웃었다. 난생 처음 보는 환한 미소였다.

 그의 팔이 존의 상체를 잡아끌더니 그의 품 속으로 꼭 안았다. 졸지에 폭 안겨버린 존은 어이가 없었다. 이자식이 누굴 누구로 착각하고 있길래 이러는 거야? 부아가 치밀기 시작한 존은 셜록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술 취한 셜록은 천하장사라도 된 것처럼 그에게 가한 속박을 풀지 않았다.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셜록의 포옹을 받아들인 자세가 된 존은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다. 대응책을 생각하느라 가만히 있는데 셜록이 낮은 목소리로 존의 이름을 불렀다.

 

 "존..."

 

 귓가에 곧바로 와닿는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숨결이 귓불에 느껴지는 바람에 존은 얼굴을 붉혔다. 간질간질한 숨결이 그의 귓불 뿐 아니라 심장마저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셜록."

 

 나직하게 말해보았지만 이미 자신의 몸은 저 목소리 때문에 노곤하게 풀린지 오래라는 걸 알고 있다. 셜록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울림이 깊어서 묘하게 성감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이 경우에는 상대가 남자라서 문제이긴 했지만.
 존이 다시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셜록은 아랑곳않고 그의 귓속으로 혀를 밀어넣었다. 촉촉한 살덩이가 귓바퀴를 따라 움직인다. 존이 숨을 멈추었다.
 귀의 모양을 따라 움직이던 셜록의 혀는 이윽고 존의 목을 파고들었다. 목에 선 핏줄을 셜록은 혀로 눌렀다가 집요하게 핥으며 장난을 쳤다. 그러나 그 장난을 받아들이는 당사자에게는 장난의 수준이 아니었다. 유난히 민감한 목을 그런 식으로 애무당하는 데 익숙치 않았던 존은 연신 차오르는 신음을 참아내야 했다.
 셜록의 애무는 목선에서 어깻죽지로 이어지는 부근에서 다시금 제자리걸음을 했다. 코를 깊이 파묻고 셜록이 속삭였다.

 

 "냄새 좋다..."

 

 그 말은 어떤 애무보다도 강하게 존의 중추신경을 자극했다. 키득키득 웃으며 존의 어깨를 자근자근 깨물기 시작한 셜록때문에 결국 존은 신음 한 줄기를 내뱉었다.

 

 "하으-"

 

 장난치는 것처럼 가볍던 애무가 그 순간 뚝 멈추었다. 신음소리를 낸 존도 자신이 그런 소리를 냈다는 것에 당황하여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셜록의 머리가 존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존은 너무나 두려워서 눈을 꼭 감았다.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서 셜록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눈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 지 너무나 두려웠던 존은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서 가만히 있었다.
 잠시 자신의 앞에서 머물던 얼굴이 서서히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건조한 듯한 입술이 자신의 입술 위에 포개어졌다. 알코올의 씁쓰름한 맛이 배인 혀가 자신의 혀와 섞였다.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있는 자신의 혀를 그의 혀가 달래듯이 부드럽게 감싼다. 용기를 내어 그의 혀를 건드린다. 그의 혀는 존의 소극적인 움직임도 반가운지 적극적으로 응수한다.
 존은 셜록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지금의 따스하고 상냥한 키스처럼 그를 따뜻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을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의 실험이라면, 하는 생각이 들자 눈을 뜨기가 두려워졌다. 만약 눈을 떴는데, 사물을 관찰하는 것 같은 차가운 시선이 자신 앞에 자리한다면 그는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존 왓슨은 셜록 홈즈를 사랑하므로.
 몇 번이고 눈을 뜰까말까 망설이던 존은 결국 눈을 뜨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술에 취한 셜록이 이 키스를 영원히 기억하지 못하길 바라며, 그저 자신이 이 키스를 가끔 떠올리며 반쪽짜리 행복감이라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존은 간절히 빌었다.
 그러는 새 키스는 끝났다. 셜록은 풀썩 소리를 내며 소파 위에 몸을 눕혔다. 바들바들 떨던 존은 셜록의 숨소리가 고르게 되는 것을 듣고 나서야 눈을 살며시 떴다.
 셜록은 눈을 감고 있다.
 다행이야. 그는 잠들었어.
 존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셜록을 내버려둔 채로 침실로 돌아갔다.

 

*

 

 셜록은 존의 발걸음소리가 충분히 멀어진 것을 듣고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떴다.
 술기운으로 초점이 없던 눈은 어느새 차가운 총기를 되찾았다. 사실 그는 술을 몸에 쏟았고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뱉었을 뿐 전혀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용케도 존을 잘 속여넘겼다고 생각하며, 그는 존이 사라진 침실 쪽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살짝 올려보았다.
 입술만이 뜨겁게 불타는 감각.
 잠시 멍하니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침실에서 존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셜록은 급히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귀만 쫑긋 세우고 존이 왜 다시 왔는지를 추리하고 있는데, 자신의 몸 위에 이불이 덮히었다. 정성껏 이불을 덮어주고 셜록의 가슴 위까지 끌어올리고 매무새를 정리한 존은 잠시 그의 옆에 있다가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다시 발소리가 멀어진 후에도 셜록은 차마 눈을 다시 뜨지 못하고, 두방망이질치는 그의 심장 박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밤을 지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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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Last moment

2013. 12. 11. 21:04 from BBC Sherlock/단편

셜록존/리퀘

 

 대체 어쩌다 이런 상황에 휘말린 건지 모르겠다.

 

 "존!"

 

 셜록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건지 시끄럽게 내 이름을 부른다. 급히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지만 셜록은 '저리 피해!'라고 소리치며 갑자기 내게 달려온다. 왜 달려오는 거야, 왜! 괜히 위치가 노출되기 전에 엄폐물 뒤에 잘 숨어있으란 말야! 물론 속엣말로 외쳤기 때문에 셜록에게는 들릴 리가 없다.
 셜록은 내 눈짓도 무시하고 상자들 틈에서 내쪽으로 달려와 나를 붙잡고 나를 밀쳤다. 거의 동시에 총성이 울렸다.
 조용하지만 빠르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천년처럼 길다.

 

*

 

 "이런 제길...셜록! 이 멍청이가!"

 

 그 자리를 어떻게 벗어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를 겨냥하고 쏜 총알은 셜록의 옆구리를 스쳤고, 아니 스쳤길 바란다...적어도 파열탄은 아니길...어쨌든 그 한 발의 총알을 필두로 매복하고 있던 수많은 저격수들이 총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방탄 조끼를 입고 있는 나였기 때문에 총탄에 치명적인 타격은 입지 않았다. 그러나 9mm탄도 몇 개 섞여있는지 온 몸이 찌릿찌릿한 둔통은 가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약과다...옆구리에 총상을 입은 셜록에다 대면, 그정도 부상은 부상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것이다. 그러니까 잘 숨어있으라고 말했던 건데...하긴 셜록이 내 말을 고분고분 들으리라고 생각한게 오산이다. 아드레날린 때문인지 공포심때문인지 실없는 웃음이 피식 샌다.
 셜록을 부축하고 날듯이 달려온지 한참이 지났다. 매복 구간을 벗어난 것인지 총성이 저멀리서 들린다. 한숨 돌려야겠다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어둠컴컴한 골목이 보인다. 부상때문에 맥을 못추고 비틀거리는 셜록을 이끌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담벼락과 밤이 선사하는 캄캄한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다. 일단은 셜록의 부상을 체크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다.

 

 "존..."
 "닥쳐. 입다물어. 이 멍청아. 방탄 조끼 나 입으라고 던져줬으면 얌전히 숨어있기나 할 것이지 왜 나오고 지랄이야."

 

 평소에는 입밖에 내지도 않던 욕이 저절로 쏟아져나온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손은 바쁘게 움직인다. 훈련된 군의관의 솜씨가 이런 시점에서 필요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생각보다 잘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독려했다. 숙련되다 못해 거의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찢어진 코트를 젖히고 옆을 살핀다. 하얀 와이셔츠 한쪽이 피범벅이다. 어둠 속에서 검붉은 빛깔의 피가 더욱 검다. 환부를 관찰하기 위해 상처를 덮은 부분을 찢어낸다. 이미 끈적하게 살갗에 달라붙은 핏물과 새로 흘러나오는 피가 엉겨 꼴이 말이 아니다. 제길, 제길, 하고 상소리만 나온다.
 마침 바지 뒷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는다. 손수건을 쥔 손이 덜덜 떨린다. 정신 차려, 존. 피를 한 두번 본 것도 아니면서 왜이래. 자신을 나무란다. 간신히 피를 닦아내자 손수건도 절반 정도가 피에 푹 절어버린다.
 주변을 살피고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휴대폰을 꺼내 액정의 불빛으로 살폈다. 다행히 관통탄의 흔적임을 확인한다. 약간 깊게 스쳐지나갔길래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는 있지만, 그래도 안에서 내장을 헤집어놓는 파열탄보다는 사정이 낫다. 저도 모르게 휴 하고 한숨을 쉬다가 지레 놀란다. 그다지 멀리 도망온 것은 아니기에 추격의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숨소리를 죽이고, 심호흡을 한 후 총알이 스친 상처를 손수건으로 누른다.
 셜록이 나에게 뭐라고 중얼거린다. 귀를 그의 입가에 가까이 대었다.

