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존/장편/203이후/뱀파이어

 

 "내 피를 마셔."

 

 존이 결연히 말했다.
 가느다란 뼈가 하얀 피부 위로 도드라진 자신의 손을 줄곧 바라보고 있던 셜록이 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뭐라고?"

 

 셜록은 당황한 나머지 조금 늦게 대답했다. 간신히 더듬거리는 것은 면했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셜록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떠오른 것을 보고 존은 약간 움찔했지만 다시 한 번 말했다.

 

 "내 피를 마시라고."

 

 강한 어조의 존의 말을 들은 셜록은 존이 허투루 말하는 것임이 아님을 알고 소파에 깊이 파묻고 있던 몸을 일으켜 존을 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각은 하고 있는 건가?"

 

 맞은편의 남자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냉랭하게 말했다. 어느새 그에게 어려있던 물기는 간데없다. 건조한 인상의 셜록은 눈에 띄게 여위긴 했지만 그가 지닌 특유의 기세는 여전하다. 존 역시 셜록이 호락호락 넘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차가운 반응을 보이는 것에는 역시 당황한 듯 말이 없었다.
 셜록은 말했다.

 

 "자네가 지금의 나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것쯤이야 예상된 패턴이야. 하지만 자네는 내가 자네의 피를 마실 때의 상황과 그 후의 상황 또한 간과하고 있군. 혹시라도 내가 자네를 죽여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은 생각해보았나? 과다출혈은? 또한 지금의 나의 상태는 불안정하기 그지없고 뱀파이어라는 것이 여타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이는 특질들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어떤 유전적 특이성을 지니고 있는지 완벽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네가 나에게 물린 후 자네마저도 뱀파이어로 변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빠른 속도로 혀를 놀린 셜록은 결론을 내렸다.

 

 "자네가 한 말은 고맙지만, 앞으론 생각을 조금 더 깊게 하고 말을 하길 바라네."

 

 존은 셜록이 말을 마치고 다시 몸을 힘없이 소파에 늘어뜨리는 것을 보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하는 말은 험악하고 비난 일색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말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임을 눈치 챈 존은 마음이 아팠다.
 자신을 외면하는 셜록을 잠시 바라본 존은 벌떡 일어섰다. 셜록이 그를 흘깃 쳐다보는 것을 느끼며, 존은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고, 남방의 단추를 풀러 내리기 시작했다.
 목 부근 단추를 전부 풀어 내린 존에게, 셜록이 천천히 말했다.

 

 "존."

 

 셜록은 묘하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마."

 

 존이 셜록에게 말했다.

 

 "지금 자네 꼴이나 좀 보고 이야기하라고."
 "내 꼴이 어떤데?"

 

 셜록이 멍청히 반문하자 존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죽기 직전의 노인네처럼 보인다고!"

 

 존의 말에 셜록은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존이 계속해서 말했다.

 

 "게다가 의사로서의 소견을 부가하자면, 자네가 흘린 피의 양은 엄청나. 일반인이었다면 지금쯤 벌써 빈혈로 사망했을 거야. 그나마 자네가...뱀파이어라는 걸 다행으로 여기게."
 "오, 그렇다면 자네는 의사로서 환자에게 수혈을 제안하는 거로군. 미안하지만 필요 없네."

 

 셜록이 고집을 부리는 것에 존은 벌컥 화를 내었다.

 

 "셜록!"

 

 셜록은 더 이상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렸다. 존은 셜록을 잠시 쳐다보다가 그가 앉아있는 소파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셜록은 회피하려는 듯 몸을 움츠렸다.

 

 "오지 마."

 

 거부에도 아랑곳 않고 존은 셜록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셜록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그 옆에 꿇어앉았다. 셜록은 필사적으로 존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은 셜록의 의지를 따라주지 못했다.

 

 "셜록,-"

 

 존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의사이건 뭐건 말이네, 나는 자네가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거야. 왜냐하면-"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했다.

 

 "-나는 자네의 친구니까."

