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존]Call me baby

2013. 12. 13. 02:34 from BBC Sherlock/단편

셜록존/단편

 

 

 "뽑아보게."

 

 존의 어깨 너머로 셜록이 갑자기 휴지곽을 내밀었다. 느긋하게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존이 한발 늦게 반응하며 말했다.

 

 "뭔데?"
 "일단 뽑아보라니까."

 

 두 눈 가득 궁금증을 담은 존에게 셜록이 재촉했다. 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셜록의 행동에 담긴-제 딴에는 심오하다고 주장하는-의미 따위를 짐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것을 존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속편하게 장단을 맞춰주기로 결심한 존은 집요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셜록의 시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티슈상자의 틈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에는 접힌 종이조각들이 가득 들어있었고 서로 부딪히며 종잇장 특유의 가벼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대체 이게 뭐지?
 의문이 한층 증폭되는 가운데 셜록은 존이 집어든 종잇조각을 가져가더니 그것을 펴보고선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정해졌군. '자기'야."

 

 셜록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닭살돋는 호칭에 존은 마신 것도 없는데 사레가 들릴 뻔했다. 말의 내용은 둘째치고,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나 기계적인 어투로 뱉어낼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왕 저런 소리를 입에 담을 거라면 좀더 부드럽고 다정한 어조로 말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파충류처럼 표정이 없는 셜록에게서 할리퀸 소설의 남자주인공같은 어조의 달콤한 밀어가 흘러나오는 건 그것대로 상당히 기괴할 것같았다.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도 존은 당황스러움을 얼굴에서 채 지우지 못한 채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려주겠어?"

 

 셜록은 의외로 순순히 털어놓았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관계가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난 후인데도 그 전과 비교해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의아하게 느껴지더군. 그래서 마이크로프트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했지."

 

 마이크로프트, 라고 언급하는 순간부터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셜록은 평소에는 마이크로프트라면 치를 떨 정도로 질색하면서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마이크로프트에게 의존하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을 한껏 놀려먹으며 그동안 무시당한 만큼의 보복삼아 웃음거리로 만들곤 했다. 그러면 존까지 덩달아 휘말려 피곤해지는 것은 물론이었다.
 존은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부디 틀리길 바라며 셜록의 뒷말을 재촉하듯 올려다보았다.

 

 "그랬더니 마이크로프트가 말하길 서로에 대한 호칭을 좀더 다정한 것으로 바꾸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더군."
 "그래서 그 권고에 따라 행동한 것의 결과가 '자기'인건가?"
 "그렇지. 이제 자네는 날 자기야 라고 불러야 해."

 

 뭔가 정신줄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스트랄하다는 표현이 이런 때에 적절한 것이겠지...하고 넋을 놓을 뻔했지만 존은 간신히 정줄을 잡고 셜록의 일방적인 요구에 반박했다.

 

 "잠깐, 나는 그런 낯부끄럽기 그지없는 호칭으로 자네를 부를 생각이 추호도 없는데. 그것도 제비뽑기로 뽑은 거고. 완전 되는대로 아냐?"
 "'자기'가 맘에 들지 않는 거라면 다른 호칭도 많은데."

 

 존의 불평을 약간 다른 핀트로 받아들여 이해한 것인지 셜록이 휴지곽을 집어들고 거꾸로 뒤집어 테이블 위에 탈탈 털어 안에 든 종이조각들을 쏟아냈다. 그게 아니라! 하고 대꾸하려던 존은 자신이 너무 매몰차게 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순간 멈칫했다. 이왕 장단을 맞추기로 한 김에 조금만 더 맞춰주지 뭐,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존이 당장 쓸데없는 짓 집어치우라며 셜록에게 면박을 주지 않은 이유는 대체 마이크로프트가 제안한 애칭들이라는 것들이 또 얼마나 변태적일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대한 대로,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들고 펴자마자 존의 얼굴이 꾸깃꾸깃 구겨졌다.

 

 "'달링'? 진심이야, 셜록?"
 "아 그거. 레스트레이드가 적극 추천하던데."

 

 상식인이라고 여겼던 레스트레이드마저도 이런 병신미넘치는 애칭 궐기대회 나부랭이에 동참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마 그렉과 마이크로프트가 눈앞에서 서로를 달링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목격했다면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욕과 독설을 일삼았을 셜록은 막상 자기가 그런 애칭을 쓴다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는 듯했다.
 참 낯짝도 두껍지, 하고 혀를 차며 다른 종이조각들을 들추어보던 존은 점점 가관이 되어가는 애칭들에 눈살을 찌푸렸다.

 

 "허니비, 곰탱이, 애기, 꿀빵...대체 누가 이런...누가 이런 걸 주워섬긴..."
 "마이크로프트와 레스트레이드 뿐아니라 앤더슨과 도노반, 몰리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지. 심지어 안시아도 거들더군."

 

 얼굴이 빨개진 채로 말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더듬거리는 존을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셜록이 들고 있던 종이조각 하나를 건넸다.

 

 "참고로 내가 적은 것도 몇 개 있다네."

 

 셜록이 고안한 애칭이라면 그나마 좀 덜 오글거리려나, 싶어 받아든 종잇조각에는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것들이 적혀있었다.

 

 "'오빠'?"

 

 존은 온몸으로 너 미쳤어, 셜록? 하고 외치고 있었다. 존의 격한 거부반응에 셜록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주일 전에 침실에서는 날 잘도 그렇게 불렀잖은가."
 "...이잇! 그거야 네가 강요했기 때문이잖아! 너...넣어주지 않겠다고 별 말도 안되는 협박을 늘어놓으면서!"

 

 얼굴을 붉히면서 언성을 높이는 존에게 셜록은 얄미우리만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말투로 대답했다.

 

 "그리고 자네는 자네의 말마따나 말도 안되는 그 협박에 굴복했지. 그래서 마음에 들어할 줄 알았는데."
 "마음에 들기는 개뿔!"

 

 대화는 점점 수렁으로 빨려들어갔다.

 

 "'암퇘지'? 이건 도대체 누가 쓴 거야? 미친 거야?"
 "응? 이건 누가 쓴 건지 기억이 안 나는걸. 야드의 직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열성적으로 적어서 협조해주었기 때문에 누가 뭘 썼는지는 잘 모르겠군. 그런데 이건 자네가 날 부를 때 적절한 호칭은 아닌 것 같군. 그 반대라면 모를까."
 "뭣이!"

 

 그럼 난 셜록을 수퇘지라고 불러야 하는건가...하고 멍하니 생각하던 존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이러면 안돼, 존. 이런 정신나간 짓거리에 동참해서는 안된다고! 비록 상식과는 전혀 거리가 먼 셜록과 사귀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식인 포지션을 포기하기는 싫었다.
 그나저나 야드의 직원들도 다 안다 이거지. 앞으로 사건 자문에 동행할 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개망신이 따로 없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며 힙없이 종잇조각을 펴던 존이 동작을 멈추었다.

 

 <여보>

 

 이거 설마 간접적인 청혼은 아니겠지... 존은 얼굴이 다시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얼른 그 종이조각을 다시 접어 쪽지 무더기 속으로 던졌다. 셜록은 혼자 울그락불그락 하고 있는 존을 흘끗 보더니 다시 쪽지에 쓰인 애칭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집중했다.
 존이 왜 가만히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한 그 모습에 존은 약간 안심하면서도 어딘지 아주 아주 아주 약간은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때문에 약간은 뾰족해진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애칭 하나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법석이야? 참나..."
 "아까도 말했잖나. 어째 연인 관계인데도 변한 게 하나 없는 것같단 말이야."

 

 왠지 그의 목소리에 투정기가 어려 있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존은 의아해하며 대꾸했다.

 

 "변한게 없긴 뭐가 없어?"
 "그럼 자네가 말해봐. 우리의 현 상태가 섹스파트너에 가까운지 연인에 가까운지."

 

 언뜻 들으면 시비조로 착각할 수도 있는 퉁명스런 어조에 발끈하려던 존이었지만 셜록의 말에 내포된 진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셜록이 연애에 관해서 완전히 무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나름대로는 생각이 많은 것같았다. 무언가 가시적인 증표가 필요하다는 맥락에서 생각해낸 고육지책이겠지 싶었다. 존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서로 사랑하잖아."

 

 셜록의 창백한 뺨이 미미하게 홍조를 띠는 것을 보고 존도 따라서 미소지었다. 흠흠, 하고 가볍게 헛기침을 하던 셜록은 자세를 고쳐 앉기도 하고 어깨를 들썩거리기도 하고 손가락을 가만 놔두질 못하고 꿈질꿈질거리더니 영 간지럽다는 표정을 억누르며 테이블 위에 온통 흩뿌려져있는 종잇조각들을 주섬주섬 치우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도 치우네, 하고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존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근데 어젠가 그저껜가 티슈 새로 갖다놓았던거로 기억하는데. 벌써 다 썼어?"

 

 질문을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비참했다. 사나이 존 왓슨, 이제 주부 다 됐구나...
 한편 셜록은 한참 머뭇거리다 질문에 대답했다.

 

 "다 썼어."
 "뭐하느라?"

 

 존이 물어오는 것에 셜록은 눈썹을 한 번 까딱 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 거 없네."

 

 그답지않게 명확한 대답을 얼버무리는 뉘앙스에서 존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다음 순간 존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실마리 비슷한 것이 스쳐지나갔다. 그건 바로 존이 단기근무로 나가는 병원에서의 야근때문에 셜록이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금욕기간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존의 안면근육이 묘하게 씰룩거리는 것을 몰래 뜯어보던 셜록이 조그맣게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는 바가 맞을 거야."

 

 셜록은 존의 얼굴이 다시 시뻘개지도록 내버려두고 얼른 거실을 나섰다. 그래! 항상 부끄러움은 존 왓슨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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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존짐]유예

2013. 12. 13. 02:32 from BBC Sherlock/단편

셜존짐/멋진징조들크로스오버/천사시리즈

 

 

"...이 조그만 흠이, 글쎄 그걸 흠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름다움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소만, 하여튼 그것이 이 지상의 불완전성의 상징처럼 나에게 충격을 주는구려."
...(중략)...
"...지금의 저처럼 어중간한 정신적 성숙 단계에 이른 사람들에게 삶은 슬픈 소유물에 지나지 않아요. 차라리 제가 더 약하거나 맹목적이라면 삶은 행복일 수 있겠죠. 제가 만일 더 강하다면 삶은 행복일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 저의 상태를 보면 죽기에 가장 알맞는 것같아요."
"당신은 죽음을 맛볼 필요가 없는 천국에나 어울리는 사람이오!"

-나다니엘 호손, <반점> 에서 발췌

 

 

느긋한 오후였다. 방 안은 조용했고, 창가에서는 부드러운 햇빛이 들이치고 있었다. 이따금 산들바람이 들이치며 후텁지근한 공기를 몰아낼 뿐.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존은 조그만 손으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아침에 끓였던 차는 식은 지 오래였으나, 정오를 넘긴 시간에는 오히려 미지근한 찻물이 더 개운한 감이 있었다. 거리낌없이 미지근한 차를 호로록 삼키며 존은 셜록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셜록은 오랜만에 잠을 자고 있었다. 존의 체구에 딱 맞는 자그마한 사이즈의 침대에 그렇지 않아도 키가 큰 셜록이 몸을 오그리고 누워 있는 모습은 퍽 우스웠다. 게다가 등 뒤의 날개뼈가 있어야 할 부분에서는 정말로 날개가 뻗어나와서 마치 그것이 별개의 생물이라도 되는 듯이 까딱거리고 있었다.
 항상 의식적으로 날개를 접고 있던 셜록이 날개를 편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차피 일반적인 인간들은 천사와 악마의 날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펴고 다녀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때마침 셜록의 곁에는 그 날개를 꿰뚫어볼 수 있는 존이 있었기 때문에 셜록은 존을 위해 상시 날개를 숨긴 채로 다니곤 했다.
 그러나 잠이 들고 나니 그런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도 무색하게 날개는 오랜만에 숨통이 트인다는 듯이 제멋대로 뻗어나와 얼마 없는 바닥의 공간을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셜록의 날개 깃털은 꽤 깔끔하게 정리된 편이었지만 방바닥의 자리를 꾸역꾸역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꼭 깃털 뭉치가 한 무더기 쌓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존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조용히 덮고 셜록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존이 침대 귀퉁이에 걸터앉자 이미 과중한 무게를 이고 있던 침대가 작게 삐걱거렸다. 존은 낡은 매트리스의 출렁임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셜록의 호흡이 고른 것을 확인한 후 펼쳐진 채로 늘어져 있는 셜록의 날개로 손을 뻗었다. 무방비하게 활짝 펴진 모양으로 바닥까지 점령하고 있던 검은 날개는 존의 손길이 와닿자 놀란 토끼처럼 퍼덕거리다가 이내 얌전하게 존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존은 손가락으로 빗질을 하는 것처럼 셜록의 깃털을 결에 맞추어 쓰다듬어주었다. 날개는 고로롱거리는 고양이처럼 종종 움찔움찔거리며 존의 접촉을 기분좋게 음미했다.
 그렇게 한가로이 셜록의 날개를 만지작거리던 존은 문득 무언가가 자신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을 발견했다. 다 자란 깃털 아래에 막 새로 돋아올라오눈 어린 깃털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뿐이었다면 딱히 시선이 갈 이유도 없었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띤 색깔이었다.
 흰색.
 타락 천사의 날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고, 있어서도 안될 순백의 흰 깃털이 새까만 깃털들 사이에서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존의 얼굴에서는 천천히 미소가 사라졌다.
 착잡한 표정으로 그 깃털을 응시하던 존의 머릿속에서는 얼마 전의 만남이 떠오르고 있었다.

