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인

 

 오랜만의 언더커버 작업이다. 조는 위장을 위해 정말로 간만에 꺼내든 고급 양복의 깃을 어루만지는 척하며 무선 도청기의 위치를 조정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전달된 것인지 귀에 끼운 통신기로 누군가가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마."

 

 리스본의 차분하고도 사려깊은 목소리다. 쓸데없이 감도가 좋은 통신기 너머로 릭스비가 징징거리는 것이 들렸다.

 

 "왜 이런 일은 모두 조 선배 차지인거죠? 저도 위장엔 자신있다고요!"

 

 아마 여자들과 시시덕거려야 하는 것이 부러운 것일 게다. 애까지 있으면서 아직도 속편하게 여자 타령이나 하다니 릭스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스가 조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거야 릭스비 선배가 더 잘 알텐데요."

 

 이번 업무는 사교 틀럽의 파티에 잠입하는 것이었다.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속한 클럽의 응접실에서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뿐더러, 사건을 수사하는 동안 용의자가 클럽의 회원들로 좁혀졌기 때문이었다. 다소 폐쇄적인 고급 사교 클럽의 특성상 출입마저 자유롭지 않은지라 대담하게 클럽의 응접실에서 피해자를 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살인사건이 일어난 시간에 알리바이가 명확하지 않은 클럽 회원들일 것이었다.
 클럽의 본래 규정대로라면 외부 관계자인 조가 이 파티에 끼어드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었지만, 타이밍 좋게도 오늘 열리는 파티는 일명 '1+1 파티', 즉 클럽의 회원이 회원이 아닌 사람을 동행할 수 있는 파티였다. 파티의 원래 목적은 새로운 회원의 유입을 위한 것이었지만, 리스본의 팀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살인 사건의 가해자를 가려낼 생각이었다. 고로 팀원들 줄 하나가 클럽 회원의 지인으로 가장하며 가해자일 법한 인물들을 떠보기 위해 파티에 참석해야 했다. 맨 처음에 수사를 나갔던 리스본과 그레이스는 이미 기존 클럽 회원들에게 얼굴이 알려졌으므로 당연히 제외. 제인은 말썽을 부리지 않겠다는 확언을 한 후에야 파티에 참석해도 좋다는 리스본의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두 명, 릭스비와 조였다. 파티에 대한-게다가 이번 파티는 수영장 파티였고 늘씬하게 잘 빠진 미녀들이 비키니를 입고 무리지어 있을 것이라는-기대에 차있던 릭스비를 제외한 다른 모든 팀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조를 지명하는 것이 아닌가. 오랜만에 임무다운 임무-그리고 덤으로 비키니를 입은 미녀, 또는 섹시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 구경-를 수행하리라고 기대했던 릭스비로서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넌 화술이 딸려."

 

 리스본이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현명하게도 '넌 입만 열면 아들 이야기밖에 안하잖아'라는 이야기는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릭스비가 냄새나는 아기 토나 묻히고 파티장을 자랑스럽게 활보할 모습이 그녀의 눈에 선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함으로써 정곡을 찌를 순 있겠지만 릭스비의 푸념-징징-은 한층 커질 것이었고 리스본은 그런 성가신 사태는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조를 지명한 이유는 또 있었다. 물러진 자신을 대신해 제인의 행동을 제어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제인의 행동에 제동을 걸 줄 알았고 조는 모르는 척 제인이 하자는 대로 동조하는 편에 속했다. 그러나 조가 서머와 사귀기 몇 주 전부터, 그러니까 서머와의 연애 행각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를 때부터 그들은 거의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다. 은근히 붙어다니던 것도 완전히 그만두고 조는 릭스비하고만 수사를 다녔다. 그레이스와 릭스비의 관계가 하이타워에게 들통이 나서 릭스비가 상심한 것을 위로하려는 것인가, 싶었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연의 일치인 것일까? 라고 리스본은 생각했으나, 그녀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었다. 그 전까지의 친밀했던 둘의 관계가 단순히 우정 수준의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리스본은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릭스비와 그레이스의 관계가 파토가 나서 꾸리꾸리해진 사무실의 분위기에 한 번 더 초를 칠 용기는 그녀에게 없었다.
 일의 전말이 어찌된 것이든 간에, 최근 들어 우울한 듯한 제인에게 물러진 자신을 대신해서 조가 더욱 냉철하게 제인의 탈선에 제동을 걸 수 있으리라고 리스본은 기대했다. 이번 일로 말미암아 둘의 관계가 최소한 직장 동료의 수준으로 회복된다면 더욱 좋은 일이고. 리스본은 그렇게 생각하며 클럽의 수영장 근처 수풀에 설치한 몰래카메라의 감도를 조절했다.

