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존/레존/마존/짐존/악마는프라다를입는다AU

 

 양 팔뚝에 스타벅스 커피-대개는 카푸치노다. 카푸치노에 질렸을 때는 카페 라테, 설탕은 반만, 샷은 추가, 아주 뜨겁게, 제기랄, 이걸 다 외우고 있는 내가 증오스러워!라고 존은 속엣말을 했다-를 한 판 가득 짊어진 존 왓슨은 누구에게든, 그게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대가를 수반할지라도, '제발 나 좀 살려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존은 금방이라도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려는 자신의 정신줄을 붙잡고 되뇌었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상상이란 걸 난 잘 알지.'

 

 왜냐면 그의 상사가 바로 악마이니까.

 

*

 

 한 달 전, 동네의 작은 병원에 근무하던 존과 사라가 비밀리에 사내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고, 병원장은 건전한 근무 분위기 조성이라는 이유-대체 뭔 개뼉다구같은 소리인지-를 들어 존과 사라. 둘 중 한 명의 퇴사를 권유했다. 존은 명색이 남자가 되어가지고서 여자 친구의 실직을 종용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기세좋게 사표를 쓰고 병원을 박차고 나왔다. 그러나 영국의 실업률 8.4%의 위상을 자랑하는 이 시점에서(게다가 잠재적인 취업 희망자 인구까지 포함하자면 그 비율은 더욱 높을 것이었다) 다소 시기가 늦은 존의 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사라와 동거하는 그는-그래봤자 소파에서 자거나 가끔 사라의 마음이 너그러워지면 에어 매트에서 자는 것이 일상이었지만-무직자로서 오후 늦게까지 빈둥대는 모습을 그녀에게 매일같이 보이는 것이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했던지라 매일 집을 나와 공원에 산책을 가거나 브런치 전문 식당에 죽치고 앉아 이력서를 쓰고 고치고 전송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 존은 공원에서 바르톨로뮤 의학 대학 시절의 동창, 마이크 스탬포드와 재회하게 되었다. 존이 어렵사리 현재 상황을 털어놓자 그가 말했다.

 

 "꼭 의료 계열이나 군대 쪽으로만 알아보지 말라고. 요즘 거기는 나이 어린 친구들-게다가 스펙도 소위 말해서, 쩌는 애들-이 바글바글한 거 몰라?"

 

 그렇게 운을 뗀 그는 S.O.D.(science of deduction; 추론의 과학)라는 범죄 전문 잡지의 인사 담당자의 명함을 주며 말했다.

 

 "이 쪽의 일은 조금 빡센 것만 빼면 자네 전공도 살릴 수 있을 거고, 대우도 나쁘지 않아. 편집장의 어시스턴트를 구하고 있는데-"
 "이 나이에 어시스턴트를 하라고?

 

 어시스턴트라는 말에 난색을 표하는 그에게 스탬포드는 웃으며 덧붙였다.

 

 "말이 어시스턴트지, 하는 직무는 꽤 중대한 편에 속한다네. 그 회사의 잡역부로라도 들어가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자네 그렇게 철없는 소리 하고 있나? 백만 명도 넘는 사람들이 들어가고 싶어 안달을 내는 곳이야. 거기 입사하기 위해서 지원자들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걸?"(나중에 존은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존은 그렇게 인기있는 회사란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며 슬며시 솔깃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스탬포드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그의 마음을 완전히 돌리는데 일조했다.

 

 '그렇게 까다롭게 굴다간 기둥서방 되기 꼭 알맞겠다.'

 

 존은 밑져야 본전, 이라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가기로 했다.

 

*

 

 존은 집으로 간 다음 컴퓨터를 켜고 S.O.D.에 대한 검색을 시작했다.
 S.O.D.는 생긴지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신생 범죄 연감 잡지였지만 마니아(라고 쓰고 범죄 덕후라고 읽는다)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대단했다. '모든 사건을 놓치지 않는다'라는 모토를 내건 채 편집장부터 휘하 에디터들까지 모두 사건 취재를 위해 발로 뛴다는 특이한 잡지였다. 그들이 다루는 분야는 사소한 민사 사건부터 형사 사건, 그리고 미해결 연쇄 살인 사건까지 걸쳐져 있었는데, 딱 봐도 일반적인 사건 보도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며 에디터 하나하나가 사설탐정의 역할도 겸하여 사건의 해결에까지 손을 쓰고 있었다 . 상당히 심각한 사건들도 여럿 다루고 있는 터인지라 편집장 및 사원들의 신상은 철저한 보안에 가려 있었다.
 존은 이런 잡지로도 괜찮은 걸까?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쉬운 처지에 있는 것은 자신이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면접을 보기로 했다.