 

*

 

 "난 셜록의 친구야."

 

 남자는 존의 '누구세요?'라는 질문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마치 너무도 익숙해진 거짓말을 되짚어 재생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존이 대답하지 않고 남자를 빤히 쳐다보자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변명조로 말했다.

 

 "그래그래, 사실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지. 하지만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구."

 

 간접적으로 처음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인정해버리고 만 사내는, 그렇다고 해서 인상을 찌푸린다던가 하는 초보적인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 존이 의심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준비된 또다른 거짓말을 뻔뻔스레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쉽사리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거리껴하지도 않는 남자. 그에게서는 처음부터 줄곧 꺼림칙한 분위기가 풍겨나왔고, 존은 그것을 피부로 확실히 느끼고 있었으며, 눈 앞의 남자도 존이 받은 인상을 눈치챈 것같았다.
 남자는 미소지으며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 오늘 우리가 이렇게 굳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이유는 딱히 너한테 위해를 끼치려고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구. 네가 셜록과 각별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깐."

 

 셜록과 각별하지 않았다면 위해를 끼치고 남았을 것이라는 말을 돌려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존이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로 서있자 남자는 곧장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너 그건 알고 있니."

"뭘 말이예요?"

 

 존이 그제야 입을 열어 묻자 남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유."

 

 존의 눈이 커졌다. 남자는 부러 깜짝 놀란 체를 하며 말했다.

 

 "몰랐구나. 너에 대해 오해할 뻔했네. 난 네가 일부러 셜록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줄로만 알았는데."
 "제가 왜 셜록을 붙잡는다는 거죠? 셜록은 자기가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요."
 "그거야, 셜록은 말이지...너도 알다시피, 냉정하고 감수성따위는 약에 쓸래도 없을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속내는 그 누구보다도 여리잖아. 웬만한 낭만주의자보다도 인연에 얽매이는게 그녀석인걸."

 

 남자는 한 박자 말을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자기가 널 떠나면 금방 죽을 걸 아는데, 셜록이 널 두고 가버릴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마음착한 녀석이 말이야, 하고 칭찬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뉘앙스로 남자가 중얼거리는 동안 존은 놀란 마음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입술이 저도 모르게 떨려왔다. 셜록이 자신의 옆에 머물렀기에, 금방이라도 세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자신의 몸 상태가 호전되었던 건가. 그래서였나. 이제야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가 명쾌하게 풀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존의 머릿속 생각의 흐름은 더욱 엉켜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셜록을 보내주어야 하나?
 하지만...
 살고 싶어.
 셜록을 끝내 붙들어놓더라도, 더 오래오래 살고 싶어.
 셜록과 함께 살아있고 싶어...
 존의 마음 속에서 휘돌아 맴도는 생각의 끈을 잡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입을 열었다.

 

 "셜록이 네 곁에 남아주길 원할 거야. 네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지."

 

 남자는 위로하듯 조곤조곤 말했다.

 

 "물론 셜록도 그걸 싫어하진 않을 거고. 어차피 셜록은 영겁의 시간을 가진 천사이기 때문에 몇십년 정도를 너에게 할애하는 정도는 유희에 불과할테니까."

 

 유희, 라는 말이 아프게 존을 찔렀다. 남자가 말하는 대로, 셜록이 자신의 곁에 머물러주는 것은 단시간의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는 일일까.
 존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지켜보며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가 본래 수명보다 오래 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남자와 존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눈 하나 깜박 하지 않고 말했다.

 

 "누군가가 너를 대신해서 죽는 거야."

 

 존의 눈빛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딘가의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확실한 건,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그 사람의 수명은 일분 일초 깎이고 있다는 거지. 본디 누려야 할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너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셜록은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을 위해 돌아가야 할 수도꼭지를 너한테 억지로 돌리고 있는거지. 네가 살아나가는 만큼 그 사람은 죽어가고 있는거고."

 

 고작 열 살을 겨우 넘긴 소년에게 자신의 존재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발판삼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몹시도 잔혹한 일이었다. 물론 남자는 고의적으로 그 점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눈 앞에서 생명체가 자신의 하루를 연장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꼴을 구경하는 것만한 재미는 없을 것이라고, 모리어티는 생각했다.

 하지만 속마음과는 정반대로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어내며 모리어티는 혼란에 빠져든 소년을 다독였다.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주렴."

 

 속이 시원하도록 낄낄거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모리어티는 다정하게 말했다.

 

 "아직 어린 너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세상은 세심한 계획에 의거해서 조밀하게 짜여진 채로 돌아가는 거란다. 천사도 악마도 세계의 안정을 위해서 바삐 일하는 거고. 한 명이라도 씨실과 날실의 자리에서 엇나가게 되면 모두의 삶이 위태로워져."

 

 모리어티는 부드럽게 선고했다.

 

 "그게 운명의 섭리라는 거야."

 

 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를 위해서라고 생각해."

 

 모리어티의 말이 끝나고서도 존은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지루해진 모리어티가 그럼 이만, 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존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언제죠?"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질문이었으나 모리어티는 금세 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3개월 정도, 유예를 줄까."
 "아뇨."

 

 존이 빠르게 말했다.

 

 "일주일. 그정도면 충분해요."

 

 여기에는 모리어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겨우 일주일? 네 생을 마감하는 시간으로서 부족하지 않겠어?"

 

 존이 쓸쓸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전 어려요. 제가 죽는다고 해봤자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여파도 얼마 없을 거고요. 저보다 중요한 사람들도 자기에게 얼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고 죽어가잖아요? 일주일이면...괜찮은 시간이죠."

 

 존이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저는 그래도 준비할 시간이라도 있으니까...축복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눈 앞에서 한없이 선한 고백을 하는 소년에게야, 모리어티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아무리 끔찍한 악이라도 천연의 순수 앞에서는 그 위명을 잃는 법. 모리어티도 마찬가지였다.
 잠깐동안 말을 잃고 소년을 바라보던 모리어티는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그럼, 하고 짧게 소년을 일별하고 날아가버렸다. 더이상 그 선량함을 눈앞에 두고 견뎌내기 힘들다는 듯이, 모리어티는 도망치고 만 것이다.

 

*

 

 그것이 나흘 전이었다.
 한참동안 날개깃을 만지작거리던 존은 갓 머리를 내민 하얀 깃털을 조심스럽게 뽑아냈다. 덜 여물어 말랑한 깃털은 생각보다 쉽게 뽑혀져나왔다. 깃털이 뽑히고 남은 구멍은 발갛게 물들었을 뿐이었다.
 존은 다시 주위의 검정 깃털을 모아 어린 깃털이 뽑혀나온 자리를 감추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깃털이 가지런하게 덮힌 그 모습을 보고, 존은 결국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셜록의 날개에 몸을 엎드렸다. 혹시라도 셜록이 잠에서 깨어날세라 조용히 숨죽여 우는 존을 위로하는 것처럼 날개가 푹신하게 존을 감쌌다. 그 따스한 느낌에 존의 눈에선 더욱 눈물이 흘러나왔다.

 

 울다 지친 존이 겨우 잠이 들고 나서야 셜록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날개에 푹 파묻힌 채로 불쌍하게 잠이 든 어린 소년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셜록은, 존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를 들어올려 침대에 누였다.
 서툴게 이불을 끌어올려 소년의 몸을 덮고, 셜록은 침대맡에 서서 조용히 존을 응시했다. 잠시 후 셜록은 결심을 한듯 입을 굳게 다물고 창가에 섰다. 창틀을 넘어가 위태하게 올라선 셜록은 날개를 활짝 펴고 몇 번 펄럭이다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아니, 모리어티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존과의 일대일 대면에서 꼴사납게 도망치는 꼴을 보이고 만 모리어티는 고작 열 살을 겨우 넘긴 꼬맹이에게 패퇴한 것과 같은 충격에 빠져 혹시라도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지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감시를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전혀 그답지 않은 주의력과 세심함이라고, 모리어티라는 사신의 진면목을 아는 악마라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그래, 전혀 나답지 않은 일이지.'

 

 젠장, 하고 입술을 깨물던 모리어티는 발로 허공을 몇 번 짓이겼다. 겨우 꼬마 따위에게 밀리고 만 것은 분명히 자신의 실책이었다. 일개 인간 아이가 그토록 착한 심성을 갖고 있으리라고 어느 악마가 감히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존에게 당하고 만 모리어티는 한 가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존의 영혼은 이미 천사의 반열에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순수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셜록을 만남으로써 그 승격이 늦추어졌다. 위편에서 그토록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는 희생심과 삶에 대한 적은 미련에도 불구하고 셜록의 존재가 곁에 있음으로써 존을 지상에 붙들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미녀의 희고 고운 뺨에 자리한 손바닥 모양의 붉은 반점처럼.
 존에게는 그 아이의 존재가 지속되는 것의 책임이 오로지 존 자신의 것으로만 여겨지도록 말해놓았지만, 그 점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저 셜록을 다른 곳으로 따돌리고 나서 영혼을 데려가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담을 수도 없는 것이니 아쉬운 입맛을 다실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셜록을 바라보았다. 셜록은 분명 그의 형에게로 가고 있는 것이겠지. 곤란활 때마다 형에게 달려가는 것은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로서는 다른 수가 없을 테니까 한 수 물러주는 셈 치고 내버려두고 있다. 따지고 보면, 셜록의 의외로 약한 면모를 목격하면서 모리어티의 방심이 초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자신과 만난 이후로 암중으로 갖은 노력을 하고 실패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지나치게 마음이 풀어졌던 것이다. 적그리스도에게도 뒤지지 않는 위엄과 그동안 인간들을 상대로 수많은 승리를 거둔 성과에 낙관한 나머지 오만한 태도를 견지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셜록으로 하여금 최고의 패를 뽑아내도록 한 것.
 지나치게 게임을 스릴있게 끌어나가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자충수를 두고 만 것이 아닐까.
 패를 보여주고 만 도박사처럼 전전긍긍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낯설 뿐 아니라 치욕적이었다. 스스로에게 들으라는 듯이 혀를 요란하게 차던 모리어티는 그러나 자신이 띄운 승부수를 믿기로 했다.
 모리어티는 셜록이 지옥으로 떠난 것을 확인하고 존의 집 창가로 다가갔다. 눈이 부어오른 채로 새근새근 잘도 자는 아이. 숨을 쉴 때마다 가냘프게 들썩거리는 여린 어깨. 당장에라도 저 아이의 얇디얇은 육체의 덧없는 껍데기를 찢어내면 그 속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을 영혼을 그 근원의 정수까지 남김없이 뽑아내고 싶다는 유혹에 몸서리가 쳐졌다. 얼마나 맛있을까! 어리고 야들야들한 소년의 천연스럽기 그지없는 선량한 영혼의 맛이란! 생각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하지만 마지막 자존심이 그를 말렸다. 도둑놈도 아니고 자는 사람의 영혼을 몰래 도적질하는 건 영 모리어티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궁지에 몰리더라도 말이다.
 과연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을 도울 수 있을까?
 천사라면 모를까, 같이 타락한 처지의 악마라면 승산은 이쪽에 있다. 비록 위세가 당당한 7대 악마의 수좌에 있다고는 하나 그림 리퍼인 자신에게 우선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리어티는 그제야 안심하고 키들키들 웃었다.
 그래, 이 승부의 승리는 자신의 것이다.
 상대가 고작 악마인 이상.
 천사라면 모를까...
 후후 웃던 모리어티는 조용히 마음 속으로 축배를 들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승리의 예감을 즐겼다.