 

 셜록이 느릿하게 눈을 굴려 존과 눈을 마주쳤다. 존의 진파랑색의 눈이 꾸밈없는 정감을 지니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각각 청색소의 농도가 다른 두 눈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오, 존.
 셜록은 속으로 신음했다. 그 신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조금 머뭇거리며 마른 손가락을 뻗어 존의 목으로 갖다 대자, 존은 놀랄 만큼 순순히 몸을 셜록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셜록은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태도로 엄숙하게 고개를 숙여 존의 목에 입술을 대었다.

 

*

 

 두 남자의 숨소리가 점차 고조되어갔다. 젖은 소리, 무언가를 흡입하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누군가가 말했다. 침대로 갈래? 다른 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래. 젖은 소리가 멈추지 않는 가운데 의자 하나가 넘어졌다. 오, 제길. 한 사람이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 그 후로도 몇 개의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혈색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셜록이 누워있는 존의 뺨을 톡톡 쳤다.

 

 "존?"

 

 존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셜록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또 정신을 잃은 줄 알았어."
 "아냐…근데 이 기분 좀 어떻게 할 수 없을까?"

 

 존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셜록이 대답했다.

 

 "왜? 보기엔 아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좋다는 건…부정할 순 없지만, 보기에 좀 이상하잖아."

 

 셜록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뉘앙스로 오, 라고 말했다. 존이 고개를 돌려 그를 흘깃 보고는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셜록, 가서 옷이나 좀 입고 와!"

 

 셜록이 흘러내린 가운을 여미며 말했다.

 

 "뭐 어때."

 

 다시 머리를 팔로 괸 셜록은 존을 토닥이며 말했다.

 

 "일단 좀 자라고, 존."

 

 그리고 존은 거짓말처럼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아침.
 비가 온 후에나 볼 수 있는 청명한 공기와 햇살이 존의 플랫으로 쏟아져들어왔다. 존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깜박였다. 지난 밤의 일이 새록새록 머릿속에 되새겨지며 존의 양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무리 셜록을 회복시키기 위한 일이라 해도 조금 도가 지나친 일이었을까? 존은 문득 자신의 옆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누웠음에 분명한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는 시트가 보였다. 셜록은 지난밤에 여기서 잔 것일까? 존은 졸린 머리로 생각을 하려 애썼다. 젠장할, 머리는 생각만큼 원활히 돌아가 주질 않았다.
 존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간밤의 일이 있었다는 것이 의심될 정도로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한 편에 속했다고나 할까. 존은 스트레칭을 하고 나서 셜록을 찾아 나섰다.
 셜록은 의외로 거실의 소파에 얌전히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뭐해?"

 

 존이 묻자 셜록이 짤막하게 말했다.

 

 "문자."

 

 그러더니 셜록이 존을 쓱 쳐다보았다. 뭔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이었다. 존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셜록을 마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셜록은 존을 향해 핸드폰을 쓱 내밀며 말했다.

 

 "나 대신 문자 좀 보내줘."

 

 존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셜록을 바라보았지만, 셜록은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핸드폰을 받아든 그가 말했다.

 

 "수신인은?"
 "마이크로프트."
 "뭐라고 써서 보내야 해?"
 "지금부터 하는 말 토씨 하나 빠뜨리지 말고 부탁해."

 

 존은 귀를 기울였다. 셜록은 자못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존의 플랫에 양복 한 벌만 갖다줘'."

 

 문자를 치던 존이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셜록에게 물었다.

 

 "마이크로프트는 내 주소를 모를텐데?"
 "존, 아직도 그 인간을 잘 모르는 것 같군. 그 '빅 브라더(Big brother)'는 설사 지금 당장은 자네 주소를 모른다 하더라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야."

 

 빈정대는 것이 분명한 셜록의 말을 들은 존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전송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셜록에게 돌려준 후 말했다.

 

 "영국 정부 전체나 다름없는 사람한테 양복 배달 심부름을 시켜도 되는 건가 싶군."
 "우애라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것 아니겠어?"

 

 뻔뻔한 셜록의 말에 존은 실소를 지었다.