 

 "여기...Grimm street, 13번가..."

 

 그새 머릿속으로 현재 위치를 계산했나보다. 정말이지 그답다. 그가 다시 속삭인다.

 

 "레스트레이드한테...문자 보내."

 

 안그래도 그럴 거였어, 하고 대꾸한 후 재빨리 문자를 보낸다. 찰나의 망설임 후 'Emergency!!!'라고 써서 한 통을 더 보냈다.
 문자를 보낸 후 다시 셜록의 상처에 손을 갖다대고 지혈했다. 손도 어느새 피로 뜨끈하게 젖었다. 축축한 것이 기분이 무척 나쁘다. 그 피가 셜록의 피라는 것은 나빠진 기분을 더욱 바닥으로 끌고들어간다. 잔뜩 저조해진 기분으로는 뭔가 아무 말이라도 내뱉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원 병력이 온 후에 급습하쟀잖아. 게다가 방탄조끼도 안입은 놈이 어딜 달려드냔 말이야."

 

 셜록이 픽 웃었다. 어쩐지 그 웃음소리에는 힘이 빠져있다. 그의 얼굴을 본다. 계속해서 외면하고 있었던 그의 얼굴을 본다. 안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핏기마저 가셔 유령처럼 창백하다. 조롱과 비웃음만 담고 있던 얼굴이 어울리지 않게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래 마치-
 -생애 마지막 순간을 목도한 사람처럼.
 이래서 그의 얼굴을 보기 싫었다. 딱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두려워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거다. 내가 아는 셜록은 말야, 응? 그런 꼴사나운 표정은 짓지 않는다고. 알아? 웃지 말란 말이야. 그런 식으로는 더더욱 웃지 말라고. 평소처럼 나에게 핀잔을 주고, 멍청하다고, 왜 봐도 모르냐고 말하란 말이야. 그런 세상 다 산 노인네같은 표정 짓지 말고...!
 그의 손이 내 뺨을 스친다. 어느샌가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울지 마."
 "안 울어."

 

 애써 대꾸한다. 코가 아릿하다. 힘이 없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낸 그 손이 뺨을 감싼다.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의 손까지 적신다.

 

 "시간이...얼마 없는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말도 안되는 소리, 시간이 왜 없다는 거야. 나보다 젊잖아, 넌. 나이도 어린 주제에...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사랑해, 존."
 "?!"

 

 급박한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총 맞더니 정신이 나갔냐?"

 

 이런 험한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셜록은 예상했다는 듯이 피실 웃으며 말했다.

 

 "진심이야."

 

 정말로 깜짝 놀라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그는 내 상태는 아랑곳않고 말을 띄엄띄엄 이었다.

 

 "그동안, 주욱...사랑해왔어. 언젠간 고백하려고 했지만...이런 상황이 될 줄은...그래도 죽기 전에 말해서 다행이야."
 "죽긴 누가 죽는단 말야!"

 

 하지만 내가 부여잡고 있는 셜록의 옆구리에서 피가 그치지 않고 스며나오고 있다는 것은 내가 더 잘 안다. 당사자인 셜록도 그것을 직감한 것일지도.
 그러나 지금처럼 약한 소리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넌 절대 안죽어. 내가, 응, 내가 널 죽게 놔둘 것 같아?"
 "존..."

 

 횡설수설하는 내게 그가 말했다.

 

 "존, 키스해줄래?"
 "!!!"
 "나의...처음이자 마지막 키스, 네가 해줬으면 좋겠어."

 

 제기랄...!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셜록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 맑은 눈과 마주친 순간, 나는 망설임없이 그의 멱살을 잡고 키스를 했다.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리고 서툴게나마 혀가 엉킨다. 단내가 난다...상황은 개떡같았지만 그의 입술은 미치도록 달콤하다.
 짧게나마 그의 입술을 탐닉하고, 입술을 뗀 후 그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그의 얼굴을 본다. 눈이 무겁게 감겨있다-

 

 "이봐, 정신차려."

 

 재빨리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미약하게 숨결이 느껴진다.

 

 "자면 안돼. 지금 자면 끝장이라고, 이 멍청아..."

 

 저편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려온다. 레스트레이드인가? 그렇지 않다면 행인? 최악의 경우로는 추격자들을 상정할 수 있겠지만...아아, 머리가 멍하다.
 다급하게 말한다.

 

 "너...죽으면 용서하지 않아. 끝까지 정신차려서 살아남으란 말이야. 세상에 키스 한 번 밖에 못하고 죽는게 어딨냐, 응? 살아나. 죽지 말고 살아...살아서, 키스도 몇 번 더 하고, 다른 것도 하자고."

 

 답이 없는 그를 무릎에 눕힌 채로, 계속해서 그의 숨소리를 확인하며, 나는 이런저런 말을 정신나간 사람마냥 중얼거렸다.
 멀리서는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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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100제

 

 

 셜록은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찾다가 존의 눈총을 받고 서랍을 뒤적이는 행동을 멈추었다. 그는 그저 서랍을 열고 그 안을 잠시 뒤적였을 뿐인데 존은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셜록이 은밀하게 담배가 있을 만한 곳을 수색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버렸다. 얼마 전 셜록이 금연할까, 라고 언뜻 중얼거린 것을 현실화시킬 셈인지 존은 그후부터 셜록이 담배를 피우려고 하면 대놓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방금처럼 저렇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눈길을 보내곤 했다. 평소의 철면피 근성은 어디로 갔는지 셜록은 그 눈길을 견뎌내지 못하고 번번히 흡연 시도를 좌절당했다.
 셜록은 쳇 하고 혀를 차며 서랍 속에 집어넣었던 손을 거두고 서랍을 신경질적으로 탁 닫은 후 다시 소파 위에 드러누웠다.
 자신과 오랜 동안 동거하며 셜록의 추리법을 어깨 너머로 배운 덕분인지 존은 웬만한 사람들보다 주의력과 눈썰미가 좋아져버렸다. 본래도 군인으로 오래 복무한 경력때문에 다른 이의 행동 변화를 눈치채는 것에 민감한 편이었던 육감이 셜록과 동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날마다 겪는 스릴 넘치는 생활덕분에 더욱 발달한 것이다. 그 때문에 셜록이 은밀한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던 '존 왓슨 타박하기'는 최근 들어 그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다.
 셜록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존을 째려보았다. 존은 셜록이 자신을 사나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래, 물론 존은 자기가 그렇게 발전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유 모를 불안감으로 들끓어오르던 셜록의 마음 한 구석이 다시금 평온해졌다. 이건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는 것에 대해 질투하는 심정일까? 하지만 존은 결코 셜록의 제자(protege)는 아니었다. 학생(student)은 더더욱 아니었다. 주변의 많은 이들은 셜록과 존의 관계를 일컬어 '탐정과 조수(assistant)'라고 칭했다. 그렇지만 셜록은 그 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존과 셜록의 관계에는 상하 위계따윈 없으니까. 그리고 셜록이 입 밖에 내어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존은 셜록이 지니지 못한 상냥함이라던가, 배려라던가 하는 미덕을 지니고 있으므로, 존을 자신의 아래로 놓는 것은 부당한 것이었다. 한편 존은 자신을 '셜록 홈즈의 동료(colleague)'라고 자처했다. 하지만 어딘지 삭막하고 딱딱하며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동료'라는 단어는 셜록의 깐깐하기 그지없는 비위에 더욱 거슬렸다.
 그렇다면 자신은 도대체 어떤 단어를 원하는 것일까? 셜록은 곰곰히 생각했다.

 Friend.

 흠, 단어 자체는 나무랄 데 없지만 뭔가 부족하군.

 '친구'. 더할 나위없이 적합한 단어다. 물론 입 밖으로 뱉어내기에는 여전히 간지러운 단어이긴 했지만.
 그러나 이 단어는 그와 존의 관계 전부를 포괄하지 못한다. 친구가 포괄하지 못하는 둘의 관계의 부분이 어딘지 정확히 짚어내기는 어려웠으나, 미진함을 느낀 셜록은 완벽한 단어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계속해서 기억의 궁전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단어들의 무더기를 파헤쳤다.

 Lover.

 ?!