 

 

*

 

 안시아가 문을 두들겼다.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아니,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이라고 해도 좋았다.
 잠시 기다리던 안시아는 망설임없이 곧장 문을 박차고 열었다.

 

 "바알제불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침대에 번데기마냥 웅크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덩어리에서 한동안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죽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다가 겨우 음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들렸다.

 

 "돌려보내."

 

 자고 있는 거 안 보이냐...등등의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안시아는 눈썹 하나 까딱 안하고 덩어리에서 흘러나오는 불평불만이 끝나길 기다렸다. 겨우 중얼거림이 잦아들자 안시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돌려보내죠."

 

 곧바로 돌아서는 안시아의 뒤로 덩어리가 멈칫했다.

 

 "뭔가 이상한데."
 "뭐가 말이십니까?"
 "네가 순순히 방문객을 돌려보낼리가 없는데 말이지."

 

 안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끙끙대던 덩어리가 뒤척이다가 물었다.

 

 "누군데?"

 

 돌아선 안시아가 아무런 감정의 기복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시던 분이요."

 

 그 대답을 곱씹던 덩어리가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갑자기 꿈틀꿈틀거리더니 인간의 형태로 변했다. 적갈색의 머리를 뒤로 넘기고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중년의 남자로 탈바꿈한 남자, 마이크로프트가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진작에 말했어야지!"

 

 당장에 뛰쳐나가려는 마이크로프트를 안시아가 제지했다.

 

 "왜!"
 "옷은 입고 가셔야죠. 또 동생분께 한소리 들으실려구요?"

 

 막 인간의 모습을 취한 마이크로프트가 홀딱 벗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시아의 침착한 제지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로프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녀석이 제발로 들어올리가 없는데 이렇게 순순히 지옥으로 돌아온 걸 보면 뻔한게 아니겠나? 뭔가 거리끼는 게 있거나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지."

 

 형의 맨몸을 보는 것쯤이야 충분히 참아줘야지 않겠어! 하고 개소리를 지껄이던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기다리는 곳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뒤에서 안시아가 무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것쯤은 덤이다.

 

*

 

 "오랜만이구나 동생아!"

 

 응접실에 앉아있던 셜록은 요란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질색하며 쏘아붙이기를 기대하며 만면에 웃음을 띤 채로 셜록을 쳐다보았으나 셜록은 예상외로 눈 하나 깜짝 않고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야 형. 어서 와서 앉지 그래."

 

 아주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자리에 앉으라는 둥 이야기를 해대는 셜록을 보고 실망한 마이크로프트는 쳇 하고 혀를 차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마이크로프트의 몸 위에 한순간에 옷이 나타났다. 깔끔한 양복을 갖춰입은 마이크로프트는 투덜거리며 셜록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반응이 시원찮구나. 재미없어."
 "별로. 웬 천사랑 비역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내게 들켰을 때 이미 형의 알몸을 지겹도록 봐서 말이야."

 

 셜록의 지적에 움찔하던 마이크로프트가 항변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사는 치르지도 못했단다! 갑자기 밀고들어온 너 때문에!"
 "아 그러셔."
"그리고 그 천사는 내 눈앞에서 쪼르라니 도망가버렸지! 맛있게 먹어치우기 직전이었는데 말이다. 위쪽에서 도통 얼굴을 보일 기미도 없고..."

 "그렇게 아쉬워?"

 "그럼 아쉽고 말고."


 "그럼 내가 사과할 겸, 그 천사랑 다시 얼굴을 마주할 기회를 주지."

 

 셜록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흠칫 하며 팔짱을 꼈다. 응접실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조용히 머리를 굴리던 마이크로프트가 생각을 정리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네가 정말 나 잘되라고 그런 일을 제안할 성격이 아니란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셜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셜록을 바라보던 마이크로프트가 질문했다.

 

 "무슨 일인데?"
 "웬 악마가 인간의 영혼을 탐내고 있거든."

 

 마이크로프트는 부러 하품을 하며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야 메피스토펠레스 이전에도 숱하게 있었던 일이지. 위쪽에서는 엄금하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천사들의 눈을 피해 인간의 영혼 하나쯤 슬쩍하는 건 일도 아닌데-아니, 거의 본업이라고 봐도 무방하지-왜 하필 네가 나서는 거냐?"

 

 셜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로 마이크로프트를 응시하는 셜록을 보고 마이크로프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하긴 네가 나한테까지 찾아온 이유가 그것때문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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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존짐/멋진징조들크로스오버/천사시리즈

 

 

 "존, 차tea."

 

 문이 삐걱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셜록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셜록이 존의 집에 거처한지도-달리 말하자면, 백수마냥 눌러붙은지도 이제 근 2년째였다. 셜록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음식물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지만 차만큼은 상당히 즐기는 편이었기 때문에 애꿎은 존을 전용 티포트마냥 부려먹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토록 시켜댄 덕분에 존이 차를 끓이는 솜씨는 나날이 일취월장해서, 이제는 존이 탄 차가 아니면 도저히 입에 맞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때문에 셜록은 존이 있든 없든 차를 타달라고 땡깡을 부려대기 일쑤였고, 존은 '제발 나 없을 땐 셜록이 타 마시란 말이예요!' '손이 없어요 발이 없어요!'하고 불평하면서도 꼬박꼬박 셜록의 차를 타주는, 그런 평온하기 그지없는 생활이 지속되고 있었다.

 

 "존-"

 

 오늘따라 이상하게 대꾸 한 마디 없는 존에게 셜록이 다시 한번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재촉하려는 찰나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문틈을 파고들어오는 가느다랗고 음습한 한기처럼 소름끼치는 그 무엇.
 그때 열린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순간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안온한 기운이 삽시간에 밀려나고 뼛골이 시려오는 한기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그와 동시에 여태까지 침대에서 뒹굴고 있던 셜록은 오후 늦게까지 빈둥대고 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렵하게 몸을 일으켰다. 마치 적의 침입을 알아차린 고양이가 털을 세우고 가르랑거리는 것처럼, 셜록은 아까까지와 다르게 똑바른 자세로 일어나 뒤로 천천히 돌아섰다.

 

 "누구지?"

 

 차분한 목소리가 허공을 때렸다. 어느새 방 안의 공기를 장악한 채로 문가에 조용히 서 있던 남자는 셜록의 물음에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며 자못 정중한 태도로 인사했다.

 

 "모리어티라고 해. 반가워!"

 

 옷차림에 비하자면 무척이나 경망스러운 목소리였다. 단정한 빛깔의 은회색 수트를 깔끔하게 걸치고 머리를 넘긴 남자는 검은 눈으로 셜록을 응시하며 기분나쁘게 킥킥거렸다. 차림새는 몹시 우아한 데 비해 입가엔 비실대는 기묘한 웃음이 맺혀있는 그 간극에 묘하게 기분이 나빠진 셜록은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려 했으나 냉정하게 표정을 관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아아, 이야기나 좀 할까 하고."
 "난 그쪽과 할 이야기가 없어."

 

 셜록이 차갑게 대꾸하며 축객령을 내리려는 순간 모리어티가 눈을 위험하게 번득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난 할 이야기가 있는걸?"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강조되어 울려퍼지는 것같은 느낌에 셜록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의 이름을 모리어티라고 밝힌 남자는 셜록의 반응을 지켜보겠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웃고 있었다. 둘 사이에 침묵과 함께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윽고 셜록이 말했다.

 

 "이야기를 듣는 정도라면 거절할 이유는 없지."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깐."

 

 히죽대는 모리어티에게 셜록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족은 빼고 용건만 이야기하고 당장 나가도록 해."

 

 모리어티는 놀랐다는 듯이 눈을 깜박거리더니 과장된 제스처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워, 워, 워우. 사나우셔라. 저기, 너무한거 아냐? 그쪽은 나한테 고맙다고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인데, 조금이라도 상냥하게 굴어보라구."

 

 셜록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지?"

 

 모리어티가 킬킬 웃더니 속삭였다.

 

 "마이크로프트가 이제까지 널 내버려둔 거, 아니 찾아내지 못한 거 말이야, 우연이라고 생각해?"
 "..."

 

 이제는 셜록이 놀랄 차례였다. 애써 동요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저쪽은 이미 셜록이 자신의 마이크로프트에 대한 언급 때문에 당황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표정을 숨겨보았자 발악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모리어티는 셜록을 향해 즐겁다는 듯 미소지으며 약을 올리듯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손님에 대한 예의를 갖출 생각이 들어?"

 

 예를 들며 의자를 갖춘다던가, 하고 얄밉게 덧붙이는 그에게 셜록은 마음대로 하시지, 라고 말하며 그 자신도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았다.
 의자에 앉은 모리어티는 다리를 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때 널 처음 보고 깜짝 놀랐지 뭐야. 넌 그때 이 집의 소년과 환담을 나누고 있어서 몰랐겠지만 말이야."

 

 그때?
 모리어티가 말하는 그때가 언제인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셜록은 일단 잠자코 듣고 있기로 했다. 마음내키는 대로 떠들어대는 것을 참고 봐주는 것은 불쾌한 일임에 틀림없었지만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휘둘리는 꼴을 보이는 것은 더한 치욕일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동생이 내 앞에 나타나다니! 생각도 못했지. 그 내로라하는 악마의 동생이 어정쩡한 반푼이 천사인 것도 모자라서 겨우 타락천사 하나한테 어쩔 줄 모르고 휘둘린다는게 인상깊어서인지 언뜻 수배서만 본 것뿐인데도 바로 알겠더라고."

 

 어정쩡, 반푼이...물론, 일부러 도발하기 위해 고른 단어가 분명했다. 그는 대놓고 셜록의 표정을 관찰하며 보란 듯이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의혹은 확실하게 판명되었다.
 셜록은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 위를 몇 번 톡톡 소리가 나게 두들기고서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뭘 말하고 싶은거지? 내가 마이크로프트의 동생이라는 점에 대해서 토론하고 싶은 건 아닐테고."
 "물론 아니지! 사실...부탁이 있거든."

 

 셜록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부탁이라. 네가 내 소재를 마이크로프트에게 알리지 않은 데에 대한 보답을 하라는 뜻인가?"
 "그렇게 받아들여도 무리는 아니지. 그렇지만 여기엔 네가 아직 모르는 뒷사정이 있다고. 그 점에 대해 미리 밝혀도 될까?"
 "빨리 해Make it quick."

 

 본론으로 쉽사리 들어가지 않고 미적대는 모리어티의 말에 노골적으로 피로한 기색을 보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셜록을 바라보며 모리어티가 미소지었다.

 

 "네가 애지중지하는 그 꼬마에 대한 이야기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듣는게 좋을 걸."
 "존?"

 

 셜록은 부러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키워드를 던진다고 해서 바로바로 반응을 보이는 것만큼 우스워 보이는 일도 없을테니까, 이를테면 페이크를 친 셈이었다. 하지만 모리어티는 아랑곳하는 것같지 않았다.

 

 "그래. 네가 그토록 아끼는 선량하고 순수한 소년, 존 해미시 왓슨 말이야."

 

 셜록과 모리어티의 시선이 마주쳤다. 강하게 마주닿은 시선이 날카롭게 서로를 겨누었다. 모리어티는 셜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네가 그 소년과 첫 대면하던 날, 나는 그 소년의 영혼을 수확하기 위해 이 집에 도착해 있었지. 그 귀여운 소년은 말이지, 그때 몹시도 절망에 빠져있었거든. 너도 들었겠지만, 도무지 공감할 수는 없는 하고 많은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말이야..."

 

 모리어티가 뒷말을 흐리는 사이, 셜록이 등을 곧게 펴며 끼어들었다.

 

 "그 애의 영혼을 수확한다니? 그 앤 아직 죽기엔 한참 멀었어."
 "모르는 소리 마."

 

 모리어티의 얼굴에 더욱 진한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일부러 지어낸 안면 근육의 그로테스크한 굴곡에 더 가까웠다.

 

 "너도 몰랐구나? 그 앤 말이지, 가변 수명을 갖고 있더라고."

 

 셜록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아주 잠깐의 정적 후에 셜록이 곧장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가변적 수명이란 건 몹시 드물지. 그림 리퍼Grim Reaper 노릇을 꽤 오래 해왔던 나로서도 직접 접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게다가 그 애에겐 더욱 놀라운 점이 있더라고!"