 약 30분 후 존의 플랫으로 셜록의 치수에 꼭 맞는 양복 한 벌과 구두까지 배달된 직후 존의 얼굴의 미소는 사라졌지만 말이다.

 

*

 

 존은 오랜만에 바깥에서 브런치를 사먹기로 했다. 셜록이 잠깐 자신의 안전 가옥에 들렀다 온다고 말하고 나서, 그는 근처의 식당에 들어갔다. 알맞게 구워진 계란 요리를 씹으며 존은 아침에 하던 생각을 이어나갔다.
 어제는 정말로 우여곡절이 많은 날이었어, 라고 존은 생각했다. 존은 자신이 셜록에게 피를 기증-기부? 증여? 그는 적당한 단어를 찾기가 힘들었다-한 정황에 대해 되돌이켜 보았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때 자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것일까, 새겨 보아도 답은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셜록은 자신의 가장 친한-이 부분에서부터 약간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것은 존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친구다. 아마 그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자신은 함께 그 위기에 뛰어들 것이다. 앞뒤 재지 않고, 무턱대고 그렇게 할 것이었다. 옷자락을 스스로 풀어헤쳐 피를 마음껏 빨게 한 것도 그런 맥락의 하나였던 것 같다. 그것도 셜록이 거절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셜록이 자신의 하숙집에 찾아와서 문간에서 중얼거린 말-와서는 안되었었는데-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는 존의 피를 너무나도 마시고 싶어했지만 그것을 나름대로 자제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도 자신은 그런 셜록의 노력을 와해시켰다. 게다가 존의 성별만 바꾸면, 그 행동은 마치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가 옷을 벗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존은 생각했다. 이게 정상인가?
 그는 순간 깨달았다.
 오 이런.
 나는 셜록을 좋아해.
 그것도 매우.
 존은 손에 쥔 포크를 떨어뜨릴 뻔한 것을 간신히 잡아내었다.
 그때부터 셜록이 식당으로 찾아올 때까지, 그는 포크로 남은 계란을 산산히 짓이겼다.
 식당에 들어서 존의 반대편 의자에 앉은 셜록은 그런 존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생각해?"

 

 존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는 상냥하게 미소짓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무 것도."

 

*

 

 존이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챈 셜록은 존을 잠시 혼자 두기로 하고 플랫을 나갔다. 남아있는 존은 곰곰이 생각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이 쾌감과 사랑을 헷갈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자라면 종종 그런 일도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셜록과는 이런저런 일을 함께 겪어온 친구가 아닌가. 존은 우정과 쾌감의 묘한 조합 때문에 자신이 착각에 빠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텍스트 메시지가 도착했다. 셜록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저녁(Dinner)?

 

 존은 '좋아'라고 답장을 보냈다. 전송 버튼을 누른 후 그는 아까 전까지 하던 생각은 잠시 잊고 방을 정리하기로 했다.
 어젯밤 한 사람은 소파에 앉고 한 사람은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었기에 자세가 너무나 불편했던 둘은 자리를 옮기기로 합의했고, 이동하는 와중에 의자를 넘어뜨리고 탁자 위에 있던 장식품 두어 개가 바닥에 떨어뜨리는 등의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방 안은 영 깔끔한 모양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셜록은 그 때 정말로 피에 굶주린 듯 정신없이 자신의 목에 매달렸고, 그가 피를 빨 때에 전해져오는 강한 쾌감에 젖어버린 그는 셜록을 떼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찰싹 달라붙어서 좁은 방을 지나간 탓이었다.
 존은 장식품을 다시 정위치에 놓으면서도 자신의 얼굴이 다시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셜록으로부터 온 문자를 받으면서도 보기 싫게 히죽거렸던 것 같았다. 그는 방정리를 하다 말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속으로 고함을 질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존 왓슨!
 존은 그 전까지는 개소리라고 믿어왔던, 혈통 내에 동성애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이론을 다시 한 번 탐구해보자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해리엇이 레즈비언인 것이 그의 심층정신구조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뱀파이어들은 정말로 매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슬슬 머리가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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