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인/레드존제인

 

 

 침실 안으로 들어간 조는 일단 이물질이 묻었다고 의심되는 침대 위의 시트며 이불을 싹 다 걷어서 빨래 통에 던져 넣었다. 세탁실을 나오며 벽에 걸린 시계를 문득 보는데 열한 시가 조금 넘었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모닝섹스를 한 셈이다. 첫 섹스는 좀 더 은밀한 저녁나절에 좋은 분위기 속에서 하고 싶었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까 전의 섹스를 돌이켜보았다.
 ...조는 제인에게 아주 짐승처럼 박아댄 자신을 떠올리고는 약간 안색이 붉어졌다. 남자가 자신의 뒤를 여는 모습이 역겨울 법도 한데 그 남자가 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엉덩이에 서슴없이 달라붙어 자신의 성기를 넣고 흔들다니. 게다가 마지막에는 제인의 안에 그냥 사정해버리지 않았는가.
 조가 다시 불끈거리려는 아들을 진정시키고 거실로 가자 제인이 맨몸에 시트를 두른 채 조를 향해 웃고 있다. 그 모습이 또 섹시하면서도 귀엽다. 수그러들락말락하던 아들이 다시 서버릴 것만 같은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제인이 시트 속에 파묻힌 채로 조를 향해 손을 내밀고 이리로 오라는 듯 까딱까딱 해댄다.
 조가 순순히 자기한테 오자 이제는 자기 옆에 앉으라는 듯 소파를 팡팡 친다. 조가 앉자 제인이 조의 팔뚝에 달라붙어 그의 단단한 근육을 살살 만지는 느낌이 부드럽다.

 

 "뭐라도 좀 먹어야지 않겠습니까?"

 

 조가 말하자 제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근데 어제부터 나한테 자꾸 뭘 먹이려는 거 같은데, 날 살찌워서 잡아먹으려고?"

 

 조가 말했다.

 

 "제인은 병원에 입원한 후부터 영 먹질 못했어요. 거울을 보면 알겠지만 살이 눈에 띄게 빠졌습니다."

 

 그렇구나...라고 제인이 멍하게 대꾸했다.

 

 조는 격한 섹스의 후유증으로 좀처럼 움직이질 못하는 제인을 욕실로 데려다 주었다. 제인은 엉덩이에서 흘러내리는 정액을 빼내면서 다음부터는 꼭 콘돔을 지참한 채로 섹스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조 바닥에 앉아서 뜨거운 물로 한참동안 목욕을 한 후에야 제인은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지만 간신히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욕조 가장자리, 수건걸이, 세면대를 차례로 잡고 겨우 똑바로 일어선 제인은 조가 말한 대로 자신이 정말 살이 빠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거울을 바라보았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턱살이 조금 얇아진 것 같기는 했다. 이런 정도의 변화를 알아채다니 조는 역시 예리한 관찰력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불규칙한 식습관에도 좀처럼 줄지 않던 몸무게가 줄었다니,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한 것인지 감이 조금 잡히는 듯 했다.
 어제 제인은 오랜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차만 줄창 마셔대며 수첩에 글씨를 끼적이며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과연 어떤 지뢰가 숨어 있을지 추론했다. 성과는 미미했지만 일단 조가 흘린 말에서 레드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알았으니 다소 범위를 좁힐 수는 있었다.
 그가 골머리를 썩이며 그가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 본 결과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신나게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주립병원에서 자신이 깨어났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높은 것은 납치. 상식적으로 그런 붐비는 장소에서, 그것도 CBI건물 바로 앞에서 CBI소속 수사 고문을 납치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었지만, 레드존은 CBI 수사본부에도 첩자를 두어서 한 팀 전원을 죽여 버린 전적도 있었던 터라 배제하기 어려운 선택지였다.
 또한 웬만한 정신적 충격은 거의 흘려버릴 수 있는 자신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릴 정도였으니, 그동안 어떤 형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종의 학대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단순한 육체적 학대라면 리스본이 그에게 말하기 꺼려할 까닭이 없으니, 생각하기도 싫지만 섹슈얼 하라스먼트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으니, 섣불리 단정 짓지는 않기로 했다.
 제인은 그 다음으로, 조에 관해 생각했다. 섹스는 만족스러웠고, 조가 겉으로는 냉정하지만 사실은 배려심있고 관계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남자라는 것을 제인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조에게도 자신은 레드존 문제에 대해서 조에게 털어놓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조는 자신을 제 옆에 가두기보다는, 자신이 레드존의 희미한 흔적을 쫓아가는 것에 필사적으로 따라올 것이다. 마치 같은 노선 상에서 운행하는 열차처럼. 차이점은 자신은 폭주하는 급행열차라는 것이고, 조는 일반 열차라는 것이다. 영원히 같은 곳을 보고 달리나 결코 합치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조 또한 상처받는다. 레드존에 의해서든, 아니면 자신의 방치에 의해서든.
 그렇다면 조와 사귀겠다는 결정을 내린 자체가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너무 오랜만에 맛보는 따스한 포옹에 취해서, 다신은 정말로 끔찍하게 살해당한 가족마저 망각해버린 걸까? 지금도 코 끝에는 사건이 발생한 당일, 불안하고 초조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니겠지 아니겠지 아닐거야 그럴 리 없어 라고 눈 앞에 보이는 그 모든 것과 자신이 항상 신뢰해왔던 직감을 깡그리 무시하고 스스로에게 잘못된 세뇌를 하며 문을 열었을 때 훅 끼쳐왔던 진한 피비린내의 환각이 느껴진다. 저도 모르게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그것이 거짓 감각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안도감을 느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릎이 꺾여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은 이 무거운 죄책감은 자신과 레드존 사이의 일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될 때까지 천로역정의 순례자처럼 감내하며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일 것이다. 다만 행선지가 천국이 아닌 지옥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 여정에서 제인에게 부여된 이 십자가는 온전히 자신만의 것,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고독을 벗 삼아 그 무게를 인 채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가는 것이 오직 자신만이 상처받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조를 위해서야, 라고 제인은 되뇌었다.
 맨몸으로 욕실 안에서 너무 오래 서있었던 제인은 조그맣게 기침을 하고 살짝 떨리는 몸을 큰 수건으로 닦고는 조가 어느 새인가 문 안쪽으로 갖다 준 속옷과 바지, 와이셔츠를 걸쳤다. 다시 한 번 거울을 보며 방긋 웃어 보인 후 욕실을 나갔다.

