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인/레드존제인/약수위

 

 

 눈을 뜨려고 했지만 여전히 머리는 아팠다. 대체 누군지는 몰라도 마취 약품의 남용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걸 모르는 종자가 분명하다고, 다소 낙천적인 생각을 하며 패트릭 제인은 힘겹게 실눈을 떴다.
 인질로 잡힐 때마다 느낀 거지만 일반적으로 인질이 처한 환경은 필요 이상으로 살풍경하다. 제인은 소 전용 전살기로 고문당했던 옛 기억을 떠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수사를 위해 약간의 말장난을 했다가 호되게 앙갚음당한 케이스였다. 이번에도 전기 충격을 받는다면 정말이지 끔찍할 것이라고 되뇌며 제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거친 시멘트 바닥을 예상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일반 주택에서 흔히 보이는 바닥재였다. 옆에는 창문이 있었으나 바깥 풍경을 봐도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발목에 감긴 수갑과 쇠사슬이었다. 오른쪽 발목에만 쇠사슬이 연결된 족쇄가 감겨있었는데, 의외로 허술한 처리에 제인은 다소간의 희망을 가지고 이것을 풀 만한 클립 같은 것을 찾았으나, 역시나 그런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취제의 기운을 이겨내는 데만 해도 많은 힘을 소모한 제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원래 자신이 누워있던 얇은 요에 돌아가서 몸을 둥그렇게 만 제인은 '지금은 도저히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

 

 얼마나 잤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바깥은 아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환하다. 그림자 방향이 달라져 있는 것이 시간이 지났음을 알려주었다. 짧은 수면 덕택에 그나마 두통이 누그러져서 제인은 아까보다는 맑은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발목의 족쇄부터 체크해 본 제인은 클립이나 쇳조각 등 여타 도구를 찾기 전까지는 족쇄를 풀어서 탈출하겠다는 안이한 생각을 단념하기로 했다.
 그 다음으로는 쇠사슬의 길이를 본 제인은 길이가 의외로 긴 것을 보고 놀랐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의 행동반경은 확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심한 제인은 그제야 요의를 느끼고 방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온 제인은 자신이 복층식의 주택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혹시나 하고 계단 쪽으로 가본 제인은 쇠사슬의 길이가 정확하게 계단 바로 직전까지 미치는 것을 보고 범인이 생각보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자신을 납치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런 걸 희망 고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쇠사슬의 범위가 닿는 대로 2층의 이 방 저 방 뒤지며 다니던 제인은 자신의 머릿속을 콕콕 찌르며 존재감을 증명하려는 기억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기억은 명확하지 않았고, 실마리를 잡으려던 제인은 포기하고 일단 매트리스와 요가 깔려 있는 첫 번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열고 안을 보는 순간, 제인은 깨달았다.
 크리스티나를 상징하는 붉은 머리칼의 인형이 있었던 그 방과 구조가 상응하는 이 집의 구조.
 레드존.

 어딘지 익숙했던 그 기시감, 자신의 뇌세포를 자극하던 그 느낌은 레드존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최근 조와 평온한 일상에 푹 빠져 있었던 탓인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독한 마취제의 효능이 잔존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레드존의 자취를 단번에 감지해내지 못한 제인은 자신을 원망하며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인기척은 없었으나 제인은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는 소리에 지레 놀라기도 하며 천천히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마도 납치된 지 이틀은 지났을 것이다. 평소라면 얼마든지 뜬 눈으로 낮과 밤을 지새웠을 것이나 레드존에게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인은 그 사실만으로도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

 

 삼 일째, 제인이 충혈된 눈을 깜박거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열린 방문을 살짝 밀어젖히며 들어왔다. 제인은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기 때문에 그다지 깜짝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장신의 실루엣, 그가 모습을 드러낸 여느 때와 다름없이 철저하게 자신의 모습을 가린 가면과 비닐옷.

 

 "안녕, 패트릭 제인."

 

 마치 변조된 듯, 아니면 그저 허스키할 뿐인 목소리인지 헷갈리는, 바로 그 목소리이다.

 

 "레드존."

 

*

 

 둘은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진다는 암묵적인 룰이라도 있는 것처럼 기싸움을 했다. 침묵이 극도로 무거워진 순간 레드존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지난번 내가 보여준 재주는 잘 감상했나?"

 

 산 호아킨 사건을 언급하며 레드존은 후후 웃었다. 제인은 짐작했었지만 레드존 본인의 입으로 사실을 확인하니 등골이 쭈뼛해져 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늙은이를 상대하기에는 넌 무리였겠지. 지금의 너라면 말이야. 옛날처럼 오만방자하고 위아래 모르던 시절의 너였다면 오히려 쉬웠을지도 모르겠군."

