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인/레드존제인/약수위

 

 

 눈을 뜨려고 했지만 여전히 머리는 아팠다. 대체 누군지는 몰라도 마취 약품의 남용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걸 모르는 종자가 분명하다고, 다소 낙천적인 생각을 하며 패트릭 제인은 힘겹게 실눈을 떴다.
 인질로 잡힐 때마다 느낀 거지만 일반적으로 인질이 처한 환경은 필요 이상으로 살풍경하다. 제인은 소 전용 전살기로 고문당했던 옛 기억을 떠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수사를 위해 약간의 말장난을 했다가 호되게 앙갚음당한 케이스였다. 이번에도 전기 충격을 받는다면 정말이지 끔찍할 것이라고 되뇌며 제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거친 시멘트 바닥을 예상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일반 주택에서 흔히 보이는 바닥재였다. 옆에는 창문이 있었으나 바깥 풍경을 봐도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발목에 감긴 수갑과 쇠사슬이었다. 오른쪽 발목에만 쇠사슬이 연결된 족쇄가 감겨있었는데, 의외로 허술한 처리에 제인은 다소간의 희망을 가지고 이것을 풀 만한 클립 같은 것을 찾았으나, 역시나 그런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취제의 기운을 이겨내는 데만 해도 많은 힘을 소모한 제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원래 자신이 누워있던 얇은 요에 돌아가서 몸을 둥그렇게 만 제인은 '지금은 도저히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

 

 얼마나 잤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바깥은 아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환하다. 그림자 방향이 달라져 있는 것이 시간이 지났음을 알려주었다. 짧은 수면 덕택에 그나마 두통이 누그러져서 제인은 아까보다는 맑은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발목의 족쇄부터 체크해 본 제인은 클립이나 쇳조각 등 여타 도구를 찾기 전까지는 족쇄를 풀어서 탈출하겠다는 안이한 생각을 단념하기로 했다.
 그 다음으로는 쇠사슬의 길이를 본 제인은 길이가 의외로 긴 것을 보고 놀랐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의 행동반경은 확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심한 제인은 그제야 요의를 느끼고 방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온 제인은 자신이 복층식의 주택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혹시나 하고 계단 쪽으로 가본 제인은 쇠사슬의 길이가 정확하게 계단 바로 직전까지 미치는 것을 보고 범인이 생각보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자신을 납치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런 걸 희망 고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쇠사슬의 범위가 닿는 대로 2층의 이 방 저 방 뒤지며 다니던 제인은 자신의 머릿속을 콕콕 찌르며 존재감을 증명하려는 기억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기억은 명확하지 않았고, 실마리를 잡으려던 제인은 포기하고 일단 매트리스와 요가 깔려 있는 첫 번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열고 안을 보는 순간, 제인은 깨달았다.
 크리스티나를 상징하는 붉은 머리칼의 인형이 있었던 그 방과 구조가 상응하는 이 집의 구조.
 레드존.

 어딘지 익숙했던 그 기시감, 자신의 뇌세포를 자극하던 그 느낌은 레드존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최근 조와 평온한 일상에 푹 빠져 있었던 탓인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독한 마취제의 효능이 잔존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레드존의 자취를 단번에 감지해내지 못한 제인은 자신을 원망하며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인기척은 없었으나 제인은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는 소리에 지레 놀라기도 하며 천천히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마도 납치된 지 이틀은 지났을 것이다. 평소라면 얼마든지 뜬 눈으로 낮과 밤을 지새웠을 것이나 레드존에게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인은 그 사실만으로도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

 

 삼 일째, 제인이 충혈된 눈을 깜박거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열린 방문을 살짝 밀어젖히며 들어왔다. 제인은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기 때문에 그다지 깜짝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장신의 실루엣, 그가 모습을 드러낸 여느 때와 다름없이 철저하게 자신의 모습을 가린 가면과 비닐옷.

 

 "안녕, 패트릭 제인."

 

 마치 변조된 듯, 아니면 그저 허스키할 뿐인 목소리인지 헷갈리는, 바로 그 목소리이다.

 

 "레드존."