 

*

 

 다음 날 면접 약속을 잡고 SOD의 본사 건물로 찾아간 존은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에 한번 놀라고, 그 건물에 설치된 최첨단의 보안 시스템-심지어 벽을 타는 침입자들을 막기 위해 버팀목이 될 만한 요소는 전부 없앤 유리로 된 매끈한 외벽까지 갖추고 있었다-에 또 놀랐다. 그리고 인사 담당자의 말에 다시 한번 놀랐다.

 

 "악마의 소굴에 온 걸 환영해요."

 

 뭐라고요? 라고 놀란 기색의 존의 옆에 어느샌가 다가온 곱슬머리의 깐깐하게 생긴 흑인 여자가 인사담당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사람인가요?"

 

 그래, 라고 대답한 인사담당자에게 고개를 끄덕 해보이고는 여자는 존을 어디론가 안내했다.

 

 "나는 샐리 도노반이라고 해요. 편집장님의 '선임' 어시스턴트죠. 원래는 일반 어시스턴트였지만, 선임 어시스턴트였던 그렉 레스트레이드 씨가 형사 사건 부서의 수석 에디터가 되었으니 이젠 내가 선임이죠."

 

 선임 어시스턴트가 일반 어시스턴트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 지 존은 알지 못했으나 그녀의 상당히 자부심에 찬 어조에서 그 직위가 이 세계 내에서는 상당히 알아주는 지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는 존 왓슨이라고 합니다."

 

 간략하게 이름을 밝힌 존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딜 가는 거죠?"
 "뭐긴 뭐예요. 편집장님과 면접을 보는 거죠. 참, 편집장님은 Mr. 홈즈라고 불리는 것보다 이름으로 불리는 걸 좋아하시니 참고해요."

 

 편집장의 성이 홈즈였구나, 라고 생각한 존은 도노반이 그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말했던 내용을 떠올리곤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당장 면접을 본다구요? 거기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는데요."

 

 그녀가 차근히, 그러나 빠르게 설명했다.

 

 "본래는 내가 먼저 면접을 보고, 그 중에서 추려낸 지원자들이 편집장님과 면접을 보게 되죠. 하지만 편집장님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서요. 저번에는 말 한 마디 나눠보시지도 않고 얼굴이 보기 싫다고 탈락시킨 지원자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직접 면접을 보시기로 하셨답니다."
 "준비를 전혀 못했는데..."
 "그건 걱정마요. 일반적인 면접이랑은 분명 다를테니까."

 

 존은 그녀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편집장이란 사람이 어지간히 괴팍하고 자기 멋대로인 성격이구나, 라고 짐작했다. 도노반은 어느 방 문 앞에 다다른 후 존의 위아래를 쓱 살피더니 존에 손에 들린 낡고 해진 서류가방을 보더니 휙 빼앗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런 거 갖고 들어가면 분석당하기 딱 좋아요."

 

 책 잡히는 것이 아니라, 분석을 당한다고? 존을 도노반에게 방금 한 말의 의미를 물어보고 싶었으나 '편집장님이 기다리신다고요' 라고 조급하게 그의 등을 떠미는 도노반의 기세에 얼떨결에 이력서 한 장만 손에 든 채 편집장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존은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도대체 그 대단한 편집장이 누군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 '편집장'이라는 사람이 젊은 청년에 불과하다는 것에 그는 속으로 매우 당황했다. 다른 사람이 또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해보았지만, 이 방 안에는 자신과 눈 앞의 남자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 남자가 편집장이라는 게 확실했다. 존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세히 눈 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편집장'은 검은 머리칼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검은색의 고급 수트를 쫙 빼입었으며 와이셔츠의 맨 윗 단추는 푸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의 책상-을 비롯한 방 전체-은 이루 말할 데 없이 더러웠다.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듣도보도 못한 종류의 담배곽이 한쪽에는 수북이 쌓여있었고, 과학실에서나 볼 법한 샬레 접시들 안에는 담뱃재가 그득그득 쌓여있었으며 덕분에 사무실 안에는 담배 연기가 뿌옇게 가득차 있었다. 존은 작게 기침하며 혹시라도 그가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을지에 생각이 미쳐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는 그의 기침소리를 놓치지 않은 듯 거의 필터 끝까지 타들어가는 담배를 마저 세게 빨고는 한 샬레에 비벼 끄고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뒤이어 들어온 도노반 쪽을 흘깃 보니 표정은 구겨져 있었지만 하루 이틀 본 일이 아닌 듯 별다른 놀라움은 표시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담배 연기에 신경을 쓰기보단 손에 노트와 펜을 들고 긴장한 태세로 편집장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기가 어느 정도 빠져나간 후 남자가 말했다.

