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존/레존/마존/짐존/악마는프라다를입는다AU

 

 바깥에서 도노반이 소란을 가라앉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수많은 인기척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와서 뭐라고 주의를 주는 것도 어색해진 셜록은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존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그 딴에는 바깥에 들리지 않게 하려는 시도였고, 다행히도 그 시도는 보답을 받아 셜록의 목소리는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어쨌든 존, 오늘 아침에는 내가 실례를 했어."

 

 그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사과...하고 싶군."

 

 존의 눈이 동그래졌다. 셜록이 설마 아침에 잠깐 벌어졌던 해프닝에 대해 사과를 하리라고는 짐작치 못했던 것이다. 사과, 라는 말에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존은 흡족하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뭘요. 제가 더 죄송합니다."

 

 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존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렇게 일이 스무스하게 잘 풀릴 줄이야, 라고 생각했다.
 그때 셜록의 눈이 잠깐 동안 가늘어지며 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워낙 찰나처럼 스쳐지나간 눈길이라 존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없는 동안 주어진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농땡이를 피운 것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군."

 

 차가운 셜록의 음성에 풀리려던 긴장의 끈을 다시금 잡아매고 존은 '네?'라고 반문했다.

 

 "게다가 직속 상사의 뒷담화를 하다니, 가중 처벌 감이지, 안 그런가?"

 

 셜록은 존과 레스트레이드가 나눈 대화의 내용에 대해서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으나 차마 그 오해를 풀어주기에는 내용이 낯부끄러운 것이어서 존은 입을 다물었다. 일부분은 상사의 뒷담화에 속했으므로 존은 어떻게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생각하고 셜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행동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셜록은 주머니 안쪽에서 두 번 접힌 서류 몇 장을 꺼내더니 존에게 툭 던졌다. 책상 끄트머리에 안착한 그 서류를 존은 집어들고 펴보았다.

 

 "브루스...파딩턴 살인 사건...?"
 "말 그대로야."

 

 셜록이 인위적인 미소를 존에게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 사건에 대해 수사를 해와. 어떤 수단을 써서든. 기한은 내일까지."
 "내일까지요? 저기-"

 

 화들짝 놀라 당황하며 뭐라 항변하려는 존에게 셜록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상."

 

 그 한 마디에 존은 거의 반자동으로 몸을 돌려 편집장실을 나왔다. 아니,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편집장실을 나오자 안의 상황을 훔쳐듣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문 앞에 몰려있다가 존의 안색이 시커매진 것을 애도하며 순식간에 흩어져 슬슬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존은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 찾기 위해 고개를 여기저기 돌려보았으나 안에서 한 대화를 이미 들은 사람들은 존과 눈을 맞추는 것을 거부하며 잽싸게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

 

 문제의 브루스 파딩턴 살인 사건은 터진 지가 한참이 지난 사건이었지만 정당 간의 갈등 문제와 섹스 스캔들이 얽혀 있는지라 워낙 사안이 중대하고 민감하기 그지없어 아직까지도 이슈가 되고 있는 미해결 사건이었다. 그런 사건을 존 단독으로 수사하라니, 이건 사표내고 나가란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사건 자료는 모두 인계받았고 하나하나 읽어보았지만, 존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관련 자료랍시고 건네받은 자료는 너무나 양이 방대했다. 개중에는 이게 브루스 파딩턴 사건과 관련되어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알 수가 없는 자료도 포함되어 있어 사무실 구석에 빼곡히 쌓인 자료들을 읽는 존의 마음은 시간이 갈 수록 무거워지기만 했다.

 사건의 수사를 이유로 외근을 허락받은 존은 막막한 마음에 일단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도 택시도 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던 존은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차라리 이 참에 관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매일같이 자신을 데리고 다니며 잘난 척하고 갈구는 것을 낙으로 삼는 상사에게 끌려다니는 것도 이만하면 많이 참아준 것이 아닐까? 존은 사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라."
 "존? 무슨 일이야. 근무 중 아니었어?"
 "나...음, 지금 다니는 곳 그만둘까 싶어서. 어떻게 생각해?"

 

 사라는 잠시 말이 없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

 

 만류할 줄 알았던 사라가 의외로 쉽게 동의하는 것에 존이 오히려 당황하여 말했다.

 

 "뭐?"
 "그러라고. 그러려고 생각하고 나한테 전화한 거 아니야?"
 "아...나는 자기가 반대할 줄 알았거든."

 

 수화기 너머로 사라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있지, 자기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그 잡지사에 들어간 후로 나한테 소홀해졌어. 매일이 일이고 근무 중에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 못 보내다시피하는데다가, 항상 편집장이랑 붙어다니고, 퇴근하고서도 그 사람 문자 하나하나에 쩔쩔매잖아. 그 사람은 여자 친구 없대? 왜 애꿎은 당신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 거야?"

 

 쌓아놓은 불만이 많았는지 그녀의 토로는 한참 이어졌다. 어느새 존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말을 듣느라 멍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쿨하고 어떤 경우에는 존보다 더욱 호탕하기까지 한 그녀가 이 정도로 그에 대한 불평을 쌓아두고 있었던 것이 놀라워서였다.

 

 "오, 사라."

 

 사라의 말이 끝나고 존이 말했다.

 

 "정말 미안해."
 "..."
 "새 직장에 적응하는게 힘들답시고 당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어."
 "..."
 "용서해 줘."

