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존/100제/집착-실종-목소리-천근만근처럼 느껴지는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뉘였다-어여쁜 그대는 내내 어여쁘소서/폭력
3 Weeks Ago.
존은 노트북의 전원을 키려다 단념했다. 이제 자신의 계정으로 로그인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팸 메일의 기세보다 더욱 무섭게 쌓여있을 취재 기자들의 메일. 너는 사기꾼의 공범이라며 무섭게 닥달해댈 익명의 발신자가 보낸 메일. 온갖 메일들이 무리지어 커다란 산을 이루고 자신을 무섭도록 추궁해댈 것임을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힘없이 소파에 앉아서, 벌써 몇 번이고 읽어 이젠 몇 페이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외우고 있는 책을 펴들었다.
책은 자신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뿐 존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창문으로 작은 돌이 날아왔다. 돌은 톡 하고 유리창을 건드리고는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존은 책에 고개를 파묻다시피 하며 그 소리를 무시하려 애썼다. 조그만 자갈이 툭, 소리를 내며 창문을 두들기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바깥에선 허드슨 부인이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 화를 내며 고소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존은 창문으로 돌이 날아와 부딪히지 않는 그 순간을 틈타 재빨리 일어나 창문의 커튼을 닫았다. 햇살이 밝히고 있던 방 안이 그늘진 웅덩이처럼 어두워졌다.
존은 다시 소파에 앉아 책을 폈다. 책장은 더이상 넘어가지 않았고, 동그란 물방울 하나가 어디선가 종잇장 위로 툭 떨어져 얼룩을 만들었다.
*
"또 그 기사야?"
여자가 말했다. 마침 그는 '-정신병적으로 문제가 있으며'라는 부분을 키보드로 치고 있었다. '정신병적으로'까지 쓴 후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글을 쓰고 있는 중에 흐름을 끊어서 그런지 남자의 반응은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육중한 체구의 남자가 일어나 주먹을 휘두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책상에 앉아있는 남자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 말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그 주제는 좀 오래된 거 아닌가 싶어서."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여자의 노력 덕분인지 남자는 한 대 칠 것만 같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다시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는 말했다.
"이번엔 새로워."
"오, 그래?"
흥미롭다는 듯 여자가 뒷말을 재촉하자 남자가 아까 썼던 '정신병적으로'라는 단어 뒤에 '문제가 있으며'라는 단어를 이어서 쓰며 말했다.
"알고보니 그 남자,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가 제대하면서 뭔가 트라우마같은 게 생긴 모양이야. 정신과 쪽에 자기 주치의도 있더군."
"그 주치의가 당신에게 말해줬어?"
"의사와 환자 간 비밀 유지 조항이니 뭐니 때문인지 도통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더군. 그래도 몰래 사진은 찍어왔지."
남자는 마우스에 손을 올려 폴더를 클릭하여 한 사진을 손가락으로 클릭했다. 여자는 남자의 의자 옆으로 다가가 사진을 눈여겨 보았다. 사진은 정신과 병원의 팻말과 막 거기서 나오는 듯한 한 남자가 절묘하게 잘 어울려 찍혀 있었다.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지팡이를 짚고 계단을 걸어내려가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한 기색이 짙게 배어나왔다.
하긴 자기 바로 옆에 있는 남자처럼 스토킹하다시피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는데 불안하지 않을리 없지. 게다가 이 남자는 자기가 알기로는 오늘도 그 남자의 집 창문에 돌을 던지고 하숙집 주인과도 한 판 난동을 부려댔다. 오히려 평온한 편이 비정상인 것이다. 그녀는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지나치게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이 금발 남자를 약간 동정했다.
여자는 사진을 자세히 보는 동시에 옆에 켜져 있는 워드 창을 보며 기사 내용도 재빨리 훑어보았다. 눈이 아래쪽으로 굴러내려가던 여자는 갑자기 멈칫 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 음. 루카스?"
여자의 부름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왜?"
"저기, 미안하지만...시비를 걸려는 건 아닌데, 기사 내용이...좀...심한 거 같지 않아? 아무리 우리가 충격적인 내용을 전문적으로 싣는 일간지라고는 하지만, 이건...좀..."
여자가 조심스럽게 만류하는 것에 루카스라고 불린 남자가 벌컥 화를 냈다.