 지나치게 달착지근한 어감의 단어다. 어감 뿐 아니라 그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 또한 그 달콤함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다. 셜록은 자신과 가장 어울리지 않을 단어들 중 하나가-연인이라니!-뜬금없이 뇌리에 떠오른 것에 대해 너무 놀라서 소파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으나 간신히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Lovers.

 이번에는 그 망할 단어가 복수형으로 탈바꿈하여 자신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뒤집어놓는다. 셜록은 고개를 휘휘 저어보지만 보잘것없는 단어일 뿐인 그것의 공격은 생각 외로 집요하고 매우 강력해서 셜록의 머리를 온통 그 단어로 가득 채워버릴 기세다. 할 수만 있다면 진공청소기로 대뇌피질에서 동동 떠다니는 그것들을 남김없이 싹 빨아들여 쓰레기 하치장에 버리고 싶다. 그러면 이 어지러운 머릿속도 다시금 고요를 찾을 것인데.

 나는 존 왓슨과 연인이 되고 싶은 건가.

 가설이 떠오른다. 기묘하게도 그 가설은 자신을 뒷받침해줄 명료한 논거 따위는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참인 명제, 영원히 그 빛이 변치 않을 진리 같았다. 적어도, 현재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쪽으로 지나치게 머리를 굴리느라 두통이 일 지경인 셜록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셜록이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존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별 게 없네."

 

 내각의 개편에 대한 이슈가 신문의 삼분의 일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요즘 들어 전화질이나 감시질, 권력 남용질로 존과 셜록을 성가시게 하는 것이 뜸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범죄가 줄어든 것인지 아니면 신문 상의 지면 비중 할애가 줄어들었을 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존은 펼쳤던 신문을 깨끗이 접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셜록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존을 향하고는 있지만 존에게 와서 내리꽂히지 않고 셜록과 존의 사이에 존재하는 허공 어딘가에서 멈추어있다. 딴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존은 별달리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 생각이 '담배피우고 싶다'라는 생각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셜록의 폐가 니코틴과 타르로 잠식되어가는 것은 런던 시민들, 아니 영국 국민 전체의 손해라고 생각하는 대책없이 선량한 남자 존 왓슨은 셜록 스스로 금연에 대한 말을 뱉어낸 김에 그것을 기정사실화하여 그가 담배를 끊도록 종용할 생각이었다. 니코틴 패치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말이다. 어쩐지 요즘 존의 말이라면 순순히 따르는 셜록의 태도가 조금 수상하긴 했지만-마치 양가죽을 뒤집어 쓴 채 동태를 살피는 늑대같다고나 할까-그의 금연에는 보탬이 될 게 분명하므로 그 알 수 없는 속마음이 어떻든 존은 현재 셜록이 존의 흡연 제지에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존은 계속 말했다.

 

 "그럼 나가서 우유랑...다른 식료품도 좀 사올게. 음...혹시라도 마음이 내키면 냉장고 좀 정리해 놓고."

 

 별로 기대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존은 여전히 말이 없는 셜록을 잠시 바라보다가 대답을 듣기엔 틀린 것을 깨닫고 묵묵히 지갑을 챙겨 일어섰다. 문가에 다다랐던 존이 뭔가를 잊었다는 듯이 돌아서서 셜록에게 말했다.

 

 "참, 나 없는 새 담배피지 마. 알았지?"

 

 그의 말이 귀에 들어가기는 하는 것인지, 셜록은 끝내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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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셜록존]유년

2013. 12. 11.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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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흑기사

2013. 12. 11. 20:39 from BBC Sherlock/단편

셜록존/100제/집착-실종-목소리-천근만근처럼 느껴지는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뉘였다-어여쁜 그대는 내내 어여쁘소서/폭력

 

 

 3 Weeks Ago.

 

 존은 노트북의 전원을 키려다 단념했다. 이제 자신의 계정으로 로그인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팸 메일의 기세보다 더욱 무섭게 쌓여있을 취재 기자들의 메일. 너는 사기꾼의 공범이라며 무섭게 닥달해댈 익명의 발신자가 보낸 메일. 온갖 메일들이 무리지어 커다란 산을 이루고 자신을 무섭도록 추궁해댈 것임을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힘없이 소파에 앉아서, 벌써 몇 번이고 읽어 이젠 몇 페이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외우고 있는 책을 펴들었다.
 책은 자신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뿐 존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창문으로 작은 돌이 날아왔다. 돌은 톡 하고 유리창을 건드리고는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존은 책에 고개를 파묻다시피 하며 그 소리를 무시하려 애썼다. 조그만 자갈이 툭, 소리를 내며 창문을 두들기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바깥에선 허드슨 부인이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 화를 내며 고소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존은 창문으로 돌이 날아와 부딪히지 않는 그 순간을 틈타 재빨리 일어나 창문의 커튼을 닫았다. 햇살이 밝히고 있던 방 안이 그늘진 웅덩이처럼 어두워졌다.
 존은 다시 소파에 앉아 책을 폈다. 책장은 더이상 넘어가지 않았고, 동그란 물방울 하나가 어디선가 종잇장 위로 툭 떨어져 얼룩을 만들었다.

 

*

 

 "또 그 기사야?"

 

 여자가 말했다. 마침 그는 '-정신병적으로 문제가 있으며'라는 부분을 키보드로 치고 있었다. '정신병적으로'까지 쓴 후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글을 쓰고 있는 중에 흐름을 끊어서 그런지 남자의 반응은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육중한 체구의 남자가 일어나 주먹을 휘두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책상에 앉아있는 남자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 말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그 주제는 좀 오래된 거 아닌가 싶어서."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여자의 노력 덕분인지 남자는 한 대 칠 것만 같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다시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는 말했다.

 

 "이번엔 새로워."
 "오, 그래?"

 

 흥미롭다는 듯 여자가 뒷말을 재촉하자 남자가 아까 썼던 '정신병적으로'라는 단어 뒤에 '문제가 있으며'라는 단어를 이어서 쓰며 말했다.

 

 "알고보니 그 남자,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가 제대하면서 뭔가 트라우마같은 게 생긴 모양이야. 정신과 쪽에 자기 주치의도 있더군."
 "그 주치의가 당신에게 말해줬어?"
 "의사와 환자 간 비밀 유지 조항이니 뭐니 때문인지 도통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더군. 그래도 몰래 사진은 찍어왔지."

 

 남자는 마우스에 손을 올려 폴더를 클릭하여 한 사진을 손가락으로 클릭했다. 여자는 남자의 의자 옆으로 다가가 사진을 눈여겨 보았다. 사진은 정신과 병원의 팻말과 막 거기서 나오는 듯한 한 남자가 절묘하게 잘 어울려 찍혀 있었다.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지팡이를 짚고 계단을 걸어내려가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한 기색이 짙게 배어나왔다.
 하긴 자기 바로 옆에 있는 남자처럼 스토킹하다시피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는데 불안하지 않을리 없지. 게다가 이 남자는 자기가 알기로는 오늘도 그 남자의 집 창문에 돌을 던지고 하숙집 주인과도 한 판 난동을 부려댔다. 오히려 평온한 편이 비정상인 것이다. 그녀는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지나치게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이 금발 남자를 약간 동정했다.
 여자는 사진을 자세히 보는 동시에 옆에 켜져 있는 워드 창을 보며 기사 내용도 재빨리 훑어보았다. 눈이 아래쪽으로 굴러내려가던 여자는 갑자기 멈칫 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 음. 루카스?"

 

 여자의 부름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왜?"
 "저기, 미안하지만...시비를 걸려는 건 아닌데, 기사 내용이...좀...심한 거 같지 않아? 아무리 우리가 충격적인 내용을 전문적으로 싣는 일간지라고는 하지만, 이건...좀..."

 

 여자가 조심스럽게 만류하는 것에 루카스라고 불린 남자가 벌컥 화를 냈다.

 

 "닥쳐. 보아하니 또 내 기사를 훔쳐본 모양인데 어림없다고. 이건 내가 먼저 보도할 거니까."

 

 여자가 난처한 기색으로 손을 붕붕 내젓고는 말했다.

 

 "그래. 내가 무슨 수로 당신을 말리겠어. 하지만 루카스, 이건 도를 지나친 거야. 절반의 사실과 절반의 의견을 말하는 것과 절반의 억측과 몰래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신문에 싣는다는 건 엄연히 다르다고."
 "나가!"