 

*

 

 둘은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진다는 암묵적인 룰이라도 있는 것처럼 기싸움을 했다. 침묵이 극도로 무거워진 순간 레드존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지난번 내가 보여준 재주는 잘 감상했나?"

 

 산 호아킨 사건을 언급하며 레드존은 후후 웃었다. 제인은 짐작했었지만 레드존 본인의 입으로 사실을 확인하니 등골이 쭈뼛해져 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늙은이를 상대하기에는 넌 무리였겠지. 지금의 너라면 말이야. 옛날처럼 오만방자하고 위아래 모르던 시절의 너였다면 오히려 쉬웠을지도 모르겠군."

 

 레드존이 '옛날'을 언급하자 제인은 움찔했다.
 레드존은 먹잇감을 앞에 둔 뱀의 눈으로 제인의 면면을 훑어 내렸다.
 곱슬곱슬한 환한 금빛 머리카락,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색을 옮겨 칠한 듯 한 눈. 평소에는 긴장감 따윈 없이 사람의 마음을 뺏는 데에 적합한 아름다운 미소만을 짓는 데에 특화된 미형의 얼굴은 지금 그 앞에 서있는 레드존 자신으로 인해 차갑게 굳어있었다. 그에 레드존은 일말의 자부심어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너의 아름다움은 여전해... 그 때문에 내가 너를 특별히 주목했었지. 그 오랜 시간이 무색함을 보니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되는군."


 "티모시 카터는 너와 무슨 관계지?"

 

 제인이 묻자 레드존이 말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곧이어 조소와 함께 말했다.

 

 "네가 죽인 사람이라서 신경이 쓰이는 걸까나?"

 

 큭큭큭...하는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처진 눈에 잔뜩 힘을 주어 노려보는 제인을 보며 레드존은 계속해서 말했다.

 

 "내 재주를 봤으니, 너도 값을 치러야겠지?"

 

*

 

 패트릭 제인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통증에 대해 필요 이상의 두려움을 품고 있다. 그것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흡사하다. 그 때문에 제인은 일단 자신에게 위협이 가해지면 그 주체자에게 순종하는 습관이 있다. 그 습관은 지금까지 제인이 각종 인질극과 납치 사건 가운데서도 다친 곳 없이 살아나오는데 큰 공을 했었지만, 지금 그는 자신의 그런 습관을 원망하고 있었다.
 떨리는 허리를 붙들고 싶지만 이미 손발이 모두 구속된 후이다.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무시하고는 싶지만 강렬한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기에 눈꼬리에서 눈물이 스며 나온다.

 

 "제인, 정말 천박하군. 지금 네 꼴이 어떤지는 알겠어?"

 

 레드존은 이 상황이 매우 즐거운 듯 목소리의 톤이 높아져 있었다.
 제인의 조끼 단추는 뜯겨나가 방바닥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었고 단추 자리에는 실밥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셔츠가 풀어헤쳐진 것은 물론이고 가슴팍은 이미 레드존이 한 차례 괴롭힌 직후다. 이미 질릴 정도로 희롱당한 한 쪽 유두는 선정적인 빛깔로 부풀어 있었다. 제인은 레드존이 손대지 않은 다른 쪽 유두에 신경이 쏠리는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이제 레드존은 제인의 바지를 벗겨내고 하반신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의 애무는 연인 간의 애정 어린 그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방의 수치심과 쾌감을 동시에 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랜 시간의 숨바꼭질 동안 제인의 성감대라도 파악한 것인지 그는 능숙하게 제인이 느끼는 부위만을 골라 짚으며 제인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동시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지가 해졌군, 제인, 옷 한 벌 살 돈도 없을 정도로 궁핍해진 건가? 라던가, 그가 입은 흰색 면팬티를 보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조롱하기도 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드는 수치심에 난데없는 인내심의 시험을 받아야 했다.
 계속해서 레드존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제인은 질문을 던졌다.

 

 "크리스티나에게도 이렇게 한 건가?"

 

 제인이 힘겹게 묻자 레드존이 흥미로운 견해를 들은 듯 반문했다.

 

 "그랬다면?"