 

 모리어티가 아리아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듯 외쳤다.

 

 "희망을 갖고 있으면 그 앤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는 거야!"

 

 웃기지? 그따위 희망이 뭐라고-하고 모리어티가 키들키들 웃었다. 셜록이 할 말을 잃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금세 웃기를 그친 모리어티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절망하게 되면, 그만큼 죽음의 시간이 가까워지지. 2년 전 그 날이 바로 그런 경우였고. 거기다가 불치병까지 지니고 있으니, 그때야말로 그 애의 영혼을 수확하기에 딱 적기였는데 말이지..."

 

 아쉬운 듯 뒷말을 흐리는 모리어티에게 정신을 차린 셜록이 물었다.

 

 "병이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병세가 깊어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잠복기로 평생 유지될 줄 알았지...그것까지 의지의 영역으로 미룰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고? 그건...!"

 

 모리어티가 첨언했다.

 

 "의지가 아니라 희망이라고 하더군."

 

 입술을 파들파들 떠는 셜록에게 모리어티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당황해도 나무라지 않아. 비웃지도 않을게. 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놀라서 어쩔 줄 몰랐으니까."

 

 모리어티가 말을 마친 후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셜록은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해주는 이유가 뭐지?"
 "이유? 아, 그거야,"

 

 모리어티가 활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애의 영혼을 내가 먹을 수 있게 협조해달라고."

 

 셜록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꼴사나운 표정으로 모리어티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간신히 제정신이 든 셜록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마!"

"그렇지 않아, 셜록.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니라고. 애초에 그 먹음직스런 영혼에 눈독을 들인 것도 내가 먼저고, 따지고 보면 네가 교활하게 가로채간 거나 다름없지. 게다가...지금 그 애가 그 몸을 하고도 계속해서 살아나가는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 응?"

 

 일부러 잠깐 뜸을 들인 후 모리어티가 천천히 말했다.

 

 "바로 너. 네가 그 원인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나는 그때 그 애의 영혼을 무사히 수확해서 돌아갔을테고. 너는 너대로 네 갈 길을 갔겠지. 그 애는 운명의 흐름에 따른 평온한 안식으로 회귀했을 거고 말이야."

 

 느릿한 속삭임 끝에 모리어티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나는 네가 금방 그 애한테 질려서 떠날 줄 알았어. 아무리 봐도 재미라곤 없는 애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네가 떠나는 대로 그 애가 다시 절망에 빠지면 적당히 영혼을 데려가려고 했단 말이지. 그런데 2년씩이나 버티고 있어도 너는 좀처럼 떠날 기미도 안 보이고, 그 애는 너한테 매달려서 잘만 살아가고 있고 말이야. 이건 정말 내 계산 밖이었다구. 알아? 이거 칭찬이다? 넌 정말 대단해. 이 나를 몸소 나서게 하다니."
 "참을성이 부족한 모양이군. 네가 나서지만 않았어도 난 아마 내년 즈음이면 존과 헤어졌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 얘기를 듣고도 내가 존을 떠날 거라고 생각하나?"
 "미안하지만 2년도 충분히 길었어. 물론 난 참을성이 많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이 촌구석에 박혀서 지겹게 너희가 노닥거리는 꼴만 엿보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 내 성미하고는 맞지 않는다구."
 "그럼 포기하던가."
 "기세가 좋은걸. 그치만,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네가 원하는 방향대로 상황이 진척될 거라는 기대는 버리는 게 좋아."

 

 빠른 공방. 모리어티가 무슨 이유로 그렇게 자신감에 차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셜록이 말없이 모리어티를 바라보자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내년이 아마 끝이 될 거야."

 

 모리어티가 셜록에게 조근조근 말했다.

 

 "내가 직접 명부에 가서 문의했으니까 확실해. 아니, 정확히는 내가 건의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 인간 따위가 몇십년이나 되는 기간을 희망 따위로 좌우할 수는 없는 거라고, 인류 전체에 적용되는 시간축에도 영향을 미칠 거라고 했더니 흔쾌히 조정해주더군?"

 

 셜록이 벌떡 일어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왜 그 사실을 내게 말해주는 거지?"

 

 부들부들 떠는 셜록의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모리어티가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았다. 양복 바짓단이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를 바로잡은 모리어티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그렇게 말한 모리어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느긋하게 구김이 간 재킷의 매무새를 다듬고, 아랫단추를 채운다. 셜록은 분노에 찬 눈길을 모리어티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모리어티는 온몸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그 시선을 즐기며 일부러 구둣발 소리를 선명하게 내면서 점차 셜록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둘의 거리가 다음 순간 0으로 수렴했다.

 모리어티가 셜록의 귓가에 대고 입술을 움직였다.

 

 "네가 그 애를 살린답시고 발버둥치는 꼴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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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존짐/멋진징조들크로스오버/천사시리즈

 

*본편에서 악마, 타락천사, 사신은 혼용해서 쓰이는 동일한 개념입니다.

 

 

 "...천사님?"

 

 파란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코를 훌쩍거리며 중얼거리는 소년에게 셜록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천사 좋아하네."

 

 차가운 대답에 놀랐는지 소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셜록도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성격이 개차반인 그로서도 생판 처음 보는 꼬마아이에게 가차없이 비꼬아댄 것은 너무했다고 여긴 것인지 답지않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그것도 잠시, 소년에게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딸꾹!"

 

 어찌나 놀랐는지 딸꾹질을 하기 시작한 소년은 막상 딸꾹질을 하는 자신이 더 깜짝 놀랐다는 것처럼 눈이 왕방울만해져서 셜록을 올려다보았다. 탁한 금발이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를 최대한 치켜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을 응시하던 셜록은 한숨을 푹 쉬고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사탕 먹을래?"

 

*

 

 "정말 천사 아니예요?"

 

 한동안 묵묵히 막대사탕을 빨던 소년이 다시 물었다. 셜록이 곧장 부정했다.

 

 "아니라니까."
 "그치만, 날개가 있는데."

 

 보도블럭에 앉은 채로 다리를 쭉 펴고 까딱거리던 존이 셜록의 부정에 조그맣게 항의했다. 셜록이 혀를 차며 되물었다.

 

 "너 이 날개가 하얗게 보이냐? 혹시 장님...은 아니겠지. 내가 보이고, 내 날개도 보인다니까...잠깐, 그러고보니 어떻게 내가 보이는 거지?"

 

 10초도 안되는 시간동안 핀잔과 독백과 질문을 거쳐가는 정신없는 셜록의 말의 흐름을 채 반도 따라가지 못한 존은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입 안에서 사탕을 굴렸다.
 한편 얼떨결에 이름도 모르는 꼬마애에게 휘말려 사탕까지 뺏기고 보도블럭에 엉거주춤하게 앉아있는 신세가 된 셜록은 대체 평범한 인간 꼬마가 어째서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의 정리를 마치고 나서 옆을 쳐다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사탕을 오도독 소리나게 깨물며 소처럼 눈만 끔벅거리는 아이를 쳐다보던 셜록은 은근히 부아가 치솟았다.

 

 "바보같으니idiot."

 

 혀뿌리에 단단히 달라붙은 욕설을 뱉어내며 셜록은 소년이 화를 내길 기대했다. 당장 일어서서 훌훌 떨치고 가기에는 어색한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서 그답지 않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 또한 그의 천성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년이 화를 내면 자신은 나름대로 떳떳하게(?) 소년을 내버려두고 갈 명목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소년의 반응은 셜록이 예상한 바와는 딴판이었다.

 

 "맞아요. 다들 나보고 바보라고 해요."

 

 담담하게 말하며 소년은 입에서 사탕막대를 뺐다. 자근자근 씹어 너덜해진 막대 끝에는 체리물이 거진 다 빠져 처량한 연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쪼글쪼글해진 사탕막대를 빤히 쳐다보던 셜록은 소년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엄마도 아빠도 없고, 학교에 가도 친구도 없구요."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입술을 깨물며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는 아이의 신세한탄을 듣는 것보단 말이다. 이런 곤혹스런 사정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강림한 것인데, 하필이면 현신하자마자 처음으로 만난 대상이 천사와 악마의 모습을 그대로 꿰뚫어볼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라니.
 돌겠군...하고 셜록은 속으로 중얼거리는 한편으로 끙 하고 신음했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흘러내리는 코를 훔치며 하소연하고 있었다.

 

 "그리고요, 누나는 계집애들하고나 키스하니까 저도 날 때부터 호모자식일거라고도 해요. 누나가 레즈비언인거랑 제가 호모인거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난 게이도 아닌데."
 "전형적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군."

 

 혼잣말로 셜록이 중얼거리자 소년이 셜록을 향해 돌아보았다.

 

 "전형적...인...성급...오류...?"

 

 소년이 더듬거렸다. 셜록은 속엣말을 입에 올렸다는 것을 깨닫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더이상 상황이 악화되는 것은 막고 싶었기 때문에 고분고분 대답해주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너희 누나가 동성애자라고 해서 너까지 동성애자로 치부하는 건 논리적인 결함을 지닌 논법이라는 뜻이지. 그 두 가지 명제 사이의 관련성은 전무하다고. 동일 유전자를 나눠가진 사람들 간에 같은 유형의 성적 지향이 발현된다는 것도 참인 것으로 증명되지도 않았고 말이야."

 

 거기까지 나불대던 셜록은 문득 소년의 열렬한 시선을 느끼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 꼬마는 뺨이 상기된 채로 자신을 엄청나게 뜨거운 눈빛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을 잇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왠지 멋쩍어진 셜록은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일부러 과격하게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그런 멍청한 놈들이 하는 소리는 다 개소리bullshit다 이거야."

 

 셜록이 말을 마치자 소년은 참아왔던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우와는 무슨 우와야."
 "역시 천사님은 너무 멋져요."
 "글쎄 나 천사 아니라니까."

 

 셜록의 거듭된 부정에 아이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럼 왜 등에 깜장 날개를 달고 있는 건데요?"

 

 망설이던 셜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천사가 아니라고 했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왜냐면 난..."

 

 셜록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맺었다.

 

 "...타락천사거든."

 

 의외로 꼬마는 놀라는 기색도 셜록을 두려워하거나 그를 피하려는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인간 세상에 나오니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군 하며 셜록은 은근히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지옥이나 연옥에서 죽칠 때에는 하나같이 딱딱하고 지루한 꼰대들뿐이었는데 나오자마자 이렇게 하나같이 예상을 빗겨가는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무료하기 그지없었던 셜록에게는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이 따로없었다.
 셜록이 서서히 지금의 상황에 몰입하기 시작하는 동안 소년이 종알거렸다.

 

 "나도 타락천사 뭔지 알아요! 해리엇이 그러는데 크롤리랑 아라이1가 떡치는shagging 사이라고 했어요."

 

 순간 셜록은 먹은 것도 없는데 사레가 들리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한동안 쿨럭거리던 셜록이 등을 두들겨주는 아이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기침을 가라앉히고 나서, 셜록은 벌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쬐끄만 게 못하는 말이 없군."
 "아, 미안해요."
 "그런 천박한 말을 쓰는 주제에 용케 나를 볼 수 있군 그래. 그나저나 크롤리...크로울리2는 알겠는데 아라이는 누구지?"
 "몰라요. 누나 말로는 천사인데 천상 게이랬어요. 그리고 크롤리는 타락천사구요. 둘이 사귄다고 그러던데요."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군..."

 

 투덜거리던 셜록은 곧 코트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잠시 깔짝거리더니 어떤 화면을 내보이며 물었다.

 

 "네가 말하는 크롤리가 이 남자냐?"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셜록은 곧바로 다시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화면을 두드리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설마 네가 말하는 아라이가 아지라파엘...이냐?"
 "네 맞아요! 아지라파엘! 이름이 너무 길어서 까먹었다..."

 

 도대체 어디를 어떻게 생략하면 아지라파엘이 아라이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셜록은 사소한 문제는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활기찬 대화를 제공하는 인간 꼬마애를 울리기는 싫었으니까.
 한편 소년은 눈을 빛내며 셜록에게 질문하기 바빴다.

 

 "그럼 왜 여기 온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인간계에 강림했을 때에 있었던 좌표로 곧장 날아든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소년에게 그런 하잘것없는 이유를 댐으로써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셜록은 머리를 굴리다가 곧-그의 생각에는 대단하기 짝이 없는-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난 사실 널 타락시키러 왔단다."

