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존짐/중편/파이트클럽AU

 

 언제, 어떻게 잤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자신은 평소대로 하나뿐인 군청색의 실내복을 입고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그러나 반듯한 자세와는 별개로 머릿속은 마약을 오버도스한 듯 엉망진창이다.
 이게 모두 간밤에 좋지 않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것은,
 존.
 존이 누군가의 아래에 깔려서 날개꺾인 새처럼 버둥대며 삽입당하는 모습.
 존이 애무를 받으며 목을 뒤로 젖히며 신음하는 모습.
 존과 누군가의 몸이 뒤엉키고 깊고 거칠게 키스하는 모습.
 존이 절정에 다다르고-
 묘하게 사실적인 환각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급하게 몸을 일으키고 세수를 한 후, 나는 아침을 먹으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짐의 방 문 앞을 지나치며 그가 잠에서 깼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그의 방문은 닫혀 있다. 한 번도 닫힌 적이 없었는데.
 짐의 기척을 확인하고 그가 없다는 것을 안 후에 문을 열어보았다. 침대를 비롯해서 방 안은 난장판이다. 굳이 정황증거를 분석하지 않아도 진하게 풍겨오는 정액의 냄새와 방바닥에 여기저기 떨어져있는-게다가 설명하기 싫은 액체로 젖어있는-콘돔을 보면 격렬한 정사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 기분이 나빠진 채로 부엌에 갔다. 차를 끓이려고 스테인리스 주전자를 찾았다. 마침 뒤에서 부스럭 하고 인기척이 들린다.

 

 "끔찍한 꿈을 꿨어, 제임스."
 "나도 어젯밤 일이 꿈 같아."

 

 당연히 짐일 거라고 생각하고 말한 것인데 대답한 사람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존, 대체 여긴 웬일이야?"

 

 존이 먼저 와서 차를 끓인 듯 그가 들고 있는 찻잔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의 물음에 존은 입에 갖다댔던 찻잔을 내려놓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물었다.

 

 "뭐?"
 "내 집에서 뭐하는 거냐고?"

 

 아니, 질문은 사실상 헛된 것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그가 짐과 섹스한 그 남자라는 것을 단번에 파악한 나는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돌렸다.
 존은 찡그린 나의 얼굴을 보고 의자에 기대두었던 지팡이를 찾아 그것을 짚고 일어서며 'fuck...'이라고 하려다가 f까지만 발음하고 나가버렸다. 평소보다 더욱 비틀거리며 존이 힘들게 나가자 짐이 기다렸다는 듯 어슬렁어슬렁 들어와서 나에게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셜록, 저 병아리 네 친구라며? 처녀라서 뚫는 맛도 있고, 침대에서 존나 귀엽던데?"

 

*

 

 그러니까 내가 존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때, 짐이 우연히 도청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짐은 낄낄대며 나에게 그 도청 기록을 다시 재생해 주기도 했다.

 

 "저기 있잖아, 셜록...나 방금..."

 

 존은 미약하게 코를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나한테 있는 수면제 몽땅 삼켰어. 왕창 삼켰지."

 

 분명 침대에 누워서 전화를 걸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절뚝이는 걸음으로 비틀거리는 존을 상상했다.

 

 "진짜 죽으려고 약을 먹은 건 아냐. 음...이런 말 해도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 너랑 같이 사건 해결하고 다닐 때는 다리도 안 아팠어. 정말 네 말이 맞더라고, 셜록...네가 정말 내 다리를 고쳤어...근데 갑자기 너는 사라지고...죽은 줄 알았는데 전화해보니까 멀쩡히 살아었있구나..."

 

 그의 목소리가 흐려진다. 그가 짐짓 쾌활한 어조로 말한다.

 

 "나 죽는 거 중계방송할까?"

 

 목소리가 아주 약간, 느려졌다.

 

 "나 죽은 뒤에 내 혼령하고 통화해 볼래?"

 

 약 기운에 맛이 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그런 목소리였다.

 

 "숨 끊어지는 소리 들어봤어?"

 

 짐에 따르면 짐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그 전화를 연결한 다음, 발신지를 추적하며 주소를 알아낸 후 존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짐 모리어티가 말이다.

 

*

 

 "...숨이 끊어질 땐 어떨까?"

 

 존은 멍한 목소리로 수화기를 붙잡고 말을 하고 있었다.

 

 "숨 넘어가는 소리가 내가 전쟁터에서 봤던 죽어가는 사람들처럼...그렇게 으시시할까?..."

 

 존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짐 모리어티의 귓가에 울린다.

 

 "이제 내 숨이 끊어진다...10...9...8..."

 

 짐은 키득키득 웃으며 존이 살고 있는 제대자 전용 숙소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올라갔다.

 

 "5...4...3...잠깐만, 누가 왔- 이런, 빨리도 도착했네. 그런데 내가 널 불렀던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잠자코 날 따라오라고."

 

 약기운에 취한 존은 짐이 이끄는 대로 비틀비틀 끌려갔다. 존이 짐에게 거의 쓰러질 듯 기댄 채로 간신히 계단을 다 내려왔고, 존은 건물 입구 계단을 내려오면서 크게 한 번 휘청였다. 짐이 존을 부축하자, 존은 짐에게 매달려 어눌한 발음으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난 지금 잠들면 황천행이야..."

 

 존이 짐의 목에 팔을 두르고 서툴게 키스하며 말했다.

 

 "잠 못 들게 해줘, 밤새도록..."

 

*

 

 "꼭 홀린 것 같다니까."

 

 그렇게 밤의 무용담을 펼쳐놓던 짐은 낄낄 웃어댔다. 늑대같은 녀석...나는 무표정으로 티스푼으로 밀크티를 휘휘 저었다.
 짐이 갑자기 눈빛을 진지하게 하고는 나에게 물었다.