 

 콘돔을 낀 손가락이 제인의 직장의 점막을 휘저었다. 윽, 하고 신음을 참는 제인의 귓가에 레드존이 속삭였다.

 

 "또는 그렇지 않았다면?"

 

 잠시 제인의 애널을 희롱하던 그는 상냥하게 말하며 손가락으로는 사정없이 제인을 몰아붙였다.

 

 "크리스티나에게는 다른 즐거움을 줬다고만 해두지."
 "그거...흐윽! 안심되...네."

 

 제인이 신음소리를 억누르며 대꾸하자 레드존이 반박했다.

 

 "솔직해지라고, 제인."

 

 뭐에? 하는 의문과 함께 참을 수 없는 쾌감이 제인의 전신을 강타했다. 그 순간 그가 지금껏 억제해 오던 흥분이 한꺼번에 터져나왔고 그는 교성과 함께 사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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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

 

 

 "제인, 너 요즘 안색이 좋아 보인다."

 

 리스본이 말했다. 제인은 은근히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평소의 빙글거리는 미소로 적당히 넘겨버리고는 "그으래?"라고 반문하며 소파에 몸을 뉘였다.
 게으른 자태로 소파에 눌어붙은 제인을 향해 목발을 짚은 리스본이 험상궂은 표정을 짓는 사이 어디선가 조가 김을 올리는 찻잔을 들고 나타나 제인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이 최근 한 달간 새로 생긴 CBI내에서의 행태였다. 처음에는 조가 제인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줄 알고 수군대던 사람들이었지만 둘의 사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깔끔했기 때문에 어느 샌가 그 변화상에 적응해버려 이젠 아무도 뭐라 하지 않게 되었다.
 제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감탄하며 말했다.

 

 "오늘 차 진짜 환상이네. '나만큼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이제 수준급의 향취라고 할 수 있겠어."
 "조 선배 짱이네요. 내가 전에 제인씨가 시킨 대로 차 끓였을 땐 그런 소리는 못 들었었는데."

 

 조는 제인의 자아도취 섞인 찬사와 릭스비의 말을 흘려 넘긴 채로 다른 한 손에 든 서류를 리스본에게 내밀었다.

 

 "지문 감식반에서 감식 결과를 보내왔는데, 지문이 뭉개져 있어서 용의자 범위를 많이 축소시키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리스본이 소파 옆의 조그마한 나무 의자를 끌어다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은 후 서류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옆에서는 제인이 한가로이 차를 홀짝이며 얄밉게도 훈수를 두었다.

 

 "예전에 한 거 해봐."
 "뭐?"
 "감으로 용의자 선별하는 거. 먹히긴 먹혔잖아?"
 "그게 먹힌 거라고 보기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그건 사건이 필요 이상으로 꼬였기 때문이지, 결국 나쁜 놈을 검거했으니까 먹힌 거라고 봐도 무방하잖아."

 

 결국 제인의 강권으로 인해 리스본은 다시 끙끙대며 몸을 일으킨 후 화이트보드를 끌어다 사진을 하나하나 붙여놓고 산 호아킨 사건 당시 했던 일을 다시 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명의 사진과 프로파일을 릭스비와 조에게 넘긴 리스본은 탐문 수사를 지시하고 다시 목발을 짚고 어기적거리며 개인 사무실로 들어갔다.
 리스본이 절뚝이며 자리를 떠난 후 조가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물론 아주 사무적인 어조였다.

 

 "같이 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글쎄, 이번 사건 솔직히 지루하고, 리스본이 용의자를 두 명이나 찍어줬으니까 나는 안 가도 될 것같아. 게다가 지금은 소파가 더 땡겨."

 

 이미 소파에 누워있으면서 어떻게 소파가 더 땡길 수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는 알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릭스비랑 단 둘이 가야겠군요."

 

 평소답지 않게 무언가 사족을 덧붙인 후 뒤에서 릭스비가 저랑 나가는 게 그렇게도 싫다는 거예요 운운 하며 징징거리는 것을 조는 쿨쉭한 태도로 싹 무시하며 사무실 문 밖으로 나섰다.
 근데 지금, 방금 그거 데이트 신청이었나?
 조가 탐문 수사를 핑계로 비밀 데이트를 제안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인은 히죽히죽 웃으며 문 밖으로 나서는 조를 향해 말했다.