 

 레드존이 '옛날'을 언급하자 제인은 움찔했다.
 레드존은 먹잇감을 앞에 둔 뱀의 눈으로 제인의 면면을 훑어 내렸다.
 곱슬곱슬한 환한 금빛 머리카락,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색을 옮겨 칠한 듯 한 눈. 평소에는 긴장감 따윈 없이 사람의 마음을 뺏는 데에 적합한 아름다운 미소만을 짓는 데에 특화된 미형의 얼굴은 지금 그 앞에 서있는 레드존 자신으로 인해 차갑게 굳어있었다. 그에 레드존은 일말의 자부심어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너의 아름다움은 여전해... 그 때문에 내가 너를 특별히 주목했었지. 그 오랜 시간이 무색함을 보니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되는군."


 "티모시 카터는 너와 무슨 관계지?"

 

 제인이 묻자 레드존이 말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곧이어 조소와 함께 말했다.

 

 "네가 죽인 사람이라서 신경이 쓰이는 걸까나?"

 

 큭큭큭...하는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처진 눈에 잔뜩 힘을 주어 노려보는 제인을 보며 레드존은 계속해서 말했다.

 

 "내 재주를 봤으니, 너도 값을 치러야겠지?"

 

*

 

 패트릭 제인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통증에 대해 필요 이상의 두려움을 품고 있다. 그것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흡사하다. 그 때문에 제인은 일단 자신에게 위협이 가해지면 그 주체자에게 순종하는 습관이 있다. 그 습관은 지금까지 제인이 각종 인질극과 납치 사건 가운데서도 다친 곳 없이 살아나오는데 큰 공을 했었지만, 지금 그는 자신의 그런 습관을 원망하고 있었다.
 떨리는 허리를 붙들고 싶지만 이미 손발이 모두 구속된 후이다.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무시하고는 싶지만 강렬한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기에 눈꼬리에서 눈물이 스며 나온다.

 

 "제인, 정말 천박하군. 지금 네 꼴이 어떤지는 알겠어?"

 

 레드존은 이 상황이 매우 즐거운 듯 목소리의 톤이 높아져 있었다.
 제인의 조끼 단추는 뜯겨나가 방바닥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었고 단추 자리에는 실밥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셔츠가 풀어헤쳐진 것은 물론이고 가슴팍은 이미 레드존이 한 차례 괴롭힌 직후다. 이미 질릴 정도로 희롱당한 한 쪽 유두는 선정적인 빛깔로 부풀어 있었다. 제인은 레드존이 손대지 않은 다른 쪽 유두에 신경이 쏠리는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이제 레드존은 제인의 바지를 벗겨내고 하반신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의 애무는 연인 간의 애정 어린 그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방의 수치심과 쾌감을 동시에 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랜 시간의 숨바꼭질 동안 제인의 성감대라도 파악한 것인지 그는 능숙하게 제인이 느끼는 부위만을 골라 짚으며 제인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동시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지가 해졌군, 제인, 옷 한 벌 살 돈도 없을 정도로 궁핍해진 건가? 라던가, 그가 입은 흰색 면팬티를 보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조롱하기도 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드는 수치심에 난데없는 인내심의 시험을 받아야 했다.
 계속해서 레드존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제인은 질문을 던졌다.

 

 "크리스티나에게도 이렇게 한 건가?"

 

 제인이 힘겹게 묻자 레드존이 흥미로운 견해를 들은 듯 반문했다.

 

 "그랬다면?"

 

 콘돔을 낀 손가락이 제인의 직장의 점막을 휘저었다. 윽, 하고 신음을 참는 제인의 귓가에 레드존이 속삭였다.

 

 "또는 그렇지 않았다면?"

 

 잠시 제인의 애널을 희롱하던 그는 상냥하게 말하며 손가락으로는 사정없이 제인을 몰아붙였다.

 

 "크리스티나에게는 다른 즐거움을 줬다고만 해두지."
 "그거...흐윽! 안심되...네."

 

 제인이 신음소리를 억누르며 대꾸하자 레드존이 반박했다.

 

 "솔직해지라고, 제인."

 

 뭐에? 하는 의문과 함께 참을 수 없는 쾌감이 제인의 전신을 강타했다. 그 순간 그가 지금껏 억제해 오던 흥분이 한꺼번에 터져나왔고 그는 교성과 함께 사정했다.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