 

 "너도 같이 잤지?"
 "안 잤어."
 "한 번도?"
 "없어."
 "관심 없어?"
 "천만에, 전혀!"

 

 나는 엄청 화가 났다.

 

 "정말? 솔직히 말해."
 "정말이야."

 

 이거 점점 더 열 뻗치는 군.

 

 "쟨 다루기 힘들어. 가까이 하지마."

 

 그는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셜록, 잠깐 얘기하자고. 거기 앉아봐."

 

 그가 드물게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존에게 나에 대해 말하지마."
 "내가 뭐하러-"
 "누구한테든 내 얘기를 함부로 하고 다니면, 우린 끝이야."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속해 줘."
 "좋아."
 "약속하지?"
 "약속할게."
 "약속해?"
 "약속한대두."

 

 끈질기게 손을 내밀어오며 마치 맹세의 증표라도 되는 듯 악수를 요구하던 짐은 내가 그의 손에 내 손을 갖다대자 그것을 재빠르게 잡아 흔들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세 번 약속했어."

 

*

 

 그 날 사건 해결은 좀 미루더라도, 존이 죽는 걸 지켜봐 줄 걸 그랬다.

 

 "아! 아! 아앗! 하읏, 더, 더어-"

 

 어찌나 짐승처럼 해대는지 존은 신음소리를 내느라 항상 목이 다 쉬어버린다. 언제나 거칠게 섹스하는 터라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망가져버린 듯 짐의 침대가 그들이 움직임에 따라 삐걱삐걱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짐의 방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방으로 옮기면 저 소리가 안 들리겠지만 난 방을 옮기지 않았다.
 하루는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가고 있는데 마침 방문을 열던 짐과 마주쳤다. 짐이 물었다.

 

 "뭐하는 거야?"
 "물 좀 마시려고."

 

 땀에 젖은 짐이 안쪽의 침대를 쓱 가리켰다. 침대에 엎드려, 하얀 엉덩이를 내보인채 사정 직전에 몰려 발개진 볼로 끙끙대는 존이 보인다. 짐이 다소 짖궂어보이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네가 마무리할래?"
 "됐어, 사양할래."

 

 존이 힘겹게 고개를 쳐들며 짐에게 물었다.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
 "닥쳐."

 

 짐이 존에게 말하며 방문을 쾅 닫았다.

 

*

 

 오랜만에 경시청에 갔는데, 레스트레이드가 따라붙어서 말했다.

 

 "너희 집에 난 화재 사건의 단서가 잡혔어."
 "그래요?"

 

 현재 짐의 집에서 내 집처럼 편하게 살고 있는 나는 그 전의 집에 신경을 쓰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저 화재 보험금이나 좀 탔으면 싶었다.

 

 "너희 집 자물쇠에 누가 프레온 가스를 뿌리고 끌로 내리친거 알아?"
 "제가 알 턱이 없죠."
 "금시초문인가?"
 "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다이너마이트에 말이지, 옥실산염 잔여물이 남아있었다고 하더군. 이해 되나?"
 "사제 폭탄이라는 소리군요."
 "셜록, 손이..."

 

 손이 떨렸다. 다른 손으로 떨리는 손을 잡고 깍지를 낀 후 말했다.

 

 "죄송합니다. 충격이 커서..."

 

 레스트레이드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잠깐 나를 보더니 다시 서류에 고개를 돌렸다.

 

 "화재 감식반 말로는 그 폭탄을 설치한 자가 가스를 누출시켰을 거래."
 "가스가 기폭제였군요. 정말 황당하네요."
 "셜록, 혹시 폭탄 만들 줄 아는 사람 중 원수진 사람은 없나?"
 "딱히 폭탄 제조에 특화된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군요. 하지만 옥실산염 잔여물이 남을 정도로 허술한 폭탄이라면, 누구라도 만들 수 있는 거겠죠. 아시다시피, 인터넷으로는 뭐든 찾아볼 수 있지요. 그리고 경감님도 알다시피 저는 범죄자 한 둘이랑 원수가 진 것이 아니잖습니까."

 

 레스트레이드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존과 짐은 섹스할 때만 찰떡같이 붙어있다가 따로 놀기 일쑤였다. 존은 짐에게 쌓인 스트레스를 자신에게 풀려는 듯 했고, 짐은 존을 셜록에게 맡겨놓은 채 방 안에 틀어박혀서 비밀스런 일을 했다.
 짐은 전처럼 자신의 일에 나를 끌어들이려 애쓰지 않았고, 나 또한 레스트레이드와 사건을 해결하느라 바빴다. 존은 종종 나를 따라 사건 현장에 오다가, 여행을 떠나기 전처럼 사건 현장에는 꼭 나와 같이 가게 되었다.

 

*

 

