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실바/본드큐

 

스카이폴 배포전에서 외전까지 단행본으로 출간했습니다. 외전은 블로그에 업로드하지 않습니다. 단행본 재고 남아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연락주세요.

 

 

D-5

 

 뒤로 길게 빠졌다가 다시 쳐올리는 도중의 감각이 뻑뻑했다. 뒤에 난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응고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피가 단단하게 굳어가며 색이 점차 검어지고 있었다. 접합된 부위에 지저분하게 엉긴 핏자국을 보며 홀린 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찔꺽이는 소리가 난잡하게 울렸다. 잠시 신음소리가 이어지다가, 크게 숨을 토해내는 것을 기화로 쉰 듯, 거친 듯한 목소리가 뚝 끊겼다. 다시 정적이 밀려왔다. 무거운 침묵 사이로 실바의 초조한 헐떡임이 재차 파고들었다. 귓가를 멍멍하게 울리는 젖은 소리에 본드는 충동적으로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실바의 등허리께를 꼭 붙들어 안고 움찔거리는 어깨를 바라보았다. 실바의 어깻죽지를 이빨로 살점이 떨어져나가라 사납게 깨물며 본드는 절정에 달했다.
 잇새로 피맛이 느껴졌다.

 

*

 

 다소 허무한 절정을 끝으로,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수감실을 나서는 본드의 뒤로 실바의 목소리가 울렸다.


 -……본드.

 

 본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실바는 그에 아랑곳 않고 물었다.

 

 -Do you even remember Severine?

 

 이번에도 본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지 벨트를 잠그는 그의 손이 잠시 멈칫 하고 떨렸을 뿐이었다. 실바는 본드의 미미한 동요를 알아차렸다. 실바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본드는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수감실을 나섰다. 실바가 쾌활하게 소리쳤다.

 

 -Goodbye, James!
 
 

 

D-0

 

 Q가 말했다.

 

 -실바가 죽었어요.

 

 지나가는 투였다. 본드 또한 무심하게 대꾸했다.

 

 -알고 있어.
 -그래요?

 

 Q가 묻자 본드는 잠시 Q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대답했다.

 

 -그래.

 

 본드는 Q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Q가 나직하게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바람결에 그의 한숨과 음성이 섞여들어갔다. 옥상에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웠다. 본드는 꼿꼿하게 선 채로 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Q는 잠시 동안 그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곧게 뻗은 검정 코트의 끝자락이 한순간 휙 불어온 바람에 펄럭였다. 본드는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유난히 맑은 하늘을, 그 아래 펼쳐진 런던의 분주한 정경을, 그리고 저 멀리로 흐려지는 지평선을 끝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Do you even remember Severine?’

 

 문장이 메아리쳤다.
 나직하게 한숨쉬었다.

 

*

 

 무엇을 그리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을까 싶어 Q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본드의 곁으로 다가섰다. 회색빛 건물의 외벽은 마치 깎아지를 듯한 절벽처럼 아래로 곧장 떨어져내렸다. 난간도 없는 옥상 가장자리에 피뢰침처럼 서 있는 본드의 신형은 어찌 보면 굳건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Q는 꼭 본드가 지금 당장 그 아래로 몸을 던지고 싶어한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Q는 본드를 따라 아래로 보이는 차체들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 흐름은 빨라졌다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가짓수를 다 셀 수 없는 색조들이 모여 무채색으로 귀결되고, 저마다 다른 뉘앙스의 회색이 물처럼 미끄러져 흐르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이따금 하얗게 빛을 반사하는 그것을 보고 있자니 솟구쳐 오르는 급류가 돌에 부딪혀 일어나는 하얀 거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딩과 그 아래 흐르는 사람들. 절벽과 그 아래 흐르는 강물. 허공을 감싼 하늘은 잔인하게 맑고 푸르렀다. 그리고 Q는, 야릇하게도 무언가가 그의 내부에서 무너져내리는 듯 느껴졌다.
 Q는 천천히 허리를 곧게 폈다. 몹시도 허탈한 기분이었다. 아직도 시선을 허공에 고정한 채로 서 있는 본드를 뒤로하고 Q는 천천히 옥상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계단참의 문이 삐걱 하고 열리는 찰나, 본드가 말했다.

 

 -Q.

