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존짐/중편/파이트클럽AU

 

 그러나 몇 달 후에는 사정이 바뀌었다. 마이크로프트의 요청으로 나는 그를 따라 여기저기 외국으로 떠돌아야 했다. 명목상으로는 그의 일을 도우라는 것이었지만 그의 수하들의 정보망으로 분명히 내가 이런 저런 환자들의 모임을 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접수되었을 것이고, 그 사실은 곧바로 마이크로프트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 자명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일을 도우라는 핑계가 무색하게도 나를 외국의 호화스런 호텔 방에 내팽개쳐둔 채로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그 지긋지긋한 비밀 업무를 수행하러 갔다.
 마이크로프트가 나를 내버려두고 가면 시차 때문에 잠을 잔다. 자지 않을 때는 창 밖을 내려다보며 줄담배를 피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해가 기울어있다. 무의미하게 텅 빈 채 지나가는 시간.
 삶은 매 순간 사라져간다.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눈 뜰 때, 나도 바뀔 수 있다면...

 

*

 

 여행은 삶을 축소시킨다. 일회용 설탕, 일회용 크림, 일회용 버터, 소꿉장난 같은 음식, 린스 겸용 샴푸, 샘플용 구강 청정액, 소형 비누, 기내에서 만나는 일회용 친구들, 비행 시간 동안의 짧은 만남, 이 여행을 하면서 얻는 전부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모두 사라진다. 비행기가 급강하하거나 급상승할 때마다 나는 충돌이나 추락을 꿈꾼다. 이게 모두 내 주변을 숨막히도록 감싸고 있는 지루함 때문이다.
 그렇게 망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중얼거린다. 기내의 정적을 뚫고 들리는 목소리는 기묘한 음률이라도 지닌 듯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비상구 옆에 앉을 때, 비상시 의무 사항을 지킬 수 없으시다면, 승무원에게 좌석 교환을 요구 바람.'"

 

 내가 중얼거렸다.

 

 "거 참 부담되겠군."
 "자리 바꿀래요?"

 

 비상구 옆에 앉아 있는 건 그였다.

 

 "아뇨, 나도 그런 건 젬병이라."

 

 그가 진지하게 물어본 건 아니라는 듯 곧바로 말했다.

 

 "공중에서 문 열어 봤자지. 다 형식뿐인거죠."
 "동감입니다."

 

 적당히 대답했다. 그는 옆에서 계속 말을 건다.

 

 "산소 마스크는 왜 쓰는 걸까요?"
 "숨을 쉬려고 쓰는 거 아니겠어요."

 

 그가 너무 평범하잖아요 그건, 이라고 웃고는 말했다.

 

 "산소를 흡입하면, 추락할 때 정신이 몽롱해져서 조용히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죠."

 

 그는 기내용 좌석에 항상 꽂혀있는 비상 상황 대처 방법에 대한 책자를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걸 좀 봐요. 바다에 비상 착륙 하는데 이 그림의 사람들은 다 미소짓고 있잖아요?"
 "그거 재밌군요."

 

 정말로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기내용 친구들에게 의례적으로 던지는 질문을 그에게도 던졌다.

 

 "뭘 하십니까?"
 "뭘요?"
 "직업 말입니다."

 

 사실 그가 물어보지 않았어도 '보았기 때문에' 이미 대충은 파악하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머리 손질이 되어있으며, 속눈썹은 염색까지 했고 이마에는 이성애자 남성이라면 절대 바르지 않을 화장품을 바른 흔적이 있다. 게다가 눈에서 명백한 피곤함이 느껴졌는데, 클럽 죽돌이들에게서 자주 보여지는 그런 눈이다. 마지막 결정타는 캘빈 클라인 글씨가 보이게 입은 천박한 팬티. 그런 것에 비해 손목이 경직되어있고 검지가 연속적인 마우스 클릭을 하느라 여전히 다른 손가락이 비해 눌려 있다. 즉 그는 게이인 컴퓨터 프로그래머.

 그가 의아한 어조로 말했다.

 

 "왜 물어보는 거죠? 흥미도 없으면서."

 

 정곡을 찔린 내가 작게 웃자 그가 내 표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웃는 표정이 비틀려있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비행기 좌석 바닥에 놓았던 사무 가방을 꺼내었다.

 

 "가방이 똑같군요."

 

 내가 그렇게 지적했지만 그는 그 말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가방을 열어 내게 보여주었다. 뭔가 분해해놓은 것 같은 기계장치들, 본래 다른 기계에 속했던 것이 분명한 초록색 판들을 연결해 놓은 알 수 없는 전선 뭉치들...

 "난 프로그래머입니다. 현대의 창조가."

 그가 제임스 모리어티였다.

 

 제임스, 아니 짐은-그는 짐이라고 불러달라고 우겼다-기계 장치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복잡한 장치도 '키 코드'하나 있으면 바로 해킹이 가능하다는 걸 아나요?"