 비어있던 맨션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드나드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천재 해커 소그룹에서 봤던 펑크족처럼 꾸민, 또는 전형적인 너드(nerd)처럼 보이는 사람들이나, 예전에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곳에서 본 우스꽝스러운 비실이 꼬마가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그만의 군대라도 조직한 듯 종종 그들에게 뭔가 비밀스러우면서도 심각한 지시를 내리고,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그 지시를 이행하는 것에 힘썼다. 무슨 일인지는 궁금했으나 어쩐지 짐과 따로 이야기할 시간이 줄어들었고, 최근 들어 심각한 테러 사건이나 국가의 중요 건물 침입 사건이 잦아진 터라 그 사건을 수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침입당한 건물 중 하나는 옛 동창인 세바스찬이 꽤 높은 지위에 올라 있는 거대 은행이었다. 그의 의뢰로 죽은 은행원의 사인을 밝히다가 존과 함께 중국의 마피아들에게 죽을 뻔 하기도 했다.
 또 예전에 배후 불명의 택시 기사의 무차별 연쇄 살인 사건을 수사하면서 본 핑크색 아이폰을 복제한 아이폰으로 전달되어오는 사건들은 시간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짐에게 시간을 할애할래야 할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인질들까지 잡혀있다는 사실이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마음 속 깊이 파고들어 집중력을 흩어놓았다. 사건은 무사히 해결했지만 한 번은 인질로 잡힌 노인이 인질의 목소리를 묘사하는 바람에 인질이 잡혀있던 장소는 폭파되고, 무려 열두명이나 사망했다.
 네 번의 사건이 끝나고, 한 동안 그 망할 핑크색 아이폰은 잠잠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가자, 짐과 나의 집은 전에는 보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비어있던 큰 방에는 마치 텔레비전에 종종 나오는 수사국의 본부처럼 컴퓨터, 대형 스크린 등의 첨단 기계장치로 가득했다. 북적대는 사람들의 말소리, 망할 괴짜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웅성거리는 소리와 시끄러운 전자음에 질려 귀를 막고 뛰쳐나온 나는 짐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는 잘 만났다는 듯이 그를 잡고 말했다.

 

 "집에 대체 어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거야?"
 "셜록."
 "무슨 일을 꾸미든, 내게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나는 방 벽을 치며 소리쳤다.

 

 "젠장!"

 

 짐이 다리를 건들거리며 말했다.

 

 "뭘 원해? 보고서라도 쓸까?"

 

 나는 짐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짐의 옷차림이 예전과는 사뭇 다른 것을 눈치챘다. 고급스런 은회색 수트, 상당한 가격대임이 분명한 넥타이, 그리고 백금제 넥타이 핀, 분명 돈 꽤나 썼을 법한 수제화...

 짐은 나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 일은 각자 알아서 끼는 거야."
 "미리 말해 달란 말이야!"
 "뭐든지 말해주길 기다리고만 있지 마. "

 

 나는 그의 생각 외로 냉정한 어조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리고 셜록, 네가 알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지 알 수 있었어. 왜냐? 너는 네가 말했듯이 빌어먹게도 '똑똑'하니까. 하지만 너는 관심조차 없었잖아? 그동안 내가 여기저기 끌고 갔던 건 뭐라고 생각하는거야?"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제대로 된 정신 상태가 아니었던 나였다. 이런, 이것도 내 잘못이다. 그렇다. 내가 짐의 일에 대해 알지 못했던 건 내 잘못이다. 내 부주의다.
 결국엔 화를 참지 못하고 터뜨리고야 말았다.

 

 "젠장, 지겨워! 너도, 저 병신들도, 존도!"

 

 그러고도 아직 미진한 느낌이 들어 한 번 더 소리쳤다.

 

 "다 신물난다고!"

 

 짐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언제 차갑게 대했냐는 듯 부드럽게 토닥인다.

 

 "알았어, 알았다고."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는 나를 다독였다. 
 그러고는 특유의 높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왜 네 집을 폭파했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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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존짐/중편/파이트클럽AU

 

 그러나 몇 달 후에는 사정이 바뀌었다. 마이크로프트의 요청으로 나는 그를 따라 여기저기 외국으로 떠돌아야 했다. 명목상으로는 그의 일을 도우라는 것이었지만 그의 수하들의 정보망으로 분명히 내가 이런 저런 환자들의 모임을 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접수되었을 것이고, 그 사실은 곧바로 마이크로프트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 자명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일을 도우라는 핑계가 무색하게도 나를 외국의 호화스런 호텔 방에 내팽개쳐둔 채로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그 지긋지긋한 비밀 업무를 수행하러 갔다.
 마이크로프트가 나를 내버려두고 가면 시차 때문에 잠을 잔다. 자지 않을 때는 창 밖을 내려다보며 줄담배를 피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해가 기울어있다. 무의미하게 텅 빈 채 지나가는 시간.
 삶은 매 순간 사라져간다.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눈 뜰 때, 나도 바뀔 수 있다면...

 

*

 

 여행은 삶을 축소시킨다. 일회용 설탕, 일회용 크림, 일회용 버터, 소꿉장난 같은 음식, 린스 겸용 샴푸, 샘플용 구강 청정액, 소형 비누, 기내에서 만나는 일회용 친구들, 비행 시간 동안의 짧은 만남, 이 여행을 하면서 얻는 전부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모두 사라진다. 비행기가 급강하하거나 급상승할 때마다 나는 충돌이나 추락을 꿈꾼다. 이게 모두 내 주변을 숨막히도록 감싸고 있는 지루함 때문이다.
 그렇게 망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중얼거린다. 기내의 정적을 뚫고 들리는 목소리는 기묘한 음률이라도 지닌 듯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비상구 옆에 앉을 때, 비상시 의무 사항을 지킬 수 없으시다면, 승무원에게 좌석 교환을 요구 바람.'"

 

 내가 중얼거렸다.

 

 "거 참 부담되겠군."
 "자리 바꿀래요?"

 

 비상구 옆에 앉아 있는 건 그였다.

 

 "아뇨, 나도 그런 건 젬병이라."

 

 그가 진지하게 물어본 건 아니라는 듯 곧바로 말했다.

 

 "공중에서 문 열어 봤자지. 다 형식뿐인거죠."
 "동감입니다."

 

 적당히 대답했다. 그는 옆에서 계속 말을 건다.

 

 "산소 마스크는 왜 쓰는 걸까요?"
 "숨을 쉬려고 쓰는 거 아니겠어요."

 

 그가 너무 평범하잖아요 그건, 이라고 웃고는 말했다.

 

 "산소를 흡입하면, 추락할 때 정신이 몽롱해져서 조용히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죠."

