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존/단편/100제/지갑을 잃어버렸다
오늘도 존은 기계와 전쟁을 치른다.
-Card not authorized.
-Please try another card.
존은 무정한 기계음을 뱉어내는 무인 카드 인식기를 호되게 두들겨패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으나 심호흡을 한 번 하는 것으로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놈의 퇴직 군인 신용카드는 고장나거나 인식되지 않는 날이 제대로 인식되는 날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마이크로프트가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자칭 영국 정부라는 사람이 자신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기 위해 카드를 막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며 존은 그 말도 안되는 가설을 우스갯소리로 치부해버렸다. 애꿏은 마이크로프트에게 죄를 돌리는 대신 존은 '전직 군인을 위한 서비스 미비'라는 제목으로 육군 홈페이지에 민원이라도 올려야겠다고 결심하며 존은 뒷사람에게 자신의 바구니를 옮기지 말아줄 것을 부탁한 후 급히 베이커가 221b로 향했다.
'콩조림 세일 기간을 놓칠 순 없어!'
...셜록과 동거한 이후로 자신도 모르는 새 주부 마인드가 확고히 자리잡은 그였다.
거친 숨을 뱉으며 달려온 그를 흘끗 쳐다보더니 셜록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페트리 접시로 다시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Take my card."
존은 머뭇거리며 셜록 옆으로 다가갔다. 셜록은 스포이트로 페트리 접시에 신중하게 약품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며 말했다.
"자켓 안쪽 주머니에."
'-있어.'라는 말까지 하기도 귀찮았는지 셜록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존은 항상 이 순간이 싫었다. 아니, 싫다기보다는 민망했다. 셜록은 아무렇지 않아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만 신경쓰는 것 같아 더욱 싫었다. 하지만 콩조림 1+1세일을 위해서라면 그 민망함 쯤은 감수해주겠어! 라고 존은 굳게 마음먹으며 흐흠, 하고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자켓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응?'
텅 빈 헐렁한 주머니 안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던 존이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셜록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셜록?"
"..."
셜록은 대답이 없었다. 존은 그 침묵에 굴하지 않고 말했다.
"지갑이 없는데."
"없을 리가."
셜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전히 스포이트를 손에 든 채로 말이다. 존은 선언하듯 말했다.
"아니, 셜록. 진짜 너 지갑 없어."
그제야 셜록은 스포이트 안에 들어있던 액체를 원래 그것이 들어있던 병에 쪼르륵 소리가 나게 비운 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불신의 표정이 가득한 얼굴로 손수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이 주머니 안으로 들어간 순간 셜록의 얼굴에 잠시잠깐이지만 당황의 기색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존은 발견했다. 평소라면 의기양양해 마지않을 순간이지만 지금의 존은 그가 당황한 기색을 발견한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싶었다.
"셜록, 설마..."
존이 조심스럽게, 자신이 생각한 바가 틀리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저러고서 지갑을 뙇 하고 꺼내주면 좋겠다! 라고 존은 간절히 생각했다. 그러나 주머니에서 천천히 손을 빼내는 셜록의 표정은 어두웠다.
"...없어."
존은 콩조림 세일 기간을 놓쳤다는 생각에 온 몸에 힘이 빠져 소파로 터덜터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
존은 한동안 의자에 늘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늘은 셜록도 마찬가지였다. 실험은 내팽개친지 오래, 셜록도 긴 소파에 누워 아무 말 못하고 있었다.
존이야 한 끼라도 못 먹으면 못 사는 정상인이니 그럴 만도 했지만, 셜록은 본래 밥을 먹기보단 안 먹는 경우가 더 빈번해서 존은 그의 생각보다 큰 반응에 조금 놀랐다. 셜록은 존이 멘붕을 하건 뭣을 하건 코웃음치고 실험이나 할 줄 알았던 것이다. 존이 그 반응에 대해 질문하니 돌아온 대답은 이거였다.
"오늘은 사건이 없단 말야."
하긴 그동안 셜록은 사건이 있을 때만 밥을 거르긴 했다. 두뇌 회전에 방해가 된다느니 집중력을 흗뜨린다던지 하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존이 살펴보자 셜록은 존 못지않게 슬픈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셜록은 평소에 열량을 저장해놓고 한꺼번에 쓰는 스타일인가 보다.