 

 루카스는 여자의 말에 단단히 기분이 상한 모양인지 일갈했다. 사실 그는 '문제가 있으며' 다음 문구에 뭐라고 쓸 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여자는 난폭하고 거칠기로 유명한 그에게 진짜로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깨를 움츠리고는 황급히 그의 책상 옆을 벗어났다.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면서 여자는 아까 보았던 기사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희대의 사기꾼 셜록 홈즈의 친구이자 동업자이자 공범인 독신남 존 왓슨에게는 사기꾼의 범죄를 방조할 만한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폭격으로 인해 정신적인 문제가 생겨 의가사제대했으며 작년 초 영국으로 귀국하여 런던에서 자리를 잡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정신과에서 심리 치료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독신남의 주치의는 그에 대해 언급하길 꺼려했으나 본 지는 그녀와의 독점 인터뷰를 통해 그의 심리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고 정신병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오랜 군인 생활로 인해 그의 도덕관이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찝찝한 기분만 들게 하는 그 기사에 대해 잊어버리기로 했다.

 

*

 

 커튼이 쳐진 방 안에서 한 남자가 신문을 읽고 있었다.

 

 '-만약 존 왓슨이 떳떳하다면, 그는 인터뷰를 승낙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지난 겨울철에 있었던 불행한 자살 사건 이후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린다. 이번에도 본 지는 그에게 정중하게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그는 응답조차 하지 않았고 그가 머물고 있는 하숙집 여주인 또한 필요 이상으로 격한 반응을 보이며 기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시도까지 하였다...'

 

 남자는 신문을 더 읽을 가치도 없다는 듯 구긴 채 구석으로 집어던졌다.

 

 "정중한 인터뷰 요청이라고?"

 

 그래, 창문에 돌을 수십 개나 던져서 결국 창문 몇 개를 깨고도 또 돌을 던지는 행동이 정중한 요청이라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 셜록은 냉소했다.
 기사에는 소형 카메라로 몰래 찍은 것이 분명한 조악한 화질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존의 주치의, 안하느니만 못한 포토샵 수정이 되어있는 허드슨 부인의 분개하는 모습, 그리고 존이 급히 방 창문의 커튼을 치는 모습이 절묘하게 사진에 담겨 있었다. 그 표정은 슬퍼도 보였지만 죄책감어린 사람의 표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포토샵 능력만큼은 수준급인 듯 했다.
 셜록은 문제의 신문을 발로 밟아 짓이겨 납작한 종이뭉치로 만들며 심호흡을 했다. 그는 호흡을 간신히 가라앉힌 후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A Week Later.

 

 존은 오랜만에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햇살이 쨍쨍하니 맑았다. 빛 바랜 나뭇잎사귀들도 원래의 색조를 되찾은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요 몇 달 간 타블로이드지에 오르내린 탓인지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지만 그는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양 태연하게 공원을 걸었다.
 아무도 날 보고 있지 않아. 나 혼자만 괜히 그렇게 느끼는 것 뿐이지.
 존은 속으로 이 두 문장을 계속 되뇌며 여유작작한 걸음걸이를 위장하며 한동안 걸었다. 습기 찬 영국의 날씨 때문에 매일같이 시큰거리는 팔뚝도 오늘은 전혀 아프지 않다. 게다가 조금 걷다보니 사람들이 미심쩍은듯 쳐다보는 눈길도 사그라든다. 정말로 그 사람일리가 없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말로 마음 한 구석이 느긋하게 풀려서 존은 꽤 긴 시간 동안 공원을 걷게 되었다.
 정말이지 간만에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존은 벤치에 앉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3주 전까지만 해도 일간지에 종종 나는 루머와 추측을 버무려 놓은 선정적인 기사 때문에 마음 고생을 톡톡히 했었는데, 어느새인가 그의 주변은 예전처럼 조용했다. 역시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약이라는 생각을 하며 존은 지팡이를 벤치에 조심스럽게 기대어놓았다.
 더이상은 창문에 돌을 던져 그의 주목을 끌어보려는 사람도, 그가 가는 곳 어디든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도 없다.
 시선의 부재라는 것이 이렇게나 자유로운 것이었다니, 라고 생각하며 존은 정말로 행복한 듯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항상 닫혀 있던 커튼을 젖히고 쏟아져들어오는 햇볕을 만끽했다. 존은 차를 한 잔 따라 마시며 오늘의 신문을 펴들었다.
 셜록이 221b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지만 존이 신문을 꼼꼼히 살펴보는 습관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존은 왠지 모르게도 셜록이 흥미를 가질 법한 기사를 찾아 스크랩하는 그 습관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미 그가 생전에 쓰던 과학 실험 도구들을 한 학교에 기증한 터라 방 안은 휑뎅그렁했다. 존은 셜록이 종종 앉아 그는 이해도 하지 못할 실험을 하곤 했던 책상 위에 신문을 펴서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일간지 기자 실종...3명째 오리무중

 

 실종된 남자의 이름은 루카스 베리. 사실 존은 이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바로 4주 전 존에 대해 억측성 기사를 쓴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낯익은 이름이더라니 바로 그 사람이군, 이라고 존은 혀를 찼다.
 그러고보니 지난 주에도 그런 기사가 하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 존은 스크랩북을 펼치고 지난 주의 기사를 샅샅이 뒤졌다. 찾고 보니 존이 생각했던 것처럼 기사는 아니었고 실종 신고란에 있던 광고였다.

 

 -앨리 밀튼. 35세. 지난달 말일에 퇴근 후 실종됨. 이발을 하지 못해 덥수룩한 갈색 머리. 창백한 피부. 정리되지 않은 수염. 파란 눈. 마지막으로 봤을 때 입고 있던 옷은 하늘색 와이셔츠, 베이지색 면바지, 진초록색과 파란색이 섞인 체크무늬 점퍼. 이 사람을 보신 분은 ***로 연락주세요.

 

 간단한 문구였지만 나름대로 상세한 설명이었다. ***라는 것을 보니 이 사람도 일간지에서 근무하던 사람인 모양이었다.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은 선정적인 내용과 과대 광고, 그리고 허위 보도가 잦기로 유명한 일간지였다. 그리고...존에 대해 몇 번 좋지 않은 내용의 기사가 올라간 적도 많이 있었다.
 지난달 즈음에 그 일간지에서 "The Fraud" 특집인지 뭔지를 꾸미고 있었던 모양인지 ***의 한 기자가 끈질기게 자신을 쫓아다녔던 기억이 났다. 정작 그 일간지의 특집편은 인쇄 오류로 인해 기사가 거의가 날아가고 그 기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쓸데없는-노력이 허사로 돌아갔지만, 그 기자의 집요함에는 진저리를 치던 기억이 났다. 존은 생각에 잠겼다. 그 사람이 누구였더라?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던 그는 결국 노트북을 켰다. 일단 ***지의 직원 목록이 있는 웹페이지에 들어간 존은 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앨리 밀튼'이라는 사진에 찍힌 남자의 인상착의가 실종 신고란에 쓰인 외모 설명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겠지?'

 

 존은 생각했다. 자신을 성가시게 한 기자들이 두 명이나 실종되다니. 이건 분명 우연일 것이다. 존은 약간 불안한 마음을 억누른 채 구글 검색창에 '일간지 기자 실종 3명'을 쳤다.
 루카스 베리, 앨리 밀튼 외에 다른 한 사람은 버크 헤일리라는 사람이었다. 존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이 남자의 이름도 어딘가 낯익었다. 자신이 그저 착각한 것이기를 바라며 그는 '버크 헤일리'의 신상 정보를 찾았다. 마우스 클릭을 해대던 존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빤히 바라보다가 황급히 인터넷 창을 닫았다.

 

 '버크 헤일리도 나에 대한 좋지 않은 기사를 썼던 자였어.'

 

 존은 순간 방 안을 휙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침묵이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에 존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거겠지?'

 

 사실 이 세 기자들은 존에 대한 악성 기사를 쓴 기자였다는 점 외에도 공통점이 꽤 있긴 했다. 독신. 30대 중후반의 노총각. 선정적인 일간지의 남자 기자. 퇴근 후 멀쩡한 모습으로 사라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게다가 허름하고 구석진 동네의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불행히도 이 세 사람이 강도에게 살해당해 템스 강물 속에 수장됬거나, 아니면 괴이한 심경의 변화로 사표도 없이 직장을 때려치웠을 확률이 사실은 더 높았다.
 존은 마음을 놓고 노트북 전원을 껐다. 그러고 나서 그는 소파에 편히 기대어 새로 산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마음을 쓰기에는 오늘 날씨는 너무나도 좋았다.

*

 

 Today, AM 2:00.