 

 그는 기내용 좌석에 항상 꽂혀있는 비상 상황 대처 방법에 대한 책자를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걸 좀 봐요. 바다에 비상 착륙 하는데 이 그림의 사람들은 다 미소짓고 있잖아요?"
 "그거 재밌군요."

 

 정말로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기내용 친구들에게 의례적으로 던지는 질문을 그에게도 던졌다.

 

 "뭘 하십니까?"
 "뭘요?"
 "직업 말입니다."

 

 사실 그가 물어보지 않았어도 '보았기 때문에' 이미 대충은 파악하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머리 손질이 되어있으며, 속눈썹은 염색까지 했고 이마에는 이성애자 남성이라면 절대 바르지 않을 화장품을 바른 흔적이 있다. 게다가 눈에서 명백한 피곤함이 느껴졌는데, 클럽 죽돌이들에게서 자주 보여지는 그런 눈이다. 마지막 결정타는 캘빈 클라인 글씨가 보이게 입은 천박한 팬티. 그런 것에 비해 손목이 경직되어있고 검지가 연속적인 마우스 클릭을 하느라 여전히 다른 손가락이 비해 눌려 있다. 즉 그는 게이인 컴퓨터 프로그래머.

 그가 의아한 어조로 말했다.

 

 "왜 물어보는 거죠? 흥미도 없으면서."

 

 정곡을 찔린 내가 작게 웃자 그가 내 표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웃는 표정이 비틀려있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비행기 좌석 바닥에 놓았던 사무 가방을 꺼내었다.

 

 "가방이 똑같군요."

 

 내가 그렇게 지적했지만 그는 그 말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가방을 열어 내게 보여주었다. 뭔가 분해해놓은 것 같은 기계장치들, 본래 다른 기계에 속했던 것이 분명한 초록색 판들을 연결해 놓은 알 수 없는 전선 뭉치들...

 "난 프로그래머입니다. 현대의 창조가."

 그가 제임스 모리어티였다.

 

 제임스, 아니 짐은-그는 짐이라고 불러달라고 우겼다-기계 장치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복잡한 장치도 '키 코드'하나 있으면 바로 해킹이 가능하다는 걸 아나요?"

 

 그건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정말입니까?"
 "맞아요. 그 코드만 가지고 있으면 뭐든지 가능하죠."
 "정말요?"
 "그럼요, 알기만 한다면..."

 

 그가 후후 웃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 일회용 친구들 중에는 당신이 가장 재미있군. 이건 내 지론인데, 기내에선 모든 게 일회용이지."
 "똑똑하시군."
 "고맙소."
 "그래서, 똑똑해서 잘 된 게 있습니까?"
 "물론이죠."
 "그럼 계속 잘해보셔."

 

 그가 매몰차게 말하고는 자기 서류가방을 들고 좌석에서 일어났다.

 

 "엉덩이를 보이고 지나가면 실례던가?"

 

 따위의 말을 남기고.

 

*

 

 운명이란 묘한 것이었다. 공항 검색대에서 내 짐이 나오지 않았다. 검색대 직원은 역시 자신도-말단이지만-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일처리가 느렸다. 게다가 섹스 기구에 대한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해댔다.
 그리고 결국에는 짐은 되찾지 못했다.
 그 안에는 어느 국가의 법령에도 위반되지 않는 합법적인 향정신성 약물의 모든 종류가 있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접었다. 공항 바깥에서는 아까의 짐 모리어티가 늘씬하게 빠진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쌩 하니 지나갔다.

 

*

 

 내 집은 닭장같은 15층의 아파트다. 벽은 두꺼워야 한다는 것이 나의 또다른 지론이다. 보청기를 잃은 이웃의 노인이 TV를 크게 틀거나 멀쩡한 가구가 불에 타서 창 밖으로 튕겨나갈지 모르니까.
 다들 예상했다시피, 불에 탄 건 내 방이었다. 창 밖으로 튕겨져 나온 가구도 내 가구였다.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튕겨져 나온 것들이 싸구려 가구와 향정신성 약물, 그리고 244종의 담뱃재 뿐이라니 정말이지 창피한 일이었다. 경찰들은 '오븐의 점화 불씨가 꺼져 가스가 조금씩 새며 실내에 매일 쌓이다가 냉장고 컴프레서에 의해 발화'되었다고 추정했다.  나는 항상 가지고 다녔던 존의 연락처를 꺼내들고 망설였다. 전화를 걸었지만 차마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존은 전화를 끊었다.
 문득 생각이 난 것은 아까 비행기 안에서 나를 매몰차게 떠난 프로그래머였다. 짐 모리어티. 그가 처음에 명함을 주었었다. 내가 왜 그에게 전화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역시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포기하고 공중전화 부스를 나가려는데 놀랍게도 공중전화가 울렸다. 마이크로프트는 분명히 해외에서 비밀 임무에 열중하는 중이므로 지금 전화할 리가 없다. 형이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면 이미 전갈이 왔어야 했다.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요?"

 

 특이한 목소리, 특이한 엑센트. 짐 모리어티의 목소리다.

 

 "짐?"
 "누구냐구?"

 

 나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불안정하게 떨리는 것을 참고 말했다.

 

 "기내에서 만났죠, 가방이 같았던...그 똑똑한 남자요."

 

 '똑똑한'을 언급하자 그제야 남자는 기억이 난 듯 말했다.

 

 "아! 네, 셜록 홈즈씨군요."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전화 안받으시던데,...알고 있나 모르겠지만 이거 공중 전홥니다."
 "발신 추적해서 걸었죠. 그 정도는 나한테 껌이죠. 그나저나, 무슨 일이죠?"

 

*

 

 나는 자초지종을 말한 후 그와 바에서 만나기로 했다. 평소에는 전혀 가 본 적 없는 게이바였으나, 어쨋든 나는 급한 상황이므로 그가 정하는 약속 장소가 어디든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있게 마련이죠."