 

 그건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정말입니까?"
 "맞아요. 그 코드만 가지고 있으면 뭐든지 가능하죠."
 "정말요?"
 "그럼요, 알기만 한다면..."

 

 그가 후후 웃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 일회용 친구들 중에는 당신이 가장 재미있군. 이건 내 지론인데, 기내에선 모든 게 일회용이지."
 "똑똑하시군."
 "고맙소."
 "그래서, 똑똑해서 잘 된 게 있습니까?"
 "물론이죠."
 "그럼 계속 잘해보셔."

 

 그가 매몰차게 말하고는 자기 서류가방을 들고 좌석에서 일어났다.

 

 "엉덩이를 보이고 지나가면 실례던가?"

 

 따위의 말을 남기고.

 

*

 

 운명이란 묘한 것이었다. 공항 검색대에서 내 짐이 나오지 않았다. 검색대 직원은 역시 자신도-말단이지만-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일처리가 느렸다. 게다가 섹스 기구에 대한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해댔다.
 그리고 결국에는 짐은 되찾지 못했다.
 그 안에는 어느 국가의 법령에도 위반되지 않는 합법적인 향정신성 약물의 모든 종류가 있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접었다. 공항 바깥에서는 아까의 짐 모리어티가 늘씬하게 빠진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쌩 하니 지나갔다.

 

*

 

 내 집은 닭장같은 15층의 아파트다. 벽은 두꺼워야 한다는 것이 나의 또다른 지론이다. 보청기를 잃은 이웃의 노인이 TV를 크게 틀거나 멀쩡한 가구가 불에 타서 창 밖으로 튕겨나갈지 모르니까.
 다들 예상했다시피, 불에 탄 건 내 방이었다. 창 밖으로 튕겨져 나온 가구도 내 가구였다.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튕겨져 나온 것들이 싸구려 가구와 향정신성 약물, 그리고 244종의 담뱃재 뿐이라니 정말이지 창피한 일이었다. 경찰들은 '오븐의 점화 불씨가 꺼져 가스가 조금씩 새며 실내에 매일 쌓이다가 냉장고 컴프레서에 의해 발화'되었다고 추정했다.  나는 항상 가지고 다녔던 존의 연락처를 꺼내들고 망설였다. 전화를 걸었지만 차마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존은 전화를 끊었다.
 문득 생각이 난 것은 아까 비행기 안에서 나를 매몰차게 떠난 프로그래머였다. 짐 모리어티. 그가 처음에 명함을 주었었다. 내가 왜 그에게 전화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역시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포기하고 공중전화 부스를 나가려는데 놀랍게도 공중전화가 울렸다. 마이크로프트는 분명히 해외에서 비밀 임무에 열중하는 중이므로 지금 전화할 리가 없다. 형이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면 이미 전갈이 왔어야 했다.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요?"

 

 특이한 목소리, 특이한 엑센트. 짐 모리어티의 목소리다.

 

 "짐?"
 "누구냐구?"

 

 나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불안정하게 떨리는 것을 참고 말했다.

 

 "기내에서 만났죠, 가방이 같았던...그 똑똑한 남자요."

 

 '똑똑한'을 언급하자 그제야 남자는 기억이 난 듯 말했다.

 

 "아! 네, 셜록 홈즈씨군요."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전화 안받으시던데,...알고 있나 모르겠지만 이거 공중 전홥니다."
 "발신 추적해서 걸었죠. 그 정도는 나한테 껌이죠. 그나저나, 무슨 일이죠?"

 

*

 

 나는 자초지종을 말한 후 그와 바에서 만나기로 했다. 평소에는 전혀 가 본 적 없는 게이바였으나, 어쨋든 나는 급한 상황이므로 그가 정하는 약속 장소가 어디든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있게 마련이죠."

 

 약간 높은 목소리와 특유의 묘한 어조가 합쳐져 위로의 기색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의례적으로는 위로를 하고 있는 게 맞았다.

 

 "자다가 성기를 찔린 남자도 있다잖아요?"

 

 대체 무슨 맥락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나는 잃어버린 내 담뱃재에 대해 그에게 토로했다.

 

 "난 담배를 살 때마다 이렇게 나 자신에게 말합니다. '이게 마지막이야'. '더이상은 안 피울 거라고'. 난 내가 구할 수 있는 담배는 다 모았었어요. 무려 244종이나 되었죠. 모든 게 완벽했는데..."
 "다 날아간 거군요."
 "사라졌어요."

 

 처량한 목소리의 내게 그가 말했다.

 

 "XX가 뭔지 압니까?"

 

 희귀한 담배의 이름이다. 나는 그에게 담배의 이름, 원산지 등을 말했다.

 

 "우린 담배 종류도 외우죠. 그게 어디에서 나온 건지도. 그런데 사실 그런 약물이 현대인들에게 필요할까요?"

 

 그가 물고 있던 담배를 흔들며 말했다.

