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실바/본드큐

 

 

 눈을 떴다.
 파르르 떨던 눈꺼풀이 열릴락말락, 열리지 않을 듯 싶다가 결국엔 열린다. 흰자위와의 경계가 분명한 검은자위의 풀린 동공이 초점이 분명해짐에 따라 서서히 명료한 그림자를 비춘다.
 멍멍한 귓가. 실 한오라기 떨어지는 잡음도 없는 완벽한 적막이 너무나 공허한 나머지 귀청이 터질 것만 같아 실바는 간신히 뜬 눈을 감는다.

 

 -Open your eyes.

 

 단단한 목소리가 고요를 깨고 울린다. 실바는 목소리에 순종하듯 다시 눈을 떴다. 빛 바랜 이끼 빛깔의 무릎. 익숙한 색감에 놀란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다시 떠본다. 시신경의 교란은 아닌 듯 하다. 유리감옥에 갇혔을 때 입은 구속복이 또다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다. 한 번 입어보았던 옷이 입혀진 무릎을 멍하니 바라본다-아니, 줄곧 입고 있었던가?-그나저나, 언제 잠이 든 거지?-도무지 알 수가 없군-
 제법 멀쩡하게 정신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즉시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강타하는 통에 정신이 없다. 고양이가 갖고 놀던 실타래처럼 멋대로 엉켜진 채 제멋대로 풀려나가는 생각들을 갈무리한다. 일단,
 나는?
 티아고 로드리게즈.
 아니, 아니지,... 라울 실바.
 첫 단추부터 엉망진창이군. 실바는 피식 웃었다. 그럼 그 다음은,
 여긴 어디지?
 고개를 든다. 고개를 들자마자 깨질 것 같은 둔통이 머리를 엄습한다.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던 듯 목근육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삐걱인다. 그나마도 손과 발은 자유롭다. 어째서지? 의문을 잠시 뒤로하고 근육통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기 위해 목을 좌우로 꺾는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오는 한 남자.

 

 -...Mr. Bond.

 

 뭉개진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광대뼈가 욱신욱신 아프다. 흉해보이리란 것은 알고 있으나 통증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입을 한 번 쩍 벌렸다가 닫았다. 입 안에서 붕 떠있던 구강 보조기가 그제야 똑바로 맞물려 제자리를 찾았다. 까득 하는 기분나쁜 감촉이 퍼진다. 쩝 하고 입맛을 다신 후 실바는 좀더 명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신가?

 

 본드가 코웃음을 쳤다. 기세좋게 뀐 콧방귀였으나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반듯하게 편 어깨도 왠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처진 듯 보인다. 그런데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가 대체 언제였지.
 기억의 혼선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실바를 앞에 두고 본드가 말했다.

 

 -제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둥 헛소리는 집어치우길 바라.

 

 요동치는 분노를 간신히 안으로 삭히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다. 실바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본드는 화가 나있다. 왜 화가 났지? 곰곰이 기억을 더듬는다. 널브러진 종이 더미 위에서 사각사각하는 소리와 함께 종잇장이 흩날리고, 그와 함께 꿈처럼 아련한 기억도. 무너져 있던 자세를 바로하고 미약하게 온기가 어린 딱딱한 바닥에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세워 톡톡 두들긴다. 손톱이 꽤 자랐다. 손질한 흔적은 지워진지 오래다.
 눈에 덮혀 지워진 발자국을 따라가듯 모호한 흐름에 진저리를 내며 실바가 말했다.

 

 -수수께끼는 여기까지 하자고. M은 어디 있어?

 

 실바의 말에 본드의 눈이 커진다. 푸른 눈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급작스레 일어나 쿵쿵거리는 걸음걸이로 이편으로 다가온다. 유리벽이 엄연히 그 앞에 버티고 있건만, 분노를 감추려는 노력 하나 없이 걸어오는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실바를 저절로 뒤로 움찔하게 만들 만큼 위압적인 기세였다.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유리벽을 꽝 하고 내리친다. 견고한 유리벽이 미미하게 흔들린다. 본드는 마치 상처입은 사자처럼 우렁차게 외쳤다. 실바는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오...

 

 그가 환희에 젖은 표정으로 탄성을 질렀다.

 

 -이제야 알겠군.

 

 본드가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망연한 시선.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며 실바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까 꿈이 아니었군?