 

 한참 말이 없던 그녀가 뭐라 입을 여는 순간 웬 키 큰 형체가 다가와 존에게 부딪혔다. 그 때문에 휴대폰을 손에서 놓친 존은 사라의 말을 듣지 못했다.


 황급히 휴대폰을 주우려 고개를 내린 존은 휴대폰이 하필이면 더러운 웅덩이에 푹 잠긴 것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몸을 숙인 그의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이런. 죄송합니다."

 

 고개를 들고 따지려던 존은 두 가지 점 때문에 그에게 삿대질을 할 수가 없었다. 첫 번째는 그가 의외로 순순히 사과를 했다는 것, 그리고 그의 키가 존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컸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셜록도 그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키였는데 그는 그것보다도 더 큰 키였던 것이었다.
 그는 보드라워 보이는 다갈색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 딱 보기에도 최고급 수제 양복으로 보이는 옷을 걸치고 손에는 검정 장우산을 들고 있었다. 우산의 손잡이를 흘낏 살핀 존은 그 우산 또한 매우 비싼 브랜드의 것임을 간파하고 어쩐지 움츠러들었다. 딱히 돈이며 권력에 아첨하거나 구애되지 않는 존이라 해도 부자 앞에서는 기가 죽는 한낱 서민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존은 그에게서 풍겨나오는 기품과 위압감에 숙이고 들어가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하지만...그건 회사에서 구비해준 전화라...곤란하군요."
 "제가 하나 사드릴 테니, 걱정마세요."

 

 휴대폰의 배상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약간 기분이 상한 존은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으나 코 끝에 찬 것이 내려앉는 느낌에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

 

 첫눈이었다. 첫눈답지 않게 거칠게 눈을 쏟아내는 하늘은 금세 그늘진 듯 어두워졌다. 존이 황급히 우산을 찾으려 가방을 뒤적이는데 그의 위로 더욱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문제의 남자가 우산을 펼쳐 그의 위에 씌운 것이었다.
 존은 왜 낯선 남자가 서슴없이 자기에게 우산을 씌워주는지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아...감사합니다."
 "뭘요. 셜록의 어시스턴트신데, 이렇게 해드려야 마땅하죠."

 

 남자의 말에 존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존에게 셜록을 언급하며 접근하는 작자들 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 없었다. 존이 의심스런 눈길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싱긋 웃으며 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자, 존."

 

 그는 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존이 흠칫 하는 것을 미묘하게 즐거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지금 당신을 비추고 있는 CCTV는 총 네 개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호텔의 입구에 달린 저것과, 도로 저편의 가로등에 달린 저것, 당신 좌측의 공중전화 옆의 신호등에 달린 저것, 그리고 우측의, 제가 가리키는 저것. 그런데 말이죠, 제가 이렇게-"

 

 그는 손을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자 시간차를 두고 각 CCTV들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해 다른 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존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남자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시겠어요?"

 

 그 말과 때를 맞추어 그들 앞으로 검은색의 세단 하나가 굴러와 멈춰섰다. 존은 차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존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당당하게 차로 걸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존의 뒤를 따라 차에 올라탄 그는 편안한 자세로 등받이에 기댄 후 말했다.

 

 "당신이 브루스 파딩턴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이런, 존이 속으로 혀를 츳 하고 찼다. 자기가 사건을 맡은 것이 전날 오후이고 지금은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저녁인데 벌써 그런 하잘 것 없는 소문이 관련자들의 귀에 들어간 것 같았다. 지금 자신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가하여 차에 태운 이 남자 또한 브루스 파딩턴 사건의 조사를 지연시키려는 수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며 존은 절대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다졌다. 백미러로 존의 얼굴을 살핀 남자가 말했다.

 

 "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당신의 수사를 방해하려는 게 아니예요."

 

 그는 문장의 끝을 살짝 끌다가 말을 맺었다.

 

 "오히려 도와주려는 거지요."

 

 그의 말을 들은 존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일면식도 없는 남자가 왜 자신을 도와주려고 한단 말인가? 게다가 어떻게?
 남자는 앞좌석의 수납함을 열어 안에 미리 준비해놓은 듯한 파일을 꺼내어 존에게 슬쩍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가 내미는 파일을 받아 겉표지를 펼친 존은 안에 든 종이에 쓰인 내용을 읽고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써 노력했다.
 파일에 든 서류는 '브루스 파딩턴 사건 개요'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그 사건의 상세한 전모를 담고 있는 것이 분명한 그 서류를 빠르게 훑다가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존은 고개를 쳐들었다.
 존은 한 템포 쉬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것을 제게 보여주는 의도가 뭡니까."

 

 분명 놀랐을 것이 분명한데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존의 담대함에 그의 눈에 이채가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가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셜록의 비서, 아니 어시스턴트지요."

 

 확정적인 말투에 그가 자신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존은 고개를 더욱 빳빳이 쳐들고 그래서 뭐?라는 태도를 보였다. 앞좌석의 남자가 말했다.

 

 "셜록 홈즈에게 가장 가까이 접해 있는 사람은 당신이지요. 당신이 그에 관해 한 가지 도움을 준다면...기꺼이 상당한 액수의 금전적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위험천만한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입꼬리를 쓰윽 끌어올리는 그에게 존이 말했다.

 

 "그 도움이란 건 뭐지요?"
 "정보. 그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사건을 수사한다면 어떤 사건을 수사하는지, 그런-사소한 정보말입니다."

 

 존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과 강하게 빛나는 존의 눈빛이 백미러에서 마주쳤다. 찬찬히 그를 살피던 존이 물었다.

 

 "당신 뭡니까?"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