 아직도 징징대는 릭스비의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을 무시하며 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티니 잔을 기울이는 척 하며 제인이 있는 곳을 슬쩍 쳐다보니 제인이 특유의 넉살을 발휘해 그럭저럭 훤칠한 사내의 혼을 빼놓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하도 입어 주름이 눌다시피 한 제인의 옷에 경멸하는 눈초리를 보내던 남자는 제인의 화려한 언변에 현혹되어 정신을 못차리는 듯 했다. 자신이 용의자 중 하나에 속하는 줄도 모른 채 수사관과 무방비하게 이러쿵저러쿵하는 모습을 보니 범인일 리는 없었다. 보통의 범인들은 수사관들에게 경계심을 품고 말을 거의 섞지 않으려하게 마련이다. 좀 더 교활한 부류는 '수사는 어떻게 되어가나요?'라는 호기심을 가장한 질문을 던지면서 그들이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알고 싶어 속을 떠보려한다. 제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자는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다.
 수사선상에서 제외해도 되렸다, 라고 조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조의 머리와는 달리, 조의 눈은 제인과 그 옆에 선 남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가 제인에게 보내는 눈빛이 점차 다른 종류의 것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감지한 까닭이었다. 게다가 저 개자식이-어느새 호칭도 비속어로 바뀌어있다는 것을 조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은근슬쩍 제인의 허리에 손을 두르는 것이 아닌가! 그 빌어먹을 손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제기랄, 조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제인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의 손이 자신의 엉덩이를 슬그머니 어루만지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었다. 아니, 천하의 패트릭 제인이 남자의 어프로치를 모를리 없었다. 아마 묵인하고 있는 것이겠지. 설마 즐기고 있지는 않겠지? 조는 이를 갈았다. 아직 이성을 차리고 있는 조의 차가운 머리 한 구석은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말도 안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와 제인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이었으므로 그가 오늘 저 한량과 원나잇 스탠드를 즐기던, 아니면 옆에 있는 여자까지 포함해 스리섬을 즐기던, 아니면 이 파티에 초대된 모두와 난교 파티를 벌이던 조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보란 듯이 제인과 결별한 후 먼저 서머와 사귄 것은 자기자신이 아니던가.
 손에 든 칵테일 잔의 손잡이가 부러져라 꽉 쥐며 조가 그답지 않게 수사는 뒷전으로 하고 슬슬 농밀해져 하는 남자의 스킨십과 그것을 기분좋게 받아들이는 듯한 제인의 뒷모습-엉덩이를 노려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못 보던 분이네요."

 

 여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조는 굳었던 입매를 풀며 답인사를 했다.

 

 "예. 친구와 함께 왔는데 어쩐지 그녀석은 보이지 않는군요."
 "여자친구인가요?"
 "아쉽게도 그건 아닙니다."

 

 전 남자친구-아니, 섹스파트너인가?-와 같이 오긴 했지만 말입니다. 조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서머와 비슷하게 간드러진 목소리를 지닌 여자가 짐짓 수줍은 척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긴, 제가 그쪽의 여자친구였다면 이렇게 멋진 분을 방치하고 갈 리가 없는걸요."