 

 본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답지않게 처량한 눈빛에서 답을 확인한 실바는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처럼 바보같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낮게 웃음을 토하며 실바가 중얼거렸다.

 

 -꿈이 아니었어...

 

 본드가 그 말에 뒤이어 말했다.

 

 -그래.

 

 순서 상으로는 두 남자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여겨도 무방할 내용의 말이었으나 실상은 둘다 서로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이 그저 혼잣말을 읊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머언 꿈처럼 흐릿하고 뿌연 기억을 더듬어 되살린다. 저항 하나 못하고 자신의 품에 안겨 날개꺽인 새처럼 바들바들 떨던 그녀. 아주 아주 아주 가까이에서 느껴졌던 그녀의 두근거리던 심장 고동. 그로부터 도망치느라 흘렸을 그녀의 식은땀 냄새. 장딴지에서 흐르던 그녀의 피 냄새. 자신의 몸에 묻은 화약 냄새가 그녀의 냄새를 폭력적으로 잡아먹는 것이 그토록 아쉬웠다. 조금만, 좀 더 가까이, 그녀를 느끼이 위해 그녀를 꼭 끌어안고 비주를 하듯 그녀와 뺨을 마주댄 채, 총구를 겨누고 격발을 그녀의 손에 맡기고 그는 뭐라고 중얼거렸던가. 실바는 여전히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들뜬 중얼거림을 뱉어냈다.

 

 -그래...그렇게...결국엔...

 

 유리벽에 이제껏 대고 있던 본드의 주먹이 힘을 잃고 스르르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진다. 손에 낀 가죽장갑과의 마찰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작은 소음에 실바가 본드를 향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든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몽롱한 미소가 만면에 가득하다.

 

 -M이 죽었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본드가 내뱉었다. 내뱉는 그 말은 순간이었지만 무게는 천근보다 무겁게 두 사람 사이로 떨어져내렸다. 본드는 그 무게에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같았으나 실바는 무통증에 걸린 사람마냥 여상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내가 할 말을 대신하는군 그래.
 정신이 나간 듯 실실거리고 웃던 실바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또박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슬퍼하는 거야?

 

 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언제든 죽을 년이었잖아?

 

 본드, 너도 알겠지만 그년은 늙을대로 늙어버린 퇴물이었다구.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할망구였지. 멋대로 지껄인다. 지껄임이 중얼거림이 되어가고, 중얼거림은 곧 읊조림으로 바뀌었다. 그 읊조림도 점차 힘을 잃고 잦아든다. 신들린 듯 입술을 움직여 말을, 단어를 뱉어내던 그의 입도 멈추었다. 다시 찾아오는 적막에 본드는 입술을 깨문다.
 한동안의 침묵.
 실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허공 중에 떠돌던 실바의 시선이 본드를 향한다.

 

 -난 왜 아직도...살아있는 거지?

 

 묻듯이, 그의 눈이 데구르르 구른다.

 

 -그 이유는 내가 알고 있지.

 

 본드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그건 바로 네가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야. 너같은 놈이 그렇게 세상을 하직하면 이미 목숨을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애석할까? 그러니까 넌 살아서 좀더 고통받아야 해.

 

 푸른 화염이 그의 눈에서 이글이글 타올랐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놀라운 자제력으로 억누르고 있는 본드를 보자 실바에게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오...Mr., Mr. Bond. 세상에.

 

 흥분으로 인해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린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하면서 말하긴 하는 거야?

 

 킥킥거리며 웃는다. 세상에, 천하의 007이 삼류 악당같은 대사를 지껄이다니! 실바가 그렇게 본드를 조롱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화가 나셨군?

 

 보란듯 크게 웃는다.

 

 -그녀 대신 내가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살아난 건 그녀가 아닌 나였고 말이야? 그리고 우리 본드는, 무척 화가 났답니다. 오, 불쌍하고 가련한 본드...

 

 실바가 본드에게 자못 익살스런 미소를 띠며 말했다.

 

 -Mommy's dead, James!