"닥쳐. 보아하니 또 내 기사를 훔쳐본 모양인데 어림없다고. 이건 내가 먼저 보도할 거니까."
여자가 난처한 기색으로 손을 붕붕 내젓고는 말했다.
"그래. 내가 무슨 수로 당신을 말리겠어. 하지만 루카스, 이건 도를 지나친 거야. 절반의 사실과 절반의 의견을 말하는 것과 절반의 억측과 몰래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신문에 싣는다는 건 엄연히 다르다고."
"나가!"
루카스는 여자의 말에 단단히 기분이 상한 모양인지 일갈했다. 사실 그는 '문제가 있으며' 다음 문구에 뭐라고 쓸 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여자는 난폭하고 거칠기로 유명한 그에게 진짜로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깨를 움츠리고는 황급히 그의 책상 옆을 벗어났다.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면서 여자는 아까 보았던 기사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희대의 사기꾼 셜록 홈즈의 친구이자 동업자이자 공범인 독신남 존 왓슨에게는 사기꾼의 범죄를 방조할 만한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폭격으로 인해 정신적인 문제가 생겨 의가사제대했으며 작년 초 영국으로 귀국하여 런던에서 자리를 잡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정신과에서 심리 치료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독신남의 주치의는 그에 대해 언급하길 꺼려했으나 본 지는 그녀와의 독점 인터뷰를 통해 그의 심리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고 정신병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오랜 군인 생활로 인해 그의 도덕관이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찝찝한 기분만 들게 하는 그 기사에 대해 잊어버리기로 했다.
*
커튼이 쳐진 방 안에서 한 남자가 신문을 읽고 있었다.
'-만약 존 왓슨이 떳떳하다면, 그는 인터뷰를 승낙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지난 겨울철에 있었던 불행한 자살 사건 이후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린다. 이번에도 본 지는 그에게 정중하게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그는 응답조차 하지 않았고 그가 머물고 있는 하숙집 여주인 또한 필요 이상으로 격한 반응을 보이며 기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시도까지 하였다...'
남자는 신문을 더 읽을 가치도 없다는 듯 구긴 채 구석으로 집어던졌다.
"정중한 인터뷰 요청이라고?"
그래, 창문에 돌을 수십 개나 던져서 결국 창문 몇 개를 깨고도 또 돌을 던지는 행동이 정중한 요청이라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 셜록은 냉소했다.
기사에는 소형 카메라로 몰래 찍은 것이 분명한 조악한 화질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존의 주치의, 안하느니만 못한 포토샵 수정이 되어있는 허드슨 부인의 분개하는 모습, 그리고 존이 급히 방 창문의 커튼을 치는 모습이 절묘하게 사진에 담겨 있었다. 그 표정은 슬퍼도 보였지만 죄책감어린 사람의 표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포토샵 능력만큼은 수준급인 듯 했다.
셜록은 문제의 신문을 발로 밟아 짓이겨 납작한 종이뭉치로 만들며 심호흡을 했다. 그는 호흡을 간신히 가라앉힌 후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A Week Later.
존은 오랜만에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햇살이 쨍쨍하니 맑았다. 빛 바랜 나뭇잎사귀들도 원래의 색조를 되찾은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요 몇 달 간 타블로이드지에 오르내린 탓인지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지만 그는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양 태연하게 공원을 걸었다.
아무도 날 보고 있지 않아. 나 혼자만 괜히 그렇게 느끼는 것 뿐이지.
존은 속으로 이 두 문장을 계속 되뇌며 여유작작한 걸음걸이를 위장하며 한동안 걸었다. 습기 찬 영국의 날씨 때문에 매일같이 시큰거리는 팔뚝도 오늘은 전혀 아프지 않다. 게다가 조금 걷다보니 사람들이 미심쩍은듯 쳐다보는 눈길도 사그라든다. 정말로 그 사람일리가 없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말로 마음 한 구석이 느긋하게 풀려서 존은 꽤 긴 시간 동안 공원을 걷게 되었다.
정말이지 간만에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존은 벤치에 앉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3주 전까지만 해도 일간지에 종종 나는 루머와 추측을 버무려 놓은 선정적인 기사 때문에 마음 고생을 톡톡히 했었는데, 어느새인가 그의 주변은 예전처럼 조용했다. 역시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약이라는 생각을 하며 존은 지팡이를 벤치에 조심스럽게 기대어놓았다.