 

 여자의 머리는 게다가 금발이었다. 제인처럼 황금빛 금발이나, 서머처럼 새하얀 빛깔의 실버블론드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금발은 금발이었다. 어슴푸레한 수영장 위를 비추는 조명에 빛나는 그녀의 머리칼은 언뜻 보면 제인의 금발 머리와 비슷한 듯도 했다. 조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이 답없는 놈아!'라고 꾸짖고는 여자의 칭찬에 답례인사를 건넸다.

 

 "과찬이십니다."

 

 여자의 은근한 대시에 장단을 맞춰주는 조의 귀에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은 제인 킹스턴. 한 번 캐보세요. 진술에 모순도 없고, 알리바이도 있는데, 그 알리바이를 증명해준 사람이 갑자기 증발했거든요. 어제부터 행방불명이예요."

 

 의심의 여지가 있군, 하고 조는 다시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혼자 오셨나요?"
 "그래요."
 "이런 미녀를 외로이 내버려두다니 여기 있는 남자들이 보는 눈이 없나보군요."

 

 후후 웃으며 조의 칭찬에 기분좋아하는 그녀에게 조는 이미 알고 있는 답을 얻기 위해 질문을 건넸다.

 

 "이름이?"
 "제인이예요. 제인 킹스턴."
 "저는 렉스 창이라고 합니다."

 

 준비한 가명을 말한 조는 한참을 여자와 시시덕거렸다. 원래 여자와 한담을 나누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조였지만, 제인과 3년간 함께하면서 의도치 않게 늘어버린 말솜씨로 그녀를 살살 구슬리니 별의별 이야기가 다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얌전해 보이던 여자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상당한 가십 여왕이었다. 우아하게 자신은 쏙 빼놓고 남들을 은근히 욕하는 솜씨가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조는 약간의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이쯤 들어줬으면 됐겠지, 싶어 조는 슬슬 과감한 질문을 던지려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 했다.
 갑자기 비명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수영장에 풍덩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영장에 입수하여 자신의 물에 젖은 몸매를 뽐내려는 골빈 여자의 비명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패트릭 제인의 비명 소리였다. 비명을 지른 사람이 제인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즉시 조의 고개는 번개보다 빠르게 뒤로 돌아갔고 제인과 함께 수영장에 빠지는 다른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아까 전까지 제인의 엉덩이를 주물거리던 남자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는 일단 그쪽으로 즉시 달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조의 물음에 제인이 물을 먹었는지 콜록거리며 말했다.

 

 "저, 저 사람 잡아!"

 

 제인과 같이 빠졌던 남자는 양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륜한 수영 실력을 과시하며 풀의 가장자리로 나오고 있었다. 조는 그쪽으로 달려가 남자를 다시 물 안으로 밀었다. 그 와중에 조도 수영장 안으로 빠지고 말았다. 물 속에서 첨벙거리며 두 사람이 육탄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릭스비가 감시실에서 달려나와 남자를 제압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니깐 죽은 남자와 저 남자-바비 포츠-는 섹스 파트너였던 거야. 순조롭게 이어지던 두 남자의 관계는 포츠의 사업이 하락세를 타게 되고 클럽에서 쫓겨나게 될 위기에 처하자 함께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지. 죽은 남자는 포츠와의 관계를 끝내고 싶어했고, 포츠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 그리고 사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돈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지."
 "그래. 난...화가 나서...화가 너무 나서...홧김에..."

 

 제인의 뻐기는 듯한 설명을 듣고 있던 바비 포츠가 더듬더듬 말했다.

 

 "범행 사실을 인정하셨군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증인이 되어 줄겁니다."

 

 리스본이 그 점을 짚자 포츠는 갑자기 흉폭해져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변호사! 변호사를 대동하지 않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거요!"

