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인/레드존제인

 

 

 "제인, 너 요즘 안색이 좋아 보인다."

 

 리스본이 말했다. 제인은 은근히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평소의 빙글거리는 미소로 적당히 넘겨버리고는 "그으래?"라고 반문하며 소파에 몸을 뉘였다.
 게으른 자태로 소파에 눌어붙은 제인을 향해 목발을 짚은 리스본이 험상궂은 표정을 짓는 사이 어디선가 조가 김을 올리는 찻잔을 들고 나타나 제인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이 최근 한 달간 새로 생긴 CBI내에서의 행태였다. 처음에는 조가 제인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줄 알고 수군대던 사람들이었지만 둘의 사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깔끔했기 때문에 어느 샌가 그 변화상에 적응해버려 이젠 아무도 뭐라 하지 않게 되었다.
 제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감탄하며 말했다.

 

 "오늘 차 진짜 환상이네. '나만큼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이제 수준급의 향취라고 할 수 있겠어."
 "조 선배 짱이네요. 내가 전에 제인씨가 시킨 대로 차 끓였을 땐 그런 소리는 못 들었었는데."

 

 조는 제인의 자아도취 섞인 찬사와 릭스비의 말을 흘려 넘긴 채로 다른 한 손에 든 서류를 리스본에게 내밀었다.

 

 "지문 감식반에서 감식 결과를 보내왔는데, 지문이 뭉개져 있어서 용의자 범위를 많이 축소시키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리스본이 소파 옆의 조그마한 나무 의자를 끌어다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은 후 서류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옆에서는 제인이 한가로이 차를 홀짝이며 얄밉게도 훈수를 두었다.

 

 "예전에 한 거 해봐."
 "뭐?"
 "감으로 용의자 선별하는 거. 먹히긴 먹혔잖아?"
 "그게 먹힌 거라고 보기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그건 사건이 필요 이상으로 꼬였기 때문이지, 결국 나쁜 놈을 검거했으니까 먹힌 거라고 봐도 무방하잖아."

 

 결국 제인의 강권으로 인해 리스본은 다시 끙끙대며 몸을 일으킨 후 화이트보드를 끌어다 사진을 하나하나 붙여놓고 산 호아킨 사건 당시 했던 일을 다시 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명의 사진과 프로파일을 릭스비와 조에게 넘긴 리스본은 탐문 수사를 지시하고 다시 목발을 짚고 어기적거리며 개인 사무실로 들어갔다.
 리스본이 절뚝이며 자리를 떠난 후 조가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물론 아주 사무적인 어조였다.

 

 "같이 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글쎄, 이번 사건 솔직히 지루하고, 리스본이 용의자를 두 명이나 찍어줬으니까 나는 안 가도 될 것같아. 게다가 지금은 소파가 더 땡겨."

 

 이미 소파에 누워있으면서 어떻게 소파가 더 땡길 수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는 알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릭스비랑 단 둘이 가야겠군요."

 

 평소답지 않게 무언가 사족을 덧붙인 후 뒤에서 릭스비가 저랑 나가는 게 그렇게도 싫다는 거예요 운운 하며 징징거리는 것을 조는 쿨쉭한 태도로 싹 무시하며 사무실 문 밖으로 나섰다.
 근데 지금, 방금 그거 데이트 신청이었나?
 조가 탐문 수사를 핑계로 비밀 데이트를 제안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인은 히죽히죽 웃으며 문 밖으로 나서는 조를 향해 말했다.

 

 "아 그리고 이 차 식기 전에 마셔야지. 차는 온도가 생명이란 말이야."

 

 제인이 덧붙인 말에 조는 제인 쪽을 돌아보았다. 제인이 조가 타준 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올려보이며 어깨를 으쓱 하는 것을 보고도 조는 무표정이었으나 데이트 신청이 거절당한 것으로 인해 가슴 속에 조그맣게 뭉칠 뻔 했던 의기소침함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꾸물대던 릭스비를 데리고 티격태격하며 탐문 수사를 나가는 조와 릭스비를 보며 제인은 마치 등교하는 아들 형제를 바라보듯 엄마 미소를 지었다.
 그런 제인을 향해 반 펠트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반장님 걱정이네요. 거의 다 나은 다리가 이번에는 금이 가기까지 해서..."