 

 "뭐야?"

 

 어시스턴트 면접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한 남자에게 도노반이 또박또박 말했다.

 

 "새 어시스턴트 지원자입니다."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남자에게 도노반이 말했다.

 

 "오늘 면접 보시기로 하셨잖아요."
 "오."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 짧게 감탄성을 낸 그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네가 지난 번에 데려온 남자는 정말 영 아니었어. 보는 것만으로도 집중력을 방해하게 생긴 남자였지. 그 어정쩡한 상판이라니. 게다가 그 남자, 앤더슨이었지 아마, 너랑 불륜 관계인 남자잖아? 네가 그동안 엄선했답시고 데려온 사람들 중에 최악이었어."

 초면인 존 왓슨 앞에서도 도노반에게 인신 공격이나 다름없는 혹평을 퍼붓는 모습을 보면서, 아까 전까지 거들먹거리는 태도 탓에 못마땅하게 여겼던 도노반이 불쌍해지는 존이었다.

 

 "너는 이만 나가봐. 이상(That's all)."

 

 남자의 단호한 말에 도노반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아무런 대꾸 없이 방을 나갔다. 그나마 같은 약자 입장인 도노반이 편집장실에서 쫓겨나고, 존은 홀로 사자 앞에 남겨진 하룻강아지같은 기분으로 편집장실에 덩그러니 남았다.
 약 5초 간 남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존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창백한 얼굴과 색이 그닥 달라보이지 않는 투명한 청회색의 눈은 겨울 바람처럼 싸늘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한 입에 삼켜질 것만 같은 분위기에 존은 남몰래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남자는 일으켜세우고 있던 등을 의자에 기대며 짧게 말했다.

 

 "자기 소개."

 

 아! 하며 존은 자신의 보잘것 없어보이는-지금 이 상황에서는 휴지조각만도 못해보였다-이력서를 지저분한 책상 한 귀퉁이에 올려놓았고, 다시 뒷짐을 지고 서서 더듬거리며 열심히 자기 소개를 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지껄여대던 존 왓슨은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꿰뚫는 듯한 시선을 피해 무심코 책상으로 눈길을 돌린 존은 남자의 이름이 셜록 홈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명패를 바라보던 존은 다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손을 모은 채 데스크 위에 놓인 존의 이력서를 눈으로 훑고 있었다. 가지런히 모은 손이 유난히 하얗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 존은 멍하니 그 손을 쳐다보았다.
 셜록이 고개를 불쑥 들었다. 존은 흠칫 하고 자세를 똑바로 했다.

 

 "흠."

 

 셜록이 짧게 신음성을 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나가봐. 이상."

 

 존은 셜록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편집장실을 나와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나가는 그의 머릿속은 단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망.했.다.

 저렇게 차갑기 그지없는 말투였으니, 존은 방금 전 면접에서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역시 전공과 상관이 없으니 곧바로 탈락시킨 것이겠지, 라고 존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아까 자기 소개를 할 때 자신이 치명적인 실수를 했던 것이 분명했다. 내일부터 다시 구직자의 일상으로 복귀하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존이 건물 밖으로 터덜터덜 나가려는 찰나, 뒤에서 누군가 존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 아까의 선임 어시스턴트, 도노반이 보였다. 손을 까딱까딱 하며 그를 부르는 그녀의 제스처에 그는 긴가민가 한 채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채용됬어요."

 

 존은 펄쩍펄쩍 뛰며 어린애처럼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애써 자제하며, 슬쩍 입꼬리만 끌어올린 채 앞서 걷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이후에 근로 착취나 다름없는 고생을 겪게 될 것임을 존이 미리 알았다면 절대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