 

 그레이스는 남자를 단번에 제압하고는 그를 한심하단 듯 바라보며 미란다 원칙을 읊기 시작했다. 제인은 그 옆에서 특유의-범인들의 부아를 돋구는 전형적인 약올리는-말투로 감정조절장애라도 있으신가 본데, 감옥에서 몇 년 구르다 보면 자연히 나아질 걸요, 하고 조잘거렸다. 제인에게 달려들려는 포츠를 제지한 후 리스본과 힘을 합쳐 근처에 대기시켜놓은 경찰차에 그를 태운 릭스비가 조와 제인에게 소리쳤다.

 

 "사무실로 가요! case-closed 피자 먹어야죠."

 

 조가 그런 릭스비에게 자신의 몰골을 좀 보고 이야기하라는 듯이 자신을 가리켰다. 그도 그럴것이 조는 쫄딱 젖어 도저히 차에 탈 수가 없었다. 차 시트가 모조리 물에 젖어서 쭈글거리게 되는 것을 감수할 것이 아닌 이상 말이다.
 릭스비는 '그럼 늦게라도 와요. 치즈 피자 몇 조각은 남겨둘테니깐'하고 덧붙이고는 리스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뒤로하고, 일단 물의 무게 탓에 무거워진 양복 재킷을 벗었지만 상황은 그대로였다. 진한 색상의 와이셔츠를 입었기 때문에 딱 달라붙은 것이 덜 민망해서 다행이었다. 이 꼴을 어떻게 수습한담, 하고 고민에 빠진 조의 옆에서 조와 같이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하고 있던 제인이 클럽 건물 쪽으로 고개를 까닥이며 눈짓했다. 조가 그를 쳐다보니 제인이 한 손으로 젖어버린 곱슬머리를 털며 말했다.

 

 "따라와."

 

*


 파토가 난 파티의 잔해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인파를 비집고 용케 파티의 호스트를 찾아낸 제인은 그를 구슬려 여벌의 옷을 부탁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멍해있던 호스트는 제인의 구렁이 담 넘어가듯 청산유수같은 설득에 어렵지 않게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행히도 클럽 건물의 고용인들 전용 건물에는 웨이터를 위한 여벌의 양복 바지와 상의가 상비되어있었기에 개중에 사이즈가 맞는 것을 일단 골라 입고 나중에 다시 갖다주기로 약속한 그들은 건물 열쇠를 받아들고 락커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여벌옷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조의 물음에 제인이 메, 하는 특유의 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 서빙하던 사람들 중에 자기하고 안 맞는 사이즈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꽤 있길래 찍어본 것뿐이야. 그래도 예상이 맞아떨어져서 다행이지 뭐."

 

 그렇게 말하며 락커룸의 문을 연 제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음..."

 

 탈의실이 따로 없이 탁 트인 락커룸의 구조를 본 제인이 의미모를 신음성을 내었다. 한때나마 친밀했던-친밀하다 못해 서로의 성감대 등에 대해 속속들이 알기까지 하는-사이였던지라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함께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이 넉살좋은 제인으로서도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곤란함을 감추지 못하는 제인의 심정을 눈치챈 것인지 조가 먼저 라커룸 안으로 들어서며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어서 갈아입죠. 그대로 있다간 단단히 감기에 걸릴 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먼저 바지를 벗기 시작하는 조의 태도에 오히려 머쓱해진 제인은 괜히 의식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후회를 약간 느끼며 재킷을 천천히 벗었다.
 텅 빈 락커룸 안은 을씨년스러웠다. 미비한 조명 시설 탓에 간헐적으로 깜박이는 조명은 얼음처럼 차가운 빛을 뿌렸고 제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들 하고 떨었다. 제인은 문득 락커룸 한쪽 전면에 붙어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 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무람없이 옷을 훌렁훌렁 벗고 옷을 갈아입는 조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몰래 훔쳐보는 제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아까 자신과 포츠가 환담을 나누고 있을 때의 조의 시선을 눈치챈 탓이었다. 사실 그의 시선을 느꼈기에 물리쳐도 되었을 포츠의 희롱을 받아들인 감도 없잖아 있었다는 것을 제인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할 때의 마음 속에서 불쑥 올라온 망설임을 의식하고 나니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도 더욱 생각이 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CBI에 들어간 이유는 레드존을 잡기 위해서였잖아.
 제인은 자신에게 되뇌었다. 조에 대한 감정이 잔류하여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그 자신에게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레드존에 대한 집착 때문에 조와의 관계에 소홀했고, 화가 난 조의 이별 통보를 받은 것도 자신이었다. 말하자면 귀책 사유는 자신에게 있었기에 지금 와서 만회하고 싶다고 해서, 되돌리고 싶다고 해서 되돌려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몸뿐인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것뿐이었다. 제인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손을 재게 놀려 옷을 벗었다. 속옷까지 푹 젖은 하의는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기에 일단 상의부터 벗기로 한 제인은 되도록이면 조의 몸뚱이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조끼를 재빨리 벗고 와이셔츠의 단추까지 푸른 후 옷장 안에 걸린 와이셔츠를 향해 손을 뻗었다.