불행히도 허드슨 부인은 채터지 씨와 데이트를 하러 가느라 가게를 잠그고 나갔다. 다른 하숙인들도 모두 셜록과 존을 골탕먹이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집을 나가 있어서 쿠키 한 조각 얻어내기도 실패했다. 허드슨 부인의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빌리는' 것도 실패한 그들은 토탈 멘붕 상태에 빠져 거실 소파에서 구겨진 빨랫감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허드슨 부인은 왜 하필 오늘 데이트를 나가신 거야."
"그것도 채터지 씨랑!"
셜록은 '데이트를 나간' 사실보다 '채터지 씨와' 데이트를 나갔다는 것에 더욱 분개한 기색이었다. 셜록은 음흉하게 중얼거렸다. 조만간 조치를 취해야지. 그리고 이틀 후 셜록은 채터지 씨에게 숨겨진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까발렸다.
어쨋든 그건 미래에 일어날 일이므로, 셜록과 존이 현재 겪고 있는 당장의 굶주림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의자에서 미끄러질 듯 퍼질러 눕다시피 하고 있던 존이 문득 말했다.
"그런데 셜록...?"
셜록은 어느새 가운을 걸치고 소파에 뒤돌아서 웅크린 채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존은 셜록이 잠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금세 눈치채고 말을 이었다.
"...그 지갑 안에 들어있는 거 말이야.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도 위험하지 않겠어?"
셜록은 존에게 등을 보인 채 머리를 팽팽 굴렸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었더라? 셜록 자신의 신용카드와 신분증, 저번 은행 사건을 해결하는 대가로 받은 수표 한 장-몇 장 더 있었지만 존과 셜록의 생활비로 탕진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셜록이 '빌려온' 마이크로프트의 신용카드, 마이크로프트의 신분증, 마이크로프트의 극비 시설 출입 허가증 등등. 어쩐지 마이크로프트의 물건이 더 많은-데?
셜록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셜록과 존은 아마도 똑같이, 당황과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
"제기랄 그게 다른 범죄자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존은 평소답지 않게 거친 말을 쓰며 신경질을 냈다. 존이 마치 자기가 지갑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길길이 날뛰고 있었지만 셜록은 뭐라 한 마디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갑 간수를 못 한 것은 셜록 자신이었으니까.
화를 버럭버럭 낸 존은 바깥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이성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배가 고파서 더이상 화를 낼 기력이 없었다.
"좋아, 일단 셜록, 네가 마이크로프트한테 전화해."
"전화를 왜 해?"
"빨리 카드를 정지시켜야지!"
존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셜록이 반박했다.
"야 그걸 어떻게 말해!"
"그럼 내가 말하리?"
셜록이 고개를 맹렬히 끄덕였다. 존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네 형이지 내 형이냐?"
그래도 셜록이 납득할 생각을 하지 않자 존이 작전을 바꾸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했다.
"셜록, 언제나 진실, 아니 사실이 가장 좋은 거란 걸 너도 알잖아. 마이크로프트는 아마 용서해줄거야. 그에게 솔직히 말하고 용서를 빌면 네 신용카드도 빨리 새로 발급받을 수 있을 테고 말야."
그래봤자 콩조림 세일 기간은 지났지만...하고 존이 처량하게 중얼거리자, 셜록은 아주 큰 결심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 내가 전화하지."
존 네가 전화하면 그 관음증 양반이 더 좋아하긴 하겠지만, 이라고 말한 셜록은 존이 화낼 틈도 주지 않고 마이크로프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셜록?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는 마이크로프트가 어쩐지 수상했지만 셜록은 일단 자초지종을 말했다. 사정을 들은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오...그렇구나. 그러니까 네 신용카드랑 내 신용카드랑 네 신분증이랑 내 신분증이랑 내 출입허가증 등등을 칠칠맞은 네가 잃어버렸다는 것이로구나.
마이크로프트는 어쩐지 즐거운 기색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존과 셜록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이크로프트가 미쳤나? 라는 의견을 눈으로 주고받았다.
한참을 킬킬킬킬 웃던 마이크로프트가 속삭이듯 말했다.
-자, 셜록. 존 옆에 있어?
셜록이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있을 리가 없지. 지금 군인 카드로 현금이라도 뽑아보겠다고 밖에 나갔어."
셜록은 그렇게 말하고는 스피커 폰으로 전환했다. 존은 숨을 바싹 죽인채 마이크로프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와하하하하핳핫핫하하핫핫핫!!!