더이상은 창문에 돌을 던져 그의 주목을 끌어보려는 사람도, 그가 가는 곳 어디든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도 없다.
시선의 부재라는 것이 이렇게나 자유로운 것이었다니, 라고 생각하며 존은 정말로 행복한 듯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항상 닫혀 있던 커튼을 젖히고 쏟아져들어오는 햇볕을 만끽했다. 존은 차를 한 잔 따라 마시며 오늘의 신문을 펴들었다.
셜록이 221b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지만 존이 신문을 꼼꼼히 살펴보는 습관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존은 왠지 모르게도 셜록이 흥미를 가질 법한 기사를 찾아 스크랩하는 그 습관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미 그가 생전에 쓰던 과학 실험 도구들을 한 학교에 기증한 터라 방 안은 휑뎅그렁했다. 존은 셜록이 종종 앉아 그는 이해도 하지 못할 실험을 하곤 했던 책상 위에 신문을 펴서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일간지 기자 실종...3명째 오리무중
실종된 남자의 이름은 루카스 베리. 사실 존은 이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바로 4주 전 존에 대해 억측성 기사를 쓴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낯익은 이름이더라니 바로 그 사람이군, 이라고 존은 혀를 찼다.
그러고보니 지난 주에도 그런 기사가 하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 존은 스크랩북을 펼치고 지난 주의 기사를 샅샅이 뒤졌다. 찾고 보니 존이 생각했던 것처럼 기사는 아니었고 실종 신고란에 있던 광고였다.
-앨리 밀튼. 35세. 지난달 말일에 퇴근 후 실종됨. 이발을 하지 못해 덥수룩한 갈색 머리. 창백한 피부. 정리되지 않은 수염. 파란 눈. 마지막으로 봤을 때 입고 있던 옷은 하늘색 와이셔츠, 베이지색 면바지, 진초록색과 파란색이 섞인 체크무늬 점퍼. 이 사람을 보신 분은 ***로 연락주세요.
간단한 문구였지만 나름대로 상세한 설명이었다. ***라는 것을 보니 이 사람도 일간지에서 근무하던 사람인 모양이었다.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은 선정적인 내용과 과대 광고, 그리고 허위 보도가 잦기로 유명한 일간지였다. 그리고...존에 대해 몇 번 좋지 않은 내용의 기사가 올라간 적도 많이 있었다.
지난달 즈음에 그 일간지에서 "The Fraud" 특집인지 뭔지를 꾸미고 있었던 모양인지 ***의 한 기자가 끈질기게 자신을 쫓아다녔던 기억이 났다. 정작 그 일간지의 특집편은 인쇄 오류로 인해 기사가 거의가 날아가고 그 기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쓸데없는-노력이 허사로 돌아갔지만, 그 기자의 집요함에는 진저리를 치던 기억이 났다. 존은 생각에 잠겼다. 그 사람이 누구였더라?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던 그는 결국 노트북을 켰다. 일단 ***지의 직원 목록이 있는 웹페이지에 들어간 존은 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앨리 밀튼'이라는 사진에 찍힌 남자의 인상착의가 실종 신고란에 쓰인 외모 설명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겠지?'
존은 생각했다. 자신을 성가시게 한 기자들이 두 명이나 실종되다니. 이건 분명 우연일 것이다. 존은 약간 불안한 마음을 억누른 채 구글 검색창에 '일간지 기자 실종 3명'을 쳤다.
루카스 베리, 앨리 밀튼 외에 다른 한 사람은 버크 헤일리라는 사람이었다. 존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이 남자의 이름도 어딘가 낯익었다. 자신이 그저 착각한 것이기를 바라며 그는 '버크 헤일리'의 신상 정보를 찾았다. 마우스 클릭을 해대던 존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빤히 바라보다가 황급히 인터넷 창을 닫았다.
'버크 헤일리도 나에 대한 좋지 않은 기사를 썼던 자였어.'
존은 순간 방 안을 휙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침묵이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에 존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거겠지?'
사실 이 세 기자들은 존에 대한 악성 기사를 쓴 기자였다는 점 외에도 공통점이 꽤 있긴 했다. 독신. 30대 중후반의 노총각. 선정적인 일간지의 남자 기자. 퇴근 후 멀쩡한 모습으로 사라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게다가 허름하고 구석진 동네의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불행히도 이 세 사람이 강도에게 살해당해 템스 강물 속에 수장됬거나, 아니면 괴이한 심경의 변화로 사표도 없이 직장을 때려치웠을 확률이 사실은 더 높았다.