 

 존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커졌다.

 

 "저를요?"
 "그래."
 "저는 나쁜 아이가 아닌걸요?"

 

 항변하는 아이에게 셜록이 씩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미 못된 아이를 타락시켜봐야 뭐가 재미있겠어? 착한 아이를 나쁜 아이로 타락시켜야 보람차지."

 

 소년의 동요를 드러내듯 파란 눈의 초점이 흔들렸다. 셜록은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저급한 희열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셜록의 반듯한 입매가 일그러지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나는 현대의 악마들보다는 전통적인 방식을 선호하지. 꼬마야, 바보 이반 이야기를 알고 있니? 악마들은 우직한 이반은 꼬드기지 못했지만, 그 형들인 세묜과 탈라스는 성공적으로 제 편으로 만들었지. 그리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반보다는 어리석은 세묜과 탈라스와 더 닮았고 말이야. 앞으로 난 네 옆에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성심성의껏 타락하게 만들어 줄 계획이란다. 고리타분하지만 그편이 확실하거든."

 

 모범적인 악마다운 태도로-사악함이 듬뿍 묻어나면서도 한없이 유혹적으로 속삭여주자 눈앞의 소년은 당황한 듯 멍하니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셜록은 마침표를 찍듯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려 미소지어보였다.
 이제야 타락천사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군, 하고 셜록은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쉬운 기미가 들기도 했다. 이제 소년은 그를 내팽개치고 이 자리를 도망가려 들겠지. 그러면 오랜만에 나눈 즐거운 대화도 이제 안녕일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그 소년은, 놀랍게도 오늘 하루동안 셜록의 예상을 무려 세 번이나 비껴가게 하는 위업을 달성해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다행이다. 난 또..."

 

 소년이 뭐라고 말하려다가 뒷말을 삼켰다. 셜록이 그 심상치 않은 생략에 의아해할 틈도 주지 않고 꼬마는 말을 이었다.

 

 "그럼 앞으로 내 옆에 계속 있을 건가요?"
 "...그렇게 되는 셈인가?"

 

 당황한 셜록이 얼떨떨하게 내뱉은 모호한 대답에도 소년은 세상을 다 얻은 것마냥 좋아라 소리를 질러대며 셜록을 꼭 껴안았다. 

 

 "와 신난다!"

 

 작은 소년의 팔이 굳어버린 셜록을 감싸안았다. 무표정이 일상화된 셜록의 얼굴과는 달리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등 뒤에서 어쩔 줄 모르며 움찔거리던 검은 날개에 소년이 얼굴을 폭 묻었다. 작고 보드라운 코끝이 깃털 뭉치 사이로 파묻혀서 속살에 간지럽게 와닿았다. 아까까지 울던 아이의 얼굴에 덜 지워진 채 남아있던 콧물이 윤기나는 깃털을 적시고 말았지만 왠지 기분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은...뭔가 이상했다.

 

 "...내 이름은 셜록 홈즈라고 한다."

 

 다소 무감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에도 소년의 환희는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셜록을 더욱 세게 껴안으며 소년이 살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존 왓슨이라고 해요. 미스터 홈즈."
 "장난하냐? 셜록이라고 불러."

 

 자못 아무렇지 않은 듯 핀잔을 주면서도 셜록은 느끼고 있었다.
 그래. 뭔가가 이상하다. 이 모든 상황의 기점이 어디선가부터 비틀려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셜록은, 지금 당장은 그 점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1.뒤에 나오겠지만, 아지라파엘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2.Anthony J. Crowley(<멋진 징조들>의 등장 타락천사이자 악마)와 Aleister Crowley를 헷갈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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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마레/SCP재단크로스오버

 

*SCP재단 산하의 윤리 위원회에 대한 참고 링크: http://mirror.enha.kr/wiki/SCP%20%EC%9E%AC%EB%8B%A8/%EC%9C%A4%EB%A6%AC%20%EC%9C%84%EC%9B%90%ED%9A%8C

*본편은 해당 링크에 있는 대화를 99% 복붙하였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하얗게 빛나는 문손잡이를 밀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회의실 안에 고인 침울한 냉기가 존의 가운에 스며들어 그는 반사적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드러난 손목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일상적일 마찰음일 뿐인데, 방 안에 서린 찬 기운때문인지 그것마저도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천천히 회의실 가운데로 나아가는데 뒤에서 문이 그극 하고 기묘하게 어긋나 돌아가며 닫혔다. 회의실 안은 이제 천장 한 가운데의 오렌지빛 조명이 내리쬐는 약한 빛 외에는 무거운 어둠과 침묵뿐이었다.
 지레 겁을 먹고 만 존이 등 뒤로 시선을 주는데 앞쪽, 흐릿한 어둠 속의 실루엣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앉으시죠."

 

익숙한 목소리였다.

 

"...마이크로프트?"

 

 회의실 가운데의 공터에서부터 계단식으로 짜인 회랑 위편에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앉아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이크로프트 뿐만이 아니었다. 생소한 얼굴들이 그를 둘러싼 채로 관찰하고 있었다.
 조용한 위압감에 압도되는 것도 잠시, 지금의 상황은 마이크로프트의 질 나쁜 장난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그는 윤리 위원회의 부름을 받았는데 이건 그가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마이크로프트를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존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시죠? 아니 그것보다...당신이 날 호출한 건가요?"

 

 마이크로프트 옆에서 시립해있던 안시아가 입을 열었다.

 

 "맞게 오신 거에요. 닥터 존 왓슨."

 

 언제나처럼 미리 녹음해놓은 음성 파일을 재생하는 듯한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존은 불편한 심기를 여실히 드러내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마이크로프트는 여전히 의뭉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또 하나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이 다음에 있을 D등급 요원 투입 실험 일정이 어그러질까 신경이 쓰이는 거라면, 그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네."
 "그렉...?"

 

 방 안의 침침한 조명 때문에 회랑의 귀퉁이 자리에 앉아있는 레스트레이드의 존재를 미처 알아채지 못한 존이 깜짝 놀랐다. 레스트레이드는 약간 지쳐보이는 얼굴로 웃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라고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마이크로프트가 그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위원회가 끝났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이 방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존은 뭐라고 항변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실험이라도 하듯 냉정하고 침착한 눈초리로 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험용 흰쥐가 꼬물거리는 것을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같은 눈빛에 존은 순간적으로 화를 벌컥 낼 뻔했다. 하지만 그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라고 존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당장의 상황만 봐도, 자신이 소환된 이 윤리 위원회라는 단체가, 재단 내부에 알려진 것만큼 무기력하고 만만한 단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는 찰나 존의 속내를 꿰뚫어본듯이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문은 이미 잠겼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박사님이 집중하시는 겁니다."

 

 존은 도전적인 눈빛으로 마이크로프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누구 하나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존은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천천히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무표정으로 존을 응시하던 마이크로프트가 슬쩍 입꼬리를 올려보이며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좋아요."

 

 그렇게 말한 마이크로프트는 그 뒤로 이어지는 짧은 침묵의 여운을 즐기듯 느릿하게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질 좋은 종이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으로 맨 앞의 서류를 집어든 마이크로프트는 정적을 깨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박사님은 지금부터 SCP재단 윤리 위원회의 위원이십니다. 이건 좌천이 아니에요."

 

 무감정한 목소리로, 태평하기 짝이 없는 어투로 그 말을 뱉어내는 마이크로프트를 보며 존은 기어이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게 좌천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존의 모습에도 마이크로프트는 하등 동요하는 기색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존이 화를 내는 꼴을 바라보던 마이크로프트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주시죠."

 

 그 목소리에 담긴 차가운 위협의 기색에 존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독사가 목을 부풀리고 날카로운 독니를 내보이며 은밀하게 쉿쉿거리는 것처럼 나직한 속삭임. 순간 존은 등줄기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자신을 내리누르는 은연중의 압력에 저항이라도 하듯 고개를 쳐들고 마이크로프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않고 눈을 빛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악의.
 존은 힘없이, 무너져내리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풀썩 소리와 함께 가운이 처량하게 부스럭대는 소리를 냈다. 마이크로프트는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존을 쳐다보았다. 아까 전까지 쌩 하게 감돌던 냉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압니다, 놀라셨겠죠. 아마 무슨 실패 때문에 처벌 받는 거라고 생각하시겠지요, 판단 착오나, 박사님이 연관된 끔찍한 재해 때문에요."

 

 'Sherlock Holmes' 때문일까? 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일명 SCP-221-B(blocked: 정보 차단 등급). 최근에 일어났던 일련의 보안 사고의 과정이 생생하게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듯 했다. 국제적인 악질 해커 크루 MORIARTY에 의한, 등급 책정 보류 중이던 인간형 SCP의 외부로의 정보 유출. 그리고 사망을 가장한 폐기. 분명 그것때문이리라. 지금의 일방적인 인사 조치는.
 왜냐하면 SCP-221-B는-마이크로프트 홈즈의 친혈육이므로.
 존의 얼굴이 서서히 공포에 질려 창백해지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이크로프트는 나긋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박사님의 재단 경력은 끝났다고 생각하실겁니다. 아마도 심지어 '윤리 위원회로의 전근'은 '사망'의 완곡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죠. 이건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제거'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재단에서 '제거'란 하루에도 수백 수천 건씩 처리되는 사안이었다. 즉 일상적인 감원 과정으로,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누구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존 또한 수많은 D등급 요원들을 '제거'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제거'란 그저 종이에 사인을 하는 절차일 뿐이었다. 그저 펜을 잉크 글씨를 몇 자 휘갈기는 것만으로도 종이 위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이제는 존이 죽어나갈 차례인 것일까?

 

 "박사님은 제가 '제거'대신에 '사망'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셨을겁니다. 고의적인 단어선택입니다. 윤리 위원회에서는 완곡어법을 쓰지 않아요."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이었다.

 

 "SCP재단이 하는 일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재단이 윤리위원회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그저 질 나쁜 농담으로만 여깁니다. 아니면 그들이 위원회가 존재하는 것을 알더라도, 우리가 그냥 쓸데없는 웃음거리밖에 안될거라는 느낌을 받겠지요. 반대라는 말은 할 줄도 모르고 고무도장으로 '승인함'이라는 도장만 찍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리만 채우고 있는 그런 이미지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박사님이 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구를 바꾸려면 몇 명의 윤리 위원회 사람들이 있어야 할까? 답은 아무도 없다!야. 왜냐하면 윤리 위원회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니까!'"

 

 존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평소에만 해도 일종의 레퍼토리처럼 반복해대고 서로서로 바리에이션까지 만들어내면서 바보처럼 웃어대던 조크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저걸 재밌다고 하면서 시도때도 없이 웃어댔던 거지? 재미는 커녕 당장이라도 속이 뒤집어질 것같았다. 내장이 울렁거렸다.
 마이크로프트가 일견 이해심 넘치는 투로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웃으실 수도 있죠. 저희는 사람들이 저희가 쓸모없다는 느낌을 받게하기 위해서 계속 노력했으니까요. 왜냐하면 저희는 SCP재단의 숨은 권력이기 때문이죠."

 

 O5가 아니라?
 존이 하지만-하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마이크로프트가 제지했다.

 

 "앉아계세요."

 

 존은 또다시, 그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존이 고분고분하게 자리에 앉자 마이크로프트가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요, O5가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안전한가 안전하지 않은가 판단하지요. 그것은 필수적이고 필요한 기능입니다. 하지만..."

 

 마이크로프트가 두 팔을 활짝 벌려 위쪽 연단 좌석에 앉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들은 O5에게 무엇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면 안될지 충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입꼬리를 올려 미소짓는 마이크로프트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박사님은 지금까지 재단에서 일하시면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부정하려고 하지 마세요, 박사님. 저희 또한 재단에서 일할 때 그런 일들을 했습니다. SCP들과 일하다 보면 결국 피할 수 없는 결론을 하나 내리게 되죠. 그리고 그 경우에, 아마도 궁금해 하실겁니다. '만약 재단이, 말하자면, 악당이라면? 글쎄, 재단은 악당이 아니야.' 바로 그것이 윤리 위원회가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박사님의 첫번째 교훈입니다. 이해하셨나요?"