 

 한 달 전 리스본의 다리에 총탄이 스치는 사고가 난 이후 리스본은 지금까지 목발에 의존하는 신세였다. 다리의 상처 회복이 의외로 느렸던 데다가, 다 나아갈 즈음 캘리포니아에 내방한 외국의 귀빈의 경호를 맡다가 인파를 막던 경찰력이 뚫려 튀어나온 부분에 하필이면 리스본이 있었는데 과격화된 사람들 때문에 넘어진 리스본의 다리뼈가 금이 갔던 것이다. 덕분에 리스본은 최근 한 달 동안 외근이라곤 꿈도 못 꾸는 신세였다.
 그런 상황이 리스본 자신도 매우 답답해했고 다른 팀원들도 물론이고 제인도 염려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제인은 상냥하게 그레이스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그럼 난 뭣 좀 먹고 올게'라고 하며 CBI건물 밖으로 나갔다.

 

*

 

 오늘따라 제인의 단골 아이스크림 카페는 한산했다. 제인은 요즘 살이 찌려는지 먹성이 좋아지고 단 것이 마구 당겼다. 아몬드 크리스피와 초콜릿 시럽을 듬뿍 뿌린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앉아서 한 스푼 한 스푼 소중하게 떠먹으며 제인은 행복감을 만끽했다.
 제인은 스푼에 묻은 초콜릿 시럽을 핥으며 리스본이 아까 전 한 말을 떠올렸다.

 

 '제인, 너 요즘 안색이 좋아 보인다.'

 

 그에 대해선 짚이는 바가 있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조와 사귀게 된 후부터 조의 권유로 가구도 별로 없고 티백 말고는 먹을거리도 없는 살벌한 저택에서 나와 조의 집에서 밤을 지내는 날 수가 늘어났다. 처음에는 조가 소파에서 자기도 했지만 곧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잔지가 까마득했던 제인은 처음에는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어느새 쿨쿨 잘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조와 잘 때의 제인은 평소에 그토록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것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금세 잠에 들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제인도 그 전에 비해-안색과 성격 모두-놀랄 만큼 밝아져서, 일단 고질적인 수면 문제가 해결되자 제인 자신의 정신적인 건강도 한층 호전되는가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조와 사귀는 것은 의외로 평범하고 단조롭다고 봐도 무방했으나, 제인은 현재로서 그다지 파란만장한 연애 담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 제인이 진지하게 둘의 관계를 고려한다고 판단한 조는 둘만 있을 때에는 굉장히 다정하고 세심하게 행동해서 제인 스스로도 굉장히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 전의 연인들에게도 이렇게 다정하게 대했을까, 라는 의문도 떠올랐지만 그 질문은 시기상조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는 제인은 당분간은 조와의 말랑말랑한 관계를 즐기기로 했다.
 이런 낙천적인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정말 조가 제인 자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하며 제인은 혼자서 피식 웃었다.
 아직 조와 진도를 많이 나가진 않았지만 원래부터 제인은 조의 탄탄한 근육질의 육체며-특히 단단한 팔뚝-단정한 얼굴에 호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가다간 정말 정이 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제인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뭉갰다.
 순간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아이스크림을 급하게 먹지는 않았는데, 라며 스푼을 쟁반에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제인은 주변에서 수상함을 느꼈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산하긴 했지만 몇몇 사람이 있던 가게 안이 텅 비어있다. 깨질 듯한 머리를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것을 참고 가게의 유리벽 너머를 보았지만 정말이지 거리 전체에는 쥐 죽은 듯이 사람 기척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눈앞이 가물가물한 원인이 분명한 아이스크림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며 제인은 테이블 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