존은 마음을 놓고 노트북 전원을 껐다. 그러고 나서 그는 소파에 편히 기대어 새로 산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마음을 쓰기에는 오늘 날씨는 너무나도 좋았다.
*
Today, AM 2:00.
소각장. 깊은 밤. 달도 없는 검은 하늘. 소각장 문 틈새로 새어나오는 열기와 빛. 근처에 생명체의 기척은 들리지 않는다.
검은 차가 다가온다. 조용히 미끄러지듯 다가온 자동차는 소각장 입구에서 멈춰선다. 소각장에서 나는 타닥거리고 불똥이 튀기는 소리에 묻혀 차가 미약하게 덜덜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소각장 입구는 차체에 가려 빛이 보이지 않는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문을 열고 나온다. 시동이 꺼진 차는 침묵한다. 남자는 앞좌석 문을 닫고 뒤편으로 향한다. 트렁크 앞에 선다. 주머니 속에 든 열쇠를 꺼낸다. 수술용 고무 장갑을 낀 손으로 열쇠를 잡고 그는 트렁크를 연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트렁크가 열린다. 트렁크 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웁웁, 우우우! 청테이프에 막혀 들리지 않는 신음소리. 용케 테이프를 뚫고 나오는 소리는 알아듣지 못할 말뿐.
신음소리를 끈질기게 질러대는 남자는 온 몸이 비닐백에 싸여있다. 머리를 감싸고 있는 부분만 지퍼가 살짝 열려 있다. 분명 숨 막혀 죽지 않게 하려는 조치다. 트렁크를 연 남자는 트렁크 안의 남자가 신음을 내지르는 것을 무시하고 열쇠를 코트 주머니에 넣는다. 코트 주머니에 들어간 열쇠는 이미 자리하고 있던 동전 몇 닢과 부딫히며 찰그랑 하는 작고 차가운 금속성을 낸다. 수술 장갑을 낀 손을 매만지던 남자는 차분한 기색으로 손을 뻗어 비닐백 채로 트렁크 속의 남자를 끌어낸다. 차분한 태도와는 다르게 남자의 손놀림은 거칠다. 비닐백이 트렁크 가장자리에 끌리며 찌지직 하는 마찰음을 낸다. 비닐백 안의 남자가 거칠게 저항하는 탓에 트렁크에서 남자를 꺼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남자는 세게 비닐백을 끌어내린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흙바닥 위로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린다. 비닐백은 흙범벅이 되어 버둥거린다.
남자는 약간 열려 있던 비닐백의 남은 숨구멍을 닫아버린다. 비닐백 안의 남자가 숨을 쉴때마다 비닐백 안에 김이 서리고 퍼득퍼득 하고 비닐백이 구겨졌다 펴지는 소리가 반복된다. 비닐백을 밀봉한 남자가 말했다.
"질식사하고 싶나?"
비닐백 안에서는 바깥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온다. 질식사하고 싶나?
"숨 막혀 죽는 것이 너의 소망인가?"
숨막혀 죽는 것은 비닐백 안의 남자의 소망이 단연코 아니었다. 남자는 고개를 허겁지겁 저었다.
남자가 고개를 젓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협조하라고. 최소한 고통스럽지는 않게 해줄테니까."
비닐백 안의 남자는 저런 협박에 안도해야만 하는 자신이 싫어졌지만 버둥거리던 몸짓을 멈추었다. 얼굴 부근의 비닐백 지퍼가 조금 열린다. 남자는 거기에 입을 갖다대고 급히 숨을 들이켰다.
고무장갑을 낀 남자는 비닐백을 들려고 시도한다. 안에 담긴 남자의 허리께가 조금 들렸다가 내려간다. 안의 남자는 보이는 것만큼 무게가 나갔다. 바깥의 남자는 들쳐메고 가려던 생각을 접고 발부분의 비닐백 귀퉁이를 잡고 질질 끌고 간다. 남자가 향하는 곳은 소각장 안이다.