 

 약간 높은 목소리와 특유의 묘한 어조가 합쳐져 위로의 기색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의례적으로는 위로를 하고 있는 게 맞았다.

 

 "자다가 성기를 찔린 남자도 있다잖아요?"

 

 대체 무슨 맥락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나는 잃어버린 내 담뱃재에 대해 그에게 토로했다.

 

 "난 담배를 살 때마다 이렇게 나 자신에게 말합니다. '이게 마지막이야'. '더이상은 안 피울 거라고'. 난 내가 구할 수 있는 담배는 다 모았었어요. 무려 244종이나 되었죠. 모든 게 완벽했는데..."
 "다 날아간 거군요."
 "사라졌어요."

 

 처량한 목소리의 내게 그가 말했다.

 

 "XX가 뭔지 압니까?"

 

 희귀한 담배의 이름이다. 나는 그에게 담배의 이름, 원산지 등을 말했다.

 

 "우린 담배 종류도 외우죠. 그게 어디에서 나온 건지도. 그런데 사실 그런 약물이 현대인들에게 필요할까요?"

 

 그가 물고 있던 담배를 흔들며 말했다.

 

 "이건 구속구예요. 복잡한 현대 사회에 눌려 억압받고 사는 시민들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척 하면서 사실은 중독되게 만드는 거죠. 사회 체제를 무시하고 약물, 섹스, 스포츠에만 집착하도록. 약물로 뭔가 위로를 받겠다는 건 개소리일 뿐이라구."

 

 그가 나에게 계속 말했다.

 

 "사실 당신이 모은 담뱃재가 없어진들 어떻다고? 하긴 당신에겐 비극일 수 있겠지."
 "아니, 비극까진 아닙니다."
 "당신 여흥거리를 잃었잖소."
 "그렇긴 합니다만...화재보험금이 나올 겁니다."

 

 그가 여기 불쌍한 바보가 있다는 듯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죠?"
 "당신이 또 약물의 노예가 될까 봐. 뭐 당신이 알아서 하겠지만."

*

 
 바를 나선 후 나는 말했다.

 

 "늦었군. 술 잘 마셨습니다. 전 이제 호텔로 가겠습니다."

 

 그가 만류했다.

 "무슨 말이예요?"
 "네?"
 "호텔이요? 그냥 나한테 부탁하세요."
 "뭘 말입니까?"

 

 그가 담뱃재를 탁 털며 말했다.

 

 "괜히 뺄 거 없다니까. 갈 데가 없어서 전화한 거잖아요?"
 "아닙니다."
 "그냥 솔직히 말해요. 격식 차리지 말고요."

 

 나는 망설이다 짐에게 말했다. 사실 그의 표정은 읽기가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처럼 직설적으로 물어볼 수 있으면 편할 텐데.

 

 "상관없겠어요?"
 "말 되게 돌리네. 원래 그런 성격 아니잖아요."
 "당신 집에 가도 됩니까?"

 

 그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물론."

 

 고마워요, 라고 나는 말하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

 짐 모리어티는 야행성 인간이었다. 그는 남들 다 자는 밤에 프로그래밍을 했다. 그가 프로그래밍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남을 엿먹이기 위해서였다. 자세한 내용은 나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비밀스러웠다.
 그는 개인 맨션에서 2년 정도 살아왔다고 했다. 실력 좋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답게 보안은 철통같다. 그는 집의 비밀번호를 아무에게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비밀번호는 우습게도 간단하면서도 쉬웠다. 101000.
 그가 이 집을 샀던 무단 점거를 했던 난 상관없었지만, 이거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겠다. 집은 무섭도록 깔끔하면서도 지저분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짐 모리어티만의 질서가 있었다는 뜻이다. 선반에는 옛 친구의 해골이라는 것이 놓여있고 고급 벽난로 위에는 잭나이프가 푹 꽃혀있더라도, 어떤 넓은 방은 아예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있고 다른 조그마한 방은 무언지 모를 서류의 산으로 문을 열기가 겁날 정도였지만 말이다.
 밤엔 이 맨션 전체에 사람이라곤 짐과 나뿐이었다. 내가 레스트레이드에게 받아온 서류를 펄럭이며 넘기는 소리, 짐이 키보드를 간헐적으로 두드리는 소리 말고는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거의 서로의 삶에 간섭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부부처럼 살았다. 짐은 종종 자신이 이끄는 천재 해커 소그룹이라던가,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약칭 테사모-에 나를 끌고 갔는데, 내가 반복해서 갈 때마다 점점 그 수가 불어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나는 도저히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떠들어 댔지만 혼자인 것이 익숙한 나는 그것이 오히려 편했다.
 그러면서 나 또한 활기를 되찾았다. 천재 해커 소그룹에 동참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짐과 어울린 이후로 레스트레이드가 나에게 넘기는 사건이 많아졌고 그 사건은 매우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

 

 그러다가 뜻밖에도, 생각지도 못한 밤 시간에, 존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존은 나에게 따졌다.

 

 "몇 주 간 어디 갔었던 거야?"
 "존?...어떻게 전화한 거야?"
 "전에 네가 가르쳐줬잖아. 요즘은 모임에 안 나오던데?"
 "안 나가면 잘 된거 아니겠어? 그나저나 내가 모임에 가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몰래 가봤지."

 

 그의 대답에 약간의 수치심이 엿보였다. 그의 귀여운 반응에 나는 전화기 너머로 몰래 미소지었다. 나는 그에게 절반의 진실만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요즘에는 다른 모임에 나가."
 "정말?"
 "그래. 하지만 걱정 마, 전처럼 환자들이 모이는 그런 모임은 아니니까."

 

 그 때 노트북 화면에 레스트레이드가 보낸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최근에 약물을 이용한 무차별 연쇄살인사건에 관한 자료였다.