 

 존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마이크로프트 또한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세요: 재단은 사악하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그냥' 사람을 고문하지 않습니다. 또한 저희들은 불필요한 잔인한 행동을 반대합니다. 그 말은 누군가가 잔인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결정할 때에만 행동한다는겁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란 바로 저희입니다...오, 이런. 떨고 계시는 군요. 떨지 마세요."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뚝 하고 눈썹 위로 떨어졌다. 눈을 깜작이자 땀이 눈으로 스몄다. 따끔한 느낌에 눈을 수 차례 깜박였다. 누군가가 옆에서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수건을 내미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채 존은 기계적으로 일단 받아들었다. 땀을 닦고 나니 어지러운 열기가 가시고 오한이 밀려왔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박사님, 두번째 교훈입니다. 중요하니까 잘 기억하세요.
 재단은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 재단은 세계에 봉사한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일반인들의 생각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하는 일, 즉 재단이 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최고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야말로 독선의 극치였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그 독단어린 발언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진심을 담고 있다는 것과, 회의장에서 존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그에 전폭적으로 동조의 기색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요, 저는 박사님이 이미 깨달으셨을거라 확신합니다...하지만 박사님은 더 깊은 의미에 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으셨을겁니다. 박사님은 이 모든 고문과 살인은 더 큰 선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시면서 자기 자신을 위로하시겠죠. 이 말은 더 큰 선이 있다면... 작은 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다양하고 독특한 선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측량될 수 있어야 하고 비교 될 수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바로 윤리 위원회에서 우리들이 하는 일입니다."

 

 목소리가 열정적으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억제된 환희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우리들은 재단이 하는 모든 일과 그 도덕적 비용의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용들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가치를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박사님? 이 말은 우리는 재단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수정되고 말소된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글자 하나까지요."

 

 존이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 데이터 말소 ]...에 대해서도 말인가요?"
 "그래요, 저희들은 SCP-447-2가 시체와 접촉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 지도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110-몬탁 절차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있고요.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디자인한 인물들 중 하나니까요."

 

 110-몬탁 절차. 존이 재단의 연구진으로 채용되었을 당시 견학이라는 명목으로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 격리 절차였다. 그때 존과 동행했던 신참들은...하나같이 구토를 했다. 안내원 역할의 박사들과 격리 절차를 수행중이던 요원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기록하거나 속엣것을 게워내는 그네들을 보며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존은 또다시, 안에서 치밀어오르는 토기를 참지 못하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회의장 안에서는 존이 우욱, 웩 하고 속에서 역류하는 것들을 뱉어내는 소리만 질척거리며 울렸다. 안시아가 토하는 존을 보며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더니 몸을 숙여 마이크로프트에게 속삭였다.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인사조치를 철회하셔도 됩니다. 왓슨 박사가 입을 놀리고 다니는 것이 걱정이긴 하지만...아, 마침 오늘이 D등급 요원 처리일자와 겹치니 소각장으로 이송시킬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소각 운운하는 안시아에게 마이크로프트가 자못 자애로운 태도로 말했다.

 

 "아니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일반적인 반응이에요. 아마 점심 직후에 이 만남 일정을 잡지 않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제 생각엔 말이죠-자, 왓슨 박사님께 수건을 새로 갖다드리도록 하세요. 물도 한 컵 떠다드리고요."

 

 상황이 어느정도 진정이 되고 나서의 존의 안색은 해골처럼 해쓱해져있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눈 아래가 푹 패여 그늘까지 진 것을 전혀 내색하지 않으며 마이크로프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박사님은 이제 적극적으로 연구에 참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사님은 본인이 일반적인 연구원이라고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한 프로젝트에서 다른 프로젝트로 옮겨 다니고, 한 사이트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마음대로 말입니다. 이건 비밀이 아닙니다. 박사님은 자유롭게 박사님의 친구분들께 박사님이 윤리 위원회로 전근가게 됬다고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만약 그 농담들과 동정을 견뎌내실 수 있다면요."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러나 존은 웃지 않았다. 의자에 몸을 늘어뜨리고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조용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박사님은 연구를 관찰하시고, 참가자들과-자신에게-물어보시면 됩니다. 이 실험이 행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요. 박사님이 느끼시기에 어떤 점이라도 무언가가 과도하다거나, 불필요하다거나 잘못되었을시에는, 저희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관계자들을 소환해서 그들에게 질문 할 것입니다. 박사님의 동료들이 조롱했던 온화하고 효과없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고는, O5에 내려가는 보고는 걸러내 질겁니다, 저희 관료제의 많은 단계를 거치면서요. 그리고 저 비윤리적인 사람들은 징계받고 그 기록이 영구적으로 남겨지겠지요. 아니면 감봉당하던가, 강등당하던가. 아니면 다른 프로젝트로 전근처리 될겁니다."

 

 마이크로프트는 한 박자 쉬었다가 말했다.

 

 "어쩌면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혐의로 총살 당할 수도 있지요."

 

 살짝 윙크를 곁들이며 말하는 것에 존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익살이랍시고 던지는 말에 다시금 구역질이 났다. 존의 눈동자에 떠오른 어렴풋한 혐오의 기색에도 마이크로프트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세번째 교훈입니다. 기억하세요. SCP재단의 'P'는 '보호하다(Protect)'를 상징합니다. 재단은 인류를 SCP로부터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재단을 그 자체로부터 보호하지요. 우리는 재단이 하는 일 중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을지 판단합니다. 우리는 악의 균형을 대체적으로 잡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악은 최소화될 겁니다."

 

 얼음장같은 침묵이 내리깔렸다. 존은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다 마쳤다는 것을 잠깐동안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같았다. 불안하게 눈을 깜박거리던 존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마지막 단말마처럼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저는...저는...!"

 

 무어라고 말하려는 존에게 마이크로프트가 진하게 미소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안됩니다, 박사님은 위원회에 들어오시는 것에 대해서 선택권을 행사하실 수 없습니다."

 

 아아...하고 한숨처럼 탄식하며 존 왓슨이 다시 의자에 주저앉는 것을 보고, 마이크로프트 또한 숨을 내쉬었다. 희열의 여운에 젖은 목소리로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래요, 아이러니 한 것은 사랑스럽지요,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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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마레/고양이/리퀘

 

*총리관저 수석수렵보좌관에 대해서는 링크 참조: http://mirror.enha.kr/wiki/%EC%B4%9D%EB%A6%AC%EA%B4%80%EC%A0%80%20%EC%88%98%EC%84%9D%EC%88%98%EB%A0%B5%EB%B3%B4%EC%A2%8C%EA%B4%80

 

 

 나는 제 14대 총리관저 수석수렵보좌관 존이라고 한다. 비공식 직책이긴 하지만 영국 총리의 참모진 중 하나로서 현재 재임 중인 마이크로프트 홈즈 경과 함께 다우닝가 10번지 관저에 머무르고 있다.
 나 자신의 유능한 실력에 힘입어 재무부 장관의 보좌관에서 일국의 수상의 보좌관으로 전격 승진하게 된 나이지만, 최근에는 한 가지 골칫거리가 생기고 말았다.

 

 "야옹."

 

 바로 저 녀석 때문이다. 구석탱이에 웅크리고 앉아서 심드렁하게 야옹거리기나 하는 저 고양이녀석! 그따위로 나지막하게 가르랑거린다고 해서 누가 거들떠볼 줄 아는가보지! ...아니 뭐 나도 고양이이긴 하지만.
 그래, 난 고양이다. 내가 지닌 직책의 본 업무도 총리 관저에 숨어있는 쥐를 소탕하는 일이지. Chief mouser이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자세로 퍼질러앉아서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연신 그르렁거리는 저 고양이녀석이 문제라는 것이다. 노랑 태비에 예쁜 파란색 눈을 가진 나와는 달리 저녀석은 음침하게시리 온통 시커먼 털색을 지닌데다가 덩치도 나보다 훨씬 크고 나태하기까지 하다. 쥐가 눈 앞에서 뽈뽈거리며 달려다녀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경질당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그나저나 고양이 주제에 쥐도 못잡아서 경질된 녀석이 왜 아직도 총리관저에 빌붙어서 호의호식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전관예우라나 뭐라나. 인간들은 별 쓸데없는 걸 다 챙긴다니까.
 게다가 이름도 누가 지었는지 괴상하기 짝이 없다. 

 

 "셜록."

 

 어느새 뒤까지 바싹 다가와서 제 이름을 속삭이고 유리알같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어슬렁거리는 저 음습한 행동거지를 보라. 제 이름 생각하고 있는 건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았는지, 셜록이라고 불러 운운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말 그대로 멍멍이다(개같다는 말은 고양이들 사이에서는 제일 심한 욕이라는 것을 참고하자). 매일같이 저러니 아홉개나 되는 고양이 목숨도 남아나지 않을 노릇이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온몸의 털을 빳빳이 세우고 캬옹 하고 신경질적으로 울어대고 말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현 영국의 수상 마이크로프트 홈즈 경이 들어왔다.

 

 "하하, 오늘도 사이가 좋구나."

 

 느물느물하게 웃는 홈즈 경이 얄밉다. 사이가 좋긴 개뿔! 아무리 인간들이 고양이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 상황이 사이가 좋은 걸로 보일 수가 있어!

 

 "네가 그렇게 백날 야옹거려봐야 저 늙다리 변태가 알아들을 거 같냐?"

 

 저 싸가지없는 말뽄새 좀 보소. 하여튼 셜록...하고 짜증스럽게 그르렁거리다가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근데 누가 늙다리 변태라는 거야?"

 

 어느새 또 식빵자세를 하고 앉은 셜록이 집무실로 향하는 마이크로프트의 뒷모습을 향해 느릿하게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누군 누구야, 저 늙은이지."

 

 존의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더욱 커졌다. 그 모습이 몹시 귀엽다고 생각하며 셜록이 말을 이었다.

 

 "가끔가다 방문하는 런던 경시청 경위가 왜 찾아오는 건지도 모르지?"

 

 존의 입이 빠끔히 벌어지며 귀엽고 촉촉한 연분홍빛 혀가 언뜻 보였다. 입가에 돋아난 하얗고 가느다란 수염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셜록이 막타를 날리려는 순간 당사자가 뒤를 따라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홈즈 경. 이렇게 자꾸 부르시면 곤란합니다."

 

 레스트레이드 경위였다. 난색을 표하며 걸어들어오던 레스트레이드는 한참 야옹거리고 있던 두 고양이들을 보고 미소를 띠며 다가와 각자 한 번씩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갸르릉거리는 존과 역시나 귀찮은 듯 멀뚱하니 쳐다만 보는 셜록 앞에 쭈그리고 앉아 야옹아 안녕? 하고 쫑알거리는 레스트레이드더러 얼른 들어오지 않고 뭐하느냐며 채근하는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들렸고 레스트레이드는 한숨을 푹 쉬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레스트레이드가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쾅 닫혔다.
 어쩐지 요란하고 단호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나서 존과 셜록은 입을 다물었다. 위화감 섞인 침묵도 잠시, 안에서 조근거리는 밀어가 새어나왔다. 셜록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은-그리고 본능적으로 조금 있으면 일어나게 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존은 패닉에 빠졌고 셜록은 티벳여우처럼 초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떻게 신성한 일터에서!"

 

 존이 순진하기 그지없는 경악의 의미를 담아 야옹거리자 셜록이 흘낏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꼴 보기 싫어서 내가 쥐를 안 잡았던거지."

 

 그 말에 넋이 나가있던 존이 빼액 하고 날카롭게 야옹거렸다.

 

 "그렇다고 쥐새끼들이 돌아다니는 걸 내버려둔다는 게 말이 돼?"
 "그러면 경위가 싫어하거든. 따라서..."

 

 셜록이 고갯짓을 하며 가르랑거렸다.

 

 "저 안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짓거리도 일어나지 않는거고."

 

 존은 저도 모르게 귀가 쫑긋거렸지만 고양이 특유의 예민한 청각을 발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앞발 사이에 파묻었다. 그런 존을 바라보며 셜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털을 골랐다. 존은 재무부 장관 사옥에서 총리관저로 옮겨온 것이 잘한 일인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의심 섞인 눈으로 셜록을 슬쩍 쳐다보았는데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언제나처럼 거만하기 그지없는 눈빛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다정하게 느껴지는 눈빛이다. 수컷고양이에게 같은 수컷이 얼마나 다정하겠냐마는. 그러고보니 저녀석 항상 야옹야옹거리며 시도때도없이 잘난체를 해대고 잔뜩 어지르기나 하고 밉상이 따로없지만 꽤 준수하게 생긴 것같...

 거기까지 생각하다 존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요즘 한동안 암코양이 구경도 못했더니 괜히 이상한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발정기. 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애써 생각했다.