 

 "아 그리고 이 차 식기 전에 마셔야지. 차는 온도가 생명이란 말이야."

 

 제인이 덧붙인 말에 조는 제인 쪽을 돌아보았다. 제인이 조가 타준 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올려보이며 어깨를 으쓱 하는 것을 보고도 조는 무표정이었으나 데이트 신청이 거절당한 것으로 인해 가슴 속에 조그맣게 뭉칠 뻔 했던 의기소침함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꾸물대던 릭스비를 데리고 티격태격하며 탐문 수사를 나가는 조와 릭스비를 보며 제인은 마치 등교하는 아들 형제를 바라보듯 엄마 미소를 지었다.
 그런 제인을 향해 반 펠트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반장님 걱정이네요. 거의 다 나은 다리가 이번에는 금이 가기까지 해서..."

 

 한 달 전 리스본의 다리에 총탄이 스치는 사고가 난 이후 리스본은 지금까지 목발에 의존하는 신세였다. 다리의 상처 회복이 의외로 느렸던 데다가, 다 나아갈 즈음 캘리포니아에 내방한 외국의 귀빈의 경호를 맡다가 인파를 막던 경찰력이 뚫려 튀어나온 부분에 하필이면 리스본이 있었는데 과격화된 사람들 때문에 넘어진 리스본의 다리뼈가 금이 갔던 것이다. 덕분에 리스본은 최근 한 달 동안 외근이라곤 꿈도 못 꾸는 신세였다.
 그런 상황이 리스본 자신도 매우 답답해했고 다른 팀원들도 물론이고 제인도 염려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제인은 상냥하게 그레이스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그럼 난 뭣 좀 먹고 올게'라고 하며 CBI건물 밖으로 나갔다.

 

*

 

 오늘따라 제인의 단골 아이스크림 카페는 한산했다. 제인은 요즘 살이 찌려는지 먹성이 좋아지고 단 것이 마구 당겼다. 아몬드 크리스피와 초콜릿 시럽을 듬뿍 뿌린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앉아서 한 스푼 한 스푼 소중하게 떠먹으며 제인은 행복감을 만끽했다.
 제인은 스푼에 묻은 초콜릿 시럽을 핥으며 리스본이 아까 전 한 말을 떠올렸다.

 

 '제인, 너 요즘 안색이 좋아 보인다.'

 

 그에 대해선 짚이는 바가 있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조와 사귀게 된 후부터 조의 권유로 가구도 별로 없고 티백 말고는 먹을거리도 없는 살벌한 저택에서 나와 조의 집에서 밤을 지내는 날 수가 늘어났다. 처음에는 조가 소파에서 자기도 했지만 곧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잔지가 까마득했던 제인은 처음에는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어느새 쿨쿨 잘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조와 잘 때의 제인은 평소에 그토록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것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금세 잠에 들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제인도 그 전에 비해-안색과 성격 모두-놀랄 만큼 밝아져서, 일단 고질적인 수면 문제가 해결되자 제인 자신의 정신적인 건강도 한층 호전되는가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조와 사귀는 것은 의외로 평범하고 단조롭다고 봐도 무방했으나, 제인은 현재로서 그다지 파란만장한 연애 담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 제인이 진지하게 둘의 관계를 고려한다고 판단한 조는 둘만 있을 때에는 굉장히 다정하고 세심하게 행동해서 제인 스스로도 굉장히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 전의 연인들에게도 이렇게 다정하게 대했을까, 라는 의문도 떠올랐지만 그 질문은 시기상조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는 제인은 당분간은 조와의 말랑말랑한 관계를 즐기기로 했다.
 이런 낙천적인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정말 조가 제인 자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하며 제인은 혼자서 피식 웃었다.
 아직 조와 진도를 많이 나가진 않았지만 원래부터 제인은 조의 탄탄한 근육질의 육체며-특히 단단한 팔뚝-단정한 얼굴에 호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가다간 정말 정이 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제인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뭉갰다.
 순간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아이스크림을 급하게 먹지는 않았는데, 라며 스푼을 쟁반에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제인은 주변에서 수상함을 느꼈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산하긴 했지만 몇몇 사람이 있던 가게 안이 텅 비어있다. 깨질 듯한 머리를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것을 참고 가게의 유리벽 너머를 보았지만 정말이지 거리 전체에는 쥐 죽은 듯이 사람 기척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눈앞이 가물가물한 원인이 분명한 아이스크림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며 제인은 테이블 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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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

 

 

 "제인..."