 

 "저기 있잖아, 셜록-"

 

 그가 뭐라고 말하는 것이 들렸지만 잠깐 휴대폰을 내려놓고 레스트레이드가 보낸 이메일을 읽었다. 그리고 그 이메일에 답장을 하는 사이, 전화는 끊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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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존짐/중편/파이트클럽AU

 

 '짐 모리어티'를 아냐고, 다들 내게 묻는다.

 

 "3분 남았다~곧 폭발할 거야!"

 

 내 입에 총구를 쑤셔넣은 채, 그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정신나간 듯 낄낄거린다.

 

 "끝으로 한 말씀 해야지?"

 

 총을 물고 있으면 발음이 새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입을 우물거리자 그가 다소간의 아량-이걸 아량이라고 해석해도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을 베풀어 총을 입에서 빼준다.

 

 "아무 생각이 안나는군."

 

 난 잠시 후에 있을 대참사를 깜박 잊고, 저 총이 과연 깨끗할지를 생각했다.

 

 "이제야 슬슬 재미있어지네."

 

 그가 총을 들고 뒷짐을 진 채로 전면의 유리창 밖을 바라본다. 나는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은 그대로 얼굴을 돌려 그의 얼굴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본다.
 그렇다.
 여긴 대참사를 감상할 나를 위해 모리어티가 배정해준, '셜록' 한정의 로얄석. 

 총칭 '초토화작전'의 폭파 부대는 내가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주변의 12개의 거대건물을 폭약으로 도배했다. 2분 후면 연쇄적인 폭발로 인해 몇몇 동네는 쑥대밭이 되어버릴 것이다. 모리어티가 알고 있기에,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2분 30초. 우린 큰일을 한 거야."

 

 난 문득 깨달았다. 그가 들고 있는 총, 건물에 설치한 폭탄, 그리고 그가 설파해온 혁명 나부랭이가 '존 왓슨'이라는 남자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

 

 그러니까 그건, 내가 다섯 살 때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고, 어릴 때는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가 급사하신 후에는 형인 마이크로프트와 함께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할 때부터의 이야기다. 다만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이 간과한 점은, 마이크로프트도 아스퍼거 증후군에 걸린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항상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종종, 아니 가끔은-나보다 똑똑했기 때문에 아스퍼거 증후군 특유의 증상을 숨기는 것에 능했다.
 어쨋든 간에, 어릴 적부터 정신병원을 제집처럼 출입하느라 홈즈 가문 혈통에 잠재하는 것이 분명한 비사교적인 유전자는 더욱 활발히 날뛰었다. 솔직히 지금 와서 말하건대 정신병원에서 준 약이 나에게 있다고 의심되는 아스퍼거 증후군의 증상을 치유하는 데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마이크로프트는 내가 약을 성실히 먹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 일곱번째 생일 선물로 받았던 스마트폰으로 병원에서 처방한 약들의 세부 성분을 검색해 본 결과 그 알약들은 멀쩡한 사람을 둔탱이로 만드는 것 외에는 별다른 효능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내 판단이 옳다는 것을 믿고 있다.

 

*

 

 잠깐, 그 후로 다시 가자.

 난 6개월간 불면증에 시달렸다. 잠을 자지 못하면 모든 게 희미해진다. 마치 복사를 계속한 탓에 점점 흐려지는 복사 결과물처럼.

 우주에 관해서는 조금도 알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그 우주 탐험이라는 허울만 좋은 것이 대기업의 배를 불리고 그것을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건 알고 있다.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처넣어진 채 밑바닥에 남아있던 스타벅스 커피가 똑똑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관자놀이는 주무르고 있는 내게 레스트레이드가 다가와 서류를 내밀며 뭐라고 말한다.

 

 "여기 지난 번에 네가 감식반에 의뢰한 먼지의 감식 결과가 나왔어."

 

 레스트레이드는 지루해서 죽어가는 내게 가끔 사건을 던져주는 형사다. 화요일에는 늘 저 청색 넥타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어떡하고요?"
 "이게 먼저야. 우린 지금 출발해야 해."

 

 도노반이 가져다준 커피의 카페인이 내 커피 안에 담긴 것보다 배라도 되는 듯 그는 힘이 넘쳤다.

 귀가 후에는 언제나 코카인 한 모금. 나는 부인할 수 없는 약물의 노예가 되어있었다. 사용해본 적이 없는 약물, 특이한 약물, 또는 새로운 조합의 약물은 꼭 사서 써 봐야 직성이 풀렸다. 최근에는 담배에 맛이 들려서 지금 거실은 내가 피운 담뱃재로 범벅이 되어 있다. 244가지의 담뱃재 중 어떤 것이 가장 나를 몽롱하면서도 비정상적 활기에 넘치게 만들어 줄 것인지 나는 연구한 것이다. 내겐 없는 담배가 없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찾아보기 힘든 손으로 직접 말아서 만든 수제 쿠바산 시가까지 종류별로 다 갖추고 있을 정도였다. 어릴 땐 현대의 범죄 사건 목록을, 이젠 향정신성 약물의 분석에 골몰한다.

 

*

 
 "불면증으로는 죽지 않아요."
 "몽유병은요? 졸다가 깨 보면 엉뚱한데 가 있어요."
 "긴장을 풀어야 해요."
 "약은 처방해주시지 않는 건가요?"

 

 의사가 약을 처방하길 기다린다.

 

 "아뇨, 잠만 잘 자면 약은 필요 없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야채를 더 많이 먹고 운동을 하세요."

 

 망할 앤더슨, 넌 의사도 아냐! 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필사적인 불면증 환자의 호소를 꾸며내었다.

 

 "제발, 너무 고통스럽다고요!"

