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존/역키잡

 

 

 역 앞에서 잰걸음으로, 또는 느린 걸음으로 오고 가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우두커니 서 있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고, 또 그런 사람들 가운데, 중키의 금발 남자 하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존 왓슨이다. 몇 년간의 민간인으로서의 생활 이후 짧았던 그의 머리칼은 어느 정도 자랐고, 가무스름하게 그을렸던 피부는 여느 영국인처럼 다시 흰 빛을 찾았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변화와는 별개로 여전히 군인 시절의 행동거지와 습관은 쉽게 떨치기가 어려워, 셜록이 지금의 그를 본다 해도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 할 듯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 예보와는 다르게 매우 쌀쌀맞은 바람은 존의 얼굴을 후려치고 머리칼을 흩뜨린 채 도망간다. 그는 귀찮더라도 목도리를 하고 나올걸, 하고 생각하며 목을 움츠렸다. 역 안은 무척 추웠다. 온풍기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보였지만 어딘가의 창문이 열려있는 것인지 외풍이 고스란히 들어오고 있었다.
 셜록은 존에게 굳이 추운 날 바깥걸음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해외 출장 때문에 셜록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존으로서는 이마저도 하지 않게 된다면 셜록에 대한 부채감을 덜어버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셜록을 에든버러로 보내기 이전 존이 했던 약속-셜록이 있는 곳으로 자주 찾아가겠다는 것-은 존이 새로이 얻은 직업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었다. 어느 대학의 작은 의학부 연구실의 조교로 취직한 존은 어느 명망있는 교수의 신임을 얻어 종종 그와 함께 해외로 출장을 가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고등학생이 된 셜록은 존에 대한 그리움을 눈에 띠게 내비치는 일이 없었으나 본래 셜록이 애정 결핍으로 남몰래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존은 그 점이 못내 미안했다.
 그는 움츠린 목을 펴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에든버러 발 런던 행 열차 7:40 도착 예정'

 

 글씨가 깜박인다. 시계를 쳐다보았다. 7시 38분. 곧 있으면 셜록을 볼 수 있게 된다는 생각에 그의 안에서 기대감이 차올랐다.
 슬슬 일어나볼까, 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이제껏 앉아있었던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개찰구 쪽으로 미리 가서 그를 기다릴 심산이었다. 혹시라도 엇갈려버린다면 더한 낭패가 없을 것이기도 했고, 추위로 인해 뻣뻣하게 굳은 몸을 풀려는 의도도 있었다.
 개찰구로 향하는 도중에 열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존은 걸음을 서둘렀으나, 절뚝이는 다리는 존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그의 신형이 위험할 정도로 흔들렸다. 연구직에 종사하는 이답게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진 그는 여간해서는 뛸 일이 없었기에 그에 따라  뜀박질이 서툴러진 것 같았다. 그는 좀더 서두르지 않았던 자신을 원망하며 걸음을 평상 속도로 늦추었다.

 
 7시 45분, 존은 개찰구 앞에 도착했다. 개찰구를 나서는 인파에 떠밀릴 뻔했으나 용케도 제자리를 지킨 채로 존은 셜록을 찾기 위해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뜻 익숙한 형태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뚱뚱한 남자가 바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 시야를 가렸다. 존은 무척이나 분주해보이는 남자가 지나갈 때를 기다려 자신이 셜록을 보았다고 생각한 곳으로 눈을 다시 돌렸다. 회색의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채 똑바른 자세로 서있는 남자.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존은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셜록이었다.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입에 머금고, 그를 향해 다가가려는데 셜록과 마주보고 서 있는 또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한 번 본 듯한 사람. 그러나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존의 앞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쳐갔다. 다시 그들을 보았을 때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또렷한 흑갈색의 눈, 입가에는 호선과 같이 나긋한 미소가 어려 있는 남자의 얼굴은 존의 오래된 기억 한 편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 자리에 멈춰선 존이 그의 이름을 기억해내려 안간힘을 쓰는 중 남자가 셜록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었다. 그 광경을 본 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비주(bisou)겠지, 비주일거야, 라고 존은 불안스럽게 속으로 되뇌었으나 두 사람의 겹쳐진 얼굴은 떨어질 줄 몰랐다. 존이 망연하게 그것을 지켜보는데 셜록의 고개가 살짝 돌아가더니 자신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셜록과 눈이 마주친 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그 순간 자신과 셜록 사이에 또다른 인파가 몰려왔다가 쓸려나갔다. 존이 조심스럽게 다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다행스럽게도 셜록과 키스를 한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존은 표정 관리를 하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셜록을 향해 다가갔다.

 

 "셜록!"

 

 셜록은 존이 자기가 남자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들켰다는 것을 아는 것인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있다가 인사에 간단히 답했다.

 

 "존."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목소리였다. 더이상 어린아이도, 덜 자란 청소년도 아닌 완연한 어른이 다 된 셜록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건조했다.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훤칠한 키의 청년이 낯설게 느껴졌다. 존은 예전의 치기어린 아이의 모습이 그립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으나 그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척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며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많이 힘들었지? 에든버러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존의 환대에 셜록의 얼굴이 약간 풀렸다. 그에 안도하는 존에게 셜록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었다.

 

 "아니예요."

 

 못 본 새 너무나도 달라진 셜록을 이모저모로 뜯어보는 존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셜록이 웃으며 말했다.

 

 "저, 지난 3년간 몰라보게 달라졌지요."
 "정말 그렇구나! 다 컸는걸."