 

 조는 제인이 길고 긴 시간 목욕을 하는 동안 조는 어제 제인이 한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제인에게 키스를 했다는 사실. 여기서 제인이 거짓말을 지어낼 이유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조에게는 전혀 그랬던 기억이 없다. 그 날 술에 어지간히 취했음이 분명하다.
 그의 생각은 혹시라도, 자신이 제인에게 레드존에 관한 뭔가를 실수로 말해버리지 않았을까 라는 쪽으로 흘러갔다. 아니길 바랐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인은 술자리가 있었던 다음날 곧바로 리스본에게 찾아갔다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돌아온 후 수첩과 노트를 챙겨나갔으며, 그리고 새벽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었다.
 조는 욕실 쪽을 힐끗 보았다. 욕실에서는 여전히 물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조는 소파 앞 탁자에 놓인 제인의 양복 재킷 안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집어넣었다. 수첩이 손에 잡혔다. 조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욕실 쪽의 동태를 살피고는 수첩을 꺼내어 빠르게 넘겨보았다. 어지럽게 여러 단어가 적힌 중간 중간에 생각의 전개 구조로 보이는 듯 한 화살표가 죽죽 그어져있었고, 맨 마지막으로 글씨가 적힌 페이지에는 펜으로 세게 내리눌러 엉망으로 무언가를 덮어버린 것이 보였다. 조는 뒷면을 천장 전등에 비춰보았다. 워낙 짙게 덮어버려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집중하여 자세히 보자 'sexual'이라고 고민하여 적은 것이 보였다. 직전 장에는 'harassment' 'violence'등이 적힌 것으로 미루어보아, 제인은 기억은 아직 되찾지 못했지만 추론 상으로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이 분명했다.
 조는 제인이 욕실을 나오기 전 원래 꽂혀있던 방향으로 수첩을 다시 양복 안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제인은 아직도 안에서 목욕을 하는 중이다. 적어도 들려오기에는 그랬다. 조는 제인이 샤워를 마친 후에 함께 식사를 하러 가기로 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옷을 챙겨 입었다.
 소파에 앉아 제인이 나오길 기다리며 조는 생각했다. 제인은 자신이 알아낸 결과를 결코 조와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나마 그가 무언가를 함께 공유하는 것은 리스본이 유일했다. 그러나 레드존에 관해서는 별개다. 또한 이 정도의 사안임에야, 당연히 조에게도, 그리고 리스본에게도 털어놓을 리 만무했다. 조는 제인을 사랑하고, 제인을 아끼며, 제인이 위험하다면 무엇이건 무릅쓰고 그에게로 달려가서 그를 상처 입히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막으려고 힘쓸 것이다. 또한 이번처럼 제인에게 이상이 생기더라도 자신이 버텨낼 수 있는 한 그의 곁에서 자리할 것이다. 그러나 제인의 일 순위는 언제가 되었든 레드존일 것이다. 레드존이 모습을 드러내면 피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언제든지 그의 뒤를 쫓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것이다.
 그는 조금 슬펐지만, 현재의 제인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아니면, 만족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절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제인이 옷을 다 갖춰 입은 채 싱그러운 미소를 띠며 문을 열고 욕실 바깥으로 나왔다. 조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갈까요?"
 "응."

 

 둘은 집을 나섰다.

 

(Love&Affair THE END)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