 

 She's, DEAD! 튀어나온 못에 마지막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조롱조의 말을 한번 더 반복하는 실바는 더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온 방 안을 울리는 그의 웃음소리에 본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웃음소리 사이로 까드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숨넘어갈듯 웃어대는 실바는 숫제 배꼽을 잡고 있었다. 온 몸을 뒤틀며 괴기스런 웃음을 흘리는 실바를 뒤로하고 본드는 더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본드가 자리를 뜬 후 독실 감옥을 울리던 웃음소리는 차츰 잦아들었다. 천장을 울리던 웃음소리는 오열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바뀌었다. 길게 울리던 비통에 찬 울부짖음은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울린 후 보잘것없는 히끅거림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않았다.

 

*

 

 Q는 비교적 청각이 예민한 편이었다. 실바가 수감된 지하층에서부터 올라오는 쿵쾅거리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그 걸음소리의 발생 원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파악한 Q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직 실바가 박살낸 본부를 대체할 건물을 찾지 못한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유물이자 잔재인 낡은 기지에서 머무르며 모든 사건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잔해를 씻어내느라 바빴다. 말 그대로의 의미이기도 했고, 행간에 자리한 또다른 의미로서도 말이다.
 이 기지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생김새와는 달리 옛 본부와 비견하면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알찬 구석이 있었으나, 딱 한 가지가 구비되어 있지 못했다. 바로 방음이었다. 작은 소음에도 몹시 예민하게 반응하는 Q에게는 불상사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직 임무를 부여받지 못한 007이 매일 실바가 머무르는 지하 수감장소에 들락날락하며 코끼리처럼 쿵쾅거리는 것은 더한 불상사였다.
 때마침 본드가 Q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유리문을 열고 폭풍처럼 걸어들어오는 본드에게 불편한 기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 Q는 모니터로 표정을 교묘하게 감추며 일에 집중하는 척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본드는 평소처럼 그저 지나치지 않고 그의 옆에 멈추어섰다. Q는 무시하는 척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동안 말없이 서있던 본드는 Q가 먼저 말을 걸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따라서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Q.

 

 Q가 마지못해 고개를 들고 답인사를 건넸다.

 

 -007.

 

 그가 답하자 본드는 더 시간을 낭비할 것 없다는 듯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실바가 깨어났어.
 -?!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본드를 바라보던 Q가 곧 놀람의 기색을 지우며 말했다.

 

 -일주일 만이군요.
 -그래.

 

 본드가 다소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M이 죽었다는 것을 겨우 기억해내더군! 처음에는 꿈인줄 알던데?

 

 다소 경쾌한 목소리에 Q가 고개를 갸웃했다. 본드는 Q가 보내는 미묘한 시선을 캐치하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왜 살아있냐고 묻더군! 정말이지,...

 

 고조된 어조가 금세 바닥으로 치달았다. 정말이지, 를 반복하던 본드는 곧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궜다. Q는 눈에 띄게 우울한 기색의 본드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괜찮아요? 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무슨 심정에서인지 Q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바로 삼켰다. 대신 표정을 가다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하층 수감실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본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상이 드높은 007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처량한 그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Q는 화제를 돌렸다.

 

 -새 국장이 확정되었어요.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말로리가 새 M이 됩니다. 2주일 후에 부임한다고 하더군요. 청문회장에서 입은 팔의 부상이 생각보다 심한 모양이예요. 지금 상황으로 미루어보아서는 곧바로 부임해도 시원치않을 판인데 윗선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 말이지요.

 

 Q의 말에 본드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다소 무성의한 것을 알아차린 Q가 주의를 주듯 말했다.

 

 -부탁하건대, 007.

 

 숨을 들이마시고 Q가 말했다.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어조였다.

 

 -새 M이 부임하면, 지금까지의 일은 잊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무척 힘들 거예요. 당신에게 말입니다. 알겠어요?
 -...알고 있어.

 

 본드가 대답했다. 그러면 되었어요, 라고 Q가 말했다. 여기까지 개입한 것으로도 충분한 오지랖이었다. 유난히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 것이, 그의 쿼터마스터라는 자신의 위치때문인지, 아니면 오늘따라 유독 약해 보이는 본드의 모습 때문인지 Q는 헷갈렸다.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본드는 Q의 어깨를 툭툭 치고 휭하니 가버렸다. 무척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Q는 문득 생각했다. 그는 지금의 기지에 있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아니, 더 잘 어울린다고. 퇴색했으나 마땅히 제구실을 하는 이 낡은 기지와, 풍파에 시달리느라 폭삭 늙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능한 스파이는 많은 부분이 닮아있었으므로.
 거기까지 생각하던 Q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D-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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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MK-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