마이크로프트가 전화기가 터져나가라 웃어댔다. 저렇게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존은 대체 셜록이 지갑을 통째로 분실한 것이 마이크로프트에게 있어 즐거움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이크로프트가 히끅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야 진짜 존이 빨빨대고 돌아다니는 거 귀엽지 않냐? 지갑 없어졌다고 둘이 난리쳤을 생각하면...ㅋㅋㅋㅋㅋㅋ아 웃겨 죽겠다 내가 지금 외국이라서 너네 집이랑 슈퍼마켓에 설치해놓은 cctv 비디오 테이프 아직 수거를 못했는데 오늘 그 장면 꼭 보고 또 봐야지 두번 봐야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이크로프트는 평소의 근엄하고 우아한 이미지는 어따 팔아치웠는데 체신머리도 없이 웃어댔다. 존과 셜록은 슬슬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참으며 계속 그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참다못한 셜록은 마이크로프트가 주절거리는 것을 가로막았다.
"어쨋든, 그래서 말인데 카드 좀 새로 만들어줘."
-아 그거 새로 만들 필요없어. 네 지갑 나한테 있거든.
정확히는 내 비서 안시아에게 있지만, 이라고 하는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둘은 헛것을 들었나 싶었지만 둘 모두 똑같은 말을 들은 듯 싶었다.
셜록은 아까 들은 말이 집단 환청이길 바라며 되물었다.
"뭐라고?"
-네 지갑 나한테 있다고. 너네 하루 종일 쫄쫄 굶고 지갑 찾으려고 난리치는 거 보고싶어서 내가 훔치라고 했지. 근데 셜록 너 감 많이 떨어졌다. 소매치기 하나 못 잡아내냐?
존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마이크로프트!!!"
수화기 너머가 잠시 잠잠해졌다. 어색한 침묵이 몇 초 간 흘렀다. 가짜임이 티가 팍팍 나는 헛기침 소리와 함께 마이크로프트가 말문을 열었다.
-오, 존 자네 언제 왔나?
평소처럼 나긋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존은 풔킹을 날려주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존이 바락바락 대들었다.
"아니 당신 즐겁자고 동생 지갑을 훔쳐서 어쩌자는 거예요? 정신 나갔어요? 오늘 콩조림 세일인데 놓쳤잖아요!!!"
주부의 애환이 담긴 절규에 마이크로프트가 쩔쩔매는 것이 느껴졌다. 에잇, 하고 혀를 찬 마이크로프트가 갑자기 말했다.
-미안하다 셜록. 이렇게 된 이상 너를 감싸줄 수가 없겠구나.
"?"
"!"
셜록이 마이크로프트의 폭탄선언을 듣고 있다가 놀라서 소리쳤다.
"안돼, 그것만은! 죽으려면 혼자 죽으라고!"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 물귀신 작전을 쓰기로 단호히 마음먹은 듯 했다.
-존 그거 아나? 자네 카드가 자꾸 슈퍼마켓에서 안 먹히는 이유는 말일세,
"안돼!!!"
셜록이 고통스럽게 절규했다. 존은 혹시라도 셜록의 목소리에 마이크로프트가 털어놓으려는 비밀이 묻힐까 두려워 귀를 한껏 기울였다.
-그거 사실 셜록이 부탁한 걸세. 자네가 굴욕적이고 비굴한 모습으로 자기에게 와서 카드를 빌려달라고 부탁할 때마다 그는 너무나도 흥분을 하기 때문이지...
"내가 언제 그랬어! 난 그저 존이 나한테 부탁을 하는 게 귀여워 보일 뿐이라고 했지! 계획을 짜내고 실행에 옮긴 건 형이잖아!"
-그랬지만 너는 그때 반대하지 않았잖니? 침묵이란 곧 무언의 긍정이지. 넌 그때 이미 공범이 된 거야.
"형이 존이 슈퍼마켓에서 성질내는 게 귀엽다고 마트 cctv테이프 가져간 거는 잘 한 짓 같아?"
-너도 그 테이프 같이 봤잖아!
더이상 두 형제의 병신같은 대화가 주거니받거니 오가는 것을 들을 수 없었던 존은 소리쳤다.
"그만!"
셜록과 마이크로프트 둘 모두 입을 다물었다. 존이 씩씩거리는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정말 둘 다 너무해!!!"
눈물이 살포시 어린 눈으로 셜록을 쏘아보던 존은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셜록은 전화기를 내던지고 급히 그를 뒤쫓았다.
"존 가지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수화기 너머로는 마이크로프트가 소리쳤다.
-존! 내가 미안하네! 정말이야! 다시는 카드가지고 장난질치지 않겠네!
그렇게 셜록과 존의 굶주림으로 점철된 하루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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