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인/레드존제인

 

 

 전날 실컷 음주를 한 덕분에 오전 내내 숙면을 취할 계획이었던 리스본은 누군가가 문을 부서져라 쿵쿵 두들겨대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대문을 열었다.

 

 "?...제인? 어쩐 일이야?"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른 사람 사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몰아붙이는, 이기적인 제인이다. 숙면을 방해당한 고통으로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리스본은 제인이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상기하고는 간신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제인, 지금은 별로 적절하지 못한 순간인 것 같으니 아예 점심 때 만나는 건 어때?"

 

 '나는 잠을 더 자고 싶단 말이닷!'을 극도로 우아하게 순화시킨 말이었다. 리스본이 그렇게까지 나오는 데에서야 제인도 한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리스본의 실룩이는 미간과 잔뜩 힘이 들어간 주먹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지금의 리스본을 건드리는 자는 분명히 호되게 당할 것이 눈에 뻔히 보였으니까.

 

 근처 카페에서 앉아 차 한 잔을 시키고 잡지 한 권 한 권을 자세히 정독한 후에야 리스본이 간신히 인간의 몰골을 하고 제인이 있는 카페에 도착했다. 더 이상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데에 이골이 난 제인은 산책을 제안했다.
 근처 공원을 걸으며 리스본이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천하의 패트릭 제인이 연애상담 따윌 하려고 날 꼭두새벽부터 깨운 건 아닌 것 같고."

 

 '연애상담'이란 말에 저도 모르게 흠칫 하는 기색을 드러낼 뻔 한 제인은 얼버무리는 듯 한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언젠간 리스본한테도 조와의 관계를 말하긴 해야 할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제법 날카롭게 질문을 던지는 제인이었다. 제 발에 저려 사실을 실토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리스본이 괜히 자타공인 제인의 보모 역할을 지난 몇 년 간 해온 것이 아니었다.

 

 "네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졸도한 후에 13일 동안 원인 불명으로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거 말이야? 그냥 말 그대로의 일이야. 우린 정말로 네 걱정을 많이 했다고, 제인."

 

 제인이 레드존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것을 안 순간 CBI전체는 기밀 보안 태세로 들어갔었다. 그가 사라진 아이스크림 가게는 말 그대로 CBI의 앞마당이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은 위치였다. 그런 장소에서 CBI의 수사 고문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노출되기라도 한다면...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3주에 걸친 기간 동안 제인이 납치되었다가 트라우마로 정신 병동에 입원한 것을 아는 이들은 CBI내부의 최측근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없었으며 보안도 유례없이 잘 유지되어왔다. 이렇게 된 김에 리스본은 제인이 모든 것을 스스로 기억해내기 전까지는 그를 섣불리 자극하여 기억을 되살리려고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사건을 제인이 기억해내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취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제인은 리스본의 그런 암중의 노력을 모두 수포로 돌려버리겠다는 듯 여지없이 수상한 점을 느끼고는 그에게서 드물게 발휘되는 행동력을 발휘하여 리스본에게 쳐들어왔다. 리스본은 이 순간만 잘 넘기리라 다짐하며 진실된 표정을 지어 보이려 노력했다.
 제인은 싱글거리며 웃었다.

 

 "왜 그렇게 웃는 거야?"
 "날 속이려 하지 마, 리스본. 너희들이 뭘 숨기고 있는 건 이미 알고 있다고. 문제는 내가 너희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건데, 난 지금 바로 알아낼 생각이거든."

 

 리스본이 발뺌하려 입만 벌렸는데 제인은 검지를 홰홰 저으며 말했다.

 

 "에에~나한테 거짓말을 하려고 하다니, 리스본 나쁜 아이가 되었구나!"

 

 그러고는 전화기를 꺼내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네가 안 말해주면 나 루더 국장한테 전화할거지롱~"

 

 리스본은 그 순간 만큼은 제인이 다시 기억상실에 걸렸으면 싶다는 음험한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리스본은 제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인, 난 너를 진심으로 걱정해. 그렇지만 네가 무슨 말을 하던지, 난 너에게 말해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 신변상에 무슨 일이 있기는 했다는 거군."
 "그래, 무슨 일이 있기는 했지만, 난 네가 기억해내기 전까지는 그 일을 알려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하지만 내가 사이비 영매 짓을 하면서 돌아다녔을 때, 내가 지금의 삶을 기억해내지 못하자 너는 내게 레드존의 표식을 보여줬지. 내가 다시 그러길 바라?"
 
 리스본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봐, 제인, 그건 정말...미안하게 되었어. 하지만, 그때의 행동도, 지금 내가 하는 행동도 나는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 사실만 알아둬."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고서는 등을 돌려 공원을 빠져 나갔다. 제인은 그녀의 등을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모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