닫혀있던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열기가 훅 끼친다. 바깥의 서늘한 공기가 잠시 들어오지만 곧 열기에 잠식된다. 비닐백을 안으로 끌고들어온 남자는 다시 나간다. 비닐백 안의 남자는 혼자 남는다. 밖으로 나갔던 남자는 트렁크에서 공구 상자를 꺼내 다시 소각장 안으로 들어온다. 트렁크가 다시 쩍 소리를 내며 닫힌다. 공구 상자는 꽤 크다. 상자를 내려놓은 그는 소각장의 입구를 닫는다. 어느새 이마로 흘러내린 땀을 닦은 그는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문 옆 삐죽이 튀어나온 쇠고리에 건다. 코트는 회색이다. 목에 감겨있던 목도리도 벗어 코트와 함께 걸어놓고는 그는 비닐백 안의 남자가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필사적으로 손과 발을 묶은 매듭을 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흘끗 쳐다본다. 그는 소매 끝의 단추도 풀어 팔뚝 위까지 끌어올린다. 팔꿈치 위까지 소매를 접어올린 그는 한쪽에 내려놓은 공구상자를 향해 다가간다.
몸을 숙여 공구 상자를 열고 그 안을 뒤적인다. 안에서 그는 일단 커다란 도구부터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는다. 전기톱. 푸주칼. 식칼. 대구경의 권총. 비닐백 안의 남자는 결박을 풀려 애쓰다 말고 그 물건들을 발견한 후 겁에 질려 한층 높은 데시벨의 비명을 지른다. 공구 상자 앞의 남자는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건 말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비명 소리가 배경음악이기라도 한 듯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공구 상자 안에서 정교한 수술에 쓰이는 도구가 든 작은 가죽 케이스를 연다. 은빛 메스의 칼날이 반짝인다. 새 것만이 띠는 그런 종류의 순결하고 정갈한 광채다. 메스의 날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던 남자는 칼날이 기대에 부응할 만큼 예리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흥겨운지 휘파람을 불던 남자는 다시 메스를 가죽 주머니 안에 꽂아놓고 일어섰다. 비닐백 옆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난 가끔...내가 범죄자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했지."
남자는 콧노래를 멈추고 비닐백 옆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비닐백 안에 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당신이 기회를 주는군."
남자는 방울뱀의 최면에 걸린 쥐새끼처럼 어느새 몸부림치길 멈추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사뭇 다정하게 말했다.
"흔치 않은 기회이니만큼 잘 활용하도록 해야지."
끙 하고 몸을 일으킨 그는 공구 상자 옆 가지런히 늘어놓은 도구들 중 하나를 집었다.
"도망가면 성가시니까, 일단 발부터 잘라볼까?"
검은 곱슬머리의 남자는 불길을 뒤에 두고 차갑게 웃으며 전기톱을 들어보였다. 피 찌꺼기가 날붙이에 덕지덕지 붙은 그것에 셜록의 잔혹한 목소리가 쟁쟁 울렸다.
*
Today, PM 5:39.
냉랭한 목소리가 말한다.
-내가 초보라서 조금 서투를 지도 몰라. 이해해달라고.
-그렇게 자꾸 몸부림치면 비닐백 밖으로 피가 튀잖아. 자꾸 일을 늘리지 말아달라고. 안그래도 피곤한데.
-자,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발목 아래가 시큰하다. 있어야 할 것이 떨어져나가는 감각이 시리다. 눈 앞이 어두워진다. 아마도 나는 졸도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같다.
고무 장갑을 낀 손이 뺨을 친다. 장갑에 묻어있던 피가 뺨에도 찐득하게 묻었다. 흥건했던 식은땀과 피가 묻어 끈적한 느낌. 그는 매정하게 말한다.
-이봐, 정신차려.
-당신한테 쓰려고 준비한 거 반도 못 써먹었는데 이렇게 일찍 지쳐선 못 쓰지.
소리지른다. 반항한다.
-대체 왜!!! 왜 이러는 거야!
-그걸 알고 싶어?
-난 말이지, 죽기 전에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알아야겠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모르겠어.
-나도 겪어본건데, 그걸 안다고 해서 기분이 썩 좋아지진 않더라고.
-만약 네가 생각했던 거만큼 대단한 이유가 아니면 어쩔건데? 사소한 이유라면 뭐 어떻게 할 건데?
-아니면,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네가 죽어야 한다는 거면 기꺼이 희생이라도 하려고?
선심을 쓰듯 말한다.
-좋아, 말해주지.
-네가 성가시게 구니까 그러는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네가 최근에 했던 짓을 돌이켜보라고.