 

 조가 말했다.
 제인은 반쯤은 기대되는, 반쯤은 실망한 기분으로 조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헤프게 굴지 마십쇼."

 

 과연, CBI 최고의 인격 살인마라고 불리는 킴벌 조의 촌철살인같은 한 마디였다. 당연히 조가 제인의 유혹에 못이겨 키스라던가 그 외의 다른 행동(?)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제인은 마치 자기 자신이 창녀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괜히 패트릭 제인이 아니었다.

 

 "난 조가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제인을 보며 조는 속으로 '정말이지...'라며 탄식했다. 진짜로 반한 사람에게만 보여줄 듯한 촉촉히 젖은 페일 블루의 눈동자를 보며 조는 금방이라도 제인을 포옹해버릴 것만 같은 자신을 억제했다.

 

 "제인, 저는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조가 입을 열자 제인은 갑자기 뒤로 돌아 빠르게 자기 집으로 발을 옮겼다. 그에 벙찐 조가 제인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뭐하는 겁니까?"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어."

 

 제인이 뒤따라오는 조를 흘낏 보며 말했다.

 

 "여긴 밖이잖아. 이러다가 파파라치한테 사진찍혀서 <CBI 요원들의 은밀한 일상>이라는 타이틀로 지역 신문에

게재될 지도 몰라."

 

 농담같은 말이었지만 왠지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도 일단 함께 집으로 가는 것이니 적어도 회피는 아니라는 안도 섞인 생각을 하며 조 또한 제인을 따라 제인의 집으로 향했다.

 

*

 

 "차 마실래?"
 "물이면 됩니다."

 

 포트에 물을 끓이는 사이 제인은 유리컵에 냉수를 담아 조에게 내밀었다. 조는 물컵을 받아들고 입술을 축였다. 그새 다 끓은 물을 컵에 붓고 티백을 꺼내 물에 담그며 말했다.

 

 "그니깐 조는 나를..."
 "사랑합니다."

 

 제인의 손이 움찔 했다. 컵을 들고 있지 않았길래 망정이지, 컵을 들고 있었다면 멀쩡한 바닥에 떨어뜨릴 뻔 했던 것이다.

 

 "조는 참 솔직하다니깐."

 

 제인은 살짝 굳은 얼굴로 미소지었다. 조의 까만 눈이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에 조가 말했다.

 

 "제인 상황은 저도 알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달라고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까처럼 장난으로 넘어가진 마십쇼."


 제인은 차를 홀짝 들이키며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조는 인내심을 가지고 제인이 뭔가 말을 하길 기다렸다. 제인은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차만 마시다가 문득 말을 꺼냈다.

 

 "언제부터야?"
 "그런 게 중요합니까?"

 

 조의 무뚝뚝한 말에 제인은 반대로 그 속의 담긴 진심을 그제서야 체감했다. 겉으로는 전혀 표출되지 않겠지만 조는 이 마음을 자신에게 털어놓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무척 긴장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머릿속에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생각이 떠올랐다. 한 번 해볼까, 라는 생각. 이는 레드존 사건 이후에 진지한 관계를 피해왔던 제인에게는 그 나름의 큰 도약이었다. 제인은 한 번쯤 충동에 몸을 맡겨 보기로 결심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는 지금 당장 결론을 내려주길 바라는게 아니-"
 "좋아, 조."

 

 조의 말을 가로막은 제인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한 번 사귀어 보자, 진지하게."