 

 자신이 보지 못한 사이에 이렇듯 키도 자기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커져 성인이 된 셜록을 보니 방치된 새끼고양이가 알아서 잘 커서 집으로 돌아온 모습을 보는 듯 하여 존은 더욱 미안했다. 그리고 그는 아까 전 셜록을 보며 낯이 설다고 생각한 자기자신을 질책했다. 셜록은 그저 응석부리지 않는 어른이 되었을 뿐이야. 그가 내게 의지할 나이는 이미 한참 지났다고. 속으로 그렇게 말해보아도 그의 마음 속 아쉬움은 여전히 잔류하였으나 이제 그는 셜록을 다시 만난 재회의 기쁨을 좀 더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감격어린 눈으로 셜록을 올려다보는 존에게 셜록이 말했다.

 

 "추운데 어서 들어가죠. 여기서 기다리면서 어지간히 추웠을 텐데."

 

 이제는 존을 앞장서서 그를 이끄는 셜록을 따라가며 뒷모습을 눈에 담은 존은 셜록이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에 일면 아쉬움이 느껴지면서도 기쁨 마음 한 구석을 채우는 것을 느끼고 이런 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생각했다.

 

 "아참. 존. 잠깐만요."
 "왜?"

 

 셜록은 존을 마주보고 서더니 자신에 목에 감긴 목도리를 풀러 존의 목에 정성스럽게 감아 주었다. 존은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라고 말을 흐렸으나 셜록은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목 내놓고 다니면 감기 걸려요."

 

 셜록의 강권에 못이겨 목도리를 매고 만 존은 따스한 목도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감촉을 즐겼다.

 

 "의사니까 자기 몸은 자기가 좀 챙기라고요."

 

 툴툴거리고는 있었으나 흘끔흘끔 자기를 보며 보일듯 말듯 미소를 띤 셜록을 보며 존은 나직하게 고마워, 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난 존은 자신을 흐뭇한 눈으로 보고 있던 셜록에게 말했다.

 

 "이거, 내가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준 목도리 아냐?"
 "맞아요. 왜요?"

 

 셜록이 존의 물음에 내포된 의미를 모른 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존이 대답했다.

 

 "내가 보낸 용돈이 부족했던 거니?"
 "그게 무슨 말이예요?"
 "이렇게 추운 날씨에 이토록 낡아빠진 목도리를 매고 올 정도로 네가 쪼들렸다는 거잖아."

 

 셜록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이는 존에게 셜록이 당치도 않다는 듯 말했다.

 

 "그게 아니예요. 존. 내가 오늘 이 목도리를 하고 온 이유는 이 목도리가 제일 좋아서란 말이예요."
 "나를 위로해주려고 하는 거구나.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어. 일단 하루 정도 쉬고 내일은 새 목도리를 사러 가자꾸나."
 "존!"

 

 셜록이 말에도 여전히 자신을 '나쁜 후견인'으로 몰아붙이고 있던 존은 셜록이 크게 자신을 부르는 것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셜록은 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스스로를 비하하지 말아요. 존이 그렇게나 나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뭐가 되는 건데요?"
 "셜록..."
 "존은 저에게 너무나도 잘해줬어요. 그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요. 그리고 난 정말 이 목도리가 좋아요. 존을 위로하기 위해 꾸며낸 말이 아니라구요."

 

 셜록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을 계속했다.

 

 "...이 목도리는 존이 선물해준 거잖아요."

 

 나지막하게 줄어든 셜록의 말에 존은 어쩐지 얼굴이 화끈화끈해져오는 것을 느끼며 셜록이 감아준 목도리 속으로 얼굴을 슬쩍 파묻었다. 셜록에게 응석을 부린 건 오히려 자신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 존은 웅얼거리며 말했다.

 

 "미안. 내가 너무 유치하게 굴었네."

 

 사과하는 존에게 셜록이 말했다.

 

 "존이라면 뭐든 상관없어요."

 

 셜록이 고개를 돌리며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존이 되물었다.

 

 "뭐라고?"
 "아니예요. 어서 가죠."

 

 셜록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존은 목도리에 남아있는 셜록의 체온을 느끼며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지?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건 뭐야?
 셜록이 그런 말을 해줬다고 너무 좋아하지 말란 말이야-
 ...그러고보니, 아까 전 셜록은 어떤 남자에게 키스를 했었다. 그 남자는, 아, 드디어 기억났다.
 제임스 모리어티.
 존은 간신히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그는 아까 전 눈에 담은 광경을 돌이켜보았다.
 멀리 있어서 얼굴을 똑바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키스를 시도했을 때 셜록도 그다지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뿌리치지 않고 마주 키스해주었으니.
 셜록은 그와 사귀는 것이겠지.
 목에 감긴 목도리가 돌연 싸늘하게 느껴진다.
 자신을 향해 무한한 애정을 보내오던 그 아이는 어느새 다 커버려서 사랑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버린 거다.
 셜록, 그 애는 자신과 함께하기 위해 제 부모도 각기 감옥으로,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렸었다-이제 더이상 그런 종류의 비정상적인 애정을 바라서는 안된다.
 그러니 칼로 심장을 저미는 듯한 상실감을 느끼는 자신은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거겠지.
 그래, 이건 과거의 환상에 너무 매달리는 나의 잘못이야. 그 애는 한때 찰나의 애정을 구한 것 뿐이야. 부모놀이에 내가 너무 심취하다보니 셜록에게 어느샌가 지나친 애착을 갖게 된 것 때문이라고.
 그러니 이젠, 그에게 나는 필요없어.
 생각을 거듭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몰아내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지만 어느새 그의 목을 감싼 목도리뿐아니라 마음까지 얼어붙어버릴 뿐이었다.
 그때 뒤따라오는 기색이 없자 셜록이 뒤를 돌아보며 존을 불렀다.

 

 "존?"

 

 잠깐 셜록이 걸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우뚝 멈춰서있던 존은 셜록의 재촉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발을 옮겼다.

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