 

 "이건 구속구예요. 복잡한 현대 사회에 눌려 억압받고 사는 시민들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척 하면서 사실은 중독되게 만드는 거죠. 사회 체제를 무시하고 약물, 섹스, 스포츠에만 집착하도록. 약물로 뭔가 위로를 받겠다는 건 개소리일 뿐이라구."

 

 그가 나에게 계속 말했다.

 

 "사실 당신이 모은 담뱃재가 없어진들 어떻다고? 하긴 당신에겐 비극일 수 있겠지."
 "아니, 비극까진 아닙니다."
 "당신 여흥거리를 잃었잖소."
 "그렇긴 합니다만...화재보험금이 나올 겁니다."

 

 그가 여기 불쌍한 바보가 있다는 듯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죠?"
 "당신이 또 약물의 노예가 될까 봐. 뭐 당신이 알아서 하겠지만."

*

 
 바를 나선 후 나는 말했다.

 

 "늦었군. 술 잘 마셨습니다. 전 이제 호텔로 가겠습니다."

 

 그가 만류했다.

 "무슨 말이예요?"
 "네?"
 "호텔이요? 그냥 나한테 부탁하세요."
 "뭘 말입니까?"

 

 그가 담뱃재를 탁 털며 말했다.

 

 "괜히 뺄 거 없다니까. 갈 데가 없어서 전화한 거잖아요?"
 "아닙니다."
 "그냥 솔직히 말해요. 격식 차리지 말고요."

 

 나는 망설이다 짐에게 말했다. 사실 그의 표정은 읽기가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처럼 직설적으로 물어볼 수 있으면 편할 텐데.

 

 "상관없겠어요?"
 "말 되게 돌리네. 원래 그런 성격 아니잖아요."
 "당신 집에 가도 됩니까?"

 

 그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물론."

 

 고마워요, 라고 나는 말하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

 짐 모리어티는 야행성 인간이었다. 그는 남들 다 자는 밤에 프로그래밍을 했다. 그가 프로그래밍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남을 엿먹이기 위해서였다. 자세한 내용은 나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비밀스러웠다.
 그는 개인 맨션에서 2년 정도 살아왔다고 했다. 실력 좋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답게 보안은 철통같다. 그는 집의 비밀번호를 아무에게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비밀번호는 우습게도 간단하면서도 쉬웠다. 101000.
 그가 이 집을 샀던 무단 점거를 했던 난 상관없었지만, 이거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겠다. 집은 무섭도록 깔끔하면서도 지저분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짐 모리어티만의 질서가 있었다는 뜻이다. 선반에는 옛 친구의 해골이라는 것이 놓여있고 고급 벽난로 위에는 잭나이프가 푹 꽃혀있더라도, 어떤 넓은 방은 아예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있고 다른 조그마한 방은 무언지 모를 서류의 산으로 문을 열기가 겁날 정도였지만 말이다.
 밤엔 이 맨션 전체에 사람이라곤 짐과 나뿐이었다. 내가 레스트레이드에게 받아온 서류를 펄럭이며 넘기는 소리, 짐이 키보드를 간헐적으로 두드리는 소리 말고는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거의 서로의 삶에 간섭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부부처럼 살았다. 짐은 종종 자신이 이끄는 천재 해커 소그룹이라던가,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약칭 테사모-에 나를 끌고 갔는데, 내가 반복해서 갈 때마다 점점 그 수가 불어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나는 도저히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떠들어 댔지만 혼자인 것이 익숙한 나는 그것이 오히려 편했다.
 그러면서 나 또한 활기를 되찾았다. 천재 해커 소그룹에 동참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짐과 어울린 이후로 레스트레이드가 나에게 넘기는 사건이 많아졌고 그 사건은 매우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

 

 그러다가 뜻밖에도, 생각지도 못한 밤 시간에, 존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존은 나에게 따졌다.

 

 "몇 주 간 어디 갔었던 거야?"
 "존?...어떻게 전화한 거야?"
 "전에 네가 가르쳐줬잖아. 요즘은 모임에 안 나오던데?"
 "안 나가면 잘 된거 아니겠어? 그나저나 내가 모임에 가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몰래 가봤지."

 

 그의 대답에 약간의 수치심이 엿보였다. 그의 귀여운 반응에 나는 전화기 너머로 몰래 미소지었다. 나는 그에게 절반의 진실만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요즘에는 다른 모임에 나가."
 "정말?"
 "그래. 하지만 걱정 마, 전처럼 환자들이 모이는 그런 모임은 아니니까."

 

 그 때 노트북 화면에 레스트레이드가 보낸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최근에 약물을 이용한 무차별 연쇄살인사건에 관한 자료였다.

 

 "저기 있잖아, 셜록-"

 

 그가 뭐라고 말하는 것이 들렸지만 잠깐 휴대폰을 내려놓고 레스트레이드가 보낸 이메일을 읽었다. 그리고 그 이메일에 답장을 하는 사이, 전화는 끊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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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