실핏줄이 터져 눈 앞이 붉다. 붉은 시야에 들어온 남자의 얼굴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낯이 익다. 직접 본 사람은 아니다. 사진으로만 수 없이 접한 남자다.
-셜록 홈즈...
영안실은 접근 금지였다. 고위층의 친척이기라도 한 듯 그의 시신은 철저히 비밀리에 어떤 묘지에 안치되었다고 들었다.
-그래. 이제야 알겠나?
그는 살아있었다.
그리고...그렇다면...그가 자신을 찾아내어 팔다리를 자르고 고문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그 남자일 수밖에 없다.
-존은 내꺼야.
요 며칠간 알 수 없는 열정에 들끓어 먹지도 자지도 않고 금발 남자의 뒤를 쫓았던 기억이 난다. 몰래 사진을 찍었다. 기사에는 써먹지도 못할 사진을. 집에 침입하려고 시도했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에게 제지당했었다. 나는 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왜? 왜?
-그의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말라고.
그가 경고한다.
-아, 이제 내가 뭐라고 그래도 다시 그러진 못하겠군. 이미 다리를 잘랐으니까. 잠깐, 몸부림치지마. 지혈하느라 봉합에 신경 좀 썼다고.
소용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거세게 뒤척여본다. 이미 잘린 오른팔이 그대로 있는 것마냥 오른팔로 몸을 지탱하려고 애를 써본다.
-안되겠군. 도대체가 말을 들어야 말이지...
왼쪽 팔이 쓰라리다.
-꼭 이렇게 남은 팔까지 잘리고서야 조용해지고 싶었나?
그가 툴툴거리며 말한다.
-대체 너희 기자란 족속들은 존을 좀 가만히 내버려두면 안되겠어? 내가 이렇게 일일히 처리를 해야만 잠잠해지니 원.
-존에겐 휴식이 필요하다고. 알아듣겠어?
알아듣긴 뭘. 어쩐지 피곤해진다. 눈 앞이 다시 아득하다.
그는 집요하게 날 깨웠다. 힘들게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정신 차려. 이제 마지막이니까.
-이제 너를 저 불길에 처넣을거야.
-고통스럽게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오.
-그건 거짓말이었어.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네? 마지막까지 소소한 재미를 주다니.
-어쨌든 넌 여기까지야.
-수고했다.
-비명 좀 그만 질러. 어차피 들리지도 않아.
-즐거웠어.
-안녕.
*
셜록은 천근만근처럼 느껴지는 몸을 아무렇게나 침대에 뉘였다. 고급 침대의 매트리스는 삐걱이는 소리 하나 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아까 갈아입은 와이셔츠의 접혀있던 부분이 까슬하게 피부에 닿는다. 불편한 느낌에 살짝 뒤척인다.
침대 머리쪽에 창문에 걸린 커튼의 조그마한 틈새로 창백한 새벽 햇빛이 스며온다. 회색의 커튼이 동이 터옴에 따라 검은색에서 진회색으로, 진회색에서 연회색으로 변해간다.
점점 밝아지는 방 안에서 셜록은 생각에 빠졌다.
오늘로 세 번째. 맨 처음에 비해서 작업은 한층 수월해졌다. 이번에 처리한 대상은 덩치가 원체 커다란 사내라 끈질기게 몸부림칠 때는 결박이 끊어지기라도 할까봐 조금 긴장했지만, 일단 사지를 몇 개 자르고 나니 이전 작업과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 되었다.
사람은 역시 다 똑같아. 울고 반항하고 소리지르고 울고 소리지르고 반항하고 소리지르고 울고 반항하고 반항하고 또 반항하다가 결국엔 포기한다. 어쩜 그리도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지.
마지막으로 화염 속에 던져진 사람들의 데드 마스크는 언제나 고통과 체념으로 찌들어있다.
그는 시체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중에 혹시라도 뭔가 빼먹은 것이 있을까 싶어 아까의 작업을 반추해보았다. 비닐백 안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남자는 미처 깨닫지 못했겠지만, 소각장 바닥에는 생분해 비닐을 깔아놓았었으니 그 곳에는 피 한 방울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 비닐이 탈 때 나오는 매캐한 검은 연기나 역겨운 다이옥신 냄새가 없으니 의심을 품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신축성이 좋아 여간해서는 찢어지지 않는 수술용 고무 장갑을 확실히 끼었고, 작업을 할 때 입었던 옷부터 가루만 남을 정도로 확실하게 태웠으니 자신의 DNA 흔적이 묻어있을 미량 증거도 남김없이 소멸되었다. 고철류를 처리하는 소각장 터널에 공구 박스 안의 물건들도 전부 최우선 소각대상으로 분류해놓았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흔적도 없이 녹아 한 줌 쇳물이 되어있을 것이다.