 

 "!"

 

 같은 옷걸이를 향해 뻗은 두 사람의 손이 부딪혔다. 무의식중에 서로 등을 돌린 채로 옷을 갈아입고 있느라 몰랐지만 조는 이미 하의는 전부 갈아입은 것인지 까만 웨이터용 정장 바지를 입고 상의는 벗은 채였다. 생각에 잠겨있느라 옷을 빨리 갈아입지 못한 제인이 여전히 젖은 상의와 하의를 걸친 상황이라는 걸 파악한 조가 먼저 손을 뒤로 물렸다.

 

 "먼저 입으십쇼."
 "-아, 고마워."

 

 조의 말에 제인이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며 옷걸이를 집어들어 젖은 셔츠를 벗고 하얀 와이셔츠를 걸쳤다. 그 모습을 곁눈으로 보고 있던 조는 계속 서있는 것에 지친 듯 락커들 사이에 놓인 길고 네모난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고 나서는 굳이 몰래 훔쳐보지 않겠다는 것처럼 대놓고 제인을 바라보기 시작한 조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던 제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단추를 잠그는 손이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여 단추가 제대로 꿰어지지 않는 것을 조는 놓치지 않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뭘 참을 수 없었는지는 조도 잘 몰랐다-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조는 제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뭘 그렇게 의식하는 겁니까?"

 

 찌르는 듯 날카로운 조의 말에 제인의 손이 멈추었다.

 

 "하하...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목소리는 쾌활했지만 제인 자신의 손이 멈췄다는 사실을 제인도, 조도 알아차리고 있었다. 제인이 급히 다시 손을 움직여 단추를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며 한숨을 쉰 조는 드물게 화가 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차인 건 난데, 왜 당신이 그렇게 동요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거듭 노력했지만 단추는 손아귀에서 도망가기라도 하듯 제대로 채워지지가 않았다. 제인은 단추를 똑바로 채우는 것은 포기하고 락커 한 편에 기대었다. 힘없이 몸을 기대는 것에 제인의 무게에 눌린 양철 락커가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었다.

 

 "헤어지자고 그런 건 너잖아."

 

 눈에 띄게 꺼져들어가는 듯 나직한 목소리. 눈을 내리깔고 입을 굳게 다문 제인의 표정에 한편으론 안타까움을 느끼는 조였지만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래요. 헤어지자고 말한 건 접니다. 하지만 그 상황으로 몰아간 건 당신이라는 걸 잘 알텐데요."
 "알지."