 

 '얼른 암컷고양이를 사귀어야겠다.'

 

 그리고 그런 다짐을 하는 존을 보는 셜록의 동공이 좁아지며 눈이 한층 밝게 빛났다. 앞으로 펼쳐질 존의 암담한 묘생(猫生)의 앞길을 밝히려는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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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Domination

2013. 12. 13.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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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존]Gaze 上+下

2013. 12. 13. 02:18 from BBC Sherlock/단편

셜록존/집사물/약수위

 

 

Looking off to the side is the submissive response.

 

 

 "어서 오게." 

 

 마차에서 방금 내린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정중하게 목례했다.

 

 "반갑습니다."

 

 가볍게 손끝만 잡는 악수를 하고 남자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자신보다 반 피트 정도 키가 큰 남자가 저택을 둘러보는 것을 못본 척하며 호기롭게 그를 끌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다. 사용하지 않아 덧문이 닫힌 지 오래된 창이며, 손질이 되지 않아 쇠락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건물을 그에게 오래 보게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모순된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앞으로 저택의 모든 것을 관리하게 될 집사에게 저택의 면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꼭...흠모하는 선생 앞에서 필사적으로 흠결을 감추려 애쓰는 순진한 여학생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그때부터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 되어 앞뒤가 맞지 않는 횡설수설을 늘어놓기를 몇 분, 남자가 앞으로 쓰게 될 방에 다다르고 나서야 그것을 멈출 수 있었다.

 

 "앞으로 여길 쓰면 되네."

 

 남자가 들고 있던 가방을 침대 옆에 내려놓자 그제야 남자가 자신이 저택 안을 보여주는 동안 계속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걸어다녔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미, 미안하네...미처 생각지 못했어."
 "뭐가 말입니까?"

 

 양손에 든 가방을 차례로 옮기던 그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서생처럼 하얀 피부에 정갈한 미모의 청년의 물음에 그의 앞에 선 자신은 더욱 초라해지는 것같아 얼굴을 붉힌다.

 

 "가방을...들고 다니게 해서 말이네. 무거웠을 텐데..."

 

 남자가 딱 잘라 말했다.

 

 "어차피 제가 할 일입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런 것에 마음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을 긋는 듯한 태도에 조금, 마음이 아프다.

 

 "왓슨 씨는 제 주인님이니까요."

 

 미묘하게 누그러진 어조에 기뻐져 저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존. 존이라고 부르게."

 

 남자는 고개를 까딱 하더니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도 셜록이라고 불러 주십시오...존."

 

 남자의 묵직한 저음이 울렸고, 귓볼이 벚꽃색으로 조금 붉어졌다.

 

*

 

 의가사제대를 하고 손에 쥔 보잘것없는 돈으로 한량마냥 런던에서 한정없이 향락을 즐기던 몰락 귀족 존 왓슨이 난데없이 서섹스로 돌아오게 된 것은 그의 누님의 부고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해리엇 클라렌스. 자식도 변변한 친척도 그 외의 피붙이도 없는 그녀는 클라렌스 경이 일찍이 작고한 후로 홀로 저택을 지켜왔다. 여인의 몸으로 혼자서 넓은 저택을 예전의 모습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몹시도 외롭고 힘든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입관 직전에 간신히 도착한 존이 본 누이의 시신의 얼굴에는, 쾌활하고 볼이 통통했으며 남편과 금슬이 좋았던 그녀의 생전 모습이라곤 단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도 그렇게 될까 두려웠다. 창백하게 야위어 애처로울 정도로 마른 그녀의 모습은, 슬프다기보다는 무서웠다.
 그래서 일부러 새로운 집사를 모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생각에 잠겨 있던 존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질문의 답은 '아니다'였다. 런던의 풍속주점에서 흔히 먹고 마셨던 화려하고 기름지지만 속이 텅 빈 껍데기같은 음식들보다 형편에 맞는 간소하고 담백한 음식은 훨씬 맛이 있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는 듯 자신을 빤히 응시해오는 셜록의 푸른 눈을 넋을 잃고 응시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존이 황급히 대답했다.

 

 "그렇지 않네."

 

 존이 답지않게 깨작거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신의 옆에 시립해서 자신이 식사하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셜록의 존재가 그 이유였다. 도저히 속내를 파악할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이 포크를 움직이는 모양이라던가 무엇을 골라서 입에 넣는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은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기한 것은, 그런 눈길을 온몸으로 무방비하게 받고 있으면서도 기분만큼은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치 목을 알맞게 옥죄이는 넥타이를 매고 있는 느낌이었다. 핥듯이 끈적하게 전신을 훑고, 빠져나갈 틈새라곤 없이 답답하고 집요하게 자신을 노리는 것처럼 닿아오는 푸른 눈의 시선을 분명하게 의식하면서도 아예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말하자면, 길고 긴 마인드 게임을 펼치는 것처럼 재미있고 흥분되는 일이었다.
 말랑한 오믈렛과 그 안에서 녹아내리는 치즈를 오물거리는 것, 신선한 샐러드와 그 위에 뿌려진 단단하고 고소한 아몬드를 씹는 것, 잘 익어 바알갛게 육즙이 배어나오는 고기를 먹기 좋은 모양으로 잘라 입 안에 넣는 것... 그 모든 과정에 셜록의 시선이 드레싱처럼 곁들여지고 있었다. 셜록의 시선을 음식과 함께 씹어삼키는 것같았다. 아니, 셜록의 눈이 자신을 먹어치운다는 표현이 더욱 옳았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며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이 흡수당하는 과정을 하루에 세 차례나 겪는다는 것은 몽롱하고도 이상한 행복감을 존에게 선사했다.
 불편하게 여겨야 마땅할 시선을 기분좋은 긴장감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자신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야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를 원하는 욕심많은 자신을 겨우 억제할 수 있다.
 멈춘 시선은 여전히 미동도 없다. 식사를 계속했다. 부드러운 빛을 반사하는 은식기가 달그락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

 

 "마리는 오래 전에 죽었다네."

 

 존이 말했다.

 

 "장티푸스를 앓았지. 아주 길고 힘든 나날이었어. 연약한 이였지만 오래 버텨내주었는데... 그때문에 완쾌될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가진 순간 그녀는 편안하게 잠들었지."

 

 담담한 투로 하는 고백을 셜록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리고 군대를 갔지...아니, 그녀의 죽음 때문에 입대를 한 걸까. 지금은 잘 모르겠네. 전쟁터에서의 일들이 워낙에 인상이 깊었는지 그 이전의 일은 안개처럼 흐릿하다네. 그때의 안락한 일상은 마치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아."

 

 낙엽이 떨어지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존이 셜록을 향해 웃어보였다.

 

 "왜 내가 사용인이라고는 자네 하나만 둔 채로 이 대저택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인지 그동안 궁금해했을 것같아서 말이네."

 

 한동안 침묵이 내리깔렸다. 셜록은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한 시선으로 존을 바라보았다. 존은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불며 말라비틀어진 낙엽이 날리는 것을 응시했다.
 줄곧 묵묵하게 자신의 말을 듣고만 있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첫날,"

 

 둔중하게 울리는 아름다운 목소리.

 

 "반지를 끼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셜록의 말에 존이 무의식적으로 약지를 매만졌다. 수수한, 아무런 장식이 없는 금반지였다. 생각해보면 마리는 십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났다. 왜 아직도 이 반지를 끼고 있는 걸까. 고집일까. 오기일까. 그도 아니면 옛날에 대한 향수일까.

 존이 반지를 낀 손가락을 움츠렸다 폈다 하는 것을 셜록은 흘깃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일반적인 안주인들께서는 새로운 집사가 오면 꼭 맞이하러 나오시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집을 관리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니까요. 그러나 안주인분께서는 제가 이 저택에 도착한 첫날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때 예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가 있죠. 병환때문이거나, 돌아가셨거나."

 

 냉정하고 침착한 분석이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제가 섣불리 입에 올릴 만한 사안은 아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허한 웃음을 토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살면서 저절로 알게 되었겠지."

 

 내 아내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의문문인지 평서문인지 모호한 어조의 말에 셜록이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존이 낮게 웃었다. 잠깐 동안 허허로이 웃던 그가 웃음을 그치고 조용히 말했다.

 

 "자네는 예의가 바르지만...그와 동시에, 무례하기도 하군."

 

 셜록이 고개를 갸웃 하더니 물었다.

 

 "그래서, 싫으십니까?"

 

 존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답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네."

 

 한 박자를 놓친 것마냥 셜록이 조금 늦게 대답했다.

 

 "다행이군요."

 

 다시 정적. 무거워진 분위기를 추스르기 위해 존이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무엇보다도 땡전 한푼 없이 낙향한 몰락 귀족에게 있어서 집사를 고용하는데 그리 많은 선택지가 남았을 리도 없고 말이야."

 

 미소짓는 존을 쳐다보던 셜록이 옆으로 살짝 시선을 돌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The new covenant

 

한 번은 물었다. 

 

 "뭐라도 좀 들지 않겠나?"

 

 식사 도중이었다.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평온하며, 셜록의 은밀한 시선과 존의 묵인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순조롭게 흘러가던 시간의 흐름은 갑작스런 존의 물음으로 뚝 끊겼고, 셜록은 시중들기를 멈추었다. 빠르지만 경박스럽지 않게, 본연의 우아한 기품을 잃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던 셜록의 하얀 소맷부리의 사각거림이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셜록의 얼굴에 미미한 이채가 잠시 어렸다 사라지는 것을 존은 놓치지 않았다.
 그가 눈썹을 까닥인다. 존은 그것을 약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웃음기 띤 시선과 셜록의 눈길이 마주쳤고 셜록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존의 속내를 낱낱이 읽어내려는 것처럼 약간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빤히 존을 바라보았고 느닷없이 시작된 그 눈싸움에 존이 서서히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을 드러낼 즈음 셜록이 입을 열었다.

 

 "요 며칠간 그걸 묻고 싶으셨던 겁니까?"

 

 이번엔 존이 놀랄 차례였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쳐다보았다고 생각했건만 셜록의 예민함은 상상 이상인 모양이었다.
 존은 살짝 헛기침을 하고 대답했다.

 

 "생각해보니, 자네가 무언가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말일세."

 

 셜록은 대답이 없었다. 두 사람의 간격을 메우는 것은 침묵뿐이었으나 어쩐지 그들을 감싼 공기는 한층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에 존은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함께 식사라도...?"

 

 존이 입술을 달싹이는데 셜록이 갑자기 존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급작스레 거리를 좁혀오는 것에 놀란 존이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물렸지만 딱딱한 등받이의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어느새 존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셜록은 위압적인 태도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존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소름끼치도록 새파랗기만 한 그 눈은 마치 깊은 밤 나무둥치 사이로 빛나는 굶주린 늑대의 안광처럼 빛났고 존은 화살에 목줄기를 꿰뚫린 사슴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서슬이 퍼런 셜록의 기세에 좀처럼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는 존의 귓가에 문득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를 그다지 즐기지 않습니다."

 

 사뭇 차분한 어조였다.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나긋한 목소리였으나 긴장을 늦추기에는 일렀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던 존이 간신히 숨을 내쉬려는 순간 셜록이 존의 왼손을 억세게 움켜잡았다. 존은 숨이 멎을 것처럼 흡 하고 가쁜 숨소리를 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존의 손을 잡고 천천히 들어올리며 셜록이 무심한 어조로 속삭였다.

 

 "하지만..."

 

 단단하게 마디진 손가락이 존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숨막힐듯이 얽어들어왔다.

 

 "당신이라면 구미가 당기는군요."

 

 귓가로 더욱 가까이 그의 숨결이 닿아왔다. 몹시요. 셜록이 속삭였다. 미온을 띤 숨결이 간지러워 존은 진저리를 쳤다. 부끄럽고 좋았다. 동시에 두려웠다. 결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셜록이 자신을 말 그대로 먹어치우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말도안되는 상상을 하며 환상에 가까운 두려움을 품는다. 그런 존을 좀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셜록은 소중한 인형에 코를 부비는 아이처럼 콧잔등으로 존의 귓불을 부드럽게 뭉갰다. 여전히 규칙적인 셜록의 숨결과 점차 가빠오는 존의 숨결이 뒤섞였다.
 하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신음과 함께 존이 셜록을 끌어안았다. 경련 때문일까, 그때껏 손에 쥐고 있던 은제 나이프가 바닥에 부딪히며 쟁그랑 소리를 내었다.