 

 소각장. 깊은 밤. 달도 없는 검은 하늘. 소각장 문 틈새로 새어나오는 열기와 빛. 근처에 생명체의 기척은 들리지 않는다.
 검은 차가 다가온다. 조용히 미끄러지듯 다가온 자동차는 소각장 입구에서 멈춰선다. 소각장에서 나는 타닥거리고 불똥이 튀기는 소리에 묻혀 차가 미약하게 덜덜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소각장 입구는 차체에 가려 빛이 보이지 않는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문을 열고 나온다. 시동이 꺼진 차는 침묵한다. 남자는 앞좌석 문을 닫고 뒤편으로 향한다. 트렁크 앞에 선다. 주머니 속에 든 열쇠를 꺼낸다. 수술용 고무 장갑을 낀 손으로 열쇠를 잡고 그는 트렁크를 연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트렁크가 열린다. 트렁크 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웁웁, 우우우! 청테이프에 막혀 들리지 않는 신음소리. 용케 테이프를 뚫고 나오는 소리는 알아듣지 못할 말뿐.
 신음소리를 끈질기게 질러대는 남자는 온 몸이 비닐백에 싸여있다. 머리를 감싸고 있는 부분만 지퍼가 살짝 열려 있다. 분명 숨 막혀 죽지 않게 하려는 조치다. 트렁크를 연 남자는 트렁크 안의 남자가 신음을 내지르는 것을 무시하고 열쇠를 코트 주머니에 넣는다. 코트 주머니에 들어간 열쇠는 이미 자리하고 있던 동전 몇 닢과 부딫히며 찰그랑 하는 작고 차가운 금속성을 낸다. 수술 장갑을 낀 손을 매만지던 남자는 차분한 기색으로 손을 뻗어 비닐백 채로 트렁크 속의 남자를 끌어낸다. 차분한 태도와는 다르게 남자의 손놀림은 거칠다. 비닐백이 트렁크 가장자리에 끌리며 찌지직 하는 마찰음을 낸다. 비닐백 안의 남자가 거칠게 저항하는 탓에 트렁크에서 남자를 꺼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남자는 세게 비닐백을 끌어내린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흙바닥 위로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린다. 비닐백은 흙범벅이 되어 버둥거린다.
 남자는 약간 열려 있던 비닐백의 남은 숨구멍을 닫아버린다. 비닐백 안의 남자가 숨을 쉴때마다 비닐백 안에 김이 서리고 퍼득퍼득 하고 비닐백이 구겨졌다 펴지는 소리가 반복된다. 비닐백을 밀봉한 남자가 말했다.

 

 "질식사하고 싶나?"

 

 비닐백 안에서는 바깥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온다. 질식사하고 싶나?

 

 "숨 막혀 죽는 것이 너의 소망인가?"

 

 숨막혀 죽는 것은 비닐백 안의 남자의 소망이 단연코 아니었다. 남자는 고개를 허겁지겁 저었다.
 남자가 고개를 젓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협조하라고. 최소한 고통스럽지는 않게 해줄테니까."

 

 비닐백 안의 남자는 저런 협박에 안도해야만 하는 자신이 싫어졌지만 버둥거리던 몸짓을 멈추었다. 얼굴 부근의 비닐백 지퍼가 조금 열린다. 남자는 거기에 입을 갖다대고 급히 숨을 들이켰다.
 고무장갑을 낀 남자는 비닐백을 들려고 시도한다. 안에 담긴 남자의 허리께가 조금 들렸다가 내려간다. 안의 남자는 보이는 것만큼 무게가 나갔다. 바깥의 남자는 들쳐메고 가려던 생각을 접고 발부분의 비닐백 귀퉁이를 잡고 질질 끌고 간다. 남자가 향하는 곳은 소각장 안이다.
 닫혀있던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열기가 훅 끼친다. 바깥의 서늘한 공기가 잠시 들어오지만 곧 열기에 잠식된다. 비닐백을 안으로 끌고들어온 남자는 다시 나간다. 비닐백 안의 남자는 혼자 남는다. 밖으로 나갔던 남자는 트렁크에서 공구 상자를 꺼내 다시 소각장 안으로 들어온다. 트렁크가 다시 쩍 소리를 내며 닫힌다. 공구 상자는 꽤 크다. 상자를 내려놓은 그는 소각장의 입구를 닫는다. 어느새 이마로 흘러내린 땀을 닦은 그는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문 옆 삐죽이 튀어나온 쇠고리에 건다. 코트는 회색이다. 목에 감겨있던 목도리도 벗어 코트와 함께 걸어놓고는 그는 비닐백 안의 남자가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필사적으로 손과 발을 묶은 매듭을 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흘끗 쳐다본다. 그는 소매 끝의 단추도 풀어 팔뚝 위까지 끌어올린다. 팔꿈치 위까지 소매를 접어올린 그는 한쪽에 내려놓은 공구상자를 향해 다가간다.
 몸을 숙여 공구 상자를 열고 그 안을 뒤적인다. 안에서 그는 일단 커다란 도구부터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는다. 전기톱. 푸주칼. 식칼. 대구경의 권총. 비닐백 안의 남자는 결박을 풀려 애쓰다 말고 그 물건들을 발견한 후 겁에 질려 한층 높은 데시벨의 비명을 지른다. 공구 상자 앞의 남자는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건 말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비명 소리가 배경음악이기라도 한 듯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공구 상자 안에서 정교한 수술에 쓰이는 도구가 든 작은 가죽 케이스를 연다. 은빛 메스의 칼날이 반짝인다. 새 것만이 띠는 그런 종류의 순결하고 정갈한 광채다. 메스의 날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던 남자는 칼날이 기대에 부응할 만큼 예리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흥겨운지 휘파람을 불던 남자는 다시 메스를 가죽 주머니 안에 꽂아놓고 일어섰다. 비닐백 옆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난 가끔...내가 범죄자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했지."

 

 남자는 콧노래를 멈추고 비닐백 옆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비닐백 안에 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당신이 기회를 주는군."

 

 남자는 방울뱀의 최면에 걸린 쥐새끼처럼 어느새 몸부림치길 멈추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사뭇 다정하게 말했다.

 

 "흔치 않은 기회이니만큼 잘 활용하도록 해야지."

 

 끙 하고 몸을 일으킨 그는 공구 상자 옆 가지런히 늘어놓은 도구들 중 하나를 집었다.

 

 "도망가면 성가시니까, 일단 발부터 잘라볼까?"

 

 검은 곱슬머리의 남자는 불길을 뒤에 두고 차갑게 웃으며 전기톱을 들어보였다. 피 찌꺼기가 날붙이에 덕지덕지 붙은 그것에 셜록의 잔혹한 목소리가 쟁쟁 울렸다.

 
*

 

 Today, PM 5:39.

 

 냉랭한 목소리가 말한다.

 

 -내가 초보라서 조금 서투를 지도 몰라. 이해해달라고.

 -그렇게 자꾸 몸부림치면 비닐백 밖으로 피가 튀잖아. 자꾸 일을 늘리지 말아달라고. 안그래도 피곤한데.

 -자,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발목 아래가 시큰하다. 있어야 할 것이 떨어져나가는 감각이 시리다. 눈 앞이 어두워진다. 아마도 나는 졸도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같다.
 고무 장갑을 낀 손이 뺨을 친다. 장갑에 묻어있던 피가 뺨에도 찐득하게 묻었다. 흥건했던 식은땀과 피가 묻어 끈적한 느낌. 그는 매정하게 말한다.

 

 -이봐, 정신차려.

 -당신한테 쓰려고 준비한 거 반도 못 써먹었는데 이렇게 일찍 지쳐선 못 쓰지.

 

 소리지른다. 반항한다.

 

 -대체 왜!!! 왜 이러는 거야!

 

 -그걸 알고 싶어?

 -난 말이지, 죽기 전에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알아야겠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모르겠어.

 -나도 겪어본건데, 그걸 안다고 해서 기분이 썩 좋아지진 않더라고.
 -만약 네가 생각했던 거만큼 대단한 이유가 아니면 어쩔건데? 사소한 이유라면 뭐 어떻게 할 건데?

 -아니면,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네가 죽어야 한다는 거면 기꺼이 희생이라도 하려고?

 

 선심을 쓰듯 말한다.

 

 -좋아, 말해주지.

 -네가 성가시게 구니까 그러는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네가 최근에 했던 짓을 돌이켜보라고.

 

 실핏줄이 터져 눈 앞이 붉다. 붉은 시야에 들어온 남자의 얼굴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낯이 익다. 직접 본 사람은 아니다. 사진으로만 수 없이 접한 남자다.

 

 -셜록 홈즈...

 

 영안실은 접근 금지였다. 고위층의 친척이기라도 한 듯 그의 시신은 철저히 비밀리에 어떤 묘지에 안치되었다고 들었다.

 

 -그래. 이제야 알겠나?

 

 그는 살아있었다.
 그리고...그렇다면...그가 자신을 찾아내어 팔다리를 자르고 고문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그 남자일 수밖에 없다.

 

 -존은 내꺼야.

 

 요 며칠간 알 수 없는 열정에 들끓어 먹지도 자지도 않고 금발 남자의 뒤를 쫓았던 기억이 난다. 몰래 사진을 찍었다. 기사에는 써먹지도 못할 사진을. 집에 침입하려고 시도했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에게 제지당했었다. 나는 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왜? 왜?