 

 신랄하기까지 한 조의 말에 제인은 더욱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소의 철면피같이 낯짝이 두꺼운 제인은 온데간데없었다. 조의 앞에 있는 건 검지손가락으로 누르면 푹푹 들어가버릴 것같은 푸딩같은 남자뿐이었다. 세상에, 푸딩같은 제인이라니! 전혀 제인답지 않은 그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난 조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제기랄,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처연한 표정의 제인을 당장이라도 품에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간신히 억누르는 대신에 조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이 경우엔 내가 피해자란 말입니다!"

 

 조의 기세에 눌린 제인은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어깨를 편 제인이 마주 소리쳤다.

 

 "뭘 잘했다고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너라고 뭐 다른 줄 아나 본데, 전혀 그렇지 않거든? 아까까지만 해도 처음보는 여자랑 놀아났던 주제에!"

 

 피해자는 무슨, 하고 중얼거리는 제인에게 조가 항변했다.

 

 "그건 수사때문에 그런 거잖습니까! 게다가 놀아났다니요. 놀아난 건 당신이죠!"
 "여자랑 아주 사이가 좋아보이더구만 뭘!"
 "당신도 범죄자따위가 당신 엉덩이를 주물거리게 냅뒀잖아요!"
 "누군 수사하는 중 아니었나? 나도 그 놈 낚으려고 그런 거거든?"
 "허 참, 굳이 당신 몸을 바쳐가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내가 보는 걸 다 알면서도, 아니 내가 그 모습을 보니까 더욱 보란듯이 시시덕댄건 당신 아닙니까!"
 "참내, 보란듯 시시덕댄건 너잖아? 그러고보니 너 나랑 헤어진 다음부터는 금발 여자만 보면 헤벌레해서 달려들더라? 아까 그 여자도 금발이었고, 전에 릭스비랑 셋이서 스트립 클럽에 갔을 때도 금발 스트리퍼한테만 팁을 더 지불했었지 아마? 다른 여자들보다 가슴도 작았는데 말이지!"
 "하! 그 스트립 클럽에 가서 스트리퍼도 아니고 기도를 꼬신 당신은 그럼 뭡니까?"

 

 진지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로를 헐뜯는 성토장으로 변해버렸다. 아까 전의 애틋한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조와 제인은 열이 잔뜩 받은 채로 서로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삽시간에 조는-제인의 말에 따르면-금발 백인 여자만 보면 환장을 하는 색마로 몰려버렸고 간간이 내뱉는 조의 해명은 변명으로 치부되어버렸다. 제인도 역시-조의 말에 따르면-근육질 남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방탕하고 엉덩이 가벼운 게이가 되어버렸음은 물론이다(조는 이게 모함이 아닌 것만 같다는 생각은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진흙탕 싸움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말다툼의 대미는 역시 제인이 장식했다.

 

 "어차피 나랑 헤어져도 나 닮은 여자밖에 못 만날 거면서!"

 

 그 말을 들은 조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자마자 실수했다는 것을 자각한 제인은 조가 정말로 화가 났다는 것을 감지하고 아차 싶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몇 발짝 가다 못해 락커가 등에 부딪혔고 제인은 조의 주먹이 날아올 것을 대비해 눈을 꼭 감았다.
 쾅!
 요란한 소리가 제인의 귀 바로 옆에서 울렸다. 순간적으로 눈을 더욱 질끈 감았던 제인은 기다리고 있던 통증이 느껴지지 않자 살며시 눈을 떠 소리가 울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조의 주먹이 자리하고 있는 락커가 형편없이 찌그러져 있었다. 저 주먹이 자신의 면상에 내리꽃혔다면 멍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조."

 

 조가 겁먹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인을 바라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당신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그게 무슨-하고 물으려던 제인의 입을 조의 입이 막았다. 조가 제인의 입술을 집어삼키듯이 난폭한 키스를 하는 것에 몇 번 반항같지도 않은 반항을 하던 제인은 곧 씩 미소지으며 조의 허리를 끌어안고 적극적으로 그 키스에 답했다.
 몇 분 간 이어진 키스가 가까스로 끝나고 입을 뗀 두 사람의 입술 모두 서로의 타액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길게 이어진 키스에 탈진한 제인이 머리를 뒤쪽으로 기대고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했다.