 

 그가 돌아서서 말했다.

 

 "고통스럽다고요? 화요일에 감리교회에 가서 전쟁 귀환병들을 보면 그 말 못 할 겁니다."

 

 그리고 나는 진짜로 감리교회로 갔다.

 

*

 

 갔더니 고통은 커녕 전쟁 폭격이나 사격으로 생긴 신체 장애로 인해 자기 연민에 푹 빠져 추하게 울어대는 멍청이들만 가득하다. 그리고 우두머리 격인 심리 치료사는 "토마스를 격려해줍시다, 여러분."이라고 지껄이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만이 이런 고통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니 자신도 얼마든지 자기 연민을 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가 되어 준 토마스에게 "고마워요, 토마스."라고 지껄인다.

 

 "여러분의 용기 있는 모습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됩니다."

 

 계집애처럼 징징 짜는 모습이겠지.

 

 "이제 1대1로 앉아 토마스처럼 터놓고 대화해 봅시다. 짝을 만드세요."

 

 일단 왔으니 중간에 나가는 것은 어색할 터였다. 또한 전직 군인인 찡찡이들의 군상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있다 보니 지루하지는 않던 터여서 조금만 더 있어보기로 했다.
 그때 그 또한 처음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는 듯, 무리에 동화되지 못 한 채 나를 향해 어색한 시선을 돌린 남자가 보였다. 짧게 자른 밀짚 색깔의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남자다. 평소 성격은 대찬 듯 하지만 지금의 익숙치 않은 상황에 불안한 듯 시선을 떨고 있다. 그러다가 그가 결심한 듯 절뚝이며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 괴상한 걸음걸이라니.
 어느새 내 가까이 다가온 그가 자기 손을 내민다. 얼떨결에 악수를 했다. 빌어먹을 영국 신사의 반사 행동이란. 내가 미처 손을 빼내지 못한 사이 그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난 '존'이라고 합니다."

 

 하나 빼먹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이런 심리치료회동에서는 언제나 성 없이 이름으로만 서로를 지칭한다.

 

 "압니다, 존.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인가요, 이라크인가요?"

 

 그가 잠깐 굳어있다가 말했다.

 

 "뭐라고요?"
 "어디죠? 아프가니스탄인가요, 아니면 이라크인가요?"

 

 그가 망설이다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입니다. 미안하지만 어떻게 알았죠?"
 "그리고 당신의 주치의는 당신이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 림프관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죠. 유감이지만 그 진단은 정확한 것 같군요."

 
 그가 '그걸 대체 어떻게 안 거지?!'라는 겁 먹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반응이다. 나는 갑자기 지루해져 그의 손을 놓고는 코트를 챙겨입었다. 그가 나를 잡고 묻는다.

 

 "당신 그걸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그의 눈빛이 약간의 공포감, 그리고...호기심, 놀라움 등으로 가득하다. 한 번 반응을 떠 보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본 겁니다. 일단 이 모임에 온 것 자체, 그리고 짧게 친 머리는 군인 티가 물씬 나죠. 하지만 당신 재킷의 안쪽에 보이는 그 배지는 여기 보이는 다른 전직 군인들과는 다르게 당신이 군의관이었다는 걸 증명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의가사 제대했다는 사실은 당신을 보면 나오는 사실이죠. 당신의 얼굴은 검게 탔지만, 손목 위론 타지 않았습니다. 외국에 나가긴 했지만 선탠하러 해변에 갔다온 것은 아니란 겁니다. 그리고 그 다리를 보면 의가사 제대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겁니다. 게다가 그 정도의 검기로 피부가 탈 정도라면 중동. 중동에 가는 영국 군인들의 배속지는 아프가니스탄 아니면 이라크 정도죠."
 "주치의의 진단 내용에 관해서는 어떻게 안 거죠?"
 "걸을 때는 림프관의 문제가 진짜로 있기 때문에 잘 걷지 못하더군요. 그러나 아까 서 있을 땐 멀쩡해 보였죠. 그렇기 때문에 심리적인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심리적인 이유란 부상의 원인이 된 환경이 트라우마라고 추론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주치의가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이 다음 질문일 것 같아서 미리 말하는 건데, 당신은 심리적인 림프관 이상을 겪고 있죠. 그렇다면 당연히 주치의도 있을 거란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나를 멍 하니 보다가 말했다.

 

 "그거...놀라운데요?"

 

 그의 반응에 오히려 내가 약간 당황하여 반문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이죠. 대단해요. 정말 대단합니다."

 

 내가 맥이 빠져 말했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더군요."

 

 그가 물었다.

 

 "보통은 어떻게 말하는데요?"
 "재수없어!"

 

 내가 과장된 어조로 말하자 그가 큭큭 하고 웃는다. 그러다가 주위를 살핀다. 가만 보니 우리 빼고는 다들 서로를 부여잡고 엉엉 울고 있다.

 

  존과의 짧고도 즐거운 대화 후에 집으로 갔다. 그 날 밤 만큼은 약 생각이 나지 않았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망각으로의 침잠, 어둡고 고요한 평화. 나는 자유를 찾았다.

 

*

 

 불면증이 언제 있었냐는 듯 싹 사라진 후로 나는 모임 중독자가 되었다. 그저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듯한 체념적인 슬픈 얼굴로 있으면 제일 동정을 받는다. 그들이 크게 울면 난 더 크게 울었다. 나는 죽어가지도, 아프지도 않았고, 단지 살아 숨쉬는 이 세상의 일부였다. 그렇게 나는 인간의 감정을 흉내내는 것을 습득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즐겁고도 스릴 넘치는 학습의 과정을 '존 왓슨'이 망쳤다.

 

 "당신은 아픈 데가 없으면서도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는데, 왜죠?"
 