 

 그의 부름에 Q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릴 뻔했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있었다. 꼴사납게 그의 무관심에 슬퍼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어차피 자신과 그의 관계는 요원과 쿼터마스터라는 관계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왜요?

 

 본드가 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이었다.

 

 -미처 말하지 못했는데,

 

 Q는 본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기대해도 되는 걸까?

 

 -다음 임무 때는 동행하도록 해보자구.

 

 멋쩍어하는 듯한 본드의 말에 Q는 미소가 비어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비행기는 타지 못한다고, 이브가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무섭다면 곁에 같이 있어주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어줄 테니 기대하라고.
 -그럼…….

 

 그래. 이거면 된 거다.

 

 -…기대할게요.

 

 Q는 빠르게 내뱉고는 옥상 계단문을 쾅 닫아버렸다. 본드가 그런 그의 앵돌아진 뒷모습을 보며 귀엽다는 듯 낮게 흘리는 웃음이 귀에 선했다.

 

*

 

 가볍게 웃으며 모습을 감춘 Q의 모습을 눈으로 덧그리던 본드의 미소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머릿속에서는 아직 목소리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Do you even remember Severine?’

 

 비참하게 죽은 여인을 떠올렸다. 머리로 술잔을 받치고, 윌리엄 텔의 아들처럼 신뢰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여인. 탄환이 발사되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고개를 푹 수그린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은 비스듬한 각도로 균형을 잡지 못했고, 곱슬머리가 폭포수처럼 앞으로 쏟아져 내렸었다. 힘없이 꺾인 고개는 다시는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지 못했다.
 더 이상 그녀의 환상을 견디지 못한 본드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환상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환영처럼 Q의 미소가 떠올랐다. 엷은 붉은색의 입술. 붉은색은 점차 깊어져간다. 실바의 창백한 어깻죽지에 물든 붉은 잇자욱이 눈앞을 떠돈다. 초승달처럼 휜 형태의 핏빛 자국이 어른거리자 본드는 다시 눈을 감았다.

 

 -Q…….

 

 의미모를 중얼거림을 끝으로, 본드는 다시 눈을 뜨고 코트 깃을 살짝 올려 여미고 옥상을 떠났다.

 

 

 

D+4

 

 모니터를 바라보는 무심하고 건조한 녹색의 눈동자가 깜박였다. 눈동자는 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파일 삭제 확인’

 

 그것은 실바와 본드가 대면했을 시각의 영상 기록을 담은 파일이었다.
 그러니까, 약간의 트릭이 있었던 셈이다.
 Q는 본드가 영상 기록의 중지를 요청했을 때 카메라와 컴퓨터 사이의 연결을 단절했을 뿐, 실상 영상 자체는 꼬박꼬박 녹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메인 컴퓨터의 데이터베이스로 백업되지 않았을 뿐으로, 둘의 만남에서 실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Q는 언제든지 알아낼 수 있었다.
 본드의 요청에 대해 저런 얄팍한 잔꾀를 쓰게 된 것은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충동 때문이었다. 그 충동은 실바에 대한 자신의 질투라고 해도 좋았다. 라울 실바는 제임스 본드와 기분 나쁠 정도로 닮아있는 반면에, 자신은 제임스 본드와의 공통점 따윈 없었으니까. 과연 그 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으며, 왜 그것을 비밀로 하려고 하는가? 굳이 자신에게 부탁하면서까지?
 마우스를 손에 쥔 채로 Q는 몇 초간의 짧은 시간동안 갈등했다.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Y/N’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Q는 속으로 컴퓨터가 던진 질문을 되뇌었다. 기록 유실이 아닌 고의적인 기록의 폐기는 중대 처분감이다. 007의 쿼터마스터 직은 물론, MI6에서 퇴출당할지도 모른다.
 입술을 깨물던 Q는 숨을 짧게 들이켜고 마우스 왼쪽 버튼을 클릭했다.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Y/N’

 

 흔적도 없이 파일을 디스크에서 날려버린 Q는 혹시라도 다른 누군가가, 혹은 자신이 파일의 복원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복원의 가능성까지 손수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바쁘게 손을 놀리던 Q는 작게 실소했다. 쓸쓸한 웃음이 한동안 입가에 머물렀다.

 

 


<Undead>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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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