소각 완료.
실수한 것은 없다.
셜록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어렴풋이 미소지었다. 얼음 장벽이 깨지고 흘러나오는 하얀 연기같이 냉혹하면서도 모호한 미소였다.
침대맡에서는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한동안 들려왔다.
불 꺼진 침실은 점차 아침의 햇살로 인해 따스한 빛깔로 물든다.
*
At That Time.
-그래서, 만족하니?
수화기 너머로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척 피곤한 듯 평소만큼 목소리가 나긋하지 못하다. 셜록도 갈라질 듯 까칠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만족해."
과연 자신은 무엇에 만족하는 것일까? 만족한다, 고 확답한 자신조차 자신이 무엇에 만족하는지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 알았다. 앞으로도 종종 연락하마.
그건 필시 셜록이 자기의 감시 하에서가 아닌 감시 영역 바깥에서 일을 저지르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서일 것이다. 소심하긴, 하고 셜록은 풋 웃었다. 하긴 셜록 자신도 자신이 이리도 능숙하게 살인이라는 것을 해치울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마이크로프트도 놀랐겠지. 쑥맥에 애송이로만 알았던 그가 이토록 깔끔하게 완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사실 정말로 완전 범죄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마이크로프트의 입도 막아야 하지만, 셜록은 그 능력을 감히 짐작키 어려운 상대의 콧수염을 건드리는 우는 범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살인 후에 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은 첫 번째에도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람의 살갗이 불타오를 때의 지독한 냄새와 연기에 구역질을 했었다. 다시금 코 끝에 살이 타는 역겨운 내음이 끼쳐오는 것 같아 그는 전화기를 얼굴에서 멀리 하고 숨을 가쁘게 쉬었다. 토할 것만 같은 느낌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는 침대에 웅크려 숨을 가파르게 쉬었다.
헛구역질이 멈췄을 때는 이미 전화는 끊겨 뚜-뚜-하는 둔한 기계음만이 들린다.
*
셜록은 얼굴에 아교를 정교하게 붙였다. 문제의 '사기꾼 자살 사건'이 일어난 후 마이크로프트가 마련해준 은신처에 칩거하기 시작하면서 셜록은 그동안 이론 상으로만 숙지하고 있었던 무대 분장술을 실험하고 익히기 시작했다. 마치 집시라도 되는 양 한 곳에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갑갑증이 치밀었던 것이었다. 분장술을 시연해볼 캔버스야 자신의 얼굴이 전부였지만, 그는 나름대로 잘 해나갔다. 처음에는 자신이 봐도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의 어설픈 분칠과 가짜 수염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남들 앞에 나서는 데 불안함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이마의 주름살, 푹 패인 뺨, 축 늘어진 목의 주름을 아교로 굳힌 다음, 검붉은 안색을 위해 벽돌 가루 색깔의 분칠을 한 후, 그는 입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음. 셜록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정도면 몇 마디 말을 한다고 해서 쉽사리 아교가 떨어져나가진 않을 것이었다. 검은 머리칼과 반듯한 눈썹만 빼면 그는 완벽하게 가난에 찌들어 몇 권 안되는 책이라도 팔려고 나온 한 명의 고서점상이었다.
그는 서랍을 열어 떡진 것처럼 억세게 빗어내린 반백의 가발을 쓰고, 조심스럽게 눈썹과 수염을 붙였다. 어느 정도 되었다 싶자 셜록은 다듬지도 못해 아무렇게나 자란 것처럼 보이는 하얀 눈썹을 까닥여 보이고, 볼품없이 듬성듬성하게 붙인 수염을 살짝 쓰다듬었다.
솔기가 튿어진 낡은 외투를 걸치고 서랍장 옆쪽에 놓아둔 지저분한 책 몇 권을 집어든 그는 연습한 대로 허리를 한껏 구부정하게 숙이고 무릎 관절이 불편한 사람처럼 무릎도 살작 구부리고는 천천히 방에서 나갔다.