 

 -그의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말라고.

 

 그가 경고한다.

 

 -아, 이제 내가 뭐라고 그래도 다시 그러진 못하겠군. 이미 다리를 잘랐으니까. 잠깐, 몸부림치지마. 지혈하느라 봉합에 신경 좀 썼다고.

 

 소용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거세게 뒤척여본다. 이미 잘린 오른팔이 그대로 있는 것마냥 오른팔로 몸을 지탱하려고 애를 써본다.

 

 -안되겠군. 도대체가 말을 들어야 말이지...

 

 왼쪽 팔이 쓰라리다.

 

 -꼭 이렇게 남은 팔까지 잘리고서야 조용해지고 싶었나?

 

 그가 툴툴거리며 말한다.

 

 -대체 너희 기자란 족속들은 존을 좀 가만히 내버려두면 안되겠어? 내가 이렇게 일일히 처리를 해야만 잠잠해지니 원.

 -존에겐 휴식이 필요하다고. 알아듣겠어?

 

 알아듣긴 뭘. 어쩐지 피곤해진다. 눈 앞이 다시 아득하다.


 그는 집요하게 날 깨웠다. 힘들게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정신 차려. 이제 마지막이니까.

 -이제 너를 저 불길에 처넣을거야.

 

 -고통스럽게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오.

 -그건 거짓말이었어.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네? 마지막까지 소소한 재미를 주다니.

 -어쨌든 넌 여기까지야.

 -수고했다.

 -비명 좀 그만 질러. 어차피 들리지도 않아.

 -즐거웠어.

 -안녕.

 

*

 

 셜록은 천근만근처럼 느껴지는 몸을 아무렇게나 침대에 뉘였다. 고급 침대의 매트리스는 삐걱이는 소리 하나 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아까 갈아입은 와이셔츠의 접혀있던 부분이 까슬하게 피부에 닿는다. 불편한 느낌에 살짝 뒤척인다.
 침대 머리쪽에 창문에 걸린 커튼의 조그마한 틈새로 창백한 새벽 햇빛이 스며온다. 회색의 커튼이 동이 터옴에 따라 검은색에서 진회색으로, 진회색에서 연회색으로 변해간다.
 점점 밝아지는 방 안에서 셜록은 생각에 빠졌다.
 오늘로 세 번째. 맨 처음에 비해서 작업은 한층 수월해졌다. 이번에 처리한 대상은 덩치가 원체 커다란 사내라 끈질기게 몸부림칠 때는 결박이 끊어지기라도 할까봐 조금 긴장했지만, 일단 사지를 몇 개 자르고 나니 이전 작업과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 되었다.
 사람은 역시 다 똑같아. 울고 반항하고 소리지르고 울고 소리지르고 반항하고 소리지르고 울고 반항하고 반항하고 또 반항하다가 결국엔 포기한다. 어쩜 그리도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지.
 마지막으로 화염 속에 던져진 사람들의 데드 마스크는 언제나 고통과 체념으로 찌들어있다.
 그는 시체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중에 혹시라도 뭔가 빼먹은 것이 있을까 싶어 아까의 작업을 반추해보았다. 비닐백 안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남자는 미처 깨닫지 못했겠지만, 소각장 바닥에는 생분해 비닐을 깔아놓았었으니 그 곳에는 피 한 방울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 비닐이 탈 때 나오는 매캐한 검은 연기나 역겨운 다이옥신 냄새가 없으니 의심을 품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신축성이 좋아 여간해서는 찢어지지 않는 수술용 고무 장갑을 확실히 끼었고, 작업을 할 때 입었던 옷부터 가루만 남을 정도로 확실하게 태웠으니 자신의 DNA 흔적이 묻어있을 미량 증거도 남김없이 소멸되었다. 고철류를 처리하는 소각장 터널에 공구 박스 안의 물건들도 전부 최우선 소각대상으로 분류해놓았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흔적도 없이 녹아 한 줌 쇳물이 되어있을 것이다.
 소각 완료.
 실수한 것은 없다.
 셜록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어렴풋이 미소지었다. 얼음 장벽이 깨지고 흘러나오는 하얀 연기같이 냉혹하면서도 모호한 미소였다.
 침대맡에서는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한동안 들려왔다.
 불 꺼진 침실은 점차 아침의 햇살로 인해 따스한 빛깔로 물든다.

 
*
 

 At That Time.

 

 -그래서, 만족하니?

 

 수화기 너머로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척 피곤한 듯 평소만큼 목소리가 나긋하지 못하다. 셜록도 갈라질 듯 까칠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만족해."

 

 과연 자신은 무엇에 만족하는 것일까? 만족한다, 고 확답한 자신조차 자신이 무엇에 만족하는지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 알았다. 앞으로도 종종 연락하마.

 

 그건 필시 셜록이 자기의 감시 하에서가 아닌 감시 영역 바깥에서 일을 저지르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서일 것이다. 소심하긴, 하고 셜록은 풋 웃었다. 하긴 셜록 자신도 자신이 이리도 능숙하게 살인이라는 것을 해치울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마이크로프트도 놀랐겠지. 쑥맥에 애송이로만 알았던 그가 이토록 깔끔하게 완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사실 정말로 완전 범죄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마이크로프트의 입도 막아야 하지만, 셜록은 그 능력을 감히 짐작키 어려운 상대의 콧수염을 건드리는 우는 범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살인 후에 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은 첫 번째에도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람의 살갗이 불타오를 때의 지독한 냄새와 연기에 구역질을 했었다. 다시금 코 끝에 살이 타는 역겨운 내음이 끼쳐오는 것 같아 그는 전화기를 얼굴에서 멀리 하고 숨을 가쁘게 쉬었다. 토할 것만 같은 느낌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는 침대에 웅크려 숨을 가파르게 쉬었다.
 헛구역질이 멈췄을 때는 이미 전화는 끊겨 뚜-뚜-하는 둔한 기계음만이 들린다.

 

*

 

 셜록은 얼굴에 아교를 정교하게 붙였다. 문제의 '사기꾼 자살 사건'이 일어난 후 마이크로프트가 마련해준 은신처에 칩거하기 시작하면서 셜록은 그동안 이론 상으로만 숙지하고 있었던 무대 분장술을 실험하고 익히기 시작했다. 마치 집시라도 되는 양 한 곳에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갑갑증이 치밀었던 것이었다. 분장술을 시연해볼 캔버스야 자신의 얼굴이 전부였지만, 그는 나름대로 잘 해나갔다. 처음에는 자신이 봐도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의 어설픈 분칠과 가짜 수염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남들 앞에 나서는 데 불안함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이마의 주름살, 푹 패인 뺨, 축 늘어진 목의 주름을 아교로 굳힌 다음, 검붉은 안색을 위해 벽돌 가루 색깔의 분칠을 한 후, 그는 입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음. 셜록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정도면 몇 마디 말을 한다고 해서 쉽사리 아교가 떨어져나가진 않을 것이었다. 검은 머리칼과 반듯한 눈썹만 빼면 그는 완벽하게 가난에 찌들어 몇 권 안되는 책이라도 팔려고 나온 한 명의 고서점상이었다.
 그는 서랍을 열어 떡진 것처럼 억세게 빗어내린 반백의 가발을 쓰고, 조심스럽게 눈썹과 수염을 붙였다. 어느 정도 되었다 싶자 셜록은 다듬지도 못해 아무렇게나 자란 것처럼 보이는 하얀 눈썹을 까닥여 보이고, 볼품없이 듬성듬성하게 붙인 수염을 살짝 쓰다듬었다.
 솔기가 튿어진 낡은 외투를 걸치고 서랍장 옆쪽에 놓아둔 지저분한 책 몇 권을 집어든 그는 연습한 대로 허리를 한껏 구부정하게 숙이고 무릎 관절이 불편한 사람처럼 무릎도 살작 구부리고는 천천히 방에서 나갔다.