 

 "...미안해."

 

 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인이 계속해서 말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야."
 "사과치고는 참 성의가 없군요."

 

 조가 투덜거렸다. 제인이 피식 웃었다. 입가에 가득 묻은 타액을 닦아내던 조는 갑자기 키스를 퍼부은 것이 민망해진 듯 제인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저도 죄송합니다."
 "뭐가?"
 "몸 좋은 남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고 해서요."

 

 조의 말에 제인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사과할 필요 없어."

 

 조가 묻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제인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난 정말로 몸 좋은 남자를 좋아하거든."

 

 제인의 말에 벙찐 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제인이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건데, 아까 너가 수영장에 뛰어들었을 때 진짜 멋있었다구."

 

 꼭 제임스 본드 같았어, 라고 익살스럽게 말하는 제인에게 조는 웃음기라곤 하나도 없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 우리 다시 사귀는 겁니까?"

 

 조가 직구를 던지는 것에 제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를 잠시 바라보다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입담이 늘었네."
 "제 앞에 있는 누구 덕분이죠. 이렇게 확언을 받아놓지 않으면 또 어떤 핑계를 대서 빠져나갈지 모르거든요."

 

 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 제인은 생각에 잠겼다. 그와 다시 사귄다 해도 지난번과 같은 이유로 또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제인은 잘 알고 있었다. 레드존에 대한 그 자신의 집착은 이미 그 자신조차 어찌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와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제인은 락커룸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워 조를 향해 다가가 그의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그래."

 

 결국엔 제인은 이성보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선택을 하고 말았다. 자신이 갈등했다는 사실에 대해 조에게 미안해진 제인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작게 말했다.

 

 "이번엔 나도 잘해볼테니까."

 

 그 말을 들은 조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제인을 꼭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화가 완전히 다 풀려버렸다는 것을 제인이 눈치채도록 하기 싫었기 때문에 그를 안아주는 대신 제인의 젖은 곱슬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당신만 잘하면 됩니다. 그나저나, 제 몸때문에 다시 사귀는 건 아니겠죠?"
 "아니거든!"

 

 곧바로 대꾸했으나, 스스로도 찔렸는지 '그 이유가 아예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말이야'라고 중얼거리던 제인이 말했다.

 

 "아 진짜, 말발이 너무 느니까 수줍은 맛이 없어졌어."

 

 입가에 약한 미소를 띠고 계속해서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기는 조에게 제인이 불평했다. 그러나 불평도 잠시, 제인은 조의 허리에 올리고 있던 손을 꼼지락거리며 조가 입은 바짓자락을 간질이더니 끈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보니 너...안에 팬티 안입었지?"

 

 락커룸에서 하는 거 스릴넘칠 거 같지 않아? 라고 조의 귓가에 속삭이는 제인에게 조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했다가 들켰다간 후폭풍이 장난아닐 겁니다."
 "하긴 그렇지?"

 

 일을 치르다가 들키기라도 하면-조와 제인의 체면은 둘째치고 CBI의 위명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점을 상기한 제인은 입맛을 다시며 락커룸에서의 박진감넘치는 섹스를 단념했다.

 

 "대신 집에 가는 길에 콘돔사서 갑시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콘돔을 사러 가자는 말을 하는 조를 다시 한번 휘둥그레진 눈으로 올려다본 제인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로 투덜거렸다.

 

 "진짜 너무 능숙해졌다니깐."
 "다 당신한테 배운거라니까요."

 

 그렇게 말한 조는 제인의 이마에 쪽 하고 뽀뽀를 해주곤 다시 말했다.

 

 "빨리 옷 입고 집에 갑시다."

 

-fin-

 

'Mentalist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제인]Love&Peace  (0) 2013.12.13
[조제인]Kiss kiss kiss  (0) 2013.12.13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