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존/장편/203이후/뱀파이어

 

 레스트레이드를 만난 후의 존은 어쩐지 밝아졌다. 셜록이 어딘가에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지나친 우울감에 젖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있던 그에게 닥쳐온 조울증의 증세일까?
 어떤 것의 여파일지는 존 스스로도 몰랐지만, 일단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

 

 처음에 존은 레스트레이드가 또 다른 사진을 찾아내었다는, 아니면 사실 사진 모서리에 있던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소식을 전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레스트레이드로부터 더 이상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하긴 런던 경시청의 경감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미 죽은 사람으로 확인된 사람의 행방이나 뒤쫓을 여력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존은 타다 남은 담배꽁초에서 피어나는 한 줄기 연기 같은 희망을 포기했다.
 존은 그렇게 셜록의 잔재와 그에 대한 기억을 떨치고 일어나는 것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지만, 어쨌든 그 또한 여느 사람들처럼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망자를 기리는 일도, 고인에 대한 그리움도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는 법이고, 이승에 남아 숨 쉬는 자들은 또 제각기 자신만의 죽음으로의 여정을 계속해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죽은 이를 그리워하는 이들 중에서는 어리석은 기다림을 되풀이하다가 '어떤 시점'이 되어서 비로소 자신의 살아있는 자로서의 위치를 깨닫는 이들이 많다. 그 예 중 하나로 매우 사랑하던 연인이 죽은 가브리엘 샤넬은 그를 잃은 슬픔에 못이겨 자신이 묵던 호텔방의 모든 커튼, 침구, 테이블보 등의 장식품을 검은색으로 도배했다. 그 애도의 표시가 모두 완성되어 방 안에 장식된 순간, 그녀는 이런 집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을 옮겼다.
 딱히 그녀를 따라한 것은 아니었지만 존은 한 달 후 새로운 플랫으로 이사하기로 정했다. 이 집의 방세는 허드슨 부인이 아무리 너그러이 깎아준다 해도 존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존으로서도 아쉽고, 어쩌면 후회할 지도 모르는 결정이었지만, 존은 기억이라는 몇 겹이나 되는 어두운 베일을 헤치고 그를 가두고 있던 장막을 벗어나 한 발 내디디기로 했다.
 그의 결정이 순조롭게 진행될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

 

 "이렇게 안녕이라니, 아쉽구나."

 

 존의 결정을 들은 허드슨 부인이 말했다. 허드슨 부인은 오늘도 가장 아끼는 자주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조금 눈가 주름이 깊어진 듯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다정하다. 앞으로는 그녀의 모습도 여간해서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존이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래요. 하지만 이 방은 한 명이 쓰기엔 너무 넓으니까요."
 "그래…."

 

 허드슨 부인이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존은 부인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잡아주며 상냥하게 말했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더라도 여긴 종종 들를 테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아요. 아주머니의 샌드위치와 차 없이 제가 어떻게 살겠어요?"

 

 둘은 작게 웃었다.

 

*

 

 그가 짐 정리를 위해 일단 방 가운데 서서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울리는 일이 드물었던 존의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발신자 표시 제한'을 본 존은 단번에 마이크로프트인 줄 짐작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또 무슨 일-"

 

 존의 약간은 짜증 섞인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존, 혹시…음."

 

 평소답지 않게 빠른 속도로 말하던 마이크로프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존은 자신의 말을 가로막은 주제에 수화기 너머로 뭔가 말을 하다가 만 마이크로프트의 침묵을 당황한 채로 듣고 있다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마이크로프트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존."

 

 존은 이 남자가 또 왜 이러나 싶었다.

 

 "존, 혹시…셜록을 봤나?"
 "네?"

 

 존이 이 사람이 정신이 나갔나, 싶다는 어조로 반문했다.
 수화기 너머로 다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이크로프트는 한숨을 쉬며 미안하네, 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존은 벙찐 표정으로 일방적으로 끊긴 수화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동생이 죽더니 이 남자마저 정신이 나간 건가, 라는 생각을 하며 전화기를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짐을 어떻게 싸야 하는지 무척 고민하느라 바쁘던 존은 그 일을 묻어버렸다.