 

*

 

 바깥 나들이가 오랜만이어서 그런지-기자들을 처리하러 나갔던 몇 번의 밤나들이는 예외로 치자-셜록은 날카롭게 지면에 내리박히는 햇볕의 따스함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표가 나지 않게 닦아낸 셜록은 여민 외투 앞자락을 풀어헤치고 공원으로 향했다.
 오늘같은 날씨라면 분명 존은 공원으로 산책을 나설 것이다. 겉으로 표시는 하지 않지만 그는 이렇게 해가 환하게 뜬 날씨를 아주 좋아했다. 이런 날이면 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다쳐서 돌아온 팔도 시큰거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만 없다면 그는 이런 날 몇 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햇볕을 쬐다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혼자 공원에 몇 시간이고 있는 남자에 대해 공원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 지 걱정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길어야 두 시간 정도 공원에서 거닐다가 집으로 일찍 돌아와서는 못내 아쉬운 눈으로 창가에 앉아 바깥을 쳐다본다.
 그러니 늦기 전에 그를 먼 발치에서나마 보려면 걸음을 서둘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공원 입구에 들어서는데 마침 공원을 나서는 존과 마주쳤다.
 이런, 늦었군, 이라고 생각하며 혀를 쯧 하고 찼다. 아래로 늘어진 하얀 눈썹에 시선이 가려지길 바라며 존을 쳐다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이다. 햇살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밝다. 자신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얼굴에 드리운 우울감이 걷힌 것만 같아 셜록은 기뻤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잡고 가발과 분장을 벗어던지고 존, 정말 오랜만이야, 잘 있었어? 라고 말하고 싶다.
 존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욕망을 이성을 발휘하여 강하게 자제하며 셜록은 앞으로 침착하게 걸어갔다.

 

 "!"

 

 오랜 시간 구부리고 있던 허리와 무릎에 갑작스런 통증이 덮쳐와 주저앉고 말았다. 쥐가 난 것이다. 급히 몸을 일으켜 보지만 존은 자신이 넘어지는 장면을 보고야 만 듯 이쪽으로 다가온다.

 

 "괜찮으세요?"

 

 사려깊은 어투, 상냥한 몸짓. 어쩐지 눈물이 울컥 날 것 같지만 자동적으로 셜록은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준비한 대사를 내뱉는다.

 

 "저리 비켜! 자네같은 젊은이에게 도움을 받을 정도로 늙진 않았다고."

 

 가래가 들끓는 듯 걸걸한 목청으로 퉁명스럽게 말한다. 존은 조금 당황한 듯 싶지만 아무 말 없이 바닥에 흩어진 책을 주워 셜록에게 내밀었다.

 

 "조심하세요. 이 공원 바닥은 울퉁불퉁하니까요."

 

 그렇게 내쳤는데도 존은 이 성질 나쁜 노인에게 상냥하다. 갑자기 장난기가 든 셜록은 존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이 늙은이가 걱정이 된다면 책이라도 한 권 사주지 않겠는가? 보시다시피 이 늙은이는 책을 파는 걸 업으로 삼고 있네. 오호라, 마침 잘 되었군. 자네라면 이 책을 즐거이 읽을 수 있을 것이야. <나무 숭배의 기원>일세. 보시다시피 오래됬지만 내용 하나는 충실한 책이지."

 

 속사포처럼 쏟아져나오는 그의 말에 존은 잘못 걸렸다, 라는 표정이었다. 애써 숨기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배어나오는 낭패한 기색에 셜록은 조금 재미있었다. 빨리 자리를 비키고 싶어하는 존의 몸짓을 무시하려 셜록은 다른 책 한 권을 같이 내밀며 말했다.

 

 "<나무 숭배의 기원>를 사간다면 이거 한 권을 덤으로 주겠네. 어떤가?"

 

*

 

 결국 약 이십 분 간의 실랑이 끝에 <나무 숭배의 기원>라는 책과 <카툴루스>라는 책을 존에게 강매한 셜록은 당황한 기색으로 얼떨결에 산 책 두 권을 끌어안고 베이커가로 향하는 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조금만...조금만 기다려, 존.
 그렇게만, 행복한 모습으로 날 기다려줘.

 

 언젠가는 이렇게 만났다는 사실을 즐거운 일화의 하나로, 우스갯소리로 삼을 날이 오겠지. 셜록은 오랜만에 낙천적인 마음을 먹으며 쥐가 덜 풀린 다리 한 쪽을 질질 끌며 걸음을 옮겼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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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셜록존/단편/100제/지갑을 잃어버렸다

 

 오늘도 존은 기계와 전쟁을 치른다.

 

 -Card not authorized.
 -Please try another card.

 

 존은 무정한 기계음을 뱉어내는 무인 카드 인식기를 호되게 두들겨패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으나 심호흡을 한 번 하는 것으로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놈의 퇴직 군인 신용카드는 고장나거나 인식되지 않는 날이 제대로 인식되는 날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마이크로프트가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자칭 영국 정부라는 사람이 자신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기 위해 카드를 막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며 존은 그 말도 안되는 가설을 우스갯소리로 치부해버렸다. 애꿏은 마이크로프트에게 죄를 돌리는 대신 존은 '전직 군인을 위한 서비스 미비'라는 제목으로 육군 홈페이지에 민원이라도 올려야겠다고 결심하며 존은 뒷사람에게 자신의 바구니를 옮기지 말아줄 것을 부탁한 후 급히 베이커가 221b로 향했다.

 

 '콩조림 세일 기간을 놓칠 순 없어!'

 

 ...셜록과 동거한 이후로 자신도 모르는 새 주부 마인드가 확고히 자리잡은 그였다.

 

 거친 숨을 뱉으며 달려온 그를 흘끗 쳐다보더니 셜록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페트리 접시로 다시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Take my card."

 

 존은 머뭇거리며 셜록 옆으로 다가갔다. 셜록은 스포이트로 페트리 접시에 신중하게 약품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며 말했다.

 

 "자켓 안쪽 주머니에."

 

 '-있어.'라는 말까지 하기도 귀찮았는지 셜록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존은 항상 이 순간이 싫었다. 아니, 싫다기보다는 민망했다. 셜록은 아무렇지 않아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만 신경쓰는 것 같아 더욱 싫었다. 하지만 콩조림 1+1세일을 위해서라면 그 민망함 쯤은 감수해주겠어! 라고 존은 굳게 마음먹으며 흐흠, 하고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자켓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응?'

 

 텅 빈 헐렁한 주머니 안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던 존이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셜록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셜록?"
 "..."

 

 셜록은 대답이 없었다. 존은 그 침묵에 굴하지 않고 말했다.

 

 "지갑이 없는데."
 "없을 리가."

 

 셜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전히 스포이트를 손에 든 채로 말이다. 존은 선언하듯 말했다.

 

 "아니, 셜록. 진짜 너 지갑 없어."

 

 그제야 셜록은 스포이트 안에 들어있던 액체를 원래 그것이 들어있던 병에 쪼르륵 소리가 나게 비운 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불신의 표정이 가득한 얼굴로 손수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이 주머니 안으로 들어간 순간 셜록의 얼굴에 잠시잠깐이지만 당황의 기색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존은 발견했다. 평소라면 의기양양해 마지않을 순간이지만 지금의 존은 그가 당황한 기색을 발견한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싶었다.

 

 "셜록, 설마..."

 

 존이 조심스럽게, 자신이 생각한 바가 틀리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저러고서 지갑을 뙇 하고 꺼내주면 좋겠다! 라고 존은 간절히 생각했다. 그러나 주머니에서 천천히 손을 빼내는 셜록의 표정은 어두웠다.

 

 "...없어."

 

 존은 콩조림 세일 기간을 놓쳤다는 생각에 온 몸에 힘이 빠져 소파로 터덜터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

 

 존은 한동안 의자에 늘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늘은 셜록도 마찬가지였다. 실험은 내팽개친지 오래, 셜록도 긴 소파에 누워 아무 말 못하고 있었다.
 존이야 한 끼라도 못 먹으면 못 사는 정상인이니 그럴 만도 했지만, 셜록은 본래 밥을 먹기보단 안 먹는 경우가 더 빈번해서 존은 그의 생각보다 큰 반응에 조금 놀랐다. 셜록은 존이 멘붕을 하건 뭣을 하건 코웃음치고 실험이나 할 줄 알았던 것이다. 존이 그 반응에 대해 질문하니 돌아온 대답은 이거였다.

 

 "오늘은 사건이 없단 말야."

 

 하긴 그동안 셜록은 사건이 있을 때만 밥을 거르긴 했다. 두뇌 회전에 방해가 된다느니 집중력을 흗뜨린다던지 하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존이 살펴보자 셜록은 존 못지않게 슬픈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셜록은 평소에 열량을 저장해놓고 한꺼번에 쓰는 스타일인가 보다.
 

 불행히도 허드슨 부인은 채터지 씨와 데이트를 하러 가느라 가게를 잠그고 나갔다. 다른 하숙인들도 모두 셜록과 존을 골탕먹이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집을 나가 있어서 쿠키 한 조각 얻어내기도 실패했다. 허드슨 부인의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빌리는' 것도 실패한 그들은 토탈 멘붕 상태에 빠져 거실 소파에서 구겨진 빨랫감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허드슨 부인은 왜 하필 오늘 데이트를 나가신 거야."
 "그것도 채터지 씨랑!"

 

 셜록은 '데이트를 나간' 사실보다 '채터지 씨와' 데이트를 나갔다는 것에 더욱 분개한 기색이었다. 셜록은 음흉하게 중얼거렸다. 조만간 조치를 취해야지. 그리고 이틀 후 셜록은 채터지 씨에게 숨겨진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까발렸다.
 어쨋든 그건 미래에 일어날 일이므로, 셜록과 존이 현재 겪고 있는 당장의 굶주림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의자에서 미끄러질 듯 퍼질러 눕다시피 하고 있던 존이 문득 말했다.

 

 "그런데 셜록...?"
 

 셜록은 어느새 가운을 걸치고 소파에 뒤돌아서 웅크린 채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존은 셜록이 잠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금세 눈치채고 말을 이었다.

 

 "...그 지갑 안에 들어있는 거 말이야.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도 위험하지 않겠어?"

 

 셜록은 존에게 등을 보인 채 머리를 팽팽 굴렸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었더라? 셜록 자신의 신용카드와 신분증, 저번 은행 사건을 해결하는 대가로 받은 수표 한 장-몇 장 더 있었지만 존과 셜록의 생활비로 탕진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셜록이 '빌려온' 마이크로프트의 신용카드, 마이크로프트의 신분증, 마이크로프트의 극비 시설 출입 허가증 등등. 어쩐지 마이크로프트의 물건이 더 많은-데?
 셜록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셜록과 존은 아마도 똑같이, 당황과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

 

 "제기랄 그게 다른 범죄자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존은 평소답지 않게 거친 말을 쓰며 신경질을 냈다. 존이 마치 자기가 지갑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길길이 날뛰고 있었지만 셜록은 뭐라 한 마디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갑 간수를 못 한 것은 셜록 자신이었으니까.
 화를 버럭버럭 낸 존은 바깥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이성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배가 고파서 더이상 화를 낼 기력이 없었다.

 

 "좋아, 일단 셜록, 네가 마이크로프트한테 전화해."
 "전화를 왜 해?"
 "빨리 카드를 정지시켜야지!"
 

 존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셜록이 반박했다.

 

 "야 그걸 어떻게 말해!"
 "그럼 내가 말하리?"
 

 셜록이 고개를 맹렬히 끄덕였다. 존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네 형이지 내 형이냐?"

 

 그래도 셜록이 납득할 생각을 하지 않자 존이 작전을 바꾸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했다.

 

 "셜록, 언제나 진실, 아니 사실이 가장 좋은 거란 걸 너도 알잖아. 마이크로프트는 아마 용서해줄거야. 그에게 솔직히 말하고 용서를 빌면 네 신용카드도 빨리 새로 발급받을 수 있을 테고 말야."

 

 그래봤자 콩조림 세일 기간은 지났지만...하고 존이 처량하게 중얼거리자, 셜록은 아주 큰 결심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 내가 전화하지."

 

 존 네가 전화하면 그 관음증 양반이 더 좋아하긴 하겠지만, 이라고 말한 셜록은 존이 화낼 틈도 주지 않고 마이크로프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셜록?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는 마이크로프트가 어쩐지 수상했지만 셜록은 일단 자초지종을 말했다. 사정을 들은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오...그렇구나. 그러니까 네 신용카드랑 내 신용카드랑 네 신분증이랑 내 신분증이랑 내 출입허가증 등등을 칠칠맞은 네가 잃어버렸다는 것이로구나.

 

 마이크로프트는 어쩐지 즐거운 기색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존과 셜록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이크로프트가 미쳤나? 라는 의견을 눈으로 주고받았다.
 한참을 킬킬킬킬 웃던 마이크로프트가 속삭이듯 말했다.

 

 -자, 셜록. 존 옆에 있어?

 

 셜록이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있을 리가 없지. 지금 군인 카드로 현금이라도 뽑아보겠다고 밖에 나갔어."
 

 셜록은 그렇게 말하고는 스피커 폰으로 전환했다. 존은 숨을 바싹 죽인채 마이크로프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와하하하하핳핫핫하하핫핫핫!!!

 

 마이크로프트가 전화기가 터져나가라 웃어댔다. 저렇게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존은 대체 셜록이 지갑을 통째로 분실한 것이 마이크로프트에게 있어 즐거움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이크로프트가 히끅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야 진짜 존이 빨빨대고 돌아다니는 거 귀엽지 않냐? 지갑 없어졌다고 둘이 난리쳤을 생각하면...ㅋㅋㅋㅋㅋㅋ아 웃겨 죽겠다 내가 지금 외국이라서 너네 집이랑 슈퍼마켓에 설치해놓은 cctv 비디오 테이프 아직 수거를 못했는데 오늘 그 장면 꼭 보고 또 봐야지 두번 봐야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이크로프트는 평소의 근엄하고 우아한 이미지는 어따 팔아치웠는데 체신머리도 없이 웃어댔다. 존과 셜록은 슬슬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참으며 계속 그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참다못한 셜록은 마이크로프트가 주절거리는 것을 가로막았다.

 

 "어쨋든, 그래서 말인데 카드 좀 새로 만들어줘."
 -아 그거 새로 만들 필요없어. 네 지갑 나한테 있거든.

 

 정확히는 내 비서 안시아에게 있지만, 이라고 하는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둘은 헛것을 들었나 싶었지만 둘 모두 똑같은 말을 들은 듯 싶었다.
 셜록은 아까 들은 말이 집단 환청이길 바라며 되물었다.

 

 "뭐라고?"

 

 -네 지갑 나한테 있다고. 너네 하루 종일 쫄쫄 굶고 지갑 찾으려고 난리치는 거 보고싶어서 내가 훔치라고 했지. 근데 셜록 너 감 많이 떨어졌다. 소매치기 하나 못 잡아내냐?

 

 존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마이크로프트!!!"

 

 수화기 너머가 잠시 잠잠해졌다. 어색한 침묵이 몇 초 간 흘렀다. 가짜임이 티가 팍팍 나는 헛기침 소리와 함께 마이크로프트가 말문을 열었다.

 

 -오, 존 자네 언제 왔나?

 

 평소처럼 나긋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존은 풔킹을 날려주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존이 바락바락 대들었다.

 

 "아니 당신 즐겁자고 동생 지갑을 훔쳐서 어쩌자는 거예요? 정신 나갔어요? 오늘 콩조림 세일인데 놓쳤잖아요!!!"

 

 주부의 애환이 담긴 절규에 마이크로프트가 쩔쩔매는 것이 느껴졌다. 에잇, 하고 혀를 찬 마이크로프트가 갑자기 말했다.
 

 -미안하다 셜록. 이렇게 된 이상 너를 감싸줄 수가 없겠구나.

 

 "?"
 "!"

 

 셜록이 마이크로프트의 폭탄선언을 듣고 있다가 놀라서 소리쳤다.

 

 "안돼, 그것만은! 죽으려면 혼자 죽으라고!"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 물귀신 작전을 쓰기로 단호히 마음먹은 듯 했다.

 

 -존 그거 아나? 자네 카드가 자꾸 슈퍼마켓에서 안 먹히는 이유는 말일세,

 

 "안돼!!!"

 

 셜록이 고통스럽게 절규했다. 존은 혹시라도 셜록의 목소리에 마이크로프트가 털어놓으려는 비밀이 묻힐까 두려워 귀를 한껏 기울였다.

 

 -그거 사실 셜록이 부탁한 걸세. 자네가 굴욕적이고 비굴한 모습으로 자기에게 와서 카드를 빌려달라고 부탁할 때마다 그는 너무나도 흥분을 하기 때문이지...

 

 "내가 언제 그랬어! 난 그저 존이 나한테 부탁을 하는 게 귀여워 보일 뿐이라고 했지! 계획을 짜내고 실행에 옮긴 건 형이잖아!"

 

 -그랬지만 너는 그때 반대하지 않았잖니? 침묵이란 곧 무언의 긍정이지. 넌 그때 이미 공범이 된 거야.

 

 "형이 존이 슈퍼마켓에서 성질내는 게 귀엽다고 마트 cctv테이프 가져간 거는 잘 한 짓 같아?"

 

 -너도 그 테이프 같이 봤잖아!

 

 더이상 두 형제의 병신같은 대화가 주거니받거니 오가는 것을 들을 수 없었던 존은 소리쳤다.

 

 "그만!"

 

 셜록과 마이크로프트 둘 모두 입을 다물었다. 존이 씩씩거리는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정말 둘 다 너무해!!!"

 

 눈물이 살포시 어린 눈으로 셜록을 쏘아보던 존은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셜록은 전화기를 내던지고 급히 그를 뒤쫓았다.

 

 "존 가지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수화기 너머로는 마이크로프트가 소리쳤다.

 

 -존! 내가 미안하네! 정말이야! 다시는 카드가지고 장난질치지 않겠네!

 

 그렇게 셜록과 존의 굶주림으로 점철된 하루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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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