 

*

 

 식탁 위에 눕혀진 채로 서로를 갈구하는 키스만도 수백번을 하는 동안 존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새로웠다. 상대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나서의 안온하고 안정적인 교감이 아닌, 그야말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대와의 섹스. 존이 셜록에 관해 아는 것이라곤 이름이 셜록 홈즈라는 것과 그가 자신의 사용인이라는 것뿐이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시죠."

 

 셜록의 말에 존은 푸흐흐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괴팍하고 놀라울만큼 명석한 분석의 대가이기도 하지. 하지만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는 남자라는 것이었다. 주인과 하녀의 스캔들로 여차저차 얼버무릴 수도 없는 것이다. 위험천만한 도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셜록이 그의 손을 잡았을 때, 그가 살아온 인생의 어느 순간보다도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박동했다는 것이다.
 관계의 후폭풍에 대해 미리 염려하기보다는 관계의 물꼬를 트는 데에 집중하자고 존은 생각했다. 존의 내심을 읽어낸 듯 셜록은 불안감을 떨치려는 듯 매달려오는 존의 키스에 호응해 주었다.
 혀가 또 한 번 엉켰다.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그들은 서로를 만끽할 수 있었으나 기다림으로 인해 고조된 갈증은 쉽사리 해소되지 못하고 끈덕지게 그들을 괴롭혔다. 한참 후에야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셜록은 그 와중에도 존의 베스트 단추를 풀러내리고 있었다. 촘촘하게 잠긴 단추가 하나씩 풀리는 동안 존은 스스로 느슨하게 여민 넥타이를 거칠게 벗어던졌다. 셔츠를 거의 찢어발기듯이 양 옆으로 벌리고 나서 차디찬 셜록의 손이 셔츠자락 안으로 쑥 들어갔다. 정열로 얼룩진 육체가 몸서리쳤다. 바르르 떠는 존에게 셜록이 말했다.

 

 "말랐군요."

 

 존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는 나이가 들었다. 금발에는 흰머리가 드문드문 섞여나오기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보송보송한 피부의 미소년과 감히 비할 수도 없다. 불현듯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는 셜록의 시선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볼품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걱정을 불식시키려는 것처럼 셜록은 그 딴에는 다정한 태도로 입을 맞추어오며 말했다.

 

 "또 하잘것없는 생각을 하는 중이네요."

 

 입술에서 뺨으로, 뺨에서 불거진 목젖을 더듬고, 목에서 가슴팍으로 옮겨간 입술. 질척한 애무에 흐늘흐늘해진 존이 신음을 입가로 줄줄 흘리는 것을 면밀히 살피며 셜록은 이빨을 세워 유두를 긁어내렸다. 예민한 부분에 가해지는 애무에 당황해하며 존이 움찔거리자 셜록이 그를 붙잡고 내리눌렀다.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존을 지켜보며 셜록 또한 점차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지 벨트를 끌르고 부푼 앞섶을 풀어헤치며 생각했다. 자신이 이제껏 이토록 충동적인 욕망에 몸을 맡긴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다.
 셜록은 남은 이성을 끌어모아 자신의 아래에서 허덕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몰락 귀족의 후예. 평범한 독신남. 평범한 외모.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평범하지 않다. 자신을 자신답지 못하게 만드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인가?
 나다움이라...하고 속으로 읊조리며 차가운 시선으로 존을 훑어보던 셜록은 문득 존의 왼손에 눈길이 갔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줄곧 왼손 약지에 자리잡고 있던 금반지가 식탁 촛대의 불빛을 반사하며 은은히 빛났다. 갑자기 배알이 뒤틀린 셜록은 지금껏 하던 성찰적인 고민 따위는 집어치우고 존의 손을 잡아당겼다. 존은 영문을 몰라하며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존의 손을 눈 앞까지 끌어당겨 정욕과 함께 미묘한 질투가 뒤섞인 눈빛으로 응시하던 셜록은 영문을 몰라하는 존을 흘끗 쳐다보고는 혀를 내어 존의 손가락 끝에 갖다대었다. 축축하지만 흥분되는 감촉에 존이 흐읏, 하고 나직하게 신음했다.


 한동안 할짝거리는 젖은 소리가 홀에 조용히 울렸다. 손가락을 혀로 휘감으면서도 셜록은 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상기된 뺨을 하고 잇새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는 존도 마찬가지였다. 뭉툭한 손가락 끝에서 손가락 뿌리 부분으로 옮겨간 혀는 한결 느릿하게 그러나 그만큼 더 자극적으로 움직이며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의 갈퀴 부분을 간질여대었다. 동시에 셜록은 금반지의 틈새를 혀로 적시고 은근하게 눌렀다. 낡고 흠집난 금반지가 타액에 젖어들며 미끌미끌해졌다. 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한순간, 좀처럼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던 반지가 놀라우리만치 쉽게 벗겨져나왔다.
 입 안에서 맴도는 금반지를 뱉어낸 셜록은, 여전히 존을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고 반지를 살며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두 남자가 뒹구느라 엉망이 된 식탁 한옆에 놓인 금반지는 몹시도 초라하게 빛났다.
 존은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한몸처럼 끼워져 있던 반지가 사라진 약지손가락의 뿌리는 다른 손가락보다 약간 잘록했고 덜 그을려 희어보였다. 그렇다고 아쉽게 느껴지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조금은 홀가분한 느낌에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던 존은 셜록의 시선을 눈치챘다. 자신을 바라보며, 어쩐지 눈치를 보는 듯한 그에게 존은 착잡함이 드러나는 미소를 설핏 띠어보였다. 그러나 역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셜록을 살짝 끌어당겼다.

 식사는 계속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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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

[마레]애견가

2013. 12. 13. 02:14 from BBC Sherlock/단편

마레/도그플레이/조교/약수위

 

 

 "내가 자네 형이 시킨다고 뭐든 다 하는 사람인줄 아나?"

 

 거짓말이었다.

 

*

 

 물론-그렉 레스트레이드는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그러한 '일'의 범주는 넓었다. 침실에서의 육체적인 봉사도 개중에 하나였다.
 ...글쎄, 봉사는 오히려 그가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핥아줄까요."

 

 마이크로프트가 물었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저리도 노골적인 내용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저 사람뿐이겠지. 레스트레이드는 뺨을 붉혔다. 익숙한 질문이지만 거듭 들어도 뺨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답이 없는 레스트레이드의 뒤에서 마이크로프트가 재촉하듯, 가만히 귓볼을 핥았다. 혀가 귓볼을 끈적하게 핥아올리며 나는 질척한 소리가 곧장 고막으로 스며들었다. 따스한 숨결와 촉촉한 습기가 엉겨 머릿속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숨이 가빠왔다. 목에 감긴 가죽 목줄이 답답했다. 노곤한 쾌락으로 움찔거리는 레스트레이드를 안고서 마이크로프트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느릿하게 훑었다.

 

 "흐읏-"

 

 참고 참던 신음소리가 가냘프게 흘러나온다. 부끄러워 스스로 자신의 입을 막는다. 마이크로프트는 친절하게 그 손을 떼어냈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대로, 솔직하게 신음을 내주세요."

 

 귓바퀴에 입김을 불어넣듯이 속삭였다.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도록 했다. 고개를 돌리던 레스트레이드가 뒤척거리며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바닷물처럼 파란색과 초록색이 뒤섞인 색의 눈이 레스트레이드를 응시했다. 손을 뻗어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빗듯이 뒤로 넘긴다. 개의 털을 빗겨주는 것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런 동작이다. 땀에 젖어 치덕거리는데다가 짧아 뒤로 잘 넘어가지도 않는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는 것이 뭐가 그리도 즐거운 것인지 마이크로프트는 입가에 보일듯 말듯한 미소를 띠고 있다.
 레스트레이드가 눈꺼풀을 내리깔자, 마이크로프트가 조용히 웃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개로군요."

 

 머리카락을 만지던 것을 그치고, 마이크로프트는 장님처럼 레스트레이드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더듬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손가락이 몇 개인지 세는 사람처럼 신중하게.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과정을 마치고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의 이마에 키스했다.

 

 "순종적인 개라면 주인의 손길에 기쁘게 울어주는 것이 도리겠지요."

 

*

 

 개라고 불리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다. 옷을 벗고 마이크로프트가 손수 목에 까끌한 검정 목줄을 채워주면 그때부터 레스트레이드는 말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는 사람의 말을 하지 않으니까.
 침묵은 의외로 몹시도 편했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이런저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느라 안달이 났으나 마이크로프트는 그런 말들이 아예 나올 필요가 없도록 세심하고 상냥하게 레스트레이드를 '보살폈다'.

 

 "저는 애견가이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기르는 개를 소중하게 돌보는 것이야말로 주인의 본분이 아닐까요."


 그 말마따나 마이크로프트는 침대 기둥에 목줄이 매인 채 벌거벗고 누운 레스트레이드를 위해 직접 트레이를 밀고 와 레스트레이드로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산해진미를 먹여주는 것도 모자라 입가에 묻은 것을 냅킨으로 닦아내어주기까지 한다. 그 냅킨이라는 것의 감촉이 또 너무 부드러워 레스트레이드가 깜짝 놀라자 마이크로프트는 소리내어 웃었다.
 후식으로 위스키 봉봉을 입 안에 넣어주는 마이크로프트의 손가락을 무의식적으로-처음으로 핥았을 때 그의 태도에서는 난감해하는 듯한, 또한 묘하게 난처해하는듯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에 조금은 장난스럽게, 손가락 마디마디를 혀로 더듬었다. 펜대를 잡느라 생긴 동그란 굳은살을 자근자근 깨물고, 안쪽의 연한 살을 간지럽게 핥았다. 마이크로프트는 손을 빼지 않았다. 어떤 형태의 성행위를 연상시키도록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뺐다 하며 마이크로프트의 손가락을 빠는 행위에 골몰하고 있다가 스스로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서 급하게 손가락을 뱉어낸 연후에야 마이크로프트는 가만히 내밀고 있던 손가락을 거두었다.
 소꿉놀이처럼 잔잔하던 분위기는 어느새 성적인 뉘앙스를 물씬 풍기는 분위기로 변모해있었지만 마이크로프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계속해서 레스트레이드를 시중들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도, 레스트레이드의 눈에도 무언가에 대한 열망과 긴장이 피어올랐다는 것을 서로가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 마이크로프트가 방을 나가고 나서 레스트레이드는 욕망으로 멍해진 머리로 떠올렸다. 여유로운 미소만을 띠고 있던 엄숙한 입매가 무언지 모를 동요로 비틀려 있는 그 모습은 놀랍게도 귀여워보였다. 개들이 어째서 주인의 관심에 그토록 기뻐하는 것인지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상호적인 애정의 교환이란 꽤 즐거운 일이므로.
 마이크로프트의 동요가 기쁨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개로서의 레스트레이드의 애교는 날로 늘어만 갔다. 수동적으로 '주인님'의 보살핌을 받기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매일매일, 조금씩 더...

 

*

 

 신사다운 포옹, 느릿한 애무, 잔잔한 키스. 그 다음 순서는 뻔하다.
 자신의 위에 올라탄 그의 몸 안을 꿰뚫었다. 남자와의 섹스에서 발생하는 익숙치 않은 고통 때문인지 레스트레이드는 반사적으로 손을 짚어 마이크로프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러나 저항도 잠시 그는 곧 손에 주었던 힘을 빼고 앙칼지게 손톱을 세워 길고 붉은 상흔을 남긴다. 뭉툭한 손톱이 창백한 살갗을 긁어내린다. 진심으로 밀어내려 마음먹었다면 얼마든지 밀어낼수도 있을 터. 그러나 레스트레이드는 저항하지 않았다.
 서툴지만 분명히 적극적으로 허리를 움직이는 레스트레이드의 눈가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목줄의 이음매의 쇠고리에서 찰그랑거리는 소리가 난다. 소리와 함께 흘러내린 눈물은 마이크로프트의 가슴팍에 난 손톱자국 위에 정확히 떨어졌다. 쓰라렸다.
 연결된 부분은 뜨거웠다. 그의 안으로 침투한 자신의 일부가 녹아버리는 것같다. 차갑고 미지근한 육신이 고조되며 달아오른다. 온몸을 점령하는 열기에 머릿속이 어질어질하다. 언제까지고 녹지 않을 것만 같던 만년설이 부드러운 온풍의 훈기에 속절없이 녹아버리고 마는 그 감각에 달리 저항도 하지 못하고 순응하고 만다.
 그리고 함께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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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3.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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