 

*
 
 다음날 리스본 휘하의 요원들은 모두가 전날의 음주가무로 퀭한 기색이었다. 물론 언제나 상큼한 안색의 패트릭 제인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조도 어젯밤 제인의 집에 들렀다가 자기 집으로 가는 바람에 잠이 부족한지 오늘따라 그늘진 눈가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전날 종료된 케이스만 정리하면 당분간은 맡은 사건이 없으므로 릭스비를 비롯한 팀원들은 서류 정리에 주력했다.
 맡은 보고서를 팀원들 중 가장 먼저 마무리지은 조는 CBI 내의 주방으로 가서 간단히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다른 팀원들이 서류 작업을 하느라 끙끙대는 동안 전용 소파에서 뒹굴대거나 딴지를 거는데 주력하던 제인은 조가 부엌에 가자 잠시 후에 뒤따라가서 찻잔을 새로 채울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담긴 주전자가 끓자 컵에 물을 붓던 제인에게 조가 말했다.

 

 "제인, 접시 꺼내게 잠시만 비켜주시겠습니까."

 

 제인은 비키는 대신 뒤돌아서 찬장에 손을 뻗는 조와 마주봤다. 그리고 눈을 찡긋 하더니 조의 귓가에 속삭였다.

 

 "생각해보니 우리 사내연애다?"

 

 조가 기습적인 제인의 달콤한 말에 동요하는 사이 제인이 쏙 빠져나가 찻잔을 들고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부엌을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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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레드존제인

 

 

 인간의 망각이란 과연 축복일까 저주일까. 패트릭 제인에게는 양 쪽 다 해당사항이 있었다. 살해당한 아내와 딸의 얼굴이 곧바로 생각나지 않을 때, 그녀들의 희미한 인상만이 남아서 뇌리를 떠도는 것을 느낄 때 그는 깊은 슬픔과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며 다시금 레드존의 자취가 잔류하는 그 방으로 들어가 이제는 거의 느껴지지않는 가족의 혈향을 들이마시며 복수를 되새김질했다.
 CBI의 팀원들과 웃고 떠들며 잡담을 지껄이는 순간 문득 자신의 목적을 떠올리면 바로 직전까지 느끼던 즐거움의 반향으로 더욱 어둡도록 슬프고 비참한 내면으로 침잠했다.
 그때 패트릭의 심연으로 손을 내민 것이 킴벌 조였다. 감히 리스본도 하지 못했던 일을.

 

 "제인은 한숨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잠복근무를 하던-정확히 말하자면 제인이 벌린 일의 해결사 명목으로 동참한-와중에 조가 한 말이었다.
 평소의 차갑고 무표정한 바윗덩이같은 얼굴로 묘한 친절함을 베푸는 그는 생소했다. 릭스비가 반펠트와 헤어진 후에 실연을 위로해주는 친구의 태도를 취했던 그때의 조와는 미묘하게 다른 모습이란 점에서 패트릭 제인은 의아함을 가졌다.

 

 "그건 조가 신경쓸만한 문제가 아닌 것같군...음 조, 전에 선이라던가 본다고 하지 않았어? 그때 만났던 아가씨 미인이라고 들은 거 같은데-"
 "말 돌리지 마십쇼."

 

 패트릭 제인이 보인 명백한 거부와 거절의 태도, 그리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능숙하게 어색한 상황을 타개하는 용도의 해맑은 미소를 보고 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조가 갑자기 이렇게 참견을 해대는 이유를 난 모르겠는걸."

 

 능글한 미소의 제인을 향해 찡그린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 하던 조가 갑자기 안전벨트를 풀렀다.

 

 "용의자가 집 밖에 나왔군요."

 

 조가 차 문을 닫으려다 말고 제인에게 당부했다.

 

 "저 자의 움직임이 수상하니 제가 일단 진입하겠습니다. 제인은 차 안에 그대로 계십쇼."

 

 무전기로 지원 요청을 하는 조의 뒷모습을 보며 제인은 좌석 깊숙이로 등을 기대었다. 조는 온몸의 근육을 단단히 긴장한 태세로 용의자의 집으로 향했고 오늘따라 유난히 어두운 밤의 어둠에 조의 실루엣은 순식간에 묻혀버려 제인의 시야에는 더이상 눈에 띠지 않았다.
 제인은 지원 인원과 도착하길 기다리며 아까의 조를 되돌이켜 생각해보았다. 묘하게 애틋한 느낌. 아이스맨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냉랭한 그의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왠지 모를 열기마저 느껴졌던 그의 눈빛.
 헤에, 설마-라고 치부하기에는 제인 자신의 뛰어난 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에 월터 매쉬번과 어울렸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표정이 안좋았던건가.'