 

*

 

 존은 새로 옮길 방의 구조와 자신이 옮길 짐들이 들어갈 자리를 배치하느라 무척 머리가 아팠다. 셜록과 살 때는, 원래부터 셜록이 먼저 갖다놓은 짐들로 방이 엉망진창이었던 데다가, 그가 아무리 정리해도 셜록이 곧잘 다시 어지럽혀놓곤 했었기 때문에 존도 어느 순간부터는 플랫의 정리를 단념했었다. 그래서 허드슨 부인의 골칫거리가 더 커졌었지. 존은 피곤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며 소파에 쓰러져 잠들었다.

 

 새벽 세 시.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이다.
 소리를 내는 이는 유난히 짙은 이 밤의 어둠에 지레 겁먹고 울어대는 길고양이 한 마리 뿐.
 잘 닫혀있던 창문이 조그만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결에 커튼이 약하게 펄럭이려는 것을 검은 인영이 꾹 잡았다. 흐릿한 검은 인영은 찬바람 내음을 풍기며 창문에 걸터앉았다.
 그는 소파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존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가까이 가거나, 멀어지려는 어떤 행동도 자제하면서, 마치 녹은 청동액에 뒤덮여 굳어버린 동상처럼, 해가 뜨기 전까지 고요히 그 자리를 지켰다.

 

*

 

 이 주 후 그는 예정대로 이사를 원활히 마쳤다. 존이 세심히 안배한 대로 이사하는 도중 그릇이 깨지거나 이삿짐센터에 맡겼던 소중한 책들이 화재로 전소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옮긴 짐을 어느 정도 정리하는 것이 끝났다. 물론 존 혼자서 모두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자잘한 짐 몇 가지는 아직 상자 속에 들어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쯤 해도 하루 동안의 노동량으로는 차고도 넘쳤기 때문에 존은 스스로 만족하며 전에 비해 약간 좁아진 침대에 몸을 누였다.

 그리고 그 날의 새벽 세 시, 모든 것이 잠든 시간, 창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허나 이번의 침입은 순조롭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온 손은 자석의 같은 극을 갖다 대었을 때처럼 강하게 튕겨나갔다. 인영은 인상을 쓰며 손을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들어온 하얀 손의 표피에서 한 방울, 한 방울, 핏방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더불어 손에서 피가 빠져나가면서 손이 잘 마른 장작개비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그 기현상을 알아챈 그는 급히 손을 다시 바깥으로 빼내었지만, 피 한 방울이 그가 모르는 사이 창턱에 떨어졌다. 놀란 듯 손을 앞뒤로 살피던 그는 미처 창문을 닫을 생각도 못하고 형체를 감추었다.
 한 가지 미처 언급하지 못한 사실은, 존이 새로 세든 방은 5층으로, 사다리를 놓지 않는 한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는 점이다.

 

*

 

 다음날 아침 7시에 일어난 존은 반쯤 열린 창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낡은 건물의 상태를 미루어봤을 때 간 밤 강한 바람에 열렸을 가능성을 생각한 그는 경첩과 창문의 걸쇠를 수리하기로 했다.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를 들어보고 창문의 자물쇠 상태를 면밀히 살피던 그는 창턱에 동그랗게 굳어있는 검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존은 어딘지 익숙한 향기를 느끼며 저도 모르게 손을 갖다 대었다. 아무래도 페인트 자국은 아닌 듯한, 검지손가락 끝에 묻어나온 그것을 바라보던 존은 혀를 내밀어 살짝 핥았다.
 피.
 명백한 피의 맛이었다.

 

*

 

 어두운 방이다.
 설사 빛 한 줄기라도 들어올까 겁이 나는 듯 방 안은 검은색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휘장 바깥의 창문도 검은색 커튼으로 가려져 있다.
 칠흑 같은 방 안의 휘장 속에 웅크린 인영만이 연한 빛깔의 눈을 깜박이며 자리한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 하얀 피부. 길쯤한 얼굴. 목 아래는 시트로 감싸여 뭉덩이진 천 무더기처럼 보인다.
 굳게 닫힌 방문이 열리자,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두터운 휘장에 시야가 가려 있는데도 용케 신원을 확인한 듯 남자는 옆으로 돌렸던 얼굴을 다시 바로했다.
 들어온 장신의 남자는 문이 잘 닫힌 것을 확인하고 휘장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만."

 

 휘장 안의 남자가 말했다. 중얼거리는 듯한 어조에는 미약한 우울감이 감돈다. 다가오던 장신의 남자는 거부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휘장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온다. 스마트폰을 꺼내 손전등 어플리케이션을 실행한 그가 웅크린 남자에게 말했다.