 그걸 들킨 것은 내가 가는 환자들의 모임이 일반적으로 허름한 병원의 세미나실을 야간에 빌려 열린다는 사실때문이었다. 전직 군의관이고 다리를 심하게 저는 것 외에는 훌륭한 의학 대학의 박사 학위와 경력을 가진 존은 바르톨로뮤 병원에 야간 응급실 의사로 재취직하여 힘들게 생계를 잇고 있었다. 존이 그 병원에서 일하는 것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백혈병 환자, 악성 빈혈 환자, 결핵 환자들의 모임이 그 병원의 빈 세미나실을 빌려서 진행된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되었다.
 그는 내가 여러 모임에 동시다발적으로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묵인하여 주었으나 나와 어쩌다가 눈이 마주칠 때 만큼은 그의  동그란 푸른 눈으로 없던 양심에 가책을 주었다.

 

 난 나흘 간 한숨도 자지 못했다. 불면증일 때는 잠도 못 자지만 깨어있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그렇게 존의 시선을 견디다 보니 불면증은 다시 찾아왔다.

 

 존은 참 찝찝한 존재였다. 건드리면 안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혀로 자꾸 건드리게 되는 입 천장의 상처 같은 존재.
 그리고 그 찝찝함을 참지 못한 나는 나에게도 충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모임의 쉬는 시간에 충동적으로 그를 찾아 끌고 구석진 곳으로 갔다.

 

  "당신은 내가 병이 없으면서도 그런 모임에 간다는 사실을 알아."

 

 일부러 그를 화나게 하려고 무례한 말투를 써 보지만 그는 여전히 정중한 말투다.

 

 "그래요, 난 대체 당신같은 멀쩡한 사람이 왜 그런 모임에 들락날락하는지 도통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알 것 없어. 그냥 그런 또라이가 하나 있다고 치고 앞으로 날 쳐다보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폭로할 겁니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뭘?"
 "당신이 가짜로 환자 행세를 한다는 것."

 

 그가 나를 혐오하는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생각대로 잘 되갑니까? 남들의 고통을 보며 속으로 비웃는 거 말이죠."

 

 존이 양심의 가책을 주는 눈으로 쳐다보는 걸 무시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가 나를 혐오하는 눈빛으로 보는 것은 더욱 슬프다.
 털어놓을까 말까.
 나는 망설이다 말했다.

 

 "이건 내게 중요한 모임이야."
 "왜 그런 짓을 하는 지 말해봐요."
 "글쎄..."

 

 나는 핑계를 지어낼까 하다가 관두었다. 이 남자에게만큼은 속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죽음 앞에선 다들 솔직해져."
 "거짓으로 얼굴을 꾸며내지 않고 말이죠?"

 

 의외로 내 의도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그에게 나는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래."

 

 이왕 말한 김에 다른 것도 조금 털어놓았다.

 

 "이런 모임에 너무 많이 나가면 중독된다는 거 알아?"
 "정말입니까?"
 "농담하는 거 아냐. 그리고 너처럼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난 그 솔직한 얼굴을 관찰하는 데 써야할 집중력이 없어져."
 "솔직한 얼굴을 보고 싶다니, 그건 너무 이기적이잖아요. 당신 혼자서만 아픔을 가장하고 남의 아픔을 구경하겠다니."

 

 그가 진저리난다는 얼굴로 돌아섰다.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며 복도를 걸어가는 그를 황급히 잡았다.

 

 "잠깐 기다려! 내가 너의 다리를 고쳐준다면, 용인해 주겠어?"

 

 그가 황당한 소리를 듣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다리를 고쳐준다니, 당신이 의사라도 됩니까?"

 

 그는 걸음을 서둘렀다. 나는 그를 따라갔다. 당직실에서 식은 커피를 홀짝이는 다른 동료들에게 '간식을 좀 사올게요'라고 한 후 그는 내가 따라오던 말던 신경쓰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엘리베이터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나를 존은 애써 무시했다.
 내가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그를 잡으려 드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나는 이래 뵈도 자문 탐정이야. 내가 만들어낸 말로, 세계에서 이 직업을 가진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지."
 "그리고 그게 당신이고요?"

 

 그가 응수했다. 혼자 떠들어대는 내가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지금은 이 남자의 연민을 붙잡아야 할 때다.

 

 "경찰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이 생길 때-거의가 그들에겐 해결 불가능한 사건이지만-나에게 의뢰를 해. 그리고 나는 그 요청을 들어주고."

 "경찰들은 아마추어에게 사건을 상담하지 않습니다."
 "맞아."

 

 그리고 나는 그를 보며 슬쩍 미소지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아마추어가 아니라는-"
 "아마추어가 아닌 정도가 아니지. 난 프로 그 이상이야."

 

 코트 목 깃을 세우는 나를 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그거...그거 습관인가요?"
 "뭐가?"
 "왜 그...신비로운 척 하면서, 광대뼈를 그렇게 하고...현명하게 보이려는 그거 말입니다. 전에도 몇 번 그러는 걸 봤습니다만."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는 마음이 살짝 풀린 건지 쿡쿡 웃으며 핫도그를 주문했다. 그리고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내가 잡았다.

 

 "연락처를 알려줘야지."
 "뭣 때문에요?"
 "아까 말한 그거, 같이 하자고. 당신은 전직 군의관이었고, 많은 시체와 죽음을 경험해왔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그가 망설였다.

 

 "좋아요. 하지만 나는 지금 금전 상태가 좋지 않아요. 그러니 야간 병원 일에는 방해가 되지 않을 선까지만 도와줄 겁니다."
 "마음대로 해."

 

 나는 그의 명함을 한 장 가져갔고 그의 손바닥에는 내 휴대전화번호를 적었다.
 우린 그렇게 함께 낮에는 함께 사건을 해결했고, 밤에는 각자의 일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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