 월터 매쉬번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알아주는 유산가 중 하나로 비정상적일 정도로 스릴과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만한 재산을 쌓을 정도의 수완과 인맥도 갖추고 있어 CBI의 수사진을 개인적으로 이용하는 등의 짓도 가능한 그런 남자였다.
 매쉬번과 어울린 건 버트럼의 부탁도 있었지만 매쉬번 특유의 한계까지 자신을 내모는 모습에 흥미를 느껴서이기도 했다. 하루동안 그의 노리갯감이 되어주는 것은 지루한 내근에서 벗어나는 방편 가운데 하나기도 했다. 가끔 매쉬번과 있다 왔다는 언급을 넌지시 할 때에 조는 제인에게서 나는 매쉬번의 체향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인은 조가 과연 자신에 대한 감정을 자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이 교차했고, 의외로 빠르게 지원 차량과 요원들이 도착했다. 리스본은 제인이 잠복용 차량 안에 얌전하게 있는것을 보고 재빨리 눈인사만 한 후에 요원들과 함께 용의자의 집으로 향했다.

 사건은 잘 마무리되어가는 듯 하다가 사단이 났다. 먼저 진입했던 조가 거구의 범인과 몸싸움을 하느라 지쳐있던 사이 다른 요원들이 제압했던 범인이 순간적인 괴력을 발휘한 것인지 수갑을 채우기 직전 빠져나가 리스본에게 총탄을 먹인 것이다. 다행히 급하게 쏘는 것이었던지라 조준이 엉망이었고 총알은 리스본의 왼쪽 다리를 스치는 것으로 끝났다. 그래도 명색이 총알인지라 당분간 리스본은 예전에 인파에 밀려 강바닥에 넘어졌을 때처럼 목발 신세를 져야했다.
 리스본은 다리가 아팠지만 수사 진척만 해도 이 주일에 가까운 시간을 소요했고 체포에도 애를 먹었던 범인을 끝내 잡을 수 있게 되어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기꺼이 케이스 클로즈드 피자를 먹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제인은 파인애플이라면 질색하는 조를 위해(?) 하와이안 피자를 시켜서 반펠트와 함께 조를 편식쟁이라고 놀려댔다. 그렇게 밤은 저물어갔고 잠복 차량에서의 해프닝은 제인과 조 모두에게 잊혀진 것 같았다.

 

*

 

 아픈 리스본을 먼저 집에 데려다 준 후 제인, 조, 릭스비, 반펠트는 2차에서 맥주도 거나하게 마셨고 3차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고 내일의 무사 출근을 바라며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조 너희 집은 이쪽이 아니지 않아?"
 "바래다주고 가도 그렇게 멀진 않습니다."

 

 술자리에서 왁자지껄 떠들어댈 때에는 간간히 웃음기를 내비친 조였지만 제인과 단둘이 있게 되자 다시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와버렸다. 천성인건지 CBI의 심문관 역할을 하면서 몸에 밴 것인지 조는 함께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침묵을 못견디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제인이야 얼마든지 무시할 수는 있었지만 집까지 가는 내내 이런 분위기라면 정말 사양이라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차 안에서 하던 얘기 마저 해볼까?"
 "됐습니다."
 "왜?"

 

 제인은 빙글빙글 웃으며 조의 앞에 고개를 들이밀며 조의 표정이 풀리길 기다렸지만 조의 굳은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인은 항상 도망치기만 하는 군요."
 "그거야 난 총도 무섭고, 주먹질하는 것도 무섭고-"
 "지금 하는 행동을 말하는 겁니다. 난 제인이 좋지만, 그런 행동은 정말 좋아할 수가-"

 

 멈춰서서 말하는 조를 보던 제인이 갑작스럽게 조의 정면으로 다가와 조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런 거 아니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조의 눈빛을 제인은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안 그래?"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