 

 "셜록."

 

 남자, 아니 셜록은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보는 빛이 그의 눈을 찌른다. 서서히 눈을 뜬 그가 이불 속에 감추고 있던 손을 꺼냈다.

 

 "설명해, 마이크로프트."

 

 이름을 불린 남자는, 손에 있던 전화를 셜록이 웅크리고 있는 침대에 내려놓고 그 또한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손을 깍지 끼고, 그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제멋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잖니."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셜록이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햇빛에 타죽으면 어쩌려고."
 "그런 식으론 죽지 않는다는 건 이미 증명했어. 조금 눈부시긴 하지만 자연 발화 현상은 일어나지 않더군."

 

 차가운 목소리로 툴툴거리며 셜록이 대답했다.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어."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셜록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다정한 척 하지 말고 이 손에 대해서 설명해."
 "전후 상황을 먼저 말해줘야 알 수 있을 텐데 무턱대고 졸라대지 마렴."

 

 떼쓰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그의 뉘앙스에 셜록은 입을 삐죽였지만 그에게 순순히 사정을 털어놓았다. 존의 새 집으로 찾아가 창문을 열고 손을 들이밀었더니 피가 손에서 빠져나오고 손은 거친 나뭇가지처럼 바싹 말라버렸다는 것을 들은 마이크로프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그 가설이 증명된 거로군."
 "무슨 가설?"

 

 셜록이 묻자 마이크로프트가 대답했다.

 

 "뱀파이어는 초대받지 못한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혹시 이전 하숙집에 갔을 때는 별 일 없었어? 아니, 그동안 네가 출입한 장소를 전부 말해봐."
 "221B에 갔을 때는 아무 일 없었어. 거기 말고 내가 간 곳은 몇몇 가게뿐이라고. 술이나 음식이 내 몸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 궁금했기 때문이야."

 

 셜록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묘하게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그거 참 다행이구나. 난 네가 인간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가택 침입도 하고 무력 행사도 해 봤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투명 인간>의 주인공처럼. 이를테면, 강도, 살인,..."

 

 흔한 범죄 행위의 예를 읊조리던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셜록은 항변했다. 항변이라기보다는 핀잔에 가까운 어조였다.

 

 "예상이 빗나가게 되어서 유감이군. 나는 형 같은 성품이 아니라서 말야, 그런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지."

 "상상력이 부족하구나."
 "상상력 과잉이 더욱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

 

 사소한 공방이 지나가고, 셜록이 말했다.

 

 "그럼, 집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 집에 들어가면 손뿐만 아니라 내 몸 전체가 이 비쩍 마른 해골 꼴이 난단 말이군."
 "그렇겠지."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셜록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그럼 원래 하숙집에서는 내가 허락된 존재였고, 존이 현재 하숙집에서는 내가 허락받지 못한 존재라는 거야?"

 

 셜록은 간신히 '-나의 존의 하숙집인데 말야?'라는 뒷말을 삼켰다. 마이크로프트가 불편한 심기가 역력히 드러난 셜록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 최근에 관찰한 결과로는 새 출발을 하기로 결심한 듯싶더구나. 네가 사라진 지도 이미 일 년 가까이 되었고, 그 정도로 긴 기간의 애도라면 충분치 않을까?"

 

 대본을 줄줄 읽는 듯 감정이 없는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에 셜록은 입을 다물었다. 셜록의 내부에서, 이미 갈가리 찢겨 없어진 줄 알았던 감정의 편린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편린은 깨진 파편이 섞여서 뭉친 것과 같아서 이미 그것을 정의하기에는 무리였다. 셜록은 현미경의 렌즈 배율을 높이듯 그것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을 향해 가까이 다가간 그는 연극적인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굽혀 그것을 응시했다.

 기억의 궁전 구석에 남아있던 먼지야, 네 이름을 말해 보렴.

 

'BBC Sherlock > Let Me In(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셜록존]Let Me In Ch.1_5  (0) 2012.08.23
[셜록존]Let Me In Ch.1_4  (0) 2012.08.23
[셜록존]Let Me In Ch.1_3  (0) 2012.08.23
[셜록존]Let Me In Ch.1_1  (0) 2012.08.23
[셜록존]Let Me In Ch.1_0  (0) 2012.08.23
Posted by 에스MK-2 :