*
바깥 나들이가 오랜만이어서 그런지-기자들을 처리하러 나갔던 몇 번의 밤나들이는 예외로 치자-셜록은 날카롭게 지면에 내리박히는 햇볕의 따스함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표가 나지 않게 닦아낸 셜록은 여민 외투 앞자락을 풀어헤치고 공원으로 향했다.
오늘같은 날씨라면 분명 존은 공원으로 산책을 나설 것이다. 겉으로 표시는 하지 않지만 그는 이렇게 해가 환하게 뜬 날씨를 아주 좋아했다. 이런 날이면 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다쳐서 돌아온 팔도 시큰거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만 없다면 그는 이런 날 몇 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햇볕을 쬐다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혼자 공원에 몇 시간이고 있는 남자에 대해 공원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 지 걱정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길어야 두 시간 정도 공원에서 거닐다가 집으로 일찍 돌아와서는 못내 아쉬운 눈으로 창가에 앉아 바깥을 쳐다본다.
그러니 늦기 전에 그를 먼 발치에서나마 보려면 걸음을 서둘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공원 입구에 들어서는데 마침 공원을 나서는 존과 마주쳤다.
이런, 늦었군, 이라고 생각하며 혀를 쯧 하고 찼다. 아래로 늘어진 하얀 눈썹에 시선이 가려지길 바라며 존을 쳐다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이다. 햇살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밝다. 자신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얼굴에 드리운 우울감이 걷힌 것만 같아 셜록은 기뻤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잡고 가발과 분장을 벗어던지고 존, 정말 오랜만이야, 잘 있었어? 라고 말하고 싶다.
존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욕망을 이성을 발휘하여 강하게 자제하며 셜록은 앞으로 침착하게 걸어갔다.
"!"
오랜 시간 구부리고 있던 허리와 무릎에 갑작스런 통증이 덮쳐와 주저앉고 말았다. 쥐가 난 것이다. 급히 몸을 일으켜 보지만 존은 자신이 넘어지는 장면을 보고야 만 듯 이쪽으로 다가온다.
"괜찮으세요?"
사려깊은 어투, 상냥한 몸짓. 어쩐지 눈물이 울컥 날 것 같지만 자동적으로 셜록은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준비한 대사를 내뱉는다.
"저리 비켜! 자네같은 젊은이에게 도움을 받을 정도로 늙진 않았다고."
가래가 들끓는 듯 걸걸한 목청으로 퉁명스럽게 말한다. 존은 조금 당황한 듯 싶지만 아무 말 없이 바닥에 흩어진 책을 주워 셜록에게 내밀었다.
"조심하세요. 이 공원 바닥은 울퉁불퉁하니까요."
그렇게 내쳤는데도 존은 이 성질 나쁜 노인에게 상냥하다. 갑자기 장난기가 든 셜록은 존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이 늙은이가 걱정이 된다면 책이라도 한 권 사주지 않겠는가? 보시다시피 이 늙은이는 책을 파는 걸 업으로 삼고 있네. 오호라, 마침 잘 되었군. 자네라면 이 책을 즐거이 읽을 수 있을 것이야. <나무 숭배의 기원>일세. 보시다시피 오래됬지만 내용 하나는 충실한 책이지."
속사포처럼 쏟아져나오는 그의 말에 존은 잘못 걸렸다, 라는 표정이었다. 애써 숨기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배어나오는 낭패한 기색에 셜록은 조금 재미있었다. 빨리 자리를 비키고 싶어하는 존의 몸짓을 무시하려 셜록은 다른 책 한 권을 같이 내밀며 말했다.
"<나무 숭배의 기원>를 사간다면 이거 한 권을 덤으로 주겠네. 어떤가?"
*
결국 약 이십 분 간의 실랑이 끝에 <나무 숭배의 기원>라는 책과 <카툴루스>라는 책을 존에게 강매한 셜록은 당황한 기색으로 얼떨결에 산 책 두 권을 끌어안고 베이커가로 향하는 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조금만...조금만 기다려, 존.
그렇게만, 행복한 모습으로 날 기다려줘.
언젠가는 이렇게 만났다는 사실을 즐거운 일화의 하나로, 우스갯소리로 삼을 날이 오겠지. 셜록은 오랜만에 낙천적인 마음을 먹으며 쥐가 덜 풀린 다리 한 쪽을 질질